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엡1:22-23절, 84.85.506장.A
세계 도처에서 분쟁과 재난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개인과 개인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분쟁이 있습니다. 그리고 국가와 국가 사이에 분쟁이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끼리의 다툼으로 교회에 큰 분쟁이 있습니다. 이런 분쟁 속에서 인간은 무서운 파멸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 분쟁의 역사 속에서도 인간(人間)은 나름대로 화해를 시도해 주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 화해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 화해라는 것도 자기 나름대로의 만족을 느낄 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만족이 충족되지 아니할 때 화해는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에베소서는 바로 이런 인간의 죄악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화해의 복음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화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과의 화해자로 등장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는 영원전부터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교회를 통해서 선포되게 하시고 증거(證據) 되게 하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에베소서는 기독론과 교회론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1.에베소서에서 제기된 문제입니다. 에베소서를 연구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많은 문제가 제기된 것은 바로 저작성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에베소서는 바울이 기록했습니다. 더 정확한 표현은 바울을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에베소서가 정말 바울이 기록했느냐입니다.
바울이 쓴 편지인가 아니면 바울의 제자가 바울의 생각을 담아서 기록한 편지인가? 이런 문제가 쟁점으로 제기되었습니다. 그렇게 쟁점이 된 이유는 이렇습니다. 첫째, 바울이 다른 서신을 기록할 때는 독자들과 개인적으로 아주 친밀한 관계 속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서는 그런 개인적인 친밀함이 생략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이 기록했을까라는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둘째, 에베소서가 바울의 다른 서신들과 다른 독특한 점 때문입니다. 에베소서는 고린도서 처럼 교회의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록된 것이라기 보다는 기독론과 교회론에 대한 소논문과 같은 것입니다.
에베소서는 편지의 형식을 띤 소 논문과 같은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셋째, 에베소서에 기록된 단어들의 어휘 때문입니다. 에베소서를 살펴보게 되면 신약(新約) 성경(聖經) 그 어디에서도 사용하고 있지 않는 말이 에베소서에만 사용된 것이 무려 38개가 됩니다. 또한 바울서신과 비교해서 에베소서에만 나오는 말들이 44개입니다.
이 이야기는 마치 에베소서가 바울의 편지라고 한다면 왜 바울의 다른 편지에는 기록되지 않는 다른 말들이 에베소서에만 기록되고 있느냐고 합니다. 이런 문제가 제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에베소서는 바울의 편지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또한 에베소서는 에베소에 있는 교회를 포함해서 에베소 주위인 아시아, 소아시아 전체 교회에도 읽혀지도록 바울의 묵상과 혹은 설교라는 형식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계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2.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입니다.(1장)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구원을 신령한 복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복은 하늘에 속한(3절)복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같은 하늘에 속한 복을 누구에게 주신다고 했습니까?
그것은 1:4절에 기록된 대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된 자들에게만 주신다고 했습니다. 왜 이 신령한 구원의 복이 모든 자의 것이 아닌 특별한 자들의 것입니까? 그 이유는 1:5절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뜻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은 자들만이 신령한 복을 받기 때문에 그 복은 예수님과 상관없는 자들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진 신령한 복은 우리들에게 거져,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내쪽의 노력과 행위와 상관없이 주어졌습니다. 이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이렇게 은혜로 주어진 이유는 우리들로 하여금 겸손하게 하나님께만 찬미하게 하시려는 섭리 때문입니다.(6,12,14절). 이 같은 놀라운 신령한 복인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과 죄사함을 받은 우리들은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17).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광의 풍성함과 하나님의 은혜와(18) 능력과(19) 위엄과(20) 권세를(21)를 알아야 하고 느껴야 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풍성함을 드러내고 찬양하고 선포하는 무대가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를 통해서 영광의 풍성함이 드러난다는 것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때만이 교회의 존재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까?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섬기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고 우리 자신이 교회의 머리라고 혼동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교회의 주도권 싸움은 그리스도가 교회 머리되심을 거부한 행위(行爲)들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은 반드시 그 책임(責任)을 물으실 것입니다.
3.장벽을 허물어 하나 되게 한 십자가입니다.(2장)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들을 예수 십자가로 살려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풍성한 긍휼과 큰사랑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2:4절). 그러므로 생각하라(2:11)고 합니다. 무엇을 생각하라고 합니까?
이제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가 가진 능력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이것은 율법을 통한 의에 기준을 제거하시고 예수님께서 주신 십자가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기준을 제시하여 우리들을 새사람 되게 했습니다.(2:15절).
이제 인종적(人種的) 구분이나 신분적 구분, 사회적 구분과 성(남성 여성)의 구분은 이제 더이상 의미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구분하는 장벽을 십자가(十字架)로 다 허물어 버렸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만 있으면 우리 모두는 하나입니다. 이제 죄의 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제 우리들은 교회(敎會)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개별적(個別的)인 지체(肢體)들이 되었습니다. 지체들인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보이지 않는 거대한 성전(聖殿)의 일원으로 지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 성전은 하나님이 거하신 성전입니다. 그 성전에 우리들은 한 부분이라는 것을 망각하면 안 됩니다.
4.바울의 사도직과 기도와 권면입니다.(3-4장) 계시로 주신 구원의 비밀을 바울에게 허락해 주셨고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권위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은 이방인을 위해서 주신 비밀의 말씀에 대한 관리자임을 이야기합니다.
바울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점과 은혜의 깊이와 넓이를 깨달아 충만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敎會)와 그리스도의 일치를 강조(强調)합니다. 머리와(그리스도) 몸의(교회) 일치와 동시에 주종(主從) 관계(關係)를 강조합니다.
동시에 몸의 하나 됨을 강조합니다. 죄악으로 인한 하나님과의 단절, 이웃과의 불신의 장벽을 그리스도 안에서 허물고 새생활, 거듭난 생활(生活)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5.그리스도인의 생활 윤리입니다.(5-6장)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4:17절에서부터 5장 6장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무조건 이런 삶을 명령식으로 강조하지 않습니다. 전반부에서 진술한 복음의 은혜로 인하여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특히 바울은 영지주의자들의 이원론적 사상에 근거한 도덕적 타락을 지적합니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은 영의 세계인 하늘과 물질적인 세계인 땅 사이에 악령들이 존재하면서 인간의 운명을 좌지우지(左之右之)한다고 보았습니다.
땅에서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할 때 중간에서 악령들이 가로막는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 악령들의 노예로 살아간다고 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런 악령들을 무장 해제시켰습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復活)로 그 악령의 세계를 결박시켰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十字架)의 승리(勝利)는 곧 우리들의 승리입니다.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탄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우리들도 이제 거룩한 전쟁(戰爭)을 펼쳐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6:10-20절에서 말씀한 내용입니다.
6.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은 믿음의 분량은 서로 다를지라도 믿음의 내용과 질은 같아야하고 하나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들은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 성경에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성경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모아 놓은 잡지와 같은 그런 책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죄를 범한 인간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저주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해결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같은 구원을 위해서 성령께서 어떤 일을 하시는가를 보여줍니다.
특히 구원을 받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고백하고 섬겨야 할 것인지를 맙㈐莩求? 성경을 통하여 바른 하나님을 깨닫고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들에게 베푸신 은혜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나면 우리들의 교만과 오만이 꺾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의 죄책감이 사라지고 복음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 자유인들은 자기를 자랑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십자가만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나타내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그런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만을 받아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한 자들만의 기도를 응답해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중보기도자입니다.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자가 될 수 없고 중보기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다른 사람 사이에 어떻게 내가 중보자로 개입하여 중보기도를 해 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이단적 사상일 수가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 주는 기도를 중보기도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들은 구약 성경에서 모세나 아브라함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기도한 기도를 중보기도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백번 양보해서 구약의 모세나 아브라함이 드린 기도가 중보기도라 할지라도 그 중보기도는 장차 중보자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약속해 주고 예언해 주고 예표해 주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아무런 생각 없이 모세의 중보는 곧 우리들의 중보기도라는 등 식을 만듭니다.
얼마나 성경에 무지하는지 모릅니다. 우리들이 중보기도자라고 한다면 구태여 무엇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겠습니까? 자신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들은 기도에 관해서도 오해하고 있다는 증거들입니다.
오직 예수님이여야 합니다. 교회의 머리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들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나의 공로와 자랑이 아닌 오직 십자가의 공로와 자랑만이 있어야 합니다.
딤전2:5절에 "하나님은 한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중보자인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여 응답받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복된 성도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엡1:22-23절, 84.85.506장.A
세계 도처에서 분쟁과 재난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개인과 개인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분쟁이 있습니다. 그리고 국가와 국가 사이에 분쟁이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끼리의 다툼으로 교회에 큰 분쟁이 있습니다. 이런 분쟁 속에서 인간은 무서운 파멸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 분쟁의 역사 속에서도 인간(人間)은 나름대로 화해를 시도해 주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 화해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 화해라는 것도 자기 나름대로의 만족을 느낄 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만족이 충족되지 아니할 때 화해는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에베소서는 바로 이런 인간의 죄악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화해의 복음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화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과의 화해자로 등장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는 영원전부터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교회를 통해서 선포되게 하시고 증거(證據) 되게 하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에베소서는 기독론과 교회론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1.에베소서에서 제기된 문제입니다. 에베소서를 연구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많은 문제가 제기된 것은 바로 저작성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에베소서는 바울이 기록했습니다. 더 정확한 표현은 바울을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에베소서가 정말 바울이 기록했느냐입니다.
바울이 쓴 편지인가 아니면 바울의 제자가 바울의 생각을 담아서 기록한 편지인가? 이런 문제가 쟁점으로 제기되었습니다. 그렇게 쟁점이 된 이유는 이렇습니다. 첫째, 바울이 다른 서신을 기록할 때는 독자들과 개인적으로 아주 친밀한 관계 속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서는 그런 개인적인 친밀함이 생략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이 기록했을까라는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둘째, 에베소서가 바울의 다른 서신들과 다른 독특한 점 때문입니다. 에베소서는 고린도서 처럼 교회의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록된 것이라기 보다는 기독론과 교회론에 대한 소논문과 같은 것입니다.
에베소서는 편지의 형식을 띤 소 논문과 같은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셋째, 에베소서에 기록된 단어들의 어휘 때문입니다. 에베소서를 살펴보게 되면 신약(新約) 성경(聖經) 그 어디에서도 사용하고 있지 않는 말이 에베소서에만 사용된 것이 무려 38개가 됩니다. 또한 바울서신과 비교해서 에베소서에만 나오는 말들이 44개입니다.
이 이야기는 마치 에베소서가 바울의 편지라고 한다면 왜 바울의 다른 편지에는 기록되지 않는 다른 말들이 에베소서에만 기록되고 있느냐고 합니다. 이런 문제가 제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에베소서는 바울의 편지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또한 에베소서는 에베소에 있는 교회를 포함해서 에베소 주위인 아시아, 소아시아 전체 교회에도 읽혀지도록 바울의 묵상과 혹은 설교라는 형식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계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2.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입니다.(1장)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구원을 신령한 복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복은 하늘에 속한(3절)복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같은 하늘에 속한 복을 누구에게 주신다고 했습니까?
그것은 1:4절에 기록된 대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된 자들에게만 주신다고 했습니다. 왜 이 신령한 구원의 복이 모든 자의 것이 아닌 특별한 자들의 것입니까? 그 이유는 1:5절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뜻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은 자들만이 신령한 복을 받기 때문에 그 복은 예수님과 상관없는 자들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진 신령한 복은 우리들에게 거져,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내쪽의 노력과 행위와 상관없이 주어졌습니다. 이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이렇게 은혜로 주어진 이유는 우리들로 하여금 겸손하게 하나님께만 찬미하게 하시려는 섭리 때문입니다.(6,12,14절). 이 같은 놀라운 신령한 복인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과 죄사함을 받은 우리들은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17).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광의 풍성함과 하나님의 은혜와(18) 능력과(19) 위엄과(20) 권세를(21)를 알아야 하고 느껴야 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풍성함을 드러내고 찬양하고 선포하는 무대가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를 통해서 영광의 풍성함이 드러난다는 것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때만이 교회의 존재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까?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섬기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고 우리 자신이 교회의 머리라고 혼동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교회의 주도권 싸움은 그리스도가 교회 머리되심을 거부한 행위(行爲)들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은 반드시 그 책임(責任)을 물으실 것입니다.
3.장벽을 허물어 하나 되게 한 십자가입니다.(2장)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들을 예수 십자가로 살려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풍성한 긍휼과 큰사랑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2:4절). 그러므로 생각하라(2:11)고 합니다. 무엇을 생각하라고 합니까?
이제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가 가진 능력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이것은 율법을 통한 의에 기준을 제거하시고 예수님께서 주신 십자가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기준을 제시하여 우리들을 새사람 되게 했습니다.(2:15절).
이제 인종적(人種的) 구분이나 신분적 구분, 사회적 구분과 성(남성 여성)의 구분은 이제 더이상 의미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구분하는 장벽을 십자가(十字架)로 다 허물어 버렸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만 있으면 우리 모두는 하나입니다. 이제 죄의 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제 우리들은 교회(敎會)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개별적(個別的)인 지체(肢體)들이 되었습니다. 지체들인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보이지 않는 거대한 성전(聖殿)의 일원으로 지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 성전은 하나님이 거하신 성전입니다. 그 성전에 우리들은 한 부분이라는 것을 망각하면 안 됩니다.
4.바울의 사도직과 기도와 권면입니다.(3-4장) 계시로 주신 구원의 비밀을 바울에게 허락해 주셨고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권위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은 이방인을 위해서 주신 비밀의 말씀에 대한 관리자임을 이야기합니다.
바울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점과 은혜의 깊이와 넓이를 깨달아 충만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敎會)와 그리스도의 일치를 강조(强調)합니다. 머리와(그리스도) 몸의(교회) 일치와 동시에 주종(主從) 관계(關係)를 강조합니다.
동시에 몸의 하나 됨을 강조합니다. 죄악으로 인한 하나님과의 단절, 이웃과의 불신의 장벽을 그리스도 안에서 허물고 새생활, 거듭난 생활(生活)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5.그리스도인의 생활 윤리입니다.(5-6장)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4:17절에서부터 5장 6장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무조건 이런 삶을 명령식으로 강조하지 않습니다. 전반부에서 진술한 복음의 은혜로 인하여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특히 바울은 영지주의자들의 이원론적 사상에 근거한 도덕적 타락을 지적합니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은 영의 세계인 하늘과 물질적인 세계인 땅 사이에 악령들이 존재하면서 인간의 운명을 좌지우지(左之右之)한다고 보았습니다.
땅에서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할 때 중간에서 악령들이 가로막는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 악령들의 노예로 살아간다고 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런 악령들을 무장 해제시켰습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復活)로 그 악령의 세계를 결박시켰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十字架)의 승리(勝利)는 곧 우리들의 승리입니다.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탄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우리들도 이제 거룩한 전쟁(戰爭)을 펼쳐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6:10-20절에서 말씀한 내용입니다.
6.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은 믿음의 분량은 서로 다를지라도 믿음의 내용과 질은 같아야하고 하나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들은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 성경에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성경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모아 놓은 잡지와 같은 그런 책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죄를 범한 인간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저주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해결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같은 구원을 위해서 성령께서 어떤 일을 하시는가를 보여줍니다.
특히 구원을 받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고백하고 섬겨야 할 것인지를 맙㈐莩求? 성경을 통하여 바른 하나님을 깨닫고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들에게 베푸신 은혜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나면 우리들의 교만과 오만이 꺾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의 죄책감이 사라지고 복음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 자유인들은 자기를 자랑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십자가만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나타내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그런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만을 받아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한 자들만의 기도를 응답해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중보기도자입니다.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자가 될 수 없고 중보기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다른 사람 사이에 어떻게 내가 중보자로 개입하여 중보기도를 해 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이단적 사상일 수가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 주는 기도를 중보기도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들은 구약 성경에서 모세나 아브라함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기도한 기도를 중보기도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백번 양보해서 구약의 모세나 아브라함이 드린 기도가 중보기도라 할지라도 그 중보기도는 장차 중보자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약속해 주고 예언해 주고 예표해 주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아무런 생각 없이 모세의 중보는 곧 우리들의 중보기도라는 등 식을 만듭니다.
얼마나 성경에 무지하는지 모릅니다. 우리들이 중보기도자라고 한다면 구태여 무엇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겠습니까? 자신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들은 기도에 관해서도 오해하고 있다는 증거들입니다.
오직 예수님이여야 합니다. 교회의 머리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들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나의 공로와 자랑이 아닌 오직 십자가의 공로와 자랑만이 있어야 합니다.
딤전2:5절에 "하나님은 한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중보자인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여 응답받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복된 성도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주는 포도나무 나는 가지 a 글쓴이 : 이종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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