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제근
1. 이 시기의 정의 :
1.1. 이스라엘의 회복기 :
선지자 예례미야로 말씀하신 70년이 차는 때에 페르샤의 왕인 사이루스 1세 (고레스)가 모든 백성에게 해방을 선포하였다 (540/539년).
고대의 제국 : 신앗수르 - 신 바벨론 - 페르샤. 그러나 외교정책에서는 페르샤는 그 이전의 제국들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 이전에는 나라를 무력으로 점령하여 그 나라의 정체성을 말살하고 완전한 속국이 되게 하기 위하여 사람들을 거기서 뽑아서 이민을 시켜서 분산하여 살게 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만민의 원한이 되었다는 것을 페르샤의 왕 고레스는 잘 알고 있었고 이것에 완전히 반대되는 정책을 시행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속국이 된 백성들의 종교적인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었다. 그럼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인정하고 대신에 정치적으로 속국으로 머물러 있으면 되는 것이었다. 이 고레스 왕의 정책은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고레스 이후의 페르샤의 정국은 항상 안정된 것은 아니었다. 왕이 바뀔 때마다 순조로운 절차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고레스의 아들 캄비세스가 갑자기 죽고 가우마타라는 사람이 자신이 캄비세스의 아들이라고 자칭하고 나섰고 이에 대하여 캄비세스의 신하의 한 사람인 다리우스가 이를 평정하게 되었다. 이러한 혼란을 틈타서 여러 국가들이 완전한 독립을 할 수 있는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 519년에 다리우스는 이러한 혼란을 평정하였다. 내정에서 성공을 하였고 외정에서도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다리우스는 자신의 아들인 아하수에로(Xerxes)에게 왕위를 계승한 것이 486년이었고 그는 465년까지 통치하였다. 에스라 4:6과 에스더에 그가 언급되었고 그는 에스더의 왕이었다. 그는 그리스와의 전쟁에서 지고 말았으나 여전히 전 오리엔트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고 있었다. 그 뒤를 이어서 아닥사스다 (Artaxerxes)가 왕위를 465년에 이었고 424년까치 통치하였다. 이 사람이 바로 에스라와 느혜미야의 시절의 통치자이었다. 아마 애굽의 반란이 종식된 456년 경에 아닥사스다가 에스라와 느혜미야를 유다로 보내었을 것이다. 유다의 평안이 자신의 통치에 중요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유다는 어떤 의미에서 중간지대에 속하기 때문이다. 애굽을 평정했던 메가비주스가 왕에게 반기를 들었는데 이 때에 아마 느혜미야가 파송이 되었고 유다를 잘 조직할 것으로 기대되었던 것 같다. 느혜미야는 왕에게 충성한 것 같고 이런 사람이 왕에게 필요하였다.
1.2. 제사장이 중요한 시기
제사장이 중요한 시기는 이스라엘의 초기에 이미 있었다. 그 때는 아직 왕 제도도 수립되지 않았고 선지자 제도도 수립되지 않았다. 왕제도가 만들어지려면 사울-다윗의 시기를 기다려야 하고 선지자 제도가 수립되려면 역시 사무엘의 시대를 기다려야 한다.
이 제사장 제도는 이스라엘의 시작부터 결정적으로 중요하였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형성 그 자체의 존립을 위해서 결정적인 제도였다. 즉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어 하나님의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게 되었는데 이제 그것을 늘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제사장 제도를 수립한 것이다. 뒤에 나올 왕, 선지자와 함께 이 제사장들은 이런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중보로서 역할을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이스라엘이 많은 범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고 새로운 관계를 늘 가지도록 하였다.
이제 에스라, 느혜미야가 활동하던 시기는 이 제사장이 다시 중요한 역할을 할 때였다. 왕과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기에 제사장은 하나님 나라의 순수함의 유지와 발전에 수동적인 역할을 하였다. 주어진 명령을 규칙적으로 묵묵히 수행함으로서 일관된 전통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총체적인 타락이 왔다. 왕들은 타락하여서 자신들의 정치적인 야욕만을 채우기위하여 국정을 운용하였다. 선지자도 타락하여서 거짓선지자가 나오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제사장도 가장 중요한 임무인 제사를 주관하는 일과 토라를 가르치는 일을 형식과 외식으로 하였다. 그래서 좋은 전통의 이행자로서의 제사장이 나쁜 전통이 쌓이는 역할을 하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백성과 함께 삼중 지도자들의 타락을 총체적인 타락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결과 하나님의 총체적인 심판을 받게 되었고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외교정책에 따라서 완전히 궤멸되는 결과에 도달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려고 하고 계시다.
예레미야의 예언 : 유다의 멸망직전과 그 이후에 활동하였던 중요한 선지자. 이 선지자를 통하여 백성의 죄, 하나님의 진노, 회개의 촉구,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하나님은 선포하셨다. 그러나 동시에 이 선지자에게
이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시작에
2. 이 새 시대의 중요한 두 지도자, 에스라와 느혜미야
2.1. 공동사역의 중요성
에스라는 느혜미야를, 느혜미야는 에스라를 언급하고 있다 (에스라 : 느혜미야 12;1,13,33; 느혜미야 : 에스라 2:2). 두사람 모두 하나님의 자비와 도움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즉 하나님의 자비와 도움이 필요한 시기라는 인상을 주고 있다.
이 외에도 동역한 사역자들이 많았다 :
(1) 선지자 학개, 선지자 스가랴 (에스라 5:1)
(2) 스룹바벨과 여호수아 (에스라 3:2).
이 시대의 사역자들의 아주 중요한 특징은 서로간의 갈등이 없다는 것이다. 선지자 학개의 예언속에 스가랴에 대한 언급이 없고 스가랴의 예언속에 학개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리고 에스라의 글 속에 느혜미야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스 2:2에만). 또 느혜미야의 글에 에스라에 대한 언급이 거의없다 (느12:1,3,33에만). 이것은 서로에게 대한 무관심과 심지어는 적대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글들에는 자신의 일에 충실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이 사실을 설명할 수 있다. 이 시기는 외적인 어려움이 많은 시기였고 여기에대한 내적인 단결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내적인 단결이 싫으면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된다. 왜냐하면 그 일 속에 자신의 정치적인 이익은 이미 없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유다의 멸망전과는 사정이 틀리다. 그 때는 유다 속에 모든 개인적인 이익이 있었기 때문에 이 일에 사람들이 집중할 수 밖에 없고 거기에 생명을 걸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른 형편이었다. 돌아온 사람들은 이미 그런 이익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결정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총독 스룹바벨과 제사장 여호수아간의 갈등도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위기의 때에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자신들의 사역의 독특성을 인식하고 거기의 분량안에서 충실한 것을 볼 수 있다.
2.2. 에스라의 사역
등장은 에스라 7장부터이다. 그 앞에는 그의 사역이 있기 전에 이미 어려웠지만 성전 건축이 완료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에스라의 사역은 우선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백성을 섬기기로 결심한데 있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회를 주셨고 그 기회를 사용한 것이다.
먼저 그는 1차 귀환에 이어서 2차로 귀환할 사람들을 데리고 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아주 중요한 종교적, 사회적인 문제인 돌아온 이스라엘이 타민족과 결혼하는 습관을 완전히 제거하는 사역을 하엿다. 이 사역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앞날에 중요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었다.
2.3. 느혜미야의 사역
에스라서에서 에스라와는 정반대로 그는 첫장부터 등장한다. 이렇게 등장한 느혜미야는 그 사역의 핵심은 성전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는 일이었다. 이것으로 에스라와 좋은 대조를 이룬다. 에스라는 학사와 제자장으로서 하나님의 성전을 짖는 일에 관여하고 느혜미야는 예루살렘성을 건축하는 것을 중요한 임무로 삼았다. 각자가 맡은 역할이 다르도록 하나님이 각자를 다르게 준비시키셨다. 그리고 그 일을 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셨다. 에스라는 제사장과 같은 입장이고 느혜미야는 하나님 나라의 실제적인 일을 감당하는 왕과 같은 역할을 한 것이다.
느혜미야는 예루살렘 성 건축에서 시작되는 모든 종류의 영적인 싸움을 용감하게 인내있게 감당하였다. 그리고 과단성있게 모든 문제되는 것들을 처리하였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견고한 반석위에 세웠다.
3. 각 책의 중요주제
3.1. 에스라
3.1.1. 서론
(1) 내용의 구분
1-6 : 에스라가 등장하기까지의 모든 역사적 상황에 대한 소개
7:1-8:20 : 에스라의 귀환과 같이 귀환한 사람들
8:21-10 : 에스라의 사역
(2) 이 책의 소개
이 장의 특이한 점은 에스라의 활동과 소명의 기록이 이 책의 중간에 나온다는 것이다. 1-6장까지의 내용은 페르샤 왕 Cyrus의 예루살렘 건설의 칙령부터 시작하여서 에스라가 등장하기까지의 전말이 소개되어 있다. 그리고 이어서 에스라가 관여한 재건, 개혁운동을 소개한다.
3.1.2. 각 부분의 내용
(1) 가장 먼저 모든 변화의 가능성의 출발이 된 고레스 왕의 칙령 자체의 소개로 시작한다 (1:1-4). 이것은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였다. 갑자기 뜻하지 않았던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였고 하나님 나라의 새역사가 시작되었다.
(2) 그리고 나서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다. 먼저 이 하나님의 은혜에 민감하게 반응을 보인 사람들은 포로되어서 끌려간 자들이었다. 이들의 모습을 성경은 정확히 기록하고 있고 이것은 앞으로 나타날 이스라엘 종교의 방향을 결정지워주는 것이다. 이것은 두가지 점에서 그러하다.
ㄱ. 먼저 이 칙령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으로 생각하고 민감하게 반응을 보였던 포로되었던 자들이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유대인과 베냐민 족속이었고 직분으로는 제사장과 레위사람들이 주를 이루었다. 이것이 앞으로 신약시대가 오기까지 아니 그 이후의 이스라엘의 역사를 좌우하는 사건이었다. 즉 이스라엘은 이제 유다의 주도하에 인도되게 되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유대인이라는 이름을 그 이후의 역사에서 듣게 되었다.
ㄴ. 또 같이 돌아온 제사장 무리들은 이제 이스라엘의 새로운 지도계층이 되었다. 옛날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울 때에 (출 19-24) 가장 먼저 만들어진 언약을 유지하기 위한 제도가 제사장 제도였다. 이제 이스라엘이 재건될 때 가장 먼저 앞장선 무리들이 왕들의 후손들이 아니라 제사장의 후예들이었다. 이것 역시 이스라엘 종교의 향후의 방향을 결정짖는 것이었다. 즉 이스라엘이 앞으로 제사장을 중심한 Torah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전통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이 실패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 것은 이 토라를 지키지 아니하여서 그렇게 된 것으로 생각하고 토라에 열중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부정적인 방향으로 발전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즉 토라의 원래적인 의미인 언약의 핵심은 놓치고 또 한 번 더 율법을 지키면 된다는 전통이 생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들의 행동을 성경은 "여호와의 감동하심을 받아서"라고 기록한다 (1:5). 즉 구속 역사를 객관적으로 시작하심도 하나님에 의해서 되었지만 그 구속역사를 구체적으로 주관적으로 개인속에 나타내셔서 이루어 가심도 하나님에 의해서 이다.
그리고 이들이 한 행동의 가장 중요한 것은 고래스왕의 명령대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고레스 왕의 정책에 의한 것이었다. 옛날 앗수르-바벨론의 긴 압제정책 때문에 많은 민족들이 그들의 삶의 터전을 떠나면 뿌리가 뽑혔고 그 결과 지배민족에 대한 뿌리깊은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이민족을 오래동안 지배할 수 없었다. 이런 정치외교정책의 실수를 잘 알고 있는 현명한 고레스 왕은 지배받던 민족들의 정신과 종교의 자유를 허락해 주었다. 그 결과 많은 민족들이 종교에 있어서 자치권을 가지게 되었고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이스라엘인 것이다. 느부갓네살이 가져온 모든 성전의 기물들을 고레스는 다시 돌려주었다 (1:7-11).
(3) 그리고 두 번째 인간의 반응는 이스라엘 백성이 끌려와서 살던 곳의 주위의 사람들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 (1:6). 이들은 예루살렘의 성전의 건축을 초기에는 물질로 도왔다.
(4) 2장에서 나타난 돌아온 족속들의 소개는 민수기의 인구조사를 생각나게 한다. 그 때는 새로운 땅에 들어가기 전에 인구조사하였지만 지금은 회복되는 땅에 들어갈 하나님의 백성들의 숫자를 파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속에서도 그 자비 때문에 살아남은 신실한 자들의 모임으로 소개된 것이다. 그 때는 건설을 위하여, 지금은 재건을 위하여 ! 에스라의 족보에 대한 소개 (7:1-5), 2차귀한백성의 명단들도 (8:1-14) 이러한 맥락에서 소개된 것이다.
(5) 3장은 성전건축의 시작을 말하고 있다.
이 성전건축의 지도자로서 제사장 무리들이 앞장서고 있다 :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그 형제 제사장들과 스알디엘의 아들 스릅바벨과 그 형제들 (3:1,8). 그리고 전 역사를 감독하는 이들도 모두 제사장 무리들이나 혹은 레위인들이었다 (3:8-9). 이것은 첫 성막의 형성에 레위인과 제사장들이 관련하였듯이 이 둘째 성전의 건축에도 동일한 계통의 사람들이 관련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아삽자손들의 찬양이 이어졌다 (3:10-11). 이 아삽자손들은 다른 레위인들과 함께 현재 시편의 편집에 결정적인 열쇠를 쥐고 잇는 사람들이었다.
시작은 초막절에서 부터였다 (3:7). 9월말 10월 초에 있는 가을 추수를 감사하는 이 초막절은 이스라엘의 마지막과 함께 시작을 알리는 축제이다.
3:6 전지대를 놓지 못한지라. 이 말은 성전전체의 기초를 놓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제단을 쌓는 일이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 일은 솔로몬 성전의 건축의 순서와는 정반대로 되었다. 그러나 원래의 성막을 만들때의 순서와 동일한 것이었다.
3:7 백향목을 레바논에서 운수함은 솔로몬왕이 성전을 짖기 위하여 그렇게 한 것을 연상하게 한다. 아마도 이들이 이러한 것을 의식하고 하였을 가능성이 많다. 2장에서의 인구조사에서 처럼 이스라엘의 재건이라는 목적을 의식하고 솔로몬이 했던 것과 동일한 절차를 밟았을 수 있다.
첫 기공식 때의 광경이 감격적으로 그리고 특이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전 성전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던 노인들은 대성통곡을 하엿고 이제 새성전을 짖는 이들은 기뻐하며 즐거이 불렀다 (3:12-13). 슬픔과 기쁨의 소리가 같이 어울러진 놀라운 광경이 묘사된 것이다. 이것은 광대한 역사의식에서 나오는 가눌 수 없는 광대한 진폭의 감정들이 다 수용된 것을 말한다. 광대한 역사의식은 과거의 역사에 대한 반성과 회한과 함께 미래에 이루실 하나님 나라의 새 역사에 대한 놀라운 기대가 어울러진 것이다. 이 의식이 슬픔과 기쁨의 양 극단의 감정의 표출이 동일한 공동체속에서 동시에 나타나게 하였다. 그 결과 즐거움의 소리와 통곡의 소리를 구분하지 못할 지경까지 되었다. 한 사람 속에 기쁨과 슬픔의 감정이 동일한 시간에 공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한 공동체속에도 마찬가지이다. 그 불가능한 것이 지금은 가능한 것이 되었다.
(6) 4장
그러나 성전 재건의 과정은 시작만큼 순조롭지는 않았다. 예상치 못했던 반대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들은 4:1에는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이라고 표현되었다. 그러나 곧 앗수르 왕 엣살하돈이 다른 지역 사람들을 이 곳에 유배시켜서 데려왔고 그들은 여기에서 그 이후에 계속 살아왔던 것이다 (4:2, 참고 왕하 17:24-33). 이들도 예루살렘 성전이 건축된다는 말을 듣고 자신들도 동참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대하여 그들은 본래 이방인들이므로 아무리 성전짖는 일에 도움을 준다 하더라도 그들이 같이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없는 것을 돌아온 무리들은 명확히 하였다. 이들의 의도는 성전을 건축하는데 같이 주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돌아온 무리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이들로 인하여 성전재건의 근본목적인 이스라엘의 언약의 회복이 흐려지고 타락되는 것이었다.
이것이 성전재축의 어려움이었다. 동일한 상황은 언제든지 교회를 개혁하려고 할 때에 일어날 수 있다. 복음 자체가 아니라 복음과 유사하게 보이는 것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같이 개혁에 동참하려고 할 때에 어떻게 우리가 행동해야 할 것인가를 말해준다.
그들의 방해전략은 고전적인 것이다. 즉 권력의 고위층에 호소하여 이 재건역사를 방해하는 것이다. 이들은 편지를 ㅆ다. 어떤 면에서 에스라서는 편지에서 시작하여 편지로 성전 역사가 마무리 되는 느낌이다. 고레스왕의 조서(1:1)로 시작되었고 다리오왕의 조서로 끝맺고 있다 (6:1). 에스라는 특히 그 편지와 조서들의 전문 내지 발췌문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이들의 방해 역사는 고래스 왕 때부터였고 다리오 왕 때까지 이른다 (4:5). 새왕의 등극은 이 사람들에게는 절호의 챤스로 보였다. 아하수에로 (Xerxes)왕의 등극에 유다와 예루살렘을 향한 반대공작을 하는 편지를 보내었다.
그리고 아닥사스다 (Artaxerxes) 때에 이들은 더 구체적으로 나갔다. 그들중의 주모자는 비슬람과 미드르닷과 다브엘이었다 (4:7). 이들이 꾸민 거짖조서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소개되었다 (4:11-16). 그 조서의 내용은 예루살렘은 패역한 성읍이고 항상 반역을 꿰하는 곳이므로 이 성전이 건축되면 페르샤에 반역할 것이라는 것이다. 어느 민족이고 다른 민족의 지배를 저항하지 않는 민족은 없다. 이런 일반적인 논리로 예루살렘에 대하여 악담을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악담이 효과를 발휘하여서 결국 예루살렘의 성전 건축을 막은 조서가 왕으로부터 나오게 되었다 (4:17-24). 그결과 성전 재건역사는 일단 중단된 상태에 있게 되었다. 다리오 왕 2년까지.
이 때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는 학개 1:4에 잘 기록되었고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에 대해서 학개서 1:7-11 (한재)에서 잘 기록하고 있다.
(7) 5-6장
새왕의 등극은 유다의 지도자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었다. 왕의 등극과 함께 사면을 해주던 고대의 관습을 따라서 새로운 희망의 조처가 생길 것을 기대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왕의 허락을 받기 전에 전역사를 재개하였다.
이 때는 단순히 제사장들만이 지도력을 발휘한 것이 아니라 선지자의 무리가 도왔다. 목말랐던 이스라엘의 두 번째 지도체제인 선지자들이 나선 것이다.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가 그 주도적인 인물이었다. 이것은 또 하나의 하나님의 역사인 것이다. 첫 번째는 제사장의 무리를 통하여 시작하셨다가 이제 선지자의 무리를 통하여 일으키신 것이다. 그러면 언제 왕이 나와서 이스라엘의 재건을 도울까 ? 무엇보다도 다윗의 약속을 (삼하 7) 이을 왕이 나올 것인가 ? 나온다면 언제인가 ?
------------------ ** 선지자 학개의 선포 ** ------------------------------
다리오 왕 2년 6월 그달 첫날에 하나님의 말씀이 학개에게 내려졌다. 이 때의 지도자들은 유다총독 스룹바벨과 제사장 여호수아였다. 이 때 백성들의 영적 상태는 성전 건축을 거의 포기한 지경이었다. 대신에 자신의 삶 자체를 이루는 데에 관심이 있었다 (학개서 1:4). 그래서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자연의 재앙을 내리신 것이다 (한재 : 학개서 1:11). 이것은 이스라엘이 초기에 타락하였을 때에 하나님이 자연의 재앙을 내리신 것과 같다 (신 28:17). 학개의 선포의 결과 백성들이 순종하게 되었고 학개는 순종하는 백성들에게 성전건축에 대한 격려와 함께 미래에 대한 비젼의 멧세지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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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자극을 받아서 제사장들이 다시 일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방해가 될 수 있는 함수들이 나타났다. 유브라데스강의 서편을 통치하던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그 동료들이었다. 여기서도 편지로 문제가 제기되고 편지로 문제가 해결되었다.
오히려 이렇게 강서편의 총독이 돌아온 이스라엘인들을 추궁하였으나 이들의 열심히 재건역사를 방해하지는 못했다 (5:5). 그리고 오히려 이 총독들이 다리오 왕에게 보내는 질문편지가 진리를 드러내는 데 역할을 하였다. 과연 돌아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주장한대로 페르샤 왕국의 위대한 왕인 고레스왕의 조서에 예루살렘을 재건하라는 명령이 내려진 것이 밝혀졌고 (6:1-5)이 사실 때문에 원래의 조서대로 하라는 다리오 왕의 새로운 조서가 내려진 것이다 (6:6-12).
이것은 예상밖의 수확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리오 왕에게 편지를 써서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적하는 사람들의 편지가 진실을 밝힌 것이었다. 이것은 이 역사의 시작(고레스 왕의 조서)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이 예측하지 못한가운데 일하셨던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였다.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에도 인간의 믿음이 필요하였다. 그 때는 하나님이 예상하신 시간(70년)동안에만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믿고 기도하던 다니엘과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이 때에는 고레스 왕의 칙서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나왔다는 것을 확신한 사람들이 현실이 어떠하든 관계없이 또 최고지도자인 다리오 왕에게 호소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주신 일 자체를 재개하는 사람들이 일을 이루어낸 것이다.
그 결과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 "다리오 왕의 조서가 내리매 강 서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그 동료들이 신속히 준행한지라" (6:13). 다시 이 조처에 힘을 얻은 영적 지도자 학개와 스가랴의 권면함으로 성전 건축의 길이 환하게 열리게 되었다.
다리오왕의 6년 아달월 3일 (515년 3월 12일)에 성전이 완성되었다 (6:15). 이것은 전 기초가 놓아지고서 21년 만의 일이다. 그리고 성전이 파괴된 지 (586년) 70년만의 일이다. 성전봉헌식은 솔로몬의 봉헌식에 비하여 초라한 것이지만 (비교 왕상 8, 대하 7:3이하) 진실된 봉헌이었다. 그 70년동안 속죄제가 드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유월절 제사가 드려졌다 (6:19-22).
(8) 7장 : 에스라의 등장
에스라는 아닥사스다 (Artaxexes I)왕 때에 (458년)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에 올라왔다 (참고 : 느혜미야는 수사에서 왔다). 아마 바벨론에 사는 유대인들은 번성했고 교육을 많이 받았던 것 같다. 에스라도 그런 여유있는 환경속에서 자라났고 그 교육을 이제 쓸 때가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중에 있는 미래를 향한 은혜의 준비였다. 아무도 이런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했으나 하나님은 준비시키신 것이다.
그는 학사(서기관, 서기, spr)이었고 동시에 제사장이었다. '학사'라는 말은 '쓴다', '기록한다'는 동사에서 온 말이며 정확하게 번역하자면 '기록자'이다. 이 기록자들은 성경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의 중요성 때문에 생긴 직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기록자들은 권위를 가지게 되었고 나중에 이 기록자들은 종교적으로 중요한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예수님 시대의 '서기관' (같은 단어임)과 같이 죽은 정통을 고수하여 하나님의 일에 오히려 대적이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에스라가 예루살렘을 위하여 등장한 것은 성전이 봉헌된 이후 많은 시간이 지나서이다. 여기서도 왕의 조서, 즉 아닥사드다 왕의 조서가 소개되었다.
(9) 8장 : 2차 귀환한 백성들의 명단들과 그들의 행동
에스라의 철저한 사역의 준비 :
1. 같이 일할 사람들의 준비 :
에스라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집단 이주민들의 명단이 소개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그 장소를 떠나기 전에 한 곳, 즉 유브라데스강의 한 운하인 아하바에 집결했다 (8:15).
2. 같이 사역할 지도자들의 준비 : 그 중에는 그러나 레위자손들이 없으므로 다시 그들을 불러모아서 (8:15-20) 같이 예루살렘으로 가기를 종용하고 같이 가게 되었다.
3. 금식으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기도함 (8:21-23) :
이제 이들이 떠나기 전에 아하와 강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하나님께서 여정을 지켜주시기를 기도한다. 여기에 특이하고 담대한 구절이 소개되었다. 즉 왕에게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길을 지키실 것이라고 담대한 믿음의 선언을 하였으므로 다시 왕에게 호위할 군사를 요청하는 일은 수치스러운 일(한글개역 : "부끄러워하였음", 오해될 수 있음)로 여겼다. 그러나 그 결과 하나님의 인도를 체험하는 기간이 되었다.
4. 성전에 필요한 모든 기구들을 준비하여 감 (8:24-30) :
성전은 지어졌어도 그 속에 정상적인 예배와 희생이 드려질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솔로몬 성전에 있던 모든 기물들을 차례로 가져가도록 지도자들을 준비하였다.
5. 예루살렘으로의 여행 (8:31-36) :
드디어 여행을 마무리 하고 모든 물건들을 제사장에게 맡겼다.
(10) 9장 : 에스라의 회개기도
이제 새로운 상황이 전개되었다. 그 동안 백성들은 주위의 백성들과 평화롭게 살기 위하여 타협도 하였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지 못하기도 하였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타협을 하면 서 살았는데 특히 주위의 민족들과 통혼을 하면서 그들의 모든 관습을 다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 사실은 현대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고대에서는 통혼을 한다는 것은 양 가족의 모든 것을 허용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종교적인 것들을 서로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방의 경우는 이것이 문제될 것이 없었다. 왜냐하면 이방의 종교는 모두 혼합주의이고 어떤 종교가 또 하나 더 들어오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경우는 달랐다. 그들은 하나님 한 분만을 모시는 신앙을 가졌으므로 다른 종교를 허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적인 본질상 이방인과의 통혼은 허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과거의 이스라엘의 범죄는 거의 대부분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했다고 할 수 있는데 이제 그 무서운 것이 이스라엘 내에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 죄에 지도자들이 더 먼저 가담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사태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 준다 (9:1-2).
그러나 이런 위기는 신앙의 영웅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에스라의 영웅적인 긴 기도는 (9:6-15) 공동체를 위한 대표적인 기도문이라고 할 수 있다.
1. 죄의 고백과 공동체의 죄를 자신의 문제와 죄로 생각할 수 있었다 :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러워 낯이 뜨듯하여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 (9:6).
이것이 과장적인 기도가 아니다. 왜냐하면 결혼을 하게 되면 그 끈을 끊기가 고대일수록 너무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그 결혼의 결과로 생겨나는 아이들의 문제는 더 심각한 것이기 때문이다.
2. 이 죄의 역사성에 대한 인정 (9:7) :
이 죄가 자신들만이 지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조상들이 지었던 죄이고 이 죄 때문에 자신들이 망하게 된 것을 인정한 것이다. 이방인과 통혼하는 것 자체는 직접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 같이 보이지 않고 또 이스라엘 자체에 죄를 짖는 것 같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상 이 통혼의 죄는 이 두가지 종류의 죄를 모두 짖게 하는 주요 원인인 것이다. 죄인식의 역사성이 여기서 중요한 교훈이다.
3. 현실의 인식 (9:8-10) :
현재 자신들이 살고 있는 것이 자신들의 열심히 살았던 삶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인식하고 있다. 열국들 앞에서 유다가 보호를 받는 입장에 선 것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은혜로된 것임을 인식하고 있다.
4.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한 차원 더 깊은 인식과 (9:11-14) 하나님의 의로우심의 인식 (9:15).
더 깊은 인식이란 이스라엘의 초기에 즉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 이미 하나님은 통혼을 금하셨다는 것을 에스라는 명확히 하고 있다. 이어서 이런 백성에게 하나님이 심판을 행하셔도 옳은 것이라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대한 선포를 한다.
(11) 10장 : 회개와 개혁운동
1. 개혁운동의 실마리 : 백성들의 자발적인 회개 (10:1-4)
이런 근본적인 회개에 들어갔을 때에 이적이 일어났다. 그것은 에스라가 백성에게 어떤 회개의 외침을 하지 않아도 백성이 스스로 애통하며 자복하는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그들이 오히려 에스라를 도우며 개혁운동을 시작하라고 격려하는 모습을 보인다.
2. 공동체의 죄의 공적인 회개 (10:5-17)
모든 백성이 집회로 모이고 거기서 죄를 공적으로 시인하고 그것을 없애기 위하여 그런 죄를 범한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한 결혼을 포기할 것을 선언한 것이다.
그 명단에서 드러나는 것과 같이 지도자에 속하는 레위자손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놀라운 사실이다 (10:23-24).
출처 :보길예송교회 글쓴이 : 김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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