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스가랴 강해

스가랴서 연구

에반젤(복음) 2019. 10. 1. 21:07




스가랴서 연구  

 

 

서론 

 

1. 스가랴(הירכז,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선지자와 학개 선지자는 동시대 인물로서(1:1,1:1) 역사적 배경이 비슷하다.

 

B.C.520년에 학개 선지자는 4개월에 걸쳐서 네 번 설교했다. 스가랴 선지자는 학개 선지자가 사역을 시작한지 두 달 후부터 시작했다. 스가랴가 사역을 시작할 때 고레스는 부친의 뒤를 이어 페르시아의 왕이 되었다. 그는 왕 위에 오른 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온 유다를 자유케 해 주고 그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에 귀환하여 성전을 재건하도록 허용했다. 고레스가 바벨론을 지배하기 시작한 해는 B.C.539년이다. 고레스는 그 때에 조서를 내려 이스라엘이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서 성전을 재건하도록 허락했다(대하36:21-23,1:1-4,6:3-5). 에스라서 2장은 큰 무리(5만 명)B.C.538-537년에 사이에 총독 스룹바벨과 제사장 예수아의 인도 아래 예루살렘으로 귀환했다고 말해 주고 있다. 귀환한 유대인들은 B.C.536년 초에 성전건축의 기초를 다졌다(3:8-13). 그러나 성전건축은 주변의 어려운 환경으로 인하여 지연되었고 결국에는 중단되고 말았다(4:1-5,24). 그 시기 페르샤의 고레스는 전사했고(B.C.529), 일 년 동안 그의 섭정을 받았던 아들 캄비세스 2(Cambyses)가 페르시아의 왕이 되었다(B.C.530-522). 그러나 정치적인 반역이 일어나 결국 그의 왕좌는 B.C.522년 다리오(Darius Hystaspes)에게 넘어 갔다. 다리오왕은 종교적으로 관용하는 정책을 베풀었다. 그는 자신의 종교 정책에 따라 유대인들에게 호의를 베풀어 고레스의 칙령을 승인했고, 성전 재건을 허용했다(6:6-12,1:1-2)(Kenneth Barker, 스가랴서 주석, Expositor's Bible Commentary P.640).

 

학개와 마찬가지로 스가랴도 귀환한 백성들로 하여금 중단된 성전건축을 다시 시작하도록 격려하였고 또한 유다에게 장차 모든 대적과 싸워 승리할 날이 올 것이라는 소망의 메시지를 전해 주었다. 스가랴의 사역은 선지자 학개 보다 더 광범위 했고 또한 그의 예언의 범위도 다른 소선지자들보다 광범위했다. 스가랴서에는 많은 환상이 제시되어 있기 때문에 구약의 계시록이라 불리기도 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활동을 다른 소선지서의 저자들보다 훨씬 자세히 말했다(Charles Lee Feinberg, 12소선지서 연구, 은성, P.452). 로빈슨(George L. Robinson)은 스가랴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묘사했다. “본인의 판단에 의하면 스가랴서는 모든 구약 문서들 중에서 가장 메시야적이며 가장 묵시적이며 종말론적인 책이다스가랴서에 나타나는 메시야적인 예고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가지(3-6, 4:2, 23:5)"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6:13)'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과 장차 받을 영광’9:9,10)' ‘배반당하시는 목자 그리스도(11:12,13)' ‘십자가에 못 박히는 그리스도(12:10)' ‘그리스도의 수난(13:7)' ‘그리스도의 재림(14)' (Merrill F. Unger, 구약개론, 은성, p.402).

 

스가랴서는 크게 나누어서 1-8장과 9-14장의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부분에서는 스가랴 시대의 사람들에게 주는 여덟 가지 예언적 환상이 기록되어 있고. 두 번째 부분은 종말의 때에 일어날 사건들과 천년왕국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스가랴는 B.C.516년에 성전 건축이 완성될 것을 예언했지만 스가랴서의 마지막 장들에는 그보다 훨씬 더 큰 예언들이 기록되어 있다. 스가랴의 예언들을 개괄하면 환상들(1-6)과 질문들(7-8) 그리고 경고들(9-14)로 구성되어 있다. 스가랴서는 포로 귀환으로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의 이스라엘의 영적 역사와 이스라엘과 이방인들과의 관계를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스가랴의 예언에서 메시아와 예루살렘은 중심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스가랴의 예언에는 세 개의 제국이 등장하는데 바사, 그리스, 그리고 로마가 이들 나라다.

 

 

2. 스가랴서를 개괄하면 다음과 같다.

 

스가랴의 메시지는 회개의 메시지와 함께 시작된다. 스가랴는 유다에게 선조들이 회개의 권고를 거부함으로 패망했다는 사실을 회상시키며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한다(1:3). 이것은 유다가 죄로 인하여 황폐해 진 곳으로부터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은 회개뿐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회개는 유다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로 인하여 받을 수밖에 없는 저주로부터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이다. 하나님은 죄인들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회개라는 은혜의 수단을 주셨다.

 

스가랴는 다리오왕 21124일 밤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여덟 개의 환상을 전해 주고 있다(1:7-6). 이 환상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화석류 나무 가운데 있는 사람(1:7-17), 네 뿔과 공장(工匠)에 대한 환상(1:18-21), 척량 줄을 가진 사람(2:1-13), 대제사장을 정결케 하는 것에 대한 환상(3:1-10), 순금 등대와 두 감람나무(4:1-14), 날아가는 두루마리(5:1-4), 에바 속에 앉은 여인(5:5-11), 네 병거에 대한 환상(6:1-8). 이 여덟 개 환상들은 각각 특별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이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온 후 내외적인 많은 어려움을 당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전을 건축해야 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특별한 격려와 위로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지자 스가랴를 통하여 이들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주신 것이다. 이런 목적으로 선포된 여덟 개의 메시지는 형식에 있어서는 서로 다를지라도 내용에 있어서는 다음의 세 가지 점에 있어서 일치한다. 하나는 이스라엘을 황폐케 했던 열국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멸망할 것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되어 그곳에 예배가 회복될 것이라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예루살렘이 평화의 도시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메시지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여전히 사랑하고 계심을 말씀해 주심으로 그들로 하여금 고난 가운데서도 위로 받게 하셨고 또한 그들에게 위임해 주신 성전 건축을 지속적으로 하도록 하셨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를 필요로 하는 자들이다.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위임받은 일을 행하고 있을지라도 때로는 낙심 가운데 빠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낙심 가운데 빠진 하나님의 백성들은 오직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를 통해서만 회복 되고 새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년 후 스가랴에게 또 다시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7,8). 이 말씀은 벧엘로부터 올라온 두 사람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한 지금도 국가적 슬픔을 당한 날을 기념하여 금식해야 하는지 묻는 물음에 답하는 형식으로 임했다.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의 함락을 기념하는 사월의 금식(417), 성읍과 성전의 파괴를 기념하는 오월의 금식(59), 그다랴의 암살을 기념하는 칠월의 금식(73), 그리고 예루살렘 포위의 시작을 기억하기 위한 시월의 금식(1010) 등이 있었다. 하나님은 금식에 대하여 묻는 자들에게 그들이 지금 하고 있는 금식이 위선임을 말해 주었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금식이 아니고 그들 가운데 진실과 공의가 행해지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하나님께서 금식을 금하신 것은 금식이 무가치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금식이 형식에 불과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후부터 칠십년 동안이나 오월과 칠월에 금식했지만 하나님은 이들에게 그것이 나를 위한 것이었는가라고 물으셨다. 이것은 금식은 금식하는 행위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합당한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줄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이스라엘이 패망한 원인은 그들 속에 지녀야할 참된 경건을 상실하고 형식적인 종교적 습관에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스가랴는 벧엘로부터 파송된 두 사람에게 이와 같은 사실을 말하고 그들로 하여금 참된 경건을 소유하도록 권고하였다. 공의와 진실을 행하라는 권고야말로 참된 경건을 소유하라는 권고다. 만일 이들이 참된 경건을 소유한다면 금식의 날은 그들에게 흉악의 결박으로부터 해방의 날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스가랴는 현실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의 모든 관심을 여호와의 날에 집중시키고 있다(9-14). 스가랴가 말하고 있는 여호와의 날은 현재와 미래에 대한 예언이 뒤엉킨 날이다. 이 날은 시간적으로 볼 때 가까이는 이스라엘 가운데서 예언의 말씀이 성취될 날을 말하고, 멀리는 메시야의 임하심과 세계의 종말에 대한 예언이 성취될 날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한 시점에서만 여호와의 날을 바라본다면 그 날이 어떤 날인지 혼돈할 수도 있다. 구약의 대부분의 예언들은 현재의 사건을 예표로 하여 미래에 성취될 일을 말하고 있다. 이처럼 대부분의 예언들은 이와 같은 이중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전자의 메시지는 이스라엘에게 보다 더 현실적인 것을 말하고 있지만, 후자는 보다 세상의 종말에 관심을 두고 있다. 스가랴서를 통해 주신 메시지의 내용은 대부분 메시야의 초림과 배척(9:1-11:17), 그리고 메시야의 재림에 대하여 말해주고 있다(12:1-14:21).

 

 

 

 

위로의 말씀 

 

1) 스가랴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는 위로의 메시지다.

 

선지자 스가랴는 학개와 동시대 선지자다. 그러므로 이들이 활동하던 시기에 유다에게 요구 되었던 것은 성전 건축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당시 유다는 바벨론에서 귀한 한 후 성전 건축을 시작했지만 여러 가지 외적 환경의 어려움으로 인하여 성전 건축을 중단하고 15년 동안이나 방치해 둔 상태에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이처럼 성전 건축을 중단한 유다에 대하여 한 편으로는 책망하셨고 다른 한편으로는 위로의 말씀을 주심으로 그들로 하여금 성전 건축을 완성하도록 촉구하셨다. 이와 같은 방식은 하나님께서 모든 시대 자기 백성들을 인도하시는 방식이기도 하다. 낙심한 자들로 하여금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격려와 위로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진정한 지도자는 격려와 위로를 할 줄 아는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너는 무리에게 고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1:3)”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회개한 이스라엘에게 회복의 은혜를 주실 것에 대한 약속의 말씀이다.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회개할 때 그들과 함께 해 주실 것을 약속해 주셨다. 그러므로 회개는 주의 길을 예비하는 길인 동시에 그 자체가 위로의 메시지가 되는 것이다(3:2,3).

 

7장은 우리에게 진정한 회개란 어떤 것인지 말해 준다. 선지자 스가야는 여덟 번의 이상을 받은 후(1:1), 2년이 지난 다리오왕 사년 구월 사일에 또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7:1), 이 때 임한 말씀은 유다로 하여금 자신을 돌아보게 하므로 참됨 신앙을 회복 시켜 주기 위한 권고의 말씀이었다. 이 권고의 말씀은 금식의 문제에 대한 물음과 대답을 통하여 주어졌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들은 국가적으로 비운을 맞은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그 날을 금식일로 정하고 그 날을 지키며 슬퍼했다. 이들이 지킨 4월의 금식(49, 왕하25:3,4; 39:2)은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진 날을 기념하는 날이었고, 5월의 금식(59, 왕하25:8-10)은 하나님의 전이 소화되어 파괴되던 날을 기념하는 날이었고, 7월의 금식(73, 왕하2:25; 41:2)은 아하감의 아들 그달야의 암살을 상기하는 날로 지켰다. 그리고 10월의 금식(1010, 왕하25:1; 24:2)은 바벨론 왕이 예루살렘을 포위한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지켰다. 유대인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후 칠십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이와 같은 금식 일을 지키며 국가적인 재난을 슬퍼했다. 그러나 지금은 선지자 예레미야가 예언한 예언이 성취되어 포로 되었던 유대인들이 해방 되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였다. 그리고 그들에 의하여 예루살렘에 성전이 건축되어 거의 완성 단계에 있었다. 이와 같은 때에 벧엘의 사람이 예루살렘에 사람을 보내어 선지자와 제사장들에게 그들이 지금까지 바벨론에서 지켜온 금식 일을 계속 지켜야 하는지 아니면 중단해야 하는지 물어왔다. 선지자 스가랴는 이들의 물음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해야 할 것인지 하나님께 물었고, 하나님은 선지자의 물음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다. 선지자는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라고 말하므로 벧엘로부터 온 자들에게 주는 대답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말하고 있다(7:4). 하나님은 벧엘에서 온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칠십년 동안 오월과 칠월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너희의 먹으며 마심이 전혀 자기를 위하여 먹으며 자기를 위하여 마심이 나니냐(7:5,6)" 여기 스가랴에게 임한 말씀은 금식을 계속해야 하느냐 중단해야 하느냐에 대한 것이 아니고 그 금식을 하는 동기에 대하여 묻는 말씀이다. 즉 유대인들이 바벨론서 칠십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국가적인 재난의 날을 기억하며 금식하고 슬퍼해 왔는데 그렇게 한 진정한 동기가 무엇인지 물은 것이다. 이 물음은 바벨론의 유대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 하나님의 백성들에도 중요한 물음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물음을 통하여 진정으로 자신의 신앙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들이 칠십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금식을 해 왔을지라도 그것이 하나의 관습에 불과했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일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무슨 일을 얼마나 오래 해 왔느냐 또는 앞으로 얼마나 계속할 것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일을 어떤 동기로 또는 어떤 목적으로 하고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신앙의 전통이나 또는 예배 의식이 중요할지라도 이것들을 지키는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다면 이것들은 다만 종교적 관습에 불과할 뿐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가운데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자들을 찾으신다. 그러므로 바벨론으로부터 온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의 요점은 금식 일을 지킬 것인지 중단 할 것인지에 관한 것이 아니었고 진정한 회개가 있었는지 없었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그들이 그날의 금식을 스스로를 돌아보며 진정으로 회개하는 기회로 삼았다면 하나님은 그 금식을 받아 주실 것이고 또한 앞으로도 그런 금식을 받아주실 것이다. 그러나 그 날의 금식이 단순히 신앙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라면 하나님은 그들을 받지 않으실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바벨론으로부터 온 자들의 물음에 대하여 주신 대답이었다.

 

8-14절은 하나님께서 선지자 스가랴를 통하여 유다의 선조들이 신앙의 전통을 지켰지만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난 모습을 보여 주면서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고 있다. 유다의 역사를 보면 자의적(恣意的)으로 성전 예배를 중단한 적은 없다. 유다가 영적으로 침체 가운데 있을 때에도 그들 가운데 성전 예배는 더욱 장엄하게 드려졌다. 그러므로 성전 예배의 외적 모습은 유다의 진정한 신앙의 모습을 판단해 줄 수 있는 시금석이 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유다의 참된 신앙의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는 시금석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나타나는 그들의 변화된 삶의 모습이었다. 만일 그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고 있다면 예배 의식을 통해서도 또는 일상적인 생활 가운데서도 그들은 하나님께 합당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다면 그들 가운데 장엄한 예배 의식이 행해졌을지라도 그들의 삶은 세속적일 수밖에 없다. 즉 하나님의 백성들이 참된 신앙 가운데 있을 때에는 신앙과 삶의 모습은 일치하지만, 참된 신앙으로부터 떠나 있을 때에는 이들 사이에 불일치를 이룰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면 신앙은 형식화되고, 이것은 형식적인 예배 의식을 통하여 표현되는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유다의 선조들은 신앙의 전통을 지켰고 성전 예배를 드렸지만 그들의 삶은 신앙에 합당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 가운데 공정한 재판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고아와 과부 그리고 나그네가 보호를 받지 못하였고,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하는 마음이 사라졌다. 이런 삶의 모습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청종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증거들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들에게 대하여 그들이 청종하기를 싫어하며 등으로 향하며 듣지 아니하려고 귀를 막으며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 율법과 만군의 여호와가 신으로 이전 선지자를 빙자하여 전한 말을 듣지 아니하므로 큰 노가 나 만군의 여호와께로 나왔도다(7:10-12)"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로 인한 심판으로 아름다운 땅 예루살렘은 황무하였고 성전은 파괴되었으며 또한 유다인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스가랴를 통하여 말씀해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참 된 신앙은 형식(의식)의 문제가 아니고 마음의 문제'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스가랴를 통하여 이와 같은 말씀을 주심으로 우리에게 참된 회개는 형식으로의 돌이킴이 아니고 마음의 돌이킴이라는 것을 말씀해 주셨다. 그러므로 진정한 회개는 우리의 영이 하나님의 인격과 대면할 때만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무리에게 고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1:3)” 여기서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는 메시지는 바로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우리 스스로들 돌아보고 마음으로 돌아오라는 메시지다. 이처럼 그 분의 임재 앞에서 마음을 돌이키는 행위 또는 예배하는 행위가 바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행위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에게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주시기 원하시며 또한 이런 자들을 구원해 주시기 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스가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위로 하실 때 무엇을 통하여 위로하시는지 말씀해 주셨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로하실 때 말씀을 사용하신다. 이것은 스가랴서뿐만 아니라 모든 성경이 말해 주고 있는 위로의 방식이다. 시편 107편은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도다(107:19,20)”라고 말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위로가 필요할 때 자신의 종들을 보내심으로 그들에게 말씀을 주셨다. 스가랴서의 여덟 개의 환상을 통해 주시는 말씀과 메시야 예언을 통하여 주시는 말씀은 모두 시련 가운데 있는 유다를 격려하고 위로해 주시기 위하여 주신 말씀들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모든 시대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적 침체 가운데 있을 때 무엇으로부터 위로를 받아야 하는지 교훈해 준다. 하나님은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말씀을 보내신다. 여기 말씀을 보내신다는 것은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다는 의미다. 성령님은 시련 중에 있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여 소망 가운데 거하도록 해 주시기 위하여, 때로는 새로운 말씀을 주시기도 하고, 때로는 이미 알고 있는 말씀들 가운데 필요한 말씀을 생각나게도 해 주신다.

 

하나님께서 스가랴를 통하여 유다에게 주신 여덟 가지 환상은 유다가 이미 잘 알고 있는 성전을 계시의 수단으로 하여 주신 말씀들이다. 이 경우는 성령님께서 이미 알고 있는 말씀을 지금 여기에서 필요한 말씀이 되게 해 주신 예가 될 것이다. 실제로 스가랴가 본 일련의 환상들은 서로 독립적인 것이 아니고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환상을 통하여 그에게 성전이 점점 완성 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 주셨다. 하나님은 첫 번째 이상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하여 일하시는 모습을 보여 주셨고, 두 번째 이상을 통하여 성전 건축을 방해하는 열국을 심판하실 것을 보여 주었고, 세 번째 이상을 통하여 황폐한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기 위하여 척량하는 모습을 그리고 네 번째를 통하여 제사장이 세워지는 것을 다섯 번째를 통하여 일곱 촛대에 불이 밝혀지는 모습을 보여 주셨다. 여섯째 환상에서 하나님은 공의대로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심으로 유다를 위로 해 주셨고, 일곱째 환상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죄를 제거하실 것과 바벨론을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셨고, 여덟 번째 환상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세계에 이를 것을 말씀하셨다. 유다는 이와 같은 환상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위하여 끊임없이 일하시는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이고, 또한 자신들의 구원이 점점 온전하게 이루어져가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환상을 통하여 주신 말씀들은 유다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욱 신뢰할 수 있게 했고, 구원의 소망을 더욱 확신할 수 있게 했다. 말씀은 언제나 우리 가운데 이와 같이 역사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위로가 필요할 때 말씀을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시련 가운데 있는 유다에게 스가랴를 통하여 연속적인 환상으로 말씀해 주신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할 때까지 그리고 우리가 스스로의 구원을 온전히 확신할 때까지 하나님께서 계속 말씀 해 주신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연속성을 갖는다'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 연속성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열쇠가 된다. 왜냐하면 이 말은 자기 백성을 위하여 베푸시는 은혜가 끊이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 주기 때문이며 또한 자기 백성 가운데 이루고자 하시는 선하신 목적을 점진적으로 이루어가기 위하여 필요한 은혜를 필요할 때마다 주신다는 것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 가운데서만 온전함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은혜를 말씀을 통하여 주시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가 필요할 때 말씀을 통하여 그것을 주신다는 것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이것을 알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에 대하여 주목하게 되고 또한 그 말씀을 합당한 태도로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읽는 중 특별한 깨달음이 있거나 또는 설교 말씀을 듣는 중에 특별히 들리는 말씀이 있을 때 이것을 하나님께서 지금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믿는다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기대하며 소망 가운데 살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그 시간의 깨달음으로 족할 것이다. 이처럼 말씀이 임했을 때 그 말씀을 지금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는 것과 단순한 깨달음으로 아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말씀은 언제나 지금 여기에주시는 말씀으로 받는 자들 가운데서만 역사하신다. 성경은 이런 자들 가운데 임한 말씀의 역사에 대하여 '마음이 뜨거웠다'라는 표현을 사용하므로 말씀을 통한 역사하심이 그들의 삶 가운데 실제적인 것임을 말해 주고 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격려하시고 위로하시고자 하실 때 말씀을 통하여 그들의 장래를 보여 주실 뿐만 아니라 보여주신 그들의 장래를 보장해 주실 것을 약속해 주신다. 하나님께서 고난 가운데 있는 자기 백성들을 위로하시기 위하여 주신 메시지들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언젠가 그들의 대적들이 멸망할 것이며 그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소망이다. 이와 같은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현재의 고통을 인내할 수 있게 해 주고 장래에 대하여 구원의 소망을 갖게 해 준다. 여기 하나님께서 대적들을 멸하실 것이다라는 메시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대적들로부터 받고 있는 현재의 고난조차도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것이라는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장래에 그들의 대적을 멸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원하시기만 하면 대적을 멸하실 수 있는 능하신 분이라는 것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대적을 멸하지 않으시고 장래에 그들을 멸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하여 자기 백성들 가운데 이루시고자 하시는 깊은 뜻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온전함에 이르도록 하시기 위하여 사용하시는 은혜의 수단들 가운데 하나는 고난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를 온전함에 이르도록 하기 위하여 고난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고난은 완고한 마음을 돌이켜 회개에 이르도록 하고(32:1-5), 자기를 의뢰하지 않고 하나님만 온전히 의뢰하도록 이끌어 주고(고후1:9), 또한 고난은 고통 받는 형제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줌으로 진정 형제를 사랑하게 해 주신다(2:18). 그러므로 우리가 현재 고난 가운데 있을지라도 이 고난을 통하여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질 것을 알기 때문에 인내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연약한 자들이기 때문이 이와 같은 뜻을 알지라도 가까운 시일 내에 이 고통으로부터 자유케 된다는 소망이 없으면 견딜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고난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이런 소망을 주시기 위하여 장차 우리의 대적들을 멸하실 것과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소망의 말씀을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스가랴를 통하여 유다에게 두 가지 방식으로 그들의 장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 보여주셨다. 하나는 가까운 장래에 이루어질 일을 보여주심으로 백성들을 위로해 주셨고, 다른 하나는 보다 먼 장래에 이루어질 메시야에 대한 약속을 말씀하심으로 위로해 주셨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현재 직면한 문제들을 도우신다. 하나님은 스가랴를 통하여 현재 그들을 괴롭히고 있는 대적들을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셨고 또한 그들이 건축하고 있는 성전을 완성할 수 있도록 해 주실 것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더 나가서 예루살렘성 전체가 평화의 도시로 회복될 것을 말씀해 주셨다. 유다는 이와 같은 메시지를 듣고 실제로 하나님께서 현재 자신들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로부터 구원해 주실 것을 믿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유다에게 메시야를 통하여 임하게 될 영원한 축복을 약속하셨다. 전자가 현실로부터의 구원이라면 후자는 그들이 누리게 될 궁극적 축복이요 구원이라 할 수 있다. 현실의 축복은 상황이 달라지면 변할 수 있다. 실제로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하나님을 의뢰했을 때 그들의 환경은 복되었지만, 돌이켜 악을 행할 때 그들의 환경은 다시 황폐해 졌다. 이와 같이 현재의 문제에 약속된 축복은 현재의 상황에 따라 변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메시아를 통하여 받게 될 궁극적인 축복은 어떠한 상황에도 변하지 않는 축복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현재에서 실패할지라도 여전히 그들 앞에는 소망이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현재의 시련으로부터 구원의 소망을 말씀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메시야를 통하여 이루어질 영원한 구원의 소망을 말씀해 주신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스가랴를 통하여 이중적인 소망의 말씀을 주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소망 가운데 살게 해 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