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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기독교와 제사

에반젤(복음) 2021. 9. 13. 12:48

        

 

 기독교와 제사

 

 

I. 제사와 현대문화

 

자료 근거 : http//www.webblow.kornet.net

 

1. 역사로 본 제사

 

(1) 중국의 공자이전 夏나라와 商나라 때 제사를 지낸 기록이 있음 : 부모에게 드린 것 아니고, 뛰어난  황제에게 지냄. 이유는 황제가 위대하기에. 예를 들면 야호순이란 한나라임금은 부친이나 조부에게가  아니라, 요임금이 훌륭했기에게 그에게 제사 지냄.

 

(2) 그 후에 변질됨 : 훌륭한 임금에게만 제자지낸 것에서 자기조상들이 훌륭한 것을 내세우기 위해 제사드림 : 자기위치가 더 든든해지기 위한 방편이 됨.

 

   초기-왕실에서 황제들만 제사지냄. 그 다음은 제후들도 제사지냄. 그 다음은 재상들도 제사지냄. 춘추 전국시대에 이르러 왕의 허락없이 평민도 제사지내기 시작함.

 

(3) 제사의 이론적인 뒷받침 : 송나라 주희(주자)가 유,불,도교의 영향받은 유교철학 (우리나라에서는  '성리학'이라 불림)을 마듬. 처음으로 조상에게 반드시 제사를 지내야한다고 강조했는데, 하나의 철학으로까지 발달함.

 

(4) 우리나라 경우 :

 

가. 삼국시대나 고려시대는 특수왕에게만 제사지냄. 당시는 불교가 성행했던 때는 조상에게 제사지내지 않음. 절에가서 제사지낸 것은 불교와 무속이 혼합하여 후대에 생긴 것임.

 

나. 13세기말 고려말 성리학 영향으로 사람들이 사당을 짓기 시작함(위패나 신주를 모시고 제사드리는 곳). 이때도 훌륭한 사람들만에게 사당지음.

 

다. 조선시대: 나라 종교를 성리학으로 하자 조상의 제사를태조가 장려함. 평민들은 조정에서 장려하는 것에 별 관심이 없었음. 그러나 후에 점점 성행함.

 

제사를 장려한 이유 : 교육적 목적, 곧, 아주 덕이 있는 사람들에게 제사지냈으므로, 너희들도 덕이 있는 사람이 되어 제사를 받도록 노력하라는 것

제사의 대상

주나라 때 : 종손을 앉혀놓고 제사드림(영혼의 대변자)  

 

우리나라 : 사람의 영정,사람의 그림놓고, 그 다음은 나무토막에 이름써서 신주라는 것(이후에  위패란 이름으로 바뀜)을 만들고서, 그 다음은 지방이라는 것을 만들어 하루만 쓰고 태워버림. 顯考處士府君神位이란 내용으로 쓴다.

 

 

제사의 폐단:

* 국모가 죽은후, 喪服기간이 발단이 되어, 싸움. 사원(교육과 제사의 기능)을 중심으로 싸움- 대원군이 사원을 정리함

 

* 한자적인 뜻 : 사대주의 사상내재됨 중국 갑골문자에서 제일 많이 나오는 글자가 보일 示  이것은 종가할 때나 제사하다의 祭에 나온다. 뜻은 상에 다리가 있고, 그 위에 음식을 놓았다는 것으로 제사상을 뜻한다. 그러므로 조상이나 제사라는 말하고 관련있다. 그러므로 ' 제사 안 지내는 놈은 상놈이다'. '양반은 되놈(중국놈)이다'라는 사대주의사상이 숨어있는 것이다.

 

라. 조선시대 많은 유학자중 기독교인이 된 이유 : 유교가 우리의 풍속이 아닌 것을 절실히 깨달았기에.

 

마. 결론 : 제사가 한국의 것이 아니라 중국의 풍속이다. 13세기 억지로 왕가에서 강요해서 생긴 풍속이다. 유교에서 온 풍속이 정착된 것임.  

2. 철학으로 본 제사

 

시간에는 , 순환적 시간관(시간은 돈다, 과거지향적)와 직선적 시간관(시간은 바로간다, 미래지향적)이 있다.

 

(1) 유교는 순환적인 역사관(시간관)을 가졌다. 순환적 역사관의 예는 1998년이 십간십이지로 무인(戊寅)년이라고 쓰는데, 61세때 환갑이라하여 한평생을 살았고, 이제는 새 한평생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요즘 1998년이라고 쓰는 것은 시간관이 그동안 바뀐 것을 의미한다. 조선이 하늘을 반역하고 임금을 반역한 것은 예전 중국에서 왕조가 500년마다 바뀐다는 생각에서 영향받은 것이다.

 

(2) 유교는 과거지향적 사관이다. 공자는 아무 새것도 말하지 않는다. 요, 순임금이 가장 위대한 왕이라하여, 그들뿐 아니라 과거의 성현이 말해놓은 것을 말할 뿐이다고 말한다.

 

- 폐단 : 가장 쉽고 과학적인 문자를 만든 세종에게 최만리가 상소를 올려 眞書의 말을 놓고 동이족인 조그만 나라에서 글자를 바꾼 것은 안된다고 올려서 근 500년간 천한사람들만 사용됨.정약용같은 실학자들은 천주교 영향받아 이 사관을 고치려 제사제도를 거절하였다.

 

- 조상숭배를 왜 하느냐? 조상이 위대했기 때문이고, 더 위대한 이유는 그들이 옛날 사람이라는 것이다.  

 

3. 자연주의적 세계관에서 본 제사

 

그런데 제사는 자연주의 세계관에 근거한다. 만물이 하늘에서 나오고 인간들은 조상으로부터 나왔으므로, 조상에게 제물을 드려 보응하는 것은 인간의 본심에 마땅하다고 믿는다.  자연주의 종교는 사람이 자연에만 순응하면 구원받는다고 믿는다. 기독교는 자연주의 종교가 아니라 계시의 종교이다. 반자연주의종교다. 인간 스스로 놓아두면, 구원의 길을 깨달을 수 없다.  

 

4. 계급주의에서 본 제사

 

제사는 계급사회를 반영한다. 원래는 왕, 제후, 충신이나 그런 훌륭한 부류에게만 제사를 지내게 했다. "제사를 지내야만 궁중의 위대한 신하가 나온다"고 믿었다. 주나라때는 황제는 7개, 큰 제후는 5개, 작은 제후는 3, 재상들은 2, 관원과 스승은 한 개의 사당을 갖고 그곳에서 제사를 지내고, 평민들은 무덤에 가서 제사지내게 했다. 춘추전국시대에 와서 이 질서가 깨지고, 제사가 일반화됨 : 제사나 족보는 계급 사회를 반영하며, 족보도 양반자랑과 관계있다. 이것은 기독교의 평등주의와 조화 안된다.  

 

5. 문화의 변천과 제사

 

(1) 신주 : 한자로 써야지 한글로 쓰면 조상에 대한 모독, 귀신들은 한글을 못읽는다.

 

(2) 생활형태의 변화

 

그릇이나 床에 격식을 안차리고, 빌려서 제사드리는 것은 제사에 대한 관심과 의미가 사라짐을 뜻한다. 대개 열심히 제사지내는 사람가운데는 부모에게 생전에 대단히 고생을 많이 시켰기에, 죄의식에 사로잡혀 제사지내려는 사람이 많다. 기독교인은 부모 생전에 잘 섬겨야 한다. 우리 친족에게 보여 주어서 우리를 욕 안하게 해야한다.

 

 

 

II. 제사에 대한 성경적 견해

 

 

1. 예배의 대상은 누구인가?

 

제사를 조상숭배라 한다면 하나님만이 예배의 대상이라는 성경가르침에 위배된다. 우리는 특정한 기간동안 제한된 조상들에게만 제사드리고 있다. 증조부까지 제사드린다면, 그 이상의 조상들은 구천을 떠돌며 제사지내지 않을 경우, 배고파 고생을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십계명의 1, 2계명 을 생각하자. 영원토록 주되신 하나님께만 예배드려야한다.

 

 

2. 사후인간 영혼은 어떻게 되는가?

 

(1) 영혼의 기원

 

가. 先在說(선재설) : 영혼을 맣이 만들어놓으시고, 육신이 나올 때마다 하나씩 집어넣어준다는 것

 

나. 靈魂轉移說(영혼전이설) : 루터파의 주장. 부모로부터 육신을 물려받듯이 인간부모에게서 육신이 나올 때마다  하나님이 영혼을 부모로부터 전수시켜 주신다. 예수님이 무죄성이 문제가 되기에 배격함.

 

다. 창조설 : 개혁주의자들이 주장. 하나님이 직접 영혼을 하나 하나 창조하시며, 창조의 시기는 모른다는 것.

 

 

(2) 사후영혼은 어떻게 되는가?

 

가. 죽음 후 영과 육이 분리되었을 때, 영혼은 어떤 상태인가? 육체는 티끌로 돌아가고, 영혼은 죽지 않는 생을 가지며, 즉시로 영혼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의로운 자의 영혼이 완전히 거룩하게 되어 빛과 영광가운데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며, 그들의 육신이  완전히 구속되기를 기다린다(눅23:43-낙원에   있으리라, 고후5:8-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빌1:23,24-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니,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니라). 구원받지 못한 자의 영혼은 지옥에 던져져 고통과 어두움 가운데서 심판의 날을 기다리게 된다 (눅16:23,24-거지 나사로와 부자, 행1:25 -유다는 제 곳으로 갔나이다, 유다서 6,7-소돔, 고모라는 영원한 불이 형벌을 받았느리라, 벧전 3:19-옥에 있는 영혼에게 전파하였다).

 

나. 산자와 죽은 자의 대화는 가능한가? 눅16에 의하면 산자와 죽은 자의 대화는 두절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III. 제사에 대한 역사적 이해

 

 

1. 효도개념의 변천

 

효는 천명을 따르는 윤리의 기초이며, 천인합일에 도달하는 길이고, 효는 대가족제도의 통일과 조화를 유지하는 사회적 원리이고, 국가의 안정을 이루는 정치원리였다. 후에 여기에다가 종교적 요소도 가미되었다. 원래 공자는 영혼불멸이나 사후세계에 대해 별로 안가르쳤는데, 유교전통이 일반 토속신앙의 영향을 받으면서, 종교적인 요소를 포함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종교적 신앙으로 변질되었다. 후손이 제사지내면 조상의 혼백이 나무로 된 신주를 하나의 거처로 삼아 사후에도 얼마간 안정된 삶을 유지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명백한 미신이다. 제사를 지내는 것은 하늘의 뜻에 맞기에 제사지낼 때 하늘의 복을 받게된다는 생각이 생기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죽은 조상들이 직접 복을 주는 하늘의 신의 자리를 대치하게 되었다.

 

 2. 천주교의 전래

 

(1) 처음에는 제사반대 : 1784년 북경사절단원 이승훈이 세례받고 귀국하여 친구 이덕조에게 세례를 준 것이 조선의 천주교 원년이 된다. 처음 천주교회는 유교의 제사에 대해 비판적 입장 취함. 신자들이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거부하자, 전라도의 윤지충, 권상연등이 순교당하는 신해박해 사건이 1791년에 발생함.

 

(2) 새로운 정책 : 제사를 허용함

 

가. 1939년 로마교황청이 새로운 입장표명함 : 일본과 이태리가 동맹을 맺음. 신사참배나 조상숭배의식은 종교의미가 아니라 시민적 의식(civil rite)이라고 교황 피우스12세가 교서를 내림. 그 이후 제사가 허용됨. 그동안 80년동안 제자문제로 순교자가 만명이 발생함. 이것이 헛된 죽음인가?

 

나. 연옥사상 때문에 제사를 허용함 : 죽은 조상을 위해 제사지내는 것을 합리화함.

 

 

 

3. 개신교의 전래

 

(1) 처음부터 제사를 거부함. 1883년 서상윤이 만주에서 세례받고돌아옴 .1891 -1897년까지 세례자의 서약 일곱가지중에 제사를 거부하는 약속을 하게 함 : 처음부터 어려운 결단을 하고 세례를 받음

 

 

 

IV. 별세한 조상에 대한 실천적 이해

 

 

제사의 의미는 죽은 자에 대한 신앙이요, 결과적으로 예배가 된다.

 

1. 별세한 조상에 대한 의례원칙

 

별세한 조상에 대한 예우는 임종부터 시작된다.

 

(1) 성경은 별세자에 대한 교훈이 없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살아있는 자에 한하여 인격적 예우를 하게 되있다.

(2) 각자 처한 상황에 따라 처리할 수 있는 융통성이 있다.

(3) 이교적인 것은 일단 배제해야 한다 : 향 피우는 것, 풍수지리에 입각한 묘쓰기, 요란한 상복

(4) 우상을 섬기는 요소가 있으면 배격해야한다 : 죽은 자에 대한 숭배

(5) 다른 종교에서 하는 것을 기독교적인 것과 꼭 대치시킬 필요는 없다.

(6) 양심에 고통을 주지 않는 범위에서 해야한다.

(7) 별세한 조상에 대해서는 禮遇(예우)와 追悼(추도)의 두 개념사이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8) 하나님께 영광, 우리에게 은혜가 되어야한다.

 

 

2. 실제적 문제

 

가. 가족 전체가 예수믿지 않을 때, 점차적으로 추도예배로 바꾸는 것보다 처음부터 선을 그어 추도식으로 하는 것이 좋을 수 있다.

 

나. 임종시에 기억할 것

 

- 찬송하면서 하나님 말씀을 들려주라. 청각이 육체기관중 마지막까지 남는다.

- 녹음해야 할 것있으면, 분명히 녹음해 두라.

- 입관과 장례식은 교회에 전적으로 일임하라.

 

다. 추도예배시 기억할 점

 

- 어떤 규정이 없기에 일반적으로 3년정도 추도예배드린후, 지속여부는 가족이 의논하라.

- 신앙이 잡힌 가정은 가장이 예배를 인도하라. 초신자 가정 경우, 교역자가 일주기 추도식을 인도하는 것이 좋다.

- 타협은 절대로 안된다. 진리와 양심은 굽혀서는 안된다. 처음에는 장애가 많지만, 결국은 승리한다.

 

예 : 전라도 지방의 완고한 집사님. 제사때 내려가야만 함. 제사준비는 열심. 절 안하고 무릎끓어 꼭 기도함. 형제들 생일 때마다 특별히 사랑으로 섬김. 즉 사랑에는 헌신하고 진리에는 고집함. 십년 세월 결과, 전 가문이 예수믿고 돌아옴.

 

 

V. 효도와 제사

 

 

1. 동양적 효의 개념 : 생전에 부모에게 뿐아니라 사후에도 제사를 잘 지내는 것이 효도라고 하여옴. 제사는 효의 연장이고, 확장된 표현으로 봄. 신령에게 제사하는 것은 효를 넘어선 신앙의 형태이다.

 

2. 효라는 것이 신주, 귀신을 모시는 것이 효와 연결이 되어있다는 점이 논쟁거리다.

 

 

 

제사를 반대하는 이유- 종합적 결론

 

 

- 철학적적으로 과거지향적인 순환론적 사고이다

 

- 역사적으로 원래 조상숭배는 없었고, 훌륭한 왕에게만 제사를 드릴 수있었다. 평민도 조상을 자랑하기 위해 제사 드릴 수 있도록 본질이 왜곡된 것이다.

 

- 계급차별적 의미가 있다. 선비만이 드릴 수 있는 것이었다. 기독교 정신에 역행한다.

 

- 왕권에 의해 교육적으로 강요된 것이다 : 제사를 받는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

 

- 후대에 생겨난 추가됨을 검토하자. 제사로서 돌아가신 부모를 잘 모시면 자손이 복을 받고, 재액이나 재앙을 막을 수 있다고 믿는 동기가 있다. 죽은 자(조상을 귀신으로 봄)를 대상으로 한 신앙이요(신앙적인 속성), 결과적으로 그들에게 예배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우상숭배가 되는 것이다-후기에 생겨남  이것은 십계명중 1계명(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2계명(어떤 모양으로도 우상을 섬기지 말라)에 어긋난다.

 

- 사후 인간영혼은 즉시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아니면, 영원히 지옥에서 버림받는다. 귀신이 되어 머무는 것이 아니다.

 

- 죽은 자를 인격체로 볼 수 없다. 죽은 자와의 관계에서는 덕, 효 등을 적용할 수 없다.

 

 

제사를 지낼 수 없는 이유

 

2월이면 우리 나라의 명절인 설날이 온다. 이 설날이 되면 많은 한국 가정들이 제사를 지낸다. 이 제사 문제로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이다.

사실 믿음이 굳건한 그리스도인들은 이 문제에 크게 어려움을 겪지 않지만, 믿지 않는 가족들은 무지와 완고함으로 인해, 또는 제사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올바르지 못한 지식으로 인해 적잖은 그리스도인들이 곤란을 당하고 있는 것을 본다. 그러므로 제사에 대한 바른 개념을 갖고 그에 따라 바르게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겠다.

 

1. 산 사람이 중요하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제사는 산 자를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를 기념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산 자가 더 중요한가 아니면 죽은 자가 더 중요한가?

말할 것도 없이 산 자이다. 그러나 세상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산 자를 중요하게 여기기보다는 죽은 자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때문에 제사 때가 되면 살아 생전 부모님께 해 드리지 않던 각종 음식들이 제사상에 오른다. 믿지 않는 사람들의 관점으로 제아무리 제사가 효도의 한 본이 된다고 해도 돌아가신 뒤에 제사 한 번 지내는 것보다는 제사상 차릴 돈으로 살아 계신 부모님께 보약 한 첩 지어 드리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살아 계신 부모님은 나를 항상 걱정해 주시고 매일 생각해 주시며 어떻게 해서든지 도와 주시려 한다.

 

그러나 죽은 부모님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성경은 부모를 공경하라고 누누히 강조하고 있지만 죽은 부모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우리 나라의 전통은 고대 중국의 왕족 제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고대 중국에서는 죽은 왕들에게만 제사를 지내고 기념했다. 그런데 춘추전국시대에 접어들면서 유교의 영향으로 모든 인간은 조상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조상숭배 사상이 보편화되었고, A.D. 1200년경 중국 송나라의 주자라는 사람이 제사의식을 체계화하였다. (이것을 체계화한 학문이 성리학이다.)

 

우리 나라는 성리학이 전래된 고려 말엽부터 함께 들어온 <주자가례, 朱子家禮>라는 책을 통해 조상 숭배 사상이 생겨났고, 이어서 이성계가 조선을 세울 때 성리학을 통치기반으로 삼음으로써 조상 제사는 보편화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왔다.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의 종교는 불교였기 때문에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우리 나라는 불교에서도 제사를 지내지만, 사실 정통적인 불교 국가들은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이 제사에 대한 문제에 봉착할 때마다 효도라는 우리 민족의 미풍양속을 왜 지키지 않느냐고 비난받곤 하는데, 제사가 곧 효도라면 조선시대 이전에는 효자가 한 사람도 없었단 말인가?

 

 

 

 

조상 제사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1. 우리 민족의 제사, 그 유래와 의미

 

어느 민족 어느 나라에서든지 선교의 가장 높은 장벽은 그 나라 그 민족 특유의 민족주의와 그 민족이 가지고 있는 '미신'이라고 한다. 선교는 언제나 피선교 민족의 토착언어와 토착문화의 옷을 입혀서 복음을 전함으로 가능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여기에는 상대적인 요소와 절대적인 요소가 있다. 서로 타협하며 변화시켜 나갈 수 있는 상대적 요소가 있는가 하면 절대로 굽힐 수 없고 타협할 수 없는 복음의 절대적 요소가 있다. 이 상대적인 것과 절대적인 것을 구분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여기에서 토착화와 혼합주의의 구별이 분명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처음 세워질 때에 선교정책을 세움에 있어서 바로 이 문제로 크게 부심한 것이 사실이다. 토착화를 위하여 토착적인 문화를 이해하며 이를 효과적 매개체로 고용하여 복음선교를 시행하였고 이일에 다분히 성공적이었다고 본다. 우리의 문화적 특수성을 십분 이해하고 문화적 장벽을 용이하게 넘어서면서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한국교회 초창기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장 어려운 벽이 둘 있는데 그 첫째가 조상숭배요, 둘째가 술과 담배 문제라고 생각된다. 이론상으로는 간단한 듯 보이나 목회일선에서 경험하는 대로 너무나 높고 두터운 벽이 여기에 있다.

 

"예수는 믿고 싶으나 조상제사 때문에 곤란하다." "나는 장손이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라는 핑계가 단순한 핑계가 아니다. 예나 오늘이나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미신을 버리며 조상에 대한 제사를 버리고 나서야 가능한 것이었다. 이것은 참으로 '위대한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지금까지 속해 있던 공동체로부터 이탈하는 혁명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신앙을 얻고 중생한 다음에 신앙적인 용기에 의해서 이를 실천한다면 또 별 문제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전통은 먼저 미신을 버리고 술․담배를 끊고 그리고 입교하는 풍속이다. 예수는 믿어도 좋겠으나 조상에 대한 불효자가 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리고 가장 큰 반발은 조상숭배를 미신으로 보려는 편견을 저들은 참을 수 없다는 것이다. 18세기 말엽에 천주교가 한국에 전래된 이래 조상숭배와 제사를 미신으로 여겨 이를 금지했기 때문에 이것을 정치문제화하여 1871년에 큰 핍박이 있었다. (신해교난, 辛亥敎難) 그 발단은 단순히 진산의 윤지충이란 천주교도가 조상의 신주를 불살라 버리고 제사를 지내지 아니했다는데서 생긴 것이었다. 오늘도 이 문제는 심각하다.

 

 

 

2. 우리 민족의 제사, 그 유래와 의미

 

어떤 의식이든 그 의식이 가지는 뜻이 본질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그 뜻을 표현하는 상징적 의식이 오랫동안 반복되면서 계속될 때 그 형식자체가 교리(Dogma)화 되면서 그 뜻은 망각하고 형식과 의식 자체만이 고집되고 소중히 여겨지게 되는 예가 허다하다. 사실상 우리의 관혼상제 의식도 이제는 그 유래와 본 뜻도 모르고 그 상징이 말하고 있는 소중한 내용은 잊혀진 채 형식만으로 시행되고 있는 면이 없지 않다.

 

역사적으로 이 관례․혼례․상례․제례 네 가지 의식은 우리의 전통적인 민속의식으로 소중히 지켜 왔고 이것이 없이는 사람이 사람구실을 못한다고 믿어 왔다. 그러나 그 뜻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어쩌면 생각하려 들지도 않고 그저 그대로 지키며 지키는 자체에 뜻이 있는 듯 생각하기까지 하고 있는 형편으로 본다.

 

서양의 관혼상제 예속(禮俗)은 주로 기독교적 종교의식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일본은 불교의식에 그리고 중국은 유교의식에 그 근거를 두고 발전해 왔다고 본다. 한국 예속은 그 뿌리와 변천과정이 아주 복잡하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한국인의 예속은 그 저변에는 주술적인 무속신앙이 깔려 있고 지금까지도 그 맥락이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이 때문에 지극히 상징적이고 미신적 색체를 짙게 풍기는 무속적 상징이 그 형식과 내용이 되어 있다. 그러던 것이 풍수설(風水說)과 불교사상․유교사상 등이 전래되면서 그것들이 예속의 형식적인 면을 역사적으로 지배하게 된 것이다.

 

고조선(古朝鮮)의 원시 종교였던 무교(巫敎)에는 제사풍속이 없었다. 무속에서는 오히려 천신(天神)을 숭배하는 제천의 풍속이 있을 뿐이었다. 여러가지 신을 섬기는 풍속으로 천신을 숭배하는 자연종교 형태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무속화란 민속신앙과 유교의 조상숭배 사상이 결합해서 생긴 것이 조상에 대한 제사풍속으로 발전되었다고 생각된다. 고대 조선시대에 우리 민족이 조상을 숭배해서 제사했다는 풍습을 전하는 기록은 없다고 전문가들은 말하고 있다. 조상에 제사 드리는 풍속은 무속적인 천신제사의 민속에 유교적 사상이 합쳐져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이조 500년 동안에 우리 고유의 민속의례가 유교의 조상숭배 형식의 틀에 갇혀서 지나온 셈이다. 유교는 봉건적이며 또 귀족적인 종교인 것이 사실이다. 결국은 상류층에서나 시행할 수 있는 조상숭배 의식이 지켜지는 동안 이 계층에는 허례허식으로 지나친 형식주의에 빠져드는 문제를 낳았고 반면에 일반 서민층에서는 이 형식에 매여서 순수한 내용과 의미조차 모르고 미신적인 예속만 되풀이해 온 셈이다. 불교는 이 조상숭배 의식에 약간의 영향을 준바 있으나 극락 사상을 제하고는 결정적인 영향을 준바 없다고 보여진다.

 

고대로부터 우리 민족은 무속신앙에 근거하여 인간의 영혼은 불멸하는 것으로 믿어 왔다. 이 신앙이 제사의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뿌리가 된다. 시체를 매장할 때 여러가지 격식을 갖추려는 것은 죽은 영혼이 그 시체에 있든지 또는 배회하고 있으며 다시 돌아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같이 민속신앙에 근거하여 조상숭배 사상과 결합할 때에 죽은 조상의 혼이 다시 찾아와 차려 놓은 제물을 먹는다는 신앙으로 발전하게 되고 이 때문에 지금도 제례를 계속하게 되는 것이다.

 

그 깊은 뜻은 간단히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미 죽은 조상의 혼이 배회하기도 하고 또 어떤 지정된 안식소에 가 있지만 때때로 자손들을 찾아오며 특히 죽은 장소와 그가 살던 곳에 찾아오고 그 혼들이 끊임없이 자손들의 예배와 공양을 받는 것을 행복으로 생각하고 동시에 이처럼 극진한 공양을 받는 조상의 혼은 그 자손을 가호한다고 믿는 것이다.

 

이 민속신앙이 발전하며 또 세속화될 때에 죽은 조상의 혼의 가호를 받고자 하는 자기 중심적 욕망이 우선되고 심지어는 이 자손들의 액운과 재해를 막아 주고 또 큰복을 내려 준다고 기복 사상에까지 내려가게 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살아 있는 늙은 부모는 자손을 돕지 못하고 죽은 부모의 혼백은 자손에게 복을 줄 수 있다는 엉뚱한 말도 나오게 되고 살아 계신 부모에게 등한하고 죽은 후에 극진한 제사를 드리는 크나큰 불효한 제사의식도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즉 미신적인 뿌리에 유교적인 옷을 입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본래 제사란 죽은 이를 계속 공양함으로써 효를 계속 이어나가는 추양계효(追養繼孝)행위이지만 이것이 무속신앙과 결합하여 미신적 제사풍속이 되어 버렸다.

 

 

3. 성서적 비판

 

앞으로 말한 바와 같이 조상제사의 그 사상적 근거가 무속신앙에 있는 고로 다시 비판할 여지가 없다고 보여진다. 기독교의 효도는 십계명에 명시되어 있으며 그 뜻의 신학적 의미가 큰 것이다.

 

먼저는 죽은 조상의 혼이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 누구의 혼도 종교적 대상이 될 수 없다는 확실한 신앙 위에서 효도를 이해해야 한다. 오직 하나님만 섬기는 것이 성서적 신앙이다. 어떤 성자나 위인도 물론 자신의 조상도 숭배의 대상이 되지못하며 하물며 죽은 자의 혼을 예배함은 용납될 수 없다. 효도와 예배는 다르며 추모와 제사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죽은 자의 혼백이 배회한다던가 다시 찾아와서 제사의 공양을 받는다는 생각은 전적으로 무속신앙이며 또 무근한 미신이다. 영혼의 주인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죽는 순간 그 영은 그 시체에서 떠나며 자의로 다시 찾아오고 가는 것이 아니다. 이같은 개념은 창조주 하나님을 모르는 어리석음이 혼백만 생각한 나머지 원시적 신앙 안에서 추리한 것이다. 원시신앙에서는 꿈과 현실을 혼돈한다. 꿈에 나타난 조상이 바로 그 조상의 혼이라고 착각한다. 이같이 원시신앙적 착각이 혼백숭배 제사에는 윤리적 도덕적 요소가 없다. 사랑과 용서, 의와 진리 그리고 사회적 요소를 찾지 못한다. 단번에 번영과 풍요를 보증해 주는 세속적 욕구와 사행심이 밑에 깔려 있고 다분히 기복적인 신앙에 매여 있는 것을 본다. 그 제사의 궁극목적이 자기자신의 부귀영화에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효의 본 뜻에서 멀어진 것이다. 효의 본뜻을 상실한 제례가 아무 뜻도 없는 것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효도의 본 뜻으로 돌아가서 새 의미를 찾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그 제사형식에 있어서 음식을 준비하고 수저를 꽂아 놓는다던가 술을 부어 드리는 일 등은 그 자체가 미신적 의식이라고 보여진다. 의식은 상징적인 것이다. 그 상징이 미신적인 상징언어에서 빌어 왔을 때 마침내 그 뜻까지도 미신화 되어 버릴 가능성이 있다. 조상에 대한 효도가 미신적으로 표현될 때 그 귀한 뜻까지 변질되어 버리며 끝내는 그 의식만 고집스럽게 되풀이되고 그 타성에 매여서 본 뜻에로 돌아갈 수 없는 허례허식의 노예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 제례를 다시 비무속화(非巫俗化)해야 할 시점에 있다고 본다. 성서적 효의 개념으로 돌아가서 주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는 신앙적인 효도가 시행되어야 할 것이다.

 

겸하여 성경에 나타나고 있는 제사의 뜻을 간단히 설명하여서 제례를 이해함에 도움을 드리고자 한다. 성경에는 아벨의 제사를 시작으로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 믿음의 조상들이 모두 하나님께 제사 드렸다. 여기서 분명히 할 것은 '하나님께' 제사 드렸다는 점이다. '살아계신' 하나님께 제사 드렸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거룩한 만남을 뜻하는 것이다. 여러가지 제사가 있으나 대표적인 것은 속죄제사였다. 그 제사들은 피를 흘려서 뿌리서 드렸고 제물을 온전히 불살라 드렸다.

 

이 제사는 하나님께 드리는 뇌물이 아니었다. 이 제사로 하나님의 진노를 막고 이 제사를 드려서 큰 복을 받아 내자는 것이 전혀 아니었다. 이 때문에 마음과 정성을 다하지 못한 제사는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산 것을 성경 여러 곳에서 읽을 수 있다(이사야 1장). 하나님은 부정한 제물을 다시는 가져오지 말라고 책망하셨다.

 

그런고로 성경의 제사는 마음과 뜻을 회개와 함께 하나님께 드리는 예식이었다.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가 곧 제사로 나타난 것이다. 여기에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는 회개, 겸손, 의와 화해 그리고 거룩함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긍휼과 사랑이 우선되는 제사이어야 한다.

 

더욱 귀중한 신학적인 의미는 이 제사들은 계시적이요 예표적이라는 점이다.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 인간들을 그의 자녀로 만나 주시며 영접해 주심에는 그 자신에 지불되는 엄청난 희생이 있다. 이 하나님 자신이 지불하시는 희생을 제물 위에서 계시하고 계신 것이다. 생명을 죽여서 하나님께 나아간다. 이 '죽음'의 관계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공의로운 사랑이 구체적으로 상징화되어 계시된 것이 제사이며 제물이다. 따라서 결정적인 제사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인 것이다. 십자가의 희생 안에서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사랑하시며 그 사랑을 확증하여 주셨다. 그 역사적인 예표가 곧 제사인 것이다. (히브리서 참조)

 

 

이제 우리는 효의 의미를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발견하고 밝고 새로운 생생한 방법으로 효의 방법을 찾아 나아가야 할 것이다. 모르고 어두워서 그리했던 제례를 통한 조상숭배의 예식에서 깨어나서 본 뜻에로 돌아가며 성서적 효도의 바른 지표를 찾아서 새로운 효도의 풍습을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기독교는 가장 높은 뜻의 효도를 강조하는 종교이다. 오히려 기독교인이 됨으로써 진정한 뜻에서 효자가 될 수 있음을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이다. 주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는 일이 새롭게 우리의 윤리강령이 되어 밝고 은혜로운 가정들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제사, 과연 성경적인가

 

 

1. 제사의 기원

 

본래 인간은 하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그 피조물로서의 한계를 일찍부터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 한계란 바로 자기의 정체를 자신이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 바로 종교(기독교를 제외한 이방종교)이며 제사의식이다.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아주 일찍부터,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인간과 제사는 떼어놓을래야 떼어놓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데, 이 종교와 제사의식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존재의 한계에서 오는 불안과 공포로부터 해방되기를 원했으며, 또한 어떤 절대자에게 의지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을 보면 인간이 종교와 제사의식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인간을 찾아오셔서 제사의식을 가르쳐주신 것으로 되어 있다. 타락한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그 죄를 일시적으로 용서받는 방편으로 제사의식을 가르쳐주셨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창3:9, 3:21).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제사의 기원을 인간 편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찾아야 마땅하다.

 

그러면 이 제사는 우리가 행해도 괜찮다는 말인가? 그것은 아니다. 기독교에서도 이 제사라는 형식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 구약시대에만 있었던 것이요, 또 그 당시에도 오늘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러한 제사와는 그 내용과 형식이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2. 한민족의 제사의 변천

 

천신숭배 제사

 

본래 한민족은 유일신인 천신(하늘신)을 숭배해왔다. 고조선의 개국설화도 천신숭배 사상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단군신화의 '환인'은 '하늘님'이며 또한 '하나님'이다.). 고조선의 종교와 사회를 연구한 윤내현 교수는 그의 논문 『고조선의 종교와 그 사상』(1993, 『동양학』제 23집, 단국대학교)에서 고조선 사회는 유일신 '하나님'을 숭배하고 제사하던 사회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고조선의 천신숭배 사상은 이어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 등의 제사의식으로 발전하였으며 오래 동안 한반도에서 지속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천신숭배 사상은 한반도 뿐 아니라 지구상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발견되는 기본적인 제사의식인데 이것은 우리 인류의 보편적인 종교성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하나님 숭배 사상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천신숭배 사상은 오늘날에도 한국인들의 사고방식과 말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데, 일 예로 "하늘이 노했다."라는 말이나, "아이구, 하나님(하느님)!", 또는 "하늘도 무심하시지!", "하나님 맙소사!" 따위의 말은 모두 천신숭배 사상에서 나온 말이며, 또한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는 생각도 다 천신숭배 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지신숭배 제사

 

천신숭배 사상이 오랜 세월 한민족의 기본적 종교형태로 내려오다가, 삼국시대 쯤부터 지신(땅신)도 섬기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 지신숭배 사상은 만주 지방의 샤마니즘의 영향인듯한데, 만주 지방에서 유래된 샤마니즘은 땅의 신과 그 형상으로 돼지를 섬기던 종교의식이었다.

 

이 지신숭배 사상에서 나온 풍습 가운데 하나가 이른바 '지신밟기'와 '고시래'다.

 

 

마을신숭배 제사

 

천신숭배에서 지신숭배로 변천해온 제사의식은 더 나아가 마을신숭배 사상과 그 제사로 이어지게 되었다. 숭배하는 신의 모습이 점점 작아진다고나 할까. 아무튼 천신숭배 사상과 그 제사로 시작된 한민족의 제사의식은 이제 천신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기껏 마을신 정도를 섬기는 데로까지 타락하게 되었다. 이 마을신 숭배 사상에서 나온 것이 바로 '서낭당(성황당)'이다.

 

그리고 '고사'라고 하는 것은 주로 가족신을 섬기는 제사인데, 이것도 일종의 마을신숭배 사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은 아직까지도 이 마을신숭배 사상이 심하게 남아있어서 각 마을마다 섬기는 신이 따로 있고, 또 한 마을에서 어느 사람이 마을을 위해 죽었다면, 그 사람이 바로 그 마을의 수호신이 된다고 믿고 섬기고 있다.

 

 

조상신숭배 제사

 

천신숭배에서 지신숭배로 그리고 마을신숭배로까지 그 모습을 바꾸어온 한민족의 제사의식이 드디어 고려시대 때부터는 조상신을 섬기는 데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 '주자가례'에 근거하여 신분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4대조까지 섬기도록 하기 전까지는 신분에 따라 섬길 수 있는 댓수가 정해져 있었고, 전반적으로는 조상신에 대한 제사가 제한적이었다.

 

이런 조상신숭배 사상은 유학의 영향이 분명한데, 이 유학은 중국이 극도의 혼란에 빠졌을 때에 그 혼란을 조금이나마 막아보려고 선조의 관습을 본받자고 역설한 공자의 가르침이다.

 

본래 유학은 하나의 종교라기보다는 실천도덕의 체계였다. 무정부상태와 공포의 중국 땅을 바로잡아 보려고 노력한 공자는 당대의 사람들에게 그 전시대의 조상들처럼 바르게 살기를 가르쳤다. 그는 말하기를 자신은 구세주나 메시야의 역할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당시의 사람들로 하여금 조상들과 다시 만나게만 해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이러한 유학이 한반도에서는 종교적인 색채를 많이 띠게 되었으며 나아가 샤마니즘과 연결되어 조상신숭배라는 하나의 종교형태로까지 발전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에 발맞추어 제사의 형식도 아주 틀을 갖추게 되었는데, 이 제사 형태는 지방마다 가문마다 나름대로 독특한 모습을 띠게 되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조상에 대한 제사는 결코 오랜 역사를 가진 우리 한민족 고유의 미풍양속도 아니며, 또한 그 모습이 통일된 것도 아니다.

 

 

3. 성경이 말하는 제사

 

구약성경은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방편으로 그리고 또 우리 인간이 지은 죄를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는 방편으로 제사를 말하고 있다. 그래서 기독교를 제사의 종교라고도 말한다. 그만큼 기독교에 있어 제사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제사 제도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끝이 나고 이제 신약시대에는 예배가 가장 중요한 의식이 되었다.

 

구약성경이 말하는 기독교의 제사는 이방종교의 제사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으니 다음과 같다.

 

첫째, 이방종교의 제사의식은 인간이 나름대로 인식한 그들의 신을 인간 편에서 찾아가는 행위인 반면, 기독교의 제사는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에게 먼저 찾아오셔서 그 죄를 용서해주시는 방편으로 가르쳐주신 것이다.

 

둘째, 이방종교의 제사는 신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여 신의 저주를 피해보려는 생각이 우선인 반면 기독교의 제사는 인간이 지은 죄에 대해 마땅히 죽어야 할 인간 대신 동물을 희생제물로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생각이 우선이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이 마음대로 정한 의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의식이다.

 

셋째, 이방종교의 제사는 무조건적인 복을 얻으려는 생각이 큰데 반해 기독교의 제사는 복을 받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무관하다. 기독교의 제사는 오로지 사죄와 그에 대한 감사가 전부이다.

 

 

4. 조상공경과 제사

 

오늘날 한국인들은 조상을 공경하는 것은 마땅히 제사의식으로써 하는 것인양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그리고 그것만 잘하면 조상공경은 끝난 것처럼 잘못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모님께 드릴만한 물건을 '고르반'(하나님께 드리기로 했다고 말하는 것)이라 하여 결국은 효도를 다하지 않은 것과도 같은 모습이라 할만하다. 물론  그 중에는 정말로 효도하는 마음으로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그들도 바른 조상공경의 자세가 어떤 것인지를 잘 몰라서 그런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인들도 마치 기독교인이 되고 나면 이제 더 이상 조상 공경같은 것과는 담을 쌓은 것처럼 생각하는 일이 있는데, 이것 또한 잘못이다.

 

기독교는 그 어느 종교보다도 더 조상을 잘 기억하고 공경하는 종교임에 틀림이 없다. 그 까마득한 옛날 우리의 조상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을 오늘도 기억하고 기다리는 종교가 바로 기독교인 것이다. 그리고 성경을 살펴보면 구구절절이 조상을 기억하고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조상공경은 기독교의 핵심적인 사상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그 관습 때문에 이 조상공경의 사상과 제사의식을 잘 분별하지 못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마치 이 둘이 한가지나 되는 것처럼 오해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제사의식을 통하지 않고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조상을 공경할 수 있으며, 조상의 덕을 기릴 수 있다.

 

조선 중기 이전의 우리 사회를 생각해 보자. 그때는 그러면 조상을 공경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단 말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때도 그 나름대로의 의식이 있었을 것이며, 사람들은 조상공경의 도를 다했을 것이다.

 

그리고 한반도 외의 다른 땅과 다른 민족을 생각해보자. 그들은 그러면 전혀 조상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란 말인가? 그렇지 않다.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의 조상공경 의식이 있을 것이며, 그를 통해 자손의 도리를 다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행하는 제사의식이란 단지 조상공경의 여러 의식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조상공경의 의식은 시대에 따라 사상적 조류에 따라 그리고 지역에 따라 그 모습이 바뀌었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늘날 21세기를 바라보는 한반도에서 아직도 이것만이 조상공경의 유일한 길인양 착각하고 살아가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의 문화를 정립해 나가야 한다. 조상공경의 문제에 있어서도, 그냥 도외시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우리 기독교식의 의식을 정착시켜 나갈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기독교가 절대 조상공경을 도외시하는 종교가 아니라는 사실을 여러 사람들에게 바르게 인식시킬 필요가 있다.

 

이런 문제에 있어 우리가 한 가지 스스로 반성할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앞장서서 조상공경, 부모공경을 부르짖어야 하겠다는 말이다. 왠지 우리들 스스로가 이런 문제만 나오면 위축되고 마치 조상들에게 죄지은 사람처럼 느끼게 되는데, 이것은 잘못이다. 우리야말로 정말 바르게 조상을 공경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자신있게 우리의 자세를 가다듬어 나가야 하겠다.

 

그리고 만에 하나라도 기독교인이라는 점을 빌미로 하여 조상공경과 부모공경을 소홀히 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다. 지금까지는 우리가 이런 모습을 본의 아니게 보여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그리스도인'이라 하면 누구나가 '조상공경과 부모공경에 앞장서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하도록 우리 스스로가 노력해야 하겠다.

 

 

5. 제사가 끼치는 영적이 나쁜 영향

 

많은 사람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행하는 제사는 우상숭배가 아니라 우리 민족의 고유한 미풍양속이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첫째, 이미 앞에서도 밝혔듯이 이 조상신숭배의 제사의식은 본래 우리 민족 고유의 것이 아니다. 우리 민족 고유의 제사의식은 유일신 하나님을 숭배하는 제사의식이었을 뿐이다. 후대에 조선 중기에 와서야 오늘날과 같은 조상신숭배의 제사의식이 유학과 샤마니즘의 영향으로 민간에 유행하게 되었으므로 사실 이 조상신숭배의 제사의식은 그 역사가 그리 길지 못하다.

 

둘째, 미풍양속이라 하면 그로 인해 우리에게 어떤 좋은 영향이 있어야 하겠는데, 사실 이 제사제도로 말미암아 우리 민족은 역사적으로 어떤 좋은 영향을 받아왔던가? 물론 이것은 쉽게 말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하건데, 이 제사제도는 우리 민족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더 많이 끼친 것으로 생각된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이 제사제도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하는 일이 많다.

 

우리 한국인들은 대체로 이 제사의식을 행하는 데 있어, 하나의 미풍양속을 행한다고 생각하기보다는 그저 내려오는 전통을 무비판적으로 받아 행할 뿐이며, 또한 남의 이목을 두려워하거나 귀신의 저주를 면해보려는 생각에서 이 의식을 행할 뿐이다. 이러한 조상신숭배의 제사의식은 우리에게 영적으로 다음과 같은 나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첫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십계명 가운데 제 2계명을 어기게 한다.

 

제사에는 본래 신주(神主)라는 것이 있는데, 이 신주가 분명히 우상에 속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앞에 절을 하는 것이며, 또한 그때 우리의 마음은 복을 비거나 저주를 면해보려는 마음이기 쉽다. 그러므로 이것은 분명히 우상숭배의 영적인 죄에 해당한다(출20:4-5).

 

둘째, 귀신의 존재에 대해 우리로 하여금 잘못 알게 한다. 귀신은 타락한 천사들인데, 이 제사제도는 귀신은 바로 돌아가신 우리의 조상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전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게 하거나 가볍게 여기도록 만들며, 또한 우리로 하여금 쉽게 귀신들과 접촉하도록 만드는 나쁜 영향을 끼친다. 성경은 우리가 귀신과 접촉하는 일을 절대 금하고 있다(신18:11-12, 고전10:20).

 

셋째,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눈을 가리우는 나쁜 영향을 끼친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인간이 죽고 나면 분명히 하나님의 심판이 있게 되며(히9:27), 그 심판 후에는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져 들어가게 되고 이 세상과는 완전히 단절된다고 가르치는데(삼하12:23), 이 제사제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 말씀을 믿지 못하게 된다. 조상숭배 사상의 제사의식에 따르면 사람이 죽고 나서도 그 귀신은 계속적으로 산 사람과 비슷하게 생활하며 산 사람과 교제할 수도 있다고 가르친다. 그렇게 함으로써 심판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 나쁜 영향을 끼친다.

 

 

6. 그리스도인이 취해야 할 조상공경의 태도

 

그리스도인들은 조상공경의 문제에 있어 지켜야 할 원칙이 있다. 부모를 공경하고 조상을 공경하되 아무것도 모르고 무턱대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깨닫고 그 진리 안에서 바른 생각과 자세로 해야 하는 것이다.사람들은 선조의 문제에 있어서는 대체로 생각이 짧다. 그래서 조상이라 그러면 기껏해야 4,5대조 정도만 생각할 뿐이다. 이것은 자가당착과도 같은 생각인데, 그토록 조상을 공경하자 공경하자 그러면서도 정작 공경하는 태도를 보면, 어떻게 하면 편하게, 쉽게 그리고 적은 댓수의 조상만을 섬기느냐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댓수를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자신도 모르는 미궁에 빠져버리고 만다. 보기를 들자면, 한국의 박씨 성을 가진 사람들은 박혁거세가 그 조상이라고 믿고 섬기고 있는데, 그 박혁거세가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으면 대답하기 곤란해진다. 기껏해야 알에서 태어났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결국 오늘의 박씨 성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알에서 태어난(?) 사람의 자손이라고 믿는 셈이 되는데, 이것이야말로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을 믿는 것이 그렇게도 쉬운 일인가? 박씨 성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그 어느 누구도 이 사실에 대해 시비를 거는 사람이 없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고 시비를 건다.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는 조상을 공경하고 싶지 않다. 조상을 공경하려면 제대로 알고 공경해야지 아무것도 모르고 무턱대고 공경해서야 되겠는가?

 

어떤 사람은 알에서 난 사람을 조상이라고 공경하고, 또 어떤 사람은 원숭이를 조상이라고 공경(?)하고 있다.

 

이것은 어찌보면 조상을 욕되게 하는 태도일지도 모른다. 멀쩡한 조상을 알에서 난 이상한 존재로 만들어 버리거나, 또는 원숭이로 만들어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을 그 조상들이 안다면 얼마나 기분이 나쁘겠는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통해서 우리의 조상이 누구인지, 나의 선조가 누구인지 분명히 알고 있다. 그리고 나를 포함한 모든 인간이 어떻게 해서 이 땅에서 이렇게 삶을 누리고 있는지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분명한 깨달음 속에서 우리의 선조들을 공경할 수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겨우 4,5대 선조 밖에 보지 못하고 있는데 반해 우리는 저 멀리 우리 가문의 최초의 사람, 인류의 최초의 사람까지 알고 있으며, 또한 그 최초의 사람을 이 땅에 존재하게 하신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섬기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조상공경이야말로 가장 바른 공경이며 조상들이 기뻐할 공경이다. 이런 사실을 깨닫고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어느 누구 못지 않게 조상공경과 부모공경에 앞장서야 하겠다. 기독교는 조상공경의 종교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조상공경이 종교적 숭배로까지 나아가서는 곤란하다는 점이다. 유교에서는 이 조상공경이 종교적 숭배로까지 나아가버렸다. 그리하여 유교는 마치 그 조상들이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고 있는 것처럼 오해를 하도록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또한 우리의 진정한 창조주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깨닫는 일에도 방해가 되고 있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우리는 조상을 공경하되 그 조상조차도 주관하고 계시는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먼저 알고 공경할 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 분만이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고 계시며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7. 추모예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잘못된 조상공경의 태도를 버리고 성경적인 바른 조상공경의 자세를 견지하여야 하겠다. 그리하여 돌아가신 조상님들에게 바른 공경의 마음가짐과 태도를 보이며 온 가족의 화목을 도모하고, 하나님의 크신 복을 받아 누리는 복된 가정이 되도록 해야 하겠다.

 

오늘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일반적으로 추모(추도)예배라는 형식을 통하여 조상공경의 일을 다하고 있다. 이 추모예배는 성경적 근거는 약하나 한국의 독특한 상황으로 보아서 현실적으로 필요한 예배형식일 수밖에 없다. 이제 추모(추도)예배의 한 모범을 보이도록 한다.

 

<추모예배> 인도 : ( )

 

묵상기도‥‥‥‥‥‥‥‥‥‥‥‥‥‥‥‥‥‥‥‥‥‥‥다함께

  “이제 우리 함께 묵상기도 하심으로 ( )님의 추모예배를 하나님

께 드립니다......."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

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

들은 다 지나갔음일러라." 아멘.

 

모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주님께서 저희들의 소

망이 되심을 믿고 감사한 마음으로 이 추모예배를 드립니다. 온전히

주님께 경배 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찬 송‥‥‥‥‥‥‥‥‥( 23 장)‥‥‥‥‥‥‥‥‥ 다함께

 

기 도‥‥‥‥‥‥‥‥‥‥‥‥‥‥‥‥‥‥‥‥‥‥‥( )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저희들의 빛이 되어 주심에 감사

드립니다. 어둠 짙은 절망을 딛고 일어설 수 있게 하시며 슬픔의 눈물

이 강수를 이루고, 아픔이 병이 될 지경에서도 저희들의 슬픔과 아픔

보다 더 큰 위로와 평강을 주신 것을 믿습니다. 저희들이 마음 모아

드리는 이 추모예배를 받아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

도 드립니다. 아멘."

 

찬 송‥‥‥‥‥‥‥‥‥( 539 장)‥‥‥‥‥‥‥‥‥ 다함께

 

성경봉독‥‥‥‥‥‥‥‥‥‥‥‥‥‥‥‥‥‥‥‥‥‥‥인도자

 

요11:25-27(믿지 않는 가족이 많을 경우에는 본문 말씀을 유인물로

 

준비하여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좋겠음.)

 

설 교‥‥‥‥‥‥‥‥‥(위로의 은총)‥‥‥‥‥‥‥‥인도자

 

그 누구이든 간에 죽음을 피하거나 물리칠 장사는 없습니다. 다만 누가 먼저 죽고 나중에 죽느냐 하는 순서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대할 때 일반적으로 갖게 되는 현상은 두려움과 슬픔이요, 한걸음 더 나아가서는 절망감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두려움과 슬픔과 절망감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으로 끝난다는 것이 불신자들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현세의 문이 닫히고 내세의 문이 열리는 때입니다.

또 하나는 다시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인은 우리에게 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에게 갈 수 있고, 그가 있는 내세의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이유는 부활의 소망 때문입니다. 죽어도 다시 사는 그 날이 올 것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 앞에서도 큰 힘과 위로를 받게 됩니다. 우리는 부활의 신앙 안에서 소망의 길을 가며 소망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고인의 삶과 교훈이 헛되지 않게 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소망이라는 위로의 은총을 주고 계십니다.

 

묵상기도‥‥‥‥‥‥‥‥‥‥‥‥‥‥‥‥‥‥‥‥‥‥‥인도자

 

이제 잠시 묵상의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삶의 참의미를 깊이 생각하시면서 경건하고 희망찬 삶을 결단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30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아멘.

 

주님의 영광 가운데서 내세의 소망과 부활의 소망을 갖게 하시고, 다시 만날 기약이 있음을 알게 하심을 인하여 찬송과 영광을 돌리옵나이다. 저희들의 삶이 더욱 복되게 하사 주님의 이름을 높이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고인의 약력보고‥‥‥‥형편에 따라 ‥‥‥‥‥‥‥‥‥ ( )

 

추 모 사‥‥‥‥‥‥‥‥형편에 따라 ‥‥‥‥‥‥‥‥‥( )

 

찬 송‥‥‥‥‥‥‥‥‥( 434 장)‥‥‥‥‥‥‥‥‥ 다함께

 

주 기 도‥‥‥‥‥‥‥‥‥‥‥‥‥‥‥‥‥‥‥‥‥‥‥다함께

 

폐 회‥‥‥‥‥‥‥‥‥‥‥‥‥‥‥‥‥‥‥‥‥‥‥다함께

 

이것으로 고 ( )님의 추모예배를 마치겠습니다.

 

**폐회 후 고인을 추모하여 애찬을 함께 나누는 것도 좋음.

 

 

 

기독교의 장례문화

 

 

교회내의 장례위원회 설치 죽음 준비교실 운영해야

호스피스사역에도 교회가 깊은 관심 가져야 할 때

 

 

복음과 함께 들어온 복음은 많은 문화들을 무리없이 수용하기도 하고 변혁시켜 오기도 했다. 그러나 유일하게 관혼상제(冠婚喪祭)라는 벽은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100년의 한국교회는 더 이상 침묵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 나라에서 지금까지 민간에 전해내려 오는 의식은 사례편람에 바탕을 둔 것으로 사회생활에 크나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사례편람에 나타난 상례의 절차는 19단계로까지 되어 있다.

 

한 사람의 죽음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수백가지의 절차를 남긴다고 한다. 그러나 그 가운데 어떤 것이 기독교 신앙에 적합하고 어떤 것이 위배되는 것인지 도무지 기준이 서지 않아 어려움을 겪을 때가 많다.

 

장의 문화에 대한 연구가 있어야 한다. 비기독교적 요소가 한둘이 아니다. 영결식(永訣式)은 부활을 부정하는 말이다. 도리어 고별식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 명복(冥福)은 죽은 뒤 명계(冥界)에서 받는 복을 말한다. 영전(靈前), 영좌(靈座), 영구차(靈柩車), 영면(永眠)도 교리에 어긋나는 내용이다. 임종예배, 입관예배, 장례예배, 하관예배도 예배라기 보다는 의식이므로 임종식, 입관식, 장례식이 타당하다. 추도식(追悼式)은 죽은 자를 슬퍼 한다는 뜻이니 추도식(追悼式)이 바람직하다.

 

어떤 교회에서는 장지로 나설 때 목회자가 맨 앞에 서고, 또 어떤 교회에서는 십자가나 고인의 사진이 맨 앞에 선다. 또 어떤 교회에는 장례 예배 시간에 유족들을 위한 조사를 준비하지만 어떤 교회에는 아예 그런 순서 자체가 없다.

 

천주교는 이런 세세한 항목을 정리한 장례 의식서가 통일되어 있다. 하지만 개신교는 무어라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통일성이 결여되어 있다. 교단마다 장례 방법이 다르고 의식서도 다르다. 또 교회마다 다르고 지방마다 다르다. 혹 교단에서 통일된 의식서를 마련해 주었다 해도 목회 현장의 필요에 따라 서로 다른 예식이 진행되고 있다. 아무리 장례 문화 토착화의 필요성을 인정한다지만 너무 다양해서 정신이 없을 정도다.

 

물론 한 사람의 힘이나, 일부 교회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하겠지만 한국 교회를 대표할만한 연합기관이나 신학대학, 또는 연구기관에서 이에 관한 연구를 추진해 통일된 기독교 장례 지침이 나왔으면 좋겠다.

 

이것이 바로 <임종 목회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교회별 장례의례 지침이다. 아직까지는 장례의례 지침이다. 아직까지는 장례의례 지침을 마련한 교회들이 많지 않지만 바람직한 기독교 장례문화를 위해선 이러한 지침을 마련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장례사역을 극대화 하라.

 

어떤 교회는 장례 예배를 마친 교인들을 주일 저녁 예배 시간에 강대상 쪽으로 불러내 교인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위로하고 강대상을 장식했던 꽃으로 위로의 꽃다발을 만들어 유족에게 선물하기도 한다.

 

유족들이 고인의 사망을 가장 뼈저리게 실감하는 순간은 장례예배 석상이 아니라 장례 후 처음으로 돌아오는 고인의 생일이나 1주기 때이다. 따라서 1주기를 즈음에서 교회에서 보관하고 있는 고인의 사진들을 모아서 작은 사진첩을 선물하거나 위로의 엽서를 띄어주면 예상치 못한 열매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목회의 최고 희열은 장례를 통해 표현되고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교회내에 장례위원회의 설치가 바람직하고 이들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이란 그저 상을 당하면 뒤치닥꺼리를 하는 정도가 아닌 구체적인 죽음 준비교실들을 주관하는 부서로 자리매김 되어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예방사역을 할 수 있어야 하며 교회 마다 설치되dj

 

있는 노인대학이나 경로대학 등에서 이런 사역을 보다 구체적으로 펼쳐나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여기에다 호스피스 사역에도 교회가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때이다.

 

 

 

목회자가 죽음의 모델이 되라

자신의 죽음을 담대히 증거하라

 

먼저 죽으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요즘 교회 차원에서 납골당을 마련하거나 화장을 장려하는 교회들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교회가 소망교회(곽선희 목사)이며 사랑의교회(옥한흠목사)그리고 새중앙교회(최홍준 목사)가 이런 계획을 가지고 있거나 구상중이다.

 

더욱 감동스런 일은 목회자들이 솔선하여 거룩한 죽음의 모델이 되고자 하는 일이다. 이미 화장 장려운동에 옥한흠, 곽선희, 이동원, 최일도, 최홍준, 박종근 목사들이 참여했다.

 

장기 기증만 해도 많은 분들이 모범을 보이고 있다.

 

더욱 최근 SK그룹의 최종현 회장이 죽으면서 자신을 화장해 달라고 했다. 신문학 원론에 의하면 오비튜어리(사망기사)가 가장 많이 읽힌다고 한다. 이는 판매부수에까지 영향을 끼치는데 이유는 고인의 삶의 향기가 있기 때문이라 한다.

 

생명관이 분명한 목회자가 못할 일이 무엇인가? 주검은 화장이든 수장이든 매장이든 산자의 공간과 환경을 망치게 해서는 안된다. 그 누구도 묘지로 넓은 땅을 차지할 권한은 없다. 이런점에서 국립묘지부터 규격화할 필요가 있다.

 

무덤 1기라면 나무 15그루를 심을 수 있다. 주인없는 묘지가 700만기다. 이래서 돈 받고 하는 벌초 사업까지 생겨났다. 지금의 추세대로라면 2050년이 되었을때 전 국토의 66%를 차지하게 된다. 이런 죽은 문화를 앞장서서 개혁할 수 있는 지도자는 곧 목회자들이다. 어느 장례식에서나 자신의 죽음 계획과 확신을 심는것처럼 큰 사역도 없다. 자신의 죽음을 담대히 증거해라.

 

천국이 있기는 있습니까?

 

저축추진중앙위원회가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상가당 조의금 규모는 1천9백5만원이었으며 한해 평균 사망자 수인 25만명으로 곱하면 2조7천3백75억원이 우리 나라 전체 한해 평균 조의금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다 문상객들은 날밤 새기를 일당 개념으로 처리하면 ꡐ문상 경제학ꡑ의 규모는 더욱 커진다. 주먹구구식으로 한 상가당 평균 조문객 수를 최소 3백명으로 잡고 교통비를 포함한 이들의 하루 일당을 3만원으로 잡게 되면 대충 잡아 본 총 조문객 수(25만명X3백명)는 7천5백만명, 여기다 하루 일당을 3만원으로 쳐서 곱하면 2조2천5백억원이 된다.

 

이를 평균 조의금과 합치면 4조9천8백76억원으로 우리 나라 한해 예산(70조원)의 7%가 넘는 금액입니다. 여기에다 장례비용까지 포함하면 천문학적인 돈이 관속으로 사라지는 셈이다.

 

 

 

장례의 아프터 서비스를 철저히 하라

위로 담긴 아프터 서비스 정신

 

장례식 뒤에도 많은 관심과 배려 있어야

조의금 봉투에 위로의 편지동봉 하기도

 

 

많은 상담가들의 연구에 의하면 상을 당한 사람들을 돕는 일은 장례식을 치룬 직후가 그와 같은 봉사를 필요로 하고 또 가장 효과가 좋다고 한다. 장례식을 치룰때까지는 거의 정신을 못차리고 있다가 집으로 돌아왔을때의 허전함과 상실감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손님들도 썰물 빠져나가듯 다 빠져나가고 사람들이 없다. 바로 이때 위로자가 필요하다.

 

이때는 최초의 혼란과 충격은 사라지고 애타는 상심의 고통이 가장 심하다. 이때는 역시 변화된 생활에 적응할 필요가 있으므로, 상을 당한 사람은 누구나 자기 손을 붙잡아 줄사람을 갈망한다.

 

따라서 유족의 심리상태를 잘 이해하고 이를 도와줌은 너무도 마땅한 목회적 돌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대개 충격(혼란)-애통-회복의 단계를 거치게 된다.

 

1. 충격과 혼란의 단계

 

사별을 당한 사람이 충격과 혼란이라는 최초의 반응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당사자의 성격과 경우에 따라서 여러가지로 다르게 나타날 수 있는데, 완전히 정신이 혼미하고 무감각하게 되거나, 지나치게 이것 저것 일을 저지를 수 있다. 그러므로 목회적 배려는 육체적인 충격에 대처하되, 안정하고 몸을 따스하게 해주는 것이다. 당연히 슬퍼해야 하는 것을 막는다든가, 외롭게 떨어져 있게 한다면, 결과적으로 병적인 현상을 일으키거나 온갖 재난을 불러 일으킬 수 있으므로, 목회자는 이때에 그들과 함께 있으므로 안정을 주고, 위안을 주어야 한다.

 

2. 애통의 단계

 

비탄 그 자체는 상실에 대한 정상적인 반응이다. 가족의 분노가 죽은 사람을 돌보던 의료진에게 향한 것이든, 고인을 향한 것이든, 하나님을 향한 것이든, 우리가 그 분노를 이해하고 참아준다면 그들이 자책감을 갖지 않고 그 죽음을 받아들이게 도와주는 셈이다. 사회적으로 도저히 용납 못할 악감정을 품고 있으며 또 그런 생각을 감히 입밖에 냈다고 유족을 꾸짖는다면 그들의 슬픔과 수치감과 죄책감이 오랫동안 지속된 것이며, 급기야는 신체적, 정서적으로 건강을 해치게 됨을 명심해야 하겠다.

 

3. 회복단계

 

애도의 절차도 몸이 치유되는 과정과 마찬가지로 상처를 아물리는 과정이 필요하다. 건강한 세포로 만들어야 하는데, 상례를 치룰때에 그 고통의 원인은 자기에게 가장 중요한 인물이 없어져 버렸다는 사실임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죽은 사람을 내면화하고 자기자신의 일부로 용해하여 자기 자신의 성격을 풍성해진 인격때문에 새 생활의 적응이 가능한 것이다. 자기 자신은 물론 자기 주위의 사람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유치하고 비합리적인 행동을 함으로써 사별당한 사람이 깜짝 놀라거나 수치감에 휩싸이게 될 때, 목회자의 따스한 동정심과 그런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아량이 요구된다. 그런 행동으로 유족은 차츰 안정감을 되찾게 된다. 목회자는 사별이 인간에게 주는 모든 충격 중에서 가장 큰 위기임을 알고, 또한 사람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사실은 가장 불안한 상태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여, 장례식 뒤에도 많은 관심과 배려가 있어야 하겠다.

 

목회를 하다보면 장례 예배를 계기로 교회에 출석하게 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그만큼 장례예배를 통해 그 어느때보다도 친밀한 교제와 신뢰가 이뤄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례 이후에 유족들의 아픔을 세심하게 배려하고 위로해주는 아프터 서비스가 필수적이다. 한 목회자의 경우 그는 유족에게 전해주는 조의금 봉투에 반드시 자신이 직접 쓴 위로 편지를 동봉한다.

 

편지에서 고인이 생전에 늘 하시던 말씀이나 교회에서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셨는지에 대해 그 동안 알고 지내온 내용들은 유족들에게 알려준다. 이를 통해 고인이 교회에 가졌던 애정이나 교회와의 유대관계를 표현함으로써 유족들이 교회에 대해 강한 애착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장례예배를 전도의 기회로 활용하라

 

장례예배는 불신자들도 쉽게 이해되도록

 

그림언어 활용하여 상대방의 감정과 지성 활동케 해

부모에 대한 효도와 가족사랑 강조하는 메시지 전해야

 

 

교회에 나오라고 하면 기를 쓰고 발뺌을 하는 사람들도 제 발로 교회를 찾아올 때가 있다. 가족이나 친지의 결혼식이나 장례식이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어렵사리 교회를 찾아온 그 기회야말로 복음 전파의 가장 좋은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영국의 명설교가 스펄전은 이에 대해 ꡒ장례 예배에서 조차 전도하지 못한 설교가는 어떤 강대상에서도 설교할 자격이 없다ꡓ고 말하기도 했다.

 

이를 위해선 불신자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해야 하고, 내용에 있어서도 부모에 대한 효도와 가족 사랑을 강조하는 메시지를 주로 들려주어야 한다. 물론 천국과 부활에 대한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빼놓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이때 주의해야 할 일은 구태의연한 언어보다 그림언어를 쓰라는 것도 권해보고 싶다. 그림언어란 대화의 도구로, 내용이나 대상을 사용하여 상대방의 감정과 지성을 동시에 활동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상대방은 우리의 말을 단순히 들을 뿐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ꡐ귀에다ꡑ말씀하시지 않고, ꡐ눈에도ꡑ말씀하셨다. 예를 들어 ꡐ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신다ꡓ고 말씀하시지 않고, ꡒ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ꡓ(마 6:26-30)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ꡒ우리가 붙잡으려 했던 것은 실상 거미줄을 붙잡은 것과 같았으며…ꡓ(욥 8:4)ꡒ우리가 사망의 골짜기를 넘나들때가 한두번이 아니었으며…ꡓ(시 23:4)등의 용어 표현이 훨씬 더 마음을 움직일 것이란 점이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한 기도문을 예로 들어보기로 한다. 다음 기도문은 대한항공기 피납 사고후 그들을 영결하는 식장에서 드려진 기도문이다.

 

ꡒ자비로우신 하나님, 오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우리의 흐느끼는 소리 당신앞에 이르게 하소서. 지금 우리는 지난 목요일 새벽 사할린 상공에서 비명에 간 2백68위의 영혼을 위해 주님께 간구합니다. 그들의 최후가 너무 충격적이고 그들의 죽음이 너무나 큰 비극이기에 우리는 무슨 말로 그들의 넋을 위로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이들이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왜 이들을 쏘는 잔인한 그 손을 잡아 멈추지 않으셨습니까? 이들을 왜 그 무도한 원수들의 손에 맡기셨습니까? 오늘이 세계가 당신을 외면하는 죄의 응보이십니까? 입으로만 평화를 부르짖고 행실로는 온 세계를 멸망시킬 수 있는 무기 생산에 광분하는 거짓에 대한 응징이십니까? 그렇다면 그 당사자들을 문책하시지 않고 하필이면 이들을 택하셨습니까? 왜 어린 생명까지 앗아가는 것을 보고만 계셨습니까? 무고한 자의 피가 오늘의 세계의 양심을 일깨우고 세상의 죄를 사하는데 더 호소력이 있어서입니까?

 

주여 당신께 원망하고 넋두리를 펴는 우리를 용서하십시오. 졸지에 사랑하는 자식을 잃고 아내와 남편, 부모, 형제를 잃은 유가족들의 비탄이 너무나 커서입니다.

 

우리의 마음 역시 슬프고 괴로워서입니다.

 

야훼 하나님! 당신은 의로우시고 당신은 사랑 지극하신 분이십니다. 당신이 이들을 벌하시고, 이들을 비명에 몰아넣으실리 없습니다. 당신이 뜻하시는 건 죽음이 아니고 생명입니다. 당신이 바라는 건 미움이 아니고 사랑이며, 전쟁이 아니고 평화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나 당신의 뜻을 외면하고 거스리며 살고 있습니다.

 

하옵기에, 오늘의 이 비극, 세상의 모든 죄악이 다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인명을 경시하고 사람 귀함을 망각한 이 시대으 죄 때문입니다. 비명에 가신 분들은 오늘의 세계와 우리 모두가 치러야 할 죄값을 대신 치른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모든 죄를 지고 죽었습니다.

 

주여 우리의 이 뉘우치는 마음을 보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며 이 영혼들을 당신품에 안으소서,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씻어주시고 그들을 인도하시어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는 당신의 생명의 나라, 빛과 평화의 나라로 인도하소서, 또한 비통에 젖은 유가족을 위로하소서, 그들의 마음속에 당신의 사랑을 가득히 부어주소서. 모두가 슬픔을 이기고 당신의 빛속에 보다 굳세게 살게 하소서.

 

그리하여 이제부터는 온 세계가 당신의 뜻에 순응하여 공산주의 소련도 회개하고 우리 모두의 뜻을 따라 우리 모두 당신께로 마음을 돌리게 하소서. 인간의 존귀함을 깨닫고 인명을 존중하고 서로 사랑함으로서 이 땅과 온 세상에 주님의 평화를 이룩하는 역군이 되게 하소서. 우리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고인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보여주라

고인의 신앙 정리한 회고록 나누며

 

유가족들 신경쓰지 못한 일 교회가 관심있게 돌봐야

추모사속에 고인의 삶의 발자취 잘 요약하여 실어

 

 

장례 예식이 며칠 동안 지속되다 보면 유족들도 지치고 목회자들도 지치게 마련이다. 하지만 가까운 가족을 잃은 유족들의 아픔은 아무리 오랫동안 위로해도 충분히 채워지지 않는 법이다. 따라서 장례 예배는 결혼예배에 비해 그 시간이 두배쯤 긴게 좋다. 장례 예식은 빨리 해치운다는 생각은 금물이다. 천주교에서는 임종을 앞둔 사람을 위해 밤을 꼬박 새워 시편을 읽어주며 그들의 아픔을 위로한다.

 

위로라는 것이 굳이 무슨 말을 많이 해 주어서는 아니다. 헨리 나우웬은 위로를 이렇게 정의했다. ꡒ위로라고 하는 것은 의로운 사람과 함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위로는 마음을 쓰며 돌보는 일 가운데 중요한 것이다. 위로는 고통을 가져 가 버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함께 있으면서 ꡐ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내가 당신과 함께 있습니다. 우리는 함께 고통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세요.ꡑ라는 의미의 말 한마디를 하는 것이다. 참으로 우리 모두는 위로를 주고 받아야 할 나약한 존재들이다.ꡓ

 

시간을 함께 나누어 주는 일에서부터 장례식장에서는 비디오를 찍은 활동상이나 녹음을 들려주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으며 고인의 신앙은 간단하게 정리한 간증문이나 회곡록을 나누는 것도 큰 은혜가 될 수 있다. 유가족들도 미처 신경 쓰지 못한 일들을 교회가 관심있게 도와줄때 감동의 선물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추모사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추모사속에서 고인의 삶의 발자취를 잘 요약하고 그 분이 남긴 인생의 교훈을 잘 정리해 줄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그 삶의 향기를 널리 비취는 기회가 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그런 추모사가 조문객들과 유족들에게 좋은 선물이 되게 할 수 있으면 이것만큼 큰 선물도 없을 것이다. 여기 그 예문을 하나 제시해 보기로 한다.

 

 

 

장례예배를 전도의 기회로 활용하라

장례예배는 불신자들도 쉽게 이해되도록

 

그림언어 활용하여 상대방의 감정과 지성 활동케 해

부모에 대한 효도와 가족사랑 강조하는 메시지 전해야

 

 

교회에 나오라고 하면 기를 쓰고 발뺌을 하는 사람들도 제 발로 교회를 찾아올 때가 있다. 가족이나 친지의 결혼식이나 장례식이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어렵사리 교회를 찾아온 그 기회야말로 복음 전파의 가장 좋은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영국의 명설교가 스펄전은 이에 대해 ꡒ장례 예배에서 조차 전도하지 못한 설교가는 어떤 강대상에서도 설교할 자격이 없다ꡓ고 말하기도 했다.

 

이를 위해선 불신자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해야 하고, 내용에 있어서도 부모에 대한 효도와 가족 사랑을 강조하는 메시지를 주로 들려주어야 한다. 물론 천국과 부활에 대한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빼놓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이때 주의해야 할 일은 구태의연한 언어보다 그림언어를 쓰라는 것도 권해보고 싶다. 그림언어란 대화의 도구로, 내용이나 대상을 사용하여 상대방의 감정과 지성을 동시에 활동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상대방은 우리의 말을 단순히 들을 뿐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ꡐ귀에다ꡑ말씀하시지 않고, ꡐ눈에도ꡑ말씀하셨다. 예를 들어 ꡐ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신다ꡓ고 말씀하시지 않고, ꡒ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ꡓ(마 6:26-30)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ꡒ우리가 붙잡으려 했던 것은 실상 거미줄을 붙잡은 것과 같았으며…ꡓ(욥 8:4)ꡒ우리가 사망의 골짜기를 넘나들때가 한두번이 아니었으며…ꡓ(시 23:4)등의 용어 표현이 훨씬 더 마음을 움직일 것이란 점이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한 기도문을 예로 들어보기로 한다. 다음 기도문은 대한항공기 피납 사고후 그들을 영결하는 식장에서 드려진 기도문이다.

 

ꡒ자비로우신 하나님, 오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우리의 흐느끼는 소리 당신앞에 이르게 하소서. 지금 우리는 지난 목요일 새벽 사할린 상공에서 비명에 간 2백68위의 영혼을 위해 주님께 간구합니다. 그들의 최후가 너무 충격적이고 그들의 죽음이 너무나 큰 비극이기에 우리는 무슨 말로 그들의 넋을 위로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이들이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왜 이들을 쏘는 잔인한 그 손을 잡아 멈추지 않으셨습니까? 이들을 왜 그 무도한 원수들의 손에 맡기셨습니까? 오늘이 세계가 당신을 외면하는 죄의 응보이십니까? 입으로만 평화를 부르짖고 행실로는 온 세계를 멸망시킬 수 있는 무기 생산에 광분하는 거짓에 대한 응징이십니까? 그렇다면 그 당사자들을 문책하시지 않고 하필이면 이들을 택하셨습니까? 왜 어린 생명까지 앗아가는 것을 보고만 계셨습니까? 무고한 자의 피가 오늘의 세계의 양심을 일깨우고 세상의 죄를 사하는데 더 호소력이 있어서입니까?

 

주여 당신께 원망하고 넋두리를 펴는 우리를 용서하십시오. 졸지에 사랑하는 자식을 잃고 아내와 남편, 부모, 형제를 잃은 유가족들의 비탄이 너무나 커서입니다.

 

우리의 마음 역시 슬프고 괴로워서입니다.

 

야훼 하나님! 당신은 의로우시고 당신은 사랑 지극하신 분이십니다. 당신이 이들을 벌하시고, 이들을 비명에 몰아넣으실리 없습니다. 당신이 뜻하시는 건 죽음이 아니고 생명입니다. 당신이 바라는 건 미움이 아니고 사랑이며, 전쟁이 아니고 평화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나 당신의 뜻을 외면하고 거스리며 살고 있습니다.

 

하옵기에, 오늘의 이 비극, 세상의 모든 죄악이 다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인명을 경시하고 사람 귀함을 망각한 이 시대으 죄 때문입니다. 비명에 가신 분들은 오늘의 세계와 우리 모두가 치러야 할 죄값을 대신 치른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모든 죄를 지고 죽었습니다.

 

주여 우리의 이 뉘우치는 마음을 보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며 이 영혼들을 당신품에 안으소서,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씻어주시고 그들을 인도하시어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는 당신의 생명의 나라, 빛과 평화의 나라로 인도하소서, 또한 비통에 젖은 유가족을 위로하소서, 그들의 마음속에 당신의 사랑을 가득히 부어주소서. 모두가 슬픔을 이기고 당신의 빛속에 보다 굳세게 살게 하소서.

 

그리하여 이제부터는 온 세계가 당신의 뜻에 순응하여 공산주의 소련도 회개하고 우리 모두의 뜻을 따라 우리 모두 당신께로 마음을 돌리게 하소서. 인간의 존귀함을 깨닫고 인명을 존중하고 서로 사랑함으로서 이 땅과 온 세상에 주님의 평화를 이룩하는 역군이 되게 하소서. 우리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반기독교적 장례문화에 지혜롭게 대처하라

보존해야 할 것과 개혁해야 할 것은 구분

 

무의식중 사용하는 장례용어 불교 유교 용어 많아

사회문화적 접근만 시도되어도 문제해결 돼

 

 

기독교의 장의문화(葬儀文化)는 전통적 장의문화와 마찰될 때가 있다. 때문에 문화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성경에 보면 요셉은 그의 아버지 야곱이 운명했을 때 애굽의 장례법대로 행했으며(창 50:1-14)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시체를 장사할 때도 ꡒ유대인의 장례법대로ꡓ했다(요 19:38-41).

 

사도행전에서 복음전파는 궁극적으로 문화의 충돌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데반은 유대인들에게 전도할 때에 모세가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친다고 오해를 받았으며 바울도 빌립보에서 전도할 때 ꡒ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한 풍속을 전한다ꡓ(행 16:20-21)고 도전을 받았다.

 

문화는 한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을 지닌다. 한편 우리는 ꡒ보존해야 할 것과 개혁해야 할 것ꡓ을 구분해야 한다. 기독교는 문화의 파괴자가 아니라 건설자로서 역할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몇가지만 예를 들어 보자. 한국의 전통적인 장례 문화 가운데 삼우제(三虞祭)라는 것이 있다. 이는 유교식 전통상례의 용어이며 절차이다. 우(虞)자는 염려할 우자인데 우제(虞祭)는 시체를 매장한 뒤 그의 혼(魂)의 방향을 염려하여 드리는 제사를 말한다.

 

우제에도 초우제가 있는가 하면 재우제가 있고 삼우제도 있다. 초우제는 산역(山役)을 마치고 혼백을 모시고 곡을 하며 돌아올 때 집에서 여상제들이 곡을 하면서 맞이한다. 이때 제사를 지내는데 이것을 초우제 또는 반혼제(返魂祭)라고도 한다. 재우제는 초우제를 지낸뒤 유일(柔日)에 지내며 삼우제는 강일(剛日)에 지낸다. 차라리 교회에서는 장사 지낸 뒤 처음으로 무덤을 살펴보는 것이니 ꡐ첫 성묘ꡑ라고 부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물론 날짜도 굳이 3일이 아니라 편할 대로 해야 할 것이다.

 

또 49제(齊)라는 것도 있다. 이 말은 본래 불교에서 유래된 것으로 사람이 죽은 지 7일마다 한번씩 제사를 지내 일곱번째가 되는 49일만에 망인(亡人)의 극락왕생이 결정된다는 뜻에서 시작된 것이다.

 

영면(永眠)은 영원히 잠잔다는 뜻이며 영서(永逝)는 아주 돌아가셨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불러가셨다 소천(召天)도 자주 쓰는 형편이지만 별세(別世)라 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이 밖에도 ꡒ명복(冥福)을 빈다ꡓ는 말 역시 불교에서 사자(死者)를 위하여 불사(佛事)를 행하는 일을 말하는 것으로서 사후(死後)의 행복을 비는 것을 뜻한다.

 

이의용은 이렇게 말한다. 불교국가에서는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13세기말 이 태조는 고려의 불교를 버리고 성리학을 기초로 한 유고를 권장한 바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불교국가였기 때문에 산 자가 죽은 조상에게 드리는 제사는 없었다. 우리가 전통적인 의식으로 알고 있는 유교식 제례는 우리 나라것이 아니라 이때 중국에서 도입한 풍습이라는 것이다.

 

우리 민족 사상 우상 숭배가 가장 심했던 때는 세종대왕 때라고 할 수 있다. 이 때 제사가 확산되어 집집마다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가묘(家廟)나 사당, 신주를 두었다고 한다.

 

유교문화는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충효의 사상이 중심이다 효는 예(禮)와 제사제도를 통해 실천되어 왔다. 공자는 영혼불멸, 사후세계에 대해 가르치지 않았으나 제사제도가 생겨났다.

 

유교의 제사 배경은 이렇다. 사람이 죽으면 혼(魂)과 백(魄)으로 갈라져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으로 내려가는데 하늘로 올라가 거처할 곳을 얻지 못하고 떠돌아 다니다가 자손들이 정성으로 제사를 지내주면 혼과 백이 연합하여 사후에 안정된 삶을 지속한다. 그리고 정성껏 제사를 지내주면 하늘이 복을 내린다. 나중에는 하늘이 조상으로 바뀌었고 조상이 곧 신이 되었다.

 

그러나 굳이 이런 역사적 의미의 고찰이 아니라도 사회문화적 접근만 시도되어도 문제는 쉽게 해결될 수 있다. 천주교 순교자 정하상은 ꡒ산 사람의 영혼도 능히 술과 밥으로써 먹이지 못하겠는데 하물며 죽은 영혼에게 어찌 할 수 있겠는가?ꡓ라며 제사는 미신 행위요. 비합리적인 것이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제 우리도 우상이 득실거리던 아덴교회를 향해 ꡒ범사에 종교성이 많다ꡓ고 했던 바울의 지혜를 배워야 할 때이다.

 

 

 

죽음이 아니라 소망을 나누자

죽음은 비극 아닌 '천상의 생일'

 

미국장로교회는 장례예배로 ꡐ부활증언예배ꡑ로 지침

장례는 산 자의 문화로 긍정적 추연 부각시켜야

 

 

그리스도인의 얼굴은 크리스천이 읽어낼 수 있는 유일한 성경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죽음이 하나님의 완전한 치유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슬프지 않을 수 없으나 죽음속에서도 하나님이 살아계심과 소망을 나누는 것이 크리스천들이다. 장례식장 만큼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는 선교의 장도 없다.

 

스데반은 죽음 앞에서도 담대히 외쳤다. ꡒ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신 것을 보는도다.ꡓ(행 7:56) 그의 죽음은 비극이 아니었다. 고통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그런 죽음에서 도전을 받았던 바울이 신약시대를 여는 중요한 인물이 된다. 죽음으로 꽃피어진 가장 큰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죽음이 준비되었던 그래서 사망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났던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ꡒ하늘 나라에서 다시 태어나는 날ꡓ이라며 ꡐ천상의 생일ꡑ이라고 불렀다. 이 때문에 어떤 교회에서는 장례예배라고 부르지 않고 ꡐ천국환송예배ꡑ라고 부른다.

 

또 미국장로교회에서는 `부활증언예배(A Service of Witness to the Ressurection)ꡑ라고 부르고 미국연합감리교회에서는 `죽음과 부활의 예배(A Service of Death and Ressurection )ꡑ라고 부른다.

 

이때문에 기독교의 장의 문화도 마찬가지다. 기존의 수의는 색깔부터도 탁하고 옷감까지도 꺼칠꺼칠하다. 수의의 개념도 환하고 밝게 바꾸어 볼 필요가 있다. 미국에서는 평소에 고인이 즐겨입던 옷이나 고운 흰색옷을 입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점에서 찬송도 밝을수록 좋다. 김활란 박사는 장송곡 대신 승리의 행진곡을 틀어달라고 유언했다.

 

한국교회에서는 죽음과 관계된 예식을 장례식(葬禮式), 혹은 장례예배라고 부른다. 풀어서 말하면 땅에 매장할 때 갖는 예식이나 예배라는 뜻이다. 이 말 속에는 그 관심이 땅에 묻는 매장에만 쏠려 있다. 그러기에 모든 장례식 분위기는 비극적인 이미지로 일관된다. 인간은 누구든 죽음을 통해 다시 태어난다. 이 때문에 바울은 ꡒ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은 것도 유익함이라ꡓ(빌 1:19-26)고까지 고백했던 것이다.

 

한편 장례는 죽은 자의 문제가 아니라 산 자의 문화라는 측면에서 부정적인 측면보다는 긍정적인 면을 죽음보다 생명을 절망보다는 소망을 꽃피워가는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죽음 준비 교육을 위한 토론 주제들

 

극단적 공포 줄이고 인간의 존엄한 죽음성취

안락사 등 윤리적 문제에 대한 인식 촉구

 

 

미국의 대학중 미네소타 대학은 매 학기에 죽음의 준비교육과목(Death Education)이 반드시 커리큘럼속에 포함된다. 풀톤 교수가 담당한 죽음의 사회학을 예로 들어보면 90분 수업이 주 3회로 1학기 강의가 짜여진다. 맨 첫 시간에 나는 누구이며,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등을 각자가 쓴다. 왜 이 죽음에 관한 수업에 등록했는가? 죽음에 관한 분야(자살, 안락사)중에서 어떤 분야에 흥미를 갖고 있는가 등에 대해서도 쓴다. 죽음에의 관심도가 높은 것은 아무래도 개인적인 체험과 분리될 수 없다. 그래서 거기에는 감정이 수반된다. 그 감정이 어떠한 심리적 문화적 배경에서 유래하는 것인가를 학생과의 토론중에 명확하게 규명해 나간다. 죽음이나 사별과 떼어 놓을 수 없는 비탄에 대해서도 상당히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 준비교육의 목표는 이렇다.

 

① 죽음에의 여섯가지 단계를 이해하는 것.

② 자기의 죽음을 인식하고 사색하여 인간의 존엄한 죽음을 성취하는 것.

③ 이별의 슬픔을 지혜롭게 극복하여 인간적 성장을 이루게 하는 것.

④ 죽음에 대한 극단적 공포심을 제거하는 것.

⑤ 죽음을 타부시 하는 생각을 바꾸게 하는 것.

⑥ 자살을 방지하는 것.

⑦ 환자의 알 권리를 인정하고 말기 환자와의 의사소통에 대해 배우는 것.

⑧ 안락사 등 죽음의 과정에 관련된 윤리적 문제에 대한 인식을 촉진하는 것.

⑨ 죽음에 관한 여러가지 문제를 의학적, 법률적으로 이해하는 것.

⑩ 장의의 역할에 대한 이해를 돕는 것.

⑪ 시간의 귀중함, 가치관의 재정립을 촉구하는 것.

⑫ 죽음의 예술을 배워 제3의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것.

⑮ 사후의 생명의 가능성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탐구하는 것.

 

이래서 Pre-planning Funeral에서는 자신의 평소에 좋아하던 찬송가 가운데 장례예배때 부를 곡을 본인이 직접 고르도록 하고 장례예배 순서지나 초청장을 직접 골라 두도록 하고 있다. 또 장례예배 때 유족이나 하객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마지막 말을 간단하게 편지를 써 두었다가 장례예배 당일 날 대독하도록 하는 순서까지 있다.

 

죽음 준비교실에서 다룰 수 있는 내용은 한두가지가 아니다. 죽음에 대한 태도에서부터 장례의 절차, 즉, 사망신고에서부터 시신 관리에 이르기까지 배울 수 있게 된다. 하다못해 불교에서도 시왕전이나 명부전이라고 해서 죽음에 대한 교육이 있다는 것은 한번쯤 반성해 볼 일이다.

 

 

 

주의 능력을 누가 제한할 것인가?

 

이 시대의 가장 큰 생명운동은 '화장'

 

 

기독교는 선교초기 한글학당을 통해 문맹을 깨우쳤는가 하면 축첩제도 폐지운동과 놀음추방운동, 금주․금연 운동 등을 통해 삶의 질을 높이는데 일조 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한없이 무기력하기만 하다.

 

선교초기의 이런 운동이 성경에 명시된 것은 하나도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시대상황에 적용시켰으며 우리 선조들은 그런 운동을 통해 신앙고백을 해 왔다. 따라서 오늘의 상황에 빛과 소금된 역할로서 나누어야 할 가장 큰 생명운동은 바로 화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화장운동은 곧 사회 개혁운동이기도 하다.

 

놀라운 것은 공산주의자들과 독재자들의 묘지일수록 크다는 점이다. 김학준은 이렇게 지적했다. ꡒ옛 소련의 크렘린 외벽(外壁)국립묘지를 그대로 본 떠 동베를린에 세운 국립묘지에 동독 건국의 아버지 격인 올브리히트가 묻혀 있다. 어디 동독뿐이었는가. 지금은 모두 사라진 옛 소련의 레닌과 스탈린, 유고슬로비아의 티토, 불가리아의 디미트로프, 체코슬로바키아의 고트발트, 알바니아의 호자 등 모두 거창하게 마련되었다. 시체는 엄청나게 비싼 돈을 들여 미라로 처리됐다. 그러나 그들은 뒷날 대체로 파묘(破墓)나 이장(移葬)의 수모를 겪어야 했다. 백성들의 원한이 뒷날 그들을 끌어낸 것이다.ꡓ그러나 서독은 달랐다. 서독 총리가 됐던 아데나워, 그의 후임 에르하르트, 그리고 사회민주당 당수로는 최초로 서독 총리가 됐던 브란트등은 모두 국립묘지 또는 기념관에 묻힌 것이 아니라 고향에 자리잡은 서민들의 공동묘지 한 구석에 잠들고 있다는 것이다. 묘역도 묘비도 보통 사람들의 것과 똑같다. 아데나워의 경우 자동차에서 내려 한참 걸어 올라가야 겨우 만나게 되고 브란트의 묘비에는 ꡐ빌리 브란트ꡑ라는 두 단어만 쓰여 있을 뿐 그 화려한 공적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표시되어 있지 않다고 했다.

 

김학준은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중국만이 유일한 예외라고 했다. 일테면 저우언라이와 덩잉차오 부부가 대표적인 인물로 중국 공산당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저우는 장례 자체가 인민에게 폐가 된다며 아주 간소하게 화장할 것을 부탁했고 덩은 수의를 마련한다는 것도 인민에게 부담을 주며 평소에 입던 옷으로 염을 한 뒤 화장하라고 유언했다. 모두들 재가 되어 중국 강산에 뿌려져 무덤조차 없다. 여덟 원로들 가운데 한 사람이던 리셴넨도 중국을 개방과 개혁으로 이끈 역사의 거인 덩샤오핑도 최근의 양상쿤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이런 흥미 있는 결론을 남긴다. ꡒ아마 지도자들의 이러한 자세가 모든 공산정권들이 무너지는 역사의 전환기 속에서도 중국의 공산정권을 존속시키는 힘이 될 것이다.ꡓ

 

하물며 우리 기독교인들은 죽음을 극복하고 절망을 이겨냈다고 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무엇이 두려워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의 사역을 제한할 것인가? 과연 하나님은 뼈라는 잔해가 있어야만 우리를 부활시킬 만큼 능력이 제한되신 분이신가? 우리보다 믿음이 훨씬 뛰어났던 순교자들 경우 그들은 불 속에서 태워졌다. 그들은 모두 지옥 불에 던져졌단 말인가? 더구나 역사이래 많은 무덤들은 파헤쳐지고 전쟁에 의해 훼손되기도 했다. 베드로며 사도바울 그리고 선교역사의 그 많은 인물들의 뼈는 어디에 잠들어 있으며 제대로 보존되어 있는가? 이미 뼈도 흔적도 찾아볼 길 없는 그들은 과연 지옥불에라도 떨어졌단 말인가?

 

굳이 신학적인 질문이 아니라도 우리는 우매한(?)질문 앞에 스스로 답해야 할 때이다. 만약 이 문제만 해결된다 해도 우리는 한 알의 밀알로 생명을 밝히는 일에 앞장서는 그리스도의 일꾼들이 될 것이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너희는 그 거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좇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 너희는 나의 법도를 좇으며 나의 규례를 지켜 그대로 행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한해 5조원이 관과 함께 땅 속으로

 

매년 여의도 면적의 1.2배 묘터 생겨나

선진국, 화장이 장묘 형식의 대부분 차지해

 

 

저축 추진 중앙 위원회가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상가당 조의금 규모는 1천 9백 5만원이었으며 한해 평균 사망자 수인 25만 명으로 곱하면 2조 7천 3백 75억원이 우리 나라 전체 한 해 평균 조의금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다 문상객들의 날방 새기를 일당 개념으로 처리하면 ꡐ문상 경제학ꡑ의 규모는 더욱 커진다. 주먹구구식으로 한 상가당 평균 조무객 수를 최소 3백명으로 잡고 교통비를 포함한 이들의 하루 일당을 3만원으로 잡게 되면 대충 잡아 본 총 조문객 수(25만명 X 3백명)는 7천 5백만명이다. 여기다 하루 일당을 3만원으로 쳐서 곱하면 2조 2천 5백억원이 된다.

 

이를 평균 조의금과 합치면 4조9천8백75억원으로 우리 나라 한해 예산 (70조원)의 7%가 넘는 금액이다. 여기에다 장례비용까지 포함하면 천문학적인 돈이 관속으로 사라지는 셈이다.

 

이 뿐일까? 97년말 현재 국내의 묘지 수는 약 1천9백98만 여개가 된다. 이는 전 국토의 1.2%에 해당되는 것으로 산림의 70%를 차지하고 있는 우리 나라 국토의 구조하에서는 생산공장의 3.5배에 해당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에다 매년 20여만 개의 신설묘지가 생겨난다. 여의도 면적의 1.2배 크기의 거대한 묘터가 해마다 만들어지고 있는 셈이다.

 

선진국에서는 이런 화장이 장묘 형식의 대부분을 차지하거나 전반적인 추세로 자리잡고 있다. 가까운 일본만 해도 메이지유신 이후 정책적 장려와 행정지도 덕분에 화장이 97%를 차지하고 있다. 홍콩은 63년부터 화장을 적극 권장한 결과 73%의 화장율을 보이고 있다.

 

이런 선진문화와 달리 한국은 어떻게 해서 매장이 보편적인 장묘형태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일까? 여기에는 우리 나라만의 독특한 효 사상이 자리잡고 있다. 어제까지만 해도 곁에 있던 부모를 화장해 강과 산에 뿌리는 불효 막심한 일을 저지를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풍수지리사상도 한 몫을 거들었다. 지난 96년 한국토지행정학회 조사에 따르면 우리 나라 사람의 56.7%가 조상이 묘를 잘 쓰면 후손이 덕을 본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또 한가지의 요인은 묘지가 단순히 주검을 안치하는 장소가 아니라 산 자가 죽은 자를 찾아가 그리워하는 장소이며 추석때 산소를 찾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문화로 인해 귀성객 사망자수가 연간 수백 명이나 되는 것도 곱씹어 봄직하다. 왜 굳이 한차례여야 할까? 또한 이런 문명시대에 제사라는 미신행위는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가? 만약 교회당근처에 납골당만 설치한다 해도 매주일 돌아볼 수 있을 터인데 그런 사고의 발상조차 없다.

 

"건강한 사람으로 부활하려면

건강할 때 죽어야 하겠네요"

 

장기기증에 대한 모순과 편견이 동일하게 적용

성경에서 구체적인 근거 찾기는 힘든 건 사실

 

 

그리스도를 대적하여 높아진 잘못된 이론들

 

"전 절대로 안주 기증 같은 것은 못해요."

"왜요? 어차피 다 두고 떠나는 거 아니에요."

"그러면 내가 부활할 때 애꾸로 부활하란 말이에요."

"아니, 누가 그런 말을 해요."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도 부활하실 때 못자국을 그대로 가지고 부활했고 옆구리의 창자국도 그대로 남아 있었잖아요."

 

(그렇다면 오늘날 장애우들은 모두들 장애우로 부활한다는 것일까? 암으로 고통을 받다 일그러진 얼굴 그대로 이 땅을 떠난 사람들은 암환자로 부활한다는 말인가? 더구나 늙은 노인네로 죽으면 쭈글쭈글한 노인네로 부활할 것 아닌가?)

 

"그렇군요. 그렇다면 건강한 사람으로 부활하려면 건강할 때 죽어야 하겠네요."

"그건 또 무슨 소리에요?"

"아니 생각해 봐요. 애꾸로 죽으면 애꾸로 부활한다면서요. 건강하고 싱싱한 사람으로 부활하려면 지금 죽어야 되는 거 아니에요."

"……"

 

이런 모순과 편견이 장기기증에만 있는 것일까? 요즈음 사회의 이슈가 되는 화장문제만 해도 그렇다. 왜 그렇게 매장을 고집하는 것일까? 그 동안 교회는 화장을 하면 안된다고 가르쳐 왔던 것이 사실이다.

 

필자가 부교역자로 어느 교회를 섬기고 있을 때도 그랬다. 당시 누군가가 자살해 죽었는데 자살한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거슬렸으니까 화장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죽은 아이들은 왜 화장을 하는가? 미혼은 매장을 하지 말라는 가르침이라도 있단 말인가?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 자를 위한 예배는 똑같이 드려졌다는 점이다. 죽은 자를 앞에 두고 유족들에게 상처를 줄 수없어서일까? 우리는 그 많은 질문들을 묻지 않는다. 묻는 것 자체가 불경스러워서였던 것인가?

 

솔직히 말해 장례를 중요시하여 매장을 원칙으로 하였다. 아브라함과 그 가족들은 모두 사유 묘지에 정중하게 매장되었다 (창 25:9, 35:29, 49:31, 50:13). 시온에는 다윗과 역대 왕이 매장된 묘지가 있다. 그리고 아모스는 에돔왕의 뼈를 불살라 회를 만들었다고 모압인을 책망하였고(암 2:1), 전사한 사울과 그 아들들의 시체를 불사르고 그 뼈를 장사하고 7일간 금식하였다(삼상 31:12,13)

 

신명기서는 불순종에 대한 저주가 "네 시체가 공중의 모든 새와 땅 짐승들의 밥이 될 것이나 그것들을 쫓아 줄자가 없을 것" (신 28:26) 으로 표현되는가 하면 전도자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비록 일백 자녀를 낳고 장수하여 사는 말이 많을지라도 그 심령에 낙이 족하지 못하고 또 그 몸이 매장되지 못하면 낙태된 자가 저보다 낫다." (전 6:3)고까지 했다.

 

구약만일까? 신약의 장례에서도 우리는 화장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를 찾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솔직히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욥바의 여제자가 운명했을 때 시체를 씻겨 다락방에 두었고 (행 9:37) 예수가 운명한 후에도 시체를 씻고 정한 세마포로 싸서 (마 27:59, 요 19:40) 몰약과 향품으로 발랐다 (요 19:40). 나사로의 시체는 수족을 천으로 묶었고 얼굴을 수건으로 싸매었다 (요 11:44).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 많은 사람이 큰 소리로 울었고 피리 부는 자와 떠드는 무리가 있었다(마 9:23-26). 나인성 과부의 아들의 장례기록을 보면 (눅 7:11-17) 시체는 관에 넣어 사람들이 상여를 메고 묘지를 향해 가는데 그 어미는 울고 조상객들은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성경안에는 염도 있고 곡하는 일도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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