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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주기도문 강해

에반젤(복음) 2020. 10. 3. 20:43

주기도문 강해

 

 

서론 : 기도는 하나님과 하나님을 믿는 성도간의 대화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고 가까이 나아가며 그 뜻대로 살기 위해서는 기도가 반드시 필요하다. 따라서 기도에 대하여는 경건한 많은 사람들이 좋은 글을 남겼다. 그러나 바른 기도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기본적인 교훈은 역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성경 가운데는 기도에 대한 많은 언급들이 나온다. 시편은 기도의 보고라고 할만 하다. 그리고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위인들은 기도의 사람들이었다. 아브라함(창 20:17), 야곱(창 32:26-31), 모세(민 11:2), 여호수아(수 10:12), 한나(삼상 1:12), 사무엘(삼상 12:18), 다윗(시 51:1), 엘리야(왕상 17:1), 엘리사(왕하 6:17), 다니엘(단 6:10) 등 그 예는 성경 가운데서 무수히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보다 더 바람직한 실례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아보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즉 세례 받으실 때(눅 3:21), 제자들을 부르실 때(눅 6:12, 13), 변화하실 때(눅 9:28, 29), 고난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막 14:32-42) 심지어는 십자가상에서 죽음에 직면해서도 (막 15:34 막 15:34) 기도하셨다. 이러한 모든 기도는 기도의 중요성과 더불어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에 대해 많은 암시를 주고 있다.

 

성경 가운데는 이와 같은 여러 기도의 실례와 교훈이 무수히 많이 등장하나 가장 깊이 있는 교훈을 주며 좋은 본보기가 되는 것은 "주기도"이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 문답에 나오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 전체가 기도에 있어서 우리를 지도하기에 유익하지만 그리스도께서 그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 형식, 즉 주기도는 특별한 가르침을 준다. 따라서 이 기도문은 예배나 집회에 있어서, 그리고 개인 신앙생활에 있어서 거듭 사용되어 왔다.

 

이 주기도는 성경 가운데 두군데 기록되어 있다(마 6:9-13눅 11:2-4). 그 가운데 누가복음의 것은 짧고 마태복음의 것은 조금 기나 그 본질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다. 이처럼 동일한 가르침이 두 곳에 중복되어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은 주기도가 계속 반복되어 교육되어야 할 만큼 중요함을 보여 준다. 실로 주기도는 어린아이라도 쉽게 외울 수 있을 만큼 단순한 기도이나, 어떠한 학자도 내용의 심오함을 능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이 있는 것이다.

 

주기도는 기본적으로 경배와 간구와 송영으로 되어 있다. 시작 부분인 경배는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에 대한 찬미의 내용을 담고 있으며 종결 부분인 송영에는 또다시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신데 대한 감사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주기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간구는 모두 일곱 가지로 되어 있는데 처음 세 가지는 하나님과 관계되는 것이고, 이어지는 네 가지는 인간의 일상적인 관심사와 관계된 것이다. 이를 보다 세분하여 보면 첫째 기원은 예배의 대상이 되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간구이고, 두 번째 기원은 하나님의 지배가 임하기를 원 하는 간구이며, 세 번째 기원은 하나님의 뜻의 실현을 원하는 간구이다. 이처럼 먼저 하나님에 대한 기원이 나오는 것은 성도 생활의 제일의 관심사가 하나님이어야 함을 보여 준다.

 

이어지는 넷째 기원은 일용할 양식에 대한 간구이고, 다섯째 기원은 죄사함에 대한 간구이며, 여섯째 기원은 사단의 시험에서 구원받기를 원하는 간구이며, 마지막 일곱째 기원은 악에서 보호받기를 간구하는 내용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성도들로 하여금 자신과 이웃들에 대한 문제를 기도하게 함으로써 축복의 길을 열어 주셨다.

 

이제 주기도문 해설에 들어가기에 앞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성도에게 주신 가장 고귀한 선물 가운데 하나인 주기도를 잘못 사용함으로써 오히려 죄를 짓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 심오한 내용에 별반 관심을 두지 않고 형식적으로 암송하는 것이나 주기도 자체에 어떤 주술적인 힘이 있는 것처럼 미신적으로 외우는 것은 엄히 경계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도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금하셨다(마 6:7). 그러나 이는 주기도 사용을 자제하라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직접 가르치셨을 뿐 아니라 교회의 역사를 통하여 아주 중요시되었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널리 사용되는 주기도를 바로 사용함으로 더 큰 은혜를 체험하여야 한다.

 

 

제1장 기도의 대상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마 6:9)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는 주기도문의 서두는 그 다음에 이어지는 모든 기도의 적절한 전제가 된다. 주기도문의 서두는 기도의 대상이 되시는 분이 누구인가를 제시하며,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과 기도를 드리는 성도와의 관계를 명확히 보여준다. 즉 기도하는 자는 마땅히 기도의 대상이신 주님을 향해 자녀의 영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기도는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완전함을 경건히 묵상하며 고백함으로 시작해야 한다. 은혜의 보좌에 가까이 다가갈 때 우리는 하나님의 최고 주권과 권능에 대한 적절한 두려움을, 그러면 서도 주님의 아버지다운 선하심에 대한 거룩한 화신을 가져야 한다.

 

이와 같이 주기도문 서두에 나타나는 분명한 교훈은 먼저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는 분의 본질과 성도의 영적 아버지로서의 영광에 대한 우리의 신랑을 고백하고 나서 기원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편에 이러한 예가 많이 있다. 적절한 예로서 시 8:1을 보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먼저 이 도입부에 내재되어 있는 신앙의 내용을 살펴보자. 이것은 하늘에 계셔서 인간으로서는 가까이 할 수 없는 위대한 하나님이 큰 은혜를 베푸셔서 기꺼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 베풀어 주실 것을 주신다는 것을 함축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알려 준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로서의 주님께 기도하게 한 것은 자녀된 우리에게 주님의 사랑과 권능을 베풀어 주실 것을 확실히 보장해 준다. 따라서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애정과 경건한 주의력을 고무시키며, 기도의 효력에 대한 확신을 굳게 한다.

 

기도가 열납되고 효과적이 되려면 다음 세 가지 요소가 필수적이다. 열심(fervency), 경배심(reverence), 확신(confidence). 주기도문의 서두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면서 시작하는 것은 우리 속에 있는 바로 이 세 가지 요소를 각각 각성시키기 위해서이다.

 

열심은 우리의 애정을 실행으로 옳긴 결과이다. 경배심은 우리가 하늘 보좌를 향해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높아질 것이다. 확신은 기도의 대상을 우리 아버지로 여길 때 깊어질 것이다.

 

예배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한다(히 11:6).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확신을 깊게 하고 우리 마음의 진기한 소망과 가장 강렬한 사랑을 자아내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주기도문의 서두보다 더 적절한 것이 어디 있을까? 죄인인 우리가 담대하게 주님 앞에 나아가 우리 영혼의 소원을 쏟아 놓는 데에 그것이 얼마나 큰 격려가 되는가! 비인격적인 제일 원인(firstcause)에 호소하는 것은 안 될 말이다. 큰 추상 개념을 숭배하거나 그것에 간구하는 것은 더 더욱 안 될 말이다. 그렇다. 가까이 오라고 우리를 부르는 것은 인격을 가진 분이시며, 거룩한 분이시며,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관심사를 염두에 두고 있는 분이시며, 심지어 우리의 아버지가 되는 분이시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요일 3:1)

 

하나님은 인간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당연히 모든 인간에 대해 부권을 가지신 아버지이시다.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한 하나님의 지으신 바가 아니냐?"(말 2:10).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사 64:8).

 

아무리 불경건하고 타락한 자라 하더라도 죄악된 것을 청산하고 탕자처럼 돌아오기만 하면 기꺼이 맞아 줄 사랑하는 아버지가 있다는 것을 보장해 주는 것이 바로 위에서 열거한 성경 구절이다. 주님께서는 까마귀의 울음소리도 들으시는데(시 147:9) 어찌 이성적인 피조물의 요청에 못 들은 척 하시겠는가? 마술사 시몬도 아직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을 때 사도로부터 그 악함을 회개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지시를 받았다(행 8:22, 23)

 

그렇지만 오직 그리스도인만이 기도의 깊이를 체험하며 그 완전한 의미를 알 수 있다. 그것은 그와 하나님 사이에는 단순히 자연적인 부자 관계 보다 다음과 같은 더 높은 관계를 가지기 때문이다.

 

첫째, 하나님은 영적으로 믿는 자들의 아버지가 되신다.

 

둘째, 하나님은 그 택하신 자들의 아버지가 되시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엡 1:3).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의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의 하나님께로 올라간다"(요 20:17)라고 명백히 알리셨다.

 

셋째,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영원한 작정(decree)에 의해 그 택하신 자들의 아버지가 되신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5)

 

넷째, 하나님은 그 택하신 자들이다시 태어나 "신의 성품에 참예 하는 자"(벧후 1:4)가 되는 중생(regeneration)에 의해 그들의 아버지 가 되신다.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

 

따라서 주기도문의 "우리 아버지"라는 말씀은 영적 자녀로서의 지위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영적 자녀된 자로서 의무가 있음을 뜻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을 향해 취해야 할 성도의 바른 태도와, 걸맞는 행위를 하여야 함을 가르쳐 준다. 즉 주님의 자녀로서 육신의 아버지보다 훨씬 더 주님을 "공경"해야 하며(출 20:12:엡 6:1-3참고) 주님께 순종해야 하며, 주님 안에서 기뻐해야 하며 매사에 주님을 기쁘게 하려고 애써야 한다. 또한 "우리 아버지"라는 어귀는 완전히 은혜로 아버지가 되신 하나님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가 된 성도에 대한 관심에 대해서도 가르쳐 준다. 내가 기도하는 대상이 "내 아버지"일 뿐만 아니다 "우리 아버지"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는 형제들을 위해 기도함으로써 그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나타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필요한 것에 신경을 쓰는 만큼 그들이 필요한 것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한편 "하늘에 계시는"이라는 표현은 앞에서 본 "우리 아버지"란 어구와 균형을 이룬다. "우리 아버지"란 표현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혜에 관한 것이라면, "하늘에 계시는"이란 어구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위엄에 관한 것이다. 즉 전자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의 긴밀함과 친밀함에 대해 가르쳐 주고 있다면, 후자는 하나님이 우리보다 무한히 존귀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알려 준다. "우리 아버지"라는 말씀이 확신과 사랑을 불러일으킨다면,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은 우리를 겸손과 경외의 마음으로 가득 채울 것이다.

 

이 두 가지는 항상 우리의 정신과 마음에 함께 있어야 한다. 만약 후자 없이 전자만 있으면 거룩하지 못한 채 친밀함에 쏠리기 쉽다. 또한 전자 없이 후자만 있다면 냉랭함과 두려움만 남게 될 것이다. 따라서 전, 후자가 서로 잘 조화를 이를 때 두 가지 종류의 불행으로부터 보호받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긍휼과 능력, 그 헤아릴 수 없는 사랑과 측량할 수 없는 고귀함을 함께 올바르게 묵상할 때 영혼에 적절한 균형이 잡혀 유지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바로 그와 같은 복된 균형 상태를 어떻게 유지했는가는 그가 성부 하나님을 묘사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말씀을 사용한 것을 보면 알수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엡 1:17).

 

한편 "하늘에 계신"란 표현은 하나님이 하늘에만 속하여 계신다는 것이 아니다. 솔로몬의 말을 상기해 보라.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왕상 8:26). 하나님은 무한하시며 무소부재하시다. 그러나 특별한 의미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하늘에" 계신다. 왜냐하면 그곳이야말로 주님의 위엄과 영광이 가장 뛰어나게 드러나는 곳이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사 66:1) 이것을 깨달을 때 반드시 우리는 가장 깊은 경배심과 경외감에 가득 차게 된다. "하늘에 계신"이란 말씀은 우리 아버지가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책임져 주실 수 있다는 것을 선포한다.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시 115:3).

 

그러나 주님의 전능하신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우리 아버지"으로서 자비를 베푸신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시 103: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에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

 

마지막으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이 복된 말씀에서 우리는 하늘을 향해 나아가는 나그네 길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게 된다. 우리의 고향은 바로 하나님이 계신 하늘이기 때문이다.

 

 

제2장 첫째 기원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은 그리스도의 모범적인 기도에 포함된 기원 중 첫 번째 것이다. 주기도문에는 일곱 가지의 기원이 있으며 이 기원들은 의미상으로는 각각 셋과 넷의 두 그룹으로 나뉘어진다. 즉 처음 세 가지 기원은 하나님께 관계되는 것이고, 뒤의 네 가지 기원은 우리 자신의 일상적인 관심사에 관계되는 것이다.

 

십계명에서도 비슷한 구분을 할 수 있다. 즉, 처음 네 계명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의무를 가르치며 뒤의 여섯 계명은 부모와 이웃을 향한 우리의 의무를 가르친다. 기도에 있어서 첫째 의무는 자신을 무시하고 우리의 생각과 욕망과 간구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이 기원이 기도를 드림에 있어 반드시 맨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위대한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은 만물의 궁극적인 목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른 요구는 모두 이것에 종속되어 따라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이 욕망을 지배하지 않으면 우리는 올바르게 기도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깊이 느끼며 간절한 마음으로 그것을 영화롭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그 거룩함과 모순되는 것을 달라고 요청해서는 안 된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그 장엄한 의미를 생각하며 이 기원을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 그러나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하고자 할 때 자연히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질문이 네 가지가 있다. 첫째, 거룩히 여김이라는 말씀이 뜻하는 것은 무엇인가? 둘째, 하나님의 이름이 가지는 의의는 무엇인가? 셋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의 의미는 무엇인가? 넷째, 왜 이 간구가 맨 먼저 나왔는가?

 

첫째, 거룩히 여김이라는 말은 희랍어 동사 "하기아조"(hagiazo)를 번역한 것이다. 이 말의 뜻은 "성스럽게 사용하기 위해 따로 떼어 두는 것"이다. 따라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말씀은 그 어떤 것에도 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이름이 존경과 경배와 영광을 받으며 거룩한 그 명성이 널리 퍼져 찬미되도록 하나님이 최고의 존경과 영예 속에 자기 이름을 두시리라는 경건한 바램임을 의미한다.

 

둘째,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어 신자의 마음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떠올리게 한다. 시 5:11에서 이것을 볼 수 있다. "주의 이름(말하자면 주님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 하리이다. "시 20:1에는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야곱의 하나님 자신이 너를 높이 드시며'라는 뜻이다. 또한 "여호와의 이름 큰 견고한 망대라"은 잠 18:10 말씀은 말하자면 여호와 자신이 견고한 망대라는 뜻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 자신을 나타낸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여호와의 이름을 반포하실" 때 자신의 복된 속성들을 열거하신 것은 인상적이다(출 34:5-7). 이것이 "주의 이름(즉, 주의 완전한 속성들)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 하오리니"(시 9:10)라는 표현의 참된 의미이다.

 

그러나 더 상세히 말하자면,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이 자신에 관해 우리에게 계시하신 모든 것을 우리 앞에 제시한다.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드러내신 것은 전능자, 만군의 주, 여호와, 평강의 하나님, 우리 아버지 등과 같은 호칭을 통해서이다.

 

셋째, 주 예수께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며"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치셨을 때, 우리 마음에 어떤 생각을 품게 하시려는 의도였을까? 먼저 가장 넓은 의미에서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이 "그 통치하시는 섭리에 의해 만물을 지도하시며 통치하셔서 자신을 영화롭게 하신다"(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는 것과 관련하여 설명할 수 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 자신이 그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기를, 즉 그 섭리와 은혜로써 율법과 복음의 선포를 통해 그것을 알게 하셔서 경배 받으시기를 기도하게 된다. 더욱이 우리는 주님의 이름이 바로 우리 속에서, 그리고 우리에 의해 거룩하게 되고 찬미 받으시기를 기도하게 된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본질적인 거룩함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어서가 아니다, 그 거룩함의 영광을 더 뚜렷이 드러낼 수 있어서이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가 다음과 같은 권고를 받는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찌어다"(시 96:8)

 

우리 자신에게는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할 힘이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입술에 수동 명령형의 동사를 두시고 우리로 하여금 우리 아버지께 "주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하소서! "라고 명령하도록 가르치신다. 이러한 명령조의 기원에는 주님이 이사야를 통해 "내 손으로 한 일에 대하여 내게 부탁하라"(KJV에서는 command, 즉 명령하라고 되어 있음)는 말씀의 취지에 따라 우리 아버지께서 반드시 하여야 할 일을 하시도록 요청하라는 가르침이 있는 것이다!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그 피조물 가운데에서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함은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 5:14)

 

하나님이 자신의 생각을 그처럼 분명히 밝히셨으니, 신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사람들 가운데 거룩하게 되기를 바라야 하며 계시된 하나님 영광이 이 땅에 더욱 더 드러나게 하도록 결심해야 한다.

 

우리는 특히 기도로써 그렇게 해야 한다. 그 위대한 목적을 이를 권능이 오직 하나님 자신에게만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도로써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 있어 하나님을 거룩하게 하고 영화롭게 할 수 있는 성령의 능력을 받게 된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함으로써, 우리는 지 극히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에게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로 그러한 분으로 인정하고 경배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게 된다. 맨톤 (Manton)이 그것을 강력히 표현했듯이.

 

이 기원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 편에서 바라고 약속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모든 기도는 바램의 표현인 동시에 우리가 요청한 것을 해내도록 우리 자신에게 스스로 지운 무조건적 맹세 내지는 엄숙한 의무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도는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가운데 자기 스스로에게 설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말하는 것은 자신에게 경고를 주기 위해서이다. 전지하신 하나님께 그 무엇을 알 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자신을 깨우치기 위해서이다.

 

이처럼 꼭 알아야 할 기도의 의미가 오늘날 강단에서는 제대로 강조되지 않고 있다. 만일 주님께 경건한 말을 늘어놓으면서 힘을 다해 그 말에 일치되는 삶을 살 의향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우롱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주님의 이름을 거룩히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최고의 자리를 내어 드린다는, 즉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생활의 모든 것 위에 주님을 올려놓는다는 말이다. 이러한 고귀한 삶의 목적은 "우리 이름을 내자"라고 말하면서 바벨탑을 세운 사람들(창 11:4)과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라고 말한 느부갓네살(단 4:30)의 예와는 완전히 반대된다. 사도 베드로는 "너희 마음에 있는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라"고 명령한다(벧전 3:15).

 

주님의 위엄과 거룩함에 대한 경외심이 우리 마음에 가득 차서 우리의 전 내적 존재가 주님께 완전히 그리고 기꺼이 복종해야 한다. 주님께 올바르게 예배하고 열납될 만하게 섬기기 위해 주님에 대한 바른 안목과 깊은 지식을 얻으려고 기도하며 노력해야 한다. 이 기원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통하여 자신을 거룩하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기를 바라는 우리의 소원을 표현할 분만 아니다,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을 알고 경배하고 영화롭게 하기를 바라는 우리의 갈망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 기원을 드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그 경륜을 통해 세상에 더욱더 드러나며 퍼지기를, 주님의 말씀이 달리고 달려서 죄인들의 회심을 이루며 성화해서 영화롭게 되기를, 주님의 모든 백성이 더욱 거룩해지기를, 그리고 사람들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일이 모두 방지되고 제거되기를 기도한다(죤 질, John Gill).

 

따라서 이 간구에는 필요한 성령을 부어 주시며, 신실한 목자를 세워주시며, 교회를 감동시켜 성경적인 원칙을 유지하게 하시며, 성도들을 각성시켜 은혜를 베풀게 해 달라는 요청이 담겨져 있다.

 

넷째, 그러면 이제 왜 이것이 주기도문의 첫째 기원이 되었는지를 살펴보자. 말하자면 이것이 다른 모든 요구의 유일한 법적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의 주된 관심사요 큰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께 이 기원을 드릴 때, 우리는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든, 내가 얼마나 낮은 곳에 떨어지든, 내가 지나가야 할 물이 아무리 깊든 상관없이 주여, 내 안에서 그리고 나를 통해 찬미를 받으소서"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성숙한 심령이 완전하신 우리 구주에 의해서 얼마나 복되이 예증되었는지를 보라.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요 12:27-28)

 

그리스도께서 고난의 세례를 받아야 했을 때도 주님의 큰 관심사는 아버지의 영광이었다. 다음 이 글에 이 기원의 의미가 아름답게 요약되어 있다.

 

오! 주여, 눈을 열어 주님을 바로 알며 주님의 권능과 지혜와 공의와 긍휼을 분별하게 하시며, 마음을 넓혀 주님 을 두려움과 사랑과 기쁨과 확신으로 삼아 마음으로부터 주님을 거룩하게 하도록 하시며, 입술을 열어 주님의 한없 이 선하심을 송축하게 하소서. 오! 주여, 그렇습니다. 눈을 열어 주님이 이루신 일에서 주님을 보게 하시며, 우리 뜻을 그 일에 나타나도록 주님의 이름을 향한 존경으로 채우고 또 그것을 받으셔서 우리가 그 뜻을 온전하고 거룩하게 펼 때 주님을 경배하게 하소서(퍼킨스, W. jerkins).

 

결론적으로 이 기원을 드릴 때 어떠한 마음을 가져야 할지에 대해 간략히 지적하고자 한다.

 

(1) 과거의 실수를 슬퍼하며 고백해야 한다. 교만한 마음, 냉랭한 열의, 완악한 의지, 불경건한 생활 등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데에 방해가 되고 그 이름을 모독시킨 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므로 이러한 죄를 고백하고 자신을 낯춰야 한다.

 

(2) 주님에 대한 충분한 지식, 우리 마음 속에 커가는 경외심, 커가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과 경배심, 그리고 올바른 은사 사용 등 주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은혜를 열심히 구해야 한다.

 

(3) 자신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여, 하나님의 따름이 불신자들에 의해 모독을 당하게 할 만한 것이 우리 행위에 없도록 해야 된다(롬 2:24).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제3장 둘째 기원

 

"나라이 임하옵시며"(마 6:10)

 

둘째 기원은 가장 짧지만, 우리 주님의 기도에 담긴 내용 중 가장 포괄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가장 이해되지 못하고 가장 논란의 대상이었던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따라서 다음의 질문들은 주의 깊은 고려를 요한다. 첫째, 이 기원과 바로 앞의 기원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둘째, 여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누구의 나라인가? 셋째, "나라"라는 단어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인가? 넷째,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말씀을 어떤 의미로 이해해야 하는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첫째 기원이 하나님의 영광 자체에 관심을 가지는 반면, 이어지는 둘째와 셋째 기원은 주님의 영광이 지상에 나타나 퍼지는 수단에 관계된다.

 

하나님의 이름이 뚜렷이 나타나게끔 영광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하며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에 비례한다. 그렇다면 이 기원과 그 앞의 첫번째 기원과의 관계는 분명해진다.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하나님의 위대한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그리고 나서 주님은 연이어 그 수단을 위해서도 기도하라고 지시하신다.

 

하나님의 영광을 퍼뜨리는 수단 가운데서 그 나라가 임하는 것만큼 영향력 있는 것은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라고 권고하신다. 그러나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해야 되지만 인간 스스로 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나라가 먼저 그 마음에 세워져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님의 통치에 자발적으로 굴복하기 전에는 하나님이 우리에 의해 영광을 받으실 수 없는 것이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여기에서 나라는 누구의 나라를 가리키고 있는이? 분명히 그것은 성부 하나님의 나라이지만,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와 별개의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딤전 3:15)가 그리스도의 몸 이외의 것이 아닌 것처럼, 하나님의 복음"(롬 1:16)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다르지 않은 것처럼, "그리스도의 말씀"(골 3:16)이 "하나님의 말씀"과 구별되지 않는 것처럼, 아버지의 나라도 그리스도의 나라와 다를 바 없다.

 

"아버지의 나라"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뜻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를 구별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어두움과 무질서의 나라인 사단의 나라(마 12:25-28)와 날카롭게 구별하려는 것이다. 사단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와 성격상 반대가 될 뿐 아니다 투쟁해야 하는 적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나라는 첫째로 또한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우주적 통치, 즉 모든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지배를 뜻한다.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대상 29:11)

 

둘째로 또한 특정적으로, 그것은 이 지상에 있는 주님의 은혜의 영적 영역을 뜻한다. 즉 이는 주님의 택하심에 의해 베풀어 주시는 은혜를 깨달올 수 있는 자들을 통해 외면적으로 인식된다(마 13:11과 막 4:11을 전후 문맥 속에서 살펴보라).

 

셋째로 또한 더욱 확정적으로 그것은 영적이면서 내적인 하나님의 나라인데, 여기는 중생에 의해 들어가게 된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수 없느니라"(요 3:5). 아버지와 아들이 본질상 하나인 것처럼 그 나라도 같다. 따라서 각 양상에 있어서도 그렇게 나타난다. 섭리의 양상에 관해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는 말씀은 세상의 통치에 있어서 성부와 성자께서 협력하는 것을 뜻한다(히 1:3).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그 아버지께서 맡기시고(눅 22:29) 세우심으로써(시 2:6) 왕의 중재적 지위에 계신다. 그러므로 그 나라가 특정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에 세워진 은혜의 다스림으로 간주될 때, "하나님의 나라"(고전 4:20)라는 명칭과 함께 "그의 사랑의 아 들의 나라"(골 1:13)로 불리는 것은 옳다.

 

궁극적인 영원한 영광이라는 측면에서 그 나라를 보면서 그리스도께서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우리와 함께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마시겠다고 맡씀하셨지만(마 26:29), 그것은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벧후 1:11)라고도 불린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말씀이 우리에게는 완전히 자연스럽게 보여야 한다.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계 11:15)

 

"여기서 그 나라의 양상 중 어느 것이 아직 미래적인 것으로 이해되고 있느냐?"나고 질문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나라는 태초부터 이미 존재해 왔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다스림이 새 하늘과 새 땅(벧후 3:13)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중에 완성될 것이라는 의미에서 그 나라는 미래적인 것임에 틀림없다. 그 때에는 그 나라의 시민으로서 성도의 전인격-영혼과 육체-이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자발적으로 복종하여 우리를 다스리는 주님의 통치가 완전하게 된다. 그러나 그 나라의 영원한 영광을 누리려면 이 땅에서 사는 날 동안 주님의 은혜로운 다스림에 개인적으로 복종해야 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은 다음 세 가지 특징을 지니게 된다.

 

"하나님의 나라는...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이러한 현재의 은혜의 다스림을 체험하는 사람은 믿음으로 주님께 기꺼이 순종하게 된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의 의가 그에게 전가되어 의로운 자가 된다는 특징을 지닌다. 더욱이 성령께서 그를 거룩하게 했기 때문에, 다시 말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거룩한 새 삶을 시작하도록 그를 따로 구별했기 때문에 그는 선한 양심의 의도 소유하게 된다.

 

이러한 사람은 또한 평강을 누린다는 특징을 지닌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양심의 평안이며 하나님의 백성들과 맺는 평화로운 관계이며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을 좇는 것이다(히 12:14). 이 개인적인 경건한 평강은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자로서 모든 사랑의 의무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유지된다(눅 10:27 롬 13:8). 의와 평강의 결과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은 또한 성령 안에서의 희락을 누리는 자라는 특징을 지니는데 이것은 모든 삶의 상황과 변화 중에서도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빌 4:10-14; 딤전 6:6-10).

 

한편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기도가 적용되는 곳으로는 세 군데가 있으며 이 기도에 내재되어 있는 의미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것은 이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외적 영역에 적용된다. "아버지의 복음이 선포되고 성령의 권능이 함께 하소서. 아버지의 교회가 강성하소서.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 커가며 사단의 역사가 무너지기를!"

 

둘째, 그것은 하나님의 내적인 나라, 말하자면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는 주님의 영적인 은혜의 다스림에 적용된다. "아버지의 보좌가 우리 마음에 세워지소서. 아버지의 법이 우리 삶 속에서 집행되며 아버지의 이름이 우리의 생활에 의해 찬미 받으소서."

 

셋째, 그것은 장래의 영광 중에 나타날 하나님의 나라에 적용된다. "사단과 그의 무리가 완전히 정복되고, 아버지의 백성이 영원히 죄에서 떠나고, 그리스도께서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사 53:11) 그 날이 속히 오소서."

 

하나님의 나라는 다음과 같은 단계를 밟아 개인에게 점진적으로 임한다. (1) 하나님이 인간에게 외적 구원의 수단으로서 말씀을 주신다 (롬 10:13-17). (2) 선포된 말씀이 인간 정신 속에 들어와 복음의 신비가 이해된다(마 13:23히 7:4-6히 10:32). (3) 성령께서 거듭 나게 하셔서,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다스림에 기꺼이 복종하는 신민으로서 그 나라에 들어간다(요 1:12,13 ;요 3:3, 5). (4) 죽을 때 속죄받은 자의 영혼은 죄에서 자유로와진다(롬 7:24, 25히 12:23). (5) 부활할 때 속죄받은 자들은 완전히 영화롭게 된다(롬 8:23).

 

오! 주여, 이 땅에서 나그네이며 순례자인 우리에게 주님의 나라가 임하소서. 아직 밖에 있으니, 우리를 준비시켜 그 곳으로 인도하소서. 주님의 영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여 주님의 뜻에 따르도록 하소서. 순례 중에 있는 우리에게 확신을 주어 심판의 날에 영혼과 육신이 완전히 영화롭게 되도록 하소서. 주여, 그렇습니다. 속히 이 영화로움을 우리와 주님의 택하신 자 모두에게 주소서(퍼킨스)

 

주기도문의 두 번째 기원이 모든 기원 중 가장 짧지만 가장 포괄적이라는 점을 다시 밝혀야겠다.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할 때 우리는 성령의 권능과 축복이 말씀 선포에 함께 하기를, 교회가 하나님이 세우시고 가르치신 교역자들로 갖춰지기를, 예배의 순서들이 은혜스럽게 진행되기를, 그리스도의 지체 내에서 영적인 은사와 은혜가 커 가기를, 그리스도의 적들이 뒤엎어지기를 간청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나라가 더욱 확장되어서 하나님의 택하신 자가 모두 그곳에 들어가기를 기도하게 된다. 또한 필연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의 없어질 것에서 점점 더 떼어 놓으시도록 기도하게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기원을 어떻게 드려야 할지에 대해 몇 가지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지 못한 우리의 잘못과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슬퍼하며 고백해야 한다. 우리가 가련하게도 본성적으로 부패 한 것과, 우리 육신의 성향이 끔찍하게도 죄와 사단의 이익을 꾀한 것 (롬 7:14-25)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다. 그리고 세상이 슬프게 돌아가는 것과 세상이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것에 애통해야 한다. 바로 그러한 것에 의해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지고 사단의 나라가 조장되는 것이다(시 119:136 막 3:5).

 

둘째,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고 유지되도록 우리의 삶이 세상에 성화의 영향을 끼치게 할 은혜를 열심히 구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계명에 우리 자신을 복종시켜 전적으로 주님에 의해 통치되며 언제든지 주님의 명령대로 할 태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롬 6:13).

 

셋째,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기를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일상 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정해주신 의무를 모두 수행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아(마 21:45롬 14:17). 이 일을 할 때 힘을 다하여야 하며(전 9:10골 3:17), 하나님의 나라를 번성케 하기 위해 하나님이 정해주신 수단을 모두 사용해야 한다. 이 둘째 기원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에 잘 요약되어 있다. 둘째 기원에서...우리는 사탄의 나라가 파멸되기를, 은혜의 나라가 번성하며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그곳에 들어가 보호받기를, 그리고 영광의 나라가 속히 오기를 기도한다.

 

 

제4장 셋째 기원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

 

이 셋째 기원과 앞의 두 기원과의 결합 관계는 그리 어렵지 않게 추적할 수 있다. 우리의 기도뿐만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첫째 관심은 항상 하나님의 영광에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자연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갈망이 따르며, 우리가 이 땅에 있는 동안 주님을 섬기려는 정직한 노력 또한 생겨날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이야말로 성숙한 성도의 마음에 자리잡은 온갖 소원의 출발점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이 분명히 나타나 확고히 되는 주요 수단은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와 확장이다. 그리고 우리의 개인적인 순종을 통해 그 나라가 이미 우리에게 임했다는 것이 분명히 나타난다. 하나님의 나라가 실제로 한 영혼에게 임하면, 그는 반드시 그 법과 제도에 순종해야 한다. 그 계명은 무시하면서 하나님을 우리의 왕이라 부르는 것은 차라리 그렇게 부르지 않는 것만 못한 것이 되는 것이다.

 

대체로 첫째와 둘째에 이어지는 이 셋째 기원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1) 순종의 영에 대한 요구, (2) 순종을 행하는 방법. "뜻이...이루어지이다". 이 어귀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느껴 "하나님의 뜻이 항상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란 말인가?"라고 질문할 독자가 있을 것이다. 어떤 점에서는 그렇지만 다른 점에서는 그렇지 않다.

 

성경은 두 가지 다른 관점에서 하나님의 뜻을 제시한다. 즉 감추어진(secret) 뜻과 계시된(revealed) 뜻, 또는 작정적인(decretive) 뜻과 교훈적인(preceptive) 뜻이 그것이다.

 

주님의 감추어진 뜻, 즉 작정적인 뜻은 창조(계 4:11), 섭리(단 4:35) 및 은혜(롬 9:15)에 적용되는 주님의 행동 규칙이다. 하나님이 작정하신 것은 장차 일어날 일에 대해 선지자가 계시하거나 일어나는 사건에 의해 계시되기까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다른 한편, 계시된 즉 교훈적인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행동 규범인데, 하나님이 스스로 보시기에 좋은 대로 성경을 통해 이미 알려 놓으셨다.

 

감추어진, 즉 작정하신 하나님의 뜻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꼭 같이 땅에서도 항상 이루어진다. 아무도 그것을 훼방하거나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의 교운 중 한 가지씩 어길 때마다 하나님의 계시된 뜻이 어겨지는 것도 분명하다.

 

모세가 다음과 같이 이스라엘에게 한 말에서 이 구분은 명확히 드러난다. "오묘한(secret)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revealed)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제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신 29:29).

 

이 구분은 모략(counsel)이라는 단어의 사용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의 모략(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사 46:10). 그러나 눅 7:30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오직 바리새인과 율법 사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counsel) (또는 계시된 뜻)을 저버리니라"(즉, 헛되게 하니라)".

 

한편으로는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롬 9:19)라고 되어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살전 4:3)라고 되어 있다. 계시된 또는 교훈적인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진술되어 우리의 의무를 규정하며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알려 준다. 하나님은 우리의 정신을 새롭게 하기 위해 정하신 수단으로서 말씀을 주셨다.

 

하나님의 교훈을 마음에 두는 것(시 119:11)은 성품과 행위가 변화하는 데에 필수적이다. 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규율이 그리스도인의 체험에 있어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롬 12:2) 분별하는 데에 절대적인 필수 조건인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이란 그 자체만 보면 하나님이 하기로 작정한 것이나 또한 이것은 우리에게 하라고 명령하신 것 중 한 가지를 나타내는 어귀이기도 하다.

 

첫째 의미로 본 하나님의 뜻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도 항상 이루어지고, 이루어져 왔고,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정책이나 지옥의 힘도 그것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 앞에 있는 본문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시된 뜻과 완전히 일치되게 해 달라는 기원으로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권위에 합당한 존경심에 의해, 그 계명으로 우리의 생각과 행위를 통제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피조물된 우리의 본분이며 우리는 언제나 그렇게 하기를 뜨겁게 바라고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만일 "뜻이...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라고 요구해 놓고서 주님의 계시된 뜻에 우리 자신을 일치시키는 것을 우리의 주된 일로 삼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우롱하는 것이다. 마 15:1-9에서 우리 주님이 엄히 경고한 것을 깊이 생각해 보아(마 25:31-46과 눅 6:46-49를 비교할 것)

 

"뜻이...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 기도를 성실하게 하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께 지체없이 복종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한 사람은 사탄의 뜻을 거부하고(딤후 2:26) 자신의 타락한 성향을 거부하며 (벧전 4:2) 하나님께 반대하는 것은 모두 물리치는 사람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사람조차 자신 속에 하나님과 싸우고 있는 것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을 고통스럽게 자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아버지의 뜻을 행할 수 없다는 것과, 자신이 능력을 주는 은혜를 열렬히 바라며 구하고 있다는 것을 겸손하게 그리고 뉘우치는 심정으로 인정한다.

 

아마 이 기원의 의미와 범위는 이렇게 표현할 때 가장 잘 드러날 것이다. "오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의 뜻을 저에게 계시하시며, 제 속에서 행하시며, 저를 통해 이루소서."

 

적극적인 견지에서 보면,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영적 지혜를 간청하고 있는 것이다. "나로 주의 법도의 길을 깨닫게 하소서...여호와여, 주의 율례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시 119:27, 33).

 

또한 우리는 주님의 뜻을 향한 영적 성향을 간청하고 있는 것이다.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오면 내가 주의 계명의 길로 달려가리이다... 내 마음을 주의 증거로 향하게 하시고"(시 119:32, 36). 더우기 우리는 주의 명령을 수행할 영적인 힘을 간청하고 있는 것이다. "주의 말씀 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시 119:25, 28빌 2:12, 13히 13:20, 21을 비교할 것).

 

또한 우리 주님이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치시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이 우리의 훈련장이기 때문이다. 즉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자리는 자기 부인을 실천해야 하는 영역이다. 여기서 주님의 뜻을 행하지 않으면 하늘에서도 결코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우리가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시도는 하늘에 있는 천사와 성도들의 행위와 다를 바가 없으며 동일한 기준이 설정된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분명히 그것은 마지 못해서나 못마땅해 하면서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며, 바리새인과 같이 위선적으로 이룩될 수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이 더디 또는 일정치 않게 실행되지는 않을 것이며, 부분 적으로나 단편적으로 실행되지도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천국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기쁘게 그리고 즐겁게 수행될 것이다. 계 5:8에 나오는 이십 사 장로와 네 생물(짐승이 아니다)은 함께 경배와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또한 하늘의 경배와 순종은 겸손하고 경건하게 이루어지는데, 스랍이 주님 앞에서 그 얼굴을 가린 것을 보면 알 수 있다(사 6:2). 그리고 스랍 중 하나가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부터 이사야에게 날아 온 것을 보면(사 6:6), 거기서는 하나님의 명령이 즉각적으로 실행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거기서는 하나님이 항상, 그리고 꾸준히 찬양을 받으신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긴다"(계 7:15).천사들은 즉시, 전적으로, 완벽하게, 그리고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뻐하며 하나님께 순종한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죄 맡고 결점으로 가득 차 있다. 그렇다면 천상의 존재들이 현재 우리 행동의 기준으로 제시된 것이 과연 타당성이 있을 수 있는가? 이 질문을 제기하는 것은 우리가 불완전하다고 포기해 버림으로서가 아니라 정직한 영혼이라면 우리가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번민하게 되기 때문이다.

 

첫째, 이 기준이 우리 앞에 세워진 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우리의 순종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하늘에 있는 존재들에게와 마찬가지로 땅에 있는 우리들에게도 무리한 임무가 부과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늘이 하늘인 것은 거기 사는 사람 모두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땅에서 하늘의 열락을 미리 맛볼 수 있는 분량은 대체로 여기서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정도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둘째, 이 기준이 주어진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복된 적정선을 보여 주기 위해서이다.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이루며 그 말씀의 소리를 듣는 너희 천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시 103:20).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더 적은 것을 요구하실 수 있는가? 우리가 영광 중에 천사들과 같이 하나님을 찬양하려면, 은혜 가운데 그들이 행한 순종과 일치하는 순종을 해야만 한다.

 

셋째, 그것은 우리가 항상 목표로 삼아야 할 기준으로서 주어진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이로써...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있게 서기를 구하나니"(골 1:9, 10골 4:12).

 

넷째, 이 기준은 우리에게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뿐만 아니라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가르치기 위해 주어진다. 우리는 분량이나 정도에 있어서 천사와 같을 수 없을지라도 그 순종의 방법에 있어서 천사를 닮아야 한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그 앞에 있는 기원에 비추어 이것을 주의 깊게 고려해 보자.

 

첫째로,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그렇다면 우리가 반드시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되지 않겠는가? 우리가 주님의 자녀라면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 불순종이야말로 주님의 대적들이 갖는 특징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사랑하시는 아들 아수께서도 주님께 완전히 순종하지 않으셨던가? 그리고 기쁨으로써 주님께 헌신하려고 노력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그 고유의 거처, 즉 우리가 장차 자리할 열락의 자리에서 늘 우리의 헌신을 아름답게 받으시기 때문이다.

 

둘째로, 우리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침을 받았으니,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실제적인 관심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최고 추구 대상인 주님의 뜻에 일치하게 하지 않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하기를 바란다면 분명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 자기 의지와 반항보다 하나님의 이름을 더 더럽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셋째로, 우리가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침을 받았으니, 그 나라의 법과 제도에 완전히 복종하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그 나라의 신민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반역자만이 주님의 홀(권위)을 경멸하기 때문이다.

 

 

제5장 넷째 기원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마 6:11)

 

이제부터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기원을 다루게 된다. 그러나 이에 앞서 하나님과 관계된 세 가지 기원을 미리 하였다는 사실은 기도할 때 우리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위해 간구하기 전에 하나님의 영광을 분명히 드러내고, 그 나라를 조성하며, 그 뜻을 행하기에 힘써야 한다는 점을 충분히 지적해 주는 것임에 틀림없다.

 

한편 하나님과 관계된 기원이 세가지인 반면 우리 자신에게 직접 관계되는 기원은 숫자상으로 넷이다. 그런데 후자의 기원에서 우리는 복되신 삼위일체의 각 위격의 사역에 대한 암시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에게 현세적으로 필요한 것은 성부의 친절하심에 의해 공급된다. 우리의 죄는 성자의 중재를 통해 용서받는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의 은혜로운 역사에 의해 유혹으로부터 보호받고 악으로부터 건짐을 받는다. 그러면 이에 이어지는 네 기원에서 보여지는 비율을 주의 깊게 유의해 보자. 이 중에 하나는 우리의 몸에 필요한 것과 관계가 있고, 셋은 영혼의 관심사와 관련된다. 이것으로 우리는 다른 모든 일상 활동에서처럼 기도할 때도 현세적 관심사가 영적 관심사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이 기원의 이해를 위해 몇 가지 질문을 제기하면서 시작하는 것이 아마 도움이 될 것이다.

 

첫째, 몸에 필요한 것을 공급해 달라는 이 요청이 영혼에 필요한 것과 관련된 기원보다 앞서 나온 이유는 무엇인가?

 

둘째, 양식(bread)이라는 어휘가 뜻하는 바는 무엇이며 그 속에 포함된 것은 무엇인가?

 

셋째, 이미 우리 손에 공급된 것이 있는데도 하나님께 일용할 양식을 간청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인가?

 

넷째, 우리 자신의 노동으로 버는 양식이 어떻게 하나님의 선물(gift)이 될 수 있는가?

 

다섯째, "일용할 양식"에만 그 요청을 제한시킴으로써 우리 주님이 가르치고 계시는 바는 무엇인가? 이러한 의문에 대답하기에 앞서, 많은 훌륭한 주석가들의 견해와 같이 우리도 그 우선적인 언급 내용을 영적인 양식으로 보기보다는 물질적인 양식으로 본다는 점을 미리 밝히고자 한다.

 

성경 주석가 메튜 헨리(Metthew Henry)는, 우리에게 물질적으로 필요한 것을 공급해 달라는 이 요청이 인간 자신에 대한 기원인 후반부 네 가지 기원의 서두에 나온 이유가 "우리의 자연적 복지가 이 세상에서의 영적 복지에 필요"하기 때문임을 예리하게 지적했다. 다시말해, 하나님이 현세 삶에 필요한 물질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영적 임무의 이행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서 마땅히 하나님을 섬기는 데에 사용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약함을 채우기 위해 얼마나 은혜롭게 배려하시는가! 만일 우리 몸을 존속시키는 데에 필요한 것이 없다면, 우리는 더 고귀한 임무를 수행하는 힘을 잃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육체의 필요를 채워달라는 기원이 먼저 나온 것이 우리 믿음의 꾸준한 성장과 강화를 촉진시키기 위해서라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날마다 물질적으로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을 깨닫고서, 더 고귀한 축복을 구하도록 격려와 자극을 받게 되는 것이다(행 17:25-28).

 

한편 "일용할 양식"은 우선적으로 우리에게 현세적으로 필요한 모든 것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히브리인들에게 빵(양식)은 의식주와 같은 현세의 필수품과 편의 시설을 의미하는 총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어휘인 음식 대신에 구체적인 어휘인 빵을 사용한 데에는 우리로 하여금 과도한 음식이나 큰 재산을 구하지 말고 유익하고 필요한 것만을 구하라고 가르치는 강조의 의미가 깔려 있다.

 

빵은 건강과 식욕 없이는 우리에게 아무런 이로움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그러나 건강과 식욕은 음식만으로 생기는 것도 아니고 인간의 의지력 속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이면에는 건강과 식욕에 있어서도 하나님이 축복하시기를 구해야 한다.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할 때는 전지하신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의 소명과 처지에 가장 적합하고 필요한 만큼 은혜로이 주시기를 구하게 되는 것이다.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네게 먹이시옵소서. 흑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 30:8, 9).

 

하나님이 우리에게 삶의 풍요함을 허락하신다면, 우리는 감사해야 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것을 사용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가 먹을 벗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 6:8).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구해야 한다. 그것은 도둑질로 얻는 것이 아니고, 남의 것을 강제로 또는 사기로 빼앗아 얻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개인적이며 건전한 노력을 통해서 얻는 것이다. "너는 잠자기를 좋아하지 말라, 네가 빈궁하게 될까 두려우니라. 네 눈을 뜨라, 그리 하면 양식에 족하리라"(잠 20:13). "그는 그 집안일을 보살피고 게을리 얻은 양식을 먹지 아니하나니"(잠 31:27).

 

그러면 이미 내 손에 좋은 것이 공급되어 있는데도 왜 진심으로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께 구해야 하는가?

 

첫째, 현재 내게 있는 일시적인 몫이 순식간에 그것도 아무런 경고 없이 내게서 없어질 수 있기 때문에 항상 일용할 양식을 구해야 되는 것이다. 창 19:15-25에서 이에 대한 인상적이고도 장엄한 예를 찾을 수 있다. 말하자면 불이 나서 집과 그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순식간에 태워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에게 현세적으로 필요한 것을 때마다 공급해 주시기를 하나님께 요청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이 현재 지니고 있는 재물이 아니라 주님의 풍요함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둘째, 하나님이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지 않으면 우리가 가진 것조차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마다 이 기원을 드려야 한다.

 

셋째,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이 이렇게 기도할 것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이 기원은 나 자신이 개인적으로 필요한 것만을 간구하는 이상의 의미를 포괄하기 때문이다. 주 예수께서는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하게 하심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향한 사랑과 연민의 정을 가르치고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할 것과, 우리 자신이 필요한 것에 마음을 쓰듯이 같은 그리스도인들의 필요한 것에도 꼭같이 마음을 쓸 것을 요구하신다(갈 6:10).

 

그러면 우리 자신이 일용할 양식을 스스로 노력하여 버는데도 어떻게 하나님이 그것을 주셨다고 할 수 있을까? 이같은 질문에는 대답한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명확한 대답이 있다.

 

첫째로, 우리가 아담 안에서 타락할 때 일용할 양식에 대한 우리의 원천적인 권리를 상실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것을 주셔야만 한다.

 

둘째로, 만물이 주님께 속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것을 주셔야만 한다.

 

"땅의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 24:1).

 

"은도 내 것이고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학 2:8).

 

"그러므로 그 시절에 내가 내 곡식을 도로 찾으며, 그 시기에 내가 내 새 포도주를 도로 찾으리라"(호 2:9)

 

그러므로 우리의 일용할 양식은 주님에게서 받는 보수로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청지기일 뿐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을 소유하고 사용하도록 허락하셨지만 그 근본적인 소유권은 하나님 자신에게 남겨 놓으셨다.

 

셋째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기도해야 한다. "이것들이 다 주께서 때를 따라 식물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주께서 주신 즉 저희가 취하며, 주께서 손을 펴신 즉 저희가 좋은 것으로 만족하나이다"(시 104:27, 28:비교 행 14:17). 노동이나 구매에 의해(상대적으로 말해) 우리 것이 된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우리에게 노동할 힘을 주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일용할 양식"에 우리의 요구를 제한시킴으로써 가르치고 계시는 것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의 연약함을 기억하게 된다. 우리는 끊임없이 위로부터 양식을 받지 않으면 24시간 동안 건강을 유지할수 없고 단 하루의 일도 감당해 낼 수 없다.

 

둘째로, 현세적인 삶의 불안정함을 기억하게 된다. 우리들은 아무도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내일 일을 자랑해서는 안된다(잠 27:1).

 

셋째로, 장래에 대한 모든 걱정 염려를 다 눌러 버리고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야 할 것을 배우게 된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다"(마 6:34).

 

넷째로, 그리스도께서는 절제의 교훈을 가르치고 계신다. 우리는 얼마 되지 않는 몫에도 만족하는 습관을 들여 탐욕의 영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한다.

 

마지막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우리 주님의 말씀이 매일 아침의 기도에 적합하다는 점에 유의하라. 반면에 눅 11:3에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가르치신 표현은 매일 밤의 간구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요컨대 이 기원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필수 불가결한 교훈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하나님께 현세적인 긍휼을 간구하는 것은 해도 좋은 일이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합법적인 일이다. (2)우리는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풍요하심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3) 우리의 확신은 하나님께만 있지 이차적인 원인에 있지 않다. (4) 우리는 영적인 축복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축복에 대해서도 고마와해야 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돌려야 한다. (5) 우리는 검소해야 하며 탐욕을 억제해야 한다. (6) 매일 하나님께 기도로써 교통하는 생활을 해야 난다. (7)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도 똑같은 마음을 써야 한다.

 

 

제6장 다섯째 기원

 

"[그리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 6:12)

 

이 다섯째 기원을 살펴보기에 앞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점은 이 기원이 처음 네 가지 기원과 다르게 시작한다는 사실을 올바로 주목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기도문에서는 처음으로 그리고(and;이 사실이 개역 성경에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라는 단어가 나온다.

 

즉,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다음에 "[그리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라는 말씀이 뒤 따른다는 것은 두 기원 사이에 매우 밀접한 연결 관계가 있다는 뜻이다.

 

주기도문 처음 부분에 나오는 세 기원이 모두 영적인 성격을 지닌 것으로 상호 긴밀한 관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은 또한 서로 뚜렷이 구별된다. 그러나 몇 가지 실제적인 이유 때문에 넷째 및 다섯째 기원은 우리 마음에서 특별히 연결되어야 한다.

 

첫째, 사죄 없이는 현세의 좋은 것들이 모두 무가치하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도 먹을 것은 먹고 입을 것은 입는 법이다. 그러나 곧 죽을 판인데 그에게 진수 성찬과 값비싼 옷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만일 우리 죄를 용서받지 않으면, 일용할 양식은 도살용 양을 살찌게 하듯이 우리를 살찌게 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Metthew Henry).

 

둘째, 우리 주님은 우리 죄가 너무가도 많고 너무나도 심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음식을 한 입도 먹을 자격조차 없다는 것을 알려 주고자 하신다. 우리는 생활 가운데서 보편적인 축복조차 상실시키는 죄를 짓기 때문에 야곱의 고백처럼 항상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를 조금이라도 감당할 수 없나이다"(창 32:10) 라고 말해야 한다.

 

셋째,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은총에 큰 장애물이 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고자 하신다(사 59:2렘 5:25). 우리의 죄는 축복의 통로를 좁힌다. 그러므로 "주옵시고"라고 기도할 때마다 반드시 "그리고...사하여 주옵소서"을 덧붙여야 한다.

 

넷째,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믿음 안에서 힘을 잃지 말고 지낼 멋을 독려하고자 하신다. 만일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 모두의 몸에 필요한 것을 공급해 줄 것을 믿는다면, 또한 하나님께서 죄의 힘과 지배로부터 그리고 끔찍한 죄의 대가로부터 우리 영혼을 구원해 주실 것을 믿어야 하지 않는가?

 

"우리 죄(debts)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의 죄는 눅 11:4에서처럼 여기서도 부채(debts)라는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이행하지 않은 의무 내지는 하나님께 마땅히 돌려야 할 것을 돌리지 못한 것을 뜻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열심을 다해 언제나 순종 함으로써 성실하고 완전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빛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롬 8:12)라고 말함으로써 빛진 자가 취할 소극적인 면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적극적으로는 우리가 하나님께 빛진 자들로서, 하나님께 얹혀 살아야 한다.

 

창조 법칙에 의해 우리는 육신을 기쁘게 할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존재로 만들어졌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다"(눅 17:10).

 

하나님께 대한 예배와 순종의 빛을 이행하지 못하면 그것이 죄가 되어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에 빛을 지게 된다. 그리고 나서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받은 임무를 면제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무죄로 해 달라고, 즉 마땅히 받아야 잘 형벌을 면제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빛 주는 사람에게 빛진 자가 둘이 있어"(눅 7:41). 여기 이 본문에서 하나님은 채권자의 모습으로 제시되는데,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주가 되신다고 보아서이고, 부분적으로는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분이시면서 재판장도 되신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재능을 주어, 은혜를 베푸시는 주님을 섬기고 영화롭게 하도록 하셨을 뿐만 아니다, 우리를 그 율법 아래에 두어 불이행 할 시에는 정죄를 받도록 하셨다. 그리고 재판장으로서 주님은 우리 각자를 불러 각자의 청지기직에 대한 회계를 완전히 하도록 하실 것이다(롬 14:12), 위대한 회계의 날이 있을 것이며(눅 19:15) 자기의 빛(죄)을 회계하고 슬퍼하며 그리스도에게로 피하지 못한 자들은 그 불이행 때문에 영원히 형벌을 받을 것이다.

 

아! 그 장엄한 최후의 심판을 자각하고 지내는 사람들이 얼마나 적은가!

 

이 빛 진 자의 비유는 단순히 우리의 파산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게도 우리의 재기를 위한 치유에도 적용된다. 지불 불능의 채무자로서 우리는 완전히 망했기 때문에 충분히 보상하지 않은 대가로 우리는 영원토록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 아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 보상할 힘이 전혀 없다.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우리는 채무 불이행 파산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구원의 손길이 마땅히 우리의 밖에서 와야 한다. 바로 이 점에서 복음은 죄에 눌린 영혼에게 구원의 길이 있음을 말해 준다. 다른 사람 즉 주 예수께서 스스로 보증인으로 나서서 그 백성을 위해 하나님의 심판을 충족시켜 하나님께 완전한 보상을 해 드린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그리스도께서는 그 조상 다윗을 통해 예언적으로 "내가 취하지 아니한 것도 물어 주게 되었나이다"(시 69:4)라고 확언했듯이 "더 좋은 언약의 보증"(히 7:22)이라 불리신다. 그리스도의 완전한 보상을 기쁘게 여기신 하나님께서는 그 택하신 자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선언하신다. "그를 건져서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라. 내가 대속물을 얻었다"(욥 33:24).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이상한 일이지만, 이 말씀을 이해하는데 곤란을 겪는 사람이 있다. 이들이 묻는 것은 하나님이 이미 그리스도인의 "모든 죄"(골 2:13)를 용서하신 것을 알고서도 계속 하나님께 용서해 달라고 간청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곤란은 그리스도에 의한 사죄의 획득과 우리들이 그 실제적 적용을 받는 것 사이를 구별하지 못해서 생겨난 것이다. 진실로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한 완전한 속죄가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십자가에서 그 유죄성이 취소되었다. 따라서 진실로 우리의 모든 옛 죄는 우리가 회심할 때 깨끗이 없어진다(벧후 1:9).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실제적인 의미에서는 우리의 현재나 미래의 죄가 하나님께 그것을 회개하고 고백하기까지 용서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것을 위한 용서를 구해야 하는 것은 필요하고도 타당하다(요일 1:6-10).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삼하 12:13)라는 말로 나단이 다윗에게 사죄의 확증을 준 후에도, 다윗은 하나님의 사죄를 간청했다(시 51:1).

 

그러면 주기도문의 다섯번째 기원에서 우리가 요청하는 것은 무엇인가?

 

첫째, 하나님께 우리가 날마다 넘하는 죄를 우리에게 담당시키지 마시기를 요청한다(시 143:2)

 

둘째, 하나님께 우리의 죄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만족케 하신 것을 열납하여 그리스도에게 있는 의로 우리를 용서해 달라고 탄원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이 이미 그리스도의 의로써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신 것이 아니냐"라는 말로 반대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실로 하나님은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끝까지 이르리로다"(시 2:8)라고 그리스도께 말씀하신 것처럼 용서를 청하라고 요구하신다. 하나님은 기꺼이 용서하기를 원하시지만, 먼저 우리들이 하나님 자신에게 죄 용서를 청할 것을 요구하신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구원의 긍휼을 알리기 위해서이며 우리의 믿음을 발휘시키기 위해서인 것이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께 계속 용서해 주실 것을 탄원한다. 우리는 의롭게 되었다 해도 계속 죄용서를 요청해야만 한다. 마치 일용할 양식에 있어서 우리 수중에 좋은 것이 이미 있을지라도 계속 그것을 위해 간청해야 하는 것과 같다.

 

넷째, 우리는 죄가 우리 양심과 하나님의 비망록에서 지워지도록 사죄의 확신을 위해 탄원한다. 그리고 비로소 얻은 사죄의 효과는 내적 평안과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다(롬 5:1-2)

 

사죄는 우리에게 당연히 주어지는 것으로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긍휼로서 요청하는 것이다. "사는 날까지는 아무리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도 사죄를 위해 처음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며 사죄를 간구했던 것처럼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무한한 은총을 간구하는 자로서 나아가야 한다"(John Brown). 그리고 이것은 완전한 칭의에 조금도 모순되지 않으며, 도리어 그 반영이기도 하다(행 13:39).

 

확실히 그리스도의 피 공로로 대속 받은 신자는 "심판에 이르지 아니 할 것이다"(요 5:24). 그렇다고 이 진리가 신자는 자기 죄를 없애기 위해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으로 이끌어 가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신자를 강하게 독려하여 죄사함의 기원을 드리게 한다. 마찬 가지로 순수한 그리스도인이 끝까지 견뎌 구원에 이를 것이라는 하나님의 확증은 사죄의 기도를 드리게 하는 매우 강력한 동기가 된다.

 

따라서 이 기원은 죄의식을 느끼는 것과 죄를 인정하며 회개하는 것과 그리스도를 위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것과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의를 좇아 우리를 용서해 주실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깨달음을 함축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기원을 드리기 위해서는 항상 자기반성과 겸손이 앞서야 한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라는 논증으로 자기 죄 사함의 기원을 확실히 하도록 가르치는데 이러한 논증에 포함된 의미는 다음과 같다.

 

첫째, 그리스도는 우리 자신에게 있는 선한 기질로부터 죄 사함의 논지를 이끌어 내도록 가르치신다. 우리에게 있는 선한 것은 먼저 하나님께 있었음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미덕의 총체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령에 의해 형제의 죄를 용서하는 선한 기질이 우리 마음에 심겨졌을 때는, 틀림없이 같은 것이 하나님에게 있을 것이다.

 

둘째, 하나님을 이야기할 때는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해야 한다. 즉 긍휼이라고는 한 방울도 없는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것을 용서해 줄 수 있다면, 분명히 참된 긍휼이 바닷물보다 많으신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하실 것이다.

 

셋째, 사죄를 기대하는 사람의 상황에서 논지를 이끌어 내야 한다. 즉 우리는 우리에게 향한 하나님의 긍휼을 깨닫고서 다른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고 싶어 하는 죄인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미 받은 긍휼을 잘 선용한다면 더 많은 긍휼을 받을 도덕적 자질을 갖추게 되어 있는 것이다.

 

사죄를 위해 하나님께 올바르게 기도하려는 사람들은 자기에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을 용서해야 한다. 요셉(창 50:14-21), 스데반(행 7:60)이 그 뚜렷한 예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에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에 대한 원한과 악의를 우리 마음으로부터 제거해 달라고 많이 기도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다는 것이 죄지은 자들을 꾸짖고, 공적인 이해관계가 포함된 경우에 그들을 기소하는 것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도리어 도둑을 경찰에게 넘겨주는 것이나, 능력이 있는 사람이 빛 갚기를 거절할 경우 법에 호소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일 것이다(롬 13:1-8). 만일 같은 시민이 범죄를 했는데도 내가 고발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 범죄에 방조자가 된다. 즉 그와 사회에 대한 사랑이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레 19:17). 그러므로 용서와 죄의 방조는 엄격히 구분되어야 한다.

 

 

제7장 여섯째 기원

 

"(그리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마 6:13)

 

이 여섯째 기원도 "그리고"라는 단어로 시작하기 때문에, 우리는 앞의 다섯째 기원과의 관계를 면밀히 살펴보아야 한다. 이들 간의 관계는 이렇게 제시될 수 있다.

 

첫째, 앞서 나온 죄 사함의 간구가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 즉 칭의(justification)의 소극적 측면에 관련된다면, 이것은 거룩하게 되어지는 것, 즉 실제적 성화(sanctification)에 관계된다. 따라서 이 두 가지 축복은 결코 분리되는 법이 없다.

 

둘째, 과거의 죄가 용서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되풀이하지 않게 해 줄 은혜를 위해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이미 용서함을 받은 똑같은 죄로부터 멀리하게 될 은혜를 진심으로 갈망하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이 우리 죄를 사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은 옳은 일일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반복하는 것을 피할 힘을 얻기 위해 열심으로 간구하기를 쉬지 말아야 한다.

 

셋째, 다섯째 간구에서는 이미 범한 죄의 유죄 성을 면해 달라고 기도하지만, 여기서는 우리를 파멸로 이끄는 죄의 권세로부터 구해 달라고 기도한다. 하나님이 앞의 요청을 들어 주시는 것에서 우리는 더욱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북돋워 우리는 하나님께 육신을 죽이고 영혼을 살리게 해 달라고 요청하게 된다.

 

잠깐 여기서 많은 사람들에게 정말 어려움이 되는 것을 처리함으로써 이 기도에 대한 바른 이해의 장애물을 없애는 것이 좋겠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 1:13).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라는 가르침과 이스라엘이 "돌이켜 하나님을 재삼 시험"하였다고 기록된 사실(시 78:41)간에 서로 반대되는 것이 조금도 없는 것을 이해한다 면,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는 말씀과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은 표현 사이에도 모순이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아무에게도 악을 불어 넣지 않으시며 우리가 죄를 지을 때 우리와 공모하는 일이 결코 없으시다는 뜻이다.

 

약 1:14에서 명확히 해주듯이, 우리가 짓는 죄의 죄 성은 전적으로 우리 자신의 탓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시험에 책임을 전가시키면서 이런저런 악이 생겨나는 것의 근본 원인이 자신의 타락한 본성이라는 것을 부인한다. 그리고 그들이 그 악을 시험의 탓으로 돌릴 수 없을 경우에는,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라고 아담이 말한 것처럼 비난의 화살을 하나님께 돌림으로써 변명하려고 한다.

 

시험하다(tempt)란 단어는 성경에서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데, 어느 특정 어귀에서 둘 중 어느 의미가 적용되는지를 결정하기가 늘 쉽지만은 않지만, 그것을 바로 이해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1) (...의 강도를) 시험해 보다, 테스트해 보다. (2) 악을 행하도록 유혹하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고 할 때는(창 22:1) 하나님이 그의 믿음과 충성을 테스트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사탄이 그리스도를 시험했다는 말씀은 도덕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사탄이 주님으로 하여금 악을 행하게 하여 몰락시키려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느 한 측면에서 시험한다는 것은 어느 한 사람을 테스트하여 그가 현재 어떠한 사람인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를 알아보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는 하나님도 합법적이고 선한 방법으로 시험할 수가 있는데, 온전한 십일조를 하였을 때 축복을 주시겠다는 말라기 3:10에 나오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의무라는 차원에서 하나님을 테스트해 보는 것이 그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시험이 있는 반면 시편 78:41의 기록이 우리에게 경고가 되듯이, 이스라엘은 죄의 차원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게끔 행동했는데 이러한 것은 엄격히 금지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이 말씀에 분명하게 함축된 다음과 같은 진리에 유의해야 한다.

 

첫째, 하나님의 우주적 섭리를 인정하고 있다. 모든 피조물이 그것을 지으신 분의 주권적인 처분에 맡겨져 있으며 그분은 선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악에 대해서도 꼭같이 절대적인 지배력을 가지고 계신다. 이 기원에서는 모든 시험을 좌우하는 것이 모든 것에 지혜로우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고백한다.

 

둘째, 하나님께서 배려하시지 않으시면 시험에 들 수밖에 없는 죄악된 존재임을 고백하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죄에 완전히 삼켜져 사탄에게 멸망당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하나님의 완벽한 의가 될 정도로 우리는 사악하다.

 

셋째, 하나님의 긍휼을 인정하고 있다. 우리가 아무리 주님을 화나게 했어도 주님은 그리스도를 위해 우리의 빛을 갚아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후로도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기를 탄원하는 것이다.

 

넷째, 우리의 약함을 고백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시험에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에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시는가?

 

첫째, 주님의 섭리가 그 자체로서 선한데도(우리의 부패성 때문에) 죄에 틈을 주게 될 때는, 하나님이 객관적으로 그렇게 버려둘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험을 받을 때 우리가 스스로 의롭다는 것을 드러낸다면 주님은 우리를 욥이 경험한 것과 같은 환경 속으로 이끌어 가실지도 모른다.

 

즉 우리가 스스로의 신앙에 대하여 자신 있어 할 때, 주님은 우리를 베드로와 같은 시험을 당하도록 내버려 두기를 기뻐하실 지도 모른다. 뿌리가 자기만족에 도취되어 있을 때, 주님은 우리를 히스기야가 처한 것과 같은 상황 속에 집어넣으실 지도 모른다(대하 32:27-31비교 왕하 20:12-19).

 

이처럼 하나님은 여러 사람들을 고난에 빠뜨리시기도 하는데, 이것이 쓰라린 연단이지만 주님의 축복 아래에서는 종종 그 영혼을 살찌우는 결과가 된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유복하게 만드시는데, 이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큰 함정이 되기도 하지만 주님에 의해 거룩하게 될 때, 그의 역량을 확대시켜 주는 것이 된다.

 

둘째, 하나님께서(그렇게 하실 의무는 없지만) 사탄을 억제하지 않을 때는 결과적으로 시험을 허용하는 것이 된다. 가끔 하나님은 마치 강한 바람이 산 나무에서 죽은 가지를 부러뜨려내듯이, 사탄이 우리를 밀 까부르듯 하게 내버려 두신다.

 

셋째,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사법적인 목적으로 시험하시는데, 즉 마귀로 하여금 그들을 더 큰 죄에 빠뜨리도록 허용하심으로써 그 죄를 벌하여 결국 그 영혼이 파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객관적으로든, 또는 사탄에게 허용하여 주관적으로든 왜 하나님이 그 백성을 시험하시는가?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하나님이 우리를 테스트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우리가 약하다는 것과 주님의 은혜가 몹시도 필요하다는 것을 계시하시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심중에 있는 것을 다 알고자 하사"(대하 32:31) 그를 붙들고 계시던 팔을 그에게서 거두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 홀로 내버려두실 때, 우리에게 남는 것은 몹시 고통스럽고도 굴욕적인 깨달음뿐이다. 하지만 우리가 마음으로부터 "나를 붙드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시 119:117)라고 기도하게 되려면 이와 같은 자신의 약함에 대한 진정한 인식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절실한 바램이 필요하다.

 

둘째, 주님이 우리를 테스트하는 것은 우리에게 깨어 기도해야 할 필요성을 가르치시기 위해서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어리석고 믿음이 없어서 체험이라는 힘든 학교를 통해서만 배우며 그 수업조차도 매로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 가운데서 조금씩 우리는 우리의 경솔함과 부주의와 뻔뻔스러움 때문에 치루어야 할 대가가 얼마나 비싼 것인지를 발견하며 주님께 기도하게 된다.

 

셋째,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를 연단 속에 두시는 것은 우리의 나태함을 고치시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잠자는 자여 깨어서...일어나라" (엡 5:14)고 부르시지만, 우리는 그 말에 주의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은 종종 시험이란 난폭한 방법을 동원하여 거칠게 우리를 일으키신다.

 

넷째, 하나님께서 우리를 테스트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영적 무장의 중요성과 가치를 우리에게 계시하시기 위해서이다(엡 6:11-18). 만일 우리가 부주의하게 영적인 무장 없이 사단의 세력과 싸우러 나간다면 부상당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 부상은 우리로 하여금 앞날에 있을 수 있는 더 큰 파멸에서 주의하게 하는 유익한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이상 말한 것에서 나타나는 분명한 점은 단순하게 그리고 절대적으로 모든 시험을 나쁘게 보며 이것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도 몸소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으며, 바로 그 목적을 위해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가셨다(마 4:1막 1:12). 우리가 시험을 그 본질이나 의도 및 결과 등 그 어떤 양상에서 보든지간에, 모든 시험이 반드시 악한 것은 아니다(바로 다음에 나오는 기원이 가리키듯이), 따라서 우리에게서 면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시험의 악이며, 그렇게 기도할 때에도 하나님의 깊으신 섭리에 순종하는 태도로 그리고 조건부로 하는 것이다.

 

다시 요약하여 말하자면 우리는 시험에 들지 않게 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시험받는 것을 타당하게 여기시면, 시험에 굴복하지 않게 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만일 굴복할 경우에는 죄에 완전히 정복당하지 않게 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시련으로부터의 완전 면제를 위해서가 아니라 시험에 대한 그릇된 판단의 제거를 위해서만 기도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에 서는 종종 우리를 겸손케 하여 하나님께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이 보호하심을 더 완전히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심으로써 영광 받으시기 위해, 사탄이 우리를 공격라고 괴롭히는 것을 허용하신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약 1:2, 3).

 

결론적으로 시험과 관련하여 우리의 책임에 대해 몇 마디 해 두는 것이 좋겠다. 첫째, 사탄의 접근을 경계하는 것이 으레 우리의 임무인 것과 같이, 우리를 죄로 끌어들일 사람과 장소를 피하는 것도 우리의 본분이다(시 19:13잠 4:14; 살전 5:22). 어느 무명작가가 말했듯이 "가연성 물질을 많이 가지고 다니는 사람은 불에서 가능한 한 먼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현명한 일일 것이다".

 

둘째, 우리는 확고부동하게 마귀를 대적해야 한다.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아 2:15). 성도들은 가귀에게 한 치라도 양보해서는 안 된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 유순하게 은혜를 구해야 한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자신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우리에게 유익을 주시기 때문이다(빌 2:13).

 

당신은 참으로 기도하며 더불어 시험에서 빠져 나오기 위한 선한 수단을 모두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주님께서 계속 당신에게 시험주시기를 기뻐하시면 순종하라. 아니, 하나님이 시험을 계속하시며 현재로서 당신에게 필요한 만큼의 은혜를 주지 않으시더라도 불평하지 말고 주님의 발치에 누워 있으라. 하나님은 은혜의 주님이심을 믿으며(토마스 맨튼).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에 따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기를 기원 드려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제8장 일곱째 기원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마 6:13)

 

이 일곱째 간구는 우리 주님의 기도 중 기원 부분의 마지막이 된다. 주님의 기도 가운데 우리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네 가지이며, 그것은 제공의 은혜("우리에게...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사죄의 은혜("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방지의 은혜("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 및 보호의 은혜("우리를 악에서 구하소서")로 나눌 수 있다.

 

여기서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은 매 경우마다 대명사가 단수가 아니다 복수, 즉 '나'가 아니라 '우리'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뿐만 아니다 믿음의 가정에 속한 모든 지체들을 위해서 간구해야함을 보여 준다(갈 6:10). 이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이 드리는 기도의 가족적 성격을 얼마나 아름답게 나타내는가!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 부를 것을 명하시며 구할 때 주님의 모든 자녀들을 품으라고 가르치시는 것을 보면 그것을 잘 알 수 있다.

 

대제사장의 가슴에는 모든 이스라엘 지파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는데, 이것은 구약 시대 대제사장의 완성 자이신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중보 기도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여러(all)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라고 명령한다(엡 6:18).

 

자기애(self-love)는 연민의 정을 가로 막아 우리를 우리 자신의 이해 관계에만 머물게 한단. 그러나 우리 믿음 가득히 스며든 하나님의 사랑은 형제의 유익을 위한 간절한 마음을 품게 한다.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여기서 악이라는 단어가 우선적으로는 마귀를 가리키지만, 오직 그것에만 국한된다고 할 수는 없다. 원래 이 말의 헬라어 단어는 악한 자나 악한 것을 모두 가리키고 있다. 사실, 이 낱말은 양쪽으로 모두 번역될 수가 있다.

 

우리는 보든 종류와 모든 정도와 모든 경우의 악으로부터, 어두움의 세력의 악랄함과 그 힘과 교활함으로부터, 이악한 세상과 그 모든 유혹과 함정과 분노와 기만으로부터, 그것이 억제되고 정복되고 종국에는 근절되도록 우리 마음의 악으로부터, 고통의 악으로부터, 구원받기를 위해 기도하라는 가르침을 받는다(토마스 스코트)

 

그렇다면 이 기원은 우리에게 정말 해가 되는 모든 것, 특히 그 안에 선한 것은 하나도 없는 죄로부터 구원받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원의 표현이다.

 

거룩한 분이신 하나님과 대조해 볼 때 사단이, "악한 자"(엡 6:16 요일 2:13, 14 요일 3:12 요일 5:18, 19)라고 불리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죄가 악하며(롬 12:9) 세상이 악하며(갈 1:4) 우리 자신의 타락한 본성이 악하다는 것도 역시 사실이다(마 12:35). 더욱이 마귀는 육신과 세상을 이용하여 우리를 압도한다. 육신과 세상이야말로 공중 권세 잡은 자의 하수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기원은 우리의 모든 영적인 적으로부터 구해 달라는 기도이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권세로 구원받아 성도가 된 우리가 이미 "흑암의 권세"에서 건짐을 받아 그리스도의 나라로 옮기운 것은 사실이며(골 1:13) 그 결과로서 사단이 우리에 대한 합법적인 권위를 잃은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영적인 적은 여전히 두렵고도 강압적인 힘을 휘두른다.

 

마귀는 우리를 통치할 수는 없지만 우리를 방해하고 괴롭힐 수는 있다. 마귀는 적들을 선동하여 우리를 박해하게 하며(계 12:13) 우리의 욕망에 불을 붙이며(대상 21:1고전 7:5) 우리의 평화를 어지럽힌다(벧전 5:8). 그러므로 마귀에게서 건짐을 받도록 끊임없이 기도할 필요가 있으며 또 그래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임무이다.

 

사단이 잘 쓰는 계략은 우리가 특별히 범하기 쉬운 어느 한 죄에 오랫동안 스스로 빠져 있도록 부추기거나 속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본성적으로 타락한 악한 욕망이 억제되도록 끊임없이 기도할 필요가 있다. 또한 추한 욕망을 일으켜 하나님의 자녀를 학대할 수 없을 때, 마귀는 다윗의 경우에 그랬던 것처럼(삼하 11:1)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케 하며 그 백성을 화나게 할 죄를 범하게 하려고 애쓴다.

 

신자가 죄에 가졌을 때 마귀는 그로 하여금 그것에 안주하여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게 하려고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과오를 추궁하실 때, 사단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아버지의 추궁을 불쾌히 여기도록 하거나 절망에 빠지게 하려고 애쓴다. 이러한 공격 방법에 실패할 때면, 마귀는 욥의 경우처럼 우리의 친구나 친척을 선동하여 우리를 대적하게 한다. 그러나 마귀의 공격 방침이 어떻든간에, 우리가 날마다 의지해야 할 것은 이러한 마귀의 궤계로부터 건짐 받기를 위한 기도이다.

 

그리스도께서 몸소 우리로 하여금 이 기원을 드리도록 독려하는 본보기를 남기셨다. 우리를 위해 다음과 같은 중보기도를 하셨던 것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들 세상에서 데려 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 17:15).

 

이것이 우리가 지금 고려하고 있는 악에서 구하옵소서란 어구와 그 앞에 나오는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며란 기원 간의 연결 관계를 보여 준다. 그리스도께서는 절대로 우리가 시험에서 면제되기를 기도하지 않으셨다. 주님은 자기 백성이 안팎으로부터 공격받을 것을 아셨던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세상에서 데려 가시기를 구하지 않고 다만 악에서 건짐을 받기만을 구하셨다.

 

죄의 악으로부터 보호받는 것은 시험의 근심으로부터 보호받는 것보다 훨씬 더 자비로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악에서 얼마나 멀리 건져 내실 것인지를 묻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첫째, 악이 우리의 가장 고귀한 영적 성장에 해로운 한, 하나님이 그 악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신다. 베드로가 일시적으로 실족하는 일을 당한 것조차(눅 22:31-34) 궁극적으로 베드로와 하나님의 백성의 영적 성장을 위해서였다.

 

둘째, 하나님은 악이 우리를 완전히 지배하는 것을 막아 우리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멸망에 빠지는 것을 막으신다.

 

셋째, 주님이 우리를 하늘에 옮기실 때, 궁극적인 구원에 의해 악에서 우리를 완전히 구하신다.

 

그러면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란 기원의 의미는 무엇인가?

 

첫째, 이것은 우리가 사탄의 계략을 감지해 낼 수 있도록(고후 2:11) 하나님의 조명을 구하는 기도이라. 자신을 빛의 천사로 가장할 수 있는 자(고후 11:14) 즉 사단은 너무 교활해서 인간의 지혜로 대처할 때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오직 성령께서 은혜로이 깨우쳐 주셔야만 우리가 그 함정을 분별할 수 있다.

 

둘째, 이것은 사단의 공격을 대적할 힘을 구하는 기도이다. 사단은 우리 자신의 힘으로 맞서기에는 너무 막강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령의 도우심에 의해 힘을 얻을 때에만 사단의 시험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으며 죄를 지으면서 느끼는 즐거움을 오히려 혐오하게 된다.

 

셋째, 그것은 우리의 욕망을 억제시키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기도이다. 우리가 외부적인 죄의 유혹을 거부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오직 우리 자신의 내적 타락으로 인한 죄악된 본성을 죽이는 정도에 따르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에 악을 허락하면서 사단에게 비난을 퍼붓는 것이 적당한 일일 수는 없다. 사단의 지배로부터 건짐을 받으려면 먼저 죄를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넷째, 이것은 우리가 죄에 굴복했을 때 회개를 구하는 기도이다. 죄는 우리의 영적 분별력을 죽이고 우리 마음을 완고하게 만드는 파멸적인 경향이 있다(히 3:13).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죄로 인한 이러한 뻔뻔스러운 영적 무관심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여 우리 안에서 죄로 인한 경건한 슬픔(회개에 이르게 하는 근심)을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를 구하옵소서"라는 말씀이 암시하는 바는, 수렁에 빠져 누군가가 들어 내 주어야만 밖으로 나올 수 있는 짐승처럼, 우리 역시 우리 힘만으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죄에 깊이 빠져 있다는 것이다.

 

다섯째, 그것은 양심으로부터 죄의식을 제거해 달라는 기도이다. 참된 회개가 이루어질 때, 그 영혼은 수치심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된다. 그리고 성령께서 양심에 새로이 정결케 하는 그리스도의 피를 뿌릴 때까지는 위안이 없다.

 

여섯째, 그것은 우리가 악에서 건짐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 영혼으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과의 교통을 회복하게 해 달라는 기도이다.

 

일곱째, 그것은 주님께서 자기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우리의 영원한 복락을 위해 우리의 타락으로 인한 죄과를 지워줄 것을 청하는 기도이다. 이 모든 것을 진심으로 바란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악으로부터 벗어나는 은총을 받았다는 표시이다.

 

한편 우리는 기도한 것을 실행에 옮기려고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께 악에서 건져달라고 하고 나서 죄를 가지고 장난하거나 무모하게 시험의 자리로 달려가는 것은 하나님을 희롱하는 일밖에 되지 않는다. 따라서 기도와 더불어 영적으로 깨어 죄에서 벗어나려는 적극적으로 노력을 하는 것은 절대 서로 분리되지 말아야 한다.

 

즉 우리는 특별히 우리의 욕망을 억제하는 데에(골 3:5딤후 2:22),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않는 데에(롬 13:14),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는 데에(살전 5:22), 믿음에 굳게 서서 마귀를 대적하는 데에 (벧전 5:8, 9), 세상과 그 안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않는 데에(요일 2:15)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의해 우리 성품이 바로 형성되고 우리 행위가 더 나아질수록, 우리는 더욱 더 선으로 악을 이기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성도는 선한 양심을 잃지 않기에 힘써야 한다(행 24:16). 하루 하루를 땅에서의 마지막 날로 여기며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잠 27:1). 우리의 생각을 위의 것에 두어야 한다(골 3:2). 그러면 우리는 진심으로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제9장 송영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 6:13)

 

거룩한 예배자들을 위한 본보기 기도로서 주기도문은 기도의 대상에게 찬양을 돌리는 것으로 종결되는데, 이것은 이 기도의 완결성을 명백히 나타낸다.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제자들에게 그들이 필요한 것을 구할 뿐만 아니라 마땅히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리라고 가르치셨다.

 

감사와 찬양은 기도에 필수적인 부분이다. 특히 후자는 모든 공중 예배에서 유념해야 할 것인데, 하나님이 반드시 받으셔야 할 것이 바로 절대자를 향한 경배이이 때문이다. 확실히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를 축복해 달라고(bless) 요청할 때, 적어도 하나님을 송축하여야(bless) 하는 것이다.

 

바울은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셨도다! "라고 외친다(엡 1:13). 이런 점에서 볼 때 하나님께 송축을 선포하는 것은 우리에게 향한 하나님의 은혜의 메아리요 반영일 뿐이다. 따라서 경건한 찬양은 고양된 영적 감정의 표현으로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영혼에 합당한 언어이다.

 

한편 주기도문과 송영이 보여주는 완벽한 점들과 그 속에 있는 각 어구와 단어가 지닌 놀라운 충만함은 빠르고 부주의하게 보아 넘겨서는 깨달을 수 있고, 경배하는 마음으로 깊이 생각함으로써만 분명해진다.

 

이 송영은 적어도 다음 세 가지 점을 고려해 볼 수 있다. (1) 거룩하고 기쁜 찬양의 표현으로서, (2) 모든 기원을 실행하기를 탄원하고 논증하는 것으로서, (3)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실 것이라는 확신의 확인과 천명으로서. 이 기도에서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참된 기도의 진수를 제시하신다. 성령에 의해 씌어진 구약 시편의 기도에서도 기도와 찬양이 끊임없이 결합되어 있다.

 

신약에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은 권위 있는 교훈을 준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성경에 기록된 뛰어난 성도들의 기도는 모두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시 22:3)께 드리는 찬미가 섞여 있다.

 

성도들이 드릴 기도의 모범이 되는 주기도문에 있어서도 알파와 오메가는 하나님이시다. 즉, 이 기도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하는 것으로 시작했고, 주님을 영광스러운 우주의 왕으로 찬양함으로써 끝난다.

 

주님의 완전함이 우리 마음 앞에 있으면 있을수록, 우리의 예배는 더욱 영적이 될 것이며 우리의 간구는 더욱 경건하고 열심 있게 될 것이다. 영혼이 하나님 자신에 대해 묵상하면 할수록 그 찬양은 더욱 더 자발적이며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될 것이다.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 4:2) 이러한 점으로 보아 주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이 우리에게 보류되는 이유는 바로 기도에 힘쓰지 못하고 감사함으로 깨어 있지 못하는 우리의 잘못 때문이 아닌지? "하나님이여, 민족들로 주를 찬송케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케 하소서. 땅이 그 소산을 내었도다. 하나님 곧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로다"(시 67:5-6)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이미 베풀어주면 긍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나님이 그 긍휼로써 우리를 축복하시리라고 기대할 수 있겠는가?

 

"나라가...아버지께...있사옵나이다". 이 말씀은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주로서의 권리와 권위를 제시하는데, 이 권리와 권위로써 하나님은 자신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만물을 처리하신다.

 

하나님은 창조와 섭리와 은혜에 있어서 최고 주권자이시다. 주님은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므로 모든 피조물과 사물이 주님의 완전한 통제 아래에 있다. "권세"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자신의 주권을 행사하고 하늘과 땅에서 자신의 뜻을 수행하는 데에 전혀 부족함이 없음을 가리킨다.

 

주님은 전능한 분이시기 때문에 기뻐하시는 대로 할 능력이 있으시다. 주님은 결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신다(시 121:3, 4). 하나님께 어려운 일은 없다(마 19:26). 주님에게 거역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단 4:35). 주님과 주님의 몸된 교회의 구원에 적대되는 모든 세력들을 주님은 뒤집어 엎으실 수 있고 또 그렇게 하실 것이다.

 

"영광"이라는 단어는 주님이 말로 다 할 수 없이 뛰어난 분이시라는 것을 제시한다. 즉 주님은 만물을 다스리는 절대 능력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너무나도 영광스러운 분이시다. 하나님의 영광이야말로 하나님의 모든 역사를 통해 이루실 장엄한 목표이며 주님은 모든 일에 있어서 자신의 영광을 항상 지키셨다(사 48:11, 12). 주님에게는 오직 자신만이 기도의 응답자라는 영광이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송영이 "대개"라는 접속사로 도입된다는 점에 유의하자. 이것은 나라가 아버지에게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이유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이 송영은 하나님의 완전함을 고백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왜 우리의 기원을 들으셔야 하는지에 대한 매우 강력한 탄원이기도 하다.

 

또한 "대개"란 접속사는 나라가 당신에게 있기 때문에 기도의 요청을 승락하실 수 있습니다라는 뜻이다. 이 송영이 의심할 바 없이 기도 전체에 속하며 일곱 가지의 기원을 모두 시행시키기 위해 도입된 것이긴 하지만, 특히 직접적으로는 맨 마지막 기원과 관계되는 것 같다. 즉 나라가 당신의 것이니,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뜻이다.

 

"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적들의 수효와 세력이 참으로 큽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 자신의 사악한 마음의 반역 때문에 더욱 더 큰 힘을 발휘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이 그들과 맞서서 우리를 도와주시기를 탄원할 용기가 납니다. 왜냐하면 죄와 사탄이 우리에게 맞서 시도한 것은 모두 우리에게 대한 주님의 주권과 지배 및 우리에 의한 주님의 영광의 확대에 대한 공격이기 때문입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있사옵나이다." 얼마나 큰 격려가 여기 있는가! 특히 이 가운데 두 가지 측면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한 큰 확신을 불러일으킨다. 즉 주님이 기꺼이 하신다는 것과 하실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 아들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자신을 우리 아버지로 부르라고 명령하신다는 것은 우리를 사랑한다는 표시요, 우리를 보살피신다는 증거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또한 만왕의 왕이시오, 무한한 권능을 소유하고 있는 분이시다. 이 진리는 우리에게 주님의 역량을 확증해 주며 그 능력을 보장해 준다. 아버지로서는 그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을 나누어 주며, 왕으로서는 그 신민들을 지켜 주신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과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시 103:13).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왕이시니, 야곱에게 구원을 베푸소서"(시 44:4).

 

주님이 자신의 것에 관하여 자신이 강함을 보여주고 자신의 권능을 나타내시는 것은 자신의 명예와 영광을 위해서이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를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엡 3:20, 21)

 

이제 얼마나 놀라운 교훈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지 살펴보자.

 

첫째, 우리는 하나님의 완전함으로부터 이끌어 낸 논지를 가지고 기도하라는 가르침을 받는다. 하나님의 우주적 왕권과 권능과 영광에 대한 신뢰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한 효과적인 탄원으로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욥이 하려고 했던 것을 실천해야 한다.

 

"그 앞에서 호소하며 변백할 말을 입에 채우리라"(욥 23:4).

 

둘째, 우리는 기원과 찬양을 결합시키라는 지시를 받는다.

 

셋째, 우리는 최고의 경배심을 가지고 기도하라는 가르침을 받는다. 하나님은 너무나도 위대하고 권능이 많으신 왕이기 때문에 경외를 받아야 되는 것이다(사 8:13). 따라서 주님 앞에서는 모든 피조물은 주권적 의지에 완전히 굴복하여 엎드려야 된다.

 

넷째, 우리는 주님에게 완전히 굴복하며 복종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는다. 그렇지 않고 우리에 대한 주님의 지배를 말로만 인정하며 실생활에서 자기 마음대로 행동한다면 하나님을 우롱하는 것 밖에는 되지 않는다(사 29:13).

 

다섯째, 이렇게 기도함으로써 주님의 영광을 우리의 일차적인 관심사로 삼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갊을 살도록 노력하여 우리들의 삶 자체가 주님에 대한 찬양을 드러내게끔 훈련 받는다.

 

"영원히"우리 아버지의 나라, 권세 및 영광이란 표현이 지상 군주의 덧없는 지배와 영광과는 얼마나 뚜렷한 대조를 보이는가!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는 영광스러운 분은 "영원부터 영원까지...하나님"(시 90:2)이시다. 또한 이와 같으신 하나님을 계시하시고 바른 기도를 제시하신 그리스도 예수께서도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히 13:8). 따라서 올바르게 기도할 때, 우리는 시간을 넘어 영원을 바라보며, 현재의 것들을 미래와 연결하여 헤아리는 것이다.

 

이 "영원히"라는 말씀이 얼마나 장엄하고 인상적인가! 이 땅의 나라는 쇠하고 사라진다. 또한 피고물의 힘은 하잘 것 없으며 순간적일 뿐이다. 이처럼 인간과 모든 세속적인 것의 영광은 꿈과 같이 사라지나 여호와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어떠한 변화도 받지 않고 감소되지도 않으며 끝을 모른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복된 소망을 첫째 하늘과 땅이 지나간 뒤에, 하나님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무궁토록 그 놀라운 실제 모습이 그대로 알려지고 찬양받는데 두어야 할 것이다.

 

"아멘" 주기도문에 있어서 마지막으로 나오는 이 단어는 기도에 꼭 있어야 할 두 가지, 말하자면 열렬한 소원과 믿음의 실행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히브리어 아멘(신약에서는 종종 "진실로"라고 번역된다)은 "그렇게 될지어다"라는 뜻을 지니기 때문이다. 간구와 기대라는 이 이중적인 의미는 다음과 같이 시 72:19에서 아멘을 중복해서 사용된 것에서 뚜렷이 암시된다.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정하셨기 때문에 이를 믿는 온 교회가 "그렇게 될지어다"라고 그 소원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 "아멘"은 주기도문의 각 부분과 어구마다 적용할 수 있다. 즉,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아멘" 등등 공중 기도와 개인 기도에서 아멘을 말하는 것은 우리의 열망을 표현하고 하나님의 권능과 신실하심에 대한 우리의 확신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 자체가 압축되고 강조된 기원이다. 즉 "아멘"이란 하나님의 약속의 진실함을 믿고 그 통치의 회고함에 의존하여 은혜로운 응답에 대한 우리의 확신 있는 기대를 마음에 새기며 고백하는 것이다.

 

출처: 창골산

 

출처: 우림과둠밈          글쓴이: 우림과둠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