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요한계시록 강해

요한계시록의 중심사상

에반젤(복음) 2019. 11. 9. 18:20



  

요한계시록의 중심사상


 

변 종 길 교수(고려신학대학원, 신약학)

 

 

 

계시록을 읽는 태도

 

요한계시록은 일반 성도들에겐 신비하고 두려운 책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이 책을 읽을 때 어떤 사람들은 두려움과 공포에 떨기도 하고 막연한 불안감에 휩싸이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열쇠를 찾기 위해 수수께끼를 풀 듯 연구하기도 한다. 마치 신비한 암호가 이 책에 들어 있고 미래 사건들에 대한 시나리오가 들어 있기나 한 것처럼 이 책을 대하기도 한다.

그러면 우리는 계시록을 어떻게 대하여야 할 것인가? 그저 무서운 책, 알기 어려운 책으로만 생각하고 덮어 버려야 할 것인가? 종교개혁 시대에 칼빈이 요한계시록은 주석하지 않고 남겨 두었듯이 우리도 그냥 덮어두는 것이 경건하고 옳은 태도일까? 아니다. 요한계시록 11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했다. 여기서 계시(apokalypsis)’베일을 벗겨서 나타내어 준 것이란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알리려고 나타내 주신 것이다. 이어서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은 우리 성도들에게 보이시려고주신 것이지 덮으라고주신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요한계시록을 너무 쉽게 생각하여 함부로 해석해도 좋다는 뜻은 아니다. 사실 계시록에는 신비하고 알기 어려운 것들이 많이 있다. 고도의 상징으로 표현된 환상들, 예언적 언어들, 상징적인 숫자들 등, 성경 전체의 조명 하에 조심스럽게 풀지 아니하면 자칫 이상한 곳으로 빠져 버릴 수 있는 위험한 것들이 많이 있다. 특히 한낱 미래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접근할 때에는 이상한 방향으로 빠져 버릴 위험성이 크다.

따라서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우리가 읽고 지키라고 주신 말씀이라고 믿고 접근하되, 그 해석에는 상당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시중에 나와 있는 소위 통속적인 책들을 보는 것은 위험하며 차라리 보지 않는 것이 더 낫다. 계시록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 원어에 대한 지식과 성경 전체에 대한 깊이 있고 균형 잡힌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며, 그 위에 해석자 개인의 경건한 삶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의 사사로운 해석을 고집하지 말고, 올바른 신학 전통에 서 있는 경건한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주석을 참고하는 것이 필요하다. 본 글에서는 미국 칼빈신학교의 교수를 지냈던 윌리엄 헨드릭슨(William Hendriksen)요한계시록 주석(아가페, 1981)과 네덜란드 개혁신학대학의 교수를 지냈던 S. 흐레이다너스(Seakle Greijdanus)요한계시록 주석(Openbaring, Amsterdam, 1925)을 많이 참고하였다.

 

 

I. 요한계시록의 중심 사상

 

1. 이제 있는 일과 장차 있을 일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이 반드시 속히 될 일(ha dei genesthai en tachei)’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주신 것이다(1:1). 따라서 계시록은 지나간 일이나 역사를 다루는 것은 아니다. ‘속히 될 일이란 앞으로 있을 일을 말하는데, 여기에는 이제 있는 일(ha eisin)’장차 있을 일(ha mellei genesthai)’을 포함한다(1:19). ‘이제 있는 일이란 2-3장에 있는 일곱 교회에 대한 말씀이요, ‘장차 있을 일이란 4장 이후에 나오는 말씀을 가리킨다(Greijdanus). 그러나 장차 있을 일이라고 해서 특별히 마지막 종말 때에 있을 일련의 사건들을 가리킨다고 보면 안 된다. ‘장차 있을 일이란 말 그대로 사도 요한의 때로부터 이 세상 마지막 날까지, 곧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질 때까지 있을 일들을 가리킨다고 봐야 한다. 이것은 다르게 말하자면 전() 교회 시대의 일을 기록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나아가서 교회 시대의 일이라고 해도 마치 몇 년도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또 몇 년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하는 식의 연대기적 사건들을 기록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성경은 그런 미래에 대한 인간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주어진 책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고 하였다(7:15).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이다.”(25:2)

물론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장래 일을 알려주셨다(16:13). 사도 바울은 벨릭스에게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미래 사건들에 대한 자세한 연대기적 시나리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종말에 있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부활과 심판을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미래에 대한 인간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현재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는 데 그 목적이 있다.

2. 교회와 세상의 싸움

 

따라서 계시록의 주제는 미래의 사건들에 대한 비밀을 찾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교회가 어떠한 영적 싸움을 싸우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많은 환난과 핍박을 당한다. 이단들의 온갖 미혹과 세상의 유혹, 그리고 박해자들의 탄압과 박해를 받으며, 또한 사회 활동과 경제 활동에도 많은 어려움을 당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많은 순교자를 내기도 한다.

이러한 세상의 배후에는 용 곧 사단이 있다. 사단은 세상의 권력들과 거짓 선지자들을 통해 교회를 핍박하고 미혹한다. 사단은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며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한다. 그래서 교회는 마치 죽임을 당하여 그 존재가 끊어지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 사단이 승리한 것처럼 보인다.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11:7-8) 그래서 이 세상은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며 즐거워한다(11:10).

그러나 이러한 기쁨은 시기상조이다. 왜냐하면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사태를 역전시키시기 때문이다. “삼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매 저희가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 오라 함을 저희가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저희 원수들도 구경하더라.”(11:11,12) 그래서 세상과의 싸움에서 결국 교회가 승리한다. 왜냐하면 교회의 배후에는 그리스도께서 계시고, 그리스도께서 사단을 이기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세상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그의 기름 부으신 자의 나라가 되어 세세토록 왕노릇하실 것이다(11:15).

 

3. 그리스도와 교회의 승리

 

따라서 요한계시록에는 그리스도께서 승리자가 되심을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는 처음이요 나중이며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이며,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다(1:18,19). 또한 유대 지파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다.”고 한다(5:5). 그리고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고 한다(6:2). 그리스도는 사망과 음부의 권세를 이기시고, 또한 용과 짐승과 그에게 경배하는 무리들을 이기신다(12:10, 19:16, 20:2,10,14, 22:3 ).

그러면 승리한 듯이 보이는 용(12:3), 짐승(13:1), 거짓 선지자(13:11), 그리고 큰 음녀(17:1) 곧 바벨론(14:8)은 어떻게 되는가? 그들은 결국 멸망한다. 용 곧 온 천하를 꾀던 마귀는 결국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며, 그를 따르던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영원한 불못에 던지운다(20:10). 사치와 권세를 자랑하며 음행으로 만국을 미혹하던 큰 성 바벨론도 일순간에 무너진다(18:2,3,19).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18:2) ‘음녀또는 바벨론으로 비유된 세상은 무엇보다도 크다는 것을 자랑하고 뽐낸다. 거대주의, 물량주의를 내세우며 부귀와 사치를 누리던 세상, 그리고 온갖 더러운 것들이 다 모여서 하나를 이룬 혼합주의, 통합주의의 세상, 그래서 그 앞에 무릎을 꿇지 아니하는 성도들을 탄압하고 박해하던 큰 성 바벨론은 결국 한 순간에 무너지고 만다. 그러자 하늘과 땅의 성도들은 기뻐하며 즐거워한다.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를 인하여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신원하시는 심판을 그에게 하셨음이라.”(18:20)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주제는 다음 말에 잘 나타나 있다. “저희가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17:14)

 

4. 믿음과 인내

 

이러한 승리의 확신을 가진 교회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무엇보다도 이 세상의 죄에 참여하지 말아야 한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18:4) 여기서 거기서 나오라.”는 말씀은 이 세상의 삶을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이 세상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 죄에서 나오라는 의미이다(17:15 참조). 이 세상은 비록 권세가 크고 부요하고 유혹하는 것이 많다고 할지라도 성도들은 거기에 같이 참여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그 좋아 보이는 것들은 유혹이요 미혹이며 실상은 온갖 더러운 것들과 부정한 것들로 가득차 있으며 그 배후에는 사단의 조종을 받는 더러운 영들이 역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러한 세상의 죄에 빠져 살다가는 하나님의 무서운 재앙을 받아 일순간에 멸망케 될 것이니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러한 세상에서 나와서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은 무엇보다도 이 세상의 죄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고 주님을 믿는 정절을 지켜야 한다.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救贖)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께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14:4,5) 여기서 이들이란 곧 땅에서 구속함을 받은 ‘144성도들을 말한다. 따라서 ‘144’(14:1,3, 7:4)이란 문자 그대로 144천 명만을 뜻하거나 유대인들 가운데서 구속받은 자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이 세상에서 어린양의 피로 구속받은 자들로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다. 곧 이 세상에서 구속받은 모든 성도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계시록을 유대주의적 관점에서 유대인들을 위한 특별한 책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이에 대해서는 R. van de Kamp, Israël in Openbaring, Kampen, 1990을 참조하라).

이 세상에서 죄와 타협하지 아니하고 정절을 지키는 것은 대단히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끝까지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말고 충성할 것을 요구하신다. 서머나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주님께서는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으리라.”고 하셨다(2:10). 여기서 죽도록 충성하라(ginou pistos achri thanatou).”란 말은 오늘날 한국 교회 성도들이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열심히 봉사하라. 있는 힘을 다해 재물을 바치고 몸이 병들어 죽을 때까지 주님의 교회를 섬기라.”는 뜻이 아니다. 이 말씀은 비록 죽음이 온다 할지라도 주님께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말라.”는 뜻이다. 곧 옛날에 신하가 임금을 섬길 때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임금께 대한 절개를 변치 않고 끝까지 충성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끝까지,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나님 한 분께만 충성해야 하는 것이다. 곧 어떠한 환난이 닥쳐와도 믿음의 정절을 지켜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시록에서는 계명을 지킬 것인내가 강조되고 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님의 말씀을 지킨연고로 칭찬을 받았다(3:8). 그들은 주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다. 주님의 말씀은 인내가 있어야만 지킬 수 있는 말씀이며 인내가 있어야만 결실할 수 있는 말씀이기에 인내의 말씀이라고 불린다. 인내가 없이는 세상의 권세와 박해와 위협을 이겨낼 수 없다. 그러나 끝까지 인내하고 견디면 마침내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세상과 마귀의 권세는 끝이 나고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루어진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들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니라.”(14:12; 13:10)

 

II. 계시록의 각 단락별 내용

 

요한계시록은 우선 크게 네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부분은 요한에게 나타나신 주님을 다루고 있으며(1), 둘째 부분은 아시아 일곱 교회에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말하고 있으며(2-3), 셋째 부분은 인류와 세상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작정이 실현되는 것이 보여지고 있다(4:1-22:5). 그리고 마지막으로 결론 부분에서는 이 계시의 확실성과 신적 성격이 말해지고 있다(22:6-21). 이 아래의 글은 흐레이다너스의 계시록 주석을 많이 참조하였다.

 

1. 요한에게 나타나신 주님(1)

 

첫째 부분에서 요한은 서두(1-3)와 축복(4-6) 후에 주님의 재림에 대해 말한다(7). 이것은 계시록의 중심 사상이며 주제이다. 그리고 나서 그는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 말한다(8).

그리고 나서 요한은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밧모 섬에 있게 되었음을 말한다(9). 거기서 그는 주의 날에 성령에 감동하여 나팔 소리 같은 큰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는데 말하기를, 그가 보는 것을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라고 하였다(10,11). 그러자 요한이 그 음성을 알아보려고 몸을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으며, 그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12-16). 요한이 그 인자 같은 이의 모습을 보고서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었을 때에 그가 요한을 위로하며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고 하셨다(17,18). 그리고는 요한에게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고 하셨다(19).

 

2. 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2-3)

 

계시록의 두 번째 부분은 아시아의 일곱 교회의 사자에게 보낸 편지를 담고 있다. 곧 에베소 교회(2:1-7), 서머나 교회(2:8-11), 버가모 교회(2:12-17), 두아디라 교회(2:18-29), 사데 교회(3:1-6), 빌라델비아 교회(3:7-13), 라오디게아 교회(3:14-22)의 사자에게 보낸 주님의 편지이다. 이 일곱 교회는 그 당시 아시아지역에 실제로 존재했던 교회들이다. 밧모 섬으로 귀양가기 전에 요한은 아시아의 에베소에서 목회했었는데(Irenaeus), 그 주위의 교회들도 같이 돌아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밧모 섬에 있을 때에 주님께서는 요한과 직·간접으로 관계된 교회들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게 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게 보낸 편지는 그 당시 실제로 존재했던 교회에 주신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을 역사상 나타나는 일곱 시대에 관한 예언의 말씀으로 보거나 또는 교회 역사상 존재하는 일곱 유형의 교회에 주시는 말씀으로 보는 것은 근거가 없다. 왜냐하면 일곱 교회의 상황에 대한 묘사와 그들의 죄에 대한 책망 등은 그 당시의 지리적, 역사적 상황에 비춰 볼 때 너무나 현실적이고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 당시 이단들의 유혹의 성격인 내용들도 그 당시에 만연했던 이단들의 것과 상통한다(구체적인 것은 R. H. Mounce, The Book of Revelation, Grand Rapids, 1977, pp.83-130을 참조하라). 따라서 계시록 2-3장에 나타나는 말씀을 그 당시 역사상 실재했던 교회에 주시는 말씀으로 보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러나 그 당시 교회에 주어진 말씀은 물론 또한 그 후에 오는 모든 교회 성도들이 읽어서 유익되며 교훈이 되는 말씀이다. 이것은 계시록 2-3장에 나오는 말씀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성경의 모든 부분의 말씀은 비록 일차적으로는 그 당시 사람들을 위해 쓰여진 말씀이라 할지라도 오늘날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어야 한다(15:4 참조). 따라서 계시록 2-3장의 말씀은 그 당시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교회가 읽고서 교훈을 받아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나 지금이나 주님의 교회는 세상의 유혹과 위협을 받고 있으며 때때로 큰 시험과 환난을 받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황에 처한 교회들에게 주시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 그리고 책망과 권면의 말씀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말씀이 된다(헨드릭슨, 요한계시록, pp.9-11 참조).

 

3. 교회와 세상의 싸움(4:1-22:5)

 

1) 하늘 보좌와 봉인된 책(4-5)

 

계시록의 세 번째 부분은 하늘의 보좌에 대한 환상에서 시작한다(4). 다시금 주님의 음성이 들려 와서 요한에게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고 하였다(1). 따라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요한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여준 환상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실제 사실과 일치할 수도 있지만 꼭 그대로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사도 요한은 미래에 있을 실제 사실을 보았다기보다도 인간의 역사에 대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운영하시고 섭리하시는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 보여주신 환상(vision)’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6장에 나오는 바 흰 말’, ‘붉은 말’, ‘검은 말’, ‘청황색 말의 환상도 꼭 그런 말()들이 역사상 그대로 나타난다는 뜻이 아니라, 그런 말들을 보여 주심으로써 우리에게 어떤 영적 진리를 가르쳐 주시려 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계시록을 읽을 때 그러한 환상들을 통해 무엇을 가르쳐 주시려고 하는가를 생각해야 하며 그 환상들이 역사상 그대로 일어날 실제 사실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것은 계시록에서 단지 어떤 단어들을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계시록의 상당한 부분이 사도 요한이 성령에 감동되어 본 환상이라는 사실, 곧 주님께서 그 종 요한에게 속히 될 일을 환상의 형태로 보여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보여주신 환상들 가운데는 변할 수 없는 사실들도 그대로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 자신의 존재와 그리스도의 위엄과 통치, 천국과 불못의 존재 등등 상당한 부분에서 사실 자체를 보여주셨거나 또는 사실 자체와 일치하는 것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이든 요한이 성령에 감동하여 본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보여주신 환상에 속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다시 4장으로 돌아와서 요한이 여기서 본 것은 하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2-3), 그리고 보좌 주위에 둘러 있는 24 보좌들과 그 위의 장로들이었다(4). 또한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있는 네 생물도 보았는데, 그 앞뒤에는 눈이 가득하였으며 여섯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6). 이 네 생물과 24 장로들이 하나님을 찬송하며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하나님께 돌렸다(8-11).

5장에서는 인류와 세상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작정을 담은 책을 보여준다(1). 이 책은 인봉되어 있었는데, 아무도 열 사람이 없기로 요한이 울었더니 장로 중의 하나가 다가와서 말하였다.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고 하였다(2-5). 이에 어린양이 나아 와서 그 책을 취하매 네 생물과 24 장로들이 어린양을 찬양하였다(6-10). 그러자 또한 천군 천사들의 합창(11-12)과 온 피조물의 찬송이 들려 왔다(13).

 

2) 일곱 인 재앙(6-7)

 

6장에서는 어린양이 일곱 인 중의 하나를 떼실 때의 일을 요한이 본 것이 기록되어 있다(1). 흰 말붉은 말검은 말청황색 말을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된 이 환상은 세상을 달리는 복음의 승리를 나타내 주고 있다.

7장에서는 먼저 인 맞은 자 144에 대해 말한다(1-7). 여기서 우리는 이 숫자를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14장에서 이들은 땅에서 구속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3-5). 뿐만 아니라 각 지파의 인 맞은 수를 말하고 있는 부분(7:5-7)에 보면 단 지파가 빠져 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고 있는 유대 지파들의 순서도 구약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순서와 다르다. 뿐만 아니라 매 지파에서 인 맞은 자의 수가 똑같이 ‘12이라는 것도 이 수가 상징적임을 시사한다. ‘1212 곱하기 1,000이니 이것은 온전한 수(12)에다 많다는 개념(1,000)이 들어 있는 수이다. 따라서 12천 곱하기 12144천은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들의 충만한 수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여기 5-7절에서 말하는 이스라엘 자손은 육적인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이스라엘참 이스라엘을 말한다. 이들은 곧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말한다(Greijdanus). 이어서 요한은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찬양하는 모습을 보았다(7:9-17). 이들 큰 무리는 유대인들을 제외한 이방인들 중에서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을 포함한 이 세상 모든 나라들 가운데서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144셀 수 없는 큰 무리는 서로 다른 두 집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 먼저 것은 유대인들 중에서 구속함을 받은 자들이요 나중 것은 이방인들 중에서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흐레이다너스는 이 두 집단이 근본적으로 같은 성격이라고 하면서도 나중 것이 먼저 것보다 더 넓은 집단이라고 한다. , 먼저 본 ‘144은 하나님을 위해 특별히 수고하거나 고난받은 자들로서 특별한 은혜를 입은 성도들로서, 나중에 본 셀 수 없는 큰 무리는 이 ‘144을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Openbaring, pp.170, 286).

 

3) 일곱 나팔 재앙(8-10)

 

8-10장에서는 복음을 배척하는 세상에 임할 심판을 일곱 나팔의 재앙을 통해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첫째, 둘째, 셋째 나팔의 재앙은 자연에 임하는, 그리고 자연을 통한 재앙이다(8:7-12). 네 번째 나팔의 재앙은 이보다 더 심한 재앙이다(8:13). 그 다음 다섯 번째 나팔의 재앙은 영적이고 사단적인 박해와 환난을 말한다(9:1-11). 여섯째 나팔의 재앙은 두렵고 무서운 전쟁을 말한다(9:12-21). 10장에서는 요한이 힘센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는데, 그의 손에는 작은 책이 펴 놓여 있었다(1,2). 요한이 이 작은 책을 받아서 먹으니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배에는 쓰게 되었다(9-10). 이것은 복음이 세상에서 어떻게 역사하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복음은 구원을 주는 것으로서 달다. 그러나 세상은 그것으로 인하여 소동하게 되고 대항하게 된다. 그러나 요한은 이 복음을 계속 전파하여야 한다(11).

 

4) 복음 증거와 세상의 저항(11-14)

 

11장에서는 교회가 이 복음을 어떻게 세상에 전파하는가를 보여준다. 이들 증인들은 세상으로부터 엄청난 저항을 받아 결국 죽임을 당한다(1-10). 그러나 심판 날이 이를 때에 하나님께서 이들을 다시 살리시며 하늘로 올라오게 하신다(11-12). 그러자 세상에는 큰 심판이 임한다(13). 그리고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 하늘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큰 소리가 들린다(15-18).

12장에서는 앞장에서 말한 전쟁의 깊은 배후 곧 영적 배경을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사단과 그의 사자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들과 더불어 싸우는 싸움이다. 주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용 곧 사단의 박해를 받으며 위협을 당한다(1-4).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사단의 박해를 이기시고 하늘로 올라가신다(5). 그러나 그의 교회는 광야로 쫓겨나 어려움을 당한다(6). 이어서 사단과 교회와의 싸움이 좀더 깊은 차원에서 보여진다(7-12). 곧 하늘에서 전쟁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천사장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마귀)과 그의 사자들과 싸웠는데, 용이 이기지 못하여 땅으로 내어 쫓겼다(7-12). 그래서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지만 땅과 바다에 거하는 자들은 환난을 당하게 된다. 왜냐하면 마귀가 자기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을 알고 크게 분을 내기 때문이다(12).

13장에서는 사단의 도구들로서 두 짐승이 나타난다. 하나는 바다에서 나오는데, 그것은 인류를 지배하는 세상 나라들(정부 권력들)이다(1-10). 다른 하나는 땅에서 나오는데, 그것은 거짓 예언 또는 거짓 종교, 거짓 학문과 그 수종자들을 상징한다. 이 둘째 것은 정부 권력과 적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에 대항하여 싸운다(11-18).

14장에서는 어린양과 그에게 충성하는 자들이 승리함을 보여주고 있다. 먼저 7장에 나온 144천이 다시금 어린양과 함께 시온산에 서 있다(1-5). 7장에 예언된 것이 14장에서는 실현된 것으로 나타난다. 사단의 분노가 그것을 저지하지 못했다. 사단이 온 세상의 권력과 교묘한 술수를 동원했지만 결국 주님의 교회를 이기지 못했던 것이다. 그 때에 다른 천사가 큰 소리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고 외친다(6-7). 그리고 또다른 천사가 경고의 말을 계속 발한다(8-13). 결국 마지막에는 주님께서 오셔서 두 종류의 추수를 하신다. 하나는 의인들 곧 믿는 자들의 추수이며(14-16), 다른 하나는 불의한 자들 곧 믿지 않는 자들의 추수이다(17-20).

 

5) 일곱 대접 재앙(15-16)

 

15장과 16장에서는 일곱 대접의 재앙을 보여주고 있다. 흐레이다너스에 의하면 이것들은 종말 직전에 임할 재앙들, 곧 종말로 인도하는 재앙들을 좀더 자세히 묘사하는 것이라고 한다(p.xxxii).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꼭 종말 직전에 있을 사건들로 제한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된다. 오히려 헨드릭슨이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전 세대를 망라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요한계시록, pp.192-194). 15장은 환난을 이기고 벗어난 자들의 찬송과(2-4), 마지막 재앙에 대한 준비를 보여준다(5-8). 16장은 그 재앙이 일곱 대접의 재앙으로 묘사되어 있다.

 

6) 바벨론에 대한 심판(17-19)

 

17장과 18장은 다시금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다. 17장에서는 큰 음녀바벨론에 대해 말하고 있고, 18장에서는 그에게 임할 심판을 말하고 있다. 음녀는 여러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 세상 권력을 뜻한다. 특히 황제와 교황이 다스리는 로마의 권력과 또한 그 세속 도시와 적그리스도를 뜻한다(Greijdanus). 여기서 우리는 세상과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섬기지 않는 모든 자들의 비극적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보여준다.

19장은 이러한 바벨론과 불경건한 세상의 멸망에 대해 천사들과 네 생물과 장로들과 구속받은 성도들의 할렐루야찬송이 기록되어 있다(1-8). 그 때에 요한이 자기에게 말하는 천사에게 경배하려고 할 때, 천사가 그를 만류하여 이르기를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고 하였다(9-10). 그리고 나서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신 그리스도의 다스리심과 싸우심이 기록되어 있다(11-16). 그 결과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가 불못에 던지움을 당한다(17-21).

 

7) 교회의 승리와 최후 심판(20:1-22:5)

 

20장에서는 다시금 교회와 세상과의 관계를 묘사하고 있다(Greijdanus). 사단은 결박되고 천년 동안 무저갱에 던지워서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도록 갇히게 된다(1-3).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죽은 자들은 살아서(첫째 부활)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 동안 왕노릇한다(4). 그러나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한다(5).

여기의 천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음은 잘 알려져 있다. 천년이란 숫자가 상징적인 것임은 분명하지만 어느 기간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흐레이다너스는 이 천년기독교가 인류 사회를 주도하는 시대로 본다(p.xxxiii). , 로마 제국에서 이방 종교가 물러나고 기독교가 지배하게 된 때가 곧 사단이 결박된 때라고 본다. 4 세기의 콘스탄틴 황제 이래로 기독교가 인류 사회를 주도하게 되었으며. 기독교인이 모든 영역에서 주도하게 되었다고 본다(p.403).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너무 서양 중심적이라는 생각이 들며 너무 치우친 해석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윌리엄 헨드릭슨의 견해와 같이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복음 시대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또는 약간 수정하여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재림 직전까지의 기간이 천년왕국 시대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사단은 결박되었으며(12:29), 하늘에서 떨어졌다(10:18).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난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곧 무력하게 하려 함이다(요일 3:8).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더 이상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으며(6:6), 죄가 우리를 주관치(곧 왕노릇하지) 못한다(6:14). 그리스도는 세상을 이기셨으며(16:33),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 또한 세상을 이겼다(요일 4:4, 5:4).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노릇하셔야만 한다(고전 15:25). 하늘의 천군 천사들도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셨도다(ebasileusen).”라고 노래하였다(19:6; 11:17 참조).

다시 돌아와서 그 천년이 차매 사단이 다시 놓임을 받고 땅의 온 백성들을 모아 기독교회를 대적하고 공격한다(21:7-8). 그러나 이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저희를 소멸하고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는 영원한 불못에 던지운다(9-10). 그리고 나서 모든 죽은 자들이 부활하고 최후 심판이 행해진다(11-15).

21장에서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다(1).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또한 보았다(2). 새 예루살렘은 현재 있는 육적 예루살렘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단어 앞에 붙어 있는 거룩한 성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깨끗케 함을 받은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 곧 교회를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이들과 함께 거하시니 이들은 하나님의 돌보시는 백성이 되어 영원한 복락을 누린다(3-7).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과 악한 자들은 불못에 던지움을 당한다(8). 그 후에 요한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았는데, 그것은 지극히 아름답고 큰 성이었다. 그것은 아름다운 보석들로 꾸며진 완벽하고도 영광스러운 성이다. 이것들은 다 상징으로서 천국이 그만큼 아름답고 영화로운 곳임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이러한 천국은 영원에서(곧 마지막 종말 때) 완전히 빛날 것이지만 또한 이 세상에서 이미 부분적으로나마 실현되고 있다(Greijdanus).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그 기초를 가지고 있다. 만국이 이미 그 빛 가운데로 다니며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간다(24). 이방인들은 이미 이 세대에서 생명 나무의 잎으로 고침을 받고 있다(22:1-5). 거룩한 성 예루살렘은 여기에 그 본질을 따라 기술되고 있으며, 단지 영원에서 이루어질 영광의 계시를 따라서만 기술된 것은 아니다(Greijdanus). 그렇게 때문에 영원에서 완전히 빛날 것이 또한 이미 이 세대에서도 어느 정도 사실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 여기에 묘사된 거룩한 성 예루살렘은 영원에 가서야 비로소 실현될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예루살렘은 어떤 것이냐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것이냐 하는 것은 이 시대에 이 땅에서, 부분적이긴 하지만, 이미 보여지고 있으며 마지막 날에 충만하게 나타날 것이다.

 

4. 끝맺는 말(22:6-21)

 

마지막 부분은 계시록에 기록된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확증하며(6-9) 그 말씀을 마음에 받아들이고 그 말씀을 따라 살 것을 다시 한번 촉구한다(10-15). 다시금 예수님의 자기 확증과 자기에게 나아 올 것을 촉구한다(16-17). 그리고 이 책의 말씀에 무엇을 더하거나 제하는 자들에 대해 엄중한 경고를 발한다(17-21). 그리고 다시금 예수님의 재림을 소망하면서 요한계시록은 끝을 맺고 있다.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