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설교이론>>>/- 이론과 작성법

[스크랩] 구약성서를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에반젤(복음) 2020. 2. 9. 15:59



구약성서와 설교 : 구약성서를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I.  들어가는 말
   II. 올바른 설교를 위한 구약성서 해석학의 기본전제들
      1. 기독교 성서에서의 구약의 위치와 의미
         1-1. 유대교의 타낙의 순서와 그 의미
         1-2. 70인역(LXX)의 순서와 그 의미
         1-3. 신약의 순서와 그 의미
         1-4. 종교 개혁가들의 경전
         1-5. 구약성서 해석학의 과제
      2. 기독교 역사를 통해 본 "구약"에 대한 곡해
         2-1. 구약은 교의학의 시녀?
         2-2. "구약"은 지나간 약속?
      3. 구약과 신약의 관계
         3-1. 대조 모델(Kontrast-Modell)
         3-2. 상대화 모델(Relativierung-Modell)
         3-3. 진화 모델(Evolution-Modell)
         3-4. 기독론 모델(Christologie-Modell)
      4. 기독교 신앙을 위한 구약의 고유한 독자적 가치
         4-1. 하나님에 대한 이해
         4-2. 인간에 대한 이해
         4-3. 세계에 대한 이해
         4-4. 죄에 대한 이해
      5. 구약 설교를 위한 해석학의 기본전제
         5-1. "역사성"과 "계시성"에 대한 질문
         5-2. 종교사학파들의 실수
         5-3. 주석과 강해
   III. 구약이 말하는 참 설교가와 거짓 설교가
      1. 설교가로서의 예언자
      2. 거짓 설교가의 모습
         2-1. 경제적 이득을 취하려는 설교가
         2-2. 말씀과 삶이 일치되지 않는 설교가
         2-3. 소명감이 없는 설교가
         2-4. 오만불손한 설교가
         2-5. 말씀의 능력이 없는 설교가
         2-6 말씀을 훔치는 설교가
         2-7. 역사의식이 결여된 설교가
   IV. 구약 예언자들의 설교
      1. 예언자들의 "설교"는 시대적 "상황"과 밀접히 관련된다.
      2. 예언자들의 "설교"는 "전승"과 밀접히 관련된다.     
   V. 나가는 말

 

 

 

I. 들어가는 말

 

기독교가 전래된 이후 날로 비대해 가던 한국 교회는 이제 폭발적인 성장을 멈추고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어두운 시절 한국 사회의 등불의 역할을 감당했던 한국교회는 일련의 불미스러운 사건들로 인하여 이제는 사회의 지탄을 받는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제 우리 한국 교회는 철저히 과거를 돌아보고, 새로운 미래를 전망해야 할 때가 왔다. 그 중에 하나는 "한국 교회의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가 얼마나 올바르게 해석되고 설교되고 있을까"하는 문제이다. 이것은 가장 본질적인 질문에 해당된다. 밀물처럼 밀려들어왔던 교인들을 향해 한국 교회는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였는가, 아니면 세상의 풍조에 오염되어 물질적이고, 세속적이고, 비복음적인 이야기를 전달하였는가에 대한 심각한 자기성찰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교회와 설교에 실망한 "믿음을 탐구하는 지성"(intellectus quaerens fidem)들은 서서히 교회를 떠나고 있다. 우리 한국 교회는 교인들에게 잘못된 세상의 풍조를 변화시키며 힘들어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라고 설교하기보다는 오히려 세속적인 "축복"을 강조하여 복음을 "물질화"시키지 않았는가? "세상적인 축복의 개념"과 "기독교적인 축복의 개념"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다고 가르쳤는가? 세상적인 성공과 기독교적 성공의 차이는 도대체 무엇이라고 설교하였는가? 기업에서 말하는 물질적이고 외향적인 성장과 교회에서 목소리 높혀 부르짖는 성장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원칙적인 면에서 말하자면 우리 목회자는 "설교"를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오늘날 우리의 설교는 지나치게 "개인적 담론"과 "비성서적 해석"에 의존하고 있지는 않는가에 대한 솔직한 자기성찰이 있어야 한다.

본 세미나와 관련해서 생각해보아야 하는 것은 "우리는 지금까지 구약을 어떻게 설교하였으며, 얼마나 자주 설교하고 있는가"의 문제이다. 1987년 출판된 새문안 교회 창립 100주년 역사 편찬위원회에서 펴낸 새문안 교회 문헌 사료의 수치에 의하면, 한국 교회의 구약성서 활용 비율은 선교 초기부터 1945년 해방 때까지는 23%, 해방 이후 1970년까지는 23%, 1971년부터 1986년까지는 29%정도이다. 최근에 행해진 한 조사에서는 1990년대에 한국 교회의 설교에서 구약을 본문으로 선택한 것은 30%정도이다. 구약성서를 본문으로 한 설교의 회수를 교단별로 조사한 통계에 의하면, 1)예장합동 2)순복음 3)예장통합 4)침례교 5)성결교 6)기장 7)감리교 8)구세군 9)루터교 순으로 되어 있다. 또 다른 통계는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한다. 해방 전이나 해방 이후나 할 것 없이 한국 교회에서 주로 사용된 구약의 본문은 창세기, 출애굽기, 이사야, 시편 등 네 권의 책에 집중되어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통계는 한국 교회가 깊이 있고 명상적인 신학적 사상이나 역사적 통찰, 그리고 예언자적 사명보다는 성공한 인물을 중심으로 한 기복신앙이나 입지전적인 구약의 인물을 영웅담의 예화로 사용하였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하는 것은 "신약중심"의 한국 교회는 구약을 "복음에 반대되는 율법"으로 간주하면서 마르시온적인 입장에서 구약을 곡해하였다는 점이다.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말씀인 구약을 경시하고, 무가치한 옛날의 이스라엘 역사로 목소리 높여 외친 것이다.       

한국 교회는 좀 더 진지하게 구약을 바라보아야 한다. 교회는 신약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구약을 "따뜻한 마음"을 갖고 대해야 한다. 교회는 또한 "뜨거운 가슴"으로 구약을 읽고 해석하고 설교해야 한다. 제발 "알기를 탐구하는 믿음"(fides quaerens intellectum)을 토대로 구약을 읽어보자. 구약을 역사적 고서로 간주하지 말고, 지금도 여전히 경전으로서 가치가 있는 살아 운동력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고 설교해 보자. "신약중심"에서 벗어나 균형 있는 설교가 강단에서 선포될 때 한국 교회는 지금보다 한 단계 성숙한 교회가 될 것이다. 이제 구약을 좀 더 잘 설교하기 위해서 기본 전제가 될 수 있는 중요한 내용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II. 올바른 설교를 위한 구약성서 해석학의 기본전제들

 

1. 기독교 성서에서의 "구약"의 위치와 의미(참고. p.28)

구약은 하나의 특별한 책이다. 왜냐하면 이 책은 두 종교의 "거룩한 경전"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이 책은 "타낙"(TaNaK)이라고 불리는 유대인의 경전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책은 신약 "앞에" 위치하고 있는, 내지는 "나란히" 위치하고 있는 기독교인의 경전의 한(첫 번째) 부분이다. 초기 기독교는 교회가 탄생되었을 때 구약을 유대인들로부터 넘겨받았고, 신약이 경전화되어 "구약과 신약"으로 된 기독교의 경전이 탄생되기 전까지 오랫동안 이 유대인의 경전을 사용해 왔다.

그러므로 기독교와 유대교는 공통적인 경전을 소유함을 통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지만 동시에 서로 다른 경전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목회자는 설교하는데 있어서 즉시 해석학적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구약과 신약"을 경전으로 갖고 있는 기독교의 설교는 "타낙"만을 소유한 유대교의 그것과 어떻게 달라야 하는가? 공통적인 본문을(첫 번째 성서) 해석하는데 기독교와 유대교의 성서해석은 왜 달라야 하는가? 구약에 대한 기독교의 설교는 반(反)유대적 요소를 내포해야만 하는가? 이러한 질문은 기독교 신앙 내에서 구약이 어떠한 권위와 어떠한 정경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의 문제와 관련된다. 구약이 기독교 경전의 "한" 부분이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1-1. 유대교의 타낙의 순서와 그 의미
구약은 원래 유대인의 경전이었다. 그러나 히브리어로 된 유대교의 타낙을 자세히 살펴보면, 기독교의 구약과 현저한 차이점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타낙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되어있다:

1) 토라(모세 5경/ 율법서     ): 5권의 책은 가장 먼저 모아지고 "경전화"되었는데(학사 에스라의 공헌), 사마리아 사람들은 B.C. 400년경 이 모음집만을 "거룩한 책"으로 간주하였다.

전체 토라의 결론 부분은 신 34:10-12이다:

10)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11)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그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12)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더라

여기서 강조하려는 것은 1)"하나님의 선지자 모세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자요, 하나님을 대면한 자이다"라는 것과 2)"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의 창립사건이다"라는 점이다.

2) 예언서(      ): B.C. 300년경 경전화되었다. A.D. 8세기 이래로 "전기 예언서"(수-왕하)와 "후기 예언서"(사-말)가 구분되었는데, 탈무드에서는 이와는 다른 순서로 전승되었다.

전체 예언서의 결론은 말 4:4-6이다:

4) 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 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여기서 강조하려는 것은 "예언서는 모세율법을 기억나게 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3) 성문서(      ): A.D. 100년경에 와서야 경전에 포함되었다. "쓰여진 것들"이라는 뜻으로 유대인의 공적인 모임에서 낭독될 의무는 없던 문서들로 경전적 가치는 떨어지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전체 성문서의 결론은 대하 36:22-23이다:

22)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저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가로되 23)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 된 자는 다 올라갈지어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이 본문은 1)"야웨는 세계의 지배자이시다"라는 것과 2)"예루살렘이 세계의 중심이 되며, 성전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타낙의 구조와 순서의 특징은 1)히브리어 성서는 경전화 과정의 역사적 순서에 따라 배열되었다는 점, 2)서로 다른 정경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 3)토라-중심적 구조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타낙의 해석학의 기본전제는 "모세의 율법은 경전의 가장 본질적인 구성요소이며, 어느 것과도 비교될 수 없는 영원한 하나님의 계시이며 삶의 지침서"라는 것이다. 예언서와 성문서는 독립적인 의미를 갖고 있지 못하며, "토라를 향해, 토라에 비추어" 해석되어야만 하는 토라의 주석서에 불과하다.

1-2. 70인역(LXX)의 순서와 그 의미

팔레스틴 본토의 유대인들은 히브리어 경전을 사용했던 반면,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헬라어로 번역된 경전(셉투아진타, 일명 70인역 - B.C. 250경부터 알렉산드리아에서 번역)을 갖고 있었다. 이 70인역은 타낙과 본질적인 차이점을 지니고 있다: 1)70인역은 타낙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책들을 포함하고 있다. 70인역은 소위 "외경"이라 불리우는 15권(대부분 B.C. 2세기-A.D. 1세기 사이에 유대인 공동체에서 기록됨)을 더 갖고 있다. 2)70인역은 타낙과 다른 4등분 구조로 되어 있다: "토라-역사서-지혜서-예언서". 70인역의 이러한 순서는 "과거-현재-미래"라는 역사신학적 도식를 제공한다: "종말론"에 대한 강조와 "역사"에 대한 관심을 통해 타낙의 "토라중심적" 구조는 사라지게 되었다. 토라는 타낙에서처럼 맨 앞에 위치하고 있기는 하지만 성문서가 완전히 해체되고 후기 예언서들이 가장 뒤에 배열됨으로 타낙의 구조에서 가졌던 토라의 특수한 위치는 상실당하게 되었고, 역사서와 바로 연결됨으로 토라는 오히려 역사적 성격을 지닌 책이 되었다. 즉 여호수아의 인도하에 이루어진 가나안 입주는 창세기의 족장들에게 하셨던 "약속의 성취"로 읽혀지게 되었다. "창조-족장-가나안입주-왕국탄생-포로"는 연속성을 지닌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가 된 것이다.

헬라어로 번역된 이 70인역은 유대교에 의해서는 악평을 받고 거부되었지만, 후에 초대 기독교에 의해 받아들여졌고 헬레니즘 세계에 기독교를 전파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다. 신약의 기자들은 구약을 인용할 때 히브리어 성서가 아닌 이 헬라어 번역본을 이용하지 않았던가! 

1-3. 신약의 순서와 그 의미

1)신약의 구조와 순서는 놀랍게도 70인역의 그것과 동일하다:

2)세계의 "시작"을 선언하는 창세기와 세계의 "종말"을 예고하는 요한계시록은 우주사적인 테두리를 형성하고 있다. 서로는 중요한 신학적인 단어들을 공유하고 있다:

창 1-3: 하늘 - 땅 - 강 - 밤 - 낮 - 나무 - 강 - 생명나무
계 21f: 하늘 - 땅 - 강 - 밤 - 나무 - 생명나무

이 구조 속에 내포되어 있는 신학적 메시지는 "세계사의 역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역사이며, 창조주 하나님은 세계 역사의 주인"이라는 것이다: 세계사의 종말은 하나님의 역사의 종말이다.  

3)구약의 마지막 부분은 말 4:4-6은 신약으로 이끄는 교량역할을 하고 있다:

4) 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 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이 말라기의 본문은 신약에서 -세례 요한을 말 4:5에 예언된 엘리야로, 예수의 활동을 "야웨의 날"(        )로 이해하기 위해- 여러 번 인용되었다(마 17:10-13; 막 9:11-13; 눅 1:17). 신약의 본문이 구약에 이렇게 연결되므로 "구약과 신약의 정경상의 통일성"이 시도되었다: 신약은 구약의 연장선상에 있는 정경이라는 사실이 암시되고 있는 것이다. 즉 신약에서의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구약의 메시야 예언의 성취이며, 신약의 하나님은 구약의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으로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신약의 이러한 구조와 내용들을 통해 신약의 기자들이 얼마나 구약에 의존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1-4. 종교 개혁가들의 경전

종교 개혁가들은 기독교 "경전"의 형국을 좀 복잡하게 만들었다. 마틴 루터(M.Luther 1483-1546)는 경전의 범위를 정하는데 있어서는 히브리어 경전 타낙(39권)을 따르고, 경전의 구조와 순서를 위해서는 헬라어 역본인 70인역을 받아들여 "역사-신학적" 구조를 지닌 경전을 탄생시켰다. 루터는 이 때문에 소위 "외경"을 정경적 가치를 지닌 책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루터는 "외경이 개인의 경건 생활을 위해 읽혀지는 것은 괜찮으나 예배나 교리를 위해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하였다. 종교 개혁가들은 루터의 결정을 따르게 되었고,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통해 오늘날 우리 개신 교회의 구약은 "70인역의 순서에 따른 39권"으로 탄생되었던 것이다.

1-5. 구약성서 해석학의 과제  

구약에 포함되어 있는 개별 책들에 대한 해석은 1)한편으로는 경전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구조와 순서의 변이에 주목하면서, 2)다른 한편으로는 구약 전체에 흐르고 있는 "역사-신학적" 흐름을 이해하면서 실시되어야 한다. 그리고 3)구약은 신약과 나란히 "한 권"으로 묶여져 기독교의 경전이 되었다는 사실이 언제나 해석학의 기본 전제로 인정되어야 한다.

 

2. 기독교 역사를 통해 본 "구약"에 대한 곡해

오랜 기독교 역사 속에서 구약은 오해되고, 잘못 해석되어 왔다. 심지어 구약은 더 이상 현대인들에게 필요가 없는 이스라엘 사람들만의 책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많은 설교가들은 구약을 단순히 설교의 예화를 위해서만 이용하기도 하며, 때로는 구약 중 십계명이나 십일조의 계명만을 단편적으로 강조하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구약이 어떻게 곡해되어 왔는지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2-1. 구약은 교의학의 시녀? 

고대 교회에서 구약은 철저히 교의학의 시녀였다. 구약은 교의학을 위한 준비단계로서만 읽혀지고 연구되었다. 오리겐은 알레고리적인 석의 방법론을 광범위하게 사용하였고, 구약에서 모든 기독교의 교리들을 비유적인 형태로 발견하려고 하였다.

중세 시대에 구약은 교회의 신정적 통치이념을 제공해 주는 책으로 간주되었으며, 교의학적 증거본문(dicta probantia)을 제공해 주는 것 이상으로 보지 않았다.
종교개혁 시대에는 알레고리적 성서 해석을 거부하고 본문의 1차적 의미(sensus literalis)를 찾기 시작하면서, 구약을 교의학적 증거 본문 이상으로 보기 시작하였다.

18세기 합리주의 시대에 와서 성서는 더 경건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합리적인 사람이 되기 위한 목적으로 읽혀지기 시작했으며, 구약이 역사적 관점에서 취급되기 시작했다. 가블러(J.P.Gabler 1753-1826)는 역사학적 학문으로서의 성서신학이 교의학과 구별된다는 점을 밝힌 최초의 신학자였다. 그는 1787년 3월 30일 알트도르프(Altdorf) 대학의 신학교수로 취임하면서 "성서학과 교의학을 차별화하고 그 경계를 양 측면으로부터 공평하게 결정하는 것에 대한 논고"라는 제목의 강연을 행하였다. 그는 이 강연에서 "성서신학은 역사 속의 하나님의 행동을 인식하는 분야임에 반하여, 교의학은 하나님의 행위에 대해 이성적으로 연구한 것을 가르치는 분야"임을 강조하였다.  

설교자와 주석가는 개인의 주관적 해석이나 교리적 선입관을 갖고 구약 본문에 접근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설교자와 주석가는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교리적 주장을 갖고 성급하게 구약의 본문 안으로 들어가지 말고, 구약 본문의 의미가 설교자에게로 나아올 수 있도록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야 한다. 구약은 신약과 마찬가지로 살아 운동력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자신들이 알고 믿고 있는 교리에 억지로 맞추어 구약의 본문을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구약을 죽이는 일이요,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제한된 사고의 틀에 가두는 일이다. 구약은 -신약도 역시- 교리적 설명을 위해 기록된 책이 결코 아니다. 즉 구약은 교의학에 종속될 수 없으며, 교의학의 준비단계를 위한 문서로 취급될 수 없다. 구약을 본문으로 설교할 때 설교자는 교리의 함정에서 벗어나야 한다. 구약을 본문으로 선택한 설교가 지나치게 교리적일 때 이미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는 사라지고, 인간이 만든 규범적 의미를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설교자는 구약의 본문에서 살아있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설교자는 교리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된다. 구약을 교리로부터 해방시키자!

2-2. "구약"은 지나간 약속?

교회는 더 이상 구약을 신약에 비해 열등한 성서로 간주해서는 안되며, 기독교적 케리그마가 없는 고문서로 취급해서도 안된다. 구약은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이며, 오늘 교회에서도 신앙적 진리로 선포될 수 있는 하나님의 계시이기 때문이다. 이제 구약의 가치는 재인정되어야 하며, 구약의 본질적 의미는 재해석되어야 한다. 교회는 구약을 새롭게 바라보야야 한다. 교회는 구약을 살려야 하며, 구약을 넘치는 사랑을 가지고 대해야 한다. 교회는 구약을 아무런 부담없이 설교의 본문으로 선택해야 하며, 설교를 통해 구약의 본문 속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계시를 힘주어 선포해야 한다. 교회는 구약과의 새로운 만남을 시도해야 한다. 교회는 구약 본문과의 "힘든 싸움"을 통해 시공간을 초월한 구약의 계시성을 밝혀야 한다. 교회는 구약에 대해 애정 어린 마음을 갖고, 구약을 예배에 참여한 회중들에게 알아듣도록 설명해 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구약"이라는 명칭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구약"(Old Testment)이라는 명칭의 의미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시도해 보자. 이 작업은 구약의 의미성과 정경성을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창세기에서 말라기까지의 히브리어(일부 아람어 포함)로 쓰여진 39권을 "구약"이라고 부른다. 헬라어로 쓰여진 신약은 구약에 대비적인 의미를 지니며 구약의 뒤에 위치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구약"의 명칭과 위치에 대한 오해를 갖고 구약을 낡아빠진 옛 문서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동안 구약이라는 명칭은 많은 선입관(Vorurteil)과 오해(Mi verst ndnis)를 불러 일으켰다. 사람들은 "구약"이라는 단어의 부정적 의미를 강조한 나머지 구약을 무가치하며 더 이상 효력이 없는, 신약에 비해 열등한 책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성서의 통일성을 부정하면서 스스로 성서를 단절된 책으로 간주한다. 이제 "구약"이라는 명칭의 본래적, 긍정적 의미가 부활되어야 한다. 구약의 의미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시도되어야 한다. "구약"(舊約)은 '오래된 약속, 이전부터의 약속'을 말한다. 약속이 오래되었다는 것은 약속이 지나갔음을 말한다기 보다는 그 약속이 귀중하다는 것을 의미하며, 지나간 오랜 세월동안 가치있게 보존되었음을 전제한다. 그리고 약속이 오래되었다는 것은 정통성과 합법성을 보유하고 있음을 말한다. "옛 약속"은 시간적 이유 때문에 무가치하다는 의미가 아니며, 오히려 "첫 번째 약속"이라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 "첫째"는 모든 것의 근본이며 초석이며 기초이며 출발이다. 하나님의 첫 번째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두 번째 약속"이 인간에게 주어졌음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두 번째 약속(신약)은 첫 번째 약속(구약)에서 유래하였다. 두 번째 약속은 첫 번째 약속을 폐하거나 무가치하게 만들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두 번째 약속의 내용은 첫 번째의 약속이 없이는 이해될 수 없으며, 존재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두 번째 약속, 즉 "새 언약"(         )이라는 명칭은 첫 번째 언약의 본문에서 취해졌다(렘 31:31). 이것은 신학적으로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에 맺어진 언약들의 계속성을 의미하며, 구약에 있는 하나님의 언약이 파기된 것이 아니라 새롭게 이해되고 해석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새로운 언약은 옛 언약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새 언약은 옛 언약의 빛 아래에서 읽혀져야 하며, 신약은 구약으로부터 조명되어야 한다. 즉 구약은 신약의 어머니(Mutter)이며, 신약의 스승(Lehrerin)인 셈이다. 

신약이 구약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증거는 신약의 많은 구절들이 그리스도를 증거하면서 구약을 거의 문자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밝혀진다: 마 1:23 - 사7:14 // 마 2:6 - 미 5:2 // 마 2:15 - 호 11:1 // 마 2:18 - 렘 31:15 // 막 1:3 - 사 40:3 // 막 7:6 - 사 29:13 // 막 12:36 - 시 110:1. 복음서의 수많은 구절들에서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의 기초로 해석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 고백의 근거로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 말은 구약이 기독론적으로 해석되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복음서 기자가 그리스도의 사건을 기술할 때 얼마나 철저히 구약에 의존하고 있는 지를 발견할 수 있다. 복음서 기자는 구약을 가치 없고 낡아빠진 효력 없는 옛 약속으로 간주하지 않고, 오히려 유일하고도 권위 있는 합법적인 본문으로 인정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철저히 구약의 빛 아래에서 읽혀지고 있다. 구약이 없이는 신약이 이해될 수 없으며, 또한 신약이 없이는 구약의 존재가치가 없다. 사도 바울도 롬 11:18에서 "네(신약)가 뿌리(구약)를 보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너를 보존하고 있는 것이니라"라고 설파하고 있지 않는가! 고대 교회의 학자요 번역가였던 히에로니무스(Hieronymus)의 말을 들어보자: "구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물론 이 말은 구약을 기독론적으로 이해해야 된다는 말이 아니다). 초대 기독교 공동체가 헬라어로 쓰여진 경전들, 즉 신약만을 경전으로 결정하지 않고 히브리어 성서 뒤에 위치하도록 순서를 결정함으로 "구약과 신약"으로 된 "한 권"(ein Buch)의 기독교 경전이 탄생되었다. 유대교의 경전을 그리스도의 복음과 대치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버리려는 시도들이 있었지만, 초대 기독교 공동체는 유대교의 히브리어 성서를 기독교의 경전으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기독교의 경전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 하나의 기독교 성서"(die eine, zweigeteilte christliche Bibel)가 탄생되었다. 히브리어 성서는 포기될 수 없는 기독교의 초석이며,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의 기초가 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다음과 같은 브라운(H.Braun)의 지적은 의미심장하다고 볼 수 있다: "신약성서의 기자들이 구약적이고 유대적인 사고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 않았다면 헬레니즘적인 기독교는 황홀경과 신비에 빠져버렸을 것이다."

 

3. 구약과 신약의 관계

"구약과 신약"은 아무런 문제없이 서로 연결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둘 사이에는 분명 긴장관계가 존재한다.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풀기 위한 시도들을 몇 부류로 나누어 살펴보자.

3-1. 대조 모델 (Kontrast-Modell) : 구약에 대한 강한 부정

구약과 신약을 대립적 긴장관계로 보려는 시도이다. 구약과 신약의 불연속성을 주장하는 자들에게 구약은 "실패의 책"(R.Bultmann 1884-1976)이며, "대사기극" (F.Delitzsch 1850-1922)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구약은 유대인들만을 위한 책이지, 기독교인들을 위한 책은 아니다. 기독교인들에게 구약은 "무익한 책"(F.Baumg rtel 1888-1981)이며, 복수심에 불타는 야웨 하나님이 등장하는 구약은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이 등장하는 신약과 동일시될 수 없는 책이다(Marcion 85-160). 독일 개신교의 교회사가였던 하르낙(A.von Harnack 1851-1930)은 오늘의 교회가 구약을 정경의 문서로 보존하고 있는 것은 교회가 제기능을 발휘하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탄하기도 하였다.
구약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 평가는 자연스럽게 구약과 신약의 단절로 이어졌다. 그러나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연결시키며, 구약의 기독교적 의미를 밝히려는 많은 노력들이 있어 왔다. 본훼퍼(D.Bonh ffer)의 다음의 지적은 매우 중요하다: "너무나 성급하고 너무 지나치게 신약적으로만 되려는 사람은 더 이상 기독교인이 아니다". 브라운(H.Braun)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약의 기자들이 구약적이고 유대적인 사고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 않았다면 헬레니즘적인 기독교는 황홀경과 신비주의에 빠져버렸을 것이다".    

3-2. 상대화 모델(Relativierung-Modell) = 모형론(Typologie)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인정하기는 하지만, 구약을 신약의 하인으로 간주하는 견해이다. 이 모델에 따르면, 구약은 신약을 준비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구약은 모형(Typos)이며, 신약은 완성된 원형(Antitypos)으로 간주된다. 구약의 사건, 인물, 말씀, 제도들은 모형일 뿐이며, 이 모형들과 상응하는 것들이 신약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구약은 신약을 위한 예비적 서술일 뿐이며, 신약은 계시의 완성된 실제라는 주장이다. 폰 라트(G.von Rad 1901-1971)는 초기에 모형론적 구약 이해에 동의했지만, 후대에 자신의 입장을 "멍청한 시도"였다고 회고하기도 하였다.

이 모델은 모형(구약)과 원형(신약)의 상관 관계를 통하여 구원 역사의 연속성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1)이 모형론적 이해는 시간적 간격을 뛰어넘어 서로를 직접적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해석학적 장점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구약의 본문이 모형론적으로만 해석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2)이 모델은 구약의 본문이 지니고 있는 역사적 배경을 완전히 무시할 수 있는 해석상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3)구약의 본문이 원래 갖고 있지 않던 미래적 의미를 억지로 도출시킬 수도 있다.

3-3. 진화 모델(Evolution-Modell) : 약속과 성취의 관계

구약은 씨앗이며, 신약은 활짝 핀 잎사귀와 같다는 주장이다. 선적인 역사이해를 배경으로 한다. 구약은 신약을 향해 서있으며, 신약은 역사 발전의 최종 단계에 속한다(후기 G.von Rad/ W.Zimmerli/ C.Westermann). 신약은 구약을 "약속"이라는 개념으로 특징지운다(롬 4:13-25; 갈 3:14). 사실 구약의 많은 본문은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구약은 신약을 향해 나아가고 있으며, 구약에서의 예언(Prophetie)과 약속(Verhei ung)은 신약에서 성취(Erf llung)된 것으로 이해한다.

1)이러한 "약속과 성취"의 도식은 구약의 특징 중의 하나인 하나님의 역사의 미래개방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2)신약의 복음서 기자들이 구약을 이해하였던 방식이다.  3)또한 이 진화 모델은 하나님의 말씀(구약)의 진실성을 증명시키는 긍정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4)이 모델은 신약을 중심으로 구약을 해석하는 방법인데, 여기에는 위험성이 존재한다. 구약을 중심으로 보면, 구약의 모든 약속과 예언이 신약과 필연적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경우는 이미 구약 안에서 성취되었고(왕상 17:16; 사 44:26; 겔 37:14), 어떤 경우에는 예수 그리스도 이후에도 여전히 성취되지 않은 예언도 존재한다. 이 모델은 구약을 단순화시키려는 위험성을 갖고 있다.
3-4. 기독론 모델(Christologie-Modell)

구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찾으려는 시도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해석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기독교 설교가들이 매우 자주 구약을 해석하는데 사용되어 오고 있다. "구약은 오실 메시야에 대해서, 신약은 오신 메시야에 대해서 말한다"는 일반적인 주장과 관련된다. 이 모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의 중심(中心)이다. 프록쉬(O.Procksch 1874-1947)는 그의 책 "구약신학"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모든 신학은 기독론이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은 구약의 공기 안에 숨쉬고 있다. ...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존재의 뿌리를 구약에 박고 서있는 나무의 면류관이요, 그는 구약의 모든 예언의 광채를 불부치는 점화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구약을 이해할 수 없고, 구약을 떠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할 수 없다". 헬바르트(H.Hellbardt)도 극단적으로 이에 동의한다: "기독론적 해석만이 구약 본문의 적절한 해석이다".

1)모든 구약의 본문이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되지 않음은 자명하다. 그리스도와 관련되지 않는 구약의 본문은 무가치하며, 설교의 본문으로 사용되지 말아야 하는가? 이 기독론적 구약해석 방법은 구약의 역사적 배경과 독자적인 의미를 무시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2)구약을 기독교적으로 읽어야 한다는 사실은 기독론적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위에서 언급한 모델들은 기독교의 경전인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풀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기는 하지만 충분한 해답을 주지는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것은 구약과 신약의 관계가 한 두가지 개념적 도식으로 설명될 수 없는 복합적 관계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구약의 설교는 지나치게 획일적이고 단편적인 해석 방법에 얽매이지 말고, 신앙의 지적이고 이성적인 작업을 통해 구약 본문의 1)역사적이고(1차적 의미) 2)계시적인 의미(2차적 의미)를 밝혀내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4. 기독교 신앙을 위한 구약의 고유한 독자적 가치

신약과 비교하여 기독교 신앙을 위한 구약의 고유한 독자적 가치를 파악하는 작업은 쉬운 일은 아니지만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구약을 본문으로 하는 설교를 작성하는데 자신감과 가슴 벅찬 기대감을 제공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구약의 독자적 가치를 한마디로 요약할 수는 없지만, 신약 설교가 아닌 구약 설교를 위한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중요한 구약 신학적 요소들을 찾아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구약시대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밝히는 작업을 포기하는 것은 우리의 "게으른 이성" 때문이다.

구약은 신약에 언급되어 있지 않은 중요한 주제들을 우리에게 제공해주고 있다. 세계와 우주의 기원, 인간의 창조, 율법과 죄,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이해 등의 주제는 기독교 신앙에서 포기될 수 없는 중요한 믿음의 구성요소들이다. 신약이 "그리스도에 관한 책"이라면, 구약은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에 관한 책이다. 구약만이 소유하고 있는 이런 내용들은 기독교 신앙에서 결코 소홀히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p.19-20을 보라)
4-1. 하나님에 대한 이해

4-2. 인간에 대한 이해

4-3. 세계에 대한 이해

4-4. 죄에 대한 이해

 

5. 구약 설교를 위한 해석학의 기본전제

5-1. "역사성"과 "계시성"에 대한 질문

구약의 모든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의미있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으로 읽혀질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갖고 있는 초월성 때문이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시공간의 벽을 뛰어넘어 오늘 우리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와 닿는다. 그러나 우리는 구약이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었으며, 모든 구약의 본문이 역사성을 지니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설교가는 구약의 "본문과 상황"(Text und Situation)이 이미 처음부터 밀접하게 관련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구약에 대한 학문적 접근과 설교는 성서 본문이 갖고 있는 "역사적 의미"(성서 본문의 1차적 의미)와 "계시적 의미"(성서 본문의 2차적 의미)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 구약에 대한 올바른 설교를 위해서는 먼저 "구약의 본문이 과거에 무엇을 말했었는가?"가 질문되고, 다음에 "구약의 본문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가 대답되어야 한다. 신학의 위기는 구약 본문의 역사적 탐구에 머무를 때 찾아오며, 설교의 위기는 구약 본문의 계시적 의미 탐구에 머무를 때 찾아온다. 구약은 신약과 마찬가지로 원래 오늘의 우리를 대상으로 쓰여진 책이 아니라, 당시의 사람들에게 선포되고 그들을 위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는 성서의 1차적 독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구약 본문의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배경에 대한 진지한 성찰은 필수적이다. 구약의 역사적 의미를 파악하는 일을 외면한 채로 구약의 계시적 의미를 밝혀낼 수는 없는 일이다. 성서의 모든 본문을 무시간적으로 해석하는 일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며, 위험한 일이다. 성서 본문에 대한 독자 지향적 해석이 위험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본문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성실한 숙고가 진행되지 않는다면 설교자는 자의적 해석에 빠지고 말 것이다. 성서 본문에 대한 지나친 주관적 해석과 독자 지향적 해석은 지양되어야 한다. 텍스트에 대한 역사적 성찰은 본문 뒤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역사계획을 깨닫게 해준다. 성서 본문의 시대적 배경에 대한 성실한 숙고는 성서 이해의 첫걸음이며, 좋은 설교를 위한 필수적 작업이다. 본문의 역사적 상황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없이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오늘 우리에게 억지로, 무리하게 적용시키려는 과오를 범해서는 안된다.

5-2. 종교사학파들의 실수

본문의 역사성을 무시한 초월성의 강조는 우리를 알레고리 성서해석이라는 함정에 빠뜨리고 말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본문의 계시적 의미를 무시한 역사성의 강조는 구약을 신앙적 유산이 아닌 단순한 역사적 유물로 간주하게 할 것이다. 종교사학파들의 실수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들은 구약의 계시성을 철저히 무시하고 구약을 고대 근동종교의 문헌중의 하나로 인식하고 말았다. 구약의 종교는 "모든 옛 종교들의 완성이며, 고대의 모든 종교들의 꽃"(R.Kittel 1853-1929)일 뿐이다. 역사성만의 강조는 구약 본문의 생명력을 죽이는 일이다. 초월성을 지닌 성서 본문에 대한 신앙고백(credo)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본문은 단지 과거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유산일 뿐이다.
5-3. 주석과 강해

역사성을 지닌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다가올 수 있으며, 다가와야 한다. 주석과 강해는 바로 성서 본문이 지닌 역사성과 초월성 사이의 간격과 긴장을 조율하는 작업이다. 텍스트와 콘텍스트를 연결시킬 수 있는 다리를 놓아주어야 하는 학문적 작업들이다. 단순한 본문 해설이나 어구풀이가 되어서는 안된다. "주석"이 본문의 일차적 의미를 설명하는 작업이라면, "강해"는 본문의 이차적 의미를 밝히려는 작업이다. 주석은 본문의 역사적 의미에 강조를 두는 반면, 강해는 본문의 계시적 의미를 더 추구하는 작업이다. 주석은 "그때 그 사람들에게" 본문이 무엇을 말했었는 지를 살피는 입장에서 진행된다면, 강해는 본문의 원래적 의미를 상실하지 않은 채 "오늘 우리에게" 적용시키려는 입장에서 탐구되는 작업이다. 그러나 주석과 강해는 서로 독립적인 작업이 아니다. 주석은 강해를 도와주어야 하며, 강해는 주석 작업을 통해 얻어진 결과를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주석은 강해 설교의 기본이며, 출발이며, 전제조건이다. 강해는 본문의 일차적 의미를 인정하고 현재의 콘텍스트에 적용시킬 수 있는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만남은 강해의 중심이기 때문에 주석 작업은 이 만남을 성의있게 주선해야 한다. 강해 설교자는 성서본문이 선포되고 기록되던 당시의 사람들에게 주었던 의미를 무시해서는 안된다. 또한 본문이 오늘 우리에게 제시하는 삶의 방향을 도외시하는 실수를 범해서도 안된다. 성서 본문은 "그때 그 사람들에게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면서, 동시에 "오늘 우리에게 선포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III. 구약이 말하는 참 설교가와 거짓 설교가

 

1. 설교가로서의 예언자

구약의 예언자들은 훌륭한 공중 설교가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백성들과 통치자들을 향해 공적으로 하나님의 말씀(         )을 외쳤던 자들이었다. 그들은 원래 글을 쓰는 문필가들이 아니라, 주어진 말씀을 입으로 외쳤던 선포자들이었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기계적인 전달자"가 아니라, 자신들이 서있는 오늘을 분석, 비판하고 예리한 역사에 대한 통찰력을 지닌 "비판적 설교가들"이었다.

그런데 구약은 모든 예언자들을 참 설교가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구약을 읽다보면 거짓 설교가로 소개되는 일련의 예언자들을 만나게 된다. 아모스를 벧엘에서 추방한 아마샤(암 7장), 예레미야와 격돌한 하나냐(렘 28장) 등이 그들이다. 그런데 이 거짓 예언자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왕과 백성들에게 예언을 선포하고, 백성들의 영적 지도자로 활동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구약에 따르면, 이 거짓 설교가들은 주로 성전이나 궁중에서 일하던 자들로 소개되고 있지만 이 곳에서 일한다고 모두가 거짓 설교가들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참 예언자로 인정된 나단과 갓도 다윗의 왕궁에서 설교가로 활동하지 않았는가!

도대체 참 설교가와 거짓 설교가의 판단 기준은 무엇인가? 구약이 이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논쟁하고 있는 것을 보면, 구약 시대에 "참 예언자로 가장한 거짓 설교가들"이 매우 많았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예수님도 거짓 예언자들에 대해 경고하였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거짓된 설교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마 7: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이러한 경고는 매일 매일 설교하는 우리 목회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적인 말씀이 아닐수 없다. 구약이 말하는 거짓 예언자들의 판단 기준을 살펴보며, 설교자로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뒤돌아보도록 하자.

 

2. 거짓 설교가의 모습

구약은 거짓 영의 분별이 매우 어렵지만 꼭 필요하다고 말한다. 구약은 거짓 설교가들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2-1. 경제적 이득을 취하려는 설교가

미 3:5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는 이에 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도다"

미가는 거짓 설교가란 예언 활동을 통해 이득을 취하려는 자라고 고발하고 있다. 그는 어떤 댓가를 바라고 말씀을 외치는 자이며, 돈을 받으면 무조건적으로 축복을 외치는 자이다. 예언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익(사례)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 거짓 예언자들의 선포의 주제나 내용은 그들이 얻을 수 있는 소득의 기대에 따라 선택된다. 돈과의 종속관게, 이것은 바로 거짓 설교가들의 결정적 표시이다. 그렇다면 참 설교가란 죄와 불법에 침묵하지 않고 경제적 이익에 초월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이다.

2-2. 말씀과 삶이 일치되지 않는 설교가

렘 23:14 "내가 예루살렘 선지자들 중에도 가증한 일이 있음을 보았나니 그들은 간음을 행하며 행악자의 손을 굳게 하여 사람으로 그 악에서 돌이킴이 없게 하였은즉 그들은 다 내 앞에서 소돔 사람과 다름이 없고 그 거민은 고모라 사람과 다름이 없느니라"

아내와 다른 이웃을 속이는 자는 거짓 설교가이다. 사회의 도덕성의 상실을 촉진시키고, 윤리적 죄악을 행하는 자는 아름다운 미사여구를 사용하며 외친다고 할지라도 거짓 설교가이다. 말씀은 거룩하게 외치나, 행동은 타락된 모습을 보이는 자이다. 이 윤리적 기준은 실제적인 행동에 대하여 간과하기 쉬운 공식적인 판단이 공정한 것임을 입증해 준다.

2-3. 소명감이 없는 설교가

렘 23:21 "이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내가 그들에게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하였은즉"
암 7:15 "양 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나니"

거짓 예언자는 부름 받아 일하는 자가 아니지만, 참 예언자는 부름 받아 일하는 자이다. 어원학적으로 예언자(    )는 아카드어 nabium(부름 받은 자)와 관련된다(J.Jeremias). 구약의 참 예언자들은 역사의 위기상황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말씀을 동시대인들에게 전하는 자들이었다. 이것이 바로 설교가의 카리스마이다. 맡겨진 말씀은 현재를 위한 말씀일 수도 있고, 미래를 위한 말씀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예언자들은 스스로 도를 깨우쳐 미래를 예고하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소명 체험이 없는 설교가는 목회와 설교에 진지할 수 없으며, 성실할 수 없다. 소명 체험은 설교가에게 있어 가장 기본적이다. 참 설교가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자이다.

2-4. 오만불손한 설교가

암 7:12 "아마샤가 또 아모스에게 이르되 선견자야 너는 유다 땅으로 도망하여 가서 거기서나 떡을 먹으며 거기서나 예언하고"
렘 28:10 "선지자 하나냐가 선지자 예레미야의 목에서 멍에를 취하여 꺾고"
렘 23: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거짓 몽사를 예언하여 이르며 거짓과 헛된 자만으로 내 백성을 미혹하게 하는 자를 내가 치리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며 명하지 아니하였나니 그들이 이 백성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거짓 예언자의 모습은 오만, 불손, 자만, 방종, 협박으로 나타난다. 참 예언자들에게도 독설과 욕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방자한 모습은 아니었다. 참 설교가는 겸손한 자이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자신의 의를 드러내지 않고, 언제나 진실과 겸손의 모습으로 옷입고 있는 자이다. 거짓 설교가는 청중을 무시한다. 

2-5. 말씀의 능력이 없는 설교가

렘 28:8-9 "나와 너 이전 선지자들이 자고로 여러 나라와 큰 국가들에 대하여 전쟁과 재앙과 염병을 예언하였느니라 평화를 예언하는 선지자는 그 예언자의 말이 응한 후에야 그는 진실로 여호와의 보내신 선지자로 알게 되리라"
신 18:22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지니라"

예언의 성취 여부는 매우 중요한 판단 기준이었다. 거짓 설교가의 외침은 공허하며, 능력이 없다. 또한 자신의 죄와 죄로 인한 재앙에 관해서 침묵을 지키는 자, 정의와 불법에 관한 물음을 현재의 결정과 미래의 기대 안에 포함시키지 않는 자는 거짓 설교가이다. 고전 예언자들은 왕과 백성들의 죄를 지적하고, 심판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거짓 예언자들은 청중들에게 임할 심판을 선포하지 않았다.

2-6. 말씀을 훔치는 설교가

렘 23:30-3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보라 서로 내 말을 도적질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그들이 혀를 놀려 그가 말씀하셨다 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
렘 23:28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몽사를 얻은 선지자는 몽사를 말할 것이요 내 말을 받은 자는 성실함으로 내 말을 말할 것이라 겨와 밀을 어찌 비교하겠느냐"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마음에서 나온 묵시들"(23:16)을 알리는 예언자에게 경고한다. 그는 계속해서 자신의 마음과 자신의 꿈과 자신의 환상을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과 교훈과 예리하게 구별한다(23:9).
참 설교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선포하는 자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이다. 설교의 위기는 자신의 생각과 개인적 경험을 마치 계시를 통해 받은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위장하는데서 시작한다. 설교는 자기 변명을 위한 수단이 아니며, 자기 자리를 견고히 하기 위해 청중들을 향해 위협사격을 가하는 수단이 아니다. 참 설교가는 자신의 소원과 의지를 꺾고, 자신의 근심이 하나님의 뜻에 압도당하도록 자신을 내어놓는 자이다.

여기서 예언에 대한 용어상의 오해를 지적할 필요가 있다. 예언은 한문으로 豫言(미리 예)이 아니라, 預言(맡길 예)이다. 전자의 의미는 앞일을 미리 예고하는 사람,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말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후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라는 뜻이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미래의 길흉을 점치는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맡겨진 하나님의 말씀을 동시대인들에게 전하는 자들이었다. 맡겨진 말씀은 현재를 위한 말씀일 수도 있고, 미래를 위한 말씀일 수도 있다. 예언자의 선포는 결코 미래를 향한 말씀에 국한되지 않는다. 미래적이면서 동시에 현재적이다. 예언자들은 현재의 질서의 모순에 눈을 뜨고, 현재를 비판하면서 다가오는 하나님의 미래를 대비시키고 역사의 방향전환을 시도했던 자들이다. 예언 선포의 출발점은 언제나 "받은 말씀"이었다. 예언자는 그에게 주어진 구체적인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자였다.

2-7. 역사의식이 결여된 설교가

렘 27-29: 예레미야와 하나냐의 대결

하나냐는 위로가 되는 평화를 외쳤지만 시대의 역사적 흐름을 읽는데 실패했다. 거짓 설교가는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백성들의 사고와 판단을 마비시키는 자이다. 무조건 축복이나 외치는 자이다. 역사의 격동 속에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전혀 알지 못하는 자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역사의 흐름에 동참하지 못하기 때문에 잘못된 구원 약속을 선포하게 된다. 거짓 설교가는 자기 시대의 혼란의 이유를 알지 못하여, 역사에 대한 성찰의 결여로 현실을 오판한다.

우리 모두 뒤돌아보자. 우리 목회자들이 오늘 한국 사회의 시대적 흐름을 얼마나 파악하고 있으며, 역사적 상황에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가를. 우리 설교가들에게는 사회에 대한 거대한 통찰력을 소유할 수 있는 "비판적 지성을 겸비한 믿음"이 필요하지 않은가?

 

IV. 구약 예언자들의 설교

 

1. 예언자들의 "설교"는 시대적 "상황"과 밀접히 관련된다.

예언자들은 역사의 구체적인 무대 위에서 살았던 자들이다. 그러므로 각 예언자들의 설교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살았던 시대적 상황을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B.C. 9세기 엘리야가 살았던 시대는 바알 종교에 의해 야웨 신앙이 극도로 위협받고 있을 때였다. 그는 야웨와 바알의 공존을 추구하며 "종교의 세계 개방주의"를 외친 오므리 왕조(B.C. 881-845) 시대에 야웨의 놀라운 능력을 전파한 예언자이다. 그러나 B.C. 8세기에 살았던 소위 문서 예언자들(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미가)의 메시지는 그 성격을 달리하게 된다. 아모스는 북왕국의 마지막 경제적 부흥기라고 할 수 있는 여로보암 2세(B.C. 786-745) 시대에 깨어진 하나님의 정의(    )와 공의(    )를 고발하고,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알린 예언자이다. 북왕국 출신의 유일한 문서 예언자인 호세아는 앗시리아의 팽창정책이 시작되어 북왕국이 고통 당하다가 멸망당하기 직전까지 활동하면서(B.C. 750-725) 가나안적인 바알 숭배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도덕적으로 타락한 여인과 비교하며 그들의 종교적 배교를 고발하고 있다. 호세아도 아모스처럼 다가오는 이스라엘의 패망을 선포한다. 이사야는 다른 예언자들 보다 훨씬 깊이 국제 외교정치와 관련된 예언을 선포한다. 그는 시리아-에브라임 전쟁(B.C. 734-732)과 B.C. 701년의 산헤립의 침공 때에 왕들에게(아하스와 히스기야) 하나님께 대한 굳건한 믿음(   )을 요구하였고(사 7:9; 28:16; 30:15), 야웨 하나님의 거주지인 시온 예루살렘의 안전을 선포하였다. 유다의 시골마을 가드 모레셋 출신 미가(B.C. 725-711)는 시골 소작농들의 고뇌를 이해하고, 가난한 자를 압제하는 예루살렘 정부 관리들의 악행을 고발한다.

이스라엘과 유다가 멸망한 후의 예언의 성격은 "심판" 선포에서 "구원" 선포로 변한다. 바벨론 포로기 때에 활동했던 예언자들(제2이사야, 에스겔)은 성전과 민족의 회복을 외치고, 다가오는 해방의 기쁜 소식을 전한다. 희망의 신학자들인 셈이다. 포로에서 돌아온 이후 예언자 학개와 스가랴는 예루살렘 성전 재건과 성전 제사의 회복을 외쳤다. 무너진 성전 재건만이 돌아온 팔레스틴 땅에서의 풍요를 위한 전제조건임을 강조하였다. 제2성전이 건축된 후 말라기와 제3이사야가 예언자로 등장한다. 이들은 성전에서 행해지는 형식적인 예배를 고발하며, 하나님의 보편주의적 사랑을 외친다.    

예언자들이 살았던 시대의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 경제적 상황을 파악하는 노력은 예언자들의 설교의 핵심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이다. 예언자들은 이 땅에 발을 디디고 살았던 자들이었고, 이 땅의 공기를 마시며 살았던 자들이었다. 예언자들은 "오늘"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역사계획을 선포하였으며, "오늘"의 체제와 모순을 비판하였던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예언자의 설교에 대한 이해는 곧 예언자의 시대에 대한 이해인 것이다. 

 

2. 예언자들의 "설교"는 "전승"과 밀접히 관련된다.

오랫동안 예언자들은 "율법의 해석자"(Gesetzesausleger)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예언자에 대한 이해가 달라졌다. 예언자는 "율법과 무관한 자유인"이며, 하나님과 직접 교통하는 "창조적인 인격의 소유자"로서 "윤리 종교의 창시자"로 인정되고 있다. 하지만 예언자를 이스라엘의 옛 전승과 무관한 개인으로 간주하는 평가에 대한 새로운 반성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예언자들로 하여금 자기 시대의 역사를 정확히 분석하고, 비판적으로 조명하게 만든 요인은 도대체 무엇일까? 예언서를 주의깊게 읽다보면, 예언자들은 "오늘"의 문제를 옛 이스라엘의 전통 속에서 탐구하고 해석한 자들임을 알게된다. 예언자들은 옛 이스라엘의 신앙전통을 이어받아 자기 시대의 문제를 새롭게 분석하고 "내일"을 조망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역사와 전승의 해석자들이었으며, 전승과 함께 성장한 자들이었다. 예언자의 메시지는 "전승과의 비판적 대화"였으며, "전승을 현실화하는 대화"였다. 우리는 예언자들의 활동 속에서 "역사와 전승에 대한 해석자"로서의 기능이 포함되어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각 예언자들의 역사해석과 현실이해는 그들이 어떤 신앙적 전승의 계승자인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이스라엘 예언 역사상 처음으로 국가의 멸망을 선포한 아모스의 예언은 북왕국의 선택전승(출애굽 전승: 2:10; 3:1-2; 5:25)을 야웨 심판의 근거로 삼고 있다: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하셨나니"(3:2)

아모스가 선포한 심판예언의 출발은 선택전승이었다. 그러나 아모스는 하나님이 영원히 이스라엘 편에 서 있을 것이라는 전통적인 사상을 부정한다. 그에게 있어서 선택전승은 더 이상 구원의 보증이 아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정의와 공의를 상실한 이스라엘의 존속을 보증하시는 분이 아니다. 아모스의 예언은 선택전승과 대결하고 있으며, 출애굽 사건을 상대화시키고 있다. 아모스는 하나님이 이스라엘만 애굽에서 이끌어낸 것이 아니라, 아람 사람을 길에서 그리고 이스라엘의 원수 블레셋을 갑돌(Crete)에서 인도해 내었다고 선포한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는 내게 구스 족속 같지 아니하냐 내가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블레셋 사람을 갑돌에서, 아람 사람을 길에서 올라오게 하지 아니하였느냐"(9:7).

아모스는 특별한 이스라엘의 구원역사를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개념으로 바꾸어 놓았다. 아모스는 또한 거룩한 전쟁사상에 기원을 두고 있는 "야웨의 날"(        )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다. 이스라엘에게는 구원의 날이며, 이방 국가에게는 패배와 심판의 날로 간주되던 "야웨의 날"을 아모스는 새롭게 이해한다: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뇨 그 날은 어두움이요 빛이 아니라"(5:18)

야웨는 이 날에 이스라엘을 "위하여"(f r/for) 이방 백성들과 싸우지 아니하고 이제 이스라엘을 "대항하여"(gegen/against) 싸우신다는 것이다. "야웨의 날"은 이제 가난한 자들(    )을 착취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대(大)재난의 날이요, 심판의 날이 된 것이다.

호세아의 선포 역시 출애굽 전승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시작이며,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모든 사랑을 베푸셨고, 은혜의 줄로 그들을 인도하셨다(12:9; 13:4). 호세아에게 있어서 광야는 이스라엘이 전적으로 야웨를 의지한 곳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대한 순수했던 사랑을 소유하고 있던 곳이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광야시대를 흠모하는 유토피아적 이상주의자이다. 이에 반해 호세아는 땅 점유 전승과 왕국 전승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인 해석을 시도한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밟는 순간부터 바알 숭배의 유혹에 넘어간 것으로 보았으며(9:10),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의 고향인 기브아를 범죄의 장소로 간주하였다(9:9; 10:9).

이사야는 아모스와 호세아와는 다른 전승의 계승자이다. 그의 예언은 시온-다윗전승에 기초한다. 그는 호세아가 외친 광야시대를 흠모하지 않으며, 출애굽 전승에도 전혀 관심이 없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백성을 국가로 이해하고 있으며, 유다의 구원은 국가 안에서 이루어 질 것임을 선포하였다. 그는 국가의 문제를 비판하였을 뿐 국가 질서의 완전한 멸망을 외치지 않는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거주지이며 하나님의 역사의 중심지인 시온이 어떤 위기 속에서도 보존될 것이며, 다윗 왕조는 계속될 것이라고 외치고 있다. 그는 시온이 세계의 중심지가 될 것이며, 거기로부터 율법이 나오며 많은 백성들이 순례객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2:1-5).

왕국 시대에는 각각 따로 선포되었던 북왕국의 출애굽-광야전승과 남왕국의 시온-다윗 전승이 포로기의 예언자들에게서는 통합되어 나 그 증거는 포로기 때 활동한 익명의 예언자 제2이사야의 예언에서 쉽게 찾아질 수 있다. 그의 예언 선포 안에는 세 개의 선택 전승들(출애굽, 시온, 다윗)이 녹아 있다. 제2이사야는 출애굽 전승에 기초하여 오고 있는 구원의 사건을 제2의 출애굽 사건으로 해석하였다(사43:16-21; 48:20-21). 그는 남왕국의 시온-다윗 전승도 알고 있었다. 예언자는 황폐된 도시 시온은 회복되고 하나님의 백성과 열방의 사람들이 그리로 몰려들게 될 것임을 선포하였다(사 41:27; 45:14; 46:13). 파수꾼들과 평화의 사절단이 시온에서 야웨의 왕국을 선포하고, 이스라엘 하나님의 구원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제2이사야의 예언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하나님에 의한 세계창조에 대한 전승이 새롭게 등장한다(사 43:1,7,15; 44:2,21; 51:9-10). 그 이전 시대에 어떤 예언자에 의해서도 인용된 적이 없는 이 창조 전승은 제2이사야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첫 번째 역사행위를 증거하는 것이며, 그 분의 구원 의지에 대한 특별한 증언을 담고 있는 전승이다. 우리는 제2이사야에게서 원래는 서로 독립되어 있었던 구속사 전승과 창조 전승의 현저한 혼합을 발견하게 된다(사 44:24; 54:5).     

모든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의 옛 신앙전승을 자기 시대에 새롭게 해석, 적용시킨 자들이었다. 그들은 전승된 하나님의 역사계획을 항상 다시 읽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과거에 행하신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옛날 이야기로 간주하지 않고, "오늘"의 사건으로 재현시키려 노력하였다. 각 예언자들이 서 있던 역사의 현장은 달랐지만, 그들의 예언이 뿌리내리고 있던 전승은 달랐지만 예언자들은 언제나 "우리는 누구인가?"를 물으며 신앙의 정체성을 확인하려 했던 위대한 신학자들이었다.       

 

V. 나가는 말

 

지금까지 구약성서를 올바르게 설교하기 위해 필요한 몇 가지 신학적인 내용들을 살펴보았다. 이것들을 기초로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하고자 한다.

(1)구약과 신약의 관계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근거하여 구약을 설교해야 한다. 이제는 더 이상 구약을 신약의 빛 아래에서 읽으려고 하지 말자. 그리고 구약과 신약을 대립적인 긴장관계로 보려는 시도를 포기하자.

(2)구약 본문의 역사적 배경 이해를 중요하게 취급해야 한다. 본문의 현재적 적용에 치우쳐 본문이 주는 원래적 메시지를 간과하지 말자. 상황과 시대에 따라 다르게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분석하자.

(3)구약 본문 속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본문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에 귀를 기울이자.

(4)교리적 설명으로(예를 들자면 삼위일체론, 기독론, 원죄론, 예정론, 성령론등) 구약의 본문을 풀이하려는 시도를 가급적 피해야 한다. 구약을 더 이상 교리적 증빙문서로 생각하지 말고, 교리의 노예로 취급하지 말자.

(5)참 예언자들이 지녔던 설교가로서의 모습을 본받자.

(6)구약만이 갖고 있는 고유한 특성들을 잘 파악하여 설교에 활용한다.

(7)구약은 한 권의 책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39권의 합성본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다음성(多音性)과 다층성(多層性)을 인정하고, "구약의 내적인 만남과 대화"(통일성)를 시도해 보자. 39권의 서로 다른 목소리가 함께 대화하면서 "한 분 하나님"을 고백하고 있음을 잊지 말자. 
◆ Workshop을 위한 주제들 : 기독교 신앙을 위한 구약의 고유한 독자적 가치 ◆

 

1.하나님에 대한 이해
  1)영원하신 하나님:"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 분"(시 90:2; 50:13)
                   :신의 계보(Theogonie)에 대해 침묵
  2)거룩하신 하나님:구약의 종교는 "거룩함의 종교"(J.H nel)
                   :거룩함의 대상들 - ①거룩한 장소들 ②거룩한 물건들(법궤, 성막)
                                       ③거룩한 절기들(무교절, 수장절, 칠칠절, 안식일)
  3)질투하시는 하나님:    -독점적 경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의지
  4)인자하신 하나님(출 34:6)
  5)살아 계신 하나님:야웨의 존재성(Sein)이 아니라, 야웨의 활동(Wirken)과 관련
  6)인격적인 하나님:①기도, 제사, 서원, 맹세, 전쟁에서 "야웨의 이름"을 사용
                     ②神人同形同性論(Anthropomorphismus)
                     ③神人同感論(Anthropopathismus)
  7)한 분이신 하나님:①다신론(Polytheismus)
                      ②일신론(Henotheismus)-여러 신들중 한 신만 숭배
                      ③윤리적 유일신론(Monolatrie)-나에게는 한 신만 존재
                      ④절대적 유일신론(Monotheism)-다른 신존재를 부정
  8)권능자로서의 하나님:①야웨 하나님의 강력한 호전적 활동들 ②창조주 하나님
  9)의로우신 하나님:   /     - 상대방을 향한 올바른 행위와 성품

 

2.인간에 대한 이해
  1)피조물로서의 인간: 창조주인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
    ·영웅화, 신격화될 수 없는 인간 - 인간의 신격화에 대한 신학적 저항
    ·신의 자리에 오를 수 없는 인간(사사, 왕, 예언자)
  2)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지닌 인간(창 1)
    ·하나님의 최고 창조물로서의 인간
    ·하나님의 사귐의 유일한 파트너로서의 인간
    ·하나님의 대리통치자로서의 인간(인간은 하나님의 초상이다)
  3)땅의 먼지(   )로 피조된 인간(창 2)
    ·아담(   )과 아다마(    ) - 형이하학적 물체성을 지닌 인간
    ·유한적 존재로 창조된 인간
    ·생기(창 2:7): 인간은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의존적 존재이다.
    ·인간 모두는 평등한 사회적 존재(D.S lle)
  4)인간의 두 얼굴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인간인 동시에 초라한 모습을 지닌 인간
  5)남자(   )와 여자(    )의 창조
    ·여자는 남자의 완전한 동격이며 보완(   )이다.
    ·단성적 인간의 창조가 아니라, 분명히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여 창조
    ·남자와 여자의 창조는 창조의 완성이다.
    ·하나님은 단성이다(고대근동: 신들의 결혼): 인간을 신적 능력의
                                  유일성으로부터 격리시키려는 신학적 노력

3.세계에 대한 이해
  1)세계는 하나님의 창조적인 말씀의 산물
    ·    동사의 의미(Creatio ex nihilo)
    ·세계는 하나님 자신이 아니며, 본질상 철저히 하나님 자신과 구분된다.
    ·자연주의적 범신론(Pantheism)의 거부
  2)아름다운 창조세계 - "보시기에 좋았더라"
  3)세계의 역사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G.von Rad)
    ·죄악된 인간의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사는 계속된다.

 

4.죄에 대한 이해(창 3-11)
  1)罪에 대한 신학적 이해
    ·죄:㉠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불순종
          ㉡피조물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망각(자기절대화, 자기신격화, 하나님에게로의 자기높임)
    ·죄의 결과:
          ㉠자신과의 부조화:인간 내면의 균열, 수치, 부끄러움, 자기를 감춤
          ㉡하나님과의 부조화: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짐(에덴에서의 추방)
                              :스스로의 인식, 판단, 결정
          ㉢자연과의 부조화:가시나무, 엉겅퀴, 땅의 저주, 뱀의 저주
                           :피조세계와의 균열, 갈등, 적대감
          ㉣타인과의 부조화:갈등, 살인, 복수
    ·죄의 침입:선악과 이야기(하나님에 대한 단순한 순종에서 벗어남)
    ·죄의 증대:형제살해(수평적 파괴) →칼의 유입(복수의 증가) →
                 하늘의 아들들과 땅의 딸들의 결혼(수직적 파괴/ 지상세계와
                 하늘세계의 경계가 무너짐) →
                 바벨탑사건:인간 죄악의 종착역(하나님께 대한 도전)
                           :거대주의(Titanismus)에 대한 욕구와 높아지려는 교만
  2)罪에 대한 인간학적 이해
     ①육체적, 심리적 현상으로서의 죄의 결과
       ·수치, 공포, 책임전가, 상호불신, 자아의 혼란, 거짓
     ②인간사회의 언어적 비통일성(언어의 다수성)은 죄의 결과
  3)罪에 대한 문화사적 이해
     ①인간과 토지(자연)의 적대적 관계는 죄의 결과
     ②문화와 문화와의 갈등(목축업과 농업)은 죄의 결과
     ③발달된 과학기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폭력적 괴물이다.
                      : 하나님 없는 문화의 발전은 비극적 파국을 초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