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벧전,후서 강해

[스크랩] 베드로전서 (개론)

에반젤(복음) 2019. 11. 28. 18:41



 베드로 전서(개론)




[1] 저자

이 서신은 사도 베드로에 의해 쓰여졌다고 주장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 베드로전서 1:1-2). 저자는 또한 자신을 장로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라고 부른다(...나는 함께 장로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 베드로전서 5:1). 그는 실루아노의 도움으로 쓰고 있으며 (내가 진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베드로전서 5:12).
자신과 함께 있는 사랑스런 아들 마가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베드로전서 5:13). 문체 또는 내용상에 있어서 이러한 주장을 반박할만한 문제점은 없는 것 같다. 저자가 하나님 아버지를 '공평하게 판단하시는 분'으로 언급한 것(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 베드로전서 1:17)은 고넬료 및 그 집에 있던 이방인 무리들에게 베드로가 일찌기 했던 말을 생각나게한다(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사도행전 10:34). 또한 베드로전서 2:7,8에서 '모퉁이의 머릿돌'이라는 이사야의 예언을 그리스도에 적용한 것(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그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 베드로전서 2:7,8)은 행4:11에서 베드로가 산헤드린 공회에 한 말과 매우 유사하다(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사도행전 4:11).
베드로 전서에 현저하게 나타나는 박해와 고난에 대한 언급은 초대 기독교인들의 박해에 대한 역사 기록과 얼마만큼 일치하는가를 알고자 하는 학자들에 의해 세밀히 연구되어 왔다. 케이스 박사(Dr S. J. Case)는 초기에 있었던 세번의 혹심한 박해시기를 구분하는데, 이것들은 네로 통치시대 (주후54-68년), 도미티안 통치시대(주후81-96년), 트라얀 통치시대(주후98-117년) 등이다. 그는 베드로 전서를 가혹한 박해가 절정에 다다른 시대 뿐 아니라. 베드로전서 1:1에 언급된 소아시아 지방까지 확산된 시대의 반영이라고 보는 학자들의 견해를 따르고 있다.
다른 학자들은 베드로 전서를, 이미 당시에 조짐을 보이고 있던대로, 다가오는 박해에 대한 사전 경고로 해석한다. 빅스(Biggs)는 초기의 박해들이 대체로 유대 산헤드린에 의해 고무되었으나, 로마인들은 기독교에는 이교주의와 양립될 수 없는 생활 방식이 있으며, 그들의 관점에서 볼때 그것은 반드시 중지되어야한다는 것을 곧 알게되었다고 주장한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당한 박해는 이러한데 연유한 것이며 유대인의 선동은 없었던것 같다.

[2] 저작 시기 및 장소

베드로 저작설을 인정한다면, 베드로전서의 저작 시기 및 장소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5장13절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을 보면 이 서신은 '바벨론'에서 쓰여진 것으로 되어 있다. 오늘날의 카이로가 위치한 애굽에 바벨론이라 불리우는 앗수르의 피난민 거주지가 있었다. 그러나 1세기에 그곳은 군대의 주둔지일 뿐이었고 베드로가 그곳에 거주 한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전승이 전혀 없다.
유브라데 강 유역의 바벨론은 주후36년에 유대인 회중이 숨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오순절때 예루살렘에는 바벨론 출신의 유대인들이 있었다. 이후에 기독교 교회가 그곳에 있었을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그러나 갈리굴라의 통치 말엽 (주후41년경)에 바벨론의 유대 거류민들은 심한 박해와 학살로 뿔불이 흩어지고 말았다.
베드로 전서가 이러한 곳에서 쓰여졌다는 것은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 베드로가 그의 말년에 로마에 거주했다고 하는 초기의 유력한 전승이 있었다. 이러한 생각은 종교개혁 이전에 교회에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종교개혁자들이 앗수르의 바벨론이 베드로전서 5:13에 있는 베드로의 언급에 대한 해석이라고 주장할때, 그들은 부분적으로는 로마 교황제도가 베드로에서 이어져 내려왔다고 하는 주장을 반대하려 함이 그들의 동기였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구약성서의 지명들을 현존하는 성읍들에 대해 상징적으로 사용한 것은 사도 시대에 잘 알려져 있었다. 바울은 하가와 시내산을 예루살렘에 비유했다(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 갈라디아서 4:25). 계시록 11:8에는 예루살렘을 '소돔과 애굽'으로 불렀으며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 계시록 11:8). 계시록 17:18에서 '바벨론'으로 불리운 음녀는 로마에 대한 언급임이 명백한 것 같다.
편지의 전달자로부터 그것이 어디서 왔는가를 즉시 알게 되었을 베드로 전서의 수신자들에게 있어서, 로마에 대한 이토록 신중하고 또한 비유적인 언급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베드로가 로마에 도착한 시기를 체이스(Chase)는 대략 주후63년 말이었던 것으로 추산한다. 라이트풋(Light foot)은 그 시기를 주후64년 초로 본다. 바울이 죄수가 되어 로마에 도착한 것은 이보다 이른 주후61년이나 62년의 일이었다.
그는 로마 도착 후 2년 뒤에 석방되었고 디모데 후서는 후에 로마 밖에서 처형되기 직전인 주후67년이나 68년에 집필되었다고 하는 전승이 있다. 그러나 이 두번째 투옥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으며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디모데 후서의 집필 연대를 바울의 로마 도착 후 2년쯤 되는 주후63년이나 64년으로 본다. 이 때가 바울의 순교 직전이었을 것이며 그 무렵 베드로가 로마에 도착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바울이 로마로 부른 마가(...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디모데후서 4:11)가 베드로 전서가 집필될 때 베드로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그것은 또 한 바울의 친구요 전도여행시 잠시 동역자였던 실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몇가지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베드로 전서는 주후64년 경 네로의 박해가 시작될 무렵 로마에서 집필되었다고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3] 내용

베드로는 소아시아의 다섯 지방에 사는 유대인 및 이방인 성도들에게 이 서신을 써보냈다. 그가 이방인 성도들까지도 염두에 두었다는 것은 서신을 보면 매우 명백하다. 그는 2:10에서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그들에게 상기시켜 주고 있다. 그는 이방인 성도들의 과거 생활을 이방인들의 죄많은 욕망 가운데 살아온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베드로전서 4:3).
아마도 베드로는 주님의 명령들, 즉,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누가 22:32)'하신 명령과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 내 양을 먹이라(요한 21:15-17)"하시는 명령을 상기하였을 것이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이전의 베드로는 그리스도에 대한 인간적인 충성심과 변하기 쉬운 이기주의가 복합된 유동적인 인간이다.
십자가를 지지 말라! 바로 이것이 주님에 대한 베드로의 충고였다(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마태 16:22). 그러나 성령이 충만히 내린 오순절 사건은 급격한 변화를 몰고 왔다. 그리하여 이미 헤롯의 손 아래서 채찍질을 당하고 죽음에도 직면해 보았던 베드로는 아시아의 사랑하는 형제들을 격려하고 더욱 강하게하여 이미 잔인한 네로의 박해를 당하고 있을지도 모를 그가 그들에게 임하고 있는 것을 보았을 임박한 갈보리의 십자가를 직시할 수 있도록 하고자 앞으로 나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