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요엘 강해

[스크랩] 요엘서 연구

에반젤(복음) 2019. 9. 26. 10:04




 요 엘 서 연 구

 


*이름의 뜻을 통한 주제-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

*요엘 주제 - 주님의 날에 우리를 회복케 하시는 성령

*요엘 주제 절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요엘 2:32).



Ⅰ. 예언자 요엘

   예언자 요엘에 대하여 참고가 될 자료를 본서 외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는 브두엘의 아들인데 요엘이라는 이름의 뜻 (야웨는 하나님이시다)으로 보아 그의 부모는 경건한 신앙의 소유자였을 것이다.


  요엘의 연대에 관해서 학자들 사이에 9세기로 부터 2세기까지 큰 연대 차이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요엘의 연대를 요아스왕 (836 - 797년) 시대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즉 포로기 전이다. 그 이유는 본서가 호세아서와 아모스서 사이에 끼어 있다는 것은 옛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아모스, 호세아와 같이 초기 예언자로 간주했었다는 증거다. 또 본서의 문체가 포로기 전의 형식이며 또 왕에 대한 말이 없고 장로들과 제사장들만 언급되어 있는 것은 요아스 왕이 일곱 살에 왕위에 오른 것 (왕하 11 : 21)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본서에서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은 1장과 2장의 말씀이 미래의 일에 대한 예언인가 그렇지 않으면 과거의 사실에 대한 역사적 기록인가 하는 문제다.



Ⅱ. 내용과 주요 사상

   가공할 만큼 많은 메뚜기 떼가 모든 곡식과 초목을 먹어버리고 땅을 초토화하는 큰 재앙이 유다에 일어났다. 요엘은 이 사건에서 자연적인 재난과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적, 도덕적 생활 사이에 어떠한 깊은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믿었다. 즉 자연적 재난 속에 종교적 의미가 있다고 해석하였다. 요엘은 하나님께서 범죄한 민족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메뚜기를 보내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리하여 요엘은 이 재앙을 보고서 백성들이 회개할 것을 호소하였다.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2 : 12)라고 외쳤다.

 

  그러나 요엘의 말씀은 희망의 예언이기도 하였다. 만일 이스라엘 민족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서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가뭄과 메뚜기의 재앙으로 잃어버린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주실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주리니 너희가 이로 인하여 흡족하리라"(2 : 19)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느치과 황충과 팟중이의 먹은 횟수대로 너희에게 갚아주리니 너희는 먹되 풍족히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행하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 것이라 내 백성이 영원히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 (2 : 25 - 26).



Ⅲ. 내용 분해

1. 메뚜기의 습격과 가뭄 및 그 회복 1 : 1 - 2 : 27

   1) 메뚜기의 습격과 가뭄 1 : 1 - 20

   2) 여호와의 날의 임박과 메뚜기의 습격 2 : 1 - 11

   3) 민족적 회개의 권고 2 : 12 - 17

   4) 재앙의 제거와 풍년의 약속 2 : 18 - 27


2. 장래의 축복과 외국들의 심판 2 : 28 - 3 : 21

   1) 성령을 부어주심 2 : 28 - 29

   2) 여호와의 날의 징조 2 : 30 - 32

   3) 이스라엘을 압박하는 자를 심판하시는 이유 3 : 1 - 3

   4) 두로, 시돈, 블레셋의 죄와 벌 3 : 4 - 8

   5) 최후의 결전과 심판 3 : 9 - 17

   6) 유다가 받을 축복 3 : 18 - 21



Ⅳ. 요엘서의 구성 내용


첫째, 이스라엘 심판입니다.

   1장에서 2:11절까지 이스라엘의 심판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심판하십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이 애굽처럼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처럼 되어버렸다는 것을 무엇을 보고 알 수 있습니까? 메뚜기로 심판하는 것을 보고 알 수가 있습니다. 메뚜기는 하나님이 애굽을 쳤던 심판의 도구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이스라엘이 애굽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은 타락하였습니다. 땅의 소산을 먹고 그것이 전부인 줄 알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이스라엘에 대하여 하나님은 메뚜기를 보내어서 심판하시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심판은 너무나도 철저합니다. 1:4절에 "팟중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느치가 먹고 느치가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라고 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팟중이, 메뚜기, 느치, 황충이 등은 별개의 곤충이 아니라 메뚜기의 생애 동안에 메뚜기가 겪는 변화과정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메뚜기가 없어지지 않고 너무나 왕성하게 살면서 모든 식물을 남겨두지 않고 먹어버리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잎을 다 먹고 나서는 그것이 모자라서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껍데기까지 갉아 먹었기 때문에 그 모든 가지가 하얗게 되었다고 했습니다(1:7). 그러므로 먹고 마실 것이 없어 사람들은 탄식하고 제사 드릴 제물이 없어서 제사장들은 슬퍼하며 농부들은 밭에서 나는 것이 없으므로 부끄러워하면서 통곡을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메뚜기들이 모든 들의 수목과 성내와 집을 덮치는 것은 선지자의 눈에는 장차 이스라엘을 치러 올 군대의 행군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2:11절까지는 바로 많은 메뚜기 떼의 침략을 통해서 군대의 침략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 떼가 많아 하늘을 가리고 빛을 가리기 때문에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고 합니다(2:2). 여기서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민이라도 범죄 하면 하나님은 이렇게 심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는 이러한 심판에 대한 의식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한국 교회는 심판을 받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선민의 정신을 잃은 교회 즉 세속화된 교회는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피에 참여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누구라도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겉보기에는 아무리 훌륭하고 에덴 같아 보여도 심판받아 무너지고 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그것은 이미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신앙이라고 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둘째, 이런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내리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고 하십니다.

 

  여기서 특별히 마음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제라도 울며 애통하며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으라'고 하십니다. 사람이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좋아하는 것은 세상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행하는 종교 행위는 신앙이 아닙니다. 위선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마음을 찢으라고 합니다. 세상 사랑하는 것을 아파하며 그것이 죄악이라는 것을 직시하라는 말입니다. 여기에 회개가 있고 애통이 있게 됩니다. 오늘날 신자들의 문제는 회개와 애통이 없습니다. 이것은 세상을 사랑하고 있는 자기 마음이 죄악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죄악이라는 인식이 있다면 아파하면서 마음을 찢게 될 것이요 그 죄악에서 돌이키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마음을 찢으라는 말은 하나님의 용서가 있고 받으심이 있으니 그것을 받을 준비를 하라는 말로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사람이 회개하니 하나님이 받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와 받으심이 있으니 사람이 그것을 받을 준비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받으시는 것을 자기의 언약 때문입니다. 자기의 약속이 있기 때문에 선민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받으심도 이렇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용서와 받으심이 주어졌으니 그것을 믿는 우리를 받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만약 이런 것이 없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 자체가 은혜를 입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셋째, 구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하나님께서 메뚜기 떼를 다 제거하고 땅을 회복시키는 사건입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셔서 밀과 포도주가 풍성하게 되는 사건이 바로 성령 부으심을 예시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하나님의 모든 뜻을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남겨지는 사람들입니다.


넷째, 남겨진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는 반면 온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이스라엘을 괴롭힌 죄로 인하여 온 세상은 심판을 받습니다(3장). 여기에 여호사밧 골짜기가 만국의 심판받을 장소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 여호사밧 골짜기는 성령을 받지 못한 온 세상입니다. 온 세상은 심판의 장소입니다. 문자적으로 성경을 이해한 사람들이 여호사밧 골짜기를 그대로 이해하고 있습니다만 사실은 성령 받지 못하는 온 세상이 다 여호사밧 골짜기 곧 심판의 장소입니다.

 

  요엘서는 약속의 땅을 하나님의 징조의 땅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 땅의 재앙을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보며 그 땅의 회복을 통해서 성령 안에 있는 구원을 내다봅니다. 그러므로 그 땅은 하나의 징조로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즉 죄악에 대한 심판과 언약 성취에 의한 구원의 징조로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엘은 땅을 보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있을 성령을 보도록 하고 있습니다. 성령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구원은 성령의 부음을 받는 것입니다. 성령 부음받는 것이 곧 이스라엘의 구원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사실입니다. 우리들에게도 성령 안에 있는 것이 곧 구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이스라엘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란 이스라엘의 남겨진 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령의 부으심이 있는 것이 곧 종말현상입니다. 남겨져서 성령의 부으심을 받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자는 구원에 들어가는 사람이요 그렇지 못한 사람은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성령은 죄 아래 있는 첫 창조 세상과 반대의 세상입니다. 죄 아래 있는 이 세상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피와 불과 연기로 가득하며 또 해와 달도 어두워지고 피같이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저주하시며 거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 안에 있는 자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구원을 누리게 됩니다.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은 첫 창조에서 빠져 나와 성령 안에 들어온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요 신약의 교회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도 이것을 바라보도록 하기 위하여 요엘은 외쳤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