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에스라, 강해

[스크랩] 에스라 (개론)

에반젤(복음) 2019. 12. 28. 09:49


               에스라(개론)




[1] 명칭

에스라서의 명칭은 이 책의 중심인물에 따라 붙여진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 책을 느헤미야서와 한 책으로 생각해 왔으나(탈무드, 마소라 본문 요세푸스 참조), 에스라 2장이 느헤미야7장에 반복된 것으로 보아 두 책은 원래 별개의 책이었다.
[2] 저자와 저작연대

비록 저자가 명시되지 않고 화자(話者)가 1인칭과 3인칭으로 나타나지만, 에스라가 직접 여러 칙령과 서한, 계보들을 기본 자료로 사용하여 이 책을 기록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일부 바벨론 문서들도 이와 비슷한 서술형식을 사용하였다. 따라서 인칭의 변화가 에스라의 저작설을 부인하는 결정적인 논거는 되지 못한다. 에스라가 자신을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사"(7:6)로 언급한 사실도 그의 저작설을 반증하는 실제적인 논거로 사용될 수는 없다(민수기 12:3참조). 에스라는 느헤미야 시대까지 살았기 때문에 에스라 10:17-44의 사건이 일어나던 주전 458년봄부터 느헤미야가 바사 궁전을 떠나 예루살렘에 도착한 주전 444년 여름에 걸쳐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그의 책을 완성하였다.

[3] 역사적 배경

에스라서는 70년간의 포로생활 후에 이스라엘 조국으로 돌아오게 하리라고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하여 그들에게 하신 약속의 성취를 기록하고 있다. 세 바사 왕(고레스, 다리오, 아닥사스다)의 보호와 도움 및 스룹바벨과 예수아, 학개, 스가랴, 에스라와 같은 위대하고 경건한 유대인들의 인도를 통하여, 예루살렘에서는 두번째 성전이 완성되어 참된 예배가 다시 드려졌다. 1-6장까지는 고레스왕(538-530 B.C.) 치세 초기의 2,3년과 다리오왕(522-486 B.C.) 치세 6년 동안의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으며, 나머지 7-10장은 (4:7-23 포함) 아닥사스다1세 (465-424 B.C.) 통치 초기의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다. 바사의 아끼메니드 왕조에 있어 중요한 80년간의 기간이 에스라서의 해당 기간이지만, 바사의 두 차례 희랍 원정 실패와 에스더서의 사건들이 일어났던 주전 516-458년 사이의 58년간에 대해서 그것은 실제로 아무 것도 언급하지 않는다.

[4] 바벨론 포로에서의 귀환

북왕국 이스라엘 백성은 앗수르에 포로로 끌려가서 결코 돌아올 수 껄었다. 그들이 민족적 실체로서 계속 존재하지 못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다. (1)북왕국에는 유다와는 달리 돌과 흙으로 된 것이든 마음 속에 있는 것에든 성전이 없었다. (2)이스라엘에는 수도 사마리아가 함락된 후 왕족 생존자가 없었다. 여하튼 그들은 그 이전에 이미 다윗 혈통을 잃었으며, 이로 인하여 영원한 왕국의 보좌 위에 "다윗의 아들'이 앉을 것이라는 위대한 예언적 이상(理想)이 말살되었다. (3)앗수르는 대부분의 백성들을 북왕국 밖으로 몰아내고 이방인을 그 땅에 이주시켰다. 이로 인해 남아 있던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들 사인에 잡혼이 이루어지고,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인들로부터 그처럼 증오를 받던 혼혈족인 사마리아인이 나타나게 되었다. (4)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앗수르에 있던 이스라엘 포로들 중에는 그들의 종교적, 문화적 동질성을 유지할만한 계속적인 종교적 지도력이나 예배 중심지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고대 중동의 떠돌이 민족들 속으로 사라졌고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열 지파"가 되었다. 그러나 유다 왕국의 포로 역사는 이와 달랐다. 주전 586년에 예루살렘 도성을 마지막으로 점령하고 불사른 것은 앗수르가 아니라 바벨론이었고, 정복민에 대한 바벨론의 정책은 매우 달랐다. (1)바벨론은 포로로 잡혀온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공동체를 이루고 거주하도록 하였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신을 섬기고, 그들 자신의 학교를 운영하며, 그들의 민족적, 종교적 동질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2)유다도 마찬가지로 다윗의 혈통을 왕으로 삼았고 다윗의 한 후손이 백성들과 함께 포로로 잡혀갔다. 이것은 다윗의 후손이 거기에 있어 다윗 왕조의 회복에 대한 소망을 간직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3)바벨론은 앗수르가 사마리아에서 행했던 것과 같이 고의로 유대의 거주민을 교체시키지는 않았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는 언제나 유대인들이 남아 있었고, 바벨론의 포로들도 거룩한 시온산 위에 폐허로 남아있는 거룩한 도성과 영광스런 성전을 결코 잊지 않았다. (4)가장 중요한 것은 유다에서 끌려간 포로들은 율법 책을 보존하고 가르쳤던 서기관과 제사장이 있었다는 것이다. 포로에서 살아남은 백성은 "성경의 백성"이 되었고, 바벨론께서 귀환한(주전 538년경) 해에 그들은 성경을 가르치는데에 종교생활의 중심을 두는 민족이 되었다.

[5] 내용

에스라서는 느헤미야와 역대상, 하를 포함하여 4권을 하나로 엮은 책에 속한다. 이 4권은 "이스라엘의 제사장 역사"라 불리는 문학 작품의 일부로 생각된다. 동일한 종교적 메시지가 제사장 역사를 다룬 이들 모든 책들을 통하여 빛나고 있다. 그 메시지는 율법의 모든 사항을 신실하게 준수함으로 그리고 계약의 백성들이 이교적 오염과 우상숭배에 물들지 않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에스라는 이방인과의 잡혼에 관하여 우려를 나타내고있다. 하나님의 구속 계획 안에 있는 한 민족이 절박감을 느끼고 타종교 및 문화와 계속 통혼함으로 생길 파멸과 싸우고 있다. 두 중요 인물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바벨론포로가 낳은 산물이며 각기 이스라엘의 계속적인 계약사(契約史)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느헤미야는 파괴된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데 있어서 건축가요 유능한 조직가이며, 확고한 의지를 지닌 지도자였다. 에스라는 서기관이요, 가장 학식있는 율법 해석자며, 무엇보다 포로에서 귀환한 백성을 "성경의 백성'으로 형성시킨 인물이었다. 심지어 옛 책들이 모두 분실되자 에스라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그것들을 모두 다시 저술했다는 전승도 있다. 이 때문에 에스라의 예루살렘 귀환과 이스라엘의 신앙생활을 재건하는데 그가 지도적 역할을 한 것은 주전 444년경 또는 아닥사스다(404-358 B.C.)가 선택된 해에 근거하여 그보다 늦은 주전398년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증거는 전자의 연대를 옹호하고 있으며, 이 책에 기록된 역사는 포로의 선발대가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기 시작한 (주전 538년) 약100년 전에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