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예화 모음
▶톨스토이의 부활은 유명한 작품입니다. 귀족 청년 '네풀류도프'는 '나타샤'라는 그의 하녀를 유혹하여 임신까지 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를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하녀는 주인집으로부터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하녀는 그 후 이리 저리 방황하면서 지독한 고생을 했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피눈물나는 고생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견디다 못해 창녀가 되어 몸을 팔아먹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자기를 괴롭히는 남자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살인범이 되었습니다. 법정에 섰습니다. 그런데 임신하게 했던 그 남자 '네풀류도프'는 그 동안 법을 공부하고 판사가 되어 공교롭게도 그가 그 재판을 맡게 되었습니다. 기구한 운명이었습니다. 자기가 한 때 불장난하여 그렇게 만든 여자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양심에 가책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 여자를 돕게 되었습니다. 차마 사형을 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사형을 면하여 주는 대신에 시베리아 먼 땅으로 유형살이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여자를 시베리아로 유배시키며 그녀를 따라 가게 됩니다.
시베리아로 가는 길에 한 여인숙 방에서 밤중에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그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젊은 날의 방탕에서 벗어났습니다. 그 후부터는 사람을 사랑하고 돕는 일에 자신을 헌신하겠다고 다짐하며 나머지 생을 그렇게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톨스토이의 '부활'의 줄거리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새로운 인생이 됩니다. 여기서 톨스토이는 부활의 개념을 '악한 사람이 선해졌다'는 개념으로 부활을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부활은 그런 부활이 아닙니다. 악한 사람이 선해졌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도 아닙니다. 기독교의 부활은 생명의 근원을 찾는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은 영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죽어도 다시 사는 생명' 이제 우리는 죽어도 우리를 다시 살리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미국에서 스탠포드 대학은 우리나라 서울대 연 고대처럼 명문 대학입니다. 그런데 그 스탠포드 대학을 설립한 사람이 바로 '스탠포드'입니다. 스탠포드가 스탠포드 대학을 설립한 동기가 있습니다 스탠포드는 부자였습니다. 캘리포니아 출신 상원의원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외아들이 죽었습니다. 잘 생기고 수재였던 외아들이었습니다. 극도의 슬픔에 잠긴 아버지는 장례식에서 말을 잃었습니다. 슬픔 속에 잠을 자지 못 하고 있는 데 그 날 밤 꿈에 아들이 생생한 모습으로 나타나 말했습니다. '아버지 저는 부활하신 예수님 곁에 있습니다. 저 대신 청년들을 도와주셔요.' 스탠포드는 이 환상을 보고 인생관이 확 바뀌고 말았습니다. '예수님도 살아 계시고 내 아들도 살아있다!' 스탠포드는 이런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아들의 소원을 들어 주기고 하고 청년 교육에 전력을 다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당시 거액인 2천만 달러 약 200억 원을 바쳐서 오늘의 명문인 스탠포드대학을 설립했습니다. 그리고 어려운 학생들을 돕는 일에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죽을 때 이런 유서를 남겼습니다. '나의 재산은 10원짜리 동전 하나 남기지 말고 청년 교육에 사용하라' 부활이 없으면 예수님도 부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부활하셨습니다. 분명히 부활은 있습니다. 이제 우리도 부활합니다.
▶프랑스에 야심에 찬 영웅이 있었습니다. 그는 기독교를 추종하는 이들이 전 세계적으로 수십 억 명이 되는 것을 알고 놀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종교를 하나 만들어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한 성직자를 찾아가서 말하기를 '나도 예수님처럼 종교를 하나 만들고 싶습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종교를 만들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 성직자는 정중하게 대답하기를 '한 가지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 앞에서 직접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십시오. 그리고 3 일 만에 살아나십시오. 그러면 기독교와 같은 위대한 종교를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그는 새로운 종교 만들기를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부활입니다.
▶전해오는 재미있는 설화 한 토막을 소개하겠습니다. 유대 요단강 계곡의 경사면에 세 그루의 나무가 서 있었습니다. 이들 나무는 저마다 나름대로의 소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나무는 예루살렘의 성전의 재목이 되고 싶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와서 경배하는 하나님 성전의 한 부분이 됨으로 저를 통하여 하나님께 크게 높이 찬양되기를 소원했습니다.
두 번째 나무는 바다로 가고 싶었습니다. 곧 큰배가 되어 많은 사람들을 태우고 온 세계로 두루 다니면서 소중히 여김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쓰임을 받기를 소원했습니다.
세 번째는 나무는 '나는 여기 남아서 높이 자라 하늘을 향해 가지를 쳐들고 있겠다. 그리하여 이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내 그늘에 앉아 쉬면서 하나님을 사모하게 해 주겠다'는 소원을 밝혔습니다.
세월이 많이 지나갔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고 싶어했던 첫 번째 나무는 찍혀서 베들레헴의 한 마구간의 작은 구유가 되어 나귀가 핥아먹는 먹이통이 되어 마구간 한 귀퉁이에 팽개쳐지는 슬픈 신세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 나무는 큰배가 되어 큰 바다로 나가고 싶었는데 서글프게도 찍히고 깎이어 조그마한 조각배가 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갈릴리 호수로 가게 되어 꾀죄죄한 어부들이나 올라타고 비린내나는 생선이나 싣고 다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뿐입니까? 일 없을 때에는 쓸모 없이 버려진 채 호숫가에서 따분한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세 번째 나무는 그 자리에 그냥 있고 싶어 한 그의 소원과는 달리 어느 날인가 웬 사람들이 와서 결국은 찍혀버렸고 그리고 다듬어져서 엉뚱하게도 저주받은 죄인들을 매달아 죽이는 형틀인 십자가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예수께서 만백성을 구원하시고자 만 왕의 왕으로 오시는 날, 베들레헴 말구유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나무였던 그 말구유가 결국은 더 할 수없이 큰 영광을 입은 것입니다. 다시 세월이 더 흘러 예수께서 갈릴리 호수에 밤이 맞도록 수고했지만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실패자 베드로에게 오셔서 그의 배를 빌려 복음을 전하신 뒤에 베드로에게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자 만선의 복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두 번째 나무였던 그 조각배가 주님께 강단을 드리는 뜻밖의 영광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3년쯤의 세월이 더 흘렀습니다. 세 번째 나무였던 그 십자가는 예수께서 못 박혀 달리심으로 길이길이 만백성의 추앙을 받는 거룩한 십자가가 되었답니다.
▶어떤 젊은 여인이 5년의 연애 끝에 결혼하여 부부가 되었습니다. 살다보니까 지극히 사소한 일로 부부싸움을 하고 더 살다보니까 서로를 실망하게 되어 결국에는 대판 싸우고 서로 헤어지자고 합의하여 이혼장에 도장을 찍어 가정병원에 제출했습니다. 재산도 공평하게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이들 사이에는 어린 딸 하나가 있었습니다. '이 딸을 누가 키웁니까?' 판사가 물자 '그 아이는 법적으로 제 자식이니 제가 키웁니다.' 남편이 말했습니다. 그러자 부인이 '아닙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한 자식은 바로 자랄 수가 없습니다. 법적으로는 남편의 자식이지만 성년이 될 때까지 제가 키우겠습니다.' 그러면 이 아이에게 선택권을 주십시다. 판사가 말합니다. '너희 아빠는 저 북쪽에서 살고, 너희 엄마는 남쪽에서 가서 산단다. 너는 엄마에게로 갈래, 아빠를 따라가서 살래?' 이 소리를 듣고 아이가 눈물을 주르르 흘리면서 말하기를 '나는 아빠 따라 북쪽에도 못 가고, 엄마 따라 남쪽에도 못 가요, 아저씨 우리 같이 살게 해 주세요!' 목석이 아닌 그 아빠도 그 엄마도 어린 딸의 말을 듣고 눈물이 핑 돕니다. 남편이 '이혼 소송을 취소하겠다'고 말합니다. 부인도 '저도 취소하겠습니다.' 결국 이 부부는 서로 화해를 했습니다. 딸이 중간에 화목의 다리를 놓아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므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목의 다리를 놓으셨습니다.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구원의 징검다리요, 하늘의 복이 내려오는 사닥다리입니다.
▶네덜란드의 유명한 화가 '램브란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장면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그는 먼저 예수님을 그린 다음 그 주변에 예수님을 죽이라고 소리치며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는데 동조하는 군중들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그 군중들 가운데 한 사람을 자기 얼굴로 그렸습니다. '이 군중 가운데 내가 있다. 내가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인 장본인이다.'라는 것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무릎 꿇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못 박았습니다. 내가 예수를 못 박는 이 무리들과 한패가 되었습니다.'하고 고백하고는 '나는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을 가지고 대성통곡을 했노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어느 날 3대 독자를 잃은 한 어머니가 석가모니에게 찾아와서 죽은 자기 아들을 살려달라고 애원을 했습니다. 석가모니는 하도 기가 차서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이런 조건을 걸었습니다.
'부인 내가 당신의 아들을 살려드리겠소. 그런데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부인이 저 동네에 들어가서 아무도 죽음의 고통을 당해 보지 아니한 집에서 겨자씨 하나를 구해 오시오' 그 부인은 한 가닥의 희망을 품고 이 집 저 집 모든 집을 다 찾아다니면서 죽음을 맞보지 않은 집에서 겨자씨 하나를 구해 오려 했으나 모든 노력이 헛수고였습니다. 다시 돌아와 '그런 겨자씨는 구할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하자 그 때 석가모니가 '그렇지요! 죽음의 비애란 모든 집, 모든 인생에게 다 임하는 것인데 그대의 아들이라고 왜 당하지 않겠습니까?' 석가모니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그도 무덤에 묻혀 있습니다. 사람은 죽어서 땅에 묻힙니다. 석가모니는 인도 능수 해안에 묻혀 있습니다. 마호멧은 사우디 아라비아의 메카에 묻혀 있습니다. 공자는 중국의 장평양에 묻혀 있습니다. 그들은 무덤에서 나오지 못했습니다. 거기에서 썩었고 흙이 되었습니다. 중국은 천안문 광장 한 쪽에 모택동 미이라를 안치하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구 소련은 붉은 광장 한 쪽에서 레닌의 미이라 시신을 보여주면서 국부라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예수님의 빈 무덤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오래 전에 영국의 웰링턴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프랑스의 나폴레옹 군대와 싸우기 위해 전선으로 출발을 했습니다. 그 당시 사랑하는 남편과 사랑하는 자식을 전쟁터로 보낸 사람들 뿐 아니라 런던과 모든 영국 국민들은 전쟁터에서 승전보가 날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워털루에서 서로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 왔습니다. 이 전쟁에서 '누가 이길 것인가? 질 것인가? 내 아들 내 남편은 무사할 수 있을까?' 답답하고 초조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전선에서 소식이 들려 왔습니다. '영국군이 나폴레옹 군대에 참패를 당했다'는 소식입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소식입니다. 이 슬픔의 소식은 온 런던시민들을 탄식의 도가니로 만들어 모두들 발을 동동 구르며 어찌할 줄을 몰랐습니다. 주식 값은 뚝 떨어졌습니다.
이렇게 절망의 깊은 밤을 보내고 난 다음날 새벽 전선에서 다른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웰링턴 장군의 군대가 참패를 한 것이고 아니고 나폴레옹 군대가 참패를 당했다'는 낭보입니다. 어제 전해 진 소식은 잘못 전달된 것입니다. 짙은 안개만큼이나 침울했던 런던은 갑자기 기쁨과 환희의 도시로 바뀌게 되었고 사람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소리를 지르며 함께 얼싸 안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절망의 소식이지만, 예수님의 부활 소식은 희망과 기쁨에 소식인줄 믿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죄 문제가 해결되고 그분의 부활소식은 영생의 메시지입니다.
▶아빠가 세상을 떠나 어린 아들 둘이 엄마랑 외롭게 사는 가정이 있었습니다. 아빠가 그립고 남편이 그리워 식탁 위에 아빠 사진을 걸어 놓았습니다. 아빠와 같이 식사하는 마음으로 식사시간마다 그 사진을 바라보며 밥을 먹었습니다. 엄마도 식사할 때마다 그 사진을 바라보고 남모르게 눈물지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루는 식사를 하려던 아들이 말하기를 '엄마! 아빠가 저 사진틀에만 있지 말고 여기 나와서 우리랑 같이 살면 좋겠어' 그 때 엄마가 눈물을 닦으며 대답하기를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나팔소리가 울리고 그 때 아빠가 사진틀에서 부활하여 나올 거야' 그리고 온 가족이 다시 울었습니다. 다시 꼭 볼 수 있다는 소망의 평안히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제16대 대통령 링컨이 젊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변호사 시절 주 의회 의원에 출마했으나 낙방했습니다. 다시 하원의원에 출마했으나 역시 낙방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몇 번 낙방을 거듭하자 링컨은 좌절과 절망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변 친구들은 링컨을 보면서 염려하기를 '저러다 링컨이 자살하는 건 아니냐?'며 친구들은 비상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낙선하던 날 링컨은 머리를 말끔히 깎고 목욕도 하고 고급 음식점에 들어가서 맛있는 음식도 먹었습니다. 그리고 길을 걸으며 자기가 자기에게 외치기를 '오늘 떨어졌어도 내일 다시 할 수 있다, 부활의 주님이 도우실 것이다' 링컨은 그 당시 자기 상황을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나는 지금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인생을 살고 있다. 나는 재기할 수 없을 것 만 같은 심정이다. 나는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있다'고 절망하던 중 성경을 읽다가 부활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성경을 읽고 그 속에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함께 계신 것을 믿고 용기를 가졌습니다. 그래서 링컨은 공화당에 입당하고 열심히 뛰어 공화당에서 대통령 후보 지명을 받아 대통령에 당선되었다고 그의 일대기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20세기 인도의 유명한 전도자 '선다 싱'에 얽힌 일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선다 싱이 길을 가다가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는 광경을 보고 무슨 일인가 궁금해서 사람들을 헤집고 들여다보니 수도승 한 사람이 팔을 쳐들고 앉아 있습니다. 자기 손으로 지은 죄가 커 스스로 그 손을 벌하는 것이랍니다. 그 모양이 하도 측은해서 선다 싱이 '수십 년을 그렇게 벌서본들 그 손이 깨끗해지겠소?' 그렇습니다. 손뿐 아니라 온몸을 매질한다 해서 새롭게 되지는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명상이니 수양이니 교양이니 하는 것'들로 옛사람이 새사람 되어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것이 결단코 아닙니다. 극기(克己)나 수도(修道)를 통해서 회심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말아야 합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옛사람이 십자가에 달려 온전히 함께 죽고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될 때, 바로 그 죽음에서부터 예수 생명의 부활이 내 안에 옵니다. 즉 내 자신이 '예수 화'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적 생명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의 또 다른 생명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 생명으로 사는 것입니다.
▶시카고 신학 대학교는 매년 '세례의 날'이라는 특별한 날을 가집니다. 이날은 학생들이 야외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강당에 모여 학교측이 초청한 유명인사로부터 강의를 듣게 됩니다. 어느 해인가 '폴 틸리히'라는 유명한 신학박사가 강사로 초청되었습니다. 그는 두 시간에 걸쳐 예수님의 부활은 거짓된 사실이라는 전제 하에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그들의 책을 인용하여 강의했습니다. 강의를 마친 후 질문 시간에 한 노인이 일어나 말하기를 '틸리히 박사님!'하고 부르고는 사과를 꺼내 한 입 베어 물고 아작아작 씹으면서 '간단한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또 사과를 베어먹기 시작하더니 '박사님이 말씀하신 책들을 읽어보지는 못했습니다만'하고는 또 사과를 먹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질문을 하는 도중에 계속해서 사과를 잡수시는지 이 노인의 파격적인 행동에 모든 사람이 의아한 표정으로 주목하자, 다시 노인은 '니이버나 하이데거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아는 바가 없지만'하더니 또 다시 사과를 아작아작 씹어 먹고 방금 다 먹은 사과의 꼭지를 높이 쳐들고서는 '박사님! 방금 제가 먹은 이 사과가 신가요, 단가요?'하고 물었습니다. 몹시 당황한 틸리히 박사는 잠시 멈칫하더니 '유감스럽게도 선생님이 드신 사과를 먹어 보지 못했기에 어떤 맛인지 말씀해드릴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이 노인은 그 남은 사과 꼭지를 가방 속으로 던지면서 '그렇다면 박사님은 우리 예수님도 맛보지 못하셨군요'라고 소리쳤습니다. 그곳에 모여있던 천 여 명이 사람들이 까르르 웃고 손뼉을 쳐대는 통에 강단은 삽시간에 유쾌한 소란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얼굴이 빨개진 틸리히 박사는 조용히 강단을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신학을 연구하는 신학박사라 할지라도 예수님을 만난 체험을 하지 못한 사람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합니다. 이는 거듭나지 못한 증거입니다. 안타깝게도 자유주의 신학자들 가운데 이런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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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카페」로뎀나무 원문보기 글쓴이: 카페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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