제25과 나의 영이신 예수님
성경본문 : 고린도후서 3:12-18
“12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13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같이 아니하노라
14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15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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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으로 이사오기 전의 사무실이 건대 입구역 로데오거리에 있었는데 저희 사무실 맞은편 2층에 여행사 사무실이 있었습니다. 이 사무실은 가끔 불이 꺼지지 않고 밤 세도록 켜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세상 사람들도 저토록 열심히 일을 하는데 내가 하나님을 위해 선교를 하면서, 저 사람들만큼 열심히 하는지를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세상의 영광을 위해서도 밤을 새우기도 하고, 땀을 흘리기도 합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일을 하는 우리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바울은 “우리가 이 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고후3:12)라고 했습니다. 이 같은 소망은 앞의 7-10절을 말한 것입니다.
“구약의 모세를 따르던 사람은 단순히 죄를 알려주는 직분이었습니다. 이 없어질 직분이 영광스러웠다면 사람을 의롭게 하는 영원한 직분은 얼마나 영광스럽겠습니까? 그러니 담대히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제가 오늘 설교를 담대히 증거 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이치입니다. “썩어질 것을 위해서도 수고를 아끼지 않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하물며 하나님의 영원한 일을 위해서 어찌 열심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을 바울은 이러한 심정으로 담대히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1. 모세의 광채는 유한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같이 아니하노라”(고후3:13) 이 말씀은 출34:29-35절을 예로 든 것입니다. 모세가 얼굴에 수건을 쓴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모세에게 있던 광채가 사라졌을 때 그에 대한 경외심이 사라질 것을 염려해서였습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나타났던 광채를 통해서 백성들이 모세에게 현혹되어 영원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본문 말씀은 바울이 자신과 모세를 비교한다기보다는 복음과 율법을 비교한 것입니다. 율법은 유한한 것이며 복음은 영원한 것입니다. 율법의 일꾼이었던 모세와 다르게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대로 오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당당하고 마음의 속박함이 없이 자유롭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백성들이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한 것으로 착각할 것 같아 수건을 썼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는 복음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건을 써야할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2. 수건이 마음을 덮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고후3:14)라고 말합니다.
그러고 보면 모세만 수건을 덮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수건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대하는데 장애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수건을 덮어쓰고 있었던 것은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서 그랬던 것입니다. 원어의 ‘완고(에포로테:ejpwrwvqh)’는 의학용어인 피부 경질이란 뜻입니다. 이 경질은 뼈가 부러졌다가 다시 붙은 자리에 생기는 것으로 굳으면 원래 뼈보다 더 단단한 것을 말합니다. 이들은 성경을 읽을 때에 돌과 같이 무감각하고 굳어진 경질 같은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자신들의 고집을 버리지 않고 읽었다는 말입니다.
언젠가 강아지에게 안대를 씌어준 것을 보았습니다. 강아지는 그 안대가 얼마나 갑갑했던지 발로 비비고 고개를 휘두르고 난리를 떨었습니다. 우리에게 이 답답한 안대 같은 수건이 얼굴을 덮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답답합니까? 당연히 수건은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의 수건을 벗는 방법은 딱 한 가지가 있습니다.
3. 주님께 돌아오면 벗어집니다.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고후3:14)고 했습니다. 이 수건을 벗는 것은 율법의 한계성을 영원하게, 미완성적인 것은 온전하게 만드신 율법의 완성 자이신(마5:17-18, 롬10:4)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원문은 (엔 크리스토 카타르게이타:ejn Cristw'/ katargei'ta) [그리스도 안에서만 완전히 소멸된다]는 뜻입니다. 카타르게이타(katargei'ta)는 현재형 수동태로 ‘지금 그렇게 되고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수건이 벗어지는 일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왜! 외국의 많은 신학교가 그리스도 안에 있지 못하고 이상한 교리에 많은 문제가 발생되었는지 아십니까? 학문이라는 것은 원래 발전해야 되는데 공학과 또 역사적으로 무엇을 발굴해 내는 학문은 나름대로 그 분야에서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학은 생각해 보십시오. 박사 과정의 논문을 준비하는 학생에게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일부의 학교에서는 그 정도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습니다’라고 한다면 교수는 그것을 학문적으로 증명해 보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다원주의로 흘러가고 예수 안에서만이 아니라 선행만으로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논리나, 종교는 다 같다는 식의 논리가 성행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없어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고후3:16)입니다. 돌아온다(에페스트렙호:ejpistrevfw)는 말은 회개를 말합니다. 그리고 ‘복귀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에게 돌아오지 않으면 결코 수건은 벗어지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도 가끔 수건을 덮어쓰고 있는 사람들을 봅니다. 다름 아닌 율법에 젖어있는 사람들입니다. 유대교인이나 안식교인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런 이단에 소속되어 있지는 않지만 교회 안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보다 자신들의 전통을 더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교단이 될 수도 있고, 학교가 될 수도 있고, 심지어는 교회나 목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교회가 아니면 안되다는 생각은 위험한 생각입니다. 교회에 대한 자부심과 프라이드는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지나쳐서 혹 교회나 목사님을 그리스도보다 앞서서 생각하면 안됩니다. 교회에 가는 것이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에게 예배하기 위함이 아니라 목사 설교 들으려고,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것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만일 이런 모습이 우리 자신이었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회개하고 그분에게로 온전히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하여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약5:19-20). 나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돌아올 뿐만 아니라 다른 분들을 돌아서게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4. 주의 영은 자유롭습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3:17) ‘영’ (프뉴마:pneu'ma)는 성령을 뜻합니다. 이 단어가 성경에서 제일 처음에 나타나는 곳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마3:16) 입니다. 주님이 성령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께 돌아간다는 것은 주의 영이 우리의 속에 역사하고 있음을 말합니다(롬8:15, 갈3:2, 엡5:18). 요한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고 했습니다. 성령은 다름 아닌 진리의 영입니다. ‘자유함’이라는 말에서 무엇을 느낄 수 있습니까? 지금까지 우리는 죄로 인해서 사단에게 속박 당하고 있었던 모든 문제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성령이 있는 곳에는 그리스도가 있고 그리스도가 있는 곳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주의 영은 하나이십니다(요10:30). 이분에게 불가능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 하시는 것입니다. 성경 어느 곳에서나 성령은 모든 생명, 진리, 능력, 거룩함, 축복, 영광의 근원으로 나타납니다. 이 자유의 그리스도의 영은 나를 모든 죄악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실 것입니다.
가끔 우리는 TV이나 신문을 통해서 사람의 약점을 잡고 그것을 빌미로 계속해서 돈을 뜯어내는 아주 파렴치한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사단은 우리의 약점을 잡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계속해서 막고 있는 것입니다. 회개하면 깨끗하게 해결됩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사단에게 계속해서 질질 끌려 다니는 것입니다. 이제 결단을 하십시다. 더 이상 죄에게 종노릇하고 질질 끌려 다니지 않기 위해서, 회개하여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자유함을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
5. 주의 영은 우리를 주님과 같이 변화시킵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전3:18)
여러분 여기 놀라운 말씀이 있습니다. 두 단어를 주시해야 합니다. 하나는 ‘형상(에이코나:eijkovna)’입니다. 이 말은 단순히 모방이나 유사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원형적 대표, 실체를 말하는 것이며 아울러 현시를 의미하기도 합니다(골1:15, 히10:1). 그리고 ‘화하여’(메타모르푸메타:metamorfouvmeqa) 내적 본성에서 변화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막9:2-3에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 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만큼 심히 희어졌더라”하신 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수건을 벗고 주님의 영광을 보면 바로 이와 같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의 형체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된 몸과 같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빌3:21, 요일3:2). 이런 영광은 주의 성령을 통해서 된 것입니다. 주의 영광을 보는 한 분을 소개합니다.
얼마 전 영국에서 수련회가 있었는데, 한 집회에서 신앙 때문에 18년을 감옥에서 보낸 중국인 목사가 소개되어 간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청중에게 자신의 감옥살이 경험을 이런 말로 들려주었습니다.
“제 친구들은 제가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어떤 일을 하였기에 몸의 건강을 지킬 수 있었는지 궁금해합니다. 그러면 저는 그들에게 그곳에서의 삶은 너무너무 고된 것이었다고 대답합니다. 수용소 당국자들은 제게 인분 구덩이를 치우는 일을 시켰습니다.
그 구덩이는 수감원들조차 가까이 가기를 꺼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당국자들은 내가 교육 수준이 높은데다 유복한 집안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특히 자기들은 무신론자인데 나는 그리스도인 지도자였기 때문에 나에게 그런 일을 시켰습니다. 어쨌든 그들은 나에게 인분 구덩이 치우는 일을 시키며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여러 해 동안 내가 거기서 일하는 것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 구덩이는 수용소 전체에서 수거된 인분으로 가득 찬 넒이 2미터 이상에 길이도 2미터나 되는 구덩이였습니다. 인분이 꽉 차면 적당히 썩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퍼서 밭에 비료로 보냈습니다. 구덩이는 아주 깊어서 바닥까지 깨끗하게 퍼낼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 병균 덩어리 속에 직접 들어가 시종 악취를 맡아가며 인분을 조금씩 차례로 퍼내야 했습니다.
간수들과 모든 수감원들은 악취 때문에 가까이 오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내가 거기서 일하는 것을 좋아한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바로 혼자 있는 것이 좋았습니다. 강제노동수용소에서는 보통 모든 수감원들이 엄격한 감시하에 있기 때문에 아무도 혼자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구덩이에서 일했기 때문에 혼자 있을 수도 있었고, 주님께 실컷 큰 소리로 기도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때까지 외우고 있던 시편 모두와 여러 성경 말씀을 암송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아무도 가까이 와서 방해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인분 구덩이에서 일하는 것을 좋아했던 이유입니다. 그때까지 외우고 있던 찬송들을 큰 소리로 부를 수도 있었습니다.
당시 내가 제일 즐겨 부르던 찬송 중 하나가 ‘저 장미꽃 위의 이슬’(499장)입니다. 그것은 체포되기 전에도 제일 좋아했던 찬송이었지만, 그때는 그 찬송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인분구덩이에서 일하면서 나는 우리 주님과의 놀라운 교제를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몇 번이고 반복하여 이 찬송을 부르면서 내 곁에 계신 우리 주님의 임재를 느꼈습니다.
그 구덩이 안에서 몇 번이고 반복하여 이 찬송을 부르면서 나는 주님의 임재를 맛보았습니다. 그 분은 결코 나를 버리거나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살아나게 되었고 그 인분 구덩이는 주님과 교재하는 나의 은밀한 동산이 되었습니다.”
저 장미꽃 위에 이슬 아직 맺혀 있는 그 때에
귀에 은은히 소리 들리니 주 음성 분명하다.
주가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우리도 이와 같이 주의 영광을 바라보아 그분과 같이 새로운 부활의 생명을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창세기 2장 7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고 하셨습니다” 생령(生靈)은 ‘살아있는 영’을 말한 것입니다. 우리도 원래는 영적인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을 왜 영이시라고 다시 말합니까? 그것은 우리의 영은 이미 하나님을 떠나 죄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영으로는 하나님께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즉 죽은 영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은 우리를 다시 살리십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6:63)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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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성경 벌레들 원문보기 글쓴이: 성경 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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