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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제사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

에반젤(복음) 2024. 2. 5. 12:22

제사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

 

1. 제사의 기원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아주 일찍부터,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인간과 제사는 뗄래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데, 이 종교와 제사의식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존재의 한계에서 오는 불안과 공포로부터 해방되기를 원했으며, 또한 어떤 절대자에게 의지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을 보면 인간이 종교와 제사의식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타락한 인간을 찾아오셔서 그 죄를 일시적으로 용서받는 방편으로 제사의식을 가르쳐 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창3:9, 3:21).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제사의 기원을 인간 편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찾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면 이 제사는 우리가 행해도 괜찮다는 말인가? 그것은 아닙니다. 기독교에서도 이 제사라는 형식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 구약시대에만 있었던 것이요, 또 그 당시에도 오늘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러한 제사와는 그 내용과 형식이 완전히 다른 것이었습니다.

인류 최초의 제사는 창세기의 가인와 아벨에게 있었습니다. 제사의 원칙은 그 대상이 하나님에게요, 하나님의 방법으로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첫 제사 때부터 가인은 잘못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 후 바벨의 심판으로 인해 인류에게 언어와 사상의 혼란을 가져와 제사에 대한 개념도 매우 혼잡해졌습니다. 그래서 천연숭배, 성물숭배, 정령숭배, 조상숭배와 같은 인간 중심의 제사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중국의 요, 순 시대에는 하늘에 제사하는 일이 있었고, 또한 효의 윤리와 도덕에서 나온 조상숭배에 따른 제사 제도가 周(주)나라에 이르러 완성되었습니다.

한국에서도 하늘에 제사하는 고구려 東盟(동맹)이 있었고, 백제에서는 시조신인 東明廟(동명묘)에서 하늘에 제사지냈습니다. 고려 시대의 가정에서는 관직의 품계에 따라 大夫(대부)이상은 증조까지, 6품이상은 조부까지, 7품이하와 평민은 부모만을 제사지내게 했습니다. 그 이후 조선에서는 신분에 관계없이 고조까지 4대를 제사하게 했던 것입니다.

지금 한국 내에서는 조상 제사 문제는 큰 이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추석을 비롯한 명절이 되면 민족의 대이동이 시작되면서 귀향길에 오르게 됩니다. 이는 자기의 혈육과 친지를 확인하고 조상에게 숭배하려는 의식이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명절이 되면 "차례"라는 조상 제사를 지내게 됩니다. 이런 조상 제례에 대해 일부 현세대는 우상숭배, 즉 조상숭배 라기 보다 조상을 기억하고 효성을 표시하는 민간 의식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급기야 천주교에서는 우리 민족의 문화와 관습을 이해한다는 측면에서 로마 교황청이 1939년 12월 8일부로 제사를 공식 인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개신 교회는 지난 1백여 년간 "조상 제사는 우상 숭배"임을 굳게 믿고 완강히 거절해 왔습니다. 선교 초기에는 조상제례 문제로 1만여 명이 비난과 조롱 속에 손가락질을 받으며 순교의 길을 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현재 성도들은 어떠한 상황을 보이고 있습니까? '조상제사 절대 불가' 입장을 고수하고 거부하면 "불효"요 실행하면 "우상숭배"라는 갈등을 갖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가족 전체가 교인들이라면 문제없지만, 불신자가 포함된 집안에서는 기독교 자체를 맹목적으로 "조상을 모르는 놈들"이라고 매도해 버리기 일수입니다. 그래서 어떤 성도는 제사 문제로 집안 식구들과 완전히 갈라서 버리기도 하고, 어떤 성도는 나름대로 미풍양속으로 알고 죄의식 없이 참여하기도 합니다. 이는 교인들이 그저 제사반대 속에서 문제가 생길 때마다 죄의식 속에 치르든지, 교묘히 핑계로 넘기든지 각양각색으로 고민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과제요 넘어야 할 산은 바로 이런 갈등과 충돌을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일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어떤 신학자는 "그리스도인들의 제사는 조상을 숭배하거나 혼령과의 만남보다 하나님의 은총을 신뢰하는 행위"라면서 긍정적으로 말을 합니다. 또 어떤 목회자는 "제사는 산 자와 죽은자의 복음적 만남으로써 과거와 현재가 하나로 이어지는 만남의 의식으로 수용, 승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제사에 대한 배척보다는 오히려 선교와 신앙 교육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한편 조상제사를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제사의식 자체가 한국적인 것이 아닌데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유교, 불교적인 것은 한국적이고 기독교적인 것은 한국적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 우스운 일" 이라고 하면서 그리스도의 사상을 올바르게 실천해 제사를 드리지 않는 것으로 인하여 욕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조상제사가 "유교에서 왔든 무속신앙에서 전해졌든 간에 이교적인 요소라면 모두가 교회의 의례에서 피하는 것이 좋다"라는 생각으로 타협은 있을 수 없으며 박해가 있더라도 결국 승리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제사문제에 임해야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단순히 효의 표현이 아니라 하나의 종교적 행위임이 분명합니다. 부모님을 귀신으로 섬겨서는 안됩니다. 제사는 우상숭배로써 결코 그리스도인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죽은 허상 앞에서 음식을 차리고 절을 하는 행위는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죽은 자에게서 효를 논할 수 없는 것으로 기독교 윤리에 제사는 있을 수 없으며 기복 사상에서 전수된 유교의 도덕에 불과한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제사문제는 조선 예수교 장로회가 성립된 시기에 공의회 결정으로 "엄숙한 장례식만 하고 조상숭배의 제사는 지내지 말 것"을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아주 없애는 것이 아닌 "추도식"이라는 형식을 권장해 1915년 모범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계의 제사 논쟁은 1981년, 82, 84년으로 계속 이어지고 찬반 논쟁으로 팽팽한 대립을 보이고 있습니다. 따라서 제사 문제는 한국 교회의 전통규정과 함께 앞으로도 계속 논란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국 기독교에서는 기독교 문화의 뿌리를 민족의 정서 속에 깊이 박으려면 복음적인 조명에 의한 '한국적인 의례 신학'이 정립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들은 고전 10:20-21절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예치 못하리라"의 말씀대로 이방 제사의 배후에는 귀신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사단과 귀신을 대적하는 자세를 굳게 견지해야 합니다. 우상숭배적인 요소는 제거하되 친족과의 관계는 불필요하게 악화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각자 주어진 상황에 대해 잘못되지 않게 하시는 지혜와 화평의 그리스도의 영을 좇아야 합니다. 그래서 악령에 대한 자세와 사람을 대하는 자세를 구별해서 취할 줄 알아야 합니다.

 

2. 한민족의 제사의 변천

2.1. 천신숭배 제사

본래 한민족은 유일신인 천신(하늘 신)을 숭배해 왔습니다. 고조선의 개국설화도 천신숭배 사상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단군신화의 '환인'은 '하늘님'이며 또한 '하나님'이다.). 고조선의 종교와 사회를 연구한 윤내현 교수는 그의 논문 『고조선의 종교와 그 사상』(1993, 『동양학』제 23집, 단국대학교)에서 고조선 사회는 유일신 '하나님'을 숭배하고 제사하던 사회였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조선의 천신숭배 사상은 이어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 등의 제사의식으로 발전하였으며 오래 동안 한반도에서 지속되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천신숭배 사상은 한반도 뿐 아니라 지구상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발견되는 기본적인 제사의식인데 이것은 우리 인류의 보편적인 종교성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하나님 숭배 사상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 천신숭배 사상은 오늘날에도 한국인들의 사고방식과 말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데, 일 예로 "하늘이 노했다" 라는 말이나, "아이구, 하나님(하느님)!", 또는 "하늘도 무심하시지!", "하나님 맙소사!" 따위의 말은 모두 천신숭배 사상에서 나온 말이며, 또한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는 생각도 다 천신숭배 사상에서 나온 것입니다.

 

2.2. 지신숭배 제사

  천신숭배 사상이 오랜 세월 한민족의 기본적 종교형태로 내려오다가, 삼국시대 쯤부터 지신(땅신)도 섬기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 지신숭배 사상은 만주 지방의 샤마니즘의 영향인듯한데, 만주 지방에서 유래된 샤마니즘은 땅의 신과 그 형상으로 돼지를 섬기던 종교의식이었습니다. 이 지신숭배 사상에서 나온 풍습 가운데 하나가 이른바 '지신밟기'와 '고시래'입니다.

 

2.3. 마을신숭배 제사

  천신숭배에서 지신숭배로 변천해온 제사의식은 더 나아가 마을신숭배 사상과 그 제사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숭배하는 신의 모습이 점점 작아진다고나 할까. 아무튼 천신숭배 사상과 그 제사로 시작된 한민족의 제사의식은 이제 천신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기껏 마을신 정도를 섬기는 데로까지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이 마을신 숭배 사상에서 나온 것이 바로 '서낭당(성황당)'인 것입니다. 그리고 '고사'라고 하는 것은 주로 가족신을 섬기는 제사인데, 이것도 일종의 마을신숭배 사상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본은 아직까지도 이 마을신숭배 사상이 심하게 남아 있어서 각 마을마다 섬기는 신이 따로 있고, 또 한 마을에서 어느 사람이 마을을 위해 죽었다면, 그 사람이 바로 그 마을의 수호신이 된다고 믿고 섬기고 있습니다.

 

2.4. 조상신 숭배 제사

  천신숭배에서 지신숭배로 그리고 마을신숭배로까지 그 모습을 바뀌어온 한민족의 제사의식이 드디어 고려시대 때부터는 조상신을 섬기는 데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조선 중기 '주자가례'에 근거하여 신분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4대조까지 섬기도록 하기 전까지는 신분에 따라 섬길 수 있는 대수가 정해져 있었고, 전반적으로는 조상신에 대한 제사가 제한적이었습니다.

  이런 조상신숭배 사상은 유학의 영향이 분명한데, 이 유학은 중국이 극도의 혼란에 빠졌을 때에 그 혼란을 조금이나마 막아보려고 선조의 관습을 본받자고 역설한 공자의 가르침입니다.

  본래 유학은 하나의 종교라기보다는 실천도덕의 체계였습니다. 무정부상태와 공포의 중국 땅을 바로잡아 보려고 노력한 공자는 당대의 사람들에게 그 전시대의 조상들처럼 바르게살기를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는 말하기를 자신은 구세주나 메시야의 역할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당시의 사람들로 하여금 조상들과 다시 만나게만 해주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유학이 한반도에서는 종교적인 색채를 많이 띠게 되었으며 나아가 샤마니즘과 연결되어 조상신 숭배라는 하나의 종교형태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발맞추어 제사의 형식도 아주 틀을 갖추게 되었는데, 이 제사 형태는 지방마다 가문마다 나름대로 독특한 모습을 띠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조상에 대한 제사는 결코 오랜 역사를 가진 우리 한민족 고유의 미풍양속도 아니며, 또한 그 모습이 통일된 것도 아닌 것입니다.

 

3. 성경이 말하는 제사

  구약성경은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방편으로 그리고 또 우리 인간이 지은 죄를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는 방편으로 제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제사의 종교라고도 말을 합니다. 그만큼 기독교에 있어 제사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제사 제도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끝이 나고 이제 신약시대에는 예배가 가장 중요한 의식이 되었던 것입니다.

  구약성경이 말하는 기독교의 제사는 이방종교의 제사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으니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이방종교의 제사의식은 인간이 나름대로 인식한 그들의 신을 인간 편에서 찾아가는 행위인 반면, 기독교의 제사는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에게 먼저 찾아오셔서 그 죄를 용서해주시는 방편으로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둘째, 이방종교의 제사는 신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여 신의 저주를 피해보려는 생각이 우선인 반면 기독교의 제사는 인간이 지은 죄에 대해 마땅히 죽어야 할 인간 대신 동물을 희생제물로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생각이 우선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이 마음대로 정한 의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의식인 것입니다.

셋째, 이방종교의 제사는 무조건적인 복을 얻으려는 생각이 큰데 반해 기독교의 제사는 복을 받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무관한 것입니다. 기독교의 제사는 오로지 사죄와 그에 대한 감사가 전부입니다.

 

4. 조상공경과 제사

오늘날 한국인들은 조상을 공경하는 것은 마땅히 제사의식으로써 하는 것 인양 생각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만 잘하면 조상공경은 끝난 것처럼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모님께 드릴만한 물건을 '고르반'(하나님께 드리기로 했다고 말하는 것)이라 하여 결국은 효도를 다하지 않은 것과도 같은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물론 개중에는 정말로 효도하는 마음으로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바른 조상공경의 자세가 어떤 것인지를 잘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도 마치 기독교인이 되고 나면 이제 더 이상 조상공경 같은 것과는 담을 쌓은 것처럼 생각하는 일이 있는데, 이것 또한 잘못된 생각입니다.

기독교는 그 어느 종교보다도 더 조상을 잘 기억하고 공경하는 종교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 까마득한 옛날 우리의 조상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을 오늘도 기억하고 기다리는 종교가 바로 기독교인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살펴보면 구구절절이 조상을 기억하고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조상공경은 기독교의 핵심적인 사상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그 관습 때문에 이 조상공경의 사상과 제사의식을 잘 분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마치 이 둘이 한가지나 되는 것처럼 오해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제사의식을 통하지 않고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조상을 공경할 수 있으며, 조상의 덕을 기릴 수 있는 것입니다.

조선 중기 이전의 우리 사회를 생각해 보게 된면, 그때는 그러면 조상을 공경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단 말입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때도 그 나름대로의 의식이 있었을 것이며, 사람들은 조상공경의 도를 다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반도 외의 다른 땅과 다른 민족을 생각해 보게 되면, 그들은 그러면 전혀 조상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란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의 조상공경 의식이 있을 것이며, 그를 통해 자손의 도리를 다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행하는 제사의식이란 단지 조상공경의 여러 의식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죠. 조상공경의 의식은 시대에 따라 사상적 조류에 따라 그리고 지역에 따라 그 모습이 바뀌었을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5. 제사가 끼치는 영적인 나쁜 영향

  많은 사람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행하는 제사는 우상숭배가 아니라 우리 민족의 고유한 미풍양속이라고 말들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를 들라고하면,

 

첫째, 이미 앞에서도 밝혔듯이 이 조상신숭배의 제사의식은 본래 우리 민족 고유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 고유의 제사의식은 유일신 하나님을 숭배하는 제사의식이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후대에 조선 중기에 와서야 오늘날과 같은 조상신숭배의 제사의식이 유학과 샤마니즘의 영향으로 민간에 유행하게 되었으므로 사실 이 조상신숭배의 제사의식은 그 역사가 그리 길지 못한 것입니다..

둘째, 미풍양속이라 하면 그로 인해 우리에게 어떤 좋은 영향이 있어야 하겠는데, 사실 이 제사제도로 말미암아 우리 민족은 역사적으로 어떤 좋은 영향을 받아왔습니까? 물론 이것은 쉽게 말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하건데, 이 제사제도는 우리 민족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더 많이 끼친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이 제사제도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하는 일이 많이 있는 것이 우리의 실정인 것입니다.

  우리 한국인들은 대체로 이 제사의식을 행하는 데 있어, 하나의 미풍양속을 행한다고 생각하기보다는 그저 내려오는 전통을 무비판적으로 받아 행할 뿐이며, 또한 남의 이목을 두려워하거나 귀신의 저주를 면해보려는 생각에서 이 의식을 행할 뿐인 것입니다.

 

이러한 조상신숭배의 제사의식은 우리에게 영적으로 다음과 같은 나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첫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십계명 가운데 제 2계명을 어기게 하고 있습니다.

  제사에는 본래 신주(神主)라는 것이 있는데, 이 신주는 분명히 우상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앞에 절을 하는 것이며, 또한 그때 우리의 마음은 복을 빌거나 저주를 면해보려는 마음이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분명히 우상숭배의 영적인 죄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출20:4-5).

  둘째, 귀신의 존재에 대해 우리로 하여금 잘못 알게 하고 있습니다. 귀신은 타락한 천사들인데, 이 제사제도는 귀신은 바로 돌아가신 우리의 조상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전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게 하거나 가볍게 여기도록 만들며, 또한 우리로 하여금 쉽게 귀신들과 접촉하도록 만드는 나쁜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귀신과 접촉하는 일을 절대 금하고 있습니다(신18:11-12, 고전10:20).

 

셋째,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눈을 가리우는 나쁜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인간이 죽고 나면 분명히 하나님의 심판이 있게 되며(히9:27), 그 심판 후에는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져 들어가게 되고 이 세상과는 완전히 단절된다고 가르치는데(삼하12:23), 이 제사제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 말씀을 믿지 못하게 됩니다. 조상숭배 사상의 제사의식에 따르면 사람이 죽고 나서도 그 귀신은 계속적으로 산 사람과 비슷하게 생활하며 산 사람과 교제할 수도 있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심판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 나쁜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6. 그리스도인이 취해야 할 부모공경의 태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공경하라 엡 6:1절

  그리스도인들은 부모공경의 문제에 있어 지켜야 할 원칙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하면은 부모를 공경하고 조상을 공경하되 아무 것도 모르고 무턱대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깨닫고 그 진리 안에서 바른 생각과 자세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조상의 문제에 있어서는 대체로 생각이 짧습니다. 그래서 조상이라 그러면 기껏해야 4,5대조 정도만 생각할 뿐입니다. 이것은 자가당착(自家撞着)과도 같은 생각인데, 그토록 조상을 공경하자면서도 그러면서도 정작 공경하는 태도를 보면, 어떻게 하면 편하게, 쉽게 그리고 적은 대수의 조상만을 섬기느냐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수를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자신도 모르는 미궁에 빠져버리고 맙니다. 보기를 들자면, 한국의 박씨 성을 가진 사람들은 박혁거세가 그 조상이라고 믿고 섬기고 있는데, 그 박혁거세가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으면 대답하기 곤란해집니다. 기껏해야 알에서 태어났다고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오늘의 박씨 성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알에서 태어난(?) 사람의 자손이라고 믿는 셈이 되는데, 이것이야말로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그렇게도 쉬운 일이겠습니까? 박씨 성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 그 어느 누구도 이 사실에 대해 시비를 거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고 시비를 걸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는 조상을 공경하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조상을 공경하려면 제대로 알고 공경해야지 아무것도 모르고 무턱대고 공경해서야 되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알에서 난 사람을 조상이라고 공경하고, 또 어떤 사람은 원숭이를 조상이라고 공경(?)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찌보면 조상을 욕되게 하는 태도일지도 모릅니다. 멀쩡한 조상을 알에서 난 이상한 존재로 만들어 버리거나, 또는 원숭이로 만들어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실을 그 조상들이 안다면 얼마나 기분이 나쁘겠습니까.

어디까지나 우리는 조상을 공경하되 그 조상조차도 주관하고 계시는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먼저 알고 공경할 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분만이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고 계시며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한국의 예속은 그 뿌리와 변천과정이 매우 복잡합니다. 주술적인 무속신앙과 풍수설과 불교사상과 유교사상 등이 혼합되었습니다. 고조선의 원시종교였던 무교에는 제사 풍습이 없었습니다. 무속에는 천신을 숭배하는 제천의 풍속이 있었을 뿐입니다. 유교는 원래부터 내세도 구원도 영생도 없으며 본질적으로 현실중심적입니다. 공자는 살아계신 부모에 대한 극진한 효도에 대해서는 지나칠 만큼 세심하게 가르쳤지만 돌아가신 부모에 대하여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제사 지내는 풍속은 유교의 부모에 대한 도리와 무속적인 천신 제사와 기존해 있던 불교가 합쳐져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겠습니다. 성경에는 제사 지내는 대상이 '귀신에게' 라고 나와있습니다.(고전 10:20) 중용에는 귀신의 덕은 위대한 것으로 말을 합니다.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나 만물에 체재해서는 유외한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천하 사람으로 하여금 제명성복하고 제사로 받아들이면 양양하게 상공에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좌우에 있는 것 같기도 하니 시경에는 신의 내격함이 헤아릴 수 없는데 하물며 무심할 수 있으랴'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성서적 제사를 드려야만 합니다. 성경에서 보면 아벨의 제사를 시작으로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 믿음의 조상들이 모두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분명히 할 것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는 점입니다. 제사는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거룩한 만남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는 제사는 회개, 겸손, 의와 화해 그리고 거룩함이었습니다. 제사 문제의 타개책에 있어서는 타협과 공인 그리고 반대의 세 가지 입장으로 성립될 수 있다.

 

6.1.타협과 공인

  635년경 당 시대에 전래된 경교(기독교한파)는 태종에 의하여 대환영을 받았으며, 선교사의 단장인 아라본(Alopen)은 진국대법죽이라는 높은 벼슬을 얻었고 교세는 얼마 안가서 전국 358주 도처에 예배당이 설 정도로 번창하였습니다. 경교는 왕치위본주의, 황제숭배주의, 부모효양주의의 삼대원칙을 내세워 충국애국한다는 명목으로 황제에게 굴종, 아부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부모에게 효도한다는 명분의 조상제사를 종교방식으로 채택하여 기독교 교리에서 탈선하는 방향으로 왜곡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진리 자체에서 벗어날 때는 이미 생명을 잃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마침내 경교는 동양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렸습니다. 또 한국에서 로마 카톨릭은 초기 조상제사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함으로 많은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초부터 로마 카톨릭 교회는 제사제도에 대하여 호의적인 입장을 취함으로 한국사회에 쉽게 적응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로마 카톨릭이 이같은 타협을 했다고 해서 교회성장을 가져오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도 개인적인 신앙에 있어서 제사 지내는 자리에 타협하기 위하여 절을 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시 16:4) 마음이 후련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고통 당하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제사와 예배를 혼합시켜서 하는 것도 바른 방법이 아닙니다. 또한 제사 음식을 만들 때 함께 도와주는 것까지도 합당한 방법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나 형제들의 애경사에는 성실성의껏 돕고 새심한 부분까지 사랑을 표현해야만 할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도둑질하는 자리에 서있기만 하여도 공범으로 인정을 받게 되는 것과 같은 상황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민 25:1-3, 겔 14:6, 요일 5:21, 행 15:29, 고전 10:28).

 

6.2. 반대하는 입장

  우리나라에는 개화이래 장로교나 감리교 등 여러 교파의 선교사들이 줄을 이어 우리 땅에 상륙하였습니다. 천주교가 한국에 들어오면서 고대의 전통의식과의 충돌로 적대적 대립의 상태로 된 것을 유념한 선교사들은 매사에 조심하고 신중한 태도를 취하였던 것입니다. 한국인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고 선교 본래의 사명을 수행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결정적 단계에 이르러 서슴치 않고 반대의 방안을 채택하였습니다. 선교사들 뿐만 아니라 한국교인들도 온갖 환난과 핍박 중에서도 진리수호를 위하여 끝까지 신앙을 굽히지 않았던 까닭에 한국 기독교는 흔들림없이 튼튼하게 건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같은 명확한 결정이 교회 성장을 방해하기보다는 오히려 복음전파에 박차를 가하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 가운데에도 전도인의 신앙의 상태만큼 개종인도 그 수준에 이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7. 믿는 사람들이 제사를 지낼 수 없는 이유

  이제 명절과 제사가 다가옴으로 인해 사실 믿음이 굳건한 그리스도인들은 크게 어려움이 없겠지만, 믿지 않는 가족들의 무지와 완고함으로 인해, 또는 제사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올바르지 못한 지식으로 인해 적잖은 그리스도인들이 곤란을 당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므로 제사에 대한 바른 개념을 갖고 그에 따라 바르게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믿는 사람들이 제사를 지낼 수 없는 그 근본적인 이유는

 

7.1. 산 사람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제사는 산 자를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를 기념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산 자가 더 중요하겠습니까? 아니면 죽은 자가 더 중요하겠습니까?

  말할 것도 없이 산 자인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산 자를 중요하게 여기기보다는 죽은 자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때문에 제사 때가 되면 살아 생전 부모님께 해 드리지 않던 각종 음식들이 제사상에 오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의 관점으로 제아무리 제사가 효도의 한 본이 된다고 해도 돌아가신 뒤에 제사 한 번 지내는 것보다는 제사상 차릴 돈으로 살아 계신 부모님께 보약 한 첩 지어 드리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살아 계신 부모님은 나를 항상 걱정해 주시고 매일 생각해 주시며 어떻게 해서든지 도와주시려 합니다.

  그러나 죽은 부모님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부모를 공경하라고 누누히 강조하고 있지만 죽은 부모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할 것입니다.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우리 나라의 전통은 고대 중국의 왕족 제사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고대 중국에서는 죽은 왕들에게만 제사를 지내고 기념했습니다. 그런데 춘추전국시대에 접어들면서 유교의 영향으로 모든 인간은 조상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조상숭배 사상이 보편화되었고, A.D. 1200년경 중국 송나라의 주자라는 사람이 제사의식을 체계화하였습니다.(이것을 체계화한 학문이 성리학이다.)

  우리 나라는 성리학이 전래된 고려 말엽부터 함께 들어온 <주자가례, 朱子家禮>라는 책을 통해 조상 숭배 사상이 생겨났고, 이어서 이성계가 조선을 세울 때 성리학을 통치기반으로 삼음으로써 조상 제사는 보편화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의 종교는 불교였기 때문에 제사를 지내지 않았습니다. 우리

 

나라는 불교에서도 제사를 지내지만, 사실 정통적인 불교 국가들은 제사를 지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제사에 대한 문제에 봉착할 때마다 효도라는 우리 민족의 미풍양속을 왜 지키지 않느냐고 비난받곤 하는데, 제사가 곧 효도라면 조선시대 이전에는 효자가 한 사람도 없었단 말입니까?

 

7.2. 효도는 살아 계신 부모님께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절대로 효나 불효의 판단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하셨을 때는 살아 있는 부모를 대상으로 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너는 네 아비와 네 어미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주 너의 하나님께서 네게 준 땅 위에서 네 날들이 길 것이라"(출 20:12). "살아 있는 모든 자에게 참여하는 자에게는 소망이 있나니, 이는 살아 있는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나음이라"(전 9:4).

 

7.3. 제사는 마귀들과 교제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제사를 지내면 죽은 조상들이 와서 차려 놓은 음식을 먹고 간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은 한 번 죽으면 이 세상에 다시는 올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죽으면 즉시 하늘나라 아니면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눅 16:19-31). 우리는 지옥에서의 절규 때문이라도 제사를 지내면 안되는 것입니다. 지옥에서 고통당하는 혼들에게 먹지도 못하는 음식으로 약올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7.4. 죽은 조상은 절대로 다시 돌아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제사지낼 때 오는 것은 마귀들입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방인들이 제사하는 것은 마귀들에게 하는 것이지 하나님께 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너희가 마귀들과 교제하는 자들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아니하노라"(고전 10:20).

  이 말씀에 따르면 제사를 지낼 때 조상들이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죄짓게 만들고 병을 주며 살인하게 만들고 도둑질하게 만들고 음란하게 만드는 마귀가 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사를 자주 지내는 사람들은 마귀와 교제하는 것이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남을 참소하게 되고(계 12:10), 대적하며(벧전 5:8), 약해지고(요일 2:13), 거짓말하게 되며(요 8:44), 병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절대로 제사를 지내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귀와 교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7.5. 성경대로 믿는 사람의 자세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은 성경이 가르쳐 주시는 대로 행하고 따르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비성경적인 전통을 지킬 필요는 없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명절이면 조상을 섬긴다는 미명하에 우상을 섬기기 위해 "민족 대이동"을 하고 있습니까? 성경은 우리가 기념해야 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고전 11:26).

  명절에 가족과 친지들이 모인다면 그들 중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을 구령할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부모를 참으로 공경하기 원한다면 그들의 혼이 지옥에 떨어지기 전에 구령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훌륭한 효의 모습이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입니다.

 

 

Ⅴ. 부 록

 

▶ 어는 장남의 고민에 대한 답변: 제사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여자들의 지혜가 필요!

 

어느 집사님의 답변 - 저는 결혼 후 1년이 되어 신앙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때 시어머니는 불교 신자이셨습니다. 초사흘은 꼬박 세고, 명절 때에도 제사 지내는 것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 때만 되면 목욕을 하고 방마다 떡시루와 음식을 놓아야 했습니다. 여기서 제사보다 더 중대하게 생각할 문제는 우상숭배의 문제입니다. 내게 믿음이 생긴 후 주위의 권유에 의해 다음과 같은 방법을 취하게 되었습니다. 제사에 쓰일 떡과 음식을 마련하고 제일 먼저 한 일은 그 위에 손가락으로 십자가를 그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마음속으로 '이것은 하나님께 먼저 드리는 것입니다'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기를 2년, 3년째 되는 해에는 어머니께 용감히 말씀드렸습니다. '크리스천이 만드는 음식은 귀신이 먹지 않습니다'고 말입니다. 그 때 어머니께서는 '그렇다면 내 손으로 차리겠다'며 상을 가져가셨습니다. 신앙을 가진 후 식구들은 점점 제사 음식에 손을 대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5년 째 되는 해에 마침내 어머니께서 초사흘은 세지 말자고 말씀하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제사를 본인이 직접 드려야 하는 경우엔 이렇게 권유합니다. 안 믿는 식구들을 구원하기 전까지는 이 모든 행위가 헛된 것임을 깨우쳐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은 효도와 끊임없는 사랑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로 자기 집이 아닌 친척집에서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의 경우인데, 이런 때엔 쉽게 그릇된 두 가지 형태로 분리됨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는 명절 때 그 집에 발도 들이지 않는 이들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가정의 화목을 생각한답시고 계속 제사에 참여하고 음식과 상 차리는 것, 그 외의 분위기에 흠뻑 젖어버리는 이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흔히 '절만 안 하면 되지 않느냐?'며 반문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 두 가지 다 실패한 케이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들 모두는 도저히 가족을 구원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 신앙이 확실하다면 태도 또한 확실해야 합니다. 제사를 치루는 집에 가는 것은 막지 않습니다. 다만 열심히 일을 돕고 제사 시간 전에 몸만 빠져 나오는 것이 좋습니다. 사정상 갈 형편이 못 되면 예의를 갖춰 일주일 전쯤에 넉넉한 비용을 대는 것도 좋은 예입니다. 그리고는 적극적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가르쳐야 한합니다. 제사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말입니다.

 

   이렇듯 한국의 문화적 상황 속에서 제사문제는 한국 크리스챤들에게 언제나 커다란 도전이요 거침돌이 되어 왔습니다. 이 문제는 선교 초기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사연과 갈등을 엮어 온 것이 사실이고, 오늘도 이 문제 때문에 수많은 크리스챤들이 고민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 "제사"와 "절"의 질문에 대한 대답: 일반적 의미에서 "제사"란 신령(神靈)에게 음식물을 바치거나 또는 기타의 방법을 통해 정성을 다하는 종교의식을 뜻합니다. 성경에서도 "제사"는 매우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보면 여호와께서는 역사 안에 살아 존재하시면서 계약 질서의 실제성 안에서 제사를 통해 그의 백성들과 만나고 "인격적 관계"를 유지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제사"가 여호와께 향하는 어떤 것의 "바침"이든지 또는 "구속의 수단"이든지 그리고 "사귐의 표시"이든지 간에 그것은 "은혜와 심판" 가운데 계신 여호와께 방향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0장의 십계명 가운데 1, 2 계명을 중심으로 보면 제사의 대상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 뿐이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의 제사개념을 사용하여 그리스도를 그의 자의적인 자기 희생으로 속죄를 이루신 대제사장으로 보고 있고,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으로 보고 있습니다.(고전 5:7) 그런데 이 제사가 우상숭배인지 단순한 기념의식인지가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제사의 기원은 원시종교의 한 형태인 사령숭배(死靈崇拜)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당초에는 산짐승이나 생물을 직접 바치는 희생에서 시작하여 점점 정성된 음식물이나 그 밖의 방법을 원용하는 상징적 수법으로 전개되어온 점을 묵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상에 대한 제사는 당연히 조상숭배 또는 우상숭배를 포함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절"에 대한 개념정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절"이란 어떤 대상에게 공경하는 뜻으로 하는 예(禮)를 뜻합니다. 성경에서의 "경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약에서 "경배"는 전적으로 비유적 의미를 취하는데 경배의 배후에 "예배의 행위"가 포함됨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경배가 예배의 한 의식이라고 볼 때 진정한 경배의 대상, 즉 예배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일반 가정에서의 "제사"를 "조상 숭배" 또는 "우상 숭배"라는 시각으로 본다고 할 때 절을 하는 행위는 그리스도인으로써 당연히 근절되어야 하고 비그리스도인들에게도 권면할 사항입니다.

 

   ▶ 제사 음식을 먹으면 죄가 됩니까?: 이 질문은 "제사"가 당연히 "우상 숭배"라고 하는 점을 인정함으로써 비로소 하나의 문제로 부각될 수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에 이와 비슷한 문제가 발생하였을때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을 책망하였습니다. 그들의 지식이 편견이나 교만에 빠져 분쟁을 유발시켰기 때문입니다. 고전 8:4에서 보여주는 바울의 입장은 먼저 "우상의 실체"를 단호하게 규정했습니다. 즉 인격적 실체가 아닌 우상은 무존재한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제사의 성격을 "이방인의 제사라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고전 10:20) 당시 이방 종교에서는 우상을 숭배하며 희생 제물을 드리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제물이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이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신 음식이라고 하는 점을 묵과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바울 역시 고전 8:8에서 식물 자체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신앙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더욱 확실한 입장은 고전 8:10에서 보여집니다. 믿음이 성숙한 신자는 장소와 음식의 출처와는 상관없이 모든 것을 수용하며, 정확한 이해 가운데서 자유롭게 행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 위에 굳게 선 신자들은 그것이 제사 음식이건 어떤 음식이건 상관없이 하나님의 음식으로 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믿음이 약하여 "제물"을 먹는다는 것이 우상과 교제하며 경배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다면 단호히 먹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사 음식"에 대한 바울의 결론은 고전 8:13에서 나타나는데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며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는 것입니다.

 

   ▶ 제사를 드리지 않으면 조상에 대한 불효가 아닐까요?: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제사"가 여호와를 향한 일종의 "예배 의식"인 것을 앞에서 살펴보았습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조상에 대한 "제사"라는 설정은 비기독교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상을 대상으로 할 때는 "제사"의 개념이 아닌 "추도"의 개념으로 바뀌어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의 부모 또는 조상에 대해서 그 분들이 살아계시는 동안 우리에게 베풀어주셨던 그 사랑과 은혜에 대하여 그 분들의 유업을 기억하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제사들 드리지 않는다고 조상에 대한 불효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살아계신 분들께 효도를 다할 때 이미 돌아가신 조상들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 제사와 성묘: 한국 교회는 이러한 심각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세계 어느 나라보다 급속도로 성장을 계속해 왔음을 주지할 수 있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크리스챤들은 이러한 제사문제를 극복하고 신앙생활을 시작했고 지금도 역시 승리생활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사실을 상기하며 용기를 잃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제사문제 해결에 크리스챤들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자세가 몇 가지 있습니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말이 있습니다. 눈치를 보며 제사에 참여치 않는 사실을 변명하기 보다는 오히려 적극적인 자세로 기회있을 때마다 가족과 친지들을 대상으로 열심히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언젠가는 결신하는 사람이 한 둘씩 생기게 되고 미처 결신하지 못한 사람도 제사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지고 함부로 매도하지 못합니다. 주위 사람들이 자신을 예수 믿는 사람으로 낙인찍어 버리도록 만드는 일이 중요합니다.

   둘째, 교회에는 조상을 추모하는 추도예배가 있음을 홍보해야 합니다. 전통적인 제사보다도 더 은혜롭고 감동적인 추도예배가 있음을 홍보하고 설득함으로 예수믿는 사람은 조상도 모른다는 지탄을 받지 않도록 유의해야 합니다.

   부모와 조상의 사진, 앨범, 육성녹음, 비디오테이프 등을 이용한 추도예배 시간의 「추모의 시간」에 대해 설명하면 대부분의 경우에는 납득을 하게 될 것입니다.

   셋째, 평소에 믿지 않는 친지들에게 처신을 잘 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비난받는 것은 제사문제보다는 평소부터의 인간관계 때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평소부터 후덕한 사람으로 인심을 사 놓으면 제사문제로 시비를 거는 사람도 자연 없어질 뿐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전도하는 역사도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