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유 정신과 청지기 정신
[내용 보기]
법정 스님의 입적과 함께 그가 남긴 무소유 정신이 우리 사회의 큰 울림으로 메아리치고 있다. 종교를 떠나서 한국 사회에 이런 큰 정신적 스승을 우리 시대에 갖게 된 것이 자랑스럽기만 하다. 그리고 솔직히 부럽기조차 하다. 왜 우리는 기독교의 마당에서 이런 스승을 최근에 조우하지 못하고 있는지 안타깝고 아쉽기만 하다. 왜 그럴까? 과연 성경은 이런 정신을 우리에게 가르치지 못한 까닭일까? 아니다. 나는 성경은 무소유 이상으로 ‘청지기’(stewardship)라는 더 실용적이고 더 감동적인 정신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고 믿는다.
사실상 무소유란 실제적으로 불가능한 실천이다. 그래서 법정 스님조차도 무소유는 소유를 거절함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소유하지 않는 것이라고 정의하신바가 있다. 그래서 성경은 무소유가 아닌 청지기 정신을 가르치고 있다. 청지기 정신은 주인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청지기는 주인이 아닌 관리자이다. 그는 주인의 뜻을 따라 주인이 맡긴 것을 일시적으로 관리하는 사람에 불과하다. 우리의 주인은 물론 창조주이신 하나님이시다. 청지기는 자기 것이 없는 사람이지만 무소유의 사람이 아니라, 맡은 자로 주인의 뜻을 실현해야 할 사람이다.
무소유는 맑고 향기롭지만 공동체 발전의 에너지를 공급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그러나 청지기 정신은 맡겨진 것을 멋지게 관리하여 하나의 공동체를 구성원들의 비전을 따라 발전시킬 의욕을 제공한다. 무욕은 정결하지만, 무욕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건강하고 합리적인 의욕으로 자신을 건강하게 관리할 줄 아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세상은 더 아름답고 더 풍요한 삶의 마당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요한 전제가 있다. 선한 청지기는 끊임없이 주인의 뜻을 묻고 맡겨진 것을 주인과 주인이 기뻐하는 목적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문제는 자신이 청지기임을 잊고 자신을 주인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의욕이 아닌 야욕을 위해 맡겨진 것을 사용하는 타락이 우리를 추하고 슬프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주인의 임재 안에서 매 순간 순간을 살아야 한다. 개혁자 칼뱅은 이런 삶을 “하나님 앞에서”(코람 데오)라고 표현하였다. 불교는 본질적으로 궁극적으로 무신론이다. 무신론자 이웃이 무소유의 삶의 정신으로 우리 사회에 이런 엄청난 울림을 남기고 있다면 유신론자인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일까?
자신의 양심 앞에서 살아온 사람이 양심의 수행을 통해 우리 사회에 이런 정도의 큰 깨움과 깨우침을 주고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 성령의 인도로 사는 사람들이 남기는 간증은 너무 초라하고 자괴스럽기만 하다. 우리의 의식이 충분히 계몽되지 못한 탓일까? 아니면 알기는 해도 그렇게 삶이 훈련되지 못한 영성의 부족 탓일까? 물론 양자가 다 문제일수가 있다. 우리는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는 인생의 주인이 아니고 청지기라는 고백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그분 앞에서 삶을 사는 그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메타노이아 곧 돌이킴의 삶이라고 믿는다.
이동원 목사(지구촌교회)
'목사 설교 > <<이 동원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탐식의 죄 (0) | 2022.04.02 |
---|---|
영화 <아바타>와 <위대한 침묵>의 컨트라스트 (0) | 2022.04.01 |
드라마 제중원과 주인공의 면천 사건 (0) | 2022.04.01 |
유학생 선교와 디아스포라 목회 25년 (0) | 2022.04.01 |
사랑이 처음이요 마지막이다. (0) | 2022.04.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