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의 주기도문
(김병덕 목사)
(시 23:1-6) “{주}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주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kjv]
성경을 보면 볼수록 어렵다는 생각을 합니다. 늘 성경을 해석하면서 살아가고 있지만 혹시라도 나로 인하여 잘못된 영혼이 있을까 기도를 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하루라도 그 기도를 빠지지 않게 하고 있고 정말 바르게 성경을 해석할 수 있게 성령의 감동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설교를 작성하다가 만 것이 더러 있습니다. 성경 본문을 잡고 설교를 작성하다가 어느 한 부분에서 막히게 되면 더 이상 명확하게 해석이 안 되면 그 설교는 가능한 멈추고 다른 설교를 작성을 하고 있습니다. 저도 인생입니다 모든 성경을 다 이해할 수도 없고 또 깨달아 알 수 없다는 것을 늘 생각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그런 한계에 부닥치면 다시 한 번 돌아보는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있습니다. 그 말씀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왔다면 그리고 믿음에 대해서 해석이 되었다면 조금 설명이 잘못되었다 해도 복음에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힘을 내고 있습니다. 정말 인간적으로는 지칠 때도 있고 조금 더 배우고 싶고 성경을 더 많이 읽어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잘 나타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인터넷을 많이 봅니다. 물론 요즘은 거의 설교는 보고 있지를 않습니다. 솔직히 몇 자만 보아도 그 설교에 대해서 뻔히 보이기 때문에 더 이상 읽을 가치가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은 그런 설교들이 주를 이루고 있고 그런 비 복음적인 설교를 보면서 지금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은혜를 받는다고 고백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을 바로 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그것이 감동으로 내 영혼에 전해지지 않고 있다면 그는 분명히 문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특히 시편을 볼 때 마다 믿음의 선진들의 영성이 얼마나 뛰어나고 그들의 고백이 얼마나 진솔한가를 깨닫고 있습니다.
너무 감성에 빠져 있습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지독한 감성주의에 빠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정작 본인들은 그것을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서도 그 문자의 감성에 빠져 마치 이 세상의 시를 보는 것같이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시편은 이 세상의 시가 아닙니다. 이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절절히 담겨져 있다는 것을 성령의 감동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지금 교회 안에서 문자 그대로 시편을 노래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것이 다 감성을 자극하는 것임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노래로 부르는 것이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하는 말씀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그런 노래를 부르다 보면 감성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허리입니다. 시편, 잠언, 전도서는 성경의 허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허리가 든든히 받치고 있어야 내가 진리 가운데로 인도함을 받을 수 있는데 이 시대는 너무 감성에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또한 성경을 너무 자의적으로 해석을 하는 것이 큰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늘 깨어 있으시기 바랍니다. 눈을 뜨고 있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또 교회에 나가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또한 성경을 보라고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을 한다 해도 그가 성령의 감동을 받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이 세상 종교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깨어 있는 사람은 빛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요 1: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깨어 있는 성도만 볼 수 있습니다. 교회에는 나와 있지만 또 성경은 보고 있지만 실제 소경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어려서부터 성경을 보았고 그들은 조상 대대로 하나님을 믿어 왔다고 스스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부를 했지만 참 빛이 왔지만 보지를 못했습니다.
왜 못 봤습니까? 그들은 모두가 소경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빛이 비추어도 그것을 볼 수 없었습니다. 소경은 빛이 비추어도 낮인지 밤인지 분별이 안 됩니다 물론 눈이 나빠져 잘 안 보이는 사람은 빛을 어슴푸레하게 볼 수 있지만 나면서부터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은 빛을 전혀 분별을 하지 못 합니다. 대 낮이라도 깜깜한 밤과 똑같습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글자는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문자적으로 단어의 뜻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생의 지혜로는 소경과 같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지혜와 지식이 뛰어난 석학이라고 해도 그가 성경을 본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물론 그들이 공부를 많이 했기 때문에 성경을 남들보다 더 빠르게 사람의 이성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소경입니다. 가끔가다가 보면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교회에 나이가 들어서 들어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얼만 되지도 않아 성경을 가르치고 간증을 하러 집회를 다니는 것을 보면서 정말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들은 이미 이 세상의 이성적 지식으로 단단한 껍질로 쌓여 있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을 그렇게 봅니다. 자기 이성의 지식으로 성경을 보다 보니까 문제가 심각해지고 보통의 사람들은 그 사람의 인지도만을 생각하면서 마치 그가 모든 것을 다 아는 것 같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참 빛을 보았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참 빛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이 세상이 이성적 지식의 두꺼운 껍질을 벗어내는 것 같은 패러다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 세상의 그 두꺼운 껍질을 깨지 않고 있고 그것을 그대로 이용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초등학문이라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어두움입니다. 참 빛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참 빛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모든 것은 어두움입니다. 내 눈으로 보고 내 감성으로 느끼고 사람의 이성적인 지식으로 알고 하는 이 모든 것을 참 빛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어두움에 속한 것임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은 그렇게 어두움입니다. 성경 말씀에 있다고 해서 그것이 다 빛이라고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은 성경을 보고 그대로 행하면서 살았지만 소경이 되어서 참 빛이 왔지만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이 시대 신학자들보다 성경을 몰라서 어두움에 있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 신학자들보다 그들은 성경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까? 그래서 교회에 나와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고 주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까? 그것으로 내가 참 빛을 보고 있다고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실제 교회 안에 있는 다수는 이스라엘과 같이 역시 어두움에 거하고 있으면서도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깨닫지 못하고 있는 이슈가 바로 성령의 감동을 받고 있기 않고 사람의 이성으로 성경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 빛을 보아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내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또 내 이성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 안에서 참 빛을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내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은혜를 구해야 성령을 선물로 주셔서 성경을 볼 때 참 빛이 보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문제는 자기들이 예수그리스도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전혀 예수에 대해서 무지에 가까워 깜깜하게 지내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못 보고 있으면서도 예수를 보고 있다고 착각에 빠져 있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마치 신기루를 보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보고 있는 것이 진짜 예수라고 생각을 하는 것이 문제고 그것을 따라가다가 결국에는 어떻게 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 입니다. 그 외에 다른 것을 보고 있다면 그는 미련한 자입니다. 다른 것을 보고 있다고 하니까 불교나 천주교나 이 세상의 다른 종교를 본다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나와 있지만 그들이 참 빛을 안 보고 다른 것을 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을 보고는 있지만 그 안에서 참 빛을 보기보다는 율법과 은사에 빠져 무엇을 보고 있는지 분별이 안 되고 있습니다.
다 죽습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반드시 다 죽게 되어 있습니다. 눈이 떠 있는 사람이 소경을 인도해도 혹시 그가 잘못 인도를 해서 불행한 일이 있을 수 있는데 소경이 소경을 인도를 한다면 그것은 너무도 뻔한 결과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있는 소경들이 다 자기들은 참 빛을 보고 있다고 오해를 하고 있다는데 큰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주}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다윗의 시입니다. 그러나 이 시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을 곳곳에서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다윗은 영성이 깊은 성도로서 이 시를 썼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다윗 개인의 시로만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다윗의 시 곳곳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주}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고 말씀을 합니다. 부족함이 없습니다. 다윗은 왕입니다. 그가 이 세상을 통치는 하는 왕이라서 부족함이 없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다윗이 그 당시 중동 지역에서 모든 전쟁에서 이겨서 모든 나라를 굴복 시켜서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영의 말씀입니다. 육의 생각으로 이해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비록 다윗이 당시 중동에서 모든 나라를 이겼다고 하지만 절대로 그것으로 만족할 수는 없습니다. 인생은 어느 누구도 이 세상을 다 가진다 해도 부족함이 없다고 하지 않습니다. 유명한 알렉산더 대왕은 33세 이전에 이 세상을 모두 정복을 했습니다. 그가 정말 부족한 것이 없었을 정도로 원하는 것을 다 가졌는데 더 이상 정복한 나라를 찾지 못하니까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일찍 절명을 하고 말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생은 늘 부족합니다. 의자왕이 3천 궁녀를 거느렸다 해도 그 역시 또 부족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채울 수 없습니다. 하늘의 별을 따다 준다 해도 그것으로도 채우지 못 합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그렇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약 1:3-4)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오직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있어야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다윗도 왕이었지만 역시 인생이 받는 시련과 인내가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생명에 대해서 부족함이 없다고 시편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것으로는 아무리 채워도 채울 수 없지만 그러나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만은 나의 목자 되시는 하나님의 계심으로 부족함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왕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부족함이 없는 생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이 세상에 인생으로 오셔서 여러 가지 환난과 고난을 당하셨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전혀 부족하지 않으셨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요 5: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생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부족하지 않은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체가 생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족하지 않은 이 생명을 이 세상사는 동안에 반드시 얻어야 합니다.
주님이 아니고는 안 됩니다. 이 세상에 어떤 방법으로도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오직 영원한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부족함이 없다고 말씀을 해 주고 있지만 현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있는 것 다 변하고 없어지고 말 것을 가지고 부족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고 있고 그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주님도 인자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 주님 안에는 생명이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지금 이 시대 우리가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 생명을 얻고 있습니다. 아니 앞으로도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얻을 수 있는 생명이지만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를 않고 있습니다. 더구나 교회에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를 않고 있는 악한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악한 자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이 생명 말고 다른 것으로 부족하지 않기를 바라고 그것을 구하는 자는 악한 자입니다. 또한 그것을 얻은 것을 가지고 교회 안에서 자랑을 하고 있는 사람도 역시 악한 자입니다. 생명 이외에 것을 얻으려고 하는 모든 사람은 다 악한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지 다른 어떤 것을 주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어디입니까? 이 세상은 어느 곳도 우리가 쉴 수 있는 곳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푸른 초장이 어디 있습니까? 쉴 만한 물가가 어디 있습니까? 물론 이 세상에도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쉴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전 2:22-23)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으로 소득이 무엇이랴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밤에 쉽니까? 인생은 밤에도 쉬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내가 망중한을 누리고 있다고 그것이 쉬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으면 안 됩니다. 그 시간에도 이 지구는 돌아가고 있고 나는 점점 후패해 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생이 쉬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 시간에도 우리는 저 사망이라는 곳으로 달려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생은 수고와 근심입니다. 이 세상 어느 곳도 푸른 초장이 되지 못하고 쉴 만한 물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쉬는 그것을 쉬는 것이라고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쉴 곳은 오직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우리를 영접해서 인도할 처소 천국 밖에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천국입니다. 그곳에 가기 까지는 인생은 너무도 힘에 겹고 또 계속해서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사망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그런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를 찾기를 원하는 사람은 모두가 진리를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누가 그렇게 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주님을 천국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쉴만한 곳으로 가셨습니다. 시편은 물론 다윗의 고백이기도 하지만 이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왕으로서 하나님께서 목자가 되셔서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를 하셨습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의 에표입니다. 또한 다윗의 고백은 지금 나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모두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고백을 다윗 개인의 시로만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분명히 다윗은 주님의 입자에서 또 개인의 입장에서 감동을 받아 이 시를 썼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눅 23: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또 우리 육체도 사망의 권세를 이기지 못하고 반드시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 영혼을 하나님께서 소생시켜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도 당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직전에 하나님께 자기 영혼에 대해서 부탁을 하고 운명을 하셨습니다.
영혼을 소생 시켜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혼을 하나님께서 소생시켜 주셨습니다.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을 하게 해 주셨습니다. 다윗의 이 시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혼을 소생 시켜 주시는 것을 미리 예언적으로 쓴 시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혼을 소생시키신 것이 다윗의 영혼을 소생시킨 것이고 또 이 시대 내 영혼을 소생시킨 것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영혼을 소생시키심으로 해서 우리 영혼이 이제 또 소생이 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고 이 능력을 주님께서는 의지를 하고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또한 주님과 같이 하나님께 이 영혼의 소생을 위해서 부탁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영혼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에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이 의의 길을 인도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의에 길을 갈 수 없었는데 아니 가지를 못하고 있었는데 주님이 이 세상 오심으로 해서 의에 길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주님께서는 죄가 없으신 분이지만 우리 죄인을 위해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할 이름입니다. 그 이름을 위해서 새로운 의에 길로 인도를 하셨습니다. 이제까지는 모든 인생들이 자기의 의로 구원을 받으려고 했지만 그것이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 주셔서 율법 외에 또 다른 의를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이 의에 길을 믿음으로 가게 해 주시고 있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십자가에 달려 죽이시려고 했지만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 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영혼을 다시 살리실 것을 알았기에 두려워하지 않고 십자가에서 승리 하실 수 있었습니다.
아무도 죽을 수 없습니다. 다시 살 수 있다는 확신이 없이는 죽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고난을 당하는 그 죽음을 아무도 죽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음부의 고통에 내려가셨지만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셔서 세상을 이길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주님은 어떤 해가 와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사망의 권세를 이기셨기 때문에 초대 교회의 수많은 순교자들이 주님과 같이 순교를 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역시 복음이 있는 성도는 하나님께 자기 영혼을 의지하고 있는 성도는 어떤 상황이 어더라도 그것을 기꺼이 감당을 하고 있습니다.
(요 17: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함께 있었습니다. 늘 주님은 아버지와 함께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고난을 당 하시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생명 그 자체입니다. 그렇기에 더욱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만약에 반드시 산다는 믿음이 있다면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살리셨습니다. 그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살아나신 것은 우리 역시 다시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차피 한번 죽은 것은 정해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성도는 그 죽음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있습니다.
주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나를 안위하십니다. 물론 이것은 다윗의 고백입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사랑의 막대기가 있고 또 하나님을 의지하는 지팡이가 있기 때문에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시편은 이렇게 다윗의 개인의 고백과 또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이 함께 시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원수가 누구입니까? 물론 사단도 원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원수가 무엇이라는 것을 이 시대 사람들은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원수는 나를 죽이게 하는 것이 원수입니다. 나를 죽이게 하는 것은 바로 율법입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왔고 죄로 인하여 사망이 찾아왔습니다.
(엡 2:15)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이 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습니다. 세상 법으로도 예수님은 죄가 없다고 했지만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율법으로 신성 모독 죄를 씌워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이 원수로 결국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그 원수의 죽임에서 벗어나 상을 받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았습니다. 이 원수를 이기게 하시고 만왕의 왕이 되게 하셨고 만유의 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주님은 이기셨습니다. 원수를 이기시고 하나님 보자 우편에 앉았습니다. 우리의 원수 율법을 주님께서는 이기시도 십자가로 승리를 하심으로 해서 하나님 그 영혼이 소생이 되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게 되었습니다. 이 상 보다 더 큰 상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왕으로서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이제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에는 심판 주로서 온 우주의 만왕의 왕으로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주님이 어떻게 다시 오실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왕으로 오셔서 우리도 역시 주님과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왕입니다. 그래서 주(主)라고 합니다.다윗의 위를 이을 왕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역시 우리도 주님께서 이기신 것을 믿음을 해서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해서 원수 된 것 율법의 목전에서 우리에게 상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믿음으로 이긴 자로서 상을 베풀어 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있는 자는 하나님이 상주시는 이심을 알아야 할찌니라고 히브리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원수 된 것 율법을 없이 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믿는 성도는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에 상을 받을 줄 믿습니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주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 개인의 시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 주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다시 살리심으로 해서 부활 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거하시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성도들에게는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때 그 시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성도들에게도 평생 따르고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단번입니다. 그러나 이 단번에 지신 십자가를 믿지를 않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이기심으로 해서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십자가를 믿는 우리는 주님과 하나임으로 영원히 함께 살 수 있습니다.
정녕 따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변합니까? 절대 아닙니다. 그 십자가는 이 시대 뿐 아니라 우리의 자손 대대로 변하지 않고 그것을 믿는 성도들에게는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평생에 정녕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 들여야 하는데 주님의 십자가를 이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정녕입니다. 거짓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 평생에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다시 죄인들을 위해서 죽이시는 것이 아니라 단번에 죽으심으로 해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정녕을 믿지를 않고 있습니다. 아니 율법에 빠져 성경을 오해를 함으로 해서 믿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도 하나님의 집에 거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역시 영원히 하나님의 집에 거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고 그것을 믿으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보다는 자기들의 행위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주님이 영원히 주의 집에 거합니다. 주님께서 너희는 나와 하나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님과 내가 한 몸이라면 주님이 하늘에 올라 가계시면 나 역시도 하늘에 함께 앉아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렇게 믿는 성도는 이 세상에서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 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있습니다.
주님과 하나입니다. 이렇게 하나라고 믿는 성도는 이미 주님께서 하나님의 집에 거하시고 있기 때문에 절대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모든 두려움을 쫓아내시고 천국을 소망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다윗과 같이 詩를 써서 고백을 하고 이 고백이 내 고백이라는 것을 믿어서 주님의 은혜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성도가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출처: 우림과둠밈 글쓴이: 우림과둠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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