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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 구원론

에반젤(복음) 2020. 2. 22. 15:24



조직신학 구원론

 

구원론은 기독론에서 다룬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이 어떻게 우리들에게 적용되는가에 대해서 다룬다. 구원에 대해서 왜곡된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이 단순히 사후세계의 영원한 삶을 보장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구원이란 현재와 직접 연관되는 것이다. 사실 성경이 관심을 표명하는 대상은 사후세계가 아니라 현실세계이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서 천당 가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제로 성경은 별로 그 사실에 큰 관심을 두고 있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구원은 지금 현실의 개인과 공동체와 세상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변혁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우리는 경건주의의 영향으로 개인적인 구원의 중요성에는 민감하지만, 공동체적, 사회적 구원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 역시 성경적인 관심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개인적 구원에 최우선의 중요성을 부여하려 하지만, 사실 성경은 교회, 곧 공동체의 구원에 가장 큰 관심을 부여한다. 성경에 기록된 분량을 따라서 굳이 우선순위를 매긴다면, 공동체, 그리고 공동체 내에 속한 개인, 그리고 사회의 순서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주로 만나게 되는 전통적인 조직신학의 구원론은 구원이 현재의 것이라는 것을 밝히는 데에는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있지만, 아무래도 공동체적 구원의 중요성보다는 개인적 구원에 대해서 더욱 관심을 많이 보이고 있다. 교회론 역시 교회가 개인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느냐에 관심의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는 우리의 조직신학이 경건주의의 영향 아래 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인데, 우리는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 본다. 여하튼 여기서는 전통적인 조직신학의 틀을 따라서 구원론을 다루어 보기로 하겠다.

 

1. 성령의 인격과 사역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어떻게 우리에게 적용되는가?"의 질문에 대한 가장 간단하고 전체를 포괄하는 대답은 "성령의 사역에 의해서 된다"이다. 이렇게 구원론에서 성령에 대해서 다루기 때문에, 전통적 조직신학에서는 성령론이 따로 없고, 신론의 삼위일체론과 여기 구원론에서 다루게 된다.1) 여기서는 간단하게나마 성령의 인격과 사역(to be and to do)에 대해서 다루어 본다.

그런데, "성령에 대한 연구가 특별히 중요하지만, 이것은 또한 매우 어렵다. 이해는 대부분의 다른 교리들보다도 여기에서 종종 더 불완전하고 혼란스럽다. 이렇게 된 이유들 중에 우리가 아버지는 아들에 대해서 발견하는 것보다 성경에서 성령에 관하여 덜 명백한 계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존재한다. 아마도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성령의 사역의 큰 몫이 아들을 선포하고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에 기인하고 있는 것 같다(요 16:14). 다른 교리들과는 달리 성령에 대해서는 어떠한 체계적인 논의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상 유일하게 확대된 표현은 요한복음 14-16장에 있는 예수의 강화(講話)이다."2) 이외에도, 성령의 사역이 성부와 성자에 비해서 종속적인 위치에 있기에 그 본성과 영광이 동등되어 보이지 않는다는 점 등이 성령을 이해하는 데에 걸림돌로 존재해 왔다. 그렇기에 성령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논의는 아무래도 간단해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구원론 전체가 다루고 있는 내용이 바로 성령의 사역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적어도 그 사역에 대한 논의는 상당히 자세히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구원론을 성령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 성령의 인격

성령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에, 우리는 "성령은 이런 분이다"라고 간단명료하게 말하는 데에 상당한 어려움을 느끼게 된다. 그렇지만 여기서 일단 기본적으로 이해해야 할 것들만 열거해 보도록 한다. 우선 성령을 이해함에 있어서 가장 선행되어야 할 것은 성령은 인격이시며, 하나의 막연한 힘이 아니시라는 점이다. 요 16:13-14, 14:26에는 성령이 "그"로 표현되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이 인격이심을 가르치셨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성령께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3위로서, 성부와 성자 하나님께 우리가 드리는 영광과 존귀를 똑같이 돌려야 한다. 성령의 사역이 성부와 성자의 사역에 종속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사역의 위치에 있어서 결코 뒤지거나, 부수적인 것이 아님을 고백해야 한다. 사실 이러한 진리는 극히 신약적인 것으로, 구약에는 성령의 인격성이나, 삼위일체의 한 위로서의 엄위 등은 잘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에 대한 신앙은 기독교의 특징적인 고백이기도 한 것이다. 이 성령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 가운데 내주하시고 "나의 하나님"과 "우리의 하나님"이 되신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모세오경이 기록된 시대부터 약속되고, 실천되었던 것이지만, 성령께서 교회 가운데 내주하시게 된 이후로 더욱 강하게 실현되고,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될 것이다.

 

2) 성령의 충만3)

"성령의 충만" 또는 "성령의 세례"에 관한 문제는 상당히 커다란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으며,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다. 20세기에 들어와 이 문제 때문에 교단간에 격론이 벌어지기도 했으며, 또한, 한 교단 내에서도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논쟁을 벌여왔으며, 아직 그 논쟁은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분명한 것은, 이는 성경의 비유적 표현법임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령이 액체나 기체와 같이 표현되었다고 해서 성령의 존재가 원래 그러한 것은 아니다. 구약의 "하나님의 영"은 사실 신인동형론적인 표현에 의거한 이름이다. 히브리인들은 사람에게 "영"이 있다고 생각했으며, 구약의 하나님의 영이란 하나님의 손, 하나님의 눈, 하나님의 발 등의 표현과 같은 것이었다. 성경의 저자들은 하나님의 생명력이 사람에게 불어넣어졌다고 표현했으며, 사람에게 가득 찼다고 표현하였다. 이는 또한 하나님의 임재(얼굴)과 동일시되는 표현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이란 것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 그에 의해서 나타나는 현상이나 감정 등에 관심을 갖는 것은 성경적인 시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성령 세례 역시 마찬가지다. 성령 세례가 어떻게 오느냐에 대해서 많은 논쟁들이 오고갔지만, 실상 성령 세례란 말은 세례 요한이 자신의 물세례와 대비하여 사용한 표현법일 뿐이다. 요한은 그 표현에서 성령에 관심을 두었던 것이 아니라 세례에 관심을 두었던 것이다. 즉, 요한은 자기 세례가 완전한 것이 아니라 상징적인 것이어서 물로 세례를 주지만, 예수님께서는 진정 완전한 세례를 주실 것이기에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표현했던 것이다. 그런데 오순절파들은 이 성령세례를 강조하며, 또한 그 체험과 현상에 초점을 맞춤으로 인해 상당한 오류를 일으켰던 것도 사실이다. 특히 오순절파는 사도행전 2장에 성령을 받았던 제자들은 이미 그리스도를 믿고 회심한 이후였음을 지적하면서, 우리도 회심 이후에 주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성령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오순절은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그들과 함께 있던 자들의 삶 가운데 개인적인 사건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오순절은 옛 언약의 사역과 성령의 사역이 바뀌는 전환점이었다."4) 이 사건은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언약의 주가 되셔서 교회를 통하여 만물을 통치하게 되셨음을 선포하는 사건, 즉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를 현재 교회의 각 개인들에게 적용한다는 것은 성경해석상의 상당한 문제가 발생한다.

여기서는 이 논쟁에 대해 더이상 자세히 다룰 수 없기에, 기본적으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만을 제시하였다. 다만, "성령충만은 그리스도 충만이며, 또한 말씀충만이다"라는 것이 우리의 전통적 입장임을 알아둘 필요는 있다. 성령께서는 언제나 말씀과 함께(Cum verbo) 역사하신다(루터교는 말씀을 통하여Per verbum 만을 주장한다). 그리고 언제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로서 역사하신다. 그렇기에 말씀과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모습이 아닌 형태의 성령의 역사는 부정될 수밖에 없다.

 

3) 성령의 사역 - 보통 은혜(일반 은총)

성령의 사역은 크게 일반 사역과 특별 사역으로 나뉘는데, 이는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의 나눔과 같은 틀에 의한 구분으로서, 구원의 개념과 연관되어 있다. 사실 일반 계시는 성령의 일반 사역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성령은 택자들의 구원과 관련되지 않은 사역인 일반 사역과, 택자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시기 위한 특별 사역을 행하신다.

전통적 조직신학에서, 성령의 특별 사역이 바로 구원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사역을 다룰 때에는 일단 일반 사역만을 다루고, 구원론의 나머지는 모두 성령의 특별 사역이라고 보면 된다. 성령의 일반 사역은 일반 은총, 또는 보통 은혜라고도 불리며, 또는 일반 사역에 일반 은총이 포함되어 있다고 보기도 한다.

"보통 은혜론은 이 세상에는, 모든 복을 지닌 기독교적 삶 이외에, 구속적이지는 않지만 진, 선, 미의 특징을 보여주는 자연적 삶의 과정이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5) 이 세상이 완전히 타락하여 지옥과 같은 곳이 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일반 은총 때문이다. 이에 의해서 인간의 모든 법, 질서, 국가, 학문 등이 가능해질 수 있다. 땅은 물론 가시와 엉겅퀴를 내지만, 그래도 사람이 힘써 경작하면 그에 합당한 소산을 내어 사람들의 삶을 영위하게 한다. 사람의 마음은 모두 죄로 오염되어 있지만, 그 가운데에는 양심의 소리를 듣고 옳은 일을 하고자 하는 생각을 대부분 공유한다.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일반 은총의 결과이다. 이 일반 은총의 열매에는 1) 선고 집행의 유예, 2) 죄의 억제, 3) 진리, 도덕, 종교의 보존, 4) 외면적 선과 시민사회의 유지 5) 자연적 축복 등이 열거되어 왔다.

하지만 일반 은총, 또는 보통 은혜라는 개념은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의 구분과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기보다 인간적인 구별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그 죄악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베푸시고, 이들을 보존하기 원하신다. 그러나 그들을 모두 그리스도와의 언약관계로 부르시지는 않으셨는데, 이 부르심의 유무에 따라서 일반과 특별이 구분된다.

 

2. 구원의 서정(ordo salutis - 구원의 길)

 

구원론은 인간론의 서술 방법과 같이 순서적인 나열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론은 그 배열이 시간적 순서임에 비해서, 구원론은 시간적인 순서라기보다는 논리적 순서라는 것이 다르다. 이후에 제시되는 구원의 서정을 시간적 순서로 오해하게 되면 진리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상당한 오류가 발생한다. 그러므로 이는 구원의 여러 측면을 논리적으로 순서를 붙여 이해하고 있는 것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1) 전제: 예정

구원의 문제를 다룰 때에 우리는 예정을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 예정 교리는 우리 구원의 확실성을 보장하며, 이후에 논의될 하나님의 구원의 서정이 하나님의 의도와 열심히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선포하고 있다. 예정론에 대해서는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의 대립 뿐 아니라 신정통주의(Karl Barth)의 입장 등 여러 이견들이 있지만, 우리는 칼빈주의의 입장에 서 있다.6)

 

2) 신비적 연합

이후에 제시될 구원의 서정을 구슬로 비유한다면, 이 구슬들을 꿰는 실과 같은 것이 바로 신비적 연합이라고 할 수 있다. 신비적 연합이란, 간단히 말해서 택함을 입은 자들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한다. 갈 2:20에 언급한 대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자들이 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살아나는 것을 신비적 연합이라고 한다. 결국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신비적인 연합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성령의 중재로 가능하게 되는 것이며, 택자 각 개인이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연합함으로 말미암아 또한 교회의 다른 형제들과 연합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예정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전제로 하여 우리의 구원의 서정이 이루어진다. 사실 이후에 다루게 될 9가지의 구원의 서정은 모두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에 의해서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소명(부르심)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 가장 먼저 제시되는 것이 부르심이다. 이는 논리적으로는 예정 다음에 오는데,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에 의하면, 부르시기 전에 예정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셈이다. 하나님은 인간들을 구원에로 부르시며, 이 부르심은 보편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았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자들이 하나님께로 나아오게 마련인데, 우리는 이를 "효과적 부르심, 내적 소명"이라고 부른다. 이에 비해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부르심을 "외적 소명"이라고 부른다. 내적 소명은 성령께서 각 사람의 마음을 조명하셔서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를 알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참 구주이심을 알게 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4) 중생(거듭남) - 회심(돌이킴) - 신앙(믿음)

중생과 회심과 믿음은 하나의 사건의 세 가지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칼빈은 중생과 회심을 같은 것으로 보았다. 굳이 구별하자면, 같은 사건에 대해서 중생이란 하나님 편에서 본 것이고, 회심과 신앙이란 인간 편에서 본 것이라고 하면 될 것이다. 그 중에서도 회심이란 이전의 삶으로부터의 돌이킴인데, 그 돌이킴은 곧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며, 바로 그 하나님을 향함이 곧 믿음이다. 그런데 여기서 논리적 순서의 문제가 있다. 칼빈주의에서는 소명 이후에 중생이 처음으로 따라오게 된다. 그러나 알미니안은 회심이 중생보다 앞선다. "문제는 내부에서의 하나님의 중생의 사역 때문에 인간이 회심하느냐, 아니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회개와 믿음 때문에 개인을 중생시키시느냐에 관한 것이다."7) 즉, 이 중생-회심-신앙 사건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이지만, 이것이 하나님, 즉 성령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일임을 고백하기에 중생을 먼저 두게 된다. 그리고, 돌이키는 것과 하나님을 향하는 것은 또한 하나의 사건이지만, 논리의 순서로 보았을 때 돌이키는 것이 먼저이므로, 회심이 신앙에 앞서게 된다.

"중생에 있어서는 우리가 능동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이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 사람들에 관해 논할 때에도 요한은 말하기를,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3)라고 했는데, 여기서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을 가리키고 우리 인간의 의지로는 그렇게 태어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8) 중생은 "우리 안에서 영적인 생명을 일깨워 영적 죽음에서 영적 생명으로 옮기는 하나님의 행위"9)이다. 그리고, "이 정의에 따르면 중생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 이전에 온다고 이해하는 것이 당연하다. 사실 믿음으로 하나님께 응답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영적인 능력을 부여하는 것도 바로 이 하나님의 행위이다."10)

거듭난 자들은 지금까지의 죄악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의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게 된다. 이것이 바로 회심이요, 신앙이다. 이것은 지식, 승인, 그리고 개인적인 결심을 포함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에 대한 지식에 근거하지 않은 믿음은 맹목이요, 거짓일 뿐이다. 그것은 복음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단지 알고 이해할 뿐, 그것이 진리라고 승인하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회심-신앙이라 할 수 없다. 진정 구원을 얻는 회심과 신앙이 되기 위해서는, 알고, 승인할 뿐 아니라 실천하기로 결심하고 행동에 옮기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는 기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것이며, 자신의 삶을 완전히 그에게 의탁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진리에 대한 지식이 자라남에 따라 그 승인의 폭도 커지고, 또한 그리스도께 맡겨버릴 부분도 점점 더 커지는 것이다.  

 

5) 칭의(의롭다 함) - 수양(양자 됨)

칭의와 수양 역시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칭의는 법정적인 용어인 반면, 수양은 관계적인 용어이다. 그러나 주로 칭의를 먼저 말한다. 칭의는 신앙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2)을 보면, 칭의는 신앙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라는 논리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로 선포된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의 법적 지위가 죄인의 위치가 아니라 의인의 위치에 오르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수양도 칭의와 같이 신앙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에 의하여, 믿음에 의해서 양자됨이 이루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히브리적 개념에서는 의롭다 함과 특별한 관계에 들어감은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중생이나, 칭의에 비해서 수양 교리는 우리가 엄청난 특권을 누리고 있음을 가르쳐주고 있다.

 

6) 성화(거룩하게 됨) - 견인(이끌어 주심)

성화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결정적 성화이며, 또 하나는 점진적 성화이다. 결정적 성화란 중생과 함께 거룩한 존재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점진적 성화란 성도가 그 삶 가운데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 가며 거룩한 삶을 이루어 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성경은 "거룩하다"는 말을 통해서는 주로 결정적 성화를 말한다. 그러나, 바울 사도가 고전 9:27 등에서 말하는 것은 날마다 자신을 거룩한 존재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점진적 성화와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것이 바로 견인이다. 하나님께서는 점진적 성화의 과정을 겪는 자기 백성들을 놓지 않으시고 영화에 이르기까지 이끌어 주신다. 알미니안의 경우에는 이 견인의 교리가 확고하지 않다. 그렇다보니 자신의 구원이 늘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즉 구원의 확신이 없게 되는 것이다.

 

7) 영화(영광스럽게 됨)

구원의 서정에서 마지막은 영화로 끝난다. 즉 구원받은 무리들은 사후에 하나님 앞에 서서 영광 가운데 들어가게 되며, 최종 종말에는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게 된다. 많은 이들이 영화를 구원의 서정에 포함시키지 않는데, 이는 이것이 현재적인 것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롬 8:30에 의하면, 부름을 받아 칭의를 얻은 자들은 영화롭게 되었다. 이는 그 확실성을 나타낸 표현이면서 또한 구원받은 자들이 영광스러운 지위에 이미 올라있음을 선포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1) Millard J. Erickson은 이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느꼈는지 성령론을 간단하게나마 구원론에서 독립시켜서 다루고 있다. Millard J. Erickson, Christian Theology, 신경수 역, 복음주의 조직신학(하),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6), pp. 17-58 참조.

2) Ibid., p. 19.

3)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Wayne Grudem, Systematic Theology, 노진준 역, 조직신학(중), (서울: 도서출판 은성, 1996), pp. 421-459를 참조하라.

4) Ibid., p. 429.

5) Louis Berkhof, Systematic Theology, 권수경, 이상원 역, 벌코프 조직신학(하), (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2), p. 678.

6) 이러한 여러 이견들에 대해서는 Millard J. Erickson, op.cit., pp. 83-108을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7) Millard J. Erickson., op.cit., p. 112. Erickson은 회심이 중생에 앞선다는 알미니안적 입장을 취한다. 즉, 논리적으로는 중생이 앞서게 되겠지만, 성경적인 시각으로 볼 때에는 회개한 자가 중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8) Wayne Grudem, op.cit., pp. 313-314.

9) Ibid., p. 318.

10) Ibid. Grudem은 회심과 신앙을 한꺼번에 다루는데, 이렇게 중생이 회심-신앙에 비해서 논리적으로 먼저 다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역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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