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의미(意味)
디모데후서 4장 1-8절 /이동원 목사
“1.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 앞과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곧 친히 나타나실 때에 자신의 왕국에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분 앞에서 네게 명하노니 2. 말씀을 선포하라. 때에 맞든지 맞지 아니하든지 긴급히 하라. 모든 오래 참음과 교리로 책망하고 꾸짖고 권면하라. 3. 때가 이르리니 그들이 건전한 교리를 견디지 못하며 귀가 가려워 자기 욕심대로 자기를 위해 선생들을 쌓아 두고 4. 또 진리로부터 귀를 돌이켜 꾸며 낸 이야기들로 돌아서리라. 5.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서 깨어 있고 고난을 견디며 복음 전도자의 일을 행하고 네 사역을 온전히 입증하라. 6. 이제 내가 내 자신을 헌물로 드릴 준비가 되었고 나의 떠날 때가 가까이 이르렀도다. 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은즉 8. 이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관(冠)이 예비 되어 있나니 [주] 곧 의로우신 심판자께서 그 날에 그것을 내게 주실 것이요, 내게만 아니라 그분의 나타나심을 사랑하는 모든 자들에게도 주시리라.”(KJV)
미국의 부자 가운데 윌리암할스트 라는 이름을 가진 부호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의 나이가 자기 나이 60세가 되었을 때 자기 자녀들 친척 친구들을 불러놓고 앞으로 내 앞에서는 농담이라도 절대로 죽음이라는 단어는 입 밖에도 꺼내지도 말아라! 이렇게 엄명을 내렸다고 합니다. 어쩌면 이 사람의 마음속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을지 모르지요.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 윌리암 할스트라는 부자는 죽을 때 무지무지하게 고생을 하면서 고통 속에 몸부림하다가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로마 역사를 읽으면 로마의 한 황제는 신하들이 아침마다 자기를 알현할 때 마다 “폐하 이시여 죽음을 기억하시오.” 이렇게 인사를 하도록 자기가 시켰다고 합니다. 이 로마의 황제는 아주 편안한 죽음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만 승리를 그리고 안식과 평안을 줄 수 있다는 하나의 레슨이요, 교훈일 것입니다. 아무도 이 세상에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 죽음에서 예외인 인생은 없습니다. 더 빨리, 좀 늦게 차이만 존재할 따름입니다. 결국 우리는 모두 한번은 세상을 반드시 떠나야 합니다.
저는 죽음에 대한 가장 중요한 준비는 무엇보다 죽음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함께 읽었던 이 본문 말씀은 바울 사도가 이 세상을 떠나기 바로 직전 AD 67년경에 로마의 감옥에서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면서 기록한 서신입니다. 오늘 말씀 6절에 보시면 ➤“6 이제 내가 내 자신을 헌물로 드릴 준비가 되었고 나의 떠날 때가 가까이 이르렀도다.”라는 말로 시작 했습니다.
우리가 구약시대의 제사 규례들을 좀 연구해 보면 여러 가지 제사가 있지요. 번제 이런 제물을 드릴 때 일반적으로 보통 제물을 준비하고 양이나 염소를 이렇게 각을 뜹니다. 그 다음에 깨끗이 씻고 여러 가지 그 의례 가운데 마지막 절차가 뭐냐 하면 포도주를 붓는 것이에요. 다 쏟아 붓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관제, 전제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다 부어버리는 것입니다.
마지막 순서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제 자기의 마지막 숨결을 하나님 앞에 드릴 때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지금 예감하면서 지금 이 편지를 씁니다. 그러면서 죽음을 바라봅니다. 바울이 바라보고 있었던 죽음은 어떤 것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의 죽음의 의미를 좀 정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죽음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첫째, 죽음은 떠남입니다.
오늘 6절에 보시면 “6. 이제 내가 내 자신을 헌물로 드릴 준비가 되었고 나의 떠날 때가 가까이 이르렀도다."
이렇게 바울 사도가 고백합니다. 나의 떠날 때가 가까이 왔다. 그렇습니다. 죽음이란 떠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혹은 우리의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되어 육체를 떠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연구해 보시면 성경에서 죽음을 의미하는 이 떠남이라는 단어는 결코 어떤 의미에서도 허무나 종말을 뜻하지 않습니다. 소멸을 뜻하지도 않습니다. 성경의 죽음은 결코 비극적 종말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이 구절에 사용된 떠남이라는 단어, 나의 떠날 것이 가까이 왔다, 이 떠남이라는 단어가 영어에서는 그냥 “de-par-tur” departur, 출발, 이런 단어로 쓰여져 있습니다마는 헬라어에는 “아날루시스=Ανάλυση” 라는 단어가 쓰여 집니다. 그런데 본래 이 헬라어는 두가지 용도로 쓰여 졌던 단어라고 합니다. 한 가지 경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여행할 때 천막을 가지고 다녔어요. 그래서 한 장소에 도착하면 장막을 칩니다.
그러다가 다시 일정한 기간이 지난 다음에 다시 목적지를 향해서 출발하게 되면 천막을 매고 있었던 줄을 풀 때, 푼다는 것이 바로 이 떠난다는 단어의 어원입니다. 또 하나, 이 떠난다는 단어가 사용된 다른 용례는 이런 것입니다. 배가 항구에 매여 있다가 이제 출발을 하게 되면은 닻줄을 풀어요. 닻을 올리고 닻줄을 풀 때 바로 이 떠난다는, 배가 떠날 때 이 단어가 쓰여 집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이 출발이라는 떠난다는 이 단어는 그 의미가 종말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여행을 의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죽음은 새로운 여행의 출발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죽음은 결코 소멸의 뜻으로 사용된 일이 없습니다. 기독교 주변 그 교파 가운데 흔히 이단이라고 불리는 여호와의 증인이나 혹은 안식교 가운데서는 죽음을 소멸(消滅)로, 없어지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죽음은 결코 소멸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그것은 새로운 출발입니다. 여기에 성도의 소망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어렸을 때 그 피크닉을 갈 때 소풍을 갈 때는 어떤 그 소풍에 대한 피크닉에 대한 흥분 같은 것이 우리 마음속에 가득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성인이 된 어른이 된 지금도 어떤 낯선 미지의 장소를 향해서 여행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는 가벼운 흥분이 우리를 들뜨게 만듭니다. 저는 이것이 정상적 그리스도인이 성경을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이 죽음을 기다리는 죽음의 경험일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명한 독일 고백교회의 신학자요 지도자였던 “본헤퍼”가 반 나치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갇히죠? 그리고 이제 마지막 교수형을 받기 위한, 간수가 “나갑시다!”라는 신호를 주었을 때 직감적으로 그것이 자기의 마지막인 것을 알았을 때 본헤퍼는 감옥에 같이 있었던 동료 수인들에게 이런 인상 깊은 인사를 남겼습니다. “친구 여러분, 이제 저의 새로운 여행이 시작됩니다. 이것은 결코 저의 마지막이 아닙니다. 저는 새로운 여행을 위해서 출발합니다.” 이것은 얼마나 당당한 죽음 앞에서의 고백 이였는지요. 성경이 가르치는 죽음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죽음은 떠남인 것입니다.
둘째로 죽음은 만남입니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죽음을 경험하는 과정에서의 어떤 고통, 그 고통에 대한 두려움 때문 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우리가 살아왔던 이 세상에 대한 어떤 집착이나 미련 때문에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죽음을 두려워하는 보다 깊숙한 우리 안에 존재하는 이유는 아마도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단절 때문일 것입니다. 내가 더 이상 저들을 볼 수 없다, 만날 수 없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부터 떠나야 합니다.
죽음은 이 세상에서 떠나가는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혼이 육체에서 떠나가는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부터 떠나야 하는 사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미국의 대 테러, 이 참사사건 때도 보면 우리의 가슴을 저미게 하는 가장 안타까운 사연들은 그들의 최후를 절감한 마지막 순간에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남겼던 전화의 메세지였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셀루러폰, 핸드폰을 가지고 그들은 최후를 절감하며 전화한 사람들의 많은 사연들이 지금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 공통점이 하나 있어요. 그들은 애인이든 혹은 어머니든 또 사랑하는 자기의 남편이든 아내든 그들에게 마지막 사랑의 고백을 하고 싶어 했다는 것입니다. “여보 사랑해요 정말 사랑해요 연기가 차오르고 있어요. 그러나 사랑했어요.”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마지막 사랑의 인사를 남기고 싶어 했습니다.
저는 그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에 하와이 코나의 열방대학에 목회자 부부 세미나를 위해서 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같이 있었던 목사님 가운데 뉴욕에서 오신 목사님이 있는데 이제 계속 전화로 접촉을 시도한 끝에 이런 소식을 알려왔어요. 자기 교회 교인 한 사람이 월드 트레이드 센터에 있다가 자기의 죽음을 예견한 그 순간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집에 전화를 걸었더니 아무도 안 받아요. 교회로 전화했어요. 그래서 교회 부목사님이 받았답니다.
“목사님 죽을 것 같아요. 우리 식구들에게 전해 주세요. 제가 정말 사랑했다고, 그리고 교우들에게 전해주세요. 정말 사랑하고 감사해요. 그러나 저는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떠난다고 꼭 전해주세요.” 그리고 전화는 끊겼다고 합니다. 이런 가슴 아프나 감동적인 사연들이 지금도 우리를 울리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슬픔이지만 그러나 이것은 결코 마지막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다시 만남의 약속이 확인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울 사도의 확신이요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의 확신입니다.
➤빌립보서 1장 22-24절에 “22. 그러나 내가 육체 안에 산다면 이것이 내 수고의 열매이니라. 그럼에도 내가 무엇을 택할지 알지 못하노니 23.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바라며 내가 둘 사이에 끼어 있느니라. 그것이 훨씬 더 좋으나 24.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체 안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해 더 필요하니라.” “내가 둘 사이에 끼어 있느니라.” 둘 사이에 끼였다는 것은 삶과 죽음사이에 끼였다는 것입니다.
다시 보세요. “23.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바라며 내가 둘 사이에 끼어 있느니라. 그것이 훨씬 더 좋으나” 그렇습니다. 떠나는 것은 마지막이 아닙니다. 그것은 새로운 만남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떠남은 이와 같은 만남을 전제로 한 것이요 따라서 떠남은 곧 만남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주님과 더불어 만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하고 동행하고 사는 사람들은 날마다 그리스도의 임제를 경험합니다. 나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분적인 경험이에요. 지금 이 땅에서 우리는 주님의 임제를 부분적으로만 경험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마치 그것은 거울을 통해서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죽음을 통해 주님 앞에 서는 날 거울을 통해 봄이 아니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온전하신 주님의 임재 속에 들어가는 것, 그것이 바로 성도의 죽음의 경험이라고 성경은 가르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찬양하던, 사모했던 그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 안에서 살아왔던 모든 이들을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결코 Good bye~ 라는 인사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미국에 어떤 아버지가 자기 자녀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네 자녀가 있었는데 세 자녀에게는 꼭 같은 인사를 주었다고 그래요. “다시 만나자! 천국에서, see you again in Heaven” 다시 천국에서 만나자! 그런데 한 아들에게 만은 “쟈니 굿 바이, 굿바이”. “아버지 저에게는 다시 만나자고 왜 그러지 않아요?”
“쟈니야! 너는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잖니? 우리에게는 다시 만남의 소망이 없지 않니? 쟈니야! 이 아버지가 너에게 다시 만나자고 얘기할 수 있도록 해 줄 수는 없겠니?” 그때 비로소 아버지 앞에 터지고 울면서 이 아들은 “아버지 저도 아버지가 믿었던 예수 그리스도를 저의 구세주로 믿어요.” 힘없는 손이지만 아빠는 전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아들의 손과 몸을 끌어안으면서 “그래 아들아,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 그래서 죽음은 만남인 것입니다.
셋째, 죽음은 상급입니다.
오늘 본문을 그렇게 가르칩니다. 죽음은 상급입니다. 여러분 죽음의 순간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 우리는 어떤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 입니다. 이제는 어쩔 수 없지 라는 어떤 감정 말입니다. 그러나 이때에 우리에게 할 일이 있다면 그와 같은 무력감을 하나님께 대한 의존(依存)감으로 바꿀 수가 있어야 하겠다는 사실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우리가 죽음을 준비할 때 가장 좋은 태도는 어린아이처럼 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죽음을 준비하는 가장 좋은 태도는 어린아이처럼 되는 것이다” 저는 이것이 매우 성경적 교훈이라고 생각해요. 너희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고 그랬는데 그 천국에 들어갈 때 가장 좋은 자세는 어린아이처럼 되는 것이다.
여러분, 우리가 아기로서 출행할 때 또 아기로서 방금 태어나 자라날 때 우리는 무력하지요. 어쩔 수 없어요. 우리는 다만 우리를 돌보는 그 부모님을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의존하면 기껍게 우리를 안아주시는 바로 그분들의 임제를 경험할 수 있는 것처럼 저는 죽음의 경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심지어 우리 예수님도 그런 태도로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습니까? “아버지! 내 영혼을 주께 부탁 하나이다.” 주님을 의존하는 태도, 하나님을 의존하는 태도입니다.
여러분 삶이란 무엇일까요? 삶이라는 것은 어떤 우리의 욕망을 위해서 끊임없이 몸부림치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우리의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쥐기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는 몸부림의 순간순간을 이 땅에서 살아갑니다. 죽음은 이 몸부림을 마지막으로 포기해야 하는 순간입니다. 우리가 이 몸부림을 주 앞에서 깨끗이 포기하고 자신의 전 존재를 창조주 앞에 마지막 내어드리는 바로 그 순간, 그 순간이 바로 죽음의 순간이지요.
헨리 나우웬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어린아이들이 몸부림을 치면 부모도 편히 안아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린 아기가 자기의 존재를 그냥 내어 놓을 때, 그냥 내어 놓을 때 아빠와 엄마는 자기의 전 존재로 사랑하는 자녀를 끌어안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우리가 정말 그 하나님을 의존하면서 살았던 마지막 내 존재를 주앞에 내어놓는 그 순간 하나님 아버지의 완벽한 임제 안에서 우리를 끌어안아주시는 경험, 바로 그것이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죽음이란 가장 위대한 선물이라고 그는 고백합니다. 저는 본문 말씀을 기록하던 바울사도의 심정이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감옥에서 지금 죽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두 번 감옥에 들어가서 이번에는 마지막이다. 하는 예감을 갖고 있었어요. 그때 바울 사도에게 할 일이란 별로 없었습니다. 죽음은 기다림입니다. 물론 인간적으로 말하면 바울은 아직도 억울한 감정이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맡기고 하나님의 처분만 기다리는 심정으로 서 있습니다. 그렇다고 저는 이것이 바울 사도의 수동적인 포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차라리 그것은 희망적인 신뢰요 기다림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8절에 본문의 고백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8. 이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관(冠)이 예비 되어 있나니 [주] 곧 의로우신 심판자께서 그 날에 그것을 내게 주실 것이요, 내게만 아니라 그분의 나타나심을 사랑하는 모든 자들에게도 주시리라.” 이제 후는 나를 위하여 의로우신 심판장이. 자, 그의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으로 부르고 있습니까? “의로우신 심판장” 이렇게 부르고 있는 것을 여러분 놓치지 마세요.
당시에 바울사도는 네로 황제에 의해서 그 당시를 지배하던 로마의 황제에게서 그는 불의하게 체포되었고 로마의 법정은 그를 불의하게 단죄 하였지만, 그는 하나님을 가리켜서 의로우신 하나님 내가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은 나를 아시고 그리고 하나님은 나를 상급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이순간의 바울의 고백이 아닙니까?
이 8절에서 계속 강조되는 중요한 단어 하나가 있어요. 어떤 단어입니까? “의의 관(冠)”라는 단어. ➤“나를 위하여 의의 관(冠)이 예비 되어 있나니 [주] 곧 의로우신 심판자께서 그 날에 그것을 내게 주실 것이요,” 여기 “의”라는 단어가 강조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는 불의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이 세상에 의해서, 또 불의한 판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 순간 바울은 자기를 정당하게 판단해 주실 의로우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오히려 그를 의로움의 관(冠)으로 상 주실 것을 기대한다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죽음을 통해서 주 앞에 설 때 받을 수 있는 상급, 면류관이 성경에 여러 가지 다양한 표현으로 나와요. 그러나 여기서는 바울이 특별히 의로움의 관(冠)을 강조합니다. 세상은 불의하게 나를 단죄했지만 세상은 불공평하게 나를 대접했지만 의로우신 예수님이 의로움의 관(冠)으로 나를 상 주실 주님을 바라본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 믿음 때문에 바울은 이 불공평해 보이는 죽음 앞에 서서도 당당할 수 있었고 담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비단 바울사도의 고백뿐만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것이 우리의 고백 우리의 경험이 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의 죽음을 바라볼 때 혹은 우리가 사랑했던 어떤 사람들의 죽음을 바라볼 때 이건 정말 불공평하다. 이렇게 죽어가다니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는 얼마나 많은 삶의 불공평함을 경험하면서 이 땅에 살고 있습니까?
바울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마지막 순간에 시선을 들어 역사를 주장하시는 아직도 의로우신 하나님, 그리고 마지막 의롭게 온 역사를 판단하실 의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의의 재판장이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나에게 의로움의 면류관을 주실 것이다. 내게만 아니라 나와 동일한 믿음을 가지고 주를 사모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의로 상주실 주님을 바라보라고 고백하고 있는 이 당당한 바울 사도의 고백,
그래서 바울에게 있어서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 죽음은 승리였으며 죽음은 안식이 있으며 그리고 그 죽음은 상급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고백이 여러분과 저의 고백일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상급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 우리를 찾아올, 다가올 죽음이 우리의 당당한 승리로 처리되기 위해서는 남아있는 인생을 어떻게 살까요?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7절에서 대답을 찾아보겠습니다. ➤“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은즉” 나는 선한 싸움을 다 싸웠다, 달려갈 길을 다 마쳤다, 믿음을 지켰다. 그 다음 8절에 ➤“8 이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관(冠)이 예비 되어 있나니 [주] 곧 의로우신 심판자께서 그 날에 그것을 내게 주실 것이요, 내게만 아니라 그분의 나타나심을 사랑하는 모든 자들에게도 주시리라.” 만약 여러분과 저에게 7절이 없다면 8절은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한 싸움을 싸울 수 있었다면, 달려갈 길을 마칠 수 있었다면, 믿음을 지킬 수 있었다면 바울처럼 이제 후로는 의의 하나님 의의 면류관으로 저를 상급주실 것을 믿습니다.
마지막 이 당당한 고백
마지막 당당한 승리를 주님 앞에 누리기 위해서 여러분과 저는 다시 7절의 고백을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남아있는 인생, 선한 싸움을 싸우시겠습니까? 달려갈 길을 정말 완주하시겠습니까? 이 선한 싸움이나 달려갈 길은 모두가 경기장의 상황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한 싸움, 그래서 전쟁터 상상하시면 안돼요. 바울은 전쟁터라는 의미가 아니라 경기장이라는 의미로 지금 이 표현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경기자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완주하는 것입니다. 물론 챔피언을 따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경기자의 미덕은 끝까지 완주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완주의 경험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믿음을 지켰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믿음으로 시작해서 믿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까? 히브리서 기록자는 그의 히브리에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한 온전케 하는 이이신 누구? “예수님을” 어떻게 바라보자? 그런데 그 말은 이런 뜻이에요. 믿음의 주요, 라는 말은 믿음을 시작하게 만들어주는 사람, 믿음의 장본인, 믿음의 저작자, 믿음의 출발자, 그리고 믿음을 완성시켜 주실 분. 우리는 주님 때문에 믿음이 시작되었습니다.
놀라운 믿음.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믿는 믿음. 이 믿음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가치를 발견했고 새로운 삶의 의미를 발견했고 죽음 건너편에 영원한 소망을 발견할 수가 있었습니다. 주께서 이 믿음을 주셨습니다. 믿음으로 시작해서 마지막 믿음의 완성을 향해서 달려가는 인생의 길, 그리스도인들의 여정은 믿음의 레이스요 믿음의 여정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우리 주님이 주신 가장 소중한 자산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물질적 자산보다도 더 귀한 것입니다. 어떤 재산이 우리에게 영생을 줄 수가 있단 말입니까? 믿음은 자산 보다도 귀한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 자신의 목숨보다도 더 귀한 것입니다. 어떻게 이 레이스를 완주하고 하나님 앞에 서서 상급을 기대 할 수가 있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시면 2가지입니다.
첫째는 이 믿음을 잘 지켜야 합니다. 믿음을 잘 지켜야 합니다. 바울은 믿음을 지켰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이 “지켰다”라는 표현은 본래 아주 보물을 관리할 때 쓰여 지던 단어라고 그래요. 믿음은 보물보다도 더 귀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을 잘 관리해야지요. 여러분, 가정에 보물 다이야몬드가 있다고 하십시다. 여러분은 정성을 다해서 관리할거에요 보험도 들고, 뭐 굉장히 관리를 하겠지요.
믿음은 이 모든 보물보다도 더 존귀한 것, 그렇다면 믿음을 잘 지키셔야 돼요. 저는 여러분이 믿음 지키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여정에는 종종 우리의 믿음을 흔들어 놓는 어떤 유혹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특별히 복음적이 아닌 다른 교리, 이단을 경계해야 한다. 라고 바울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말씀합니다.
➤디모데후서 4장 3-4절 한번 같이 읽겠습니다. “3. 때가 이르리니 그들이 건전한 교리를 견디지 못하며 귀가 가려워 자기 욕심대로 자기를 위해 선생들을 쌓아 두고 4. 또 진리로부터 귀를 돌이켜 꾸며 낸 이야기들로 돌아서리라.” 우리 인간에게는 호기심이 있어요.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어느 날 무슨 신가한 소리 없나? 그러다가 이단에 빠질 때 우리는 이 존귀한 믿음을 상실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을 지키라고 말합니다. 믿음을 잘 지키라고. 그러나 지키는 수세에서 끝나면 안돼요. 이 믿음의 전하는 삶을 살라고. 이 보배로운 믿음 이 믿음으로 새로운 삶을 얻었고 이 믿음으로 영생을 얻었고 이 믿음으로 오늘을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진정한 삶의 의미를 알았다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이 믿음을 나누는 것이 합당하지 않습니까?
더구나 나는 이 믿음으로 영생을 얻었고 이 믿음으로 이 존귀한 인생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어떻게 이 믿음을 나만 간직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 믿음을 나누세요. 그것이 전도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다음절 5절에 보시면 ➤“5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서 깨어 있고 고난을 견디며 복음 전도자의 일을 행하고 네 사역을 온전히 입증하라.”
상을 얻도록 달려라.
자, 우리가 신앙생활을 경주에 비교했는데,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24절에서 꼭 같이 신앙생활을 경주로 표현합니다. “24 경주할 때에 달리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한 사람이 상을 받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리라.”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리라. 그런데 바로 그 직전 21-22절에 보면 상 얻는 방법을 말해요.
➤“21. 율법 없는 자들에게 (내가 [하나님]께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그리스도께 율법 아래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된 것은 어찌하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라.”
내가 이 존귀한 믿음을 이웃들에게 나누어주어 그들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때 그들은 나의 면류관이 될 것입니다. 바울은 이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의 믿음을 지켰고 이 영광스런 복음에 믿음을 전하는 일에 그의 생애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죽음이 다가옵니다. 그러나 그는 당당하게 이제 이렇게 고백할 수가 있었습니다. 죽음은 떠남이요, 동시에 죽음은 만남입니다.
➤“8 이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관(冠)이 예비 되어 있나니 [주] 곧 의로우신 심판자께서 그 날에 그것을 내게 주실 것이요, 내게만 아니라 그분의 나타나심을 사랑하는 모든 자들에게도 주시리라.” 저는 이 고백이 여러분과 저의 고백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난 금요일에 우리 서선옥 집사님의 영결예배가 천국환송예배가 있었습니다. 제가 마지막 발인예배에, 세브란스 병원에 갔다가 깜짝 놀랐어요. 너무 많이 오셨어요. 왜 이렇게 우리 교인들이 많이 왔나? 조금 생각해 보니까 그 분이 뿌린 씨앗이였습니다. 우리 서 집사님 전도폭발 훈련 받고 열심히 전도하던 분이지요. 뿐만 아니라 그분은 참 이런 상을 당한 어려운 가정을 위로하기 위해서 경조 섬김대로 상(喪)을 당한 사람들의 집에 늘 그 분은 거기에 있었습니다.
이제 그 분이 떠나가시는 날, 그 분의 사랑과 그 분의 복음을 받았던 사람들이 와서 그 분을 전송하는 것은 정말 아름다운 사건입니다. 좀 빨리 가셨지만, 저는 그날 아침에 나오면서 정말 서 집사님의 출발은 아름다운 떠남이다. 이렇게 고백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월은 많이 남지 않았습니다. 남은 세월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이번 주께서 여러분에게 선물로 주신 보배로운 믿음을 이웃들과 가족들과 나눌 수 있다면, 그리고 다가오는 우리 이웃사랑 축제에 우리가 이웃들에게 이 복음을 나누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자랑스러운 죽음에 대한 준비가 될 수가 있을까요? 남아 있는 그 걸음 속에 죽음을 준비하는 영광스럽고 당당한 인생일 수 있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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