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확신(존 라일) 구원의 확신(존 라일)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관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니라”(딤후 4:6-8) 사도 바울은 세 가지, 즉 아래로는 무덤을, 뒤로는 자신의 사역을, 앞으로는 심판 날을 보고 있다. 사도가 본 대로 보며 사도가 말한 대로 말할 수 있는 영혼은 행복한 영혼이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그는 제단 뿔의 줄에 매여 희생 제물로 바쳐지기를 기다리는 짐승과 같이, 그리고 마치 항해의 모든 준비를 마친 듯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태연히 자신의 무덤을 들여다보고 있다. 그는 무덤 앞에서서 무덤을 들여다보면서도 두렵지 않다고 말한다. 이 말씀은 우리와 같은 아담의 자손의 입에서 나온 영광스러운 말이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또한 그는 부끄러움 없이 자신의 사역을 뒤돌아본다. 그는 군사처럼 세상과 육신과 마귀에 대항하여 선한 싸움을 싸웠다.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경주를 끝냈다. 마침내 결승선에 도달했다.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영광스러운 복음을 단단히 붙들고 인간의 전통이나 자신의 생각을 추가하여 그 순수함을 더럽히는 일도 없었다. 그는 군사와 주자와 청지기로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관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니라” 그는 자신이 영광스러운 상, 즉 의인에게만 주어지는 면류관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심판 날에 주님이 주님을 구주로서 사랑하며 그분과 대면하기를 갈망하는 모든 이에게도 주실 것이다. 사도는 의심이나 망설임 없이 말한다. 흔들림 없는 확신으로 선언한다. 이 주제는 매우 중요한데도 오늘날 종종 간과되고 있다. 따라서 이 주제에 가급적으로 쉽게 그러나 두려움과 떨림으로 접근하려 한다. 이 주제를 가지고 나누고 싶은 사항은 첫째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는 확신에 찬 소망은 참되며 성경적이다. 둘째 구원받은 사람도 이 확신에 찬 소망에 도달하지 못할 수 있다. 셋째 구원을 얻는 것과 그 구원을 확신하는 것은 별개이다. 넷째 확신에 찬 소망을 간절히 사모해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다섯째 확신에 찬 소망을 갖기 힘든 까닭은 무엇인가? 여섯째 구원을 확신하게 하시는 성령의 임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일곱째 구원을 확신함으로 참된 그리스도인의 특권과 위안을 누리는 방법은 무엇인가? 1. 구원의 확신은 참되며 성경적이다. 디모데후서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는 확신은 단순한 감정이나 추측이 아니며 체질과 기분과는 상관없는 성령의 적극적인 은사이다. 하나님 말씀은 신자가 자신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 참된 그리스도인 즉 회심한 사람은 죄 사함과 자기 영혼의 안전을 확신한다. 가톨릭교회는 “죄 사함에 대한 확신은 공허하고 불경건한 확신이다” 라고 너무나 터무니없는 말로 확신을 비난한다 . 세상적인 사람들도 대부분 확신 교리를 반대한다. 그것은 자신이 평안과 확신을 느끼지 못하는 까닭에 다른 사람들이 그런 느낌을 갖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참된 신자 중에도 확신을 거부하거나 위험한 교리로 여겨 기피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확신하지 않고 어느 정도 의심하며 사는 것을 겸손으로 여기는 것 같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사 26:3)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고후 5:1)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킬 줄을 확신함이라”(딤후 1:12) 위에 인용한 구절들은 오늘날 수많은 신자들이 만족해하는 단순한 ‘소망’과‘신뢰’보다 훨씬 더 차원 높은 무언가를 보여준다. 신념과 확신과 확실한 지식이 담겼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너무나 겸손한 사람들이었지만 확신에 찬 소망으로 말했다. 깊은 겸손과 강한 확신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이것은 사도 시대에만 국한된 특권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확신에 찬 소망을 지닌 사람들이 많다.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에 대해 확신을 갖는 것은 그릇되지 않다. 확신은 그리스도의 약속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 믿음은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마 8:8)라고 말했던 백부장이 지녔던 믿음과 같다.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딤전1:15)로 지칭했던 바울은 자신의 죄악과 부패성을 깊이 자각했다. 그러면서도 또한 자신에게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를 더 깊이 자각했다. 그는 자기 마음속에 자리 잡은 죄악의 샘을 분명히 직시 했지만 그때에도 ‘모든 죄와 더러움’을 제거할 수 있는 다른 샘을 더욱 바라본 것이다. 자신을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엡 3:8)라고 지칭했던 그는 자신의 연약함을 절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요 10:28) 것이라는 그리스도의 약속이 결코 깨트려질 수 없음을 더욱 생생하게 느꼈다. 바울은 자신이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위에 떠 있는 가련하고 연약한 배임을 알았고 자신을 둘러싸고 포효하는 폭풍우와 파도를 보았지만 바로 그때 예수께로 눈을 돌리고 두려움을 떨쳐버렸다. 확실하고 든든한 닻을 기억했다. 그를 사랑하여 그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신 주님의 말씀과 사역과 중재를 기억했다. 2. 구원받은 신자도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할 수 있다 주께 받아들여졌음을 믿고 소망을 갖는 것과 그 믿음과 소망으로 인해 기쁨과 평안을 누리는 것은 별개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모두 믿음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모두 확신을 가진 것은 아니다. 큰 재산을 상속받을 자로 태어난 아이가 자신의 부유함을 전혀 모른체 살다가 어릴 때 죽을 수도 있다. 사람은 자신의 죄를 자각하고 용서와 구원을 얻기 위해 주님께 나아가야한다. 오직 주님께만 소망을 두어야 한다. 이렇게 할 수 있는 믿음을 지니기만 하면, 그 믿음이 아무리 연약할지라도 그 사람은 천국에서 제외되지 않을 것이다. 주님은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시다. 믿음의 양보다는 질을 보신다. 비록 사람의 믿음이 겨자씨보다 크지 않을지라도 그 믿음이 그를 그리스도께로 이끌기만 한다면 그분의 옷자락을 만지게 할 수만 있다면 구원을 받는다. 우리의 성화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칭의에는 차이가 없다. 강한 믿음을 가진자만이 아니라 “누구든지 저를 믿는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할 것이다. 다만 풍성한 위안을 얻지 못할 뿐이다. 믿음과 확신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믿음은 뿌리이고 확신은 꽃이다. 뿌리 없이는 결코 꽃을 피울 수 없지만 뿌리만 있고 꽃은 없을 수 있다. 믿음은 물에 빠져들기 시작할 때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쳤던 베드로의 부르짖음과 같고 확신은 훗날 공회 앞에서 담대히 외쳤던 베드로와 같다. 믿음은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막 9:24)라고 말하는 떨리는 음성이다. 확신은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 하리요“(롬8:33-36)라는 자신감 넘치는 도전이다. 믿음은 삶과 같다. 삶 자체가 얼마나 큰 축복인가! 삶과 죽음은 너무나 대조적이다. 그러나 인생의 끝날까지 연약하고 병약하며 고통스럽고 시련과 염려에 시달리며 기쁨과 웃음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 수 있다. 확신은 단순한 삶 그 이상이다. 건강과 힘, 능력과 활기, 활력과 에너지, 패기와 아름다움이다. 지금 우리가 다루는 문제는 구원을 받을지의 여부가 아니라 특권을 누릴지의 여부이다. 평안을 누릴지의 여부가 아니라 더 큰 평안을 누릴지의 여부이다. 그리스도의 학교에 속했는지가 아니라 그 학교에서 성적이 어떤지에 대한 문제이다. - 하나님의 영광 다음으로 우리가 바랄 수 있는 가장 귀한 것은 우리 자신의 구원이다. 우리가 바랄 수 있는 가장 달콤한 것은 구원의 확신이다. 이생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차원 높은 수준은 내생에서 누릴 축복을 확신하는 것이다. 모든 성도는 이 땅을 떠날 때 천국을 누릴 것이다. 그러나 이 땅에서 천국을 누리는 성도는 일부이다. - 캐럴 3. 구원을 얻는 것과 구원을 확신하는 것은 별개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으며 확신은 칭의에 따른 결과다.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과 그 구원을 확신하는 것은 별개이다. 구원의 확신은 믿음의 열매이자 결과다. 하나님은 신자들이 은혜 안에서 성장하기 전까지는 좀처럼 확신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이성과 학습이 다르듯이 의지하는 믿음과 확신하는 믿음도 다르기 때문이다. 이성은 학습의 기초이다 . 마찬가지로 믿음이 없으면 확신도 있을 수 없다. 이성을 잘 활용하여 학문을 습득하듯이 믿음을 잘 활용하면 확신이라는 결실을 거두게 된다. 구원 얻는 믿음은 남아 있더라도 시험이나 영적 게으름으로 인해 확신을 잃을 수 있다. - 마음속에 의심이 자주 일어나기 때문에 자신에게 믿음이 없다고 결론짓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믿음이 좋은 사람도 의심할 수 있다. 우리 주님은 가장 연약한 믿음도 무시하지 않으시지만 강하고 확고한 믿음을 기뻐하신다. - 레이턴 - 가장 작은 믿음이라도 가장 큰 믿음과 마찬가지로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이다. 자그마한 불꽃도 진짜 불이다. 한 방울의 물도 대양속의 물처럼 진짜 물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연약하다고 해서 낙심하지 말자. - 볼턴 - 믿음은 처음부터 완벽하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성장과정과 같이 유아와 어린아이, 청소년의 단계를 지나 어른이 되는 것이다. 약한 믿음을 무시하고 비난하는 이들은 교만하거나 잔인한 사람들이다. 또 어떤 이들은 위로하며 이렇게 말하는 이들이 있다. “당신은 충분한 믿음과 은혜를 가지고 있다. 더 이상 믿음은 필요치 않다. 너무 의로워져서는 인 된다” 이들은 아첨꾼일 뿐 신실한 벗은 아니다. “힘을 내라. 당신 안에 선한 일을 시작한 이가 그 일을 끝내실 것이다. 따라서 주의 은혜로 풍성해지도록 기도하라. 주의 길을 따라 앞으로 전진하라” 이것이 가장 안전하고 좋은 태도이다. - 워드 - 우리는 주님과 손을 맞잡고 있다. 우리의 손은 연약하여 쉽게 느슨해 질 수 있다. 하지만 그분의 손길은 강하며 불가항력적이다. 만일 구원이 우리의 행위에 달려 있다면 우리 손아귀의 힘이 반드시 강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귀한 선물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며 약한 손으로도 그것을 받을 수 있다. - 홀 - 약한 믿음도 강한 믿음만큼 참되고 귀하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우리의 강한 믿음이 아니라 진실한 믿음이다. 우리가 멸망하는 것은 믿음이 약해서가 아니라 믿음이 없어서다. - 로저스 4. 왜 구원의 확신을 사모해야 하는가? 구원의 확신은 만족과 평안을 준다. ‘바라거나 신뢰하는’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는 신자는 자신의 영적 산태에 대해 반신반의하기 마련이다. 확신을 지닌 사람은 고통스러운 속박에서 벗어나 큰 위안을 얻는다. 확신을 지닌 사람은 시련을 견디고 아픔 속에서도 평안하고 모든 상황에 만족한다. 확신은 쓴잔을 달게 하고 십자가의 짐을 가볍게 하고 거친 길을 평탄하게 하며 또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밝혀준다. - 확신은 모든 임무를 감당하도록 도와준다. 모든 시험을 물리치도록 우리를 무장시킨다. 모든 반대를 극복하게 한다. 가장 슬플 때에도 지탱시켜 준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면 누가 우리를 대적할 수 있으리요?” - 레이놀즈 구원의 확신은 온갖 난관과 손실을 견디게 한다. 확신은 궁핍과 손실을 견디게 도와준다. 확신은 빌립보에서의 바울과 실라처럼 감옥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할 수 있게 한다. 브래드퍼드가 처형당하기 직전에 감옥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무 것도 요청하고 싶지 않다, 만일 메리여왕이 나를 살려 준다면 나는 감사할 것이다. 나를 죽여도 나는 감사할 것이다. 나를 태워도 나는 감사할 것이다. 나를 정죄하여 영원한 감옥에 떨어뜨려도 나는 감사할 것이다” 구원의 확신은 모욕이나 고통마저 즐거워하게 한다. 확신을 지닌 사람은 사도들처럼 그리스도를 위해 당하는 모욕마저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다. 또한 모든 환난을 보상해 줄 큰 영광이 하늘에 있음을 믿는다. 확신을 지닌 사람은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는 성경 말씀을 늘 기억 한다. 구원의 확신은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게 한다 . 확신이 가장 필요한 때가 바로 죽음이 임박한 때다. 확신은 고통당하는 사람을 붙들어 주고 평안히 임종을 맞게 해준다. 임종을 맞은 백스터는 이렇게 말했다. “영원한 행복과 평안과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마지막이 가까웠을 때 좀 어떠냐고 묻는 말에 그는 “좋다”고 대답했다. 구원의 확신은 역동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게 한다 . 일반적으로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위한 일을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은 천국의 유업을 온전히 확신하는 자들이다. 확실한 소망을 갖지 않은 신자는 불안과 의심과 의문과 갈등과 혼란 같은 내면의 갈등에 사로잡혀 있어서 하나님의 일에 시간을 할애하지 못한다. 확신은 하나님의 일을 역동적으로 감당하게 한다. 그것은 기도를 일깨우고 순종을 북돋운다. 믿음은 걷게 하지만 확신은 달리게 한다. 구원의 확신은 결단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한다. 자신의 상태를 확신하지 못하는 우유부단과 의심은 서글픈 것이며 여러 가지 죄악을 유발한다. 종종 그것은 주님을 따르는 걸음을 흔들리게 한다. 반면 확신은 여러 가지 얽힌 매듭을 풀어 주고 그리스도인의 임무를 분명히 자각하게 한다.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느끼면 과단성 있게 앞으로 나아가며 단호하게 행동하게 된다. 구원의 확신은 성결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사람이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동행 한다. 믿음은 순종의 어머니이며 확고한 신뢰는 엄격한 삶의 토대다. 아버지의 사랑을 확신하는 아들과 주인의 사랑에 대해 자주 의문을 갖는 하인, 이 둘 중 누가 책임감을 더 많이 느낄까? 확신은 주 예수께 대한 의무를 신실하게 감당하게 한다. 아버지의 사랑을 확신하는 아들이 누리는 절대 평안 평안이 부족한 것은 믿음이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모든 은혜의 뿌리인 믿음이 연약하면 은혜도 시들해지기 마련이다. 하나님의 약속들을 어린아이처럼 단순하게 믿으라. 주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라. 현재의 모습 그대로 은혜로우신 구주께 나아가라. 간단한 믿음으로 시작하라. 그러면 다른 모든 것들이 곧 더해질 것이다. 성화는 그 분을 향한 지속적인 믿음에서 비롯된다. “다웟은 “내가 주의 선하심을 볼 것을 믿지 않았다면 낙심했을 것”이라고 말한다(시27:13). 그는 먼저 믿었고 그 후에 보았다.“ - 레이턴 5. 왜 구원의 확신을 갖기 힘든가? 칭의 교리에 대한 오해 때문이다. 많은 신자들이 칭의와 성화를 은연중에 혼돈하고 있다. 그들은 칭의가 자신 안에 있는 어떤 것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는다고 하는 개념에 은연중에 동조하는 것 같다. 칭의 우리의 노력과는 아무 상관이 없으며, 칭의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뿐이다. 우리가 죄인으로서 구원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는 ‘구속함 받은’ 죄인,‘의롭다 하심을 받은’ 죄인,‘새로워진’ 죄인이다. 칭의는 완벽하게 끝난 일이며 성화는 불완전하며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진행된다. 완벽해지지 않은 자신을 보며 자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 유업도 얻지 못한다는 생각에 슬픔과 두려움에 시달린다. 신자가 확신을 원한다면 칭의를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는지, 자신의 믿음에 이상은 없는지, 참 진리로 허리띠를 단단히 매고 있는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은혜 안에서 성장하기를 꺼리는 게으름 때문이다 . 일단 회심하면 더 이상 신경 쓸 일이 거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구원받은 자는 편안한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행복해 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은혜도 재능처럼 사용하고 발전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그들은 ‘성장하고 점점 더 풍성해지고, 믿음을 더하라는’ 명령을 간과한다. 30배의 결실을 거뒀다면 60배,100배를 거두려고 노력해야 한다. 주님은 우리의 성화를 바라신다. 부지런함과 확신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이다. 붙드는 믿음은 들음에서 생기지만 확신하는 믿음은 행함이 없이는 생기지 않는다. “게으른 자는 마음으로 원하여도 얻지 못하나니”(잠13“:4) - 소망과 두려움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면서 평안과 안정을 원하는가? 무기력하게 있지만 말고 일어나서 기도하고 금식하고 묵상하며 탐욕과부패한 행실을 물리치라. 기도와 간구와 끈질긴 요청으로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라. 이것이 하나님나라를 얻는 방법이다. 이런 행동 자체가 평안과 확신을 주는 건 아니지만, 하지만 이들은 평안과 확신을 얻기 위한 한 방법이다. - 오웬 - 변덕스러운 생활 때문이다. 자신이 빠지기 쉬운 죄악을 과감히 포기하지 못하면 확신을 갖지 못할 것이다. 자신의 신앙에 대한 애매한 태도는 영혼의 정원에 마름병이 들게 한다. 변덕스러운 삶은 영적인 눈을 흐리게 한다. 그런 사람의 영혼은 음울하며 냉랭하다. 마음속에 아간을 허용하면 당신의 손이 약해지고 위로받을 길이 없어질 것이다. 성령의 열매를 거두려면 그것에 합당한 씨앗을 매일 뿌려야 한다. - 마음의 고통을 야기하는 가장 흔한 원인중 하나는 알고 있는 죄를 은밀히 묵과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위로와 도우심을 거두게 한다. - 백스터 - 주 예수님을 믿는 신자가 확신을 갖기를 원하지만 아직 갖지 못했다면 양심과 행실에 거리낌이 없는지 깊이 생각하라. 자신의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고, 자신의 양심을 살피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자신의 방식을 살피고, 또한 자신의 가정을 돌아보아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자신이 소망을 확신하지 못하는 이유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6. 구원의 확신은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다. 구원을 확신하게 하시는 성령의 임재를 보라. 성령의 임재에 대해서는 그분이 만드시는 결과와 열매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 그분의 작용은 신비하여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결과는 언제나 분명하게 나타난다. 우리는 나무의 수액과 잎과 열매를 보고 나무에 생명이 있음을 알듯이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습관과 삶에 미치는 성령의 영향을 보고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심을 알 수 있다. 성령이 계시는 곳에는 죄에 대한 깊은 자각과 참된 회개가 있다. 자신의 영혼에 대해 무관심한 채 평생토록 빈둥거리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죽은 상태이다 . 성령이 계시는 곳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주로 믿는 믿음이 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해 우리에게 영적으로 필요한 모든 것들이 채워졌음을 알게 하신다. 우리 자신의 모든 공적을 부인하고 오직 예수께 맡기게 한다.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 것도 의지하지 않게 하신다.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다른 어떤 것을 기초로 삼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죽은 상태이다. 성령이 계시는 곳에는 늘 거룩한 삶과 거룩한 대화가 있다. 성령은 성결의 영이시다. 완악하고 육신적이며 세상적인 마음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부드럽고 양심적이며 영적인 마음을 갖게 하신다. 이런 것들이 결여 되었으며 매일의 경건 생활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죽은 상태이다. 성령이 계시는 곳에는 진지한 개인 기도가 있다. 성령은 은총과 간구의 영이시다. 기도할 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죽은 상태이다. 성령이 계시는 곳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과 공경이 있다. 성령은 우리를 말씀 가운데로 이끄신다. 말씀은 세상에서의 안전한 여정에 필수적인 빛과 랜턴과 만나와 검이다. 성경 말씀 속에서 각별한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며 말씀을 듣고 깨닫는 일을 기뻐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죽은 상태이다. 성령이 계시는 곳에는 이러한 증거들이 드러날 것이다 . 7. 구원을 확신함으로 영원한 기초 위에 세워진 특권을 누리라. 우리 중 대부분은 가련하게도 우리에게 약속된 축복의 극히 일부만 누리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소망을 확신하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속한 영광스러운 것들을 이생에서도 맛본다. 그것은 불신자가 이해할 수 없는 큰 위안과 위로다.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는 양식이 가득하다. 하나님의 가장 연약한 자녀도 불신자에게는 전혀 없는 위안과 보고를 지니고 있다. 그에게는 아무리 약한 소망이라도 소망이 있으나 불신자에게는 소망이 전혀 없다. 이생의 마지막을 깊이 생각하라. 이 땅에만 보화를 쌓아 두는, 즉 이생에만 소망을 두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애석한 마음이 든다. 오래된 왕국이 무녀지고 왕과 부자와 큰 인물들도 사라졌다. 사라지지 않는 나라에서 그들이 차지할 몫은 없다 . 빼앗길 수 없는 이중의 보화를, 영원한 기초 위에 세워진 성을 추구하라. 참된 만족을 결코 주지 않을 세상을 경계하라. 낮아진 죄인으로서 주 예수께 나아가라. 그러면 그분이 당신을 받아들이시고, 용서하시고, 새롭게 하는 영을 부으시며, 평안으로 채워 주실 것이다. 어렴풋한 소망을 확신으로 바꾸고 싶지 않은가?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으로 만족하려는가? 확신은 추구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확신 없이 만족하는 것은 자신의 복을 포기하는 것이다. 당신의 구원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왜 그것을 더 확실히 하려고 노력하지 않는가? 믿음 성장을 매일의 기도 제목으로 삼으라. 당신의 평안은 믿음의 크기에 비례한다. 어려움 없이 얻는 것은 별가치가 없다. 지연되더라도 기다리라. 모색하며 기다리라. 확신을 얻은 후 가끔 의심이 생기더라도 놀라지 말라. 당신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몸을 입고 땅에 있음을 잊지 말라. 확신은 매우 예민한 식물이다. 매일 수시로 보살피고 물을 주어야 한다. 확신을 지녔을 때 더 많이 기도하고 주의하라. 영적 어둠은 말을 타고 달려오고 걸어서 떠나간다. 내리막을 달리는 것은 쉽지만 오르막을 오르는 것은 힘든 일이다. 무엇보다 성령을 근심하시게 말라.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 사소한 나쁜 습관이나 작은 죄들을 용납함으로써 성령으로부터 멀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라. 포도나무선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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