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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해석학의 과제

에반젤(복음) 2020. 2. 9. 23:28



성경해석학의 과제

I. 성경해석학의 역사적 검토

성경해석학과 관련해서 구체적인 학파가 처음으로 생긴 때는 AD 180년대의 알렉산드리아 학파를 들수 있다.

1. 초대교회와 교부시대

1) 알렉산드리아 학파 (Alexandrian School )

(1) 필로(Philo of Alexandria). 필로는 유대인으로서 일종의 신 플라톤 주의 자였다. 그는 성경의 모든 문자의 배후에는 어떤 신비한 뜻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현상의 배후에 있는 것이 실체라고 하는 이원론적인 플라톤의 관념주의적 영향이다.

(2)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150?-220 AD).

교부 클레멘드는 필로의 영향으로 우화주의적( allegorical)해석의 교조가 되었다. 클레멘트는 성경의 모든 부분은 구원의 진리를 숨기고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모든 측면에서 성경을 다섯가지 측면에서 보았다. 첫째는 역사적 측면에서, 둘째는 교회적 의미에서, 셋째는 예언적의미로, 넷째는 철학적 의미로, 다섯째는 신비적의미로이다. 그리고 그는 성경의 모든 부분을 구원과 관련시켰다. 성경의 핵심은 구속사이다. 그러나 성경의 모든 부분이 다 구원에 관련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구속사를 강조하여 영해하려는 시도는 무리하다는 것이다.

(3) 오리겐(Origen ,185-254 AD)

오리겐은 클레멘드의 제자로서 인간구조의 삼분설을 근거로 영, 혼, 몸을 근거로 성경의 모든 부분에서 세가지 뜻 , 영적인 뜻, 혼적인 뜻, 몸적인 뜻이있다고 하였다. 성경의 어떤 부분을 보아도 문자적(몸)인 뜻이있고, 도덕적(혼적)인 뜻이있고, 그보다 더 깊은 영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중에도 가장 고상한 성경해석학은 영적인 해석이라고 하였다. 교회사에 있어서 우화주의적 성경해석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 사람이 바로 오리겐 교부였다.

같은 시대에 악렉산드리아 학파와 대조를 이루는 또 하나의 학파가 생겨났다.

2) 안디옥학파(Antioch School)

(1) 제롬( Jerome)- 안디옥 학파의 유명한 교부로는 제롬이 있다. 벌게이트(Vulgate) 라틴어 성경을 번역한 사람이며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달리 문자적 의미를 중시하였다.

(2)크리소스톰(Chrysostom) - 성경해석사에 있어서 크리소스톰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소위 문법적, 역사적 성경해석의 원리(Gramatical, Histotical interpretation principle)를 처음으로 제창했던 사람이다.

2. 중세기

1)대부분의 경향

초대교부시대에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디옥 학파가 대결하면서 우화주의적 해석과 역사적 문법적 해석이 공존했다. 그런데 중세기에 들어서면서 성경해석학의 경향은 대부분 우화주의적 해석으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성경을 신비하게 해석하는 경향이 증가하게 되었다. 따라서 성경은 성령의 특별한 감동을 받은 사란이나 사제(신부)들이나 해석할 수 있고, 평신도들은 그런 오묘하고 신비로운 뜻을 깨달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직자들은 이러한 경향과 함께 성경해석을 교권에 대한 도구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평신도들은 성경을 마음대로 해석 할 수 없고 사제들만이 해석할 수 있었다. 따라서 평신도들은 성경과 멀어지게 되었다. 이것이 중세기의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2)소수의 예외

중세기의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도 예외는 있었다. 예를 들면 파리의 빅토 수도원 학파의 앤드루(Andrew) 라는 사람은 글자 그대로의 의미가 본래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를 찾으려 했다. 중세기 성경해석의 암흑기에도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려는 소수의 사람이 있었다.

중세기 초엽에 활동했던 유명한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문자의 뜻을 중시해야 된다고 말했다. 그는 스콜라 철학의 영향을 받아 철학적인 설교를 많이 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문법적, 역사적인 해석원리를 중시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중세기에 대체적으로 우화주의적 성경해석학이 있었다.

3. 근세 이후

1)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했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했다는 것이다. 루터는 성경해석의 다섯가지 중요한 원칙을 제창하였다. 첫째, 문자적 해석, 둘재, 문맥의 중요성, 셋째는 역사적 상황, 넷째는 성경을 그리스도중심으로 해석하는 기독론적 해석, 다섯째는 개인의 해석의 자유를 제창한 것이다.

2) 존 칼빈(John Calvin) - 그는 무엇보다도 상식(common sense)을 가장 중요시하였다. 칼빈은 성경해석학에 있어서 첫째로 우화적 해석을 사탄적인 것, 마귀적인 것으로 취급하였다. 그는 중세기에 평신도들이 성경에서 멀어지고 성직자들만이 성경을 독점한 것이 우화적 성경해석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둘째로 역사적 맥락을 중요시하였다. 루터와 함께 성경의 역사적인 맥락을 중요시한 것이다. 셋째로, 본문의 의도 즉 저자의 의도를 중요시하였다. 넷째로 칼빈의 유명한 “성경을 성경으로”이해하는 해석의 원리를 제창하였다. 다섯째, 명료성의 원리로서 “ 성경의 위대성은 본문해석의 무한성이 아니라 한 가지의 뜻이 명료성에 있다”는 것이다. 성경이 위대한 것은 본문이 가진 명백하고 분명한 사상 때문이라는 것이다.

성경해석사를 연구하면 끊임없이 우화주의적 해석과 역사적. 문법적 해석의 원리의 갈등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우화주의적 해석이 유행할수록 평신도들이 무능해 지고, 역사적 문법적 해석이 강조될수록 교회는 개혁되고, 새로워지고 평신도들이 깨어 일어나는 운동이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 교회가 세워지기 위해서는 역사적, 문법적, 신학적 해석원리를 회복하는 것이다.

우화적 해석은 오리겐이 처음으로 시도했고, 어거스틴이 했고, 그후에 수많은 설교가들이 한 해석이다. 예) 우화주의 해석의 실례 -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II. 성경해석의 원칙들

1.성경해석의 전제들

첫째성경의 영감. 둘째, 성경의 통일성. 셋째, 문자적 명백성. 넷째, 성령님의 조명에 대한 믿음이다.

1) 성경영감에 대한 믿음 - 이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특별계시)이라는 고백이 전제이며, 기독교복음의 유일성 혹은 절대성의 가장 중요한 근거라고 생각을 한다(딤후3:15-16).

2)성경의 통일성에 대한 신뢰- 이는 점진적 계시론과 그리스도적 원리이다. 성경은 목적을 두고 점진적으로 계시되어 점점 완전하게 계시된다. 성경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계시한다는 의미에서 그리스도적인 원리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야 말로 성경의 핵심이다(요5:39, 눅24:27, 딤후3:15).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성경의 통일성을 신뢰할 수 있게된다.

3)문자적 명백성에 대한 신뢰 - 성경은 문자적으로 자명한 흐름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종교개혁시대의 성서해석에 있어서 중요한 열쇠가 되었다.

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우화주의에 빠지게 된다. 성경의 우월성을 증명하기 위해 억지로 기묘한 뜻을 부여하는 것이 우화주의 적 해석이다.

나, 불트만의 비신화와 - 역시 우화주의 해석의 현대적인 적용이다. 현대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신화나 기적은 다 비신화화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불트만의 해석은 근본적인 면에서 우화적인 해석과 동일하다. 루터나 칼빈도 이런 정신에서 성경의 “여러 의미설”(mutiples intellegentia)을 부인하였다. 성경은 한 구절에서 여러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한 가지 분명한 뜻이 있다. 문자적으로 명백한 사상이나 전제가 있다.

4)성경의 조명에 대한 신뢰 -

성경 해석에 있어서 개시교에는 두가지 중요한 원리가 있다.

첫째, 외적 원리 - 성경을 하나의 보편적, 역사적 계시로 보는 것이다. 성경은 역사적 보편적으로 이미 과거에 계시되어진 것이다.

둘째, 내적인 원리 - 성경은 또한 개인적인 진리를 담고 있다. 과거 역사적으로 계시되었던 이 말씀이 오늘의 나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개인적인 진리라면 그 적용과 깨달음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성령의 조명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성경은 연구와 함께 묵상이 필요하다. 우리는 묵상을 통해 성령의 도우심과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다. 성경은 이성만으로 다 이해할 수 있는 책이 아니라 여전히 하나님의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 “주님 내 눈을 열어 주의 귀이한 것을 보게하소서”(시119:18) 라고 기도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2. 성서해석의 일반원칙


  일반원칙과 특별원칙으로 나우어서 설명한다. 일반원칙이라는 것은 성경해석에 있어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일반적인 원리들에 대한 것이고, 특별원칙은 성경을 하나의 문학적인 장르로 보고, 문학적 구성법들을 중심으로 한 특별한 해석원칙들에 대해 말하는 것을 가리킨다.


2.1 문맥을 따라 이해하라

  성경해석의 생명은 문맥의 중요성이다. 요한복음 9장의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의 기사를 해석하고 설교를 위한 묵상을 할 경우, 9:3을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라는 말씀이 있다.  인간의 죄성이나 원죄론까지도 부인하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만약 제자들의 질문이 ”이 사람이 죄인입니까 아닙니까?“이었다면, 예수님은 틀림없이 죄인이라고 대답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의 질문은 “소경으로 태어난”이 특수한 상황이 꼭 “죄 때문입니까”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것은 이 경우에 죄 때문은 아니며, 장님으로 태어난 그 사건이 꼭 죄와 관련된 것은 아니라고 대답하신 것이다.

  고린도전서 10:23을 보면 바울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원칙에 대해 말하면서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힉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라고 한다. 우상의 제물을 먹어야 하는가 등의 문제를 중심으로 해서 바울은 모든 것이 가하지만 반드시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모든 것이 가하다”는 고린도전서 10:6에서 보면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고 말한다.

  이 문맥의 중요성을 말할 때 흔히 우리가 예로 드는 구절은 빌 4:13이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 전에는 항상 12절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자족의 교훈”이라고 말하고 있다. 12절에서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내가 배부를 때도 있었고 배고플 때도 있었고 그러한 가운데서 나는 자족의 교훈을 배웠다”고 말하면서, 13절에서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고 언급한 것이다.

  배부를 때 방탕하지 않고 여전히 주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배고플 때 낙심하지 않고 주님을 신뢰할 수 있었다. “그런즉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자족의 교훈이다. 삶 속에서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승리할 수 있다는 증언이지, 소위 불가능이 없다는 생각을 뒷받침해 주는 구절은 아니다.

  창세가 4장과 3장의 피의 제사가 공식적인 제사제도로서 확립된 어떤 성서적인 근거가 없다. 어떤 제사(소제)의 경우, 농산물이나 곡식의 제사도 기쁘게 받으셨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피 흘림의 제사만을 하나님이 받아주신다는 자기 원칙과 전제를 가지고 있으면, 그 안경을 통해서 보기 때문에 우리가 그 부분을 강조하게 된다. 창세기 4장을 객관적으로 보면, 4절에서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라는 말이 나타난다. 다시 제사에 있어서 기름은 가장 좋은 것으로 이해되고 있었다. “첫 번째 것과 가장 좋은 것”-본문의 상황 속에서는 이 정도 밖에 나타나지 않는다.

  난해구절인 고전 15:29 “죽은 자들을 위해서 받는 세례”


2.2 어휘를 이해하라

  성서해석의 일반적인 원칙 가운데 하나는 어휘를 잘 살피는 것이다. 어휘를 이해하는 원칙 몇 가지를 강조하고 싶다. 첫째, 다른 단어이지만 같은 의미를 가진 것은 없는가 살피라. ‘하나님 나라“와 ”영생“이 같은 의미로사용되고 있다. ”영생“과 ”하나님의 나라“가 다른 단어지만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둘째, 같은 단어지만 다른 의미일 수도 있다. 구원에 대한 지나친 강조 의욕, 그리스도에 대한 지나친 강조 의욕 때문에 보혈에 대한 이해가 잘못될 수 있다.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보혈을 가르치고 있지만, 붉은색이 이사야 1:18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에서는 보혈이 아니라 죄를 상징하고 있다. 빨간색 노이로제에 걸려 빨간색만 나오면 모조리 그리스도의 보혈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좋지 않다.

  셋째, 저자에 따라서 같은 단어가 다른 내용이 될 수도 있다. 구원이라는 단어가 흔히 말하는 영적인 구원, 조직신학이나 교리에 있어서의 구원의 의미와 전혀 상관없이 어려운 상태에서 구출된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도 대단히 많이 있다. 행 27:20을 보면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고 했다. 여기의 “구원”은 단순한 구조를 의미하고 있다. 엡 6:9에 “공갈을 그치라”


2.3 문법을 이해하라

  적어도 동사, 특별히 반복되는 동사는 잘 살펴야 한다. 성경에 나타난 본래의 상황을 다시 구성하는 일에 있어서 동사의 관찰이 매우 도움이 된다. 누가복음 5:1부터 보면 “무리가 옹위하여 하나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예수께서 베드로로 하여금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를 잡게 하기 전의 광경이다. 무리가... “들을새”, 예수는...“서서”, “보시니”, 어부들은 “나와서”, “씻는지라”, 예수께서 “오르시니”, “청하시고”, “앉으사”, 예수께서 움직이시는 모습들-서 계셨다가, 배에 오르시고, 그 다음에 앉으사, 띄기를 청하시고 무리를 가르치심,-여기까지만 생각해도 이 광경이 얼

마나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가? 동작 하나 하난가 눈에 보이는 것처럼 본문이 묵상된다.

  요한일서 5:18의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헬라어의 현재시제는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죄를 범하지 않는다” 즉 하나님께로서 태어난 사람마다 습관적으로 계속해서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의 사역 때문에 결국은 죄를 버리고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문법적인 정확성에 관심을 많이 기울인 번역은 NIV이다. 부정과거 용법 같은 것은 “단 한 번의 행동으로써 영원한 결과를 얻는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의 “되는”이란 단어는 한 번 됨으로써 영원히 된다는 의미를 가진다.

  접속사에 대한 관심도 필요하단. 접속사는 문장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그러므로”, “그러나”와 같은 이런 표현들에 주의해야 한다. 전치사 역시 행동의 동작을 이해하기 위해 매우 중요하다.

  로이드 존스의 책을 읽어보면 그가 “헬라어 문법이 가진..”, “헬라어 문법에 의하면..”이라는 표현을 별로 사용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헬라의 문법을 굉장히 잘하는 분이 계시는데, 어떤 교회에 부임 가능성을 가지고 선보이는 설교를 하러 가셨다. 설교 중에 헬라어 문법을 많이 사용한 모양이었다. 교인들에게 거절당했다. 헬라어 문법 때문에 그 교회에서 목회자가 되지 못한 것이다.

  4장의 문맥은 교회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교회의 한 몸이며 교회의 지체가 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2.4 문자적 배경을 이해하라

  사무엘상 12:17에 보면 “오늘은 밀 베는 때가 아니냐. 내가 여호와께 아뢰리니 여호와께서 우뢰와 비를 보내사 너희가 왕을 구한 일 곧 여호와의 목전에 범한 죄악이 큼을 너희로 밝히 알게 하시리라”는 말씀이 나온다. 이스라엘의 밀 베는 때는 비가 안 오는 시기이다. 그런데도 사무엘이 기도했더니 비가 왔다는 사실이다. 벌써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문화적 배경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 그냥 지나쳐버린다.

  마가복은 11:12~14에서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다. 성서해석학 지식이 빈곤했을 때에는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했다는 것 때문에 상당히 당황하였다. 이 부분의 성경해석에도 상당히 많은 영해가 있었다. 예를 들면 무화과나무가 나오면 이것을 이스라엘이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스라엘이 저주를 받았다고 이해하며 또한 무화과나무의 회복이 이스라엘의 회복이라고 해석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문맥을 통해 읽어보면 이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하고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신성의 능력에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다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우리를 당황스럽게 하는 이유는 때가 아닌데 예수님께서 그 무화과나무에 열매를 요구하시고 그로 인해서 그 나무를 저주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간단하게도 이스라엘의 자연 조건에 대한 무지 때문이다. 이스라엘에서는 무화과나무 철이 아니라도 항상 약간의 열매는 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전혀 무화과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이미 생명력을 상실한 것이다. 때가 아니라고 해도 다소의 무화과는 열려있어야 한다. 자연적 배경의 무지 때문에 엉뚱한 성서해석이나 결론이 가능한 것이다.

  로마서 12:20 “네 원수의 머리에 숯불을 피우라” 이것은 숯불을 머리에 피우라고 해서 정말 머리에 불을 피우라는 것은 아니다.

  옛날우리나라에서 겨울에 숯불이 귀했던 것같이 이스라엘에는 아직도 숯불이 귀하다. 이것을 빌려주는 것은 매우 친절한 행동에 속한다. 화로 비슷한 것을 머리에 이고 다니는 습관이 있는데, 이스라엘도 똑같다. 그러므로 불을 빌려주는 것은 원수에게 베풀 수 있는 단순한 친절을 말하는 것이다.


2.5 관주(cross-reference)를 사용하라.

  사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관주만 철저히 이용해도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아가페 출판사에서 간행한 성구대사전은 스트롱이나 영의 성구사전을 능가하는 것이다. 상호 관련된 다른 구절들을 사용할 때 중요한 몇 가지 주의사항이 있다. 첫째, 같은 저자의 같은 책에서 그 구절과 비슷한 구절이 있는가를 먼저 보아야 한다. 둘째, 같은 저자가 쓴 다른 책에서 인용된 구절을 살펴보아야 한다. 셋째, 다른 저자가 쓴 같은 내용의 구절이 있는가를 찾아본다. 넷째, 신약을 보다가 구약을 보고, 구약을 보다가 신약을 번갈아 가면서 보아야 한다.


2.6 저자의 원 의도를 파악하라.

  이것도 여러 번 강조된 성경해석의 생명과도 같은 중요한 선언이다. 본래 저자가 처음에 무엇을 의도하고 이 말씀을 사용했을까 하는 것이다. 원래의 본문이 우리와 동일한 시대에서 기록된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인하여 때때로 그 본래의 저자의 의도를 우리가 잘못 이해하기 쉽다.


2.7 그리스도에 대해 어떤 증언을 하고 있는가를 파악하라.

  성경은 그리스도를 지향하고 있고, 그리스도가 핵심인 것은 사실이지만 무리하게 그리스도를 증언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3. 성서해석의 특별원칙


3.1 은유와 직유.

  은유(metaphor)는 “A는 B이다”라는 표현법인데, 시편 22:6의 “나는 벌레이다”, 시편 18:2의 “여호와는 반석이다”의 경우가 그것이다. 시편 기자 자신이 고난으로 꿈틀거리는 벌레처럼 느껴져서 그랬을 것이다. 하나님과 반석도 다르지만 사물을 받칠 정도로 견고하다는 의미에서 사용한 것이다. 은유는 한 가지 유사성을 가진 다른 것을 빌어 대비시키는 표현법이다.

  직유(simile)는 “A는 B와 같다”는 표현법이다. 욥기 41:24의 “내 마음이 돌과 같다”의 표현이나 하나님 나라의 비유들에서 “하나님 나라는 마치 무엇과 같으니”가 이에 해단된다.


3.2 의인법(personification).

  의인법은 비인격적 존재를 인격적 존재처럼 설명하는 것이다. 신인동형론(anthropomorphism)과도 관계가 있다. 몰몬교는 하나님을 마치 육체적 형상을 지닌 것처럼 상상한다. “하나님께서 거니신다”는 표현이 나타난다고 해서 그가 육신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는 안 된다. “여호와의 날개”라는 표현이 있다고 해서 문자 그대로 날개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 문맥에 의해서 “보호하심”과 같은 상징적인 뜻으로 읽어야 한다.


3.3 과장법(hyperbole).

  과장법은 문학적으로 합당한 것이다. 그러나 과장법을 그대로 해석하게 되면 큰 문제가 생긴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 사용하신 과정법 가운데 하나가 “네 발이 범죄하거든 그 발을 찍어버리라”인데 그것은 그 정도로 죄에 대해서 두려워하라는 것이지, 정말로 발을 찍어버리라는 말이 아니다.


3.4 비유(parable).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이웃이 누구인가?”라는 한 가지 의미를 밝히기 위한 것이다. 이 한 가지 뜻을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 것처럼 강조하기 시작해서 주막은 무엇이며 포도주는 무엇인가 하는 식으로 되면, 그 비유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 접근하지 못한다. 비유는 한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접근하는 것이 좋다.


3.5 풍유(allegory) 또는 우화.

  알레고리는 여러 가지의 뜻이 있다. 알레고리는 처음부터 한 가지 뜻 이상의 의미를 의도한 문학형식이다. 알레고리는 성경에 많이 있지 않다. 그러나 알레고리컬한 해석이 위험하다는 것을 강조했다고 해서알레고리가 전혀 필요 없다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성경에도 많은 알레고리가 나타나기도 한다. 바울의 알레고리 중 유명한 것이 갈라디아서 4:21이하에 있다. 그런 경우엔 그것이 한 가지 이상의 의미가 있으므로 좀더 다각적 의미로 관찰할 필요가 있다.


3.6 모형(type) 또는 형상.

  모형에 관해서 성서 해석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주장하는 원칙은 “신약이 나간 데까지만 나가라”는 것이다. 유월절 어린양에 대해서 어느 선까지 해석하였는가? “유월절 어린양은 그리스도이고 누룩은 죄의  상징이다”라고 한다. 그러나 “먹던 양의 뒷다리는 무슨 의미인가”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다. 구리뱀의 경우에도, “인자”가 들리운 것같이 놋뱀이 들렸고 그것을 바라보았을 때 산 것처럼 예수님도 십자가에 달리시므로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셨다는 부분까지 신약은 언급한다. “뱀의 꼬리는 무엇의 상징인가”


3.7 예언.

  예언에 관해서도 특별히 주의해야 할 점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는 상당한 시간적 간격이 있지만, 구약시대 기자들은 그것을 한 눈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같은 관점 안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얼마나 많은 시간의 간격이 있는가를 생각하면서 문맥을 따라 조심스럽게 살피지 않으면 초림과 재림 사이의 혼동이 생길 수 있으면, 이것은 우리가 구약의 예언서를 해석할 때 가장 어려운 문제가 된다.


3.8 숫자.

  상징적으로 숫자가 사용된 경우도 있고 우발적으로 사용된 경우가 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항아리 6개, 다윗의 물맷돌 5개, 예수님의 153마리의 물고기 등에 관해서 필요없이 의미를 부여하지 말아야 한다.




4. 기타 원칙들


4.1 민족적인 적용원리

  독특하게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내용이 아닌가, 또는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원리인가를 숙고해야 한다.


4.2 최초 언급-총체적 언급의 원리.

  처음에 강조된 것이기에 나중에는 강조 없이 지나간 것들을 잘 파악해야 한다. 언제나 처음에 온전하게 언급된 부분으로 돌아가 처음 의미에 근거하여 풀어야 한다.


4.3 시간 간격의 원리.

  초림과 재림의 구별 같은 것이다. 구약의 예언서에서는 권위 있는 학자들의 도움을 얻어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중 어떤 사건에 관한 예언인가를 구별해야 한다.


4.4 구원과 교제의 원리.

  굉장히 중요한 문제인데 한 본문이 구원에 관한 메시지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원리인가 하는 점을 구별하지 못할 때 성경해석상 커다란 혼란이 일어나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

  여성에 대한 목사안수가 타당한가를 가지고 신랄하게 논쟁을 하고 있으며, 미국의 남침례교에서도 최근에 굉장한 신학적인 논쟁 가운데 하나가 여성의 목사안수 문제였다. 갈라디아서 3:23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구원에 관해서 남녀의 구별이 없다는 것이지, 목사안수에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요한복음 15장의 경우에도 그것이 구원의 본문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본문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이 말씀의 해석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대부분 알미니안적 신학 배경을 가진 사람일수록 이것을 종종 구원 문제에 관련시키려 한다.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고까지 적용하는 사람을 볼 수 있다. 주님과의 교제 속에서 맺어야 할 열매에 대한 부분이지, 구원에 관한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고린도전서 9:27도 난해 본문 중의 하나이다.


 

 

 

설교의 유형과 강해설교



Ⅰ. 설교의 유형들


1. 설교형식(본문취급)에 따른 분류


1.1 설교제목.

 설교형식 자체가 연역적이다. 제목과 문제를 내걸고 그 문제에 대해서 성경이 말하는 것을 여기저기서 뽑아 그 제목을 증명.지원하고 그 제목에 대한 설교자 자신의 결론적 요점을 전개시켜 나가는 설교이다. 무조건 제목설교를 정죄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생각한다. 불가피하게 제목설교가 필요할ㄴ 상황이 있다는 사실을 긍정하지 않을 수 없고, 강해설교를 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무조건 그 사람을 축복하시고 제목설교를 했다고 해서 무조건 그 사람을 정죄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빌리 그래함 목사도 역시 제목설교자이다. 제목설교는 성경 그 자체의 말씀보다도 설교자가 말하고 싶어하는 의도에서부터 설교가 출발할 수 있다는 위험성이 있다.

  제목설교는 많은 사람들을 훌륭하게 인도하는 일에 사용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설교의 전제 그 자체가 인간적일 수 있고 위험하다는 것이 약점이다. 트리니티 산학교의 월터 카이저교수는 심지어 “5년마다 한 번식 할 수 있다면 제목설교를 시도하십시오.


1.2 본문설교.

  본문설교자들은 대체로 본문을 짧게 정한다. 본문설교의 천재라고 일컬어지는 사람은 유명한 스퍼전이다. 본문설교는 성경의 한두 구절을 본문(text)으로 정하는 설교이다. 주제와 대지가 본문에서 나오는 설교를 전통적으로, 역사적으로 본문설교라고 불러왔다.


1.3 강해설교.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란 어떤 것인가?”라는 제목에 이렇게 대지를 요약했다. 1. 희생적인 것 2. 자기 결단적인 것 3. 궁극적으로 하나님에게서 기원한 것. 그런데 교수가 채점하는데, B도 아니고 C도 아니고 아예 F점수를 주었다. “당신의 설교는 근본적으로 전제가 잘못되었다”는 것이었다. “당신이 제목을 정했을 때 당신에게는 이미 ‘사랑이 무엇인가’라는 선입견적인 사고가 있었다. 그것이 네 설교이지, 하나님으로부터 온 말씀은 아니지 않느냐”라는 지적을 받았다.  본문을 선택하라  본문을 들어보라 ③ 본문을 분석하라  그 다음에 본문을 발전시켜라  그리고 설교를 써보아라  본문에 근거해서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가? 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는가?에 관심을 가지고 충고했다.

  강해설교라는 특수한 설교형태에 관해서 관심을 갖게 한 최초의 동기였다. 영국에서 오셨는데 로이드 존스(M. Lloyd Jones) 밑에서 설교 훈련을 받았던 사람이었다. 로이드 존스라는 이름을 알게 되고 강해설교에 대해서도 눈을 뜨게 되었다.


  

2. 설교의 내용에 따른 분류


2.1 인물설교.

  인물설교도 강해설교식으로 할 수 있고 제목설교의 형태를 따를 수도 있다. 본문에 따라서 어떤 인물은 그 맥락을 가지고 자세하게 강해적인 접근을 할 수 있다. 제목설교적인 접근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2.2 교리설교.

  제목설교의 형태와 유사하다 할 것이다. 교리를 변증하기 위해서 제목설교가 될 것이다.


2.3 윤리설교.

  제목설교도 될 수 있고 강해식이 될 수도 있다. 윤리설교는 쟁점을 다루고 있으므로 제목설교적 형태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3. 실험설교(현대적인 설교유형들)


3.1 일인칭 설교


3.2 대화식 설교와 단편설교.

  설교를 하다가 중간에 그치고 문제를 제기하여 그 문제를 가지고 대화하는 형식의 설교이다. 처음부터 어떤 문제를 제기하고 대화식으로 설교를 전개한 형식도 있다. 단편설교는 음악행사나 어떤 특이한 경우에 매우 짧게 설교를 하는 형식을 가리킨다.


3.3 드라마식 설교.





∏. 강해설교가 아닌 것


1. 간단한 주석식 설교

 “running commentary preaching"라고 한다. 본문의 구절들을 차례로 읽어가면서 주석하는 설교이다. 구미 강해설교자들은 이것은 강해설교가 아니라고 말한다. 아이언사이드의 설교도 그런 형식에 속한다. 존 맥아더라는 사람도 이런 유형의 설교자에 속한다.

  설교에 통일성이 없고 예술성이 없다. 강해설교도 하나의 설교인 이상 설교로서 흐름이 있어야 하고 절정이 있어야 한다. 설교의 분명한 목표가 있어야 하는데 간단한 주석식 설교는 장황하게 늘어 놓다 보면 핵심을 상실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많다.


2. 특정구절에 대한 설명식 설교

  “Bible explanation preaching"이라고 할 수 있다. 본문에서 어떤 한 구절만 선택해 가지고 그 구절을 간단히 설명하고 그것을 바로 적용에 옮기는 유형의 설교이다. 이것도 분문의 문화적 배경에 대한 괄이 거의 없어 주관적으로 잘못 적용될 가능성이 많다.

  교역자들이 심방 가서 이런 설교를 많이 하게 되고 특정한 경우에 자주 이런 유형의 설교를 시도하게 된다.


3. 적용이 없는 성서강해설교

  어떤 설명으로 끝나는 것이다. 학문적 관심이 깊은 설교자들이나 원어 전문가들에 의해 시도되는 설교이다. 본문에 대한 시대적 배경이나 본문의 본래 의미들이 상당히 충실하게 설교되지만 본문이 오늘의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적용의 메시지가 결핍된 설교이다. 모든 강해설교 주창자들이 생명처럼 여기는 강해설교의 혼(spirit)인 적용이 없다. 또 설교가 현실과의 대결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이런 것은 본격적인 강해설교로 간주하지 않는다.


III. 강해설교는 무엇인가?


1. 정의

  마이어(F.B. Meyer)는 “강해설교는 성경의 어떤 책, 어떤 부분들에 대하여 연속적으로 해설하는 설교”라고 했다. 도날드 그레이 반 하우스는 “하나님의 말씀의 본래의 의미를 밝혀 그 의미에 근거하여 오늘의 우리의 삶의 의미를 가르치는 설교”라고 했으며, 또 제리 바인스는 “강해설교란 성경의 한 부분을 주해하고, 한 주제를 중심으로 조직하여 전개한 다음 청중의 상황 속에 적용시키는 설교”라고 했다.

  본문을 취급하는 태도에 따라 강해적이냐 아니냐가 결정된다. 제목설교도 충실하게 준비하면 강해설교가 될 수 있다.

  존 스타트는 특별히 강해설교를 주창하지 않으면서도 사실상 모든 의미에서 설교는 강해설교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라이펠트는 강해설교의 본질을 다섯 가지로 말했다. 첫째, 본문이 있어야 한다. 둘째, 의미가 설명되어야 한다. 셋째, 보편적인 진리가 천명되어야 한다. 넷째,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조직되고 설명되어야 한다. 다섯째, 적용되도록 설명되어야 한다.


2. 강해설교의 장점


2.1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게 된다.

  설교자가 강해설교를 하려고 하면 성경본문과 씨름을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게 된다. 설교자 자신 뿐만이 아니라 그 설교를 듣는 청중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강해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슴을 배우게 된다. 성경본문이 설교의 중심을 이루기 때문에 설교자 자신과 청중들이 말씀에 더 자주 접할 기회를 지니게 된다. 설교자와 청중이 함께 성서적으로 성숙할 수 있다. 강해설교는 성경의 중심사상을 강조하게 된고 본문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게 됨으로써 성경에 청중들의 관심을 쏟도록 한다.


2.2 설교자의 폭을 다양하게 한다.

  연속 강해설교를 하게 되면, 평상시에 설교를 하지 않았던 부분들도 설교를 해야 한다. 설교자는 평소에 생소하던 성경본문도 연구하지 않을 수 없고, 따라서 전에 설교자가로 하여금 설교의 폭을 다양하게 하고, 새롭게 연구한 성경본문으로 인하여 그는 관심의 폭이 다양해지는 것이다. 강해설교를 위해서 우리의 관심 영역 밖에 있는 것을 연구하고 씨름을 하다보면 그 새로운 주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고 다양한 영역에 접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설교자가 전도서를 강해하려고 하면 평소에 관심이 없던 내용들이 어차피 나오게 마련이다. 이로 인해서 설교자는 새로운 영역에 접하지 않을 수 없고 이것은 설교자를 다양하게 만드는 기회가 된다. 그러나 제목설교를 하게 되면 설교자는 항상 자기가 좋아하는 주제만을 강조하게 되고 그 방향으로만 설교를 하게 된다.


2.3 설교자의 주관을 극복한다.

  강해설교는 그 자체의 방법으로 인하여 설교자가 자기 주관에 빠지는 것을 예방해 준다. 우리의 설교가 전적으로 객관적이 되지는 못한다. 설교를 할 때 우리가 주관적인 요소에서 완전히 해방되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설교자는 강해설교를 통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주관성을 극소화시킬 수는 있다. 강해설교라는 것은 그 방법 자체가 성경본문과 씨름을 해서 그 본문의 중심사상을 강조하게 마련이기 때문에 설교자의 주관이 최소화되는 것이다.


2.4 본문선택의 어려움을 제거시켜 준다.

  연속 강해설교를 할 때에는 다음에 설교해야 할 본문이 이미 그 순서에 의해서 나타나 있다. 다음 주일에 어떤 설교를 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은 설교자들의 공통된 어려움인데, 이 고민하는 시간을 설교준비에 쏟을 수 있다.

  1장을 하고 2장을 한 후 반드시 3장을 하려고 하다가 오히려 설교의 졸작을 만들어 내는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 순서에 엄격하게 얽매일 필요는 없다고 본다. 필요에 따라서 그 순서를 넘어가도 무방하리라고 본다.


2.5 설교자로 하여금 확신을 가지도록 한다.

  강해설교는 그 방법상 설교자의 이론이 개입되는 것을 거리고, 예방한다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설교는 진정한 하나님의 케리그마가 되고, 설교자는 이것이 단순히 “나”의 메시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메시지라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강해설교를 통해서 설교자는 확신을 가지고 강단에 서게 된다.




3. 강해설교의 단점


3.1 강해설교는 메마르고 흥미가 결여될 수 있다.

  제목설교는 자기가 좋아하는 제목을 선택해서 설교를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 강해설고는 흥미가 결여될 수가 있다. 설교자가 메마르면 그가 무슨 설교를 하든지 간에 그 설교는 메마를 수밖에 없다. 설교자가 통찰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떤 설교를 하든지 그 설교에는 그의 삶에 대한 통찰력이 개입되어 있는 것이다.


3.2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기 쉽다는 것이다.

  우리가 너무나 본문에 얽매여 있으면 자유롭게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성령의 메시지를 제한하기 쉽다는 것이다. 우리가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설교를 하면 바로 그것이 성령께서 말씀을 전달하시는 통로가 되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말씀을 통해서 성령께서 오히려 역사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비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3.3 설교의 구조적인 통일성을 결여하기 쉽다.

  이것은 강해설교를 비판하는 많은 사람들이 제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격적인 강해설교에서는 매우 치밀한 구조적인 통일성을 찾아볼 수 있다.


3.4 강해설교는 제목설교보다 시사성이나 현실성이 약화될 수 있다.

  우리가 연속 강해설교를 할 때, 때때로 계절도 잊어버리고 오직 그 본문에만 매달리게 되는 경우도 찾아볼 수 있다.

  크리스웰 목사님 같은 분은 요한계시록만 가지고 5년에 걸쳐서 주일 아침마다 연속 강해설교를 하기도 했다.

  연속 강해설교의 경우는 시사성이 어느 정도 약화되는 것이 사실이다.


3.5 설교자를 게으르게 하기 쉽다.

  본문이 있으니 그 본문을 해석하면서 설교를 대강 끝낼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격적인 강해설교에서는 오히려 더 많은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Ⅳ. 강해설교의 역사와 과제

  우리의 관심은 교리사나 설교사가 아니다. 다만 강해설교의 뿌리를 밝히고, 어떤 사람들에 의해서 주창되어 왔으며, 강해설교의 형태는 어디까지 와있고 강해설교가 가진 앞으로의 방향, 과제는 또 무엇인지를 간단히 언급하기로 한다.


1. 강해설교의 역사

  강해설교의 유형을 가지고 주장했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강해설교의 정신은 이미 성서 그 자체 안에서도 뿌리를 찾아볼 수 있다. 


1.1 학사 에스라.

  구약에서 강해설교적인 정신을 우리에게 전달해준 최초의 사람은 학사 에스라이다. 느헤미야 8:8에 보면 에스라가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는 모습이 묘사된다.

“1.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2. 그 뜻을 해석하여 3.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매 4.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우리는 에스라가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가 1. 본문을 선택했으며 그 다음에 2. 본문을 해석했고, 그 단순한 해석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3. 아마도 백성들의 삶 속에 적용될 수 있도록 전달했기 때문에 4. 계속되는 말씀을 읽어보면 그 설교의 결과가 백성들로 하여금 깨달음과 눈물을 흘리며 삶의 변화를 가져오도록 결단하는 장면에 도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선택된 구체적인 본문과 그 해석의 과정이 있었고 이것이 적용되었으며 전인격적인 반응이 뒤따랐다는 것은 에스라가 강해설교의 아주 구체적인 정신을 간직한 설교자였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구약성서적인 하나의 모범이 될 것이다.


1.2 예수님.

  신약에 들어와서 예수님은 강해설교자였는가 하는 문제는 단정짓기 어렵다. 특별히 누가복음을 보면 주님의 설교형태에서도 강해설교적인 어떤 정신을 찾을 수 있다. 누가복음 4장에는 나사렛 회당에서의 예수님의 최초의 설교라고 일컬어지는 부분이 나타난다.

 16절 이하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서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에게 응하였느니라”(눅 4:16~21).

  마르틴 루터나 칼빈이 누누이 강조한 성경해석의 중요한 원리 가운데 하나인 그리스도적 원리, 즉 말씀의 핵심을 그리스도 자신에게 적용시켰다는 것인데 이것은 강해설교자들이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엠마오 길의 두 제자에게 말씀을 풀면서 강해하신 경우에서도 율법과 선지자의 모든 예언이 그리스도 자신에게서 성취된 것을 말씀하신 예를 볼 수 있다.


1.3 사도바울.

  사도 바울에 오면 우리는 구체적인 강해설교의 형태와 그 정신이 그의 설교 속에 나타나 있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다.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봉독한 성경을 “강론”했다는 것이다.


1.4 안디옥 학파.

  우리는 성서해석사를 공부하면서, 알렉산드리아학파와 안디옥 학파의 끊임없는 논전을 통해서 우화주의적 해석과 문법적.역사적 해석 원리 사이의 긴장이 생겨났으며, 이로 인해서 성서해석의 원리가 성숙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본격적인 강해설교는 안디옥 학파를 통해서 역사 속에 전달되었다는 주장이 타당할 것이다. 초대교부 중에서, 가장 근래의 강해설교가들이 주창하고 있는 강해설교의 형태와 근접한 구조를 가졌던 설교자 한 사람은 크리소스톰이다. 어거스틴의 설교는 상당수가 우화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한 그의 많은 설교들은 굉장히 좋은 양질의 강해설교 형태를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1.5 종교개혁자들.

  강해설교의 시대는 종교개혁자들과 함께 열리기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루터나 칼빈과 이름 없이 사장되었지만 많은 재침레교도들의 설교들도 성경본문에 충실한 해석이었던 것을 볼 수 있다.


1.6 개혁주의자들, 복음주의자들, 청교도들, 침례교 설교가들.

  개혁주의자 설교가들, 복음주의자들이다. 강해설교의 역사와 전통을 만들어 온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알렉산더 매클라렌 같은 사람은 구체적으로 강해설교의 현대적 역사를 열었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이어나 캠벨 모간 같은 사람이 강해설교를 보편적으로 인기화시켰다.

  강해설교의 정신과 구체적인 모본을 남겨준 사람은 마틴 로이드 존스라고 생각한다. 도날드 그레이 반 하우스라든지 아이어사이드 등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강해설교들이 시도되어 왔다. 최근에 현존하는 사람으로서 강해설교에 대한 많은 작품을 남기고 또 좋은 영향력을 남기고 있는 사람은 존 스타트이다.


1.7 강해설교의 현재와 전망.

  강해설교의 역사를 통해서 언제나 그 뿌리를 찾을 수가 있고 또 강해설교의 형태들이 전승되어 온 것은 사실이지만, 강해설교가 하나의 흐름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지극히 최근의 일, 즉 이 삼십년 간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강해설교를 대중적으로 보급시킨 사람은 미국의 큰 교회 목회자들이요 설교자들이었다. 미국에서는 20여 년 전부터 큰 교회들, 성장하고 있는 교회들의 경우에는 대부분 강해설교자들이 그 교회를 이끌어왔다는 통계가 나왔고, 강해설교가 성도들의 영적인 필요를 충족시키는데 효과적인 역할을 했다는 하나의 증거일 것이다.

  강해설교의 이론이 체계화된 것은 지극히 최근의 일이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 역사는 많은 강해설교자들을 이제부터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이다

 

제5장   귀납법적 강해설교


I. 귀납법적 성서연구

 이는 강해설교의 기초가 된다. 귀납법은 연역법과 대조를 이룬다. 연역법이란 일반적인 원리를 먼저 설정해 놓고 이 원리를 뒷받침 할 수 있는 특수한  상황 속에 적용 시키는 것이다. 일반적 원리에서 특수한 상황을 찾아가는 것이 연역법이다. 귀납법은 특수한 상상에서 일반적인 원리를 유추해 내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의 어떤 부분을 선택해서 연구할 때 특수한 선언인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메시지를 뽑아내는 것이 바로 귀납법이다.

1) 귀납법적 성서연구의 신학적 범주

 성경전체의 줄거리를 보고 책별연구, 문단연구, 배경연구, 문법연구로 나눌 수 있다. 배경연구르 하는데는 어떤 자료와 재료를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상당히 달라질 수 있다. 하나의 설교를 형성하기 위해서 그 사람의 신학적인 입장이 아주 많이 작용을 한다. 성서신학, 조직신학, 역사신학, 실천신학등이 설교로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귀납법적인 연구를 충실히 하기 위해서 성서연구, 책별연구, 장별연구 그리고 문학형식등에 시간을 많이 투자해야 한다.

2)주경신학적 규범

 귀납법적 성경연구는 주경신학적 규범의 틀이 있다. 첫째, 누가 썼으며 왜썼는가? 기자의 개인적인 배경과 의도를 알기 위한 것이다. 둘째, 언제, 어디서 썼는가?  그 당시 역사, 사회, 문화적 상황을 이해하기 위함이다. 셋째, 어떻게 무엇을 했는가? 이것은 본문자체의 내용이며 메시지인 것이다.

3)기본적 (구체적)절차

3.1.1 구조적 관찰 - 처음에는 본문에서 시작해서 -문단으로 가고- 문단에서 본 것을 가지고 다시 본문으로 가지고 가서 부족할 경우 장으로 간다. 장에서 읽은 것을 다시 문단으로, 본문으로 가지고 간다. 예) 룻기를 강해설교 한다면 시작전 3개월 전에 먼저 룻기에 대한 개인적인 연구를 끝내야 한다. 전체 방향을 알고 구체적인 설교 방향을 잡아야 한다.      

3.1.2 사건 기록의 관찰과 주경신학적인 틀(육하원칙),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라는 질문을 종이에 써놓고 거기에 대한 답을 써보라.

3.1.3 교훈에 관한 관찰

  비울 서신들은 별로 사건이 없고 계속적인 설교와 같은 교훈이다. 이러한 설교를 관찰하기 위해서 교리적인 신학적인 틀이 필요하다. 그 것은 본문이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가? 성령, 인간, 구원, 생활, 삶, 종말에 대해서 무엇을 가르키고 있는가? 교리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관찰자는 통일성과 논리성이 있어야 하고 불필요한 것은 과감히 버려야 한다.

3.2 해석- 해석학적 원칙을 적용해서 해석을 한다.

3.3 정리- 무엇보다 먼저 장부터 정리하는 것이 좋다. 1)장제목, 2)문단나눔, 3)문둔제목 정함, 4)현대어로 풀어쓴다. 5)본문 전체를 논리적으로 정리해본다. 6)여기서 설교적인 논리를 정한다.

3.4 적용.

4)실례 - P.125참조.

성경해석학의 과제

I. 성경해석학의 역사적 검토

성경해석학과 관련해서 구체적인 학파가 처음으로 생긴 때는 AD 180년대의 알렉산드리아 학파를 들수 있다.

1. 초대교회와 교부시대

1) 알렉산드리아 학파 (Alexandrian School )

(1) 필로(Philo of Alexandria). 필로는 유대인으로서 일종의 신 플라톤 주의 자였다. 그는 성경의 모든 문자의 배후에는 어떤 신비한 뜻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현상의 배후에 있는 것이 실체라고 하는 이원론적인 플라톤의 관념주의적 영향이다.

(2)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150?-220 AD).

교부 클레멘드는 필로의 영향으로 우화주의적( allegorical)해석의 교조가 되었다. 클레멘트는 성경의 모든 부분은 구원의 진리를 숨기고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모든 측면에서 성경을 다섯가지 측면에서 보았다. 첫째는 역사적 측면에서, 둘째는 교회적 의미에서, 셋째는 예언적의미로, 넷째는 철학적 의미로, 다섯째는 신비적의미로이다. 그리고 그는 성경의 모든 부분을 구원과 관련시켰다. 성경의 핵심은 구속사이다. 그러나 성경의 모든 부분이 다 구원에 관련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구속사를 강조하여 영해하려는 시도는 무리하다는 것이다.

(3) 오리겐(Origen ,185-254 AD)

오리겐은 클레멘드의 제자로서 인간구조의 삼분설을 근거로 영, 혼, 몸을 근거로 성경의 모든 부분에서 세가지 뜻 , 영적인 뜻, 혼적인 뜻, 몸적인 뜻이있다고 하였다. 성경의 어떤 부분을 보아도 문자적(몸)인 뜻이있고, 도덕적(혼적)인 뜻이있고, 그보다 더 깊은 영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중에도 가장 고상한 성경해석학은 영적인 해석이라고 하였다. 교회사에 있어서 우화주의적 성경해석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 사람이 바로 오리겐 교부였다.

같은 시대에 악렉산드리아 학파와 대조를 이루는 또 하나의 학파가 생겨났다.

2) 안디옥학파(Antioch School)

(1) 제롬( Jerome)- 안디옥 학파의 유명한 교부로는 제롬이 있다. 벌게이트(Vulgate) 라틴어 성경을 번역한 사람이며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달리 문자적 의미를 중시하였다.

(2)크리소스톰(Chrysostom) - 성경해석사에 있어서 크리소스톰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소위 문법적, 역사적 성경해석의 원리(Gramatical, Histotical interpretation principle)를 처음으로 제창했던 사람이다.

2. 중세기

1)대부분의 경향

초대교부시대에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디옥 학파가 대결하면서 우화주의적 해석과 역사적 문법적 해석이 공존했다. 그런데 중세기에 들어서면서 성경해석학의 경향은 대부분 우화주의적 해석으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성경을 신비하게 해석하는 경향이 증가하게 되었다. 따라서 성경은 성령의 특별한 감동을 받은 사란이나 사제(신부)들이나 해석할 수 있고, 평신도들은 그런 오묘하고 신비로운 뜻을 깨달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직자들은 이러한 경향과 함께 성경해석을 교권에 대한 도구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평신도들은 성경을 마음대로 해석 할 수 없고 사제들만이 해석할 수 있었다. 따라서 평신도들은 성경과 멀어지게 되었다. 이것이 중세기의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2)소수의 예외

중세기의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도 예외는 있었다. 예를 들면 파리의 빅토 수도원 학파의 앤드루(Andrew) 라는 사람은 글자 그대로의 의미가 본래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를 찾으려 했다. 중세기 성경해석의 암흑기에도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려는 소수의 사람이 있었다.

중세기 초엽에 활동했던 유명한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문자의 뜻을 중시해야 된다고 말했다. 그는 스콜라 철학의 영향을 받아 철학적인 설교를 많이 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문법적, 역사적인 해석원리를 중시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중세기에 대체적으로 우화주의적 성경해석학이 있었다.

3. 근세 이후

1)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했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했다는 것이다. 루터는 성경해석의 다섯가지 중요한 원칙을 제창하였다. 첫째, 문자적 해석, 둘재, 문맥의 중요성, 셋째는 역사적 상황, 넷째는 성경을 그리스도중심으로 해석하는 기독론적 해석, 다섯째는 개인의 해석의 자유를 제창한 것이다.

2) 존 칼빈(John Calvin) - 그는 무엇보다도 상식(common sense)을 가장 중요시하였다. 칼빈은 성경해석학에 있어서 첫째로 우화적 해석을 사탄적인 것, 마귀적인 것으로 취급하였다. 그는 중세기에 평신도들이 성경에서 멀어지고 성직자들만이 성경을 독점한 것이 우화적 성경해석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둘째로 역사적 맥락을 중요시하였다. 루터와 함께 성경의 역사적인 맥락을 중요시한 것이다. 셋째로, 본문의 의도 즉 저자의 의도를 중요시하였다. 넷째로 칼빈의 유명한 “성경을 성경으로”이해하는 해석의 원리를 제창하였다. 다섯째, 명료성의 원리로서 “ 성경의 위대성은 본문해석의 무한성이 아니라 한 가지의 뜻이 명료성에 있다”는 것이다. 성경이 위대한 것은 본문이 가진 명백하고 분명한 사상 때문이라는 것이다.

성경해석사를 연구하면 끊임없이 우화주의적 해석과 역사적. 문법적 해석의 원리의 갈등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우화주의적 해석이 유행할수록 평신도들이 무능해 지고, 역사적 문법적 해석이 강조될수록 교회는 개혁되고, 새로워지고 평신도들이 깨어 일어나는 운동이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 교회가 세워지기 위해서는 역사적, 문법적, 신학적 해석원리를 회복하는 것이다.

우화적 해석은 오리겐이 처음으로 시도했고, 어거스틴이 했고, 그후에 수많은 설교가들이 한 해석이다. 예) 우화주의 해석의 실례 -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II. 성경해석의 원칙들

1.성경해석의 전제들

첫째성경의 영감. 둘째, 성경의 통일성. 셋째, 문자적 명백성. 넷째, 성령님의 조명에 대한 믿음이다.

1) 성경영감에 대한 믿음 - 이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특별계시)이라는 고백이 전제이며, 기독교복음의 유일성 혹은 절대성의 가장 중요한 근거라고 생각을 한다(딤후3:15-16).

2)성경의 통일성에 대한 신뢰- 이는 점진적 계시론과 그리스도적 원리이다. 성경은 목적을 두고 점진적으로 계시되어 점점 완전하게 계시된다. 성경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계시한다는 의미에서 그리스도적인 원리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야 말로 성경의 핵심이다(요5:39, 눅24:27, 딤후3:15).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성경의 통일성을 신뢰할 수 있게된다.

3)문자적 명백성에 대한 신뢰 - 성경은 문자적으로 자명한 흐름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종교개혁시대의 성서해석에 있어서 중요한 열쇠가 되었다.

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우화주의에 빠지게 된다. 성경의 우월성을 증명하기 위해 억지로 기묘한 뜻을 부여하는 것이 우화주의 적 해석이다.

나, 불트만의 비신화와 - 역시 우화주의 해석의 현대적인 적용이다. 현대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신화나 기적은 다 비신화화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불트만의 해석은 근본적인 면에서 우화적인 해석과 동일하다. 루터나 칼빈도 이런 정신에서 성경의 “여러 의미설”(mutiples intellegentia)을 부인하였다. 성경은 한 구절에서 여러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한 가지 분명한 뜻이 있다. 문자적으로 명백한 사상이나 전제가 있다.

4)성경의 조명에 대한 신뢰 -

성경 해석에 있어서 개시교에는 두가지 중요한 원리가 있다.

첫째, 외적 원리 - 성경을 하나의 보편적, 역사적 계시로 보는 것이다. 성경은 역사적 보편적으로 이미 과거에 계시되어진 것이다.

둘째, 내적인 원리 - 성경은 또한 개인적인 진리를 담고 있다. 과거 역사적으로 계시되었던 이 말씀이 오늘의 나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개인적인 진리라면 그 적용과 깨달음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성령의 조명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성경은 연구와 함께 묵상이 필요하다. 우리는 묵상을 통해 성령의 도우심과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다. 성경은 이성만으로 다 이해할 수 있는 책이 아니라 여전히 하나님의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 “주님 내 눈을 열어 주의 귀이한 것을 보게하소서”(시119:18) 라고 기도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2. 성서해석의 일반원칙


  일반원칙과 특별원칙으로 나우어서 설명한다. 일반원칙이라는 것은 성경해석에 있어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일반적인 원리들에 대한 것이고, 특별원칙은 성경을 하나의 문학적인 장르로 보고, 문학적 구성법들을 중심으로 한 특별한 해석원칙들에 대해 말하는 것을 가리킨다.


2.1 문맥을 따라 이해하라

  성경해석의 생명은 문맥의 중요성이다. 요한복음 9장의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의 기사를 해석하고 설교를 위한 묵상을 할 경우, 9:3을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라는 말씀이 있다.  인간의 죄성이나 원죄론까지도 부인하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만약 제자들의 질문이 ”이 사람이 죄인입니까 아닙니까?“이었다면, 예수님은 틀림없이 죄인이라고 대답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의 질문은 “소경으로 태어난”이 특수한 상황이 꼭 “죄 때문입니까”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것은 이 경우에 죄 때문은 아니며, 장님으로 태어난 그 사건이 꼭 죄와 관련된 것은 아니라고 대답하신 것이다.

  고린도전서 10:23을 보면 바울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원칙에 대해 말하면서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힉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라고 한다. 우상의 제물을 먹어야 하는가 등의 문제를 중심으로 해서 바울은 모든 것이 가하지만 반드시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모든 것이 가하다”는 고린도전서 10:6에서 보면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고 말한다.

  이 문맥의 중요성을 말할 때 흔히 우리가 예로 드는 구절은 빌 4:13이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 전에는 항상 12절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자족의 교훈”이라고 말하고 있다. 12절에서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내가 배부를 때도 있었고 배고플 때도 있었고 그러한 가운데서 나는 자족의 교훈을 배웠다”고 말하면서, 13절에서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고 언급한 것이다.

  배부를 때 방탕하지 않고 여전히 주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배고플 때 낙심하지 않고 주님을 신뢰할 수 있었다. “그런즉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자족의 교훈이다. 삶 속에서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승리할 수 있다는 증언이지, 소위 불가능이 없다는 생각을 뒷받침해 주는 구절은 아니다.

  창세가 4장과 3장의 피의 제사가 공식적인 제사제도로서 확립된 어떤 성서적인 근거가 없다. 어떤 제사(소제)의 경우, 농산물이나 곡식의 제사도 기쁘게 받으셨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피 흘림의 제사만을 하나님이 받아주신다는 자기 원칙과 전제를 가지고 있으면, 그 안경을 통해서 보기 때문에 우리가 그 부분을 강조하게 된다. 창세기 4장을 객관적으로 보면, 4절에서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라는 말이 나타난다. 다시 제사에 있어서 기름은 가장 좋은 것으로 이해되고 있었다. “첫 번째 것과 가장 좋은 것”-본문의 상황 속에서는 이 정도 밖에 나타나지 않는다.

  난해구절인 고전 15:29 “죽은 자들을 위해서 받는 세례”


2.2 어휘를 이해하라

  성서해석의 일반적인 원칙 가운데 하나는 어휘를 잘 살피는 것이다. 어휘를 이해하는 원칙 몇 가지를 강조하고 싶다. 첫째, 다른 단어이지만 같은 의미를 가진 것은 없는가 살피라. ‘하나님 나라“와 ”영생“이 같은 의미로사용되고 있다. ”영생“과 ”하나님의 나라“가 다른 단어지만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둘째, 같은 단어지만 다른 의미일 수도 있다. 구원에 대한 지나친 강조 의욕, 그리스도에 대한 지나친 강조 의욕 때문에 보혈에 대한 이해가 잘못될 수 있다.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보혈을 가르치고 있지만, 붉은색이 이사야 1:18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에서는 보혈이 아니라 죄를 상징하고 있다. 빨간색 노이로제에 걸려 빨간색만 나오면 모조리 그리스도의 보혈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좋지 않다.

  셋째, 저자에 따라서 같은 단어가 다른 내용이 될 수도 있다. 구원이라는 단어가 흔히 말하는 영적인 구원, 조직신학이나 교리에 있어서의 구원의 의미와 전혀 상관없이 어려운 상태에서 구출된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도 대단히 많이 있다. 행 27:20을 보면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고 했다. 여기의 “구원”은 단순한 구조를 의미하고 있다. 엡 6:9에 “공갈을 그치라”


2.3 문법을 이해하라

  적어도 동사, 특별히 반복되는 동사는 잘 살펴야 한다. 성경에 나타난 본래의 상황을 다시 구성하는 일에 있어서 동사의 관찰이 매우 도움이 된다. 누가복음 5:1부터 보면 “무리가 옹위하여 하나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예수께서 베드로로 하여금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를 잡게 하기 전의 광경이다. 무리가... “들을새”, 예수는...“서서”, “보시니”, 어부들은 “나와서”, “씻는지라”, 예수께서 “오르시니”, “청하시고”, “앉으사”, 예수께서 움직이시는 모습들-서 계셨다가, 배에 오르시고, 그 다음에 앉으사, 띄기를 청하시고 무리를 가르치심,-여기까지만 생각해도 이 광경이 얼

마나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가? 동작 하나 하난가 눈에 보이는 것처럼 본문이 묵상된다.

  요한일서 5:18의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헬라어의 현재시제는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죄를 범하지 않는다” 즉 하나님께로서 태어난 사람마다 습관적으로 계속해서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의 사역 때문에 결국은 죄를 버리고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문법적인 정확성에 관심을 많이 기울인 번역은 NIV이다. 부정과거 용법 같은 것은 “단 한 번의 행동으로써 영원한 결과를 얻는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의 “되는”이란 단어는 한 번 됨으로써 영원히 된다는 의미를 가진다.

  접속사에 대한 관심도 필요하단. 접속사는 문장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그러므로”, “그러나”와 같은 이런 표현들에 주의해야 한다. 전치사 역시 행동의 동작을 이해하기 위해 매우 중요하다.

  로이드 존스의 책을 읽어보면 그가 “헬라어 문법이 가진..”, “헬라어 문법에 의하면..”이라는 표현을 별로 사용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헬라의 문법을 굉장히 잘하는 분이 계시는데, 어떤 교회에 부임 가능성을 가지고 선보이는 설교를 하러 가셨다. 설교 중에 헬라어 문법을 많이 사용한 모양이었다. 교인들에게 거절당했다. 헬라어 문법 때문에 그 교회에서 목회자가 되지 못한 것이다.

  4장의 문맥은 교회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교회의 한 몸이며 교회의 지체가 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2.4 문자적 배경을 이해하라

  사무엘상 12:17에 보면 “오늘은 밀 베는 때가 아니냐. 내가 여호와께 아뢰리니 여호와께서 우뢰와 비를 보내사 너희가 왕을 구한 일 곧 여호와의 목전에 범한 죄악이 큼을 너희로 밝히 알게 하시리라”는 말씀이 나온다. 이스라엘의 밀 베는 때는 비가 안 오는 시기이다. 그런데도 사무엘이 기도했더니 비가 왔다는 사실이다. 벌써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문화적 배경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 그냥 지나쳐버린다.

  마가복은 11:12~14에서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다. 성서해석학 지식이 빈곤했을 때에는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했다는 것 때문에 상당히 당황하였다. 이 부분의 성경해석에도 상당히 많은 영해가 있었다. 예를 들면 무화과나무가 나오면 이것을 이스라엘이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스라엘이 저주를 받았다고 이해하며 또한 무화과나무의 회복이 이스라엘의 회복이라고 해석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문맥을 통해 읽어보면 이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하고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신성의 능력에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다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우리를 당황스럽게 하는 이유는 때가 아닌데 예수님께서 그 무화과나무에 열매를 요구하시고 그로 인해서 그 나무를 저주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간단하게도 이스라엘의 자연 조건에 대한 무지 때문이다. 이스라엘에서는 무화과나무 철이 아니라도 항상 약간의 열매는 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전혀 무화과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이미 생명력을 상실한 것이다. 때가 아니라고 해도 다소의 무화과는 열려있어야 한다. 자연적 배경의 무지 때문에 엉뚱한 성서해석이나 결론이 가능한 것이다.

  로마서 12:20 “네 원수의 머리에 숯불을 피우라” 이것은 숯불을 머리에 피우라고 해서 정말 머리에 불을 피우라는 것은 아니다.

  옛날우리나라에서 겨울에 숯불이 귀했던 것같이 이스라엘에는 아직도 숯불이 귀하다. 이것을 빌려주는 것은 매우 친절한 행동에 속한다. 화로 비슷한 것을 머리에 이고 다니는 습관이 있는데, 이스라엘도 똑같다. 그러므로 불을 빌려주는 것은 원수에게 베풀 수 있는 단순한 친절을 말하는 것이다.


2.5 관주(cross-reference)를 사용하라.

  사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관주만 철저히 이용해도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아가페 출판사에서 간행한 성구대사전은 스트롱이나 영의 성구사전을 능가하는 것이다. 상호 관련된 다른 구절들을 사용할 때 중요한 몇 가지 주의사항이 있다. 첫째, 같은 저자의 같은 책에서 그 구절과 비슷한 구절이 있는가를 먼저 보아야 한다. 둘째, 같은 저자가 쓴 다른 책에서 인용된 구절을 살펴보아야 한다. 셋째, 다른 저자가 쓴 같은 내용의 구절이 있는가를 찾아본다. 넷째, 신약을 보다가 구약을 보고, 구약을 보다가 신약을 번갈아 가면서 보아야 한다.


2.6 저자의 원 의도를 파악하라.

  이것도 여러 번 강조된 성경해석의 생명과도 같은 중요한 선언이다. 본래 저자가 처음에 무엇을 의도하고 이 말씀을 사용했을까 하는 것이다. 원래의 본문이 우리와 동일한 시대에서 기록된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인하여 때때로 그 본래의 저자의 의도를 우리가 잘못 이해하기 쉽다.


2.7 그리스도에 대해 어떤 증언을 하고 있는가를 파악하라.

  성경은 그리스도를 지향하고 있고, 그리스도가 핵심인 것은 사실이지만 무리하게 그리스도를 증언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3. 성서해석의 특별원칙


3.1 은유와 직유.

  은유(metaphor)는 “A는 B이다”라는 표현법인데, 시편 22:6의 “나는 벌레이다”, 시편 18:2의 “여호와는 반석이다”의 경우가 그것이다. 시편 기자 자신이 고난으로 꿈틀거리는 벌레처럼 느껴져서 그랬을 것이다. 하나님과 반석도 다르지만 사물을 받칠 정도로 견고하다는 의미에서 사용한 것이다. 은유는 한 가지 유사성을 가진 다른 것을 빌어 대비시키는 표현법이다.

  직유(simile)는 “A는 B와 같다”는 표현법이다. 욥기 41:24의 “내 마음이 돌과 같다”의 표현이나 하나님 나라의 비유들에서 “하나님 나라는 마치 무엇과 같으니”가 이에 해단된다.


3.2 의인법(personification).

  의인법은 비인격적 존재를 인격적 존재처럼 설명하는 것이다. 신인동형론(anthropomorphism)과도 관계가 있다. 몰몬교는 하나님을 마치 육체적 형상을 지닌 것처럼 상상한다. “하나님께서 거니신다”는 표현이 나타난다고 해서 그가 육신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는 안 된다. “여호와의 날개”라는 표현이 있다고 해서 문자 그대로 날개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 문맥에 의해서 “보호하심”과 같은 상징적인 뜻으로 읽어야 한다.


3.3 과장법(hyperbole).

  과장법은 문학적으로 합당한 것이다. 그러나 과장법을 그대로 해석하게 되면 큰 문제가 생긴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 사용하신 과정법 가운데 하나가 “네 발이 범죄하거든 그 발을 찍어버리라”인데 그것은 그 정도로 죄에 대해서 두려워하라는 것이지, 정말로 발을 찍어버리라는 말이 아니다.


3.4 비유(parable).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이웃이 누구인가?”라는 한 가지 의미를 밝히기 위한 것이다. 이 한 가지 뜻을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 것처럼 강조하기 시작해서 주막은 무엇이며 포도주는 무엇인가 하는 식으로 되면, 그 비유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 접근하지 못한다. 비유는 한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접근하는 것이 좋다.


3.5 풍유(allegory) 또는 우화.

  알레고리는 여러 가지의 뜻이 있다. 알레고리는 처음부터 한 가지 뜻 이상의 의미를 의도한 문학형식이다. 알레고리는 성경에 많이 있지 않다. 그러나 알레고리컬한 해석이 위험하다는 것을 강조했다고 해서알레고리가 전혀 필요 없다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성경에도 많은 알레고리가 나타나기도 한다. 바울의 알레고리 중 유명한 것이 갈라디아서 4:21이하에 있다. 그런 경우엔 그것이 한 가지 이상의 의미가 있으므로 좀더 다각적 의미로 관찰할 필요가 있다.


3.6 모형(type) 또는 형상.

  모형에 관해서 성서 해석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주장하는 원칙은 “신약이 나간 데까지만 나가라”는 것이다. 유월절 어린양에 대해서 어느 선까지 해석하였는가? “유월절 어린양은 그리스도이고 누룩은 죄의  상징이다”라고 한다. 그러나 “먹던 양의 뒷다리는 무슨 의미인가”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다. 구리뱀의 경우에도, “인자”가 들리운 것같이 놋뱀이 들렸고 그것을 바라보았을 때 산 것처럼 예수님도 십자가에 달리시므로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셨다는 부분까지 신약은 언급한다. “뱀의 꼬리는 무엇의 상징인가”


3.7 예언.

  예언에 관해서도 특별히 주의해야 할 점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는 상당한 시간적 간격이 있지만, 구약시대 기자들은 그것을 한 눈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같은 관점 안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얼마나 많은 시간의 간격이 있는가를 생각하면서 문맥을 따라 조심스럽게 살피지 않으면 초림과 재림 사이의 혼동이 생길 수 있으면, 이것은 우리가 구약의 예언서를 해석할 때 가장 어려운 문제가 된다.


3.8 숫자.

  상징적으로 숫자가 사용된 경우도 있고 우발적으로 사용된 경우가 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항아리 6개, 다윗의 물맷돌 5개, 예수님의 153마리의 물고기 등에 관해서 필요없이 의미를 부여하지 말아야 한다.




4. 기타 원칙들


4.1 민족적인 적용원리

  독특하게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내용이 아닌가, 또는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원리인가를 숙고해야 한다.


4.2 최초 언급-총체적 언급의 원리.

  처음에 강조된 것이기에 나중에는 강조 없이 지나간 것들을 잘 파악해야 한다. 언제나 처음에 온전하게 언급된 부분으로 돌아가 처음 의미에 근거하여 풀어야 한다.


4.3 시간 간격의 원리.

  초림과 재림의 구별 같은 것이다. 구약의 예언서에서는 권위 있는 학자들의 도움을 얻어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중 어떤 사건에 관한 예언인가를 구별해야 한다.


4.4 구원과 교제의 원리.

  굉장히 중요한 문제인데 한 본문이 구원에 관한 메시지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원리인가 하는 점을 구별하지 못할 때 성경해석상 커다란 혼란이 일어나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

  여성에 대한 목사안수가 타당한가를 가지고 신랄하게 논쟁을 하고 있으며, 미국의 남침례교에서도 최근에 굉장한 신학적인 논쟁 가운데 하나가 여성의 목사안수 문제였다. 갈라디아서 3:23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구원에 관해서 남녀의 구별이 없다는 것이지, 목사안수에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요한복음 15장의 경우에도 그것이 구원의 본문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본문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이 말씀의 해석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대부분 알미니안적 신학 배경을 가진 사람일수록 이것을 종종 구원 문제에 관련시키려 한다.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고까지 적용하는 사람을 볼 수 있다. 주님과의 교제 속에서 맺어야 할 열매에 대한 부분이지, 구원에 관한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고린도전서 9:27도 난해 본문 중의 하나이다.


 

 

 

설교의 유형과 강해설교



Ⅰ. 설교의 유형들


1. 설교형식(본문취급)에 따른 분류


1.1 설교제목.

 설교형식 자체가 연역적이다. 제목과 문제를 내걸고 그 문제에 대해서 성경이 말하는 것을 여기저기서 뽑아 그 제목을 증명.지원하고 그 제목에 대한 설교자 자신의 결론적 요점을 전개시켜 나가는 설교이다. 무조건 제목설교를 정죄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생각한다. 불가피하게 제목설교가 필요할ㄴ 상황이 있다는 사실을 긍정하지 않을 수 없고, 강해설교를 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무조건 그 사람을 축복하시고 제목설교를 했다고 해서 무조건 그 사람을 정죄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빌리 그래함 목사도 역시 제목설교자이다. 제목설교는 성경 그 자체의 말씀보다도 설교자가 말하고 싶어하는 의도에서부터 설교가 출발할 수 있다는 위험성이 있다.

  제목설교는 많은 사람들을 훌륭하게 인도하는 일에 사용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설교의 전제 그 자체가 인간적일 수 있고 위험하다는 것이 약점이다. 트리니티 산학교의 월터 카이저교수는 심지어 “5년마다 한 번식 할 수 있다면 제목설교를 시도하십시오.


1.2 본문설교.

  본문설교자들은 대체로 본문을 짧게 정한다. 본문설교의 천재라고 일컬어지는 사람은 유명한 스퍼전이다. 본문설교는 성경의 한두 구절을 본문(text)으로 정하는 설교이다. 주제와 대지가 본문에서 나오는 설교를 전통적으로, 역사적으로 본문설교라고 불러왔다.


1.3 강해설교.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란 어떤 것인가?”라는 제목에 이렇게 대지를 요약했다. 1. 희생적인 것 2. 자기 결단적인 것 3. 궁극적으로 하나님에게서 기원한 것. 그런데 교수가 채점하는데, B도 아니고 C도 아니고 아예 F점수를 주었다. “당신의 설교는 근본적으로 전제가 잘못되었다”는 것이었다. “당신이 제목을 정했을 때 당신에게는 이미 ‘사랑이 무엇인가’라는 선입견적인 사고가 있었다. 그것이 네 설교이지, 하나님으로부터 온 말씀은 아니지 않느냐”라는 지적을 받았다.  본문을 선택하라  본문을 들어보라 ③ 본문을 분석하라  그 다음에 본문을 발전시켜라  그리고 설교를 써보아라  본문에 근거해서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가? 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는가?에 관심을 가지고 충고했다.

  강해설교라는 특수한 설교형태에 관해서 관심을 갖게 한 최초의 동기였다. 영국에서 오셨는데 로이드 존스(M. Lloyd Jones) 밑에서 설교 훈련을 받았던 사람이었다. 로이드 존스라는 이름을 알게 되고 강해설교에 대해서도 눈을 뜨게 되었다.


  

2. 설교의 내용에 따른 분류


2.1 인물설교.

  인물설교도 강해설교식으로 할 수 있고 제목설교의 형태를 따를 수도 있다. 본문에 따라서 어떤 인물은 그 맥락을 가지고 자세하게 강해적인 접근을 할 수 있다. 제목설교적인 접근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2.2 교리설교.

  제목설교의 형태와 유사하다 할 것이다. 교리를 변증하기 위해서 제목설교가 될 것이다.


2.3 윤리설교.

  제목설교도 될 수 있고 강해식이 될 수도 있다. 윤리설교는 쟁점을 다루고 있으므로 제목설교적 형태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3. 실험설교(현대적인 설교유형들)


3.1 일인칭 설교


3.2 대화식 설교와 단편설교.

  설교를 하다가 중간에 그치고 문제를 제기하여 그 문제를 가지고 대화하는 형식의 설교이다. 처음부터 어떤 문제를 제기하고 대화식으로 설교를 전개한 형식도 있다. 단편설교는 음악행사나 어떤 특이한 경우에 매우 짧게 설교를 하는 형식을 가리킨다.


3.3 드라마식 설교.





∏. 강해설교가 아닌 것


1. 간단한 주석식 설교

 “running commentary preaching"라고 한다. 본문의 구절들을 차례로 읽어가면서 주석하는 설교이다. 구미 강해설교자들은 이것은 강해설교가 아니라고 말한다. 아이언사이드의 설교도 그런 형식에 속한다. 존 맥아더라는 사람도 이런 유형의 설교자에 속한다.

  설교에 통일성이 없고 예술성이 없다. 강해설교도 하나의 설교인 이상 설교로서 흐름이 있어야 하고 절정이 있어야 한다. 설교의 분명한 목표가 있어야 하는데 간단한 주석식 설교는 장황하게 늘어 놓다 보면 핵심을 상실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많다.


2. 특정구절에 대한 설명식 설교

  “Bible explanation preaching"이라고 할 수 있다. 본문에서 어떤 한 구절만 선택해 가지고 그 구절을 간단히 설명하고 그것을 바로 적용에 옮기는 유형의 설교이다. 이것도 분문의 문화적 배경에 대한 괄이 거의 없어 주관적으로 잘못 적용될 가능성이 많다.

  교역자들이 심방 가서 이런 설교를 많이 하게 되고 특정한 경우에 자주 이런 유형의 설교를 시도하게 된다.


3. 적용이 없는 성서강해설교

  어떤 설명으로 끝나는 것이다. 학문적 관심이 깊은 설교자들이나 원어 전문가들에 의해 시도되는 설교이다. 본문에 대한 시대적 배경이나 본문의 본래 의미들이 상당히 충실하게 설교되지만 본문이 오늘의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적용의 메시지가 결핍된 설교이다. 모든 강해설교 주창자들이 생명처럼 여기는 강해설교의 혼(spirit)인 적용이 없다. 또 설교가 현실과의 대결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이런 것은 본격적인 강해설교로 간주하지 않는다.


III. 강해설교는 무엇인가?


1. 정의

  마이어(F.B. Meyer)는 “강해설교는 성경의 어떤 책, 어떤 부분들에 대하여 연속적으로 해설하는 설교”라고 했다. 도날드 그레이 반 하우스는 “하나님의 말씀의 본래의 의미를 밝혀 그 의미에 근거하여 오늘의 우리의 삶의 의미를 가르치는 설교”라고 했으며, 또 제리 바인스는 “강해설교란 성경의 한 부분을 주해하고, 한 주제를 중심으로 조직하여 전개한 다음 청중의 상황 속에 적용시키는 설교”라고 했다.

  본문을 취급하는 태도에 따라 강해적이냐 아니냐가 결정된다. 제목설교도 충실하게 준비하면 강해설교가 될 수 있다.

  존 스타트는 특별히 강해설교를 주창하지 않으면서도 사실상 모든 의미에서 설교는 강해설교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라이펠트는 강해설교의 본질을 다섯 가지로 말했다. 첫째, 본문이 있어야 한다. 둘째, 의미가 설명되어야 한다. 셋째, 보편적인 진리가 천명되어야 한다. 넷째,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조직되고 설명되어야 한다. 다섯째, 적용되도록 설명되어야 한다.


2. 강해설교의 장점


2.1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게 된다.

  설교자가 강해설교를 하려고 하면 성경본문과 씨름을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게 된다. 설교자 자신 뿐만이 아니라 그 설교를 듣는 청중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강해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슴을 배우게 된다. 성경본문이 설교의 중심을 이루기 때문에 설교자 자신과 청중들이 말씀에 더 자주 접할 기회를 지니게 된다. 설교자와 청중이 함께 성서적으로 성숙할 수 있다. 강해설교는 성경의 중심사상을 강조하게 된고 본문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게 됨으로써 성경에 청중들의 관심을 쏟도록 한다.


2.2 설교자의 폭을 다양하게 한다.

  연속 강해설교를 하게 되면, 평상시에 설교를 하지 않았던 부분들도 설교를 해야 한다. 설교자는 평소에 생소하던 성경본문도 연구하지 않을 수 없고, 따라서 전에 설교자가로 하여금 설교의 폭을 다양하게 하고, 새롭게 연구한 성경본문으로 인하여 그는 관심의 폭이 다양해지는 것이다. 강해설교를 위해서 우리의 관심 영역 밖에 있는 것을 연구하고 씨름을 하다보면 그 새로운 주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고 다양한 영역에 접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설교자가 전도서를 강해하려고 하면 평소에 관심이 없던 내용들이 어차피 나오게 마련이다. 이로 인해서 설교자는 새로운 영역에 접하지 않을 수 없고 이것은 설교자를 다양하게 만드는 기회가 된다. 그러나 제목설교를 하게 되면 설교자는 항상 자기가 좋아하는 주제만을 강조하게 되고 그 방향으로만 설교를 하게 된다.


2.3 설교자의 주관을 극복한다.

  강해설교는 그 자체의 방법으로 인하여 설교자가 자기 주관에 빠지는 것을 예방해 준다. 우리의 설교가 전적으로 객관적이 되지는 못한다. 설교를 할 때 우리가 주관적인 요소에서 완전히 해방되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설교자는 강해설교를 통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주관성을 극소화시킬 수는 있다. 강해설교라는 것은 그 방법 자체가 성경본문과 씨름을 해서 그 본문의 중심사상을 강조하게 마련이기 때문에 설교자의 주관이 최소화되는 것이다.


2.4 본문선택의 어려움을 제거시켜 준다.

  연속 강해설교를 할 때에는 다음에 설교해야 할 본문이 이미 그 순서에 의해서 나타나 있다. 다음 주일에 어떤 설교를 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은 설교자들의 공통된 어려움인데, 이 고민하는 시간을 설교준비에 쏟을 수 있다.

  1장을 하고 2장을 한 후 반드시 3장을 하려고 하다가 오히려 설교의 졸작을 만들어 내는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 순서에 엄격하게 얽매일 필요는 없다고 본다. 필요에 따라서 그 순서를 넘어가도 무방하리라고 본다.


2.5 설교자로 하여금 확신을 가지도록 한다.

  강해설교는 그 방법상 설교자의 이론이 개입되는 것을 거리고, 예방한다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설교는 진정한 하나님의 케리그마가 되고, 설교자는 이것이 단순히 “나”의 메시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메시지라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강해설교를 통해서 설교자는 확신을 가지고 강단에 서게 된다.




3. 강해설교의 단점


3.1 강해설교는 메마르고 흥미가 결여될 수 있다.

  제목설교는 자기가 좋아하는 제목을 선택해서 설교를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 강해설고는 흥미가 결여될 수가 있다. 설교자가 메마르면 그가 무슨 설교를 하든지 간에 그 설교는 메마를 수밖에 없다. 설교자가 통찰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떤 설교를 하든지 그 설교에는 그의 삶에 대한 통찰력이 개입되어 있는 것이다.


3.2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기 쉽다는 것이다.

  우리가 너무나 본문에 얽매여 있으면 자유롭게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성령의 메시지를 제한하기 쉽다는 것이다. 우리가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설교를 하면 바로 그것이 성령께서 말씀을 전달하시는 통로가 되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말씀을 통해서 성령께서 오히려 역사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비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3.3 설교의 구조적인 통일성을 결여하기 쉽다.

  이것은 강해설교를 비판하는 많은 사람들이 제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격적인 강해설교에서는 매우 치밀한 구조적인 통일성을 찾아볼 수 있다.


3.4 강해설교는 제목설교보다 시사성이나 현실성이 약화될 수 있다.

  우리가 연속 강해설교를 할 때, 때때로 계절도 잊어버리고 오직 그 본문에만 매달리게 되는 경우도 찾아볼 수 있다.

  크리스웰 목사님 같은 분은 요한계시록만 가지고 5년에 걸쳐서 주일 아침마다 연속 강해설교를 하기도 했다.

  연속 강해설교의 경우는 시사성이 어느 정도 약화되는 것이 사실이다.


3.5 설교자를 게으르게 하기 쉽다.

  본문이 있으니 그 본문을 해석하면서 설교를 대강 끝낼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격적인 강해설교에서는 오히려 더 많은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Ⅳ. 강해설교의 역사와 과제

  우리의 관심은 교리사나 설교사가 아니다. 다만 강해설교의 뿌리를 밝히고, 어떤 사람들에 의해서 주창되어 왔으며, 강해설교의 형태는 어디까지 와있고 강해설교가 가진 앞으로의 방향, 과제는 또 무엇인지를 간단히 언급하기로 한다.


1. 강해설교의 역사

  강해설교의 유형을 가지고 주장했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강해설교의 정신은 이미 성서 그 자체 안에서도 뿌리를 찾아볼 수 있다. 


1.1 학사 에스라.

  구약에서 강해설교적인 정신을 우리에게 전달해준 최초의 사람은 학사 에스라이다. 느헤미야 8:8에 보면 에스라가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는 모습이 묘사된다.

“1.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2. 그 뜻을 해석하여 3.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매 4.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우리는 에스라가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가 1. 본문을 선택했으며 그 다음에 2. 본문을 해석했고, 그 단순한 해석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3. 아마도 백성들의 삶 속에 적용될 수 있도록 전달했기 때문에 4. 계속되는 말씀을 읽어보면 그 설교의 결과가 백성들로 하여금 깨달음과 눈물을 흘리며 삶의 변화를 가져오도록 결단하는 장면에 도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선택된 구체적인 본문과 그 해석의 과정이 있었고 이것이 적용되었으며 전인격적인 반응이 뒤따랐다는 것은 에스라가 강해설교의 아주 구체적인 정신을 간직한 설교자였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구약성서적인 하나의 모범이 될 것이다.


1.2 예수님.

  신약에 들어와서 예수님은 강해설교자였는가 하는 문제는 단정짓기 어렵다. 특별히 누가복음을 보면 주님의 설교형태에서도 강해설교적인 어떤 정신을 찾을 수 있다. 누가복음 4장에는 나사렛 회당에서의 예수님의 최초의 설교라고 일컬어지는 부분이 나타난다.

 16절 이하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서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에게 응하였느니라”(눅 4:16~21).

  마르틴 루터나 칼빈이 누누이 강조한 성경해석의 중요한 원리 가운데 하나인 그리스도적 원리, 즉 말씀의 핵심을 그리스도 자신에게 적용시켰다는 것인데 이것은 강해설교자들이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엠마오 길의 두 제자에게 말씀을 풀면서 강해하신 경우에서도 율법과 선지자의 모든 예언이 그리스도 자신에게서 성취된 것을 말씀하신 예를 볼 수 있다.


1.3 사도바울.

  사도 바울에 오면 우리는 구체적인 강해설교의 형태와 그 정신이 그의 설교 속에 나타나 있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다.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봉독한 성경을 “강론”했다는 것이다.


1.4 안디옥 학파.

  우리는 성서해석사를 공부하면서, 알렉산드리아학파와 안디옥 학파의 끊임없는 논전을 통해서 우화주의적 해석과 문법적.역사적 해석 원리 사이의 긴장이 생겨났으며, 이로 인해서 성서해석의 원리가 성숙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본격적인 강해설교는 안디옥 학파를 통해서 역사 속에 전달되었다는 주장이 타당할 것이다. 초대교부 중에서, 가장 근래의 강해설교가들이 주창하고 있는 강해설교의 형태와 근접한 구조를 가졌던 설교자 한 사람은 크리소스톰이다. 어거스틴의 설교는 상당수가 우화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한 그의 많은 설교들은 굉장히 좋은 양질의 강해설교 형태를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1.5 종교개혁자들.

  강해설교의 시대는 종교개혁자들과 함께 열리기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루터나 칼빈과 이름 없이 사장되었지만 많은 재침레교도들의 설교들도 성경본문에 충실한 해석이었던 것을 볼 수 있다.


1.6 개혁주의자들, 복음주의자들, 청교도들, 침례교 설교가들.

  개혁주의자 설교가들, 복음주의자들이다. 강해설교의 역사와 전통을 만들어 온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알렉산더 매클라렌 같은 사람은 구체적으로 강해설교의 현대적 역사를 열었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이어나 캠벨 모간 같은 사람이 강해설교를 보편적으로 인기화시켰다.

  강해설교의 정신과 구체적인 모본을 남겨준 사람은 마틴 로이드 존스라고 생각한다. 도날드 그레이 반 하우스라든지 아이어사이드 등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강해설교들이 시도되어 왔다. 최근에 현존하는 사람으로서 강해설교에 대한 많은 작품을 남기고 또 좋은 영향력을 남기고 있는 사람은 존 스타트이다.


1.7 강해설교의 현재와 전망.

  강해설교의 역사를 통해서 언제나 그 뿌리를 찾을 수가 있고 또 강해설교의 형태들이 전승되어 온 것은 사실이지만, 강해설교가 하나의 흐름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지극히 최근의 일, 즉 이 삼십년 간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강해설교를 대중적으로 보급시킨 사람은 미국의 큰 교회 목회자들이요 설교자들이었다. 미국에서는 20여 년 전부터 큰 교회들, 성장하고 있는 교회들의 경우에는 대부분 강해설교자들이 그 교회를 이끌어왔다는 통계가 나왔고, 강해설교가 성도들의 영적인 필요를 충족시키는데 효과적인 역할을 했다는 하나의 증거일 것이다.

  강해설교의 이론이 체계화된 것은 지극히 최근의 일이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 역사는 많은 강해설교자들을 이제부터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이다

 

제5장   귀납법적 강해설교


I. 귀납법적 성서연구

 이는 강해설교의 기초가 된다. 귀납법은 연역법과 대조를 이룬다. 연역법이란 일반적인 원리를 먼저 설정해 놓고 이 원리를 뒷받침 할 수 있는 특수한  상황 속에 적용 시키는 것이다. 일반적 원리에서 특수한 상황을 찾아가는 것이 연역법이다. 귀납법은 특수한 상상에서 일반적인 원리를 유추해 내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의 어떤 부분을 선택해서 연구할 때 특수한 선언인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메시지를 뽑아내는 것이 바로 귀납법이다.

1) 귀납법적 성서연구의 신학적 범주

 성경전체의 줄거리를 보고 책별연구, 문단연구, 배경연구, 문법연구로 나눌 수 있다. 배경연구르 하는데는 어떤 자료와 재료를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상당히 달라질 수 있다. 하나의 설교를 형성하기 위해서 그 사람의 신학적인 입장이 아주 많이 작용을 한다. 성서신학, 조직신학, 역사신학, 실천신학등이 설교로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귀납법적인 연구를 충실히 하기 위해서 성서연구, 책별연구, 장별연구 그리고 문학형식등에 시간을 많이 투자해야 한다.

2)주경신학적 규범

 귀납법적 성경연구는 주경신학적 규범의 틀이 있다. 첫째, 누가 썼으며 왜썼는가? 기자의 개인적인 배경과 의도를 알기 위한 것이다. 둘째, 언제, 어디서 썼는가?  그 당시 역사, 사회, 문화적 상황을 이해하기 위함이다. 셋째, 어떻게 무엇을 했는가? 이것은 본문자체의 내용이며 메시지인 것이다.

3)기본적 (구체적)절차

3.1.1 구조적 관찰 - 처음에는 본문에서 시작해서 -문단으로 가고- 문단에서 본 것을 가지고 다시 본문으로 가지고 가서 부족할 경우 장으로 간다. 장에서 읽은 것을 다시 문단으로, 본문으로 가지고 간다. 예) 룻기를 강해설교 한다면 시작전 3개월 전에 먼저 룻기에 대한 개인적인 연구를 끝내야 한다. 전체 방향을 알고 구체적인 설교 방향을 잡아야 한다.      

3.1.2 사건 기록의 관찰과 주경신학적인 틀(육하원칙),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라는 질문을 종이에 써놓고 거기에 대한 답을 써보라.

3.1.3 교훈에 관한 관찰

  비울 서신들은 별로 사건이 없고 계속적인 설교와 같은 교훈이다. 이러한 설교를 관찰하기 위해서 교리적인 신학적인 틀이 필요하다. 그 것은 본문이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가? 성령, 인간, 구원, 생활, 삶, 종말에 대해서 무엇을 가르키고 있는가? 교리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관찰자는 통일성과 논리성이 있어야 하고 불필요한 것은 과감히 버려야 한다.

3.2 해석- 해석학적 원칙을 적용해서 해석을 한다.

3.3 정리- 무엇보다 먼저 장부터 정리하는 것이 좋다. 1)장제목, 2)문단나눔, 3)문둔제목 정함, 4)현대어로 풀어쓴다. 5)본문 전체를 논리적으로 정리해본다. 6)여기서 설교적인 논리를 정한다.

3.4 적용.

4)실례 - P.125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