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의 아내 -카타리나 폰 보라
1. 들어가는 말
16세기 종교개혁에 있어서 가장 많이 세상에 알려진 여인은 루터의 아내 카타리나 폰 보라(Katharina von Bora,1499-1550)일 것이다.“교회 속의 여인들”이라는 주제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무엇보다도 자료의 빈곤을 실감하게 된다. 자료의 빈곤은 물론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 교회 안에서의 여인들의 역할에 대한 교회의 관심이 부족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하겠다. 여인들에 대한 교회의 관심의 결여 내지는 부족은 역사적 자료의 빈곤을 가져왔다는 점이다.
이유는 그녀가 단순히 루터의 아내로서뿐 아니라, 종교개혁자 루터를 향한 그녀의 만만치 않은 야무진 역할이 더욱 그녀를 소문나게 하였을 것이다. 과연 그녀는 16세기 당시 교회의 한 여인으로서, 게다가 그 유명한 종교개혁자의 아내로서 과연 어떠한 역사적 생애를 이룩하였을까?
2. 극적인 수녀원 탈출
1499년 1월 태어난 그녀는 10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의 재혼과 함께 독일 님브센(Nimbschen)에 위치한 수녀원에 들어갔고, 16살이 되었을 때는 비로소 공식적인 서원을 하여 수녀로서 자신의 길을 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1517년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독일을 위시하여 전 유럽에 열화와 같이 번져가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개혁의 새로운 사상에 접하게 되었다. 그녀 역시 루터의 저술을 수녀원에서 읽게 되었다. 그러던 중 그녀의 마음은 과연 진정한 신앙생활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결국 9명의 님브센 수녀들이 자신들의 가는 길에 의혹을 가지게 되었고, 함께 루터의 상담을 받게 되었다. 이에 루터는 말할 것도 없이 수녀원을 벗어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조언하면서, 이를 위해 루터 역시 나름대로 도울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당시 루터가 있는 독일의 작센(Sachsen) 지역은 신앙적으로 둘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공작 게오르그(Georg)가 통치하는 지역은 여전히 카톨릭을 지지하며, 다른 한쪽은 루터의 친구이면서 또한 생명의 은인으로 역사 가운데 소문이 나있는 현공 프리드리히 선제후가 통치하는 개신교 지역이었다. 그런데 카타리나 폰 보라가 소속되어있는 님브센 수녀원은 다름아닌 게오르그가 다스리는 카톨릭 영토 안에 위치하고 있었다.
게오르그는 매우 강경하여 수녀원에서 탈출하는 수녀를 도왔다는 이유로 한 남자를 사형에 처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살벌한 분위기 가운데서도 루터는 매우 신뢰할 수 있는 한 상인 토르가우(Torgau) 출신 레온하르트 코페(Leonhard Koppe)와 함께 특별한 수송작전으로 원하는 수녀들을 수녀원에서 탈출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구운 청어를 담은 비린내나는 큰 통에 수녀들을 함께 넣어서 위장하여 수녀원을 탈출을 시키는 그러한 꾀를 발휘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조금 더 언급하면, 탈출하고자 하는 수녀들은 예수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신 부활절 그날 저녁에 수송작전에 참여하여 부활절이 끝난 다음 화요일에 루터가 사는 비텐베르그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당시 한 학생은 친구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흥미로운 편지를 보냈다. “며칠 전 여기에 도착한 한 마차 사건보다 더 흥미 진지한 이야기는 없다. 그 마차는 처녀들을 가득가득 짐으로 싫어왔다. ... 만약 하나님께서 그녀들의 신랑들을 책임지실 것이라면, 이 살벌한 기간에도 아무 탈이 없을 것이다.” 루터 역시 이들의 장래에 대해 나름대로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다. 곧 이들이 다른 그 어떠한 어려움을 당하지 않도록 보호해야 하는 것이었다. 한 수녀는 교사가 되었으며, 둘은 어느 가정에 집안 일을 돌보게 되었으며, 다른 여인들은 결혼을 하였다. 그 중에서 카타리나 폰 보라는 2년 동안 비텐베르그의 한 가정에서 가사를 도우면서 훌륭하게 가사를 몸에 익혔다.
3. 매력적인 여인
사실 카타리나는 여러 가지 면에서 볼 때 그 중 제일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당시 덴마크의 왕이 피신하여 이 곳 비텐베르그에 거하였는데, 그는 그녀에게 금반지를 선물하기도 하였다. 또한 뉘른베르그 출신 히에로니무스 바움개르트너(Hieronymus Baumgärtner)는 25세의 귀족 가문의 청년으로서 당시 24세의 카타리나를 보자마자 첫눈에 반하여 결혼하기를 원하였다. 가능한 한 빨리 그녀를 집으로 데려가기를 원했으나, 그의 집안의 반대로 결혼의 꿈을 이룰 수 없었다. 이에 대하여 루터가 편지를 썼다. “여보게 빨리 일을 진행시키게 그렇지 않으면 그녀를 잃게 될 것이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총각 히에로니무스는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하고 말았다. 이러한 총각의 태도를 루터는 나무라지 않았는데, 자식은 부모에게 마땅히 순종함이 옳다는 생각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제 루터는 카타리나를 글라츠(Glatz) 박사에게 중매하였으나, 그녀는 루터의 그러한 호의를 박절하게 사양할 수 없어 암스돌프(Amsdorf) 박사를 통하여 거절하였다.
4. 루터에게 향하는 카타리나
사실 카타리나의 마음에 드는 신랑감으로는 다름 아닌 자신에게 그토록 호의를 베푸는 루터와 암스돌프가 바로 그러한 남자들이었다. 카타리나는 루터나 암스돌프를 가까이 하면서 여러 면에서 그들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이 두 남자들은 아직 독신들이었으나, 자신들과 카타리나 사이에 존재하는 엄연한 연령차로 인하여 결혼은 아예 생각할 수 없었다. 예를 들어 루터와 카타리나 사이의 나이 차는 루터가 16세나 연상이었다. 루터가 이러한 그녀의 마음을 새롭게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결혼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였다. 과연 결혼을 할 것인지 아니면 여전히 독신생활을 그대로 유지할 것인지를 숙고한 끝에, 루터는 혼자 살아가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러나 이러한 루터의 마음에 변화를 가져다주게 된 것은 외적인 원인 때문이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루터는 7년 후에는 결혼을 하여 아버지가 될 것이다’고 말했더라면, 아마도 그는 큰 너털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을 것이 틀림없었을 것이다. 1520년 루터가 프리드리히 현공의 도움으로 농부로 변장하고 바르트부르그(Wartburg) 성에 칩거하고 있을 때, 들려오는 소문은 비텐베르그에서 몇몇 수도사들이 결혼을 하였다는 것이었다. 이 때 루터는 “오 하나님! 우리 비텐베르그 사람들이 제발 나에게는 결혼을 강요하지 않게 하소서”라고 기도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유사한 사건이 1524년에도 있었는데, 아르굴라 폰 그룸바흐(Argula von Grumbach)가 루터에게 결혼을 통하여 복음의 확신을 제시하기를 강요하였을 때도 루터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이 때 루터는 그녀에게 “나는 결혼을 아직 생각하지 않았소”라고 말하면서, “내가 나무와 쇠로 만들어져서도 아니며, 나의 육체와 정욕이 그러한 것을 느끼지 못해서가 아니라, 결혼을 나는 아직 생각할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치 내가 이단이라도 된 것처럼 무서운 죽음의 위험이 시시때때로 나를 감싸고 있기 때문입니다.”
5. 카타리나를 루터 부모에게
그런데 42세의 루터가 다른 생각을 하게되면서 카타리나를 부모에게 소개하게 되었을 때, 루터의 아버지는 얼마나 놀랐을까를 우리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수도원에서 독신서원을 한 아들이 결혼을 한다는 말에 아버지는 충격적이었으나, 반면 이제 손자를 볼 수 있게 됨을 생각할 때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루터를 향하여, “그의 아버지는 행복하였을 것이며, 교황은 아주 화가 났었을 것이며, 하늘의 천사들은 즐거워하였을 것이며, 사탄들은 통곡하였을 것이다. 그의 결혼은 복음의 음성을 들은 루터의 확신에 찬 증거임이 틀림이 없다”는 말은 적절하다 하겠다.
그럼에도 루터의 결혼에로의 결단은 엄격히 볼 때, 그녀를 향한 사랑의 마음이 앞섰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사실 당시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을 때, 여기 저기서 혼인을 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이는 무엇보다도 신앙고백적 과시적 행위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의 잘못된 카톨릭의 이원론적 결혼관에 묶여 있던 사람들이 새로운 성경적 결혼관에 동의하면서 이에 따른 신앙고백적 행위를 새롭게 제시하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이점에 있어서 루터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루터와 카타리나 사이에 찾아온 부부간의 사랑은 얼마간 살고 난 후 였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친구에게 한 루터의 말을 통해서도 실감나게 확인할 수 있다. “나는 그녀와 사랑에 빠지지도 아니했고, 내 마음이 그녀를 향해서 뜨거워지지도 아니하네. 그럼에도 내가 나의 아내를 매우 높게 평가한다는 사실은 틀림이 없다네.” “나는 나의 사랑하는 캐테(카타리나의 애칭)를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베네치아로 뺏길 수는 없네. ... 하나님께서 그녀를 나에게 선물하셨고, 나를 그녀에게 주셨기 때문이네. ... 다른 여인들과 나의 캐테를 비교할 때 다른 여인들에게서 나는 보다 많은 결점들을 발견하게 되네. 물론 그녀 역시 결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것들을 뛰어넘는 훨씬 큰 덕성들을 그녀는 가지고 있다네.”
6. 하나님의 선물
토마스 뮌쩌(Thomas Müntzer,1490?-1525)가 이끄는 농민전쟁의 회오리바람이 한참 불어닥치고 있는 1525년 6월 13일 네 명의 증인 앞에서 루터는 케테와 소박하게 그러나 역사적인 결혼식을 올렸다. 두 주 후에 울려퍼지는 나팔소리와 함께 루터와 카타리나의 결혼을 축하하는 거리축제가 열렸다. 풍족한 향연이 베풀어졌는데, 이 축제에 루터의 부모도 기쁨으로 참석하였다. 루터의 행복한 결혼과 사랑스런 부부를 바라보며 독일의 교회사가 마틴 브레히트(Martin Brecht)도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결혼을 향한 신앙고백적 행위였다. 케테는 의식 있는 인격의 소유자로서 자신이 옳다고 생각될 때에는 기꺼이 남편인 루터에게 소신을 말할 줄 아는 여인이었다. 이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행복하였다. 1526년에 태어난 요한네스를 위시하여, 1527년 엘리자베트, 1529년 마그달레네, 1531년 마틴, 1533년 파울 그리고 끝으로 1534년 마가레테가 출생하였는데, 그 중에서 엘리자베트는 1528년에 마그달레나는 1542년에 아깝게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 세상을 떠났다. ... 점점 규모가 커져 가는 집안 일을 활동적이고 규모 있는 이 여인은 무엇보다도 더 잘 감당하여야만 하였다”고 평가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루터가 그녀와 결혼한 후 1년 정도 되었을 때, “그녀는 나에게 상냥하며, 모든 점에서 순종하며, 내가 바랬던 그 이상으로 예리하고 영특하여, 이제 나는 나의 가난을 대부호로 소문난 크레수스(Krösus) 왕의 부귀와도 바꿀 마음이 전혀 없네”라고 말하였다. 그녀를 자신의 은사(Carissima)로 칭하기까지 했던 루터는 “내가 진실로 사랑하는 캐테”라고 불렀다.
루터의 명성이 커짐과 동시에 수많은 친척들과 수시로 찾아드는 손님들 그리고 적지 않은 학생들을 겉으로 보기에는 나약한 이 여인이 지혜와 신앙으로 기꺼이 감당하였던 것을 우리는 확인하게 된다. 당시 프리드리히 현공은 루터의 생명의 은인이자 동시에 루터의 추종자로서 후한 생활비와 함께 당시 어거스틴 수도원으로 쓰던 40개의 방이 있는 큰 건물을 루터의 가정을 위해 내놓았다. 그럼에도 엄격히 볼 때 수많은 식솔들 때문에 그렇게 생활은 풍족한 것은 아니었다. 아무튼 카타리나 부인은 이 큰 규모의 살림을 잘 감당하였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루터의 결혼은 하나님의 축복과 함께 분명히 성공적이었다 하겠다.
7. 비난의 편지들
그렇다고 루터의 결혼을 마냥 축복스럽고 흐뭇한 눈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아니었다. 루터가 케테와 부부생활을 시작한지 2년 정도 되었을 때, 케테 앞으로 비난의 글이 전달되었다. 사실 수도원의 수도사였던 루터와 수녀원의 수녀 출신인 카타리나가 독신서원을 깨고 함께 결혼하여 부부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보다도 당시 루터를 원수처럼 여기는 로마 카톨릭교회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는 절호의 비난거리임과 동시에 세상사람들에게는 이야기 거리가 족히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불쌍하고 가련한 유혹에 빠진 계집에게 저주가 있을지어다. 네가 빛에서 어두움으로, 수도원적인 거룩한 신앙에서 저속하고 추잡한 생활로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에서 은혜 없는 삶으로 타락되었다는 단지 그러한 이유에서만이 아니라, ... 너의 그러한 사악한 삶의 모델을 통하여 아직 때묻지 않고 가련한 어린아이들을 역시 이러한 비참함으로 이끌어서 영혼뿐 아니라, 육체까지도 더욱 가련하게 만들어서 많은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기 때문이다.”
이렇듯 수없이 많은 핍박 가운데서도 이 두 사람은 결혼은 오직 하나님께서 세우신 축복이며 질서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으면서 더욱 깊고 거룩한 사랑으로 돈독한 부부애를 그리고 행복한 가정을 이끌어 나갔다. 둘 사이에는 언제나 신선한 유모어를 잃지 아니했으며 격려와 용기를 아낌없이 서로를 향해 쏟아 부었다. 예를 들어 루터는 크나큰 살림을 감당하는 아내를 향하여 한 번은 “우리의 여 주인장 케테, 여 주방장님”(Unsere Herrin Käthe, Oberküchenmeisterin)이라고 친구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유모러스하게 쓰고 있음은 신선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루터 역시 아내의 수고를 익히 알고 있었으며, 이해하였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게다가 루터는 그녀를 “케테씨”(Herr Käthe)라고 편지들 가운데서 종종 부르고 있는데, 물론 농담 섞인 호칭인 것은 분명하지만, 루터는 그녀의 탁월성을 염두에 두면서 그 어떤 남자 못지않은 여인이라는 존경의 의미로서 부른 것으로 이해된다. 예를 들어 케테는 여러 면에서 강한 생활력으로 활약을 했는데, 밭을 사들이고 경작하며, 가축들을 치며, 시장을 보고, 맥주를 담그는 등의 행위를 훌륭하게 감당하였다. 카타리나가 많은 밭을 샀는데, 만약 남편이 죽었을 때 혼자서 아이들을 먹여 살릴 것을 생각하면서 준비하였다. 당시 혹시 찾아올지도 모르는 남편 없는 위기 상황을 예비하면서 그녀는 가장 안전한 준비인 토지를 사들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루터에게 있어서 이러한 점은 하나의 부담이기도 했다. 루터 역시 토지를 팔거나 농사를 지을 때 축복스런 부로 이해했지만, 그저 많은 부동산을 소유하는 행위를 기꺼 하지 않았다. 루터에게 있어서 많은 곡식은 황금보다 가치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8. 종교개혁의 조언자
루터 역시 아내 케테의 말에 묵묵히 귀기울일 줄 알았다. 한 번은 한 친구가 루터에게 결혼식 축제를 집례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루터는 정중히 이 부탁을 아내 케테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거절하였다. “나의 사랑하는 친구여, 나 그리고 나의 케테도 그것을 허락할 수가 없구려. ... 나는 너의 부부 그리고 나의 부부에게도 하나의 오점을 남기고 싶지 않구려. 내 생각에는 자네가 프라이부르그(Freiburg)에서 잔치를 행하든지 아니면 가까운 친지들만을 불러서 두 세 식탁 정도로 소박하게 점심 먹기 전 간식 정도로 준비하는게 어떨는지 하네.” 우리는 루터가 이 결정을 할 때 아내 케테의 조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였음을 짐작하게 된다. 뿐만아니라 카타리나는 무거운 신학적 물음에도 많은 흥미를 가지고 참여하였는데, 예를 들어 1529년의 「마부르그 종교회의」(Marburger Religionsgespräch)에서 루터가 어떻게 성찬론에 관하여 토론을 이끌어 갈 것인지를 생각할 때, 그녀는 성경을 읽을 것을 제안하였다.
물론 이러한 그녀의 모습은 어떤 점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부부의 마땅한 도리라고 생각이 되지만, 어쨌든 당시의 급박한 위기적 상황과 더불어 당시 종교개혁자 루터의 역사적 무게를 기억할 때 남편 루터를 위한 케테의 야무진 역할은 특별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아내 케테를 향하여 루터는, “나는 케테를 사랑한다. 그리고 확실한 것은 나는 내 자신보다도 그녀를 더 사랑한다. 만약 그녀가 아이들과 더불어 죽어야만 한다면 차라리 내가 죽을 것이다”(TR 2, 1563)라고 아낌없는 사랑을 토로하였다.
그녀를 향한 루터의 각별한 사랑은 비단 여기서만 제시되는 것은 아니었다. “결혼생활에서 누리는 은혜와 평강은 분명 하나의 선물로서, 복음의 인식에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이다. ... 사랑하는 케테, 당신은 당신을 사랑하는 좋은 남자를 소유하고 있소. 당신은 진정 여자 황제올시다. 그것을 아시고 하나님께 감사하시구려!”(TR 1,1110) 부부애와 그리스도의 사랑에로의 인식은 가까이 있는데 루터에게 있어서 많은 의미를 부여하였다. 루터는 로마서와 함께 갈라디아서를 종교개혁를 위한 중요한 두 영적 무기로 생각하였는데, 갈라디아서 주석을 쓰면서 루터는 “내가 진실로 신뢰하는 사랑하는 케테 폰 보라”를 일컫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각별한 루터의 부부애는 자신의 유언(1542년)에서도 잘 나타나 있는데, 그녀를 걱정할 뿐 아니라, 다시 한 번 사랑을 확인하게 된다. “그녀는 경건하고 신실하며 부군된 남편 나를 언제나 한결같이 자비와 품위 그리고 아름다움으로 사랑했으며, 본인에게 넘치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다섯 자녀들을 낳았으며, 장성하게 하였다”. 그러면서 루터는 그녀를 향한 진심 어린 감사도 잊지않았다(BR 9, 572f.).
9.평화로운 가정
루터는 가정의 평화를 참으로 귀하게 여겼다. “우리의 몸과 생활, 아내와 자식, 집과 정원을 위시한 모든 지체들인 손, 발, 눈 그리고 모든 건강과 자유가 평화에 의해서 주어진다. 이 평화의 울타리 안에서 안식을 누리며 자리를 잡는다. 평화가 있는 곳은 거의 천국이 이뤄지는 곳이다. 평화가 있을 때, 한 입의 빵 조각은 마치 설탕처럼 달 것이며, 한 모금의 물도 저 유명한 이태리 산(産) 말바의 포도주처럼 달콤한 맛을 낼 것이다.”. M.A. Kleeberg und G. Lemme(Hrsg.), op. cit., 194.
종교개혁자 루터에게 있어서 이처럼 귀하게 느껴지는 평화는 카톨릭 교회를 위시하여 대외적으로 닥쳐오는 시련과 어려움으로 여지없이 깨어지곤 하였고, 우리의 상상력을 뛰어넘어 그에게 많은 어려움을 주었다. 이러한 종교개혁자의 힘든 생애에 있어서 포근한 가정이 가져다주는 사랑과 평화는 너무도 큰 위로와 힘이 되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루터는 많은 어려움과 시련을 온 가족이 하나님께 함께 찬송함으로 극복하며, 큰 위로를 받았다. 그에게 있어서 찬송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였다고 봐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루터는 찬송을 얼마나 귀하게 여겼는지 모른다. “마치 잘못된 신앙을 가진 모든 자들이 그렇듯이 누구든지 찬송을 함부로 무시하는 자들에게 나는 동의를 할 수 없다. 음악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재능이며, 선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귀신을 쫓아내며 사람들의 심령을 기쁘게 만든다. 게다가 음악은 모든 분노, 불순, 거만 그리고 다른 무거운 짐들을 잊게 한다. 나는 신학 다음 자리에 음악을 놓으며, 최고의 영예를 부여하고 싶다.” 음악은 루터에게 있어서 큰 위로가 되었을 뿐 아니라, 은혜와 영적 고양을 불러일으키는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음악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최고의 은사이다. 그러한 음악은 나에게 있어서 새로운 영적 힘이 되었으며, 감동을 주어 말씀을 설교함에 있어서 흥미를 불러 일으켰다.”. Ibid.
여기서 우리는 루터의 찬송으로 오늘 날 우리가 즐거이 부르는 “내 주는 강한 성이요”(384장)를 기억하게 되는데, 가사를 음미할 때 참으로 핍박과 시련으로 위기 가운데 불렀던 찬송임을 실감하게 된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옛 원수 마귀는 이 때도 힘을 써 모략과 권세로 무기를 삼으니 천하에 누가 당하랴. 내 힘만 의지할 때는 패할 수밖에 없도다. 힘있는 장수 나와서 날 대신하여 싸우네. 이 장수 누군가 주 예수 그리스도 만군의 주로다. 당할 자 누구랴. 반드시 이기리로다. 이 땅에 마귀 들끓어 우리를 삼키려 하나 겁내지 말고 섰거라. 진리로 이기리로다. 친척과 재물과 명예와 생명을 다 빼앗긴대도 진리는 살아서 그 나라 영원하리라.” 과연 루터에게 있어서 찬송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임재를 실감하는 능력 있는 또 다른 기도였음을 우리는 확인하게 된다.
루터는 또한 카타리나를 포함하여 가정의 모든 다섯 자녀들과 함께 자신이 직접 기타의 전신인 라오테를 연주하면서 하나님께 즐거운 찬송의 시간을 수시로 가졌던 것으로 전해진다. 특별히 1866년 독일의 화가 구스타브 아돌프 슈팡엔베르그(G.A. Spangenberg)는 이러한 루터의 가정을 연상하며 그림으로 그렸는데, 이 그림에서 인상깊은 한 대목은 루터의 동료 멜랑히톤이 함께 참석하여 루터 가정의 아름다운 합창을 흐믓한 얼굴로 청취하고 있는 모습이다. 찬송의 은혜 가운데 젖어 있는 종교개혁자 루터의 가정은 참으로 바람직한 개신교 성직자 가정의 아름다운 모델이라 부를 수 있을 것 같다(그림 참조).
10. 하나님이 주신 기업들
“사랑하는 딸아, 천국에 너의 또 다른 아버지가 계시단다. 거기로 네가 옮겨가는 거란다.” 이 말은 1542년 큰 딸 마그달레나가 14살의 다 큰 나이로 죽어가고 있을 때 아버지 루터가 최후의 순간에 그녀에게 들려준 가슴 찡한 위로의 메시지였다. 루터는 이 마그달레나를 잃었을 때 얼마나 가슴 아파했는지 모른다. 또한 그 딸의 묘비에 루터는 친히, “여기에 루터 목사의 사랑스런 딸이 모든 성도들과 함께 안식 가운데 잠들다. 나는 죄 가운데 태어나서 마땅히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었으나, 그리스도 보혈의 공로로 영원한 생명과 기업을 얻었노라”고 기록하였다.
우리는 영생의 확고한 소망 가운데서 딸을 하나님이 계신 천국으로 보내는 아버지 루터의 다른 면을 확인하게 된다. 카타리나 역시 이 사랑하는 딸을 장례 치르는 순간에 깊은 슬픔에서 쉽게 헤어나올 수 없어, “사랑하는 딸아, 너는 다시 살아 날거야. 그리고 별처럼 빛날 거야. 아니 태양처럼 빛날거야. 물론 이는 놀라운 사실이지만, 그리고 영원한 안식을 누릴 것이지만, 그래도 이 슬픔을 감당할 길이 없구나!”라고 절규하였다.
루터와 카타리나 사이에 태어난 자녀들로는 아들 셋, 그리고 딸 셋으로 조화를 이루었으나, 그 중 일년도 채 안되어 딸 엘리자베트를 1528년 잃고 난 후, 15년만에 너무도 사랑스런 큰 딸 마그달레나를 하나님이 계신 천국으로 보낸 것이다. 이제 남은 루터의 자녀들로는 아들 셋, 딸 하나였는데, 과연 그들은 어떠한 성장과정이 있었을까? 아이들과 아내 카타리나에 대한 사사로운 정보들을 우리는 루터의 담화록(Tischreden)과 편지들에서 거의 대부분 얻고 있다. 카타리나가 임신하여 얼마나 괴로워하는지, 1526년에 얻은 할아버지 이름 따라 부르는 첫 아들 한스가 걸음마를 어느 정도 빨리 하는지, 그가 이제는 제법 중얼거리고 말을 따라하며, 얼마나 귀찮게 하는지를 루터는 편지에서 흥겹게 이야기한다. 한 편지에서 루터는 어린 아들 한스의 “모든 성가신 일들마저도 우리에게는 기쁨입니다. ... 이는 축복된 부부에게 내리시는 열매이며, 행복입니다만, 교황에게는 이러한 가치가 인정되지 않지요”라고 행복한 개신교 첫 번째 목사가정을 서술하였다. 아들 한스가 거의 열 한 살이 되어가고 있을 때 루터는 친구에게가 아니고 한스에게 라틴어로 쓴 편지를 보냈다. 바쁜 중에서도 자랑스런 아들 한스에게 아버지 루터는 학문의 언어인 라틴어로 격려와 함께 기대 섞인 편지를 보낸 것임을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한 살도 채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난 딸 엘리자베트를 생각하면서 루터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의 사랑하는 딸 엘리자베트가 죽었다네. 나는 얼마나 슬픈지 말로 형용할 수 없네. 마치 슬픔에 빠진 한 여인의 모습이라네. 자식의 죽음이 이토록 아빠의 마음을 송두리채 흔들어 놓는지. 이전에 나는 이러한 상상을 전혀 해 본 적이 없다네”라고 토로하고 있다.
1531년 11월 9일 카타리나는 둘째 아들 마틴을 출산하였다. 이 마틴을 루터는 “가장 사랑하는 보물”(mein liebster Schatz)이라고 묘사하곤 하였다. 또한 카타리나가 마틴을 쓰다듬으면서 하는 서로간에 사랑넘치는 대화를 보면서, 루터는 “나의 아내 케테가 사랑스런 아들 마틴에게 하는 것 보다 훨씬 더 하나님은 나에게 자애로운 대화를 하실 것이 분명하다”고 행복한 소망을 표출하였다. 이러는 중에서도 루터는 늘 카톨릭과의 긴장어린 관계 가운데 있는 자신의 현실을 잊지 않았는데, 아들 마틴이야말로 대적자들인 교황, 주교들, 게오르그 공작, 황제 페르디난트 그리고 모든 사탄들을 물리치는 진리에 충실한 종이 되어 그 어느 때고 그러한 이들에게 “진정 어린 아이와 같이 되라!”고 외치길 원하였다. 루터는 또한 이 마틴이 출생하였을 때, “천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그 어떠한 주교들에게도 나에게 베푸신 이 큰 복을 주신 적이 없었다”고 감격해 마지 않았다.
1533년 1월 29일 막네 아들이 태어났을 때, 카타리나와 루터는 사도 바울과 같은 인물이 될 것을 기대하면서, 바울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사랑하는 아내 케테를 통하여 이 밤에 선물을 주셨습니다. 새로운 용기와 힘을 주셨습니다. ...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교황과 터어키인들의 새로운 대적자로 양육시키기를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나는 이 저녁이 지나기 전에 한 시라도 빨리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세례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이처럼 종교개혁의 한 복판에서 태어난 루터의 아이들은 종교개혁자 아버지 루터에게 있어서 확실한 동역자였던 것을 우리는 충분히 인식하게 된다.
1534년 12월 17일 카타리나는 막네 마가레타를 여섯 째로 출산하였다. 할머니의 이름을 따라 그녀는 마가레타로 불리었다. 루터는 마가레타가 다섯 살이 되었을 때, 그녀에게서 아름다운 목소리와 함께 음악성을 발견하였고 가정 음악회에도 종종 참여하게 하였다. 여섯 아이를 낳았지만 카타리나는 건강하였다. 이러한 가정의 행복을 만끽하면서 루터는 늘 사랑하는 아내 케테와 많은 대화의 시간을 가졌는데, 독일어뿐 아니라, 때로는 라틴어로 대화를 하였으며, 서로가 멀리 떠나 있을 때는 독일어와 라틴어를 함께 쓰는 편지로 부부애를 나누었다.
11. 카타리나의 성경지식
루터는 바쁘게 살아가는 아내 케테가 영적으로 침체되지 않도록 마음 따뜻한 좋은 조언을 늘 아끼지 않았는데, 무엇보다도 성경을 규칙적으로 읽도록 권면 하였다. 이에 대하여 그녀 역시 거부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한 번은 루터가 아내에게 재미있는 약속을 하였는데, 부활절이 오기 전까지 만약 아내 케테가 성경 전체를 다 읽을 경우 독일 돈 50 굴덴을 지불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돈을 그녀가 받았는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부부지간에 표출되는 숨길 수 없는 흥겨운 사랑만은 충분히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고 아내 케테가 성경을 읽지 않았다거나 성경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고 추측해서는 성급하다. 루터는 종종 아내의 성경 지식이 뛰어남을 자랑스럽게 여기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녀가 이 말씀대로 살기를 노력하는 것을 볼 때 늘 감사한 마음을 잃지 않았다.
한 번은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려야하는 아브라함을 루터가 해석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아내 케테는 동의하지 않았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드릴 때 가질 수 있는 고통에 대하여 루터가 언급하였을 때, 부인 케테는 다른 입장을 밝혔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 어느 누구에게라도 아들을 살해하라 하실 수 있을까요.” 이에 루터는 예수님의 죽음을 기억시키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외아들까지도 우리를 위해 내어놓으심을 결코 망설이지 않으셨다고 대답하였다.
12. 루터가 보낸 편지들
또한 우리는 루터 부부의 편지를 볼 수 있다. 부인 케테가 남편 루터에게 쓴 편지는 유감스럽게도 발견되지 않고 있으나, 루터가 아내 케테에게 보낸 편지들은 상당수 남아있어 부부지간의 사랑을 우리는 실감나게 확인할 수 있다.
1523년 2월 27일 루터는 외유 중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나의 사랑하는 케테, 휴식을 취하기 위해 부뤽 박사가 휴가를 내어 곧 내가 그분과 함께 집으로 갈 계획이오. 아마도 내일이나 모레쯤 도착할 것 같구려. 하나님께서 우리가 무사히 그리고 건강히 도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기도하오. 어제 저녁 나는 잠을 잘 잤소. 여섯 일곱 시간을 푹 잤고, 연이어 두 세시간을 또 잤소. 아마도 맥주 덕분인 것 같구려. 아무튼 빨리 당신이 있는 비텐베르그에 가고 싶구려.”
1541년 9월 18일 비텐베르크에서 루터는 �스도르프에 있는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소식이 없으니 놀랍구려. 과연 이곳의 우리가 잘 있는지 궁금하지도 않는지 말이요. ... 어쨌든 당신이 할 수 있는 대로 (땅을) 사시고 또는 계약을 하시구려 그리고 제발 빨리 집으로 오시구려.” 루터는 당시 어쩌면 일어날 수 있는 전쟁의 위험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13. 피난의 세월 속에서
구교와 개신교의 입장에 선 위정자들 사이에 발생한 여러 번의 내란, 터어키 군과 프랑스 그리고 로마 카톨릭의 교황과의 충돌들은 당시의 상황을 매우 힘들게 하였다. 루터가 아내 케테와 21년간의 결혼생활을 뒤로하고 1546년 2월 18일 세상을 떠난 후에도 이럴 때마다 케테는 아이들과 함께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한 번은 교황측의 군대에 의해 비텐베르그가 포위되었을 때, 케테는 자녀들과 함께 마그데부르그(Magdeburg)로 도피해야만 했다. 점령군이 철수하고 그녀가 가족과 함께 다시 비텐베르그로 돌아왔을 때, 밭의 곡식들은 온통 못쓰게 되었으며, 가축들은 점령군에 의해 잡혀 먹혔고, 가옥은 불에 타 폐허가 되어 있었다. 이러한 비참한 상황이 반복되곤 하였다. 뿐만 아니라 당시 흑사병은 무참히 수많은 인명을 앗아갔는데, 이러한 전염병이 휩쓸 때에도 사람들은 특별한 대책이 없어 또 다시 피난의 길을 떠나야 했다. 한 번은 케테가 아들 바울과 딸 마가레타를 데리고 이 흑사병을 피해 토르가우(Torgau)로 가서 전염병이 수그러질 때까지 그 곳에서 임시 거처를 마련해야만 했다. 이러한 생활 가운데서 카타리나 부인이 말을 타고 다소 험한 길을 가게 되었는데, 이 때 얼음물이 고여있는 무덤 옆을 지나다 미끄러져 마차에서 떨어져 허리를 다쳐 그녀는 토르가우로 옮겨졌고 당시 18세의 딸 마가레타의 정성어린 간호를 받았으나, 3개월 후 1550년 12월 20일 51세의 나이로 길지 않은 그러나 결코 평범하지 않은 한 여인으로서의 생애를 마감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먼저 간 남편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 보다 4년 10개월 뒤에 그녀 역시 세상을 떠나 하나님의 영원한 품에 안긴 것이다.
맺는 말
우리는 지금까지 16세기에 등장한 교회 속의 한 여성, 특히 가장 첫 번째 목사 부인 카타리나 폰 보라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였다. 그녀를 향한 우리의 특별한 관심은 무엇보다도 종교개혁자 루터의 아내라는 이유가 가장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실 우리의 기대는 조금은 달랐는데, 교회사 속의 한 여인으로서 그녀의 독자적인 활약을 역사적으로 추적하는 것이었다. 이를 향한 우리의 기대는 그렇게 충족되지 못하였다. 여러 가지 이유중 필자는 첫째, 그녀에 대한 역사적 자료의 빈곤을 우선적으로 제시하게 된다. 주로 역사가들은 루터를 연구하는 중 만나게 되는 그녀에 대한 자료를 활용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남편 루터와의 상관관계 속에서 만나지는 카타리나 폰 보라 부인의 모습이 우선적으로 제시될 수 밖에 없다는 점인데, 이러한 자료의 빈곤은 결국 연구의 한계성으로 부각 되어진다. 둘째, 당시 16세기가 비록 종교개혁이라는 엄청난 전환의 순간을 창출해내고 경험하는 역사적 창조적 시대이지만, 그럼에도 아직은 여인들의 교회적, 사회적 위치와 활약 그리고 봉사에 대한 기대가 크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국은 여인들의 역할이 주로 남편과 자녀들 그리고 집안 생활에 집중되고 있다. 이는 교회가 여인들의 또 다른 활약에 건 기대가 얼마나 미약했는가를 보여주는데, 이러한 미약한 기대는 결국 여인들의 다른 활동에 제재를 가하는, 어떤 면에서는 적극적 걸림돌이 될 수 있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 기독교 이후 여인들의 역할이 꼭 가정사(家庭事)에만 제한 된 것은 아니었다. 특히 성경에 대두되고 있는 수많은 여인들의 훌륭한 역할이 결코 그러하지만은 아니했다는 사실에 우리는 경의를 표한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예수님께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거나 그리고 예수께 당시 사회가 가지고 있었던 편견에 의한 사회적 판단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여성은 남성과 동일하게 예수께는 구원의 대상이요, 사랑의 대상이며, 천국복음 전파의 일군으로 기꺼이 사용하시기를 원하셨다. 물론 여러 가지 다른 해석이 대두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서로 상이한 관점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어쨌든 이제 우리는 카타리나 폰 보라의 역사적 의미를 정리하면서 끝을 맺어야 하겠다.
첫째, 종교개혁 이후 가장 첫 번째 개신교 목사 부인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우리는 카타리나 폰 보라에게 있어서 확인해야만 했다. 무엇보다도 이 역사적-신학적 역할은 크고 위대했는데, 수도사 출신 루터와 수녀 출신 카타리나의 개인적 신앙결단에도 힘입은 바 크다 하겠다. 여기서 신학적이란 이신칭의에 의한 종교개혁적 새로운 인간실존이 선언하는 진정한 삶의 유형을 성직자 독신생활의 굴레를 벗기고 축복된 결혼이라는 또 다른 자유의 모습으로 떳떳이 제시하였다는 의미이다. 이는 가정생활에 있어서 나타나는 종교개혁적 신학의 선언적 의미가 놀랍다.. 사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이러한 성직자의 독신생활을 중요한 신학원리 위에 세워놓고 있다. 일반 성도와 성직자의 차이를 강조하면서 종교개혁적 만인제사장직을 부정하는 외적 수단으로 이용한다. 또한 독신생활적 금욕주의를 하나의 행위구원의 수단으로 보는 것이다. 게다가 중세 로마교회가 말하는 결혼관은 한 마디로 말해서 결혼하지 않은 ‘거룩한’ 성직자와 결혼으로 자녀를 가지는 ‘속된’ 일반 신도들을 나누는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
둘째, 카타리나는 정숙한 목사의 사모, 신앙의 아내, 종교개혁자 루터의 지혜로운 조언자였으며, 다섯 자녀들의 성실한 어머니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무겁고 힘겨운 역할을 위기의 시대에도 최선을 다해 감당하였다. 아내로서 그녀는 인격과 용기, 예민성과 강직함, 강한 의지와 큰 사랑을 소유하였다. 수많은 사상적 대적들을 늘 곁에 두어야 했던 종교개혁자 남편 루터에게 그녀의 따뜻하며 예리한 조언은 정금같이 귀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공개적인 활약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이러한 카타리나의 모습은 어쩌면 남편 루터의 여성관 내지는 가정관에 일치하고 있다고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아니면 루터에게 부과되는 너무도 막중한 종교개혁적 사명이 그녀로 하여금 또 다른 역할을 기대하게 못했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즉 오직 이 위대한 종교개혁자 남편을 위해서 부름받은 신실한 여종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루터의 종교개혁은 이 지혜로운 아내 숨은 동역자 카타리나와 함께 이루어진 신적(神的) 작품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은 의미있다 하겠다. 여기서 우리는 카타리나 폰 보라의 역사적 위치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끝으로, 카타리나를 통해서 제시되는 개신교 첫 번째 사모의 모습은 오는 시대 개신교 목사 부인들의 상(像)을 그리는 데 있어서 어렵지 않게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출처: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문보기 글쓴이: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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