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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서는 사람을 어떻게 보는가?

에반젤(복음) 2020. 6. 20. 09:05

구약성서는 사람을 어떻게 보는가?

 

 

 

얼마 전 신문에서 참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오랫동안 홀로 살아오신 한 할머니께서 자신이 평생동안 안 입고 안 먹고 모은 전 재산을 근처 국민학교에 장학금으로 기탁했습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는 암에 걸려 있었습니다. 암 치료를 위해서 그 돈을 쓸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몇 개월 살지 못하고 결국엔 죽어서 썩어 없어질 자신의 몸에 돈을 쓰느니, 차라리 생활이 어려워서 공부를 못하는 어린아이들에게 그 돈을 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서, 정말 버스표 한 장 살 돈도 남기지 않고 자신이 평생 모은 전 재산을 장학금으로 기증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고 물어 물어서 찾아와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 마리 나비가 아름다운 꽃동산에 놀러 와서 날이 저물도록 놀다가 다시 돌아가는 심정입니다.

 

 

 

얼마나 고운 말입니까? 어쩌면 병든 몸으로, 얼마 살지 못할 자신의 삶, 결코 행복스러웠다고 할 수 없는 삶을 마감해가는 그 할머니가 이렇게 아름다운 말을 할 수 있을까? 그가 평탄치 않은 삶을 살아온 이 세상을 어쩌면 꽃동산에 비유할 수 있었을까? 그런 아름다운 마음이 있었기에 그토록 숭고한 일을 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해보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다면, 이 세상은 더욱 밝아질 것입니다. 아니, 이 할머니와 같은 분들이 아직도 많이 있기에 이 세상이 이만큼이나 지탱되는지 모를 입니다.

 

 

 

그러면서 사람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사람이란 도대체 무엇이 길래, 어떤 사람은 수많은 재산을 갖고 있으면서도 더 갖지 못해서 안달이고, 어떤 사람은 그토록 소중한 재산을 생면부지의 사람들을 위해서 아낌없이 희사하기도 하는가? 어떤 사람은 갖은 수단을 다 부리고 심지어는 살인까지 저지르면서 재물에 집착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토록 재물에 자유로울 수가 있는가? 사람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 시간에는 창세기 1장에서 5장을 중심으로 해서, 구약성서는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맨 처음 보게 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바로 사람이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피조물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다른 피조물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창세기 일장 이십육 절, 이십칠 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무 많이 들은 구절이어서 새로움이 없을 것입니다만, 중요한 구절이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표준새번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그리고 그가,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 사는 온갖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하시고,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본문은, 사람을 누가 만들었는지, 그리고 사람을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먼저 사람을 누가 만들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을 보면, 사람을 하나님께서 만드셨다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창조’라는 단어가 이십칠 절에만 세 번 나오고 있습니다. 이십육 절의 ‘만들자’라는 말까지 포함하면, 이십육 절, 이십칠 절 이 두절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음을 보여주는 단어가 네 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일장 이십육 절 이십칠 절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다. 사람을 하나님께서 만드셨다”로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본문이 전달해주는 메시지를 분명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사람을 만드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네 번이나 반복해서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사람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십칠 절을 보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는데,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동일한 말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십육 절, 이십칠 절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다는 말이 세 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의 말씀을 드릴 수 있겠습니다만, 사람을 결코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잠언에 의하면, 사람을 멸시하는 것은 그 지으신 창조주를 멸시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고귀하게 만드셨습니다.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자는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모습을 닮게 만들어졌습니다. 여기에는, 사람대하기를 하나님 대하듯이 하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습니다. 이것은 남자와 여자가 모두 동일하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음을 말합니다. 구약성경은 남녀 간의 성차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귀하고 또 평등합니다.

 

 

 

2. 책임 맡은 사람

 

 

 

다음 본문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이십팔 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베푸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하셨다.

 

 

 

여기에 보면, 먼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복을 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복을 받은 귀한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복은 그 다음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 즉 명령문으로 되어 있는 구절과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복 주심은 하나님의 명령과 불가분리의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고 복 받은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명령을 받는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섯째 날에 어류와 조류를 만드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것들에게 복을 베푸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여라. 새들도 땅 위에서 번성하여라’하셨다”(1:22)

 

 

 

하나님께서 어류와 조류에게 하신 말씀과 사람에게 하신 말씀을 비교해보시기 바랍니다.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우선 하나님께서 조류와 어류들에게 하신 말씀과 사람에게 하신 말씀이 거의 같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과 주변세계와의 연관성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만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어류와 조류들에게도 하나님께서는 깊은 관심을 두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의 선상에서 사람과 어류, 조류는 연관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차이점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류와 조류들에게는 하지 않은 말씀을 사람들에게는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 이외에는 아무에게도 주어지지 않은 명령입니다. 오직 사람에게만 주어진 말씀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독특성을 말합니다. 사람은 다른 피조물들과는 구별되어지는 책임을 부여받았습니다. 사람은 이 땅을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이 땅을 관리할 의무가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람은 단지 이 땅을 관리하는 관리자에 불과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만드시고, 그리고 여러 식물, 동물들을 만드신 다음에, 그것들을 관리할 사람이 필요해서, 갑작스럽게 사람을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첫째 날에서 여섯째 날에 이르기까지 자연스럽게 전개됩니다. 당혹스러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마치 오랜 동안의 연습을 마친 후에 숙련된 연기를 보여주는 연기자처럼,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를 아주 편안하게 하고, 깊은 감동에 잠기게 만듭니다.

 

 

 

고대 바빌로니아에도 사람창조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우리의 사람창조이야기와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신들만 있었고,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신들도 위계질서가 있어서 지위에 따라서 여러 가지 일들을 분담했습니다. 그런데 신들도 외면적으로는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특히 음식을 먹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신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농사를 짓는 신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농사를 짓는 신들이 스트라이크를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농기구를 다 던져버리고, 무기한 농성에 들어갔습니다. 자기들만 고생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신들 가운데 지도자들-당시의 신들의 세계는 칠 인의 집단지도체제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모여서 대책회의를 했습니다. 맨 먼저 사태의 진상을 파악하기로 하고, 주모자를 가려내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한참 논의를 하다가 지혜의 신이 굿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농사짓는 신들 대신, 농사를 지을 자들을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정에 없던 사람들을 만들게 됩니다. 바벨론 신화에 의하면, 이렇게 해서 사람들이 만들어집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당혹스러움을 느낍니다. 신들이 당혹스러워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농사짓는 신들이 파업을 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당장 자신들의 생계가 어렵게 되리라고는 짐작도 못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아무런 대비책도 세워두지 못했습니다.

 

 

 

신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사태에 직면하고서, 매우 난처해하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참 우습지요? 창세기에서 볼 수 있는 그런 자연스러움, 그런 숙련된 연기, 물 흐르듯이 이어지는 그런 부드러움이 바벨론의 사람창조 이야기에는 없습니다. 우체국을 만들면서 정작 우체통은 하나도 마련하지 못해서 개국하는 날 겪는 당혹스러움처럼, 그런 난처함이 본문을 지배합니다. 사람들은 사태해결을 위한 방편으로 만들어집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만드신 모든 것을 사람의 손에 선물처럼 주시는 데 비해서, 바벨론의 신들은 사람을 자신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일군으로 만들어냈습니다. 사람의 고귀함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그들은 신들의 노예와도 같습니다.

 

 

 

물론 구약의 사람들도 경작을 해야 합니다. 창세기 2장 5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 하나님이 땅 위에 비를 내리지 않으셨고, 땅을 갈 사람도 아직 없었으므로, 땅에는 나무가 없고, 들에는 풀 한 포기도 아직 돋아나지 않았다. 땅에서 물이 솟아서, 온 땅을 적셨다. 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주 하나님이 동쪽에 있는 에덴에 동산을 일구시고, 지으신 사람을 거기에 두셨다. 주 하나님은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열매를 맺는 온갖 나무를 땅에서 자라게 하시고, 동산 한 가운데는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하는 나무를 자라게 하셨다”(2:5-9)

 

 

 

이 구절을 자세히 살펴보면, 에덴동산은 하나님과 사람의 합작품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땅을 갈 사람이 없었습니다. 땅을 갈 사람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에덴동산은 가꾸어지지 않습니다. 에덴동산을 가꾸고 경작하는 것은 사람에게 맡겨질 일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땅을 가꾸어도 거기서 식물을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은 사람과 하나님의 합작품입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힘을 합쳐서 만들어낸 그 아름다운 동산,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3. 법을 지켜야 하는 사람

 

 

 

하나님의 창조이야기는 이제 에덴동산이라는 한 특정한 장소로 촛점이 맞추어집니다. 지금까지는 어느 한 지점이 특별히 지정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모습이 전면적으로 보여 지다가, 이제 한 곳으로 촛점이 모아집니다. 그런데 에덴동산의 모습을 전면적으로 보여주다가 중앙을 보여줍니다. 그곳에는 선악과와 생명나무가 있습니다. 다른 나무들의 이름은 알 수가 없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생명나무만이 이름이 밝혀져 있습니다.

 

 

 

창세기 2장 15절에서 십칠 절까지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주 하나님이 사람을 데려다가 에덴동산에 두시고, 그곳을 맡아서 돌보게 하셨다. 주 하나님이 사람에게 명하셨다.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어느 공동체에나 계약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심으로 하나님과 사람이 관계를 맺게 되었고,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살아가면서 그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 법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법이라는 게 특정한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참 원시적입니다만, 실은 매우 중요한 법입니다. 우리가 고조선 시대에 여덟 가지의 법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만, 여기에는 법이 하나만 있는 사회입니다. 어느 사회나 그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법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법의 준수와 집행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을 사람답게 살게 만드는 것이 법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법의 공정한 집행에 대해서 누누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선악과와 생명나무열매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신학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지만,여기서는 선악과를 먹지 말도록 금한 법에 촛점을 맞추어보겠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본문에서는 선악과가 무엇이었는지 생명나무열매가 무엇이었는지 보다는, 그리고 왜 못 먹게 했는지 보다는, 하나님께서 아담과의 사이에 법을 제정하시고 그것을 지키도록 규정하셨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창조행위는 질서부여의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혼돈된 것에 질서를 부여하십니다. 질서는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그 질서를 지키는 것이 바로 법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그 법을 깨뜨리게 됩니다. 그 과정은 삼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장은 법원에서 재판하는 장면을 연상하면 됩니다. 온갖 치사스러운 일들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의 판결이 내려집니다.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에덴동산에서의 추방은 에덴동산 이외의 지역을 가꾸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인류의 역사는 범죄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심판하게 됩니다. 창세기 일장에서 11장은 창조의 이야기라기보다는 범죄와 심판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범죄하고 심판받는 사람, 하나님께서 사람을 심판하십니다. 그 심판은 매우 윤리적이고 합당합니다. 이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법대로 처리하신다는 믿음을 여기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 확신이 본문 곳곳에 진하게 배여 있습니다. 이런 생각이 우리의 삶을 지탱시켜 줍니다. 우리가 갖는 근본적인 믿음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런 믿음을 깨뜨려버리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혼돈스러운 현상만을 보고, 그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질서를 보지 못합니다. 바벨론에도 사람을 심판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벨론 심판의 이야기는 사람창조의 이야기만큼이나 우리를 심란하게 만듭니다. 조금 전에 했던 이야기에 연속되는 이야기입니다. 신들이 사람을 농사짓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문제가 해결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또 예기치 않았던 문제가 발생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의 수가 불어난 것입니다. 이것은 신들이 전혀 고려치 않은 것입니다. 그저 자기들이 먹을 식량을 조달해주는 것만 생각했지, 사람이 점점 그 수가 불어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습니다.

 

 

 

인구가 증가하면서 여러 가지 문제들이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식량문제도 있었을 것이고, 사람들 사이의 갈등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것들이 신들에게는 귀찮기만 했습니다. 신들은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서 사람을 만든 것이 아닙니다. 자기들의 편익을 위해서 사람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사람이 숫자가 많아지면서,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온통 소란스럽게 되었습니다. 신들도 점심 먹은 다음에는 낮잠을 자야하는데, 사람들이 서로 티격태격하느라고 시끄럽게 해서 도저히 낮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신들은 사람들의 문제해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서 만든 사람이 이제는 편의보다는 불편함을 더 주게 되었습니다. 낮잠도 못 자게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신들이 다시 모였습니다. 사태해결을 위해서 관계기관대책회의를 열었습니다. 거기서 여러 가지 안들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비밀이 새나가서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나온 대책이 홍수를 일으켜서 사람들을 모조리 진멸시켜버리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홍수를 일으킵니다. 그리고 그 홍수로 인해서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죽게 됩니다. 전무후무한 홍수였습니다. 신들조차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홍수였습니다. 그래서 신들마저 그 홍수를 보고 겁에 질릴 정도였습니다. 신들은 이렇게 자신들에게 거추장스럽게 된 사람을 싹쓸이 해버렸습니다. 이것이 바벨론의 심판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창세기의 심판이야기와 비교해보십시오. 얼마나 유치합니까? 전혀 윤리적이거나 법률적이지 못합니다. 그런 법을 세운 적이 없습니다. 사람의 심판은 전혀 예기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세상은 혼란스럽고, 어떤 일관된 법칙이 없이 그때그때마다 임기응변식으로 흘러갑니다.

 

 

 

하지만 구약성경은 세상을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윤리적이고 법률적인 하나님을 강조합니다. 법의 집행을 강조합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그래서 범죄 한 사람들에게 심판을 선언하시면서도, 나뭇잎을 엉성하게 두르고 초라하게 웅크리고 있는 아담과 하와에게 양을 죽여서 그 가죽으로 직접 옷도 만들어주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런 분입니다.

 

 

 

4.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

 

 

 

이번에는 창세기 이장 일절에서 삼절을 보겠습니다. 여기에는 일곱째 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본문은 각 절에 따라서 세 가지로 구분됩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쉬셨습니다. 또 그 날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대개 어떤 일이나 사건을 기념해서 그 사건이 일어난 날을 기념일로 삼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조금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직접 창조하시던 엿새는 기념하지 않고, 그 대신 일을 마치고 쉬신 일곱째 날을 기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사역 그 자체보다는, 그것의 완성과 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셨던 모양입니다. 삼절을 보십시오: “이레날에 하나님이 창조하시던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으므로, 하나님은 그 날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을 특별히 구별하신 것은, 그날에 위대한 일을 하셨기 때문이 아니고, 모든 창조사역을 마치고 그날에 쉬셨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우리의 시선을 창조사역에서 예배에로 전환시킵니다. 본문은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행위에 관심을 두기 보다는, 그 일을 완성하신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촉구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부름 받고 있습니다.

 

 

5. 지혜로운 사람

 

 

 

이제는 창세기 이장 38절에서 25절까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을 읽어보겠습니다: 주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남자가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를 돕는 사람, 곧 그에게 알 맞는 짝을 만들어주겠다.’ 주 하나님이 들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를 흙으로 빚어서 만드시고, 그 사람에게로 이끌고 오셔서, 그 사람이 그것들을 무엇이라고 하는지를 보셨다. 그 사람이 살아있는 동물 하나하나를 이르는 것이, 그대로 동물들의 이름이 되었다. 그 사람이 모든 집짐승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러나 그 남자를 돕는 사람, 곧 그의 짝이 없었다. 그래서 주 하나님이 그 남자를 깊이 잠들게 하셨다. 그가 잠든 사이에, 주 하나님이 그 남자의 갈빗대 하나를 뽑고, 그 자리에는 살로 메우셨다. 주 하나님이 남자에게서 뽑아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여자를 남자에게로 데리고 오셨다. 그때에 그 남자가 말하였다. ‘이제야 나타났구나, 이 사람! 뼈도 나의 뼈, 살도 나의 사람,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고 부를 것이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남자와 그 아내가 둘 다 벌거벗고 있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언제나 읽어도 마음설레이는 이야기라서, 조금 길지만 읽었습니다.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서 중심 되는 이야기는, 아담의 짝이 없어서, 하나님께서 아담의 짝을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간에 아담이 짐승들과 새의 이름을 지어주는 장면이 삽입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짐승과 새를 아담에게로 이끌고 오셔서, 아담이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아담이 그 짐승들에게 이름을 지어줍니다. 그래서 아담이 지어준 이름이 그 짐승의 고유한 이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름 짓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 아니고 아담이 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아담이 지은 이름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대로 수용했습니다. 이것은 아담이 짐승과 새들의 이름을 아주 적절하고 알맞게 지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담이 매우 지혜롭게 일을 처리했음을 보여줍니다. 뿐만 아니고, 그는 짐승과 사람의 차이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담은 매우 지혜로웠습니다.

 

 

 

아담은 짐승과 새에 대해서 깊이 관찰을 했을 것입니다. 그것들의 전체적인 특징들을 관찰한 다음, 각각의 특징들에 따라서 이름을 붙였을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주변세계에 대해서 지식을 갖게 되었음을 말합니다. 사람은 이 세상과 짐승들, 어류, 조류들을 돌보도록 책임을 부여받았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해야 할 일입니다. 이 땅을 경작하고 가꾸고 돌보는 일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맡은 일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 연구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해놓은 자연과학적인 지식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이 땅을 좀 더 잘 보존하기 위해서 수고해온 사람들의 땀의 결정체입니다.

 

 

 

그러고 나서 여자를 만드시는 하나님의 지혜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전에 아담과 아무런 이야기도 없이 여자를 만들었습니다. 아담이 어떤 타입의 여자를 좋아하는지 물어본 적이 없습니다. 자신이 만든 여자를 아담이 좋아할 지 싫어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아담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여자를 보고, 생전 처음으로 여자를 보는데도 여자 보는 눈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합니다. 그리고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부릅니다.

 

 

 

본문은 아담이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보여준 다음, 이런 말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동심일체가 되었다는 사실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벌거벗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온전한 샬롬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사람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누리는 사람의 샬롬을 볼 수 있습니다.

 

 

 

6. 미래를 대망하는 사람

 

 

 

여기서는 창세기 3장 14절에서 5장까지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3장 14절에서 19절까지는 하나님께서 뱀과 하와와 아담에게 내리시는 판결입니다. 그 판결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수고로움’입니다. 뱀과 하와와 아담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벌은 수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아담에게 내려진 판결에는 그것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17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남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서, 내가 너에게 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의 열매를 먹었으니, 이제 땅이 너 때문에 저주를 받을 것이다. 너는, 죽는 날까지 수고를 하여야만, 땅에서 나는 것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창 3:17)

 

 

 

‘죽는 날까지 수고해야 한다.’ 이것이 아담에게 내려진 판결입니다. 이 수고로움은 사람의 고뇌를 말합니다. 사람은 땅과 자신과 다른 사람들과 씨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먼저 흙과의 씨름입니다. 사람과 가장 가까운 관계에 있고, 또 그래야만 할 땅과의 대결, 사람은 이 땅을 붙들고 몸부림치고, 땅으로 인해서 기뻐하고 땅으로 인해서 슬퍼하고 통곡하며, 사랑하는 사람을 땅에 묻고, 결국에는 자기도 땅에 묻히게 되는 판결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 후에 사람은 두 번째 판결을 받습니다. 생명나무 때문에 에덴동산에서 추방령이 내렸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사람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습니다. 생명나무를 사람의 손에서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룹을 세우고, 불 칼을 두어서 길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으셨지만, 처음처럼 사람을 신뢰하지는 않으십니다. 여기서 오는 사람의 고뇌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 하나님과의 신뢰관계를 회복해야 하는 길고도 먼 몸부림이 시작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 오랜 세월 동안 응어리진 한을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라는 말로 토해낼 때까지 계속되어야 할 몸부림입니다.

 

 

 

그러고 나서 가인과 아벨의 갈등으로 인한 형제살인이 나옵니다. 형제들끼리도 마음을 합하지 못하는 상황을 극복해 내기 위해서 사람들은 또 끈질긴 싸움을 벌여야 합니다. 이제 인간은 서로를 결코 고운 눈으로 보지 못합니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그 끝 모를 증오심과 싸워야 합니다.

 

 

 

사람들은 많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새로운 날이 오기를 대망했을 것입니다. 범죄와 에덴동산에서의 추방, 이어지는 형제살인. 이것은 가인의 말처럼 사람이 짊어지기에 너무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이 짐을 벗어버릴 날이 오기를 염원했습니다. 이러한 염원은 그 다음에 나오는 족보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5장에는 족보가 나옵니다. 성경에서 족보는 매우 중요한 기능을 합니다. 창세기 1장에서 11장까지 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창세기 5장의 족보는 셋의 계보입니다. 족보는 미래지향적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과거의 인물에서 시작해서 후대의 인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족보는 완결되지 않았습니다. 먼 미래를 지향하는 족보임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마태복음에 와서 완결된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창세기 5장의 족보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입니다.

 

 

 

이렇듯 구약의 족보들은 미래지향적인 족보입니다. 희망적인 족보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미래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나라가 멸망했을 때에도, 오랫동안 유랑생활을 하면서도, 그들은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메시야의 도래를 꿈꾸고 메시야의 나라가 반드시 올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가 조만간에 이루어질 것처럼 보이는 그런 시대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것이 이루어 적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 왕국의 도래를 염원하다가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에는 깊은 좌절에 빠지지만, 다시 그 좌절을 넘어서 새로운 희망을 갖습니다.

 

 

 

역사적으로 불가능해 보일 때는 묵시적인 대망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이렇듯 상황에 따라서 자신들의 신학을 수정하면서, 본질적으로 미래에 대한 희망,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이종록 교수

 

 

 

출처: 예수 코리아     글쓴이 : 예수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