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서를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1
이 글은 Southwestern Journal of Theology(Vol. 34 No.1,Fall, 1991)에 실렸던 것으로 Southwestern Journal of Theology지의 허락을 받아 번역 게제하였습니다.
인물 이사야와 이사야서
로버트 프린스/노스웨스트 힐스 침례교회 담임목사
서 론
이사야서는 질과 양 모두에서 구약성경의 선지서들 가운데 거인이라 할 만 한다. 역사적으로 이 책은 유대 공동체들과 기독교 공동체에게 있어 권위있는 책이다. 예를 들어 유대의 미쉬나에서 이사야서는 가장 빈번하게 인용된 책이며 쿰란 공동체의 사해두루마리에서 이 책은 가장 많이 필사된 예언서이다. 신약성경에서는 이사야서가 어떤 선지서보다 더 많은 411회나 인용되었다.
인물 이사야
이사야의 가문
이사야는 구약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선지자 대열에 낄 수 있는 인물이지만, 그의 개인적 배경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야훼는 구원이시다”라는 의미를 가진 이사야라는 히브리어 이름은, 언어학적으로 “여호수아”, “예수”, “호세아”, “엘리사” 등과 유사하다. 이 이름이 이사야 선지자 개인에게 어떤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는지는 모르나(사 8:18) 이는 이스라엘에서 상당히 흔한 이름이었다(대상 3:21; 25:3,15; 26:25; 스 8:7,19; 느 11:7). 그러므로 그의 이름이 그의 탄생이나 그의 부모의 종교적 신념에 대해 실질적인 정보를 제공해 주지는 못한다.
이사야의 생애에 대한 정보 자료는 이사야서 자체에서 발견되는 기록과 열왕기하의 평행 구절들, 특히 열왕기하 18장 13절~20장 21절 등에서 얻을 수 있다. 이 선지자는 주전 760년경 혹은 직전에 예루살렘에서 태어났다고 추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의 부친 아모스(Amoz)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전혀 없으며, 부친의 이름이 영어로는 “아모스”(Amos: 선지자 아모스)와 발음이 유사하지만 히브리어에서는 그런 유사성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유대의 전승에 의하면 이사야의 부친 아모스는 아마샤왕의 형제였다고 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사야는 유대 왕가의 한 인물이었던 셈이다. 분명 예루살렘의 왕과 통치자들, 선지자들은 이사야와 친했던 것 같다(사 7:3; 28:7, 14).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는 개인적으로, 정부의 고위층에서 이루어지는 민감한 세부적 결정 사항들에 대한 정보까지 완벽하고 신속하게 취득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사야가 귀족 출신임을 확실하게 입증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왕궁에 대한 그의 친숙성 및 왕에 대한 그의 손쉬운 접근은 그가 뼈대있는 가문에서 태어났음을 암시해주며, 아울러 그가 훌륭한 사회적 지위에 걸 맞는 교육을 받고 그에 걸 맞는 특권까지 누렸음을 암시해준다.
이사야서의 기록에 의하면 선지자는 결혼을 한 사람으로서 아내를 “여선지자”(prophetess: 한글 개역, “내 아내”)라고 부르고 있다(8:3).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하나는 수알야숩으로서 “남은 자가 돌아올 것이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었으며 다른 하나는 마헬살랄하스바스로서, “신속하게 약탈하고 재빨리 노략질한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주전 701년 히스기야 치세에 맞은 대(大)위기 이후 이사야가 얼마나 오래 생존했는지는 불확실하다. 전승에 의하면, 이 선지자는 므낫세의 시대에 톱으로 몸이 두 쪽 나는 죽음으로 순교를 당했다고 한다. 이 전승이 설득력이 있고 므낫세에 대해 알려진 바와도 일치하지만, 이사야가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는 우리가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다.
이사야의 말과 행동에는 분명 많은 요인들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클레멘츠(R. E. Clements)는 이런 요인들을 다섯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첫째 구약성경 지혜 문헌의 어법과 언어, 둘째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야훼 예배, 셋째 왕궁과 다윗 혈통의 중요한 전통들, 넷째 초기 이스라엘의 성전(聖戰) 전통, 다섯째 선지자 아모스의 설교이다. 1이런 영향들을 한데 아우르고 이사야에게 어떤 지침과 사명을 부여한 사건은 그의 소명이었다(6:1~13). 이 소명과 관련해, 스키너(J. Skinner)는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라는 서두 구절이 단순한 연대기적 진술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이사야가 북왕국에서 일어난 최근의 사건들을, 유능한 지도력의 사라짐과 더불어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하나의 경고로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사야는 어쩌면 웃시야의 죽음을 혼돈의 시대가 도래할 징조라고 느꼈을 것이라고 스키너는 말하고 있다. 2스키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6장의 환상을 이와같은 우려에 대한 대답으로 간주한다면, 그 환상의 의미가 최소한 어느 정도는 우리의 마음에 보다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사야가 존경하던 한 군주, 그가 지혜롭고 노련한 정치적 수완을 지닌 인물이라고 보았던 한 군주의 사망에 그의 생각이 완전히 사로잡혀 있을 때, 그는 이스라엘의 진정한 신적 왕이신 하나님에 대해 계시를 받았던 것이다. 동시에 이사야는 이 민족을 여호와께서 어떻게 다루실 것인가에 관한 궁극적 이슈들을 깨닫게 되고 이로써 암울하고 위협적인 미래를 자신감과 소망으로 맞이할 수 있었다(위의 책, 같은 면).
이사야의 소명에 내포된 영적 진리들은 그의 사역 전체를 주도하고 있다. 첫째, 그 체험 속에는 야훼의 압도적인 위엄과 거룩함에 대한 강렬한 의식이 존재하고 있다. 스랍들은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사 6:3).
나님의 위대하심과 권능에 대한 이런 의식은 이사야의 발언 전반에 고루 침투해 있다. 둘째로, 이사야는 자신의 평생 사명이 왕이신 하나님의 사자가 되는 것임을 의식하고 있었다. 보좌에 앉아 계신 야훼는 강퍅하고 악한 백성들에게 “가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이르라”고 이사야에게 명령하신다(6:9). 셋째,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귀환하리라는 어떤 소망이 이 소명 체험 가운데 존재하고 있다. 장차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임함에도 불구하고 거룩한 씨, 야훼께서 자신을 위해 택하신 일부분이 그 땅의 그루터기로 남아 있을 것이라고(6:13) 본문은 말한다(Skinner, I~XXXIX, xxiii~xxv).
앗수르의 위협 가운데서 행한 이사야의 예언 활동
소명 체험으로 어떤 방향과 힘을 얻은 이사야는 유다 백성들 사이에서 적극적인 예언 활동의 삶을 시작하였다. 다수의 학자들이 이사야 선지자의 생애를 고르지 않은 세 시기로 구분하고 있다. 첫 번째 시기는 웃시야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해 아하스의 통치 시초까지 이어진다. 둘째 시기는 시리아~에브라임 연합군의 위험한 침략기를 포괄한다. 세 번째 시기는 앗수르인들에 의한 통치 시대를 포함하고 있으며 이는 주전 701년의 침략과 구원으로 종결된다(위의 책, xxv).
그의 당대에 발생한 수많은 변화들이 이 선지자의 사역을 위한 무대를 마련해주었다고 할 수 있다. 존 브라이트(John Bright)가 말한 대로, 이스라엘은 자체 역사의 첫 500년 동안 국제적 권력의 큰 공백기 가운데 활약했다. 당시는 이스라엘의 존재를 극심하게 뒤흔들만한 강력한 제국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주전 8세기 중엽 그 모든 상황이 변화되었다. 그리고 그 지역 전체의 상황은 결코 전과 같은 상황으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3유다 왕국의 규모와 세력은 웃시야의 긴 치세로 정점에 달하였다. 웃시야의 명성과 그에 관한 존경심은 솔로몬 다음이었는데 그는 자국의 경제 자원과 군사력을 육성하여 블레셋과 아라비아인들을 정복했을 뿐만 아니라 암몬 족속에게서 조공을 받았고 국가를 요새화하고 군대를 재조직하며 재무장시켰다(대하 26:1~15).
분명 그의 큰 권세는 그를 아주 교만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같은 상황속에 웃시야는 제사직의 권위를 찬탈하고자 했으며 심지어 성전에 들어가 제단에 분향하려고까지 했다. 대제사장이 80인의 제사장들을 거느리고 그를 뒤따라가 말렸으나 왕은 막무가내였다. 웃시야는 분향할 준비를 하고 향로를 손으로 잡은 채 제사장들에게 분노를 발하다가 갑자기 그의 이마에 문둥병이 발하여 성전 밖으로 나가게 되었다(대하 26:16~20).
웃시야가 문둥병에 걸린 것은 대략 주전 750년경으로써 이어 왕이 된 그의 아들 요담의 치하에서도 유다는 그 지역에서 가장 안정적이고 강력하며 또 번영하는 국가로 계속 존속하였다. 하지만 불행히도 상황은 급변하려 하고 있었다. 30년이 채 못되어 북 왕국은 멸망하고 유대의 미래는 극심한 불안에 빠지게 된다.
웃시야가 죽을 무렵 강력한 앗수르 제국이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앗수르가 강대국으로 부상하자 북 왕국 이스라엘은 유다보다 먼저 그 영향을 받는다. 그 시대에 북 왕국에 위대한 지혜와 기술이 있었다면 이스라엘이 보존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현실을 파악할 능력이 부족했던 것 같다(Bright, 273).
이사야는 웃시야가 죽던 해부터 시작되는 선지자로서의 생애의 첫 기간에, 백성들에게 야훼의 임박한 심판을 직시하며 의롭게 살아가라고 촉구하는, 그런 메시지를 주로 전했던 것으로 사료된다(사 1:1~6:13). 이사야는 백성들에게 그들이 주께 죄를 범했다고 선포하면서, 회개하여 깨끗함을 얻으라고 촉구하였다(1:18~20). 이 시기에 그가 왕궁과 직접적인 접촉을 했다는 증거는 보이지 않는다(Skinner, I~XXXIX, xxv.).
이사야는 사역의 두번째 시기에 정치적 고문의 역할을 하였다. 주전 735~733년의 위기에 시리아의 르신과 이스라엘의 베가 동맹군이 예루살렘으로 진군해왔다(왕하 16:1~5; 사 7:1). 아하스왕과 유다로 하여금 자신들과 연대해 앗수르에 반역을 도모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유다의 요담이 이 반역 행위에 동참하기를 거부하자 베가와 르신은 그에게 압력을 행사해 그의 마음을 바꾸고자 하였다. 그 시점에 요담이 죽고 그의 아들 아하스가 그를 이어 왕이 된다. 이 새 왕을 폐위시키기 위해 베가와 르신은 유다를 침략하였다(왕하 15:27~16:6). 필사적으로 버티던 아하스는 마침내 앗수르의 디글랏빌레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최선의 행동 방침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아하스가 이같은 행동 방침을 취하기로 결심한 줄 알고 이사야는 자기 아들 스알야숩을 데리고 유다왕에게 가서, 그와 대면해 베가와 르신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것이라고 위안의 말을 던진다. 그리고 아하스에게 앗수르를 의지하지 말고 여호와를 의지하라고 권면한다. 왕의 결심이 흔들릴 때 이사야는 그 유명한 임마누엘의 예언을 하게 된다(사 7:2~25).
이사야의 웅변적 호소와 자극적 격려에도 불구하고 아하스는 선지자의 충고를 거부하고 앗수르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 요청에 응해 디글랏빌레셀은 다메섹을 공격하여 그 곳을 점령하고 그 곳 백성들을 사로잡아 길로 옮기며 르신을 죽였다(왕하 16: 7~9). 그 다음에 앗수르왕은 이스라엘로 눈을 돌린다. 이 때 만일 엘라의 아들 호세아가 베가를 암살하지 않고 그에게 조공을 보냈더라면 앗수르왕은 이스라엘을 아마 완전히 멸망시키지 않았을 것이다(왕하 15:30).
아하스가 이사야의 충고를 거절한 후 이 선지자는 아하스가 통치하는 동안 더 이상 국가 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지 않았던 것으로 사료된다. 분명 이스라엘의 호세아왕은 처음에 앗수르왕에게 진심으로 항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디글랏빌레셀에 이어 그의 아들 살만에셀이 왕이 된지 얼마 되지 않아 이스라엘 왕 호세아는 애굽과 동맹을 맺으려 하고 앗수르에 대해 조공을 거부하였던 것이다(왕하 17:1~4). 브라이트는 이 극도로 무분별한 결정을 “이스라엘의 자살”이라고까지 묘사하였다(Bright, 275).
당시 애굽은 남을 도울 만한 상황이 아니었는데 이를 간파하지 못하고 무리하게 애굽에 의존한 호세아의 조처는 앗수르인들을 화나게 만들었으며 이에 앗수르인들은 이스라엘을 침략하고 사마리아성을 3년 동안 포위 공격하였다. 호세아 9년 혹은 주전 722 (또는 721)년의 늦여름 어느 시기에 사마리아는 함락되었다. 무수히 많은 이스라엘인들이 메소포타미아와 메대로 사로잡혀 갔다. 그곳으로 끌려간 그들은 결국 역사에서 사라지고 만다(왕하 17:5~6). 한편 앗수르 왕이 실제로 사마리아를 정복했는가에 대해서는 논쟁이 일고 있다. 전통적으로 사르곤 2세가 사마리아를 정복한 것으로 인정되고 있기는 하지만 앗수르의 기록이 변질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일부 증거가 있다. 그래서 살만에셀이 이 전쟁을 시작하고 사르곤이 끝냈을 가능성도 있다.
아하스가 앗수르에 대한 반역 세력에 동참하기를 거부했으므로 유다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으나 그 후 다시는 자유로운 독립 국가로 존재할 수 없었다. 앗수르에 도움을 요청함으로써 유다는 앗수르의 속국이 되었다. 아하스는 자신의 통치 기간 내내 이 나라에 복종해야 했다.
이사야 예언 활동의 제 3기는 히스기야가 유다왕으로 즉위하던 때와 일치한다. 히스기야는 사르곤왕이 죽으면서 일어난, 앗수르에 대한 열국의 배반 행위에 동참했던 것으로 사료된다(사 20:1~6). 이사야는 이런 배반을 격렬히 탄핵하고 큰 재앙이 올 것을 선언하였다(28:14~22; 30:1~7; 31:1~3). 선지자의 충고에 유다가 어떻게 행동하기로 결정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앗수르가 이 배반 세력을 분쇄할 때 유다는 멸망을 모면했던 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유다 왕이 선지자 이사야의 충고를 따랐다고 추정하는 것이 합당하다.
히스기야가 통치 초년에 이사야의 경고를 따랐다 하더라도 나중에는 분명 그의 경고를 따르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르곤이 앗수르를 통치하는 동안은 유다왕이 배반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르곤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산헤립이 즉위하자 히스기야는 분명 앗수르의 통제를 벗어날 때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히스기야는 조공 바치기를 거부하고 국가 방어의 조처를 취했다(왕하 18:7). 불행히도 앗수르는 히스기야가 상상한 만큼 약하지 않았다. 주전 701년 산헤립은 히스기야를 치기 위해 진격해왔다. 상황이 절망적임을 깨닫고난 유다왕은 앗수르 군대가 라기스를 포위하고 있는 동안 산헤립에게 메시지를 보내 화해를 요청하였다(왕하 18:14). 화해의 조건은 무거웠다. 유다는 영토의 일부를 잃고 전보다 더욱 많은 공물을 바쳐야 했다. 히스기야는 여호와의 성전에서 금까지 벗겨내야 했다(왕하 18:16).
주전 701년 이후의 어느 시점에 산헤립은 다시 예루살렘을 공격하였다. 이는 분명 유다 편에서 다시 반역적 행동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무렵 이사야는 하나님의 심판 도구가 되었던 앗수르가 죄악적인 교만으로 인해 하나님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는 결론에 도달했던 것으로 보인다(사 10:15~19). 앗수르의 죄 때문에 하나님은 바야흐로 유다에서 앗수르를 쳐부수고(14:24~27) 자기 백성을 구원함으로써(10:24~27) 자신의 주권을 보여주고자 하셨다. 이 위기의 와중에 이사야는 야훼께서 예루살렘을 구원하시고 앗수르인들을 패주시키실 것이라고 예언하였다(왕하 19:5~7, 20~34).
이사야의 예언처럼 밤에 여호와의 천사가 나타나 앗수르 진영에서 18만 5천명의 군사를 죽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다음날 아침 산헤립은 급히 니느웨로 돌아가고 거기에서 자신의 아들들인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에게 암살당했다(왕하 19:35~37).
이사야는 커다란 위기의 때에 이처럼 담대한 예언을 발한 후 민족의 시야에서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일부 전승에 따르면 므낫세가 그를 죽였다고 하나, 이런 기사의 자료는 후대의 것으로써 그다지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이사야의 개인적 특징
앗수르가 몰고온 위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예언 사역을 수행한 이 용감한 선지자는 진정으로 살아있는 역동적 인물이었다. 이사야의 생애에 관한 세부적인 내용은 역사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지만 우리는 그의 활동과 발언에서 다수의 개인적 특징을 수집할 수 있다. 드라이버(S. R. Driver)는 이사야 선지자가 정치가이자 개혁가, 신학자, 시인이었다고 말한다. 4이사야의 정치가다운 기질은, 아람과 에브라임 연합군의 침공 시에 중재 역을 수행한데서 엿볼 수 있다. 그는 왕궁에 들어가 당시의 국제적 위기와 관련된, 하나님이 주신 메시지를 담대히 선포하였다. 이 선지자의 개혁가다운 면모는 유다 왕국의 정치적 사회적 해악을 바로잡기 위한 활동에서 나타난다. 이사야에게 있어서 야훼에 대한 참다운 신앙은 억압당하는 자들을 위한 정의와 구제의 요청을 의미하였다(사 1:17).
신학자로서 이사야는 선배 예언가들과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사야는 그의 소명 체험에서 극명하게 부각되었던, 야훼의 위엄과 거룩하심을 크게 강조하였다(Driver, 109.). 우상 숭배에 빠져 야훼께 불충한 모습을 보이는 한 민족을 향해, 이사야는 야훼만이 살아계신 하나님이며 역사의 주권자라고 선언하였다.
이러한 모든 면 외에도 이사야는 시인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클레멘츠가 지적한대로 이사야는 수사학과 설득법에 고도로 숙달한 높은 교육을 받은 인물이었음에 틀림없다. 구약성경의 인물 가운데 어느 누구도 그처럼 훌륭한 해학과 교묘한 언어 유희를 보인 적이 없다. 나아가 이사야는 과장법과 완곡어법의 달인이었다. 드라이버의 말처럼 이사야서는 비유적 이미지들의 다양성과 장엄함이 선지서들 가운데 으뜸이다. 따라서 이사야의 예언은 내용뿐만 아니라 문학적 예술성에서도 중요하다.
이사야서에 관한 비평적 문제들
이사야서의 통일성에 관한 이의
이사야의 책은 규모와 범위, 내용, 영감이 거대할 뿐만 아니라 논쟁거리도 그만큼 많이 제공하고 있다. 사실, 구약성경 연구와 관련한 모든 논쟁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한 가지는, 이 책이 전적으로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만 기록한 것인가 아니면 그의 이름 하에 두 사람 이상이 집필한 것인가 라는 문제이다.
이 논쟁의 뿌리는 유대의 탈무드까지 소급될 수 있다. 바바 바트라(Baba Bathra)는 “히스기야와 그의 일행이 이사야, 잠언, 아가, 전도서를 썼다”(15:1)고 진술하고 있다. 해리슨(R. K. Harrison)의 주장에 의하면, “썼다”라는 동사는 “편집했다” 혹은 “편찬했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한다.5 만일 그렇다면 이사야서는 여러 가지 신탁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그의 제자들이 후대에 그 신탁들을 현재의 형태로 배열시켰다고 추정할 수도 있다.
초대 교회에서는 이 책 전체를 이사야라는 인물이 기록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일반적 경향이었다. 주후 2세기의 유대인 저술가, 사무엘 이븐 게카틸라의 아들 모세는 이사야서에 관한 주석을 한 권 집필한 바 있다. 그는 이 주석에서, 이사야서 앞장들의 예언은 이사야 자신이 발언한 것이나 후속적인 부분은 제 2성전기에 집필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와 견해를 같이하는 유대 학자 이븐 에스라(1092~1167)가 그의 진술을 담고 있다.
그러한 진술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사야서에 관한 논쟁이 본격적으로 불붙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후반기였다. 이사야서의 단일성에 관한 전통적 견해에 도전하고, 40~66장을 포로기 말(末)에 바벨론에서 살았던 익명의 작가가 집필한 것으로 본 최초의 현대 학자는 1775년에 그에 관한 저서를 낸 도덜레인(J. C. Doderlein)이었다. 6 이 미지의 선지자가 기록한 부분(40~66장)은 제2 이사야서(Deutero~Isaiah)라고 불렸다. 스키너의 말에 의하면, 구약성경 연구에서 이 견해가 우세한 위치를 점하게 되자 보수적인 학자인 프란츠 델리취까지도 그의 이사야서 주석 제 4판(1890)에서 이사야서의 단일성에 관한 변호 입장을 포기하였다고 한다(위의 책, 같은 면. Harrison, 771면에 의하면, 델리취는 당대의 비평적 압력에 굴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이사야가 이사야서 전체를 기록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으며, 제2 이사야서라는 개념에 결코 무조건적으로 찬성하지 않았다고 한다.
학계에서 그처럼 폭넓은 동의를 얻었던 제2 이사야서에 관한 주장은 언제나 내적 증거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그 내적 증거는 세 가지 주요 범주로 구분될 수 있다. 역사적 전제, 신학적 개념, 언어와 문체가 바로 그것이다.
이사야서가 2인 이상의 저작이라는 첫 번째의 가장 결정적인 내적 증거는, 이 책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역사적 배경이다. 40~66장의 저자가 담고 있는 역사적 환경은 바벨론에서의 유대인 포로 생활 및 주전 539년경에 바벨론을 정복한 고레스의 시대와 가장 긴밀하게 들어맞고 있다. 이 장들에서 선지자는, 먼 미래가 아닌 자기 당대의 어떤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한 인상을 풍긴다. 이사야서의 전통적 견해를 비평하는 자들은, 이사야가 160년 뒤의 미래로 자신의 예언적 시각을 투영하고 이 시각을 그와 같은 다수의 장들(40~66)에서 계속 견지하였다는 전제에 이의를 제기한다(Skinner, XL~LXVI, xvi~xviii).
일부 선지자들이 자신들로부터 먼 미래의 시대를 내다본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예는 드물었으며 그 가운데 어느 누구의 글도 이사야 40~66장의 길이와 폭에 필적할 만한 것은 없었다. 만일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그 후반부의 장들을 기록했다면, 그가 동시대인들이 알지 못하는 사건들을 언급하고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았을 법한 논증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그는 동시대인들을 전적으로 무시하였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 스키너의 견해이다(위의 책, xviii).
이사야서의 단일성을 논박하는데 사용되는 두 번째의 주요한 내적 증거는 신학적인 요소이다. 신학적인 문제를 일으키는 첫째 요인은 양 부분에서 하나님에 관한 개념이 모종의 차이점을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즉 40~66장은 하나님의 무한성과 영원한 본질을 언급하고 있는 반면 1~39장에서는 이런 속성들이 광범하게 탐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로, 1~39장에서는 남은 자 교리가 지배적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반면 40~66장에서는 이것이 부차적 관심사로 나타나고 있다. 셋째, 이스라엘의 사명과 운명에 관한 견해에서도 양 부분은 차이점들을 보인다. 넷째, 1~39장에서는 메시아 왕이 중심 위치를 차지하는 반면 40~66장에서는 야훼의 종이 중심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위의 책, xx~xxi.).
이사야서의 단일성을 배격하기 위해 제시되는 세 번째의 내적 증거 분야는, 언어와 문체이다. 스키너도 말했듯이, 40~66장의 전반적 문체는 전반부의 문체와 강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어떤 개괄적 의미에서, 이사야의 문체는 “압축과 박력”이 특징을 이루고 있으나 제2 이사야서의 문체는 유동성을 강하게 보이며 “부연과 반복의 경향”을 지니고 있다(위의 책, xxii.).
제2 이사야서에 관한 이런 견해가 크게 우세한 힘을 얻은 것은 사실이지만 미해결의 문제도 아직 다수가 남아 있다. 보수적인 학자들은, 이사야 40~66장 부분이 예루살렘의 어떤 현존하는 성전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포로기 이전의 배경과 어울리는 것 같다고 말한다. 이런 문제점들에 비추어, 1892년 둠(B. Duhm)은 56~66장이 포로기 이후의 선지자에 의해 집필되었다고 주장하고 이를 “제3 이사야서”라고 불렀다. 그의 이런 입장은, 역사적 시사점, 신학적 개념, 언어와 문체의 차이 등에 근거를 두고 있다(위의 책, xxix.).
현대의 성경 신학계에서는 우리가 이사야서로 알고 있는 이 책이 최소한 세 명의 저자에 의해 저술되었다는 견해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1~39장의 단일성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한다(보수적인 유대인 학자 Yadday는 컴퓨터 분석을 통해 이사야서의 단일성을 증명하고자 하였다. 그의 통계적 분석이 보여주는 바에 의하면, 이사야서에는 1~35장과 40~66장이라는 두 개의 서로 다른 부분이 존재하며 1~12장 및 40~48장 간에 가장 큰 차이점들이 존재한다).
이사야서의 단일성에 대한 변호이사야서의 복수 저작설이 우세한 힘을 얻었지만 이 견해가 보수적인 입장의 반론을 충족시킨 것은 아니다. 복수 이사야서 이론의 초기 비평가 가운데 한 사람은 알렉산더(J. A. Alexander)였다. 그는 1865년에 이 책의 단일성을 변호하였다. 7 알렉산더는 먼저, 40~66장의 저자와 같은 위대한 인물이 흔적조차 없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은 개연성이 희박해 보인다고 주장하였다. 알렉산더의 입장을 받아들인 영(E. J. Young)도 이런 의문을 제기하였다. 40~66장의 저자가 과연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선지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면 그가 자기 존재에 대해 아무런 증거도 남기지 않고 역사에서 사라진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8둘째로, 알렉산더는 이사야서의 단일성에 오랜 전통이 존재함을 지적하였다. 근대에 들어서기 이전만 하더라도 이 책의 저자가 두 사람 이상이라는 견해는 진지하게 제시된 적이 없었다. 비교적 최근의 학자들은, 70인경이 다른 책들을 분할하고 있으면서도 제2 혹은 제3 이사야서에 관한 증거를 제공하지 않는다고 부언하였다. 게다가 주전 125년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제1 쿰란 두루마리는 39장과 40장을 단절시키지 않았다. 필사자는 아마도 선대의 두루마리를 복사했을 것이다. 따라서 주전 3세기경에도 이미 단일 이사야서의 전통이 확고하게 확립되어 있었다고 추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다(Young, 539.).
알렉산더의 셋째 주장은 이것이다. 이 선지자들의 발언이 과연 주제, 신학, 문체 등에서 그처럼 다르다면 어떻게 해서 그들 모두가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의 저작으로 간주되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Schmitt, 26~27; Harrison, 769). 넷째, 신약성경이 이사야서의 여러 부분을 인용할 때 1~39장과 40~66장을 구별하지 않았다고 이 보수적인 학자는 지적한다. 신약성경에서는 모두가 “이사야”의 글로 인용되었다(Schmitt, 26~27; 참조. 마 3:3; 8:17; 12:17; 13:14; 15:7; 막 1:2; 7:6; 눅 3:4; 4:17; 요 1:23; 12:38~39,41; 행 8:28,30,32~33; 28:25; 롬 9:27,29; 10:16,20). 다섯째, 외경 집회서가 이사야서를 하나의 단일체로 보았다고 알렉산더는 주장한다. 여섯째, 그는 40~66장, 특히 56~66장이 주전 8세기의 상황과 잘 어울린다고 지적하였다(Schimitt, 27.).
이사야서에서 발견되는 문체의 다양성과 관련해, 보수주의 학자들은 문체의 다양성에 입각한 논증이 불확실하고 때로는 주관적이라고 응답하였다. 이사야는 여러 해에 걸쳐 사역을 행하였으므로 그의 목적, 청중, 분위기, 시대에 따라 그의 문체가 변하는 게 당연하다는 것이다. 9
고난받는 종
이사야서 연구에서 두 번째의 주요한 비평적 문제는 야훼의 종에 관해 이야기하는, 본서 특정 부분의 성격에 관한 것이다. 둠(Duhm)은 자신의 주석 초판에서 일부 단락을 예언의 나머지 부분과 구별해 “종의 노래”라고 불렀다(42:1~4; 49:1~6; 50:4~9; 52:13~53:12). 그 때부터 이 부분들을 독립적인 시(詩)로 생각하는 것이 보편화되었다. 대부분의 현대 학자들은 그 부분들이 이사야나 제2 이사야에 의해 기록되었다고 믿지만, 일부 학자들은 이 구절들이 예언의 나머지 부분보다 후대에 나왔을지도 모른다는 입장을 피력한다. 10신약성경은 이 구절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분류하고 있지 않지만 이들을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으로 특별하게 인정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예수님이 자신을 이 단락들 가운데 어느 것과 직접 연결시켰다는 증거가 없다는 사실이다. 누가복음 4장 21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을 이사야 61장 1~2절 전반 절과 연계하신 바 있다. 이 구절은 그 정신이 종의 노래와 아주 흡사하므로 일부 학자들은 이 구절도 종의 노래에 포함시킨다. 기독교 시대의 초기에 이사야에 묘사된 종이 메시아라고 생각한 유대인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메시아가 고난을 당한다는 것이 믿기 어려웠으므로 보통 해석에 수정을 가하였다. 이사야서의 탈굼에서는 종의 승귀가 메시아에게 적용되었으나 고난은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적용되었다. 나중에 그리스도인들이 종의 노래에 관해 메시아적 해석을 굽히지 않자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이 종이 집합적 이스라엘을 의미한다고 주장하였다.
집단주의적 접근법(종을 하나의 집단으로 보는 견해)이 인기를 끌던 18세기까지는 이 단락들에 관해 메시아적 해석을 거부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별로 없었다. 그러다가 19세기 말에 집단주의적 견해에 대한 반발이 시작되었다. 많은 저술가들은 이 종을 집단적 이스라엘과 동일화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노래에 나오는 종의 성격이 이사야서의 다른 곳에서 발견되는 이스라엘의 성격과 판이하게 달랐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노래는 어떤 이상적 인물을 가리키고 있다는 해석이 보다 가능성이 높은 것처럼 보였다. 이 종의 모델의 후보자는 히스기야, 웃시야, 여호야김, 스룹바벨, 고레스, 이사야, 예레미야, 제2 이사야 등이 포함되었다. 오늘날에는 이 후보자들 가운데 폭넓게 지지 받는 인물이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이 단락들이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종이라고 불리는 이상(사 41:8) 적어도 종의 노래 가운데 첫 번째 것에서는 그 종이 이스라엘 국가라고 추정해야 한다. 그러나 이 노래들을 계속 훑어보면 개인적 차원이 보다 깊어지는 것처럼 보인다(52:13 ~ 53:12).
따라서 종의 노래 문제에 관한 최선의 해법은 다음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이 노래들이 집합적 이스라엘을 염두에 두고 시작되었으나 끝에 이르러 한 인물에 시선을 돌리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 인물은 이스라엘이 이룩했어야 할 어떤 상태를 개인적으로 구현하고 이스라엘의 구속을 제공할 인물이다. 기독교적 신앙의 눈으로 볼 때 이 단락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죽음, 장사, 부활로 성취되었다.
이사야서의 중요한 주제들
이 짧은 글에서 이사야서의 내용을 충분히 탐구한다는 것은 지면 관계상 불가능하지만 일부 중요한 주제들을 집중 조명해 보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첫 번째의 주요한 주제는 하나님의 백성의 구속이다. 사실 이것은 책 전체 특히 40~55장의 중심 개념이다. 이사야는 특별히 책의 서두에서 그의 백성에 대해 강한 심판의 어조를 발하면서도 여전히 소망의 표현을 잊지 않는다(7:3~25; 9:2~7; 11:1~9). 본서의 제2부에서 선지자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포로 생활에서 구해내고 그들의 우상 숭배죄를 정결케 하며 그들의 마음을 변화시킬 것이라고 말한다(43:1~44:23).
이사야의 예언에 나타난 두 번째 중요한 주제는 하나님의 주권이다. 선지자는 다른 신들이 모두 거짓이라고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우상들은 인간의 피조물에 불과하며 무가치한 것들이다(2:8). 이사야 6장 3절에서 스랍들은 온 땅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다고 선언한다. 10장 5~19절에서 선지자는 하나님이 역사의 진로를 장악하고 계신다고 선포한다.
이 책의 중요한 주제중 세 번째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다. 이사야는 자신의 소명 체험에서 하나님의 이런 속성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6:3). 본서 전체를 통해, 세상에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사역 가운데 하나님의 초월적 거룩하심이 크게 강조되고 있다.
네 번째,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대비되는 인간의 죄를 다루었다. 하나님의 순결과 초월적 거룩하심은 인간의 죄에 대한 심판으로 표현된다. 이사야는 하나님 존전에 있을 때 즉각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기에 무가치한 존재임을 절실히 자각하였다(6:5). 인간의 죄는 정화를 필요로 하며 그 정화의 수단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다(7:9; 28:16).
다섯 번째, 메시아에 대한 소망이 나타나고 있다. 구원과 소망의 시대가 올 것과, 하나님이 그 시대를 열기 위해 한 특별한 인물을 사용하실 것에 대해 본서는 예언하고 있다(7:3~25; 9:2~7; 28:16; 52:13 ~ 53:12).
오늘날을 위한 이사야의 메시지
우리 세대를 향해 이사야서가 던지는 메시지는 아주 많다. 상대주의적 규범에 의해 도덕률이 결정되는 이 시대를 향해, 이사야는 인간 행동을 지켜보는 거룩한 하나님이 존재하신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고대의 이교도 신앙에 대체적 근거를 두고 있는 “뉴 에이지” 운동에 마음을 쏟고 있는 이 때에 선지자 이사야는 우주의 창조자, 만유의 주이신 유일하신 하나님이 존재하신다고 역설한다. 무엇보다도, 많은 사람이 희망을 잃은 오늘의 세대를 향해 이사야는, 하나님이 인간을 속량 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피조물을 통치하시고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선지자는 지치고 억압받는 이들에게 미래의 한 시대를 지적해 주고 있다: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11:6,9).
로버트 프린스(Robert Prince)/베일러 대학교(B. A.)와 사우스웨스턴신학교(M. Div., Ph. D.)에서 공부했고, 1987년부터 텍사스주의 샌안토니오에 있는 노스웨스트 힐스(Northwest Hills) 침례 교회 목사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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