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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신앙고백서.

에반젤(복음) 2021. 7. 19. 14:44

한국교회의 신앙고백서.

 

 

종교개혁 이후의 신앙고백서들은 천주교의 교리와 가르침에 대항한 산물이다.

오직 천주교의 주장에 대항하고 반박하기 위하여 개진되었다.

따라서 그 내용들은 성경이 말하는 초점에서 어긋나 있다.

개혁주의 신학은 무엇에서 시작되는가?

성경의 영감론이다.

이는 천주교의 교황무오설에 반박하기 위함이다.

개혁주의의 영감론은 무엇인가?

성경은 기록된 말씀 일점일획도 어김이 없이 영감되었다는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에 하나라도 더하거나 빼면 안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이른바 축자영감론이다.

 

미국의 근본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과 투쟁하는 가운데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근본주의자들로부터 파송된 선교사들을 통하여 세워진 교회이다.

그들은 자유주의자들과 투쟁하는 가운데서

근본주의적인 복음의 영역을 확대하는 것도

자유주의와의 투쟁에서 승리하는 한 방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자유주의자들에게서 승리하는 일에 있어서

근본적인 원리만 같으면 함께 할 수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장로교는 성결교와 감리교와 함께 하였으며

그들은 선교구역을 나누어서 선교하였다.

미국의 근본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만 제외하고 한국을 복음화하는데 하나가 된 것이다.

 

한국교회는 미국의 근본주의자들로부터 복음을 전해 받은 교회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전해 준 신앙고백서를 수납하여 교회의 신앙고백으로 확정하였다.

따라서 한국교회가 접한 신앙고백서들은 근본주의 선교사들의 영향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신앙고백서를 성경이 말하는 바를 따라

검증하는 절차도 없이 그대로 수납한 것이다.

그리하여 신앙고백서는 한국교회에게 최고의 권위를 갖게 되었다.

어느 정도까지 권위를 갖게 되었는가?

신앙고백서의 가르침을 따라 성경을 번역하고 해석하기도 하였다.

신앙고백서의 가르침에 합당하도록 성경 본문을 번역하고 해석한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이단의 가르침을 검증할 능력이나 관심도 없다.

이는 성경보다 신앙고백서(교리)에 더 높은 권위를 두기 때문이다.

 

한 예를 살펴보자.

개역성경은 로마서 3장 22절을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고 번역한다.

그러나 헬라어 원문에는 소유격인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

이라고 기록한다.

그런데 한글로 번역할 때에는 목적격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라고 번역하였다.

이처럼 잘못된 번역은 현재에도 아무런 문제의식도 없이 그대로 사용된다.

이는 종교개혁 신앙고백서에 충실한 결과이다.

이는 신앙고백서의 가르침에 의거하여 성경을 번역한 산물이다.

이는 역사를 배제하고 신구약 성경을 동일선상에 놓고 해석한 신앙고백서의 결과물이다.

 

개혁주의의 율법관도 그러하다.

개혁주의에 의하면 율법은 인간이 지킬 수가 없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구원과 기준이다.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하여 연약하기 때문에 율법을 지킬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구약의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라고 말한다.(시19:7-9)

또한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자로다”

라고 노래한다.(시1:2)

 

그런데 신약의 바울은 율법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말한다.

그는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다.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

우리가 율법 아래에 있을 때, 곧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다.

율법 아래는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는 것과 같다.

우리가 어렸을 때에는 율법, 곧 이 세상 초등학문 아래에서 종노릇 하였다.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 곧 율법에로 돌아가려고 하느냐”

라고 강하게 질책한다. (갈2:16, 4:1-11)

개혁주의 축자영감론에 의하면

이러한 신구약에서의 서로 다른 언급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는가?

 

율법은 하나님 나라 언약의 법이며 역사적인 통치의 법이다.

십계명은 나라의 헌법이다.

여호와의 여러 계명과 율례는 십계명에 의거한 시행령이다.

율법에 언급되지 않는 부분은 재판장의 판단과 율법 선생의 가르침에 의거하여 보충되었다.

이러한 율법의 시행방식을 통하여 모세율법의 통치는 백성들의 삶의 구석구석에 미쳤다.

그러므로 율법은 개혁주의 가르침처럼 하나님의 절대적이며 도덕적인 의지가 아니다.

율법은 역사적인 하나님 나라의 언약의 법이고 통치의 법이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고 섬기도록 주어진 생명의 법이다.

백성들이 율법에 부착하여 언약에 신실하면

여호와께서는 사람 판단관들을 통하여 그들의 의로운 여부,

곧 언약에 신실한 여부를 판단하시고 의롭다고 선언하셨다.(눅1:6, 빌3:6)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역사이다.

성경을 이루는 밑바탕은 역사, 곧 창조된 세상의 질서이다.

역사가 배제되면 성경은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상상의 세계일 뿐이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백성과는 상관이 없는 판타지 소설일 뿐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도 세상의 자기백성과 상관이 없는 분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사역도 그의 백성에게 효력을 미치지 못하는 그림의 떡일 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영원세계에 계시지만

그의 백성들은 이 세상에 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역사를 배제하면 모든 한계성이 무시된다.

율법과 복음의 불연속성을 말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발전도 생각할 수도 없다.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한 의도 말할 수 없다.(롬3:21)

율법의 종결과 이제 나타난 하나님의 새로운 통치를 말할 수도 없다.(롬3:21-22, 갈3:23-29)

 

이제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롬3:21)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율법 아래에 보내셔서

율법과는 다른 새로운 통치를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아들은 종말의 천국왕이시다.

천국왕의 오심은 그 나라의 임함이다.

종말의 천국은 아들을 아들의 나라이다.

이는 아들을 통한 하나님의 새로운 통치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고 외쳤다.(마3:2)

예수께서도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고 전파하셨다.(막1:15)

바울은 율법 아래에 있을 때를 가리켜서

“우리가 어렸을 때에는 종과 다름이 없었다.

그 때에는 이 세상 초등학문, 곧 율법 아래에서 종노릇하였다.”

라고 말한다(갈4:1-3)

이러한 증거를 통해서

율법의 통치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아와 새로운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거하라고 권면한다.

 

믿음은 율법을 굳게 세운다(롬3:31)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새로운 통치는(롬3:22)

율법을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굳게 세워서 완성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구원과 은혜는 율법이 주지 못하는 것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은 율법이 주지 못하는 것을 주셔서

하나님도 의롭고 그의 백성도 의롭게 한다.(롬3:22-24)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

곧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은 율법을 굳게 세워서 완성한다.(롬3:22)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실실함에 참여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통치는(롬3:22)

율법을 완성하여 굳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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