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인물 사전/- 예레미야

예레미아[Jeremiah]

에반젤(복음) 2019. 10. 8. 23:13




예레미아[Jeremiah]

 

 

(렘 1:13-19) “13.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대답하되 끓는 가마를 보나이다 그 윗면이 북에서부터 기울어졌나이다 하니 14.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재앙이 북방에서 일어나 이 땅의 모든 주민들에게 부어지리라 15. 내가 북방 왕국들의 모든 족속들을 부를 것인즉 그들이 와서 예루살렘 성문 어귀에 각기 자리를 정하고 그 사방 모든 성벽과 유다 모든 성읍들을 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16. 무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들에 절하였은즉 내가 나의 심판을 그들에게 선고하여 그들의 모든 죄악을 징계하리라 17. 그러므로 너는 네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내가 네게 명령한 바를 다 그들에게 말하라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그들 앞에서 두려움을 당하지 않게 하리라 18. 보라 내가 오늘 너를 그 온 땅과 유다 왕들과 그 지도자들과 그 제사장들과 그 땅 백성 앞에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하였은즉 19. 그들이 너를 치나 너를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예레미야는 제사장 힐기야의 아들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자신을 어린 아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일찍 소명을 받은 것 같습니다. 예레미야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세우신다,’라는 말입니다. 그는 남 유다의 마지막 다섯 왕인 요시야, 여호아하스, 여호야긴, 여호야김, 시드기야왕 때 활동했으며, 예루살렘 멸망 이후 유다 남은 백성들이 애급에 이주하여 정착할 때인 B. C.580년경까지 약 50년 동안 활동합니다. 예레미야의 사역초기는 북이스라엘이 멸망당하긴 했지만, 바벨론과 앗수르가 세력 다툼을 하느라고 남 유다는 다소 평화로운 상태였습니다. 또한 내적으로는 선한 왕 요시야가 등극하여 성전을 정결케 하고 우상을 제거하는 등 내실을 다지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요시야 왕이 므깃도에서 애급 왕 바로느고와 싸우다가 전사한 뒤, 남 유다는 하나님이 아닌 애급을 의지할 대상으로 삼았고, 이후 왕들의 악행과 실정이 계속됨에 따라 유다는 급속히 쇠퇴의 길로 치달았습니다. 암흑과도 같은 혼란한 시대가 지속되었고, 백성들의 생활을 피폐해졌으며, 종교도 부패하고, 썩어서, 백성들의 영적 상태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나는 보았다. 예루살렘 예언자들의 망측한 짓을! 간음하며 헛소리를 따라가고 못된 것들 편이 되어주며 잘못을 뉘우치는 사람 하나 없어, 내 눈에는 모두 소돔 같이만 보인다. 그 시민이 모두 고모라 주민 같이만 보인다. 나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예루살렘 예언자들이 썩어, 온 나라도 따라서 다 썩었다. 이제 그것들에게 소태를 먹이고 독약을 마시게 하리라.”(23:14-15)

 

당시의 시대상은 정치. 사회. 종교 모든 분야가 부패하고 썩은 상태였기에, 예레미야의 역할 어렵고도 힘든 것이었습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비록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나와 빈다고 해도, 내가 이 백성에게 마음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이 백성을 내 앞에서 쫓아내라! 그들이 너에게 '어디로 가야 하느냐' 하고 묻거든, 너는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여라. 나 주가 말한다. '어디를 가든지, 염병에 걸려 죽을 자는 염병에 걸려 죽고, 칼에 맞아 죽을 자는 칼에 맞아 죽고, 굶어 죽을 자는 굶어 죽고, 포로로 끌려갈 자는 포로로 끌려갈 것이다.”(렘 15:1-2)

 

이것이 예레미야가 외칠 때 시대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선지자가 나라가 어려운 때에 백성들을 위로하고 소망의 메시지를 전해야 할 터인데, 회개와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는 예레미아는 당국과 마찰을 빚었고, 또 평안을 말하는 가짜 선지자들과도 충돌했습니다. 여호야야긴 왕은 예레미야가 쓴 두루마리를 읽으면서 칼로 잘라서 화롯불에 태웁니다.(렘36장) 제사장 바스훌은 예레미야에게 매질을 가하고 나무에 매달았습니다. 또 우물에 던진 적도 있었습니다. 회개 이외에는 이런 모든 심판을 피할 수 없지만, 선지자의 간절한 호소를 외면하고 유다 백성은 파멸의 길로 갔던 것입니다. 남 유다는 결국 B.C.605년 바벨론에 의해 첫 침공을 당한 후, 계속 침공을 당함으로써 BC586년 마침내 멸망당하고, 백성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기에 이르게 됩니다.

 

그 당신 선지자의 말씀이 전혀 효과가 없습니다. 효과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역작용이 납니다. 예레미아는 위험에 처하여지고, 두루마리는 불 살아지고, 왕은 더욱 분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레미야서의 모습입니다. 보통 우리는 효과가 없으면 그만 둡니다. 약을 먹어도 효과가 없으면 그 약을 중단하고, 장사를 해서 이익이 없으면 장사를 접고, 공부를 해도 계속 시험에 떨어지면 다른 길을 찾아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째서 듣지 않는 말씀을 예레미아 선지자에게 계속 전하게 하심으로 선지자를 위험에 빠트리고 백성들과 왕을 화가 나게 만들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1. 책임에 대한 문제입니다.

 

자녀들이 말을 안 듣는다고 한탄하는 부모들 중에는 교육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스스로 하게 하려고 내버려둔다.”는 것입니다. 크면 알아서 하겠지 라고 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아이 스스로 할 나이가 되기 전에 부모가 가르쳐야 할 시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이가 어릴수록 부모가 바른 판단을 내려주고, 바른 행동을 가르쳐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잘 거쳐야, 아이는 부모에게 배운 것을 가지고, 스스로 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스스로 하게 한다는 핑계를 대며 아이를 가르치지 않는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해라!”와 “했니?”로 교육을 다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숙제해라”, “다 했니?”, “일기 써라”, “다 했니?” 이런 말을 가지고는 교육이 안 됩니다. 이것은 잔소리이지 교육이 아닙니다. 왜 그것을 해야 하는지 먼저 알게 하고, 다 했을 때 잘했다고 칭찬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부모들이 아이가 엄마에게 버릇없이 굴어도 가만히 내버려 둡니다. 1학년 아이가 선생님에게 무례하게 굴어도 단지 아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학교에서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질 않습니다. 그런가 하면 열 살 난 아이가 가게에서 물건을 훔치다가 붙잡혀도 부모가 양해를 구하고 없던 일로 돌려버립니다. 이처럼 부모들은 사고의 뒤처리나 할 뿐 아이들의 잘못을 교육하는 일에 소극적입니다. 자신이 한 것에 대하여 책임을 지도록 교육하지 않습니다.

 

아이가 늦게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지 못해서 늦었다면 자동차로 학교에 데려다 주는 것을 자제해야 합니다. 아이가 준비물을 잊어버리고 학교에 갔을 경우, 부모가 대신 가져다주지 말아야합니다. 이처럼 아이가 나이에 알맞은 책임을 스스로 지게하고, 그것에 따르는 불편이나, 고통을 겪어 보아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모가 애처롭다고 항상 아이의 방패 역할만 해준다면 그 아이는 영원히 책임감과는 거리가 먼 사람으로 자라게 됩니다. 자녀를 사랑한다면 자신의 행동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지도록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입은 선지자입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합니다. 그것이 때로는 축복이고 듣기 좋은 것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듣기가 거북하고 거슬리고 심하면 말하는 선지자를 죽여 버리는 일까지 발생합니다. 예레미아는 하나님의 입이 되어서 백성들에게 왕과 대신들에게 말을 합니다. 그 말을 두루마리에 써서 보도록, 읽도록 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그것을 고치기는 고사하고 예레미아를 죽이려하고 실제로 그를 구금하고, 핍박했습니다. 그러면 문제는 무엇입니까. 예레미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전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당시의 백성들과 대신과 신하들이 죄에 깊이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향해서 큰 위험이 다가 오고 있었습니다. 그 나라는 마치 생명이 위험한 중증환자와 같았습니다. 이들에게 하신 말씀이 예레미아서입니다.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버리고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산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실상을 분명하게 알아라. 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부합니다.

 

그런데 듣지 않는데도, 전하는 것이 예레미아서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 백성에게 자신들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죄를 짓는 것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 죄의 결과는 자신이 져야한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나라가 망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을 때 그들은 누구도 원망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면 이미 수없이 경고를 받았던 결말이요. 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하면서 많은 고통을 받았고, 눈물을 흘렸고, 그때 마음을 고칩니다. 이방인들 속에서도 다시 하나님을 찾고 예배를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회당의 시작이며. 그 시대에 다니엘이나, 에스더, 느혜미야, 에스라, 에스켈 같은 인물들이 나왔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레미아는 실패를 한 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는 그의 말이 거부를 당했지만 결국은 그 말이 살아난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 경로당에 갔는데 한분이 인제가 고향이고 자기는 푸닥거리나 미신이 싫어서 이웃에 교회 나가는 사람에게 아내를 데리고 가라고 해서 지금 권사가 되었는데 작년에 폐 수술을 했는데 자기도 아내를 위해서 50년 피우던 담배를 끊었다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욥 4:7-8)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어리석은 사람이 있는데 첫째는 심지 않고 열매를 바라는 사람과 둘째는 나쁜 것을 심으면서 좋은 것을 기대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진리가 있다면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심어야 거둘 수 있습니다. 한자에 ‘불한당(不汗黨)’이란 단어가 있는데 ‘땀 흘리지 않고 잘 살려고 하는 무리들이라는 말입니다. 당시의 백성들은 죄를 심고 악을 행했습니다. 바른 말을 하는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레미아서입니다. 회개 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거부하고 결국 바벨론의 포로가 됩니다. 70년 동안 그들은 가슴을 쳤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지켜주지 않았다고 원망할 수 없습니다. 자신들의 무덤을 스스로 판 것입니다. 가지 말라, 가면 죽는다는 길을 뿌리치고 간 사람들이 그들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원망이 왜 나옵니까. 불평이 왜 나옵니까. 누가 그렇게 되라고 하였습니다. 제발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기어코 그 길을 같고 나라의 패망과 포로생활을 하는 결말을 본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많은 부분은 자기 자신의 책임입니다, 여기서 출발해야 문제를 풀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원망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원망하면 심판을 받는다고 까지 말씀하고 계십니다.

 

2. 선택권입니다.

 

미국 대통령 중 가장 뛰어난 엘리트로 평가받는 케네디 대통령은 당선된 지 얼마 안 되어 아이젠하워 전 대통령을 찾아갔습니다. 조언을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정책 하나에 온 국민의 운명이 걸려 있다는 중압감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습니다. 아이젠하워는 찾아온 케네디에게 딱 한마디를 해주었습니다. “대통령의 임무는 결단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대통령뿐 아니라 우리의 인생은 모두 결단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좋든 싫든 결단을 내려야만 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삼을 때 실패에 대한 두려움 없이 담대히 결단을 내릴 수 있게 됩니다. 수많은 상황에서 올바른 선택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실수를 두려워함으로 선택 자체를 회피하지는 마십시오.

 

사람은 영과 육의 결합체이기 때문에 육적인 본능과 영적인 소욕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육의 본능을 따라 살면 짐승 수준으로 추락하는 사람이 되고, 영적인 소욕을 추구하면 좋은 사람이 됩니다. 사람이 나오는 데로 말하고, 귀찮다고 게으름을 부리면 어떻게 됩니까. 엉망이 됩니다. 정신병자가 됩니다. 사람은 한 사람이지만 본능으로 살 것이냐. 영적으로 살 것인가를 결정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본능대로 사는 것을 육의 소욕을 따른다고 표현합니다. 폭력, 분노, 파괴, 간음, 질투, 게으름, 방탕 같은 것들은 다 본능을 따르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 인내, 축복, 희생, 충성, 인격, 거룩 같은 것들은 다 영적인 것에서 나옵니다.

 

예레미아서의 유다 백성이나, 대신들이나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육을 따라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결국은 나라가 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실제로 세상에 있던 수많은 나라가 망하고 무너진 것은 밖으로부터 온 적군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안에서 일어난 부패와 타락으로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아서의 핵심은 순종을 하면 살고, 거부하면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는 것을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회사에서 무능하다는 소리를 듣고 있는 김영수 과장은 어느 날, 회사 건물에 걸어놓은 현수막이 끊어질 것처럼 보이자, 그걸 바로 잡으려다가 그만 추락사하고 맙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는 자살로 인정되어 지옥행 표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옥문 앞에서 수문장에게 ‘나는 자살하지 않았다’고 항의했습니다. 그러자, 수문장은 “당신은 오래 전부터 아주 치밀하게 자살을 준비해왔지 않느냐.”고 말한 후, 그 내용을 말합니다. ‘12월 3일부터 5일간, 잠은 두 시간만 자고, 식사는 두 끼만 했으며, 그것도 라면과 삼각 김밥, 햄버거를 먹었다. 그리고 물 대신에 탄산음료를 먹었다. 그처럼 혹독하게 자신을 학대했으니, 죽으려고 작정한 것이 아니냐? 헬스클럽은 6개월 치 등록하고 두 번만 갔으며, 1월 14일부터 21까지 매일 술을 먹었다. 당신이 평생 먹은 폭탄주가 4만5천8백 잔이고, 양주 2만3천병, 그밖에도 어마어마한 술을 마셨다. 심근경색, 고혈압 등, 지병을 15가지나 갖고 있으면서, 왜 건강을 방치했는가? 그러니, 명백한 자살행위를 한 것이다. 자발적인 자살자다.’ 라는 것입니다. 그는 죽음을 선택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돌아와요, 아저씨’라는 이야기 중에 나오는 것입니다.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자신에게 선택권이 있다는 것입니다. 순종을 할 것인지, 제 마음대로 할 것인가. 하는 것은 자신의 문제이며 이것이 결국 천국과 지옥을 갈라놓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레미아 당시 바벨론의 포로가 될 것인가, 자유로운 백성으로 살 것인가 하는 문제는 자기들에게 달려있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으면 바벨론에게 복종한다는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선택에 문제입니다.

 

3. 귀한 줄 알라는 것입니다.

 

한 정신병자가 밤에 몰래 백화점에 침입했습니다. 밤새도록 가격표를 자기 마음대로 바꾸어 붙인 것입니다. 십만원 자리에는 100만원자리를 붙여놓고, 200만원자리에는 5만원 붙여놓고.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 다음날 아침에 일어났습니다. 백화점 문이 열리고 손님들이 들어와서는 그냥 엉터리 가격표를 보고 그대로 물건을 사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엉터리 가격표 백화점에 와서 물건을 사가지고 가는 사람은 누구를 가리킬까요? 바로 우리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가만히 자기 생활을 살펴보세요. 나는 아까운 내 인생을 무엇을 위해서 살고 있는가. 내가 귀하다고 붙잡고 있는 그것이 내 인생에게 귀한 것인가. 한번 다시 보라는 것입니다.

 

학생들에게 이 세상에서 최고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이냐, 고 질문합니다. 많은 학생들이 돈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돈, 명예, 건강, 부모 이 4가지 중에서 반드시 한 가지를 버려야 한다고 할 때 무엇을 버리겠느냐. 고 질문합니다. 그러자 많은 학생들이 '명예'를 버리겠다고 이야기하고, 심지어 일부 학생들은 부모를 버리겠다고 말했습니다. 돈을 버리겠다고 하는 학생은 별로 없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깁니다. 그러나 돈보다 가치 있는 것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자녀, 지혜, 시간, 믿음, 소망, 자유, 진리, 사랑, 생명, 천국 등입니다.

 

당시에 백성들은 자신들에게 있는 성전, 율법, 신앙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지 알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것을 잃어버린 후에 땅을 치며 통곡한 것이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자신이 듣는 말씀, 자신이 받은 직분, 정기적인 예배를 가볍게 여깁니다. 모이지 않습니다. 말씀을 엄중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새벽기도는 나오는 사람만 몇 사람 나오고, 수요일 저녁은 장로 권사 집사들도 안 나옵니다. 이제 수요 예배를 폐지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저는 수요일 저녁 7시 30분에 일을 한다고 예배 참석을 못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수요일 저녁 모이는 날이라는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수두룩합니다. 무엇이 믿음입니까. 이런 말씀을 들으면서 한 가지라도 결심해야 합니다. 매일 성경을 한 장이라도 읽자. 수요일 저녁은 꼭 참석해야 하겠다. 은혜 받고, 직분 받은 내가 새벽에 잠이나 자고 있으면 되겠나, 저녁에 일찍 자고 새벽을 깨워야하겠다. 이렇게 생각이 들어야 합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아이들은 병이 들고 아플 때 약을 먹지 않으려 합니다. 주사를 맞지 않으려합니다. 울고불고 야단입니다. 소아과에 들어 가보세요, 아이들 울음소리와 어머니의 당황한 모습을 볼 것입니다. 몸에 좋다고 한약을 한번 먹여 보세요. 먹이기 힘이 듭니다. 그래서 포기하고 마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이들만 그렇습니까? 부모들은 자식들에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자신들은 훌륭한 사람이 되려고 어떤 노력을 합니까? 노력 하지 않습니다. 공부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책 한권 제대로 읽지 않고 삽니다. 아이들보다 더 심하게 싸우는 것이 어른들이며, 욕심을 부려서 큰 손해를 보는 것도 어른들입니다. 친구하고 싸우지 말라고 말하는 부모들이 부부간에 말도하지 않기도 하고, 자식들 앞에서 다투고 싸웁니다. 나는 본이 된다. 라고 말할 사람은 아주 적습니다.

 

교인들은 어떻습니까? 반듯한 삶을 추구하며 믿음위에 삶을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 생활에 들어가면 자기 마음대로 합니다. 무슨 일은 결정하기 전에 기도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한 주간에 일곱 번의 새벽 기도와 세 번의 공식예배, 구역모임이 있습니다. 그 중에 얼마나 참여하고 또 중요하게 여기며 살고 있습니까? 오늘 날 배가 불러졌습니다. 아쉬움이 살아 졌습니다. 간절한 마음도 없고, 감사도 없습니다. 감사헌금 숫자 보십시오. 100사람이 모이는데 몇 사람이나 감사를 합니까. 육신적인 생활을 점점 발전합니다. 옷이나, 자동차, 사는 집은 아주 좋아 졌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어떻습니까. 진정성이 살아졌습니다. 신앙이 빛나는 신앙인이 얼마나 됩니까. 교회에서 들리는 찬송과 기도 소리가 살아졌습니다. 예배시간에 흘리는 눈물이 살아졌습니다. 사람들은 천국보다 외국여행을 사모합니다. 믿음의 부자가 되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결론

 

'무디'의 전기를 읽어보면, 그는 일생에서 씻을 수 없는 큰 과오를 저질렀던 때가 있었다고 후회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시카고에서 대전도 집회를 하고 있는데, 엄청난 청중이 모인 운동장에서 설교를 하는데 성령이 감동해 오기를 심판에 대해서, 종말에 대해서, 영혼 구원에 대해서, 설교하라는 감동이 옵니다. 그 설교는 내일 저녁에 합니다. 하는데 오늘밤에 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감동하기를 '내일은 네 날이 아니다'고 그러십니다. 그런 것을 억누르고 설교를 마치고 그 날은 집회를 끝냈습니다. 그런데 그 밤에 역사에 기록될 '시카고 대 화재'가 발생한 것입니다. 그 밤에 시카고 전 시내가 불바다가 되었고 수많은 시민들이 불에 타 죽고 말았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무디는 전날 밤에 인생의 종말에 대해서 설교를 하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면서 죄인 된 심정으로 살았다고 술회하고 있습니다.

 

빌리 그레함과 같이 일하였던 사람 중에 킴 윅스라는 맹인이 있습니다. 그는 이런 간증을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장님인 나를 인도할 때, 저 100m 전방에 뭐가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앞에 물이 있으니 뛰라고 하고, 층계가 있으니 발을 올려놓으라고 합니다. 인도하시는 분을 믿고 내가 한 걸음 한 걸음씩 걸음을 옮기기만 하면 항상 나는 가고자 하는 목적지에 꼭 도달하게 됩니다. 저는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식이 꼭 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알 수 없는 우리의 미래 때문에 답답해하지만, 우리는 10분 후도 알지 못하고, 알고자 할 필요도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보이시는 하나님께 믿음으로 순종하여 오늘을 살면, 하나님은 내일을 인도하셔서 마침내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그 곳에 도달케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1년 2년 후가 아닙니다.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은 이번 한주를 신앙인으로 잘살아 보라고 하십니다. 여러분들의 신앙적인 행보를 기대합니다.

 

▲조영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