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설교를 다시 회복하십시오
알리스테어 벡(Alistair Begg) 목사는 고향인 스코틀랜드에서 두 교회를 섬기다가 1983년에 미국으로 이주했으며, 이후 현재까지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 교외에 위치한 파크사이드 교회를 담임하고 있다. 벡 목사는 전국 라디오 방송망을 통한 사역에도 참여하고 있으며 The Hand of God외 여러권의 저서가 있다. 이 대담에는 벡 목사가 권해 준 벡 목사의 저서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라(Preaching God's Glory)가 참고되었다.
[질문]
목사님은 어떻게 설교자로 부름을 받게 되셨습니까? 한국교회 독자들을 위해 목사님의 신앙적 배경과 영향받은 분들에 대해 간단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답변]
저는 소년 시절에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했고, 목사님들과 선교사님들이 저희 집으로 빈번하게 찾아오시는 환경에서 자라났습니다. 그분들은 늘 저에게 “너도 언젠가는 목회자가 될 것이다”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목사가 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법률가가 되려고 스무살 때 노팅엄 대학에 입학했는데, 그때 갑자기 제가 삶에서 바라던 것들이 너무나 자기중심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후로 제가 버스를 타고 어디를 가거나 공원에서 산책을 할 때마다 그런 생각들이 제 마음 속에 밀물처럼 몰려들곤 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는 네가 너 자신이 아니라 나를 섬기기를 원한단다”라고 말씀하시는 것만 같았습니다. 결국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여하튼 그 말씀을 따라 저는 법대 공부를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와서 직장을 구했고, 런던 바이블 칼리지(London Bible College)에 지원을 했습니다. 제가 학교를 다니는 동안 종종 학생들 앞에서 설교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학생들이 모두다 제 설교를 경청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긴장이 되기도 했지만 저에게는 소중한 경험들이었습니다. 저는 아주 진지하게 이 경험들에 대해서 생각해보았고, 제게 설교의 열정이 있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문인지 런던 바이블 칼리지를 다니는 동안 그래함 스크로지(Graham Scroggie) 목사님과 시들로우 백스터(Sidlow Baxter) 목사님, 브라이언 레드패스(Brian Redpath) 목사님 등이 계신 에딘버러의 샬롯 교회에서 저에게 함께 사역하자는 초청이 들어왔고, 데렉 프라임(Derek Prime) 목사님이 담임목사로 계시는 교회에서 목회자 후보생으로서 사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프라임 목사님은 목회자 후보생이던 저에게 당신 밑에서 2년동안 훈련받을 기회를 주시고 저의 멘토(mentor:조언자)가 되어주셨습니다.
제가 처음 샬롯 교회에 갔을때, 그곳 목사님들이 저에게 무엇이라고 하시는가 하면, “우리는 형제님을 위해 기도하고 생각하고 관찰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형제님을 목회 사역으로 부르셨다는 생각이 들면 안수를 해드리지요”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저에게 내적인 소명감은 있었는데, 샬롯 교회에 가서 객관적으로도 장로님들과 회중의 승인을 받게 되었던 것이지요. 어쨌든 이 두 가지가 확인되자 저에게도 정식 목회자로서의 사역이 맡겨졌는데, 그때 제 나이가 24살이었고 지금은 마흔 여덟살이니까 그날 이후로 24년간 이 설교자의 길을 걸어온 셈이네요.
저는 제가 어릴적에 영향받은 목회자는 에릭 알렉산더(Eric Alexander) 목사님이었고, 런던에 위치한 세인트 헬렌스 비숍스 게이트 교회의 딕 루카스(Dick Lucas) 목사님이나 마틴 로이드 존스(Lloyd Jones) 목사님 같은 분들의 설교을 통해 영향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아는 분들 중에서는 데렉 프라임 목사님이 가장 뛰어난 설교자인 것 같습니다. 문제는 그분의 모국어가 웨일즈어였기 때문에, 프라임 목사님의 웨일즈어 설교를 듣지 못한 사람은 프라임 목사님 설교의 진수를 듣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질문]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설교도 들어보았다고 하셨는데, 그분의 설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답변]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경우 그분의 설교를 듣고 있으면, 하나님의 손길이 목사님을 강권하셔서 청중들을 그리스도께로 집중시키는 어떤 힘이 느껴집니다. 설교하는 로이드 존스 목사님에게는 전혀 관심이 모아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설교를 들은 청중들은 “하나님은 정말 놀라운 분이야!”라고 말하지, “로이드 존스 목사님 정말 대단하지 않니?”라고 말하지 않게 됩니다.
누가 한 말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설교 방법론 중에 “그리스도의 위대함과 설교자의 총명함을 동시에 강조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청중의 관심이 우리에게 쏠린다는 것은 예수님이 청중들이 관심권 밖으로 멀어지고 있다는 뜻이라고 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설교자가 느껴야 할 이러한 부담과 책임 그리고 이러한 특권을 철저하게 인식하시고 청중에게도 그것을 그대로 전달하신 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분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강연을 한 것이 아니라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무언가가 그분의 영혼을 사로잡았고, 그분은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성경을 오늘날의 문제들에 적용하셨는데, 그분은 성경이 우리들의 매일의 삶의 필요와 얼마나 깊이 연관되어 있는지를 다시금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진정으로 예언자적인 사역을 하셨다고 저는 봅니다. 그분은 정말 설교에 헌신하셨습니다. 그분의 설교는 인간과 인간의 필요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광을 출발점으로 삼는 설교였습니다.
설교 기법으로 말하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시사적인 화제를 먼저 꺼내고 성경 본문으로 연결해 들어가는 방법을 종종 사용하셨는데, 그런 방법론에는 의학을 공부하신 영향이 배어있는 것 같습니다. 즉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본문 접근법은 일종의 진찰법과 같습니다. “지금 상태는 이렇습니다. 이렇게 설명드릴 수 있겠군요. 다르게 말하면 이렇게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또 다른 설명도 가능하지요”라는 식으로 우선은 현 상태에 대해 말해줍니다. 그런다음 그분은 이런 설명들이 얼마나 빈약한 것인지를 청중들에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성경으로 이끌어갑니다. “성경은 이렇게 설명합니다”라는 것이지요. 정말 단순하지만 아주 심오한 설교입니다.
[질문]
목사님은 미국내 강해설교 세미나의 강사로 활동하실 뿐 아니라, 목회자를 초청하여 강해설교 세미나를 여실 정도로 설교를 대단히 중요시해 오셨는데요, 목사님께서 설교를 평생 사역의 중심으로 생각하게 된 이유가 무엇때문이었습니까?
[답변]
제가 설교를 제 평생 사역의 중심으로 생각하게 된 데에는 무엇보다도 스코틀랜드에서 발달된 목회 방식의 영향이 컸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원로 목사님들의 설교를 많이 들었습니다. 훌륭하고 마음에 와 닿는 설교들을 많이 들었지요. 좀 전에 말씀드린 대로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설교도 들었고 설교집도 읽었습니다. 저는 목회자가 설교자로서의 사명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 결과 명실상부하게 설교다운 설교를 할 때, 그 교회에 어떤 역사가 일어나는가를 똑똑히 보아왔습니다.
제가 설교를 평생 사역의 중심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진리를 전파할 방법으로 무엇보다도 설교(preaching)를 택하셨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독생자를 설교자로 보내주셨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더군요.
마가복음의 처음 부분을 보면 예수님께서 모든 병자들을 고치신 후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오는 장면이 나옵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아마도 “선생님은 너무나 훌륭한 일을 하고 계시는군요. 아주 뜻깊은 저녁 시간이 되었습니다”라는 식으로 예수님께 인사하며 말을 걸어왔겠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가까운 다른 마을로 가자. 나는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to preach the gospel) 그곳에 가야 되겠다. 그것이 내가 온 이유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례들과 제자들이 보여준 가르침의 방법론 및 방향을 보면 모범적인 복음 전도와 모범적인 제자 양육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복음 전도 및 제자 양육의 핵심은 ‘설교’에 있었습니다. 설교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진리를 전달해주는 것이 핵심이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저는 삶을 바꾸어 놓을만한 능력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종종 전화번호를 안내하는 사람 정도의 열정도 없이 설교하는 이들을 볼 때 너무나 안타까움을 가집니다.
[질문]
그럼 목사님은 설교를 무엇이라고 정의하십니까?
J. I. 패커의 말처럼 설교란 ‘본문이 말하도록 하는 것’(letting texts talk)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선포하기만 하면 거기에서 능력이 나온다고 저는 믿습니다. 리차드 백스터는 목회자가 해야할 가장 중요한 일을 바로 ‘설교’라고 꼽으면서, 동료 목회자들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우리는 모든 부분에서 진지하고 성실하고 열정적으로 사역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지금 보다도 더 많은 기술과 더 훌륭한 생활과 더 많은 열정을 이 일에 투입해야 합니다. 성도들 앞에 서서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메시지나 저주의 메시지를 구세주 예수의 이름으로 전한다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아무리 무식한 성도들이라 해도 이해할 수 있도록 평이하게, 아무리 메마른 심령이라도 느낌을 가질 수 있도록 진지하게, 아무리 반대를 일삼는 트집쟁이라도 침묵하도록 설득력 있게 메시지를 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즉 설교란 단순히 학식이 많은 사람이 나와서 자기 주장을 펴는 연설이 아니라, 신적인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설교라는 방법을 통해서, 그리고 설교자 한 사람의 삶 전체를 통해서 그분의 진리를 오늘날 전달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존 칼빈은 설교 가운데 나타나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입과 혀를 정결케 하셔서 당신을 섬기도록 하시고 그것을 통해 당신의 음성을 들려주신다. 하나님이 그들의 수고를 축복하기 원하실 때면 언제든지 거기서 나오는 가르침들이 효력을 발휘하도록 성령의 능력을 베풀어주신다. 죽음을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영원한 생명을 전달하는 도구가 된다”
저는 이 말에서 엿볼 수 있듯이 우리 설교자의 사명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그리고 설교자가 자만에 빠지지 말아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을 강해하는 설교자는 성경 본문에 복종하고 그 말씀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강해 설교자는 운율이나 심상을 이용해서 청중들을 감동시키는 시인이나, 아직 발표되지 않은 원고를 가져와서 읽는 작가가 결코 아닙니다. 설교자는 천국의 능력과 권위에 힘입어 말씀을 선포하는 전달자(herald)입니다.
제가 몇 년 전에 홍콩에서 열린 집회에서 설교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열린 집회였는데, 그곳의 강대상은 본래 회중석 보다 180cm 정도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는데, 주최측에서 강대상이 회중석과 같은 높이에 있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해서 원래의 강대상을 치워버리고, 그 대신 설교자가 말씀을 전하는 동안 성경을 놓을만한 보면대를 단 아래에 하나 준비해 놓았습니다.
그 홍콩 집회에 함께 참석한 강사 분들 중에 처음 보는 온화한 인상의 노인 목사님 한 분이 계셨는데, 그분이 바로 저와 파트너가 되어 매일 아침 설교를 맡게 된 분이셨습니다. 어느 날 아침은 내가 먼저 했고 또 다른 날은 그분이 먼저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목사님이 설교를 시작할 때면 그분은 그 작은 보면대가 움직이는데도 방해가 되고 사람들에게 ‘설교’ 듣는다는 인상을 준다면서, 제일 먼저 그것을 들어서 옆으로 치워놓곤 하셨습니다. 즉 그분은 자신이 하는 것은 설교라기 보다는 ‘이야기’이고, 따라서 듣는 이들도 긴장을 풀고 자신의 대화식 이야기 속에서 무언가 얻어갔으면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설교를 할 차례가 되면, 항상 제일 먼저 그 보면대를 다시 제자리에 갖다 놓고 설교를 하곤 했습니다. 닷새 동안 내내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까 회중들도 웃음을 터뜨렸지요. 저는 항상 보면대를 사용했고 내 파트너는 항상 그것을 치워버렸으니까요.
그러나 그 주간이 끝나기 전에 두 가지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중 하나는 내가 보면대를 사용하는 이유에 대해 청중들에게 설명을 해준 일이었습니다. 내 설명의 요지는, 내가 매번 보면대를 제자리에 가져다 놓는 이유는 단순히 성경을 놓을 자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놓여져 있는 강대상이 마땅히 예배당의 중심에 놓여져야 한다는 그 상징성을 버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만약 설교자가 넘어지거나 사라져버려도 성도들은 예배의 중심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을 보게 되지 않겠느냐고, 그리고 그 중심이란 바로 성경이 아니겠느냐고 설명했었습니다. 물론 제 파트너는 이것을 자신에 대한 비난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다음에 일어난 사건이 그것을 말해주었습니다.
그로부터 하루 이틀이 지난 후 그 목사님이 저에게 털어놓기를, 자신이 설교를 하기는 하지만 어떤 진정한 열정이나 능력은 이미 잃어버렸다고 고백했습니다. 나이도 적은 내가 노령의 목사님이 자신의 마음을 열어놓고 식어버린 열정에 대해 회한의 눈물을 흘리면서 고백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아주 민망하였습니다. 물론 그분이 설교할 때마다 강대상을 옆으로 치워놓던 것이 바로 성경의 권위와 능력을 확신하지 못하는 흔들리는 마음 때문이었다고 규정해버리는 것은 너무 단순한 생각일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분이 강대상을 치운 것이 단순한 스타일이나 개인적인 기호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사실 우리 교회를 포함해서 오늘날 교회들의 건축 양식을 보고 있으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교회는 하나님을 만나러 오는 곳이 아니라, 사람의 말을 들으러 오는 곳이라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뛰어난 웅변술을 감상하기 위해서(혹은 뛰어난 웅변술이 없다는 것을 비판하기 위해서) 교회에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기 위하여 교회에 모이는 것입니다. 이것을 먼저 우리 설교자들이 인식하고 기억해야 하며, 또한 청중들도 인식하고 기억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우리 설교자들의 엄숙한 의무라고 저는 믿습니다. 즉 설교자 자신이 먼저 설교에 대한 잘못된 태도를 바꾸어야 합니다.
제가 설교를 평생 사역의 중심으로
생각한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진리를 전파할
방법으로 설교를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질문]
오늘날 강해설교가 약화되고 있는 이유를 설교에 대한 잘못된 태도라고 하셨는데, 목사님께서 보실 때 오늘날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잘못된 설교자의 유형을 든다면 어떤 유형이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답변]
저는 잘못된 설교자의 모습을 대략 네가지 정도로 말씀드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잘못된 설교자 네 가지
1.첫째는 ‘응원단장 같은 설교자’입니다. 성도들은 이런 설교자를 매우 선호하고 환영하는 듯 합니다. 그 이유는 이들의 설교를 듣고 있으면, 본문의 맥락과 상관없이 무조건 긍정적인 신념과 용기를 불어 넣어주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성도들이 많이 웃고, 무언가 확신을 받고, 남에게도 그 확신을 나누어주며, 교회에 올 때보다 자신감을 얻어서 교회를 나가면 그 주일 예배는 훌륭한 예배라고 간주합니다. 이런 설교자들은 성경 공부를 소그룹 활동이나 개인 숙제로 넘겨버립니다. 이들은 설교자의 사명을 성도들의 ‘기를 살려주는 것’이고, 교회문을 나서자마자 성도들을 기다리고 있는 또 한 주간의 험난한 삶에 맞서 싸울 준비를 시켜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도들이 하나님 말씀의 진리를 제대로 깨달았는지, 임재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무릎을 꿇고 돌아가는 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 밖의 일로 던져 버립니다.
2.두번째 많이 나타나는 잘못된 설교자 유형은 ‘마술사 같은 설교자’입니다. 목회자는 설교 후에 “그 말씀에서 저런 의미를 찾아내시다니 우리 목사님 정말 대단하지 않아!”라는 식의 말들이 많이 나오는 것을 기대하거나 자꾸 들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이런 유형의 설교자는 본문의 정확한 의미를 그 맥락 속에서 찾아내기 위해 분투하며, 본문의 의미를 찾아서 그것을 적용하는데 힘쓰기 보다 신기한 말만 만들어내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치 손바닥에 있는 금화를 비벼서 카나리아를 만들고, 코트 소매에서 금붕어가 너댓 마리씩 헤엄치고 있는 어항을 꺼내서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재간 좋은 마술사들처럼 설교를 하려고 할뿐입니다.
3.세번째 유형의 설교자는 ‘이야기꾼 같은 설교자’입니다. 이런 설교자는 모든 성도들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하지 성경 본문 강해를 별로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 강해 같은 어려운 일은 태만히 하면서 이야기 기술을 개발하는 일에만 신경을 씁니다. 물론 예수님도 이야기를 가르침의 방법으로 쓰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비유들은 ‘천국의 의미를 지상의 이야기로 표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땅의 이야기로서도 쓸모가 없고 천국의 의미를 담고 있지도 않은 그런 재담(이야기)만을 남발하는 오늘날의 설교자들은 예수님을 핑계로 삼아선 안될 것입니다.
4.넷째 유형은 ‘연예인 같은 설교자’입니다. 오늘날 청중들은 교회에 올 때, 설교자를 그들과 같은 예배자이며 자신이 받은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으로 보기보다는, 예배에서 순서 하나를 맡아서 성도들을 즐겁게 해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게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설교자가 자기 차례가 돌아올 때까지는 ‘무대 뒤쪽에’ 대기하고 있다가 순서가 되면 나와서 자신들을 재미있게 해주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런 연예인 같은 설교자들이 불순한 동기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과연 그런 식의 행동이 옳은 것인가 하는 질문은 던지고 싶습니다. 그런 설교의 분위기가 되면 당연히 회중들은 의자 깊숙히 자리를 잡고 앉아 긴장이 풀린 상태에서 강대상에서 벌어지는 공연을 감상하는 식이 되어버린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즉 “주여, 말씀하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라는 마음 자세는 예배에서 점점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질문]
그럼 왜 교회안에서 잘못된 설교자의 모델들이 점점 많아지는 반면, 바른 강해설교자들은 찾아보기가 어렵습니까? 강해설교자들이 사라지고 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답변]
저는 두가지의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이 설교로 부르신 뜻을 저버리고 오늘날의 문화가 요구하는 대로 설교의 방향을 전환하고 있는 첫 번째 이유는 설교자 자신이 성경에 대한 확신도 없고 엉뚱한 문제들에 골몰해 있기 때문입니다. 즉 강해 설교의 부재는 성경의 권위와 완전성에 대한 확신이 침식당하고 있는 현실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성경을 무시하고 폄하하고 있으며 본래 성경의 뜻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온갖 ‘이야기’를 하기 위한 도입부 정도로만 성경을 이용합니다. 소위 복음주의적이라고 자처하는 교회들에 가서 예배를 드려 보면, 설교 시간에 성경을 읽거나 성경에 대해 언급하기는 해도 뜻을 잘못 말하거나 엉뚱한 부분을 강조하기 때문에, 설교 안에서 성경의 영향력이 미미해 지는 경우가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 결과 설교자나 회중들이나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의 엄숙한 권위 앞에 경배하려는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게 됩니다.
우리는 불확실하고 불분명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유행인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확신을 주거나 권위가 있는 사람이나 그러한 대상에 대해서는 오히려 불신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들은 이러한 문화적인 환경에 대해 압박감을 느낀 나머지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명하신 메시지보다는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설교하게 될 위험이 너무도 많이 있기 때문에 점점 강해설교자들이 세워지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 권위에 대한 불확신의 결과 중 하나는 목회자들이 심리학 이론에 집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되면 다시 성경에 대한 확신을 약화시키는 악순환의 고리를 강화시키게 됩니다. 인간이 처한 근본적인 곤경을 자존심 부족의 문제로 규정해버리게 되면, 사람들은 구세주를 만나기 위해 십자가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심리학자를 만나기 위해 상담실 의자에 앉을 것입니다.
강해설교가 오늘날 교회 안에서 약화되고 있는 두 번째 이유는 불행하게도 설교자들이 모범으로 삼을만한 뛰어난 강해설교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강해설교를 들을 기회가 점점 줄어들고 있으며, 심지어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설교자로 세워지고 있다고 저는 봅니다. 그 결과 신학대학을 나와서 이제 막 목회 현장에 접어든 젊은 목회자들은 대부분 마케팅을 활용한 극적인 성공담에 더 매료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마케팅적인 목회가 따라야 할 모범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지만, 불행하게도 그러한 성공담의 주인공들 중에서 성경에 대해 강해적 접근을 하는 목회자들은 매우 드물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그런 목회자들은 설교에서 오늘날의 문화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대단히 필요한 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출발점을 그렇게 잡으면 성경이 아니라 문화가 우리의 설교를 좌지우지하게 될 수도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와는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는 설교자들도 똑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저는 봅니다. 즉 성경 강해에 착실하게 전념하고 있기는 하지만 본문 속에 너무 깊이 파묻혀 버린 나머지 자신이 복음을 선포할 사역지로 부르심을 받은 이 시대의 문화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방향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존 스토트(John Stott)는 성경 본문이라는 섬에서 화살을 쏘기는 하지만 현대 문화라는 또 다른 섬을 적중시키지는 못하는 사람들을 비유로 든 일이 있는데, 이런 설교자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쏜 화살은 곧바로 하늘로 올라가서 다시 그들의 머리 위로 떨어집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한 마음으로 신실하게 공부하면서도 자신들의 ‘체계’(system) 안에 갇혀 있습니다. 때문에 성경신학과 현대문화라는 두가지 지평을 융합 할 때 어떤 효과를 거둘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질문]
목사님께서 이해하시는 강해설교의 원리들에 대해서도 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답변]
강해 설교는 언제나 성경 본문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 강해설교의 첫째 원리입니다. 이것은 설교를 시작할 때마다 반드시 “오늘 본문 말씀은...”이라는 말을 넣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최근에 일어난 어떤 사건에 대해서 말하거나 유행가의 한 구절을 읊으면서 설교를 시작해도 아무 상관이 없지만 설교의 정신만은 성경 본문에 기초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를 다시 말하면, 설교를 통해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사상이나 좋은 예화를 먼저 정해 놓은 다음, 거기에 맞는 성경 구절을 찾아낸 것은 절대 강해 설교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단순히 성경 본문에 대한 주석들을 모아놓는다고 해서 강해 설교가 되는 것이 아니며, 본문에 나오는 단어들을 연구하고 거기에 몇 가지 예화를 섞어서 느슨하게 묶어놓는다고 강해 설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본문에서 교리적인 부분을 찾아내서 가르쳐주는 것이 강해 설교일 것이라는 생각도 아예 접어두어야 합니다. 강해 설교는, 이와는 반대로 성경 자체에서 시작해서 그 본문이 설교의 형식과 내용을 규정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강해 설교를 여러 가지 설교 방법론(제목 설교, 헌신 설교, 전도 설교, 본문 설교, 변증적 설교, 예언적 설교, 강해 설교)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설교의 본질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이해하는 강해설교의 두 번째 원리는 본문을 재해석하는 것입니다. 존 스토트는 「두 세계 사이에서 : 20세기의 설교 기술」(Between Two Worlds: The Art of Preaching in the Twentieth Century)에서 시종일관 이런 생각을 전개하는데, 설교자가 성경 본문을 잘 주석하고서도, 정작 설교에서는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인가?”라는 청중들의 마음의 질문에는 아무런 답도 못주는 설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청중들이 에스라의 메시지를 듣기는 했지만 만약 에스라가 성경 본문을 당시의 시대 상황과 연결해주지 못했다면 백성들이 초막을 짓는 일까지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지요. 즉 진정한 성경강해에는 어떤 예언적인 차원이 있게 마련이어서, 그 말씀을 들은 성도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게 되고,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해서 잘 알고 하시는 말씀인 것 같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옛 시대의 언어를 성도들의 현재 경험에 맞추어 재해석 해주지도 않은 채 성도들에게 모든 것을 맡겨버리는 것은 설교자의 직무유기’라는 어느 스코틀랜드 설교자의 경고를 명심해야 합니다. 본문에 대한 재해석의 작업은 설교자의 임무이지 성도들의 임무가 아닙니다. 세번째 강해 설교의 원리는 1세기를 사는 고린도교회에 보내진 서신이 21세기 미국의 클리블랜드에서 살고 있는 회중들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를 성도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1세기에 고린도교회에 서신을 보낸 목적을 알아내기도 전에 본문을 클리블랜드의 상황에 적용하려고 서두르는 것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히브리서 13장 8절(“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에 대해서 강해를 한다면, 먼저 본문의 의미를 그 본래 문맥 안에서 충분히 밝혀준 다음에 변개치 아니하시는 예수님을 믿으면 지금 성도들의 삶에 어떤 유익이 있는지를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성경에 대한 올바른 해석법을 가르쳐주고자 한다면 먼저 7절과 9절 사이에 왜 이같은 말씀이 나와야만 했는가를 이해시켜 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 작업을 하다보면 본문을 문맥으로부터 떼어내어 설명하거나 단순히 우리의 상황과 관련지어 조명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넓게 주변 본문의 의미를 염두에 두고 해석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히브리서 13장 8절의 경우에는 그리스도의 영원한 제사장직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적용 원리만 찾으려고 할 때 본문의 핵심을 놓치게 된다는 뜻이며, 본문의 핵심을 놓친다는 것은 우리와 함께 성경을 공부하는 성도들에게 영적인 피해를 입히는 일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질문]
그럼 실제적으로 목사님께서는 어떻게 설교를 준비하시는지 좀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답변]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하나 있는데, 우리 주변에는 뛰어난 기억력을 가진 목회자들도 있고 컴퓨터 같은 기계들을 전문가 못지 않게 다룰 줄 아는 목회자들도 있으며, 아직도 연필로 설교문을 작성하는 목회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를 준비하는 모든 이에게 공통된 것이 한 가지 있어야 한다면, 무릎을 꿇고 성경 본문을 대해야한다는 사실입니다. 즉 설교를 준비할 때 우리 마음이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설교 준비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저는 종종 나의 설교 준비 방법론에 대해서 간략하게 소개해달라는 부탁을 받을 때마다 내가신학생이던 시절에 어느 원로 목사님에게서 배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원칙으로 답변을 대신하곤 합니다.
첫째는 설교하려고 하는 본문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즉 설교를 준비할 때는 본문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른다는 자세로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본문 연구를 다 마쳤는데도 확실하게 아는 것이 없다면 그것은 결코 우리가 바라는 상황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안다는 듯이 교만한 생각을 품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세월이 지날수록 좀 더 많은 본문에 대한 좀 더 깊은 이해가 우리 안에 축적되리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을 대할 때마다 기대하지 못했던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되리라는 기대를 품는 마음의 훈련을 한다면 설교 준비에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런 훈련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사고의 길을 열고 이전에는 알지 못하던 창조적인 시각으로 설교 본문에 접근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럴 때면 저는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을 전부 노트에 적어 봅니다. 유사한 구절도 좋고 설교 때 사용할 수 있는 예화도 좋고 본문에서 이해가 안되는 부분도 좋고 시나 찬송가의 한 구절도 좋습니다. 자연스럽게 본문을 요약해 보는 것도 좋습니다. 이것은 설교 준비의 첫 단계이므로 이때 생각한 것 중에서 실제 설교에 반영되는 것은 많지 않겠지만 그런 것은 관계없습니다. 단 5분 동안만이라도 우리는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고 성도들에게 보여줄 것도 없다는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럴 때 우리는 겸손한 자세로 본문을 대할 수 있게될 것입니다.
두 번째는 관련 자료를 충분히 읽으라는 것입니다. 저는 우선적으로는 헬라어 신약 성경을 읽습니다. 그리고는 단순히 신앙적인 것 말고 학문적인 주석을 담고 있는 좋은 주석서를 읽으면서 본문의 구조와 역사적인 맥락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받습니다. 특히 설교 본문을 읽으면서 도움이 될만한 주석집이나 자료들도 많이 참고합니다. 하지만 이런 자료들에 얽매이거나 이런 자료들이 제공해주는 통찰력에 만족하여 스스로 본문의 숨겨진 의미를 발견하고 창조적으로 해석하는 작업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그같은 위험에 빠지지 않는 한도 내에서라면 좋은 자료들을 유용하게 활용하는 방법을 익혀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목회자는 규칙적이고 광범위한 독서를 해야 합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가 일상 가운데 늘 가까이 하고 자주 보아야 할 책들이 있습니다. 리차드 백스터의 「개신교 목사」(The Reformed Pastor), 어거스틴의 「고백록」(Confessions), 읽기가 쉽지는 않지만 칼빈의 「기독교 강요」(Institutes) 등이 그런 책들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저는 전기문을 읽으면서 많은 도움을 얻곤 하는데, 특히 아놀드 댈리모어(Arnold Dallimore)가 쓴 조지 휫필드 전기 중에서 최소한 제1권과, 두 권으로 나온 로이드 존스의 전기는 모든 목회자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제가 읽은 일반 서적으로는 닐 포스트맨(Neal Postman)의 「죽을 때까지 일하기」(Using Ourselves to Death)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포스트맨이 쓴 다른 책으로는 「18세기로 다리놓기」(Building a Bridge to the Eighteenth Century)가 있지요. 그는 과거가 우리의 미래를 발전시킨다고 주장합니다. 계몽주의는 아주 훌륭한 이론이었으며, 지금은 포스트모던 시대이지만 계몽주의의 원리가 오늘날의 혼돈 보다 우리에게 더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여하튼 폭넓게 읽어야 합니다.
마지막은 뜨겁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강단에 빙산이 있는데, 회중석에서 불길이
일어나기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셋째로 그리고 나서는 명료한 원고를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의 능력을 힘입는 것이지만, 막힘이 없이 성도들에게 은혜를 끼치는 설교를 하기 위해서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을 하나 꼽으라면 연구한 내용을 세심하게 구성해내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단에서 얼마나 자유자재로 메시지를 전달하는가는 본문에 대한 연구 결과들을 얼마나 조직적으로 구성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제임스 스튜어트(James S. Stewart)는 자신이 설교를 잘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염려 끝에 조셉 파커 박사에게 상담을 의뢰한 젊은 목회자의 이야기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그 젊은 목회자는 ‘자신이 설교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성도들의 반응이 무감각하다’는 것입니다. 파커 박사는 일단 그 젊은 목회자에게 “저를 성도라고 생각하시고 지금 한 번 설교를 해보십시오”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젊은 목회자는 떨면서도 여하튼 파커 박사의 말대로 했습니다. 설교가 끝나자 파커 박사는 그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하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젊은 목사님, 나에게 솔직하게 말해달라고 하셨죠. 무엇이 문제인지를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설교하는 30분 내내 목사님은 목사님 머리 속에 있는 생각을 끄집어내려고만 하셨지 그것을 제 머리 속에 넣어주시려는 노력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배에서 설교를 하기 전에 충분한 시간을 들여 생각을 검토하고, 생각뿐만 아니라 설교 원고에 쓴 문장이나 문단, 관련 어구까지 살펴본다면 고칠 부분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충분한 수정 작업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즉석에서 설교 내용을 만들어 가면서 설교를 하게 되면 성도들은 반드시 그것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설교를 시작할 때 앞으로 전개될 내용을 대강 소개해주는 것도 설교자와 성도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원고 작성을 시작할 때까지는 내용이 확정되지 않았더라도 설교 원고를 쓰는 단계에서는 반드시 전체 내용을 요약해 줄 몇 마디 말을 생각해 놓아야 합니다. 그러나 줄거리가 뛰어나고 훌륭하다고 해서 모든 청중이 설교 내용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는 마지막 단계는 뜨겁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강단에 빙산이 있는데 회중석에서 불이 일어날 수는 없습니다. 준비 단계에서부터 설교자의 충분한 기도와 하나님과의 교제가 없다면 강단은 얼어붙을 것입니다. 사도들이 초대 교회의 조직을 재정비했던 것도 사도에게 있어서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행 6:4)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절감했기 때문입니다. 기도와 말씀 선포의 관계는 결혼의 비유를 들어 설명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짝지워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 설교자는 감히 설교와 기도를 따로 떼어놓을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설교할 때 기억해야할 가장 중요한 점은, 절대로 설교자가 다른 사람의 몸짓과 목소리를 흉내내면서 마치 자신이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설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하나님께서 강단에서 크게 들어 쓰시는 설교자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워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존경심이 모방으로 연결되어서는 안됩니다.
자기를 잊는 것이 설교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우리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성도들이 예배를 마치고 나가면서 “정말 훌륭한 목사님이야!”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실패한 것입니다. 우리는 성도들이 “하나님은 너무나 거룩하시도다. 이렇게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인지요!”라고 말하기를 원해야 합니다.
저는 설교를 준비하는 젊은 목회자들에게 이렇게 충고합니다.
“자기 자신이 되십시오. 그리고 자신을 잊으십시오! 결코 마틴 로이드 존스가 되려하지 말고 에릭 알렉산더가 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여러분은 그분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러분 자신이 되십시오. 그러나 자기 자신이 되고 나서는 그 자신을 잊어야만 합니다. 자기망각이야말로 설교의 비결입니다. 세례 요한을 기억하십시오. ‘당신은 이런 사람입니까?’ ‘당신은 저런 사람입니까?’
질문을 받은 세례 요한은 ‘나는 소리다’, ‘나는 빛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도 자신에 대해서 말해보십시오.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세례 요한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더 크시다. 그는 흥해야 하겠고 나는 쇠해야 하리라’고 말했습니다. 설교가 위험해지는 순간은 우리가 흥하고 그분이 쇠하는 순간입니다. 그러면 그 설교는 끝이 나는 것입니다. 성도를 많이 모을 수는 있고 성도들이 ‘와!’하고 감탄을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볼 때 그런 설교는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질문]
목사님께서 지금까지 설교자로서 사역해 오시면서 직면한 ‘목회 사역에 존재하는 가장 위험한 요소‘는 어떤 것들이 있었습니까?
[답변]
제가 목사로서 제 삶 속에서 발견했었고, 지역 교회의 목사로써 또 가르치는 자로서 경험하고 직면했던 가장 큰 위험 요소는 ‘기도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마귀는 기도가 빠진 설교를 조롱하고 비웃는다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지적한 바 있는데, 기도로 기초가 다져지지 않은 그리고 기도로서 후원을 얻지 못하는 설교에 마귀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문제는 말씀을 준비하기에 너무 바빠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마귀의 생각입니다. 마귀는 기도하지 않는 자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찬송가에 있듯이 마귀는 가장 연약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그가 기도할 때는 무서워 떠는 것입니다.
과거 청교도들은 기도하기 위해 새벽 세시에 일어났다고 하는데, 그 사실 때문에 자책과 괴로움에 시달릴 필요는 없습니다. 늦어도 아침 8시에는 일어나려고 애쓰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자신이 한심하고 가여운 존재라고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많은 청교도들은 새벽 3시에 일어나기 위해 전날 저녁 6시 반 경에 잠자리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내가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시간만큼 기도할 수 없기 때문에, 전혀 기도를 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반드시 기도의 습관을 노력하며 만들어 가야 합니다. 사도행전 6장에서 사도들이 사역의 영적 우선 순위를 설정하기 시작한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성도간의 교제나 구제, 성도 돌보는 일을 하느라 말씀 가르치는 일을 중단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집사들을 뽑는데, 이는 성도 돌보는 사역이 덜 중요해서가 아니라, 그 일이 사도들에게 주어진 기도와 말씀 사역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 기도와 말씀 사역은 함께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무릎 꿇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보다 나가서 말씀을 전할 때 더 많은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점이 바로 목회자들이 빠지기 쉬운 첫 번째 함정이며 위험 요소인 것입니다.
두 번째 설교자에게 있는 위험한 함정은 "가르침과 실제 삶의 불일치"입니다. 이 때문에 바울도 디모데에게 “네 자신과 네 가르침에 주의하라”고 말했던 것이지요. 바울은 삶과 가르침이라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는 또 “우리가 너희에게 그리스도의 복음 뿐 아니라 우리 자신도 주었음을 너희가 아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존 스토트 목사님이 「두 세계 사이에서」(Between Two Worlds)에서 말했듯이, 주일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설교를 하고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공개되지 않는 생활을 하는 목회자는 결코 좋은 목회자가 아닙니다.
목회자는 말씀대로 사는 것과 말씀을 선포하는 것, 이 두 가지 일을 다 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모가 중요하고 장로들이 중요한 것입니다. 목회자는 이들에 대해서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물론 그리스도와 성경에 대한 책임이 우선이지만 그 다음으로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책임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목회자가 현실과의 접촉점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이들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또 하나 들고 싶은 목회적 위험 요소는 동료 사역자에 대한 비교의식과 질투심입니다. 사역에 있어 자신을 타인과 비교하는 것이 설교자가 빠지기 쉬운, 마음속에 내재할 수 있는 정말 위험한 함정입니다. 우리 각자는 다 서로 상이한 개성과 달란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야구 경기의 예를 들어본다면, 내가 타자로 그라운드에 서게 되었을 때 바로 제 앞의 타자가 나보다 뛰어난 선수로, 좋은 타구를 치고 1루 베이스에 나가 기다리고 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때 팀을 위해서는, 다음 타자를 위해, 나는 번트를 날리고 뛰다가 아웃 당하는 희생을 기꺼이 해야합니다. 비교의식이나 경쟁심을 버리고 동료 선수와 팀을 위해서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럴 수 있겠습니까? 나 자신이 스스로에게는 가장 중요한 존재 아닙니까? 그러므로 목회에 있어 비교의식과 시기심은 우리를 파멸로 몰고가고 죽게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설교자에게 있어서 제일 부담스러운(?) 존재가 아내라고 생각되는데요, 왜냐하면 남편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목사님은 평소 사모님과의 관계에서 무엇을 가장 신경쓰십니까?
저는 목회자는 무엇보다도 아내에게 좋은 남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아내에게 목회자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남편의 책임에 명령하는 것들은 모두가 목회자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명령입니다. 목회자는 교회에서 너무나 많은 시간을 보내므로 가정에 소홀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목회자는 다른 사람들의 아이들에게 관심을 쏟느라 정작 우리의 자녀들에게는 소홀해질 소지가 있습니다! 사무실에 앉아 연구를 하거나 다른 부부들의 문제를 도와주느라고 정작 우리의 아내에게는 소홀해질 소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목회자와 사모도 성경의 명령을 진지하게 준수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라는 명령은 목회자에게도 중요한 명령입니다. 아내에게 성실하고, 아내의 상태에 민감하고, 아내에게 마음을 써주어야 합니다.
바로 얼마 전에 저는 미국에서 아주 유명한 어느 목사님이 사모님께서 이혼을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성도들에게 알렸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모님이 이혼하고 떠난 후에도 목사님은 교회에서 설교를 계속하시겠지요. 저는 이런 상황에 대해서 질문을 받았을 때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저는 아내와의 관계가 불화하기만 해도 설교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내와의 사이에 불화가 있으면 제 마음은 너무나 무거워져서 무엇보다도 먼저 그 관계를 회복하고 용서를 구하는 일부터 해야될 것 같습니다. 아내와 주님 앞에 제 잘못을 먼저 고백해야만 마음이 편해질 것 같군요.”
이것은 비단 목회자의 결혼 생활 뿐만 아니라 어느 부부 사이에서도 조화로운 관계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자세일 것입니다. 자기 가정을 돌보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집을 돌보겠습니까? (이때 전화벨이 울렸다. 벡 목사님의 아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질문]
그럼 목회자가 사모와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실천해야 할 것을 말씀해주십시오.
[답변]
한 가지를 말하라면 희생이라고 할 수 있겠죠. 자신을 아내에게 바쳐야 합니다. 자신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아내를 앞세워야 합니다. 우리의 자아를 희생하고 우리의 시간을 희생해야 합니다. 희생이 열쇠입니다. 복종도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종하듯이 아내에게도 복종해야 합니다. 남편들 중에는 복종은 아내에게만 해당되는 말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복종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복종하십시오. 그리고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에게 복종하십시오.
[질문]
마지막으로 한국의 목회자들과 신학생들에게 나누고 싶은 말씀을 한 마디 해주십시오.
[답변]
우리가 강단에 서는 것은 어떤 사상을 전달하기 위함도 아니요 좋은 아버지가 되는 다섯 가지 원리를 가르쳐주기 위함도 아닙니다. 성경이 그런 주제를 언급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결코 그것이 성경의 중요한 강조점은 아닙니다. 청교도의 신앙을 다룬 짐 팩커(Jim Packer)의 「경건을 향한 추구」(A Quest for Godliness)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성경을 성경적으로 설교하는 설교자라면 언제나 복음을 선포하는 설교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모든 설교는 적어도 암묵적으로라도 전도를 염두에 둔 설교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성경은 예수님에 대한 책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메시지를 가지고 청중들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들로 하여금 선택을 요구하는 마음의 갈림길로 데리고 가는 것이 설교자의 임무입니다. 화재가 일어난 건물 안에서 발목까지 타오르는 불길에 갇힌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사다리차를 타고 그 사람에게 접근해서 “이리오세요! 건물을 밖으로 나갑시다! 거기 있다간 당신들도 불에 탈 거예요!”라고 외치기 위해서 미리 양해를 구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건물이 불타고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왜 귀챦게 굴어요? 점심 먹고 편히 쉬고 있던 참인데!”라며 저항하겠지요. 하나님의 말씀은 먼저 그들이 있는 건물에 불이 붙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불타는 건물 안에 있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좋은 차를 몰고 와서 교회 주차장에 주차를 시키고 들어와서 성전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당신들은 지금 불타는 건물 안에 있는 사람과도 같소‘라고 말하니 그들이 듣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설교자가 그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반응에 너무 매이지 말고 사람들을 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저희 교회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시기를 바랄께요. 여하튼 당신에게 어떤 식으로든 부담을 드리는 것은 우리 교회가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무엇이든 원하시는대로 하십시오”라는 말은 설교자가 할 말이 아닙니다. 설교자는 강권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열정에 이끌림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국교회 목회자들과 나누고 싶은 것은 한국의 목회자들과 함께 동반자가 되어 복음 사역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제가 큰 기쁨을 얻고 있으며, 우리 교회에서 주일 예배 시작 전에 기도할 때마다 온 세계의 교회를 위해서 기도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한국 교회를 생각할 때 언제나 제 마음에 용기를 얻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는 디모데후서 4장 5절 말씀을 한국교회의 목회자들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질문자]
귀한 말씀 들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출처 :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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