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시록 설교

[스크랩] 계시록은 복음이다 (계 1:1-3)

에반젤(복음) 2021. 12. 17. 14:52

계시록은 복음이다 (계 1:1-3)

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계1:1-3)

성경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복음이라면 그 속에 있는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 역시 성경의 통일성으로 볼 때 복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역사 속에 나타난 요한 계시록 해석 유형은 과거적 역사적 미래적 영적 해석 등 다양합니다.

그러나 계시록이 성경일진데 성경 전체에 맞게 해석해야 하고, 또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하며,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면 덮인 수건이 사라진다는 점에서 계시록을 복음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본문의 서론에서부터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시던 예수님의 복음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서

1절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예수님이 주신 계시라는 의미입니다. 계시를 주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복음입니다. 막1:1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하신 말씀을 연상시킵니다.

2. 계시의 성경에서 용례로 보아

"계시"란 문자적으로는 ‘숨은 것을 드러내다’ 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무엇을 숨겼다가 드러내셨을까? 계시록의 내용인데 계시에 대한 성경의 용례를 보면 롬16:25에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 이제는 나타내신바” 된 것이라. 비슷한 말씀이 갈1:11-12, 마13:34-35에도 나타납니다.

3. 예수 안에서 주신 선물이란 점에서

1절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계시의 근원과 초기 전달과정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것은 다 우리를 위해 받은 것이라는 것이 복음의 전형적인 구조입니다(엡1:3, 엡2:8).

4. 열심내시는 제목이란 점에서

1절 “반드시 속히 될 일” "반드시"는 원문에 "데이"로서 절대적인 확실성을 가리킵니다. 성경에 절대성을 부여하는 사건은 오직 구원의 사역밖에는 없습니다. 여호와의 열심은 구속사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사9:7). “내가 속히 오리니”(계22:7) 여기 “오리니” (에르코마이)는 원문상 현재형입니다. 장차는 물론 이 순간에도 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씀한 것입니다.

5. 분부하신 명령이란 점에서

1절에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복음의 전달과정인데 천사는 성경에 천국복음을 전해주던 그 천사입니다. 세상 끝 날까지 전파하고 힘쓸 일은 복음(마28:19-20)과 그 복음 증거를 위해 성령권능(행1:8)을 받아야 한다는 점에서 계시록이 이 틀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6.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증거라는 점에서

2절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이라 할 수 있지만 이 두 용어는 이미 성경을 암시하는 용어요, 예수님의 지상사역과 관련된 용어입니다(행1:3, 요20:31).

7. 때가 가깝다는 표현에서

3절 "때가 가까움이라" 재림의 때를 가리키지만 아직 재림은 오지 않았습니다. 이 표현 역시 예수 복음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막1:15에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셨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신 말씀처럼 천국이 아주 당도해 있어 예수 믿는 순간 천국백성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8. 복이 되는 말씀이란 점에서

3절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계시록의 복음성을 시사합니다. 성경의 복에 대한 정의나, 계시록의 7대 복을 볼 때 계시록의 내용이 무엇인지 충분히 확신할 수 있습니다.

<계시록의 7대 복>
1:3 계시록을 읽고 듣고 행하는 자가 복이 있다.
14:13 주안에서 죽은 자가 복이 있다.
16:15 깨어 의의 옷을 입고 자기 수치를 보이지 않는 자가 복이 있다.
19:9 어린양 혼인잔치에 초대된 자가 복이 있다.
20:6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가 복이 있다.
22:7, 18, 19 예언의 말씀을 가감 없이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
22:14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가 복이 있다.

지상의 마지막 때 전쟁과 기근과 핍박 등 환난을 피함이 복이라면 그 동안 수천 년 동안 이 역사적 종말과 관계가 없던 사람들에게 계시록이 무슨 의미를 갖겠습니까? 요한을 통해 이미 개봉된 계시록은 어느 한 시대에만 적용됨이 아니라 모든 세대에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읽고 듣고 행함으로 누리는 복이라면 예수의 복음 말고는 없습니다.

그래서 눅11:27-28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이르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낳은 마리아도 복되지만 더 복된 것은 말씀을 듣고 또 지키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을 복음의 관점에서 보시기 바랍니다. 그 관점에서 해석한 결과 성경이 마땅히 다루어야 할 주제인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 구원, 율법, 성화, 신앙, 율법, 복음, 사역, 천국, 교회, 부흥, 기독, 연단, 전도, 죄, 세속, 육체, 능력, 은사, 연합, 알곡, 징계, 복음, 미혹, 승리, 양심, 신부, 죽음, 천국, 종말 등이 나타남을 볼 때 더욱 그러합니다.

마치 성찬이 예수님의 살과 피라는 구속의 진리를 형상화한 것처럼 계시록의 상징과 비유로서 복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특히 계시록이 장차 오실 예수님과 아울러 지금도 임하시는 성령의 부흥을 강조하고 마지막으로 성도의 신부 단장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성경을 바탕으로 한 복음의 진리, 신령한 영적 지도서, 그리고 신앙훈련 제자훈련을 위한 교과서로서 적합한 책이 바로 요한계시록입니다.

 

 

구속사역과 삼위일체 (계1:4-6)

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와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6.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삼위로 계시지만 죄인을 구원하시는 삼위일체의 역할은 각각 다릅니다. 성부는 계획하시고 성자는 성취하시고 성령께서는 각 개인에게 집행하십니다.

1. 구속사의 주관자이신 성부

4절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와” 이 말씀에서 구원사역의 주관자가 성부 하나님이심을 보여줍니다.

“전에도 계시고”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구원을 만세 전부터 계획하시고 진행해 오셨습니다(엡1:4-5, 롬5:8). 그 약속이 구약이고 성취가 신약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한 준비 역시 섭리 속에서 진행되어 오고 있었습니다.

“이제도 계시고” 하나님의 은혜는 현재성입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 이미 아들 안에서 준비하신 구원을 우리에게 온전히 베푸시기 위해서 쉬지 않으십니다.

“장차 오실 이” 성부를 장차 오실 분으로 소개한 점은 약간 생소하지만 구원의 완성을 위한 구속사의 주관자가 성부이심을 시사합니다. 8절 하반의 “전능한 자” 역시 사람은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로서는 가능함을 보여줍니다(막9:23).

2. 구원사역의 집행자이신 성령

4절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법이 있어도 집행하지 않으면 그 어떤 아름다운 법도 소용이 없듯 구원의 집행자 되시는 성령께 무관심하면 안 됩니다.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하나님을 믿을 수도 없고 온전할 수도 없으며 복음의 증거자도 될 수 없습니다.

성령님은 아버지 보좌 앞까지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 성령은 하나님이신데 보좌 위가 아니라 보좌 앞일까요? 성령께서 택하신 자들을 구원하시어 하나님 앞까지 이르도록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요16:13, 요20:30-31, 히4:16).

성령님은 온전케 하시는 생명의 성령이십니다. 4절에 “일곱 영”은 일곱 분이시란 뜻이 아니요, 성경에서 7은 사역의 완전수입니다. 즉 성령은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영이십니다. 성전의 일곱 등대와 같이 가지가 하나에 연해져 있듯이 하나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할 때 구원의 실제와 감격과 능력 있는 복음 증거자가 될 수 있습니다.

3. 구원사역의 공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5-6절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주님이 구원사역을 이루시기 위해서 어떻게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아버지의 말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5절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충성은 죽기까지 하는 것이고(계2:10), 증인(마르튀스) 역시 진리를 수호 및 전파하고 이를 위해 순교하는 자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에 약속하신대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죽기까지 자기를 낮추시고 성부에게 복종하신 충성된 아들이셨습니다(빌2:5-8).

예수님은 우리 구원의 모델과 목표가 되셨습니다. 5절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이처럼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셔서 우리도 장차 그렇게 될 것을 보여주셨습니다(고전15:20-21, 요일3:2-3).

주님의 죽으심은 곧 나의 죽음이요, 주님의 사심은 곧 나의 삶이기도 합니다(롬6:10-11). 이 모든 공로를 믿음으로 누리며, 이것이 우리 믿음의 목표이기도 합니다(엡4:13).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임금 곧 주가 되셨습니다. 5절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 땅의 임금들은 문자적으로 세상 나라 주권자를 가리키지만 한 편으로는 육신에 속해 살아가는 죄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과 교회의 머리이심과 아울러 우리 모두의 주권자이십니다.

그러니까 육신을 따라 살아왔던 우리 죄인들일지라도 예수님을 주로 삼으면 희망이 있습니다. 그동안 하나님의 주권을 거부하며 내 주장대로 살아왔지만 이제는 우리를 피로 사신 주권자 예수님을 나의 왕으로 삼고 그 발아래 엎드리시기 바랍니다(빌2:9-11). 그 말씀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눅6:46에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하셨습니다.

4. 구원의 동역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6절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이 말씀은 벧전2:9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라는 말씀을 연상시킵니다. 나라는 권세와 번성의 가능성을 시사한 말씀이요(창10:20), 제사장은 하나님을 섬기고 기도하는 영적사역을 시한 말씀으로 우리를 구원의 동역자로 불러주셨음을 의미합니다(고전3:9, 고후6:1).

 

요한계시록의 삼위일체 소개는 하나님에 관한 단순한 서술이 아니라 요한계시록의 명제인 구원사역과 관련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고, 지금도 무엇을 하시고 계시며, 그리고 무엇을 하실 것인지에 대해 암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소개에서도 계시록의 복음성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3이 하나님의 완전수라는 점에서 우리를 위한 구원의 역사가 얼마나 완벽한지 우리는 그저 그 구속의 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영원히 영원히 찬양하며 감사할 뿐입니다.

 

 

주님 오심의 3대 시제 (계 1:7-8)

7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8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요한계시록의 주제를 한 마디로 말한다면 “주님이 오신다.”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오셔야 구원의 완성은 물론 모든 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오실 때 주님 자신도 보배지만 또한 그냥 오시지 않고 온갖 아름답고 온전한 선물을 가지고 임하십니다(벧전1:13).

주님 오심 3대 시제에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1. [과거적] 주님은 오셨습니다.

과거에 주님이 오셔서 이루신 공로는 우리에게 자유와 특권을 누리게 합니다. 5-6절에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이미 오셨던 주님에게서 주목해야 할 사항은 우리를 위해 이루신 공로입니다. 그가 이루신 공로는 첫째로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심입니다(롬5:8-9).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 용서를 누립니다. 그래도 되나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둘째는 우리를 나라 삼으셨습니다.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우리의 왕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정권을 인정하면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눅17:20-21). 그리고 제사장은 승천하심으로 아버지께 성령을 받아 우리에게 주심으로서 이루어졌습니다(슥12:10).

그러니까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우리가 죄 사함 받고, 승천하시어 주와 그리스도가 되심으로 우리는 나라가 되고 백성이 되고, 예수님이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우리에게 부어주심으로 우리는 간구하는 심령을 가진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확신과 양심의 평안과 신령한 직분을 잘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2. [현재적] 주님이 함께 하고 계십니다.

5절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여기 은혜와 평강은 주님의 현재적 임재 속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세 번이나 평강을 축복하셨습니다(요20:19, 21, 26). 임재의 체험처럼 행복한 경험은 없습니다.

주님은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지만 우리가 주님께 무관심하면 임재의 행복을 모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부르기 전에 이미 은혜와 평강의 보따리를 가지고 우리 곁에 와 계십니다. 임재의식을 회복하려면 보이지 않지만 함께 하신다는 의식을 가지고 늘 대화하며 찬양하며 조심하며 동거 동행 동역하시기 바랍니다.

3. [미래적] 재림하시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7-8절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주님이 재림하시면 성도에게는 완전한 구원을 주시는 반면 주님을 박해하거나 준비되지 못한 사람들은 땅을 치며 후회할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진행형으로 지금도 오시고 계신 주님과, 미래형으로 장차 온전히 임하실 주님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마치 기차가 플랫 홈에 들어왔지만 아직 지나가고 있고, 온전히 멈출 때가 있는 것처럼, 주님은 지금도 성령으로 임하셔서 믿는 자와 함께 하시며 부흥의 큰 능력으로 영혼을 구원하시고 변화시키시면서 오시고 계시고, 그리고 장차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온전히 재림하실 것입니다.

가슴을 치며 애곡함

가슴을 치며 애곡하는 현상 역시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부흥의 영으로 주님이 임하실 때 애곡하고 통곡하는 일이 일어납니다(삿2장, 행2:37). 다음은 재림의 심판 날에 주님의 원수들이 후회하며 통곡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의 영육 간에 불 못에 던지실 것입니다(눅12:4-5).

구름을 타고 오심

학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가견적인 상징물이라. 즉 상징적이면서도 실재적이라."는 주장입니다. 마지막 종말에는 영광중에 그러면서도 문자 그대로 그렇게 임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런데 구름의 다른 의미도 있습니다. 마 17장과 계14:14에 나오듯 예수 외에 나머지는 가리는 역할입니다(마17:5-8). 눅9:36 “오직 예수만 보이시더라” 이처럼 신령해 지고 싶은 욕망도 아니라 오직 예수의 확고한 터전 위에서 하나님께 한없는 영광을 돌릴 때 주님이 부흥의 불길로 임하실 것입니다.

구원의 성취는 확고함

8절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알파와 오메가가 의미하듯 죄인을 구원하시기로 시작하신 이가 온전한 구원을 반드시 성취하실 것입니다. 빌1: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이 일은 이제도 전에도 변함없이 진행 중이며 우리에게 임하시는 날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온전한 작품이 될 것입니다.

 

주님은 2000 여년 전에 오셨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며, 또 갈망하는 자들에게 부흥의 영으로 임하고 계시고, 그리고 장차 재림으로 온전히 임하실 것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에 담긴 진리를 깨달아 이미 이루신 예수님의 공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함께 하신 주님을 믿고 동거 동행 동역하며, 더욱더 부흥의 영으로 임하시기를 갈망하고, 그리고 온전히 재림으로 임하셔서 우리의 육체와 우주까지도 변하게 해주시기를 갈망하시기 바랍니다.

 

 

참된 복음의 일군 (계 1:9-11)

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11. 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전승에 의하면 유배지만 밧모 섬은 들어가면 3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죽어서 나오는 악명 높았던 섬으로 섬을 지키는 군인들이 포학하여 무법천지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요한이 노구의 몸을 이끌고 밧모 섬 채석장에서 1년 6개월 동안 중노동을 하는 사이에 그 흉악한 섬은 간수들과 죄수들이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여 평화의 섬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요한은 복음의 일군이요 최고의 전도자였습니다.

복음의 일군들이 갖출 구비조건은

1. 사랑의 동질성을 갖는 것입니다.

9절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여기 형제라 했습니다. 그냥 형제가 아니고 “너희 형제”입니다. 말씀을 받을 대상과의 동질성을 강조하는 용어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육신을 입혀 보내신 이유가 속죄의 어린양 외에도 전도적 측면에서 인간과 교감을 갖기 위해서였습니다. 형제라는 말에는 무한한 사랑이 내포되어 있습니다(잠17:17, 요일3:16).

2. 전도자는 복음을 알고 복음을 체험해야 합니다.

9절 중반 절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원문에는 앞의 “형제”라는 말과 “동참하는 자”가 한 관사로 묶여 있습니다. 즉 요한이 성도들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나라에 동참했다는 것은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에게 천국이 저희 것이듯 환난과 나라와 참음은 동의어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잘 알았고 복음을 정확히 이해했으며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체험한 사람이었습니다(요일1:1, 벧전1:7-9, 딤후2:11).

3. 전도자는 복음전도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9절 하반 절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밧모 섬은 요한이 죄수로서 보내졌던 유배지로 3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죽어서 나올 만큼 험한 곳이었지만 선한싸움에서 승리하여 온전히 복음화했습니다. 전도자는 성경연구와 복음전파에도 목숨 걸어야 합니다(행20:23-24). 메시지가 나쁘다든지 은혜가 없다는 말은 듣지 않아야 합니다.

4.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갖추어져야 합니다.

10절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계시록이 주일날 주어졌다는 것은 역사적 시간을 알려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삶이 매일 주의 날이 될 때 비로소 성령의 은혜가 함께 한다는 것을 시사해줍니다. 주의 날은 구약에서 “여호와의 날”로 범죄한 나라에 대해서는 심판이지만 신약에서는 성령이 임하셔서 죄악을 소멸하시는 날이기도 합니다(욜2:28-30). 그러므로 열심히 하나님을 경외하십시오(시110:3).

5. 매사에 성령님을 스승 삼고 사십시오.

10절 하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요한의 배후에는 주님이 계셨습니다. 사30:21에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라 한 것과 같습니다. 늘 공부하고 자료를 모으고 최선을 다하면서 알지 못할 때는 늘 엎드려 여쭈시기 바랍니다(벧후1:19).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사사로이 풀어서는 안 되며, 성경의 중심과 맞아야 하고, 그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메시지가 드러나야 합니다.

예수님의 음성이 나팔소리 같았는데 나팔은 복음의 상징입니다. 성경을 연구하다가 나팔소리가 들려와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면서 성경을 읽고 또 읽으면서 원어 주석 문맥 용례 문화 배경 등을 수집하고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면서 성경기자나 진리의 선배들은 어떻게 이해했는지 참고하면서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6. 분명하고 감격적인 복음의 진리를 취해야 합니다.

또 10절 “나팔 소리와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계시록을 주시기 전에 큰 나팔소리 같은 음성으로 말씀하심은 계시록이 그리스도의 복음임을 나타내기 위해서였습니다. 계시록을 복음적으로 접근해야지 달리 노스트라다무스 식으로 접근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크다는 것은 늘 구원과 관계된 영적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계시록은 우리를 온전한 천국백성으로 기르는 여러 가지 진리를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하나님 나라, 신론, 인죄론, 구원론, 기독론, 교회론, 종말론, 보혈, 십자가, 교회, 성령, 부흥운동, 자아처리, 대적론, 육체론, 세상, 마귀,, 등등 우리가 성화에 이르도록 구체적으로 알려줍니다.

7. 성경에 대한 시각이 열려야 합니다.

네가 보는 것을” 즉 “계시”란 (αποκαλυψις 아포칼뤼프시스)인데 아포(덮다, 가리다), 칼립시스(벗기다, 드러내다)는 의미로 그 의미는 ‘비밀을 나타내다. 베일을 벗기다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의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려면 성경에 대한 눈이 열려야 합니다.

감사한 것은 성경을 해석하기 전에 큰 틀에서 그 답이 이미 나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요, 또한 그 복음의 어떤 구체적인 무엇에 대한 것입니다. 이런 대전제 하에 성경을 보면 열리기 시작합니다. 요5:39에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엠메오 도상에서 예수님께서 성경을 가르쳐 주며 두 제자의 눈을 열어주신 것처럼 성경으로 성경을 혹은 신약으로 구약을 보면 성경이 열립니다.

8.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두루마리에 써서” 두루마리는 고급 양피지로서 성경을 의미하는 대명사입니다. 두루마리에 쓰라는 것은 네가 본 것 즉 계시록이 성경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복음의 일군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 말씀도 소홀하지 않도록 축자영감설을 믿을 때 성경이 열립니다(딤후3:16-17).

9. 수신자에게 맞게 전달되어야 합니다.

11절 “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그런데 내용을 보면 한 분 예수의 말씀이지만 그 내용이 각각 다릅니다.

살펴보면 그 교회의 처한 형편과 영적상태에 맞게 전달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위로할 상황에서는 위로하셨고, 인정 및 칭찬할 상황에서는 칭찬하셨고, 책망해야 할 점은 책망하시고, 약속과 예언 역시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의 삶을 지도해 주셨습니다. 허공을 치는 메시지가 아니어야 합니다.

10.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전해야 합니다.

11절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주님은 “보내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일곱 교회에 보낼 메시지가 계시록 2장과 3장에 국한 된 것인지 아니면 계시록 전체를 포함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2-3장임은 분명하지만 계시록 전체를 배제할 근거가 없다는 점에서 계시록 전체도 보냈다고 보는 편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2장 3장 외의 메시지는 그리 쉬운 내용이 아닙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도, 기독교강요를 쓴 칼빈도 계시록은 손도 대지 않았습니다. 계시록의 전달자인 사도 요한도 본문만 기록했지 주석을 달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요한에게 보내라 하셨습니다.

필자 역시 계시록의 힌트만 전달할 뿐 완전히 알지는 못합니다. 힌트 역시 계속하여 발전해 나가는 상황입니다. 확실한 것은 요한에게 “보내라.” 하실 때는 하나님께서 책임지신다는 것입니다. 설교를 준비할 때 하나님께서 하라 하시는 것을 말하면 열매 맺여주시며 무엇을 말해도 문제가 없지만, 하나님이 막으시는 것을 말하면 결말엔 누군가 그 설교를 듣고 시험에 빠지는 등 문제가 생깁니다.

사52:7-8에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한 것처럼 복음전도자처럼 값지고 귀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 사도 요한과 같이 진정한 복음의 메신저들이 되기 위해 먼저 복음을 알고 체험하고 누릴 뿐 아니라 전도자로서 부족함이 없도록 준비하고 또 준비하는 하나님의 일군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계시 (계 1:12-16)

12. 몸을 돌이켜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4.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15.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16. 그의 오른손에 일곱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인생의 최고의 발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나와 관련하여 알지 못한다면 진정한 복음이 되지 못합니다. 특히 구원하시고 온전케 하심과 관련하여 나와 어떤 분이지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은혜 받는 삶을 위해서 그리스도에 대한 앎은 필수적입니다.

요한에게 나타나신 주님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1. 인자이신 예수님이십니다.

12-13절 "일곱 금촛대를 보았는데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여기 촛대는 교회를, 일곱은 완전을, 금은 신성 혹은 믿음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교회는 인간의 단체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피로써 세우신 신령한 교회입니다. 교회 무시하지 말고 신앙생활해야 합니다.

부활 승천하신 주님이 인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은 지금도 교회와 함께 하시며 교회를 통해서 갈릴리에서와 같이 인자 예수님의 사역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엡4:11-12). 그러므로 교회를 통해서 양육 받지 않고서는 참된 성도가 될 수 없습니다.

2.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이십니다.

13절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출28:4, 8, 레16:4 등을 보면 이 모습은 대제사장의 옷차림입니다. 그런데 대제사장복의 특징이 많은데 그 중에 발에 끌리는 모습을 강조할까요? 죄 없으신 예수께서 자기 발을 덮는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은 주님이 부정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죄를 덮으시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를 나타낸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구원의 진정함을 경험하지 못합니까? 속죄의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보혈의 공로를 모르니 사탄의 참소로 인한 양심의 고통은 말할 수 없이 큽니다. 아버지의 용납하시는 사랑과 보혈의 공로를 믿어 의롭다 함을 받는 진리에 서지 않고서는 진정한 영적 생활은 불가능합니다.

3. 왕이신 예수님이십니다.

13절 "가슴에 금띠를 띠고" 이 모습은 왕의 모습입니다(단10:5-6). 그런데 면류관이나 홀이나 보좌 등 왕의 상징이 많은데 가슴에 금띠로 소개한 이유는 가슴은 마음의 위치요 하나님의 좌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금은 신성이나 은혜를 가리키며 띠는 자세나 통제를 의미합니다. 이처럼 주님이 우리의 마음을 은혜로 다스리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늘 주님을 가까이 할 때 우리 마음과 삶을 아름답게 다스려 주십니다.

4. 의로우신 예수님이십니다.

14절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예수님의 모습은 머리와 머리털이 양털과도 같고 눈과도 같이 희였습니다. 잠16:31에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했듯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양털과 눈에 비유함은 우리들의 죄까지도 온전히 희게 해주심을 나타냅니다(사1:18). 성경의 배경이 되는 고산지대의 눈은 사시사철 녹지 않습니다. 주님을 의지하며 머리털만이 아니라 머리까지 희었듯이 우리의 머리털 같은 죄 뿐 아니라 마음까지도 성결케 하십니다(요일1:7, 골3:10, 사61:10).

5. 통찰력을 가지신 예수님이십니다.

14절 "그의 눈은 불꽃같고" 단10:6에는 “그 눈이 횃불 같다”했습니다. 이는 사물의 본질과 인간의 마음까지도 꿰뚫어 보시는 그리스도의 신적 통찰력을 의미합니다. 그 앞에서 어떤 거짓도 불의도 숨길 수 없습니다. 그리고 가만 두지 않으십니다(렘17:10).

아무리 용서의 은혜를 받았어도 변화 받지 못한 숨은 마음이 있다면 불꽃같은 눈동자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끝까지 추적하셔서 회개시키고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빌3:15). 은혜 가운데 살려면 날마다 하나님 앞에 새롭게 되길 기도하란 교훈입니다.

6. 완악함을 깨뜨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15절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고대 전쟁문서나 부조에 나타나듯 원수를 밟는 발은 승리의 상징이었습니다(시110:1). 주님은 원수 사탄을 밟으셨고 또 더 밟아야 할 것이 있는데 바로 완고하고 교만한 우리의 자아입니다. 나를 내려놓으면 좋으련만 우리 인간 얼마나 완악한지 그래서 불같은 연단이 필요하고 강력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모습은 어떤 완악한 것도 산산조각으로 부숴버리는 강한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변화되는 것만이 연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바울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고후12:7). 수장절은 천국의 예표로서 가을에 포도를 추수해야 오는 절기입니다. 포도알갱이처럼 짓밟혀 깨뜨려지지 않고는 온전한 믿음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7. 은혜와 진리가 풍성한 예수님이십니다.

15절 하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예수님께서 자신을 거대한 폭포 소리로 계시하신 이유는 그만큼 은혜로 충만하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요1:16에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했습니다. 요7:38에도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셨습니다.

8. 강하게 붙들어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16절 "그 오른손에 일곱별이 있고" 오른손은 권능의 상징이요,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 즉 주의 종들입니다. 7은 완전수입니다. 그래서 일곱별은 당시 일곱교회의 주의 종들이지만 모든 시대의 주의 종들일 수도 있습니다.

정상적인 주의 종의 모습은 주님의 손에 붙들린 모습이어야 합니다. 내 꿈과 내 비전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비전을 실천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움직이려 해서는 안 됩니다. "주의 종이 여기 있나이다. 제가 무엇을 하리이까?" 이래야 쓰임을 받습니다(시123:2). 그리고 능력의 오른손에 붙들려 있다는 믿음 가지고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일에 담대하시기 바랍니다(렘1:7-8).

9. 진리의 분별력을 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16절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여기 검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입니다(엡6:17, 히4:12). 그리고 좌우는 흔히 분별을 암시하는 용어였습니다(욘4:11, 출2:12). 삿3:16에도 좌우의 검은 예리함을 가리켰습니다. 히4:12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성경이 바로 예리한 검입니다. 이 검을 가지십시오. 이런 예리한 검으로 이단과 세상에서 지켜 주십니다.

10. 해와 같이 밝게 살게 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16절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시84:11에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광체가 아니라 해가 힘 있게 비치는 것 같다고 한 것은 우리에게 그렇게 하여 주시길 원하신다는 메시지입니다. 그만큼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이 악하고 험해서 마음은 늘 찌들고 밝을 날이 없지만 낙심하지 말고 주님을 붙들면 주님께서 더 밝은 빛으로 힘 있게 비추셔서 해와 같이 밝게 살게 하십니다.

우리 주님의 모습에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그 바라심 그리고 우리에게 주실 은혜가 가득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더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더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과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열 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우리 주님의 온전케 하시는 은혜를 모두 받아서 온전함을 누리고 또 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계시록은 살리는 복음 (계 1:17-20)

17.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18.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19.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20.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최고의 사랑은 죄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복음인 것은 죽은 심령을 살리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도 해석하면 복음이기에 죽은 자를 살리는 복음인 것을 본문에서 보여줍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영광에 압도되어 죽은 자 같이 된 요한을 살려주신 것은 사실을 넘어 이 사건을 계기로 죽은 자도 살리시는 분이신 것을 계시하고 있습니다(17-18절). 그러면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19절)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은 살리는 복음입니다.

 

살리는 복음의 전달자가 되려면

1. 살리는 복음을 체험해야 합니다.

7절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영광의 예수님을 본 요한은 그 앞에서 거의 죽은 자와 같이 되고 맙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압도적인 영광 앞에서 모두가 거꾸러지며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출33:20, 단8:17, 27:10, 마17:6, 행26:14). 이러한 요한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려 주셨습니다.

바울이 복음전도자가 된 것도 예수를 만나 복음 안에서 살리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고전15:1-2에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했습니다.

황해도 안악의 유명한 깡패 김익두와 같이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김익두는 스왈렌 선교사의 전도로 예수를 믿고 세례 받기 전에 부부 분방하고 매일같이 냉수 목욕하고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세례 받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선교사 순방이 1년이 늦어져 선교사의 순방을 기다리며 성경을 100독했는데 얼마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깊이 묵상했는지 모릅니다. 그는 항상 “예수 십자가 고난을 상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고 하면서 울어 김익두 목사의 집회는 항상 모두가 함께 우는 눈물의 집회였습니다.

2. 예수님이 살리는 복음이십니다.

17-18절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여기서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이 말씀은 한 번 죽었지만 이제는 또 다시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뿐 아니라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사 살리는 일을 하십니다. 사망과 음부는 비슷한 동의어로 봅니다. 음부가 무덤 외에도 지옥을 가리키지만 예수님께서 지옥의 문을 열고 꺼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즉 하나님을 떠나 죄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죽어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걸 보여주시기 위해 나인성의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고,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으며, 죽은 지 나흘이 된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 살리셨습니다. 지금도 불신앙으로 죽은 심령을 살려내시고 재림하실 때 주님을 믿고 사랑하는 성도들을 온전히 살려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망과 음부의 열쇠는 예수 복음입니다.

3. 요한계시록도 살리는 복음입니다.

19-20절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앞에서 살리시는 예수님을 소개하신 후에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고 하심은 요한계시록이 죽은 자를 살리는 복음임을 시사합니다. 이 말씀이 본문에서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입니다.

4. 계시록은 해석이 필요한 말씀입니다.

학자들은 19절의 “네가 본 것”은 1장의 과거적 사건을, “지금 있는 일”은 아시아 일곱 교회의 사건을, 그리고 “장차 될 일”은 4장 이하의 사건으로 봅니다. 그러나 20절을 보세요.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즉 일곱 별과 일곱 촛대가 무엇인지 해석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계시록 해석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계시록을 문자적으로 봐야 할 부분도 있지만 대부분은 상징과 비유이므로 그것이 무엇인지 해석해야 합니다. 계시록은 해석이 필요한 책입니다. 성경과 정통교리의 틀을 떠나지 마시기 바랍니다. 계시록은 성경에 쓰인 힌트와 비유와 상징을 동원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여러 영적인 교훈을 말씀하는 신령한 교과서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에 대한 풍부한 지식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예수님과 성경 기자들의 관점을 가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광야의 놋뱀과 광야의 만나가 바로 자기를 가리킴이라 하셨고, 바울도 홍해 사건을 중생의 사건으로 보고 반석은 그리스도라 하였습니다. 이사야도 미디안 전쟁의 배경을 들어 예수 탄생을 말씀했는데(사9:5), 이 사건은 중생의 비밀에 적용해도 되는 말씀입니다(요1:13).

고후3:14-16에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성경을 예수로 해석하면 덮인 성경이 열리고 보인다는 말씀입니다. 계시록에서 다른 복음이나 이단의 교주가 보이면 안 됩니다. 비약의 알레고리는 배척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쓰는 거룩한 알레고리가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알레고리 민족입니다. 알레고리는 그들의 삶에 깊이 뿌리내려 그들의 일상이요, 의식구조 그 자체였습니다. 그들은 숫자 하나까지도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성경 기자들의 관점을 가지고 성경을 접근하시기 바랍니다.

5. 그리스도가 비전입니다.

19절 하반 절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장차 될 일은 문맥상으로는 계시록 4장 이하의 사건으로 봅니다. 그 내용을 배우겠지만 한 마디로 요약하면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과 그리스도의 신부로 키우는 비전입니다. 말씀과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종들의 공통비전이요 우리 모두의 비전입니다.

그래서 갈4:19에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고 했고, 엡4:13-15에서는 “우리가 다 -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고후11:2에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했습니다.

계시록은 단순히 역사 속에 전개될 미래 역사의 서술이 아닙니다. 성경이 복음이요, 계시록이 살리는 복음입니다. 진정한 복음의 전달자가 되려면 계시록을 포함한 성경 속에 영혼을 살리는 사망과 음부의 열쇠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복음을 알고 복음을 체험하고 복음을 전하여 죽은 영혼을 살리고 그 영혼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양육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계시록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1. 요한 계시록의 계시자(1:1)
2. 충성된 증인(1:2)
3. 땅의 임금들의 머리(1:2)
4.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신 이(1:5)
5.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이(1:6)
6. 알파와 오메가이신 분(1:8)
7.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1:8)
8. 전능한 자(1:8)
9.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1:13)
10. 처음이요 나중이신 분(1:17)

11. 세세토록 살아 계신 분(1:18)
12. 죽었다가 살아 나신 이(2:8)
13.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2:12)
14.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2:18)
15.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2:23)
16.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3:1)
17.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3:7)
18. 아멘이신 분(3:14)
19. 충성되고 참된 증인(3:14)
20.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3:14)

21.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4:2)
22. 유대 지파의 사자(5:5)
23. 다윗의 뿌리(5:5)
24.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는 어린양(5:6)
25.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5:12)
26. 진노하시는 어린양(6:16)
27.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7:17)
28. 시온산에 서신 어린양(14:1)
29. 성전이 되신 어린양(21:22)
30. 성전 등잔이 되신 어린양(21:23)

31. 큰 환난에서 나오는 이들의 목자(7:17)
32.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12:5)
33. 사람의 아들과 같은 이(14:14)
34. 만주의 주(17:14)
35. 만왕의 왕(17:14)
36. 백마와 탄 자(19:11)
37. 충신과 진실(19:11)
38. 자기밖에 아는 자 없는 이름을 가지신 분(19:12)
39. 하나님의 말씀(19:13)
40. 흰 보좌 위에 앉으신 자(20:11)

41. 이기는 자의 하나님(21:7)
42. 광명한 새벽 별(22:16)
43. 시작과 끝이신 분(22:13)
44. 요한계시록을 증거하신 이(22:20)
45. 진실로 속히 오실 분(22:20)

 

※ 요한계시록의 숫자 이해

요한계시록에는 약 200개 정도의 숫자가 나오는데 대개는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1 - 분열되지 아니한 온전한 수이며, 절대를 상징한다(17:13,17). 그리하여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이 되신다.

1/2 - 1의 파열된 수로서 불안정과 일시성을 나타낸다. 8:1절의 "반시"는 문자적은 30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긴장된 한 순간을 가리킨다.

1/3 - 1의 파열된 수, 혹은 완전수 3의 일부분으로 불완전수다. 요한계시록에서는 특히 나팔재앙의 피해를 나타내는데 사용되어 있다(8:7-12, 9:11).

1/4 - 1의 파열된 수, 땅의 수 4의 일부분으로 불완수다(6:8).

2 - 증인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수이다(11:3,4, 신17:6,19:15). 예수께서 제자 파송때 둘씩 짝을 지어 보내심, 변모 때에 모세와 엘리야의 나타남, 빈 무덤에서의 두 천사, 승천할 때의 두 천사 등은 이를 암시한다.

3 - 하나님의 완전수를 암시한다(9:18, 16:13,19, 21:13).

3.5 - 요한계시록에서 '삼일 반'(11:9,11) "한 때, 두 때, 반 때"(12:14)로 나타나며, 한이레의 절반 즉 7 완전수의 파열, 불안정한 때, 짧은 기간을 말한다. 이 숫자가 문자적일 수 없음은 저자가 이를 42개월(11:2, 13:5), 1260일(11:3, 12:6)과 동일시하고 있기 때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상징하는 숫자이다.

4 - 땅의 수, 가시적인 피조물을 상징하는데 쓰였다. 네 생물(4:6), 땅의 네 모퉁이, 땅의 사방의 바람(7:1), 네 천사(7:2), 네 뿔(9:13), 사방(20:8) 등...

5 - 세상의 만수인 10의 절반으로 10의 파열은 제한된 재앙의 기간을 나타내기도 하고, 10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계2:10) 했듯 환난수의 중간으로 고통을 상징하기도 한다. 예수님께서 고난의 상처의 수이기도 하다.

6 - 완전수 7에 하나 부족한 수로서 불완전을 상징함과 동시에, 6은 천지창조 시 인간을 지으시고 동물의 육을 지으신 날로 세상적이고 육신적이고 정욕적인 의미를 상징한다.

7 - 하나님 사역의 완전수로서 일곱 영(1:4), 일곱 등불(4:5), 일곱 뿔, 일곱 눈(4:6), 일곱 무리(10:4), 일곱 머리(12:3), 일곱 면류관(12:3),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등 7은 3+4, 즉 천지 합수로서 신적인 세계의 한 세트 혹은 한 싸이클이다.

8 - 일곱을 한 '싸이클'로 볼 때, 여덟은 다음 사이클의 첫 수이므로, 이는 새로운 국면의 시작을 의미한다. 17:1절의 "여덟째 왕"은 문자적인 "여덟째 왕"이 아니라 새로운 국면의 박해를 시작하는 왕임을 나타낸다.

10 - 세상의 만수로서, 열흘 동안의 환난(2:10), 열 뿔(12:3, 13:1, 17:7), 열 면류관(17:3), 열 왕(17:12) 등 제한된 그러나 충분함을 상징한다.

12 - 천지 승수로서(3*4=12) 완전수요, 12지파 12사도가 의미하듯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는 숫자요, 선택의 수이기도 하다. "열두 별"(12:1), 열두 문, 열두 천사(12:12), 열두 기초석, 열두 사도, 열두 사도 , 열두 이름(21:14), 열두 문, 열두 진주(21:21), 열두 실과(22:2) 등 하나님 백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24 - 12+12로서 신구약의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나타내는 완전수이다. 이십사 보좌(4:4), 이십사 장로(4:10, 5:8, 11:16 등).

144 - 12*12로서 21:17에서는 새 예루살렘의 둘레인 성곽의 높이로서, 144규빗은 신구약 성도들과 같은 믿음이어야 함을 보여준다. 즉 진리의 초석을 놓은 12사도처럼 우리가 진리에 견고히 서는 성곽이어야 하며, 하나님 언약의 백성 12지파처럼 하나님을 저버리지 않고 끝까지 붙드는 완전한 믿음이어야 함을 상징한다.

666 - 여러 설이 있지만 모든 악의 총체를 상징한다는 것이 다수 학자들의 견해다. 즉 사람의 수, 짐승의 수라고 했듯(13:18) 창조하실 때 보여주셨듯 6은 세상이나 육신 짐승 등을 가리키는 수이다. 666은 6이 3번 거듭된 수로서 나름대로는 하나님의 완전수 3을 모방하는 행위로서 모든 악의 총체를 상징하는 수입니다.

1,000 - 만수요 충족수인 10의 3자승한 수로 충분 충만한 기간을 상징한다(20:2, 4, 7).

144,000 - 능히 아무라도 셀 수없는 큰 무리(7:9)라고 한 것처럼 12*12*1,000는 신구약의 구원받은 자의 충만수를 상징한다(7:4,14:1). 저자는 이를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해석한다.

이만만(2억) - 2*10,000*10,000 계산인데 2는 증인이나 증거의 수요, 10.000은 무한충만수로서 무한충만한 증거 즉 성령의 부흥이 임하시면 아무도 막지 못할 강력한 복음의 증거가 일어날 것을 시사한 것이다.

만만 천천 - 무한충만수의 제곱, 제한충만수 1.000의 제곱이니 명확하게 제도화되어 있으면서도 그 수효에 있어서는 셀 수 없는 다수를 상징한다(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