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의 배경이 되는 초대교회 역사
- 구약을 중심으로 -
박동현 교수(장신대/구약학)
1. 초기 기독교에 영향을 준 유대교의 신학논쟁
a. 고전 유대교에서 바벨론 포로기까지
b. 포로귀환 직후의 시대
c. 랍비시대
2. 초기 기독교 안에서의 두 사상의 대립
a. 예루살렘 유대교적 기독교 공동체
b. 구원 보편주의를 향한 준비
c. 예루살렘 사도회의와 안디옥 사건
d. 바울 공동체의 형성과 구원보편주의의 확산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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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기 기독교에 영향을 준 유대교의 신학논쟁
a. 고전 유대교에서 바벨론 포로기까지
야훼께서 이스라엘이라는 하나의 민족을 선택하셔서 오직 이 민족과만 계약을 맺으시고 이 민족만의 하나님이 되시며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만이 하나님의 선택함을 받은 백성이라는 생각을 선민의식(electionism)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선민의식은 고전 유대교(Classical Judaism)를 특징지어 주는 대표적인 신학사상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2) 이러한 선민의식은 물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고백적인 신앙으로 출발한 것이지만, 한편으로 이러한 사고는 구원사적인 관점에 있어서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다른 민족에 대하여 배타적인 태도, 즉 이스라엘만이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이며 이방인들은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입장을 가지게 하였다. 이 선민의식과 그것의 부수적인 결과로 나타난 배타적인 구원신학을 "유대 특수주의(Jewish Particularism)"라고 부른다. 물론 오경 안에도 이 유대 특수주의와는 맥을 달리하는 신학적인 사고가 반영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3) 적어도 바벨론 포로기 이전까지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이 유대 특수주의가 지배적인 사고의 틀을 형성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유대교 안에서 이 유대 특수주의와 대립되는 다른 신학사상이 있다면 그것은 유대 특수주의의 배타성을 극복한 열린 구원신학의 성격을 띠는 사상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을 이스라엘로 국한시키지 않고 모든 사람으로 보는 시각이 그것이다. 이러한 신학적인 사고를 구원 보편주의 혹은 세계 보편주의(universalism)라고 부른다. 세계 보편주의가 처음으로 강하게 표현된 것은 제2이사야의 선포에서부터이다.4) 제2이사야도 기존의 전통적인 신학의 입장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는 것을 기본적인 전제로 삼고 있다.5) 그러나 그는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만이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이다"라고 생각하는 유대 특수주의의 배타적인 입장을 극복하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신 목적이 궁극적으로는 그들을 통하여 세계를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라고 보는 새로운 신학적 지평을 열게 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나라들의 빛"으로 세우셨다고 선포한 것이다(사 42:6과 49:6). 이제 이스라엘은 이 빛을 온 세상에 비추어 하나님의 구원이 이스라엘의 테두리를 넘어서 "땅 끝에까지 미치도록"6) 할 사명을 가진 것이라는 새로운 인식이 생긴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 입장을 "세계 보편주의(universalism)"라고 부른다.7)
사실상 이 제2이사야의 세계 보편주의는 전통적인 유일신 신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온 세계를 창조하셨고8) 또 온 땅에 하나님은 한 분뿐이시기 때문에 야훼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신 것이 아니라 온 세계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생각이다.9) 그런 점에서 제2이사야의 세계 보편주의는 전적으로 새로운 사상이라기보다는 이미 유대교 안에 존재하고 있던 신학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면서 그 구원사적인 지평을 넓게 확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든 이 제2이사야의 세계 보편주의는 기존의 유대 특수주의와는 매우 다른 신학적인 경향성을 보이며, 그렇기 때문에 유대 특수주의를 따르던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거부감을 불러 일으켰으리라는 것은 쉽게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10) 그렇다면 바벨론 포로기는 유대교 안에 세계 보편주의라는 새로운 신학사상이 태동하면서 기존의 유대 특수주의와 대립의 양상을 보이며 두 사상이 병존하는 시기였다고 말할 수 있다.
b. 포로귀환 직후의 시대
바벨론 포로기를 마치고 귀환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우선 그동안 흐려졌던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그리고 종교적인 순수성과 정통성을 회복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 일은 주로 에스라와 느헤미야 개혁에 의해 추진되었다. 이들은 혈통의 순수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이방인과의 결혼을 금지하고 이미 혼인한 이방 여인들은 모두 이혼하여 고향으로 되돌려 보내는 조치를 내렸고,11) 율법을 이스라엘의 모든 종교와 생활의 규범으로 재확립하여12) 포로 후기 유대교(post-exilic Judaism)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러한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정책은 포로기와 귀환이라는 일련의 역사적인 사건들을 거치면서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유대교 안의 사상사의 흐름에 있어서 국수주의(nationalism)와 배타주의(exclusivism), 그리고 율법주의(legalism)를 고양시킨 결과를 낳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유대교 안에서는 세계 보편주의(universalism)와 대립되는 유대 특수주의(Jewish Particularism)가 다시 지배적인 사상으로 부각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포로귀환 이후 유대 특수주의가 다시 강화되었다고 해서 새롭게 일어나기 시작한 세계 보편주의가 전면적으로 약화된 것 같지는 않다.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룻기나 요나서 같은 책은 포로귀환 이후에 쓰여진 것으로, 에스라, 느헤미야의 유대 특수주의에 입각한 강경한 국수주의적인 노선에 대하여 하나의 반제를 제시하면서, 제2이사야의 세계 보편주의를 계승 발전시킨 신학적인 문헌들이라고 추정된다. 그렇다면 포로귀환 직후 시대는 한편으로 유대 특수주의가 지배적인 사상(ideology)을 이루고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 보편주의가 여전히 그 맥을 이어감으로 해서, 유대교 안에는 이 두 사조가 서로 대립의 양상을 보이는 시기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c. 랍비시대
구약성서시대 이후 유대교의 신학적인 흐름은 외경 및 랍비들의 문헌을 통해 나타나 있다. 특히 유대교가 범 헬라적 시기(The Hellenistic Period)13)를 거치면서 헬라문화와 긴밀한 접촉을 하게 되었을 때, 이로 인하여 생기는 여러 가지 신학적인 문제들은 당시의 유대교 신학자들 사이에 적지 않은 의견의 대립을 야기시켰다. 특히 이방인 개종자들(proselytes)14)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개방적인 입장을 취하는 학자들과 폐쇄적인 입장을 취하는 학자들이 서로 대립적인 관계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그 당시의 역사적인 정황이 만들어 낸 갈등이라기보다는 오래 전부터 유대교 안에 서로 다른 흐름을 형성해 온 세계 보편주의와 유대 특수주의 사이의 대립이 새롭게 표출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한 것 같다.
이러한 랍비들의 견해 차이는 1세기의 대표적인 유대교 학자인 힐렐(Hillel)과 샤마이(Shammai) 사이의 신학적인 경향의 차이를 통해 선명히 드러나고 있다. 랍비문헌에는 힐렐과 샤마이의 상반된 견해에 얽힌 수많은 일화들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 일화들은 특별히 개종을 원하는 이방인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바벨론 출신의 힐렐은 세계 보편주의를 지향하고 있고, 샤마이는 유대 특수주의에 가까운 경향을 취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15)
이 당시 이방인 문제에 대한 견해 차이는 랍비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사이에서도 나타나는데, 대체로 귀족적이고 사제적인 경향을 띤 사두개인들은 유대인들의 인종적 순수성을 흐리게 할 이방인 개종자들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는데 이에 반하여 신학적으로 윤리적 유일신관(ethical monotheism)을 지향하는 바리새인들은 모든 사람을 우상으로부터 참 신이신 야훼에게로 인도하는데 관심을 가져서 이방인 개종자들에 대하여 매우 긍정적인 입장을 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6) 따라서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찾아오는 이방인들을 환영했을 뿐만 아니라, 일종의 선교를 통하여 적극적으로 이방인 개종자들을 찾아다닌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마태복음 23:15에 나오는 예수의 logion은 이러한 추측이 상당히 근거가 있는 것임을 확인해 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유대교 학자들은 당시의 유대교 지도자들 중 상당수가 이방인 개종자들을 적극적으로 환영했을 뿐만 아니라, 보다 많은 개종자들을 얻기 위하여 조직적이고 활발한 선교활동도 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17)
물론 한편으로는 이방인 개종자들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있었고 또 이들의 주장은 사두개인 이외에도 극단적인 국수주의자들, 그리고 야훼종교의 순수성을 염려하는 적지 않은 유대인 평신도들에 의해 지지되었다. 이러한 이들의 부정적인 입장이 할라카의 일부에 드러나 있기는 하지만, 학가다에는 대체로 이방인 문제에 대하여 긍정적인 입장이 많이 반영되고 있다.18) 일반적으로 타나임 시대(The Tannaitic Period)19)에는 이방인 개종의 문제에 있어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입장이 더 강세를 보였고,20) 아모라임 시대(The Amoraic Period)21)에는 이 문제에 대하여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입장이 더욱 강세를 보이고 있다.22) 이렇듯 세계 보편주의와 유대 특수주의는 구약 시대에 이어서 랍비 시대에도 대립관계를 보이고 있으며 이러한 대립은 어떤 면에서 볼 때 유대교 안에서 오늘날까지도 계속되어 오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2. 초기 기독교 안에서의 두 사상의 대립
세계 보편주의와 유대 특수주의의 대립은 유대교 안에서뿐만 아니라 유대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초기 기독교 안에서도 발견된다. 초기 기독교 안에서의 이러한 신학적인 대립은 결과적으로 신약교회공동체들 사이의 대립과 갈등으로 발전하면서 초대교회 역사 전개에 있어서 하나의 중요한 동인(動因)을 형성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초대교회 역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이 동인의 뿌리와 그 영향을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 될 것이다.
a. 예루살렘 유대교적 기독교 공동체(The Jewish-Christian Community in Jerusalem)
예루살렘 유대교적 기독교공동체의 초기역사와 그 신학적인 입장을 자세히 재구성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다만 사도행전에 나타난 몇 가지 사건을 종합해서 그 흐름의 큰 줄기들을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우선 사도행전 5-6장에 보면 예루살렘 공동체의 초창기에는 베드로와 요한을 중심으로 한 예수의 제자들이 지도권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15장을 보면 예루살렘 사도회의에서 "주의 형제"라고 불리는 야고보가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로서 그 회의를 주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이후에는 바울서신이나 그 밖의 교회전승이 이 야고보를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대교적 기독교공동체의 지도자로 부각시키고 있다. 이 사실로부터 우리는 주후 30년부터 50년 사이의 어느 때엔가 예루살렘교회 안에 지도권의 변화가 있었고 그 결과로 베드로 같은 예수의 제자들은 시리아나 소아시아 등지로 흩어지고 예루살렘 기독교공동체는 주의 동생 야고보가 단일지도체제를 형성한 것으로 추측된다.23)
이 사이에 일어난 예루살렘 공동체의 변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주는 사건이 바로 사도행전 6장에 나오는 히브리파와 헬라파와의 갈등이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한 가지 단순하면서도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밝혀 주고 있는데, 그것은 예루살렘의 원시 기독교공동체가 한 가지 색깔을 지닌 동질집단(a homogeneous community)이 아니라 적어도 그 안에 어떤 점에서든 서로 선명히 구별되는 두 계열의 사람들이 섞여 있는 이질집단이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히브리파"는 아람어를 말하는 유대인들을, 그리고 "헬라파"는 그리이스어를 말하는 디아스포라 출신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말로 추정된다.24) 사도행전은 이 두 파 사이의 갈등이 과부를 구제하는 문제로 야기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 과부의 구제문제가 두 계파 사이의 갈등이 문제로 표출되는 근인(近因)이 되었을 수는 있어도, 그것이 모든 문제의 전부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문제의 근본적인 뿌리는 어쩌면 그 두 계파가 취하는 신학적인 입장의 차이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아람어 문화권에 속하는 히브리파 사람들의 신학은 보다 전통적인 유대교 신학에 가까워서 율법준수나 이방인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 유대 특수주의적인 입장을 취했을 것이고, 그리이스어 문화권에 속하는 디아스포라 출신 헬라파 사람들의 신학은 자연히 세계 보편주의적인 경향을 취했을 것으로 추정된다.25) 이 같은 가설을 뒷받침 해주는 근거가 바로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 스데반의 설교이다. 이 스데반의 설교는 그가 성전과 율법을 모독한다는 유대인들의 비난(행 6:13)에 대한 답변으로 주어진 것인데, 스데반 개인의 견해를 밝힌 것이라기보다는 어떤 계파의 신학적인 입장을 대변하는 설교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이 설교는 사도행전의 이야기 전개에 있어서 헬라파 사람들이 선포한 케리그마의 전형이라고 볼 수 있는데,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 그 신학적인 입장이 선명하게 부각되고 있다. 즉 7:48-53에서 스데반은 이사야서의 글을 인용하면서 중심을 잃은 유대교의 성전제의(temple cult)에 대하여 그리고 율법의 중심 사상을 망각하고 그 외적인 준수만을 고집하는 율법주의적인(legalistic) 유대인들에 대하여 강도 높은 비판을 가하고 있다. 이러한 비판은 헬라파 사람들이 예루살렘 유대교 지도자들의 유대 특수주의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면서 세계 보편주의를 지향하고 있었다는 가정 아래서 가장 잘 설명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로 스데반의 이러한 비판이 그와 및 예루살렘 기독교공동체에 대하여 큰 박해를 불러 일으켰고 그 결과 그들이 유대와 사마리아 전역에 흩어진 것으로 되어 있다(8:1). 그런데 8장 이후를 보면 결국 예루살렘 기독교공동체 사람들 중에서 박해를 받아 흩어진 사람들은 헬라파 사람들이고 히브리파 사람들은 박해도 받지 않고 흩어지지도 않았음을 알 수 있다.26) 그 이유는 사도행전의 본문 안에서는 직접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고 있지만, 아마도 성전제의와 율법준수의 문제에 있어서 히브리파 사람들의 신학적인 입장이 당시 유대 특수주의를 지향하던 예루살렘의 강경파 유대교 지도자들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헬라파 사람들이 흩어지고 난 후, 그리고 베드로나 요한 같은 사도들도 예루살렘을 떠난 후, 예루살렘 유대교적 기독교 공동체(The Jewish Christian Community)를 이끌게 된 지도자들, 즉 야고보와 및 장로들은 그 공동체의 최초의 시기보다 더 강하게 유대 특수주의를 표방하게 되었을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27) 이러한 신학적인 경향성 때문에 이들은 우선 이방인 선교에 있어서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고, 이방인이 구원을 얻으려면 우선 할례를 받아 유대인이 되어야 할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도 율법의 조항들이 정한 것들을 다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28) 이들은 헬라파 사람들이 선교하여 세운 안디옥교회와 바울이 세운 갈라디아교회, 고린도교회 등에 대하여 영향력을 행사하여 이 교회들을 유대 특수주의에 입각한 유대교적 기독교공동체로 만들려고 하는 시도를 했고, 이 때문에 이방인 선교의 주역이었던 바울과 심각한 신학적인 대립 및 역사적인 갈등을 야기시키게 된 것이다.
b. 구원 보편주의를 향한 준비
사도행전은 초대교회의 역사가 그 사상적인 흐름에 있어서 초기의 유대 특수주의로부터 구원 보편주의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점진적인 것이고 또 그 뒤에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었을 것이다. 사도행전은 그 중에서도 특별히 초대교회의 두 지도자의 회심사건을 부각시킴으로 해서 그것을 초기 기독교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삼고 있다. 사도행전 9장의 바울의 회심, 그리고 10장의 베드로의 회심이 바로 그것이다. 바울의 회심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던 유대인 바울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사건이며, 베드로의 회심은 유대 특수주의에 사로잡혀 있던 유대인그리스도인 베드로가 구원 보편주의에 입각한 세계교회 그리스도인으로 변하는 사건이다. 이 두 사건이야말로 초기 기독교공동체의 신학적인 흐름을 결정지어 준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사도행전은 예루살렘으로부터 독립된 헬라파 기독교공동체 및 바울 공동체의 생성과 확산을 통해서 초기 기독교공동체가 신학적으로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어떻게 세계를 향한 교회로 발전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c. 예루살렘 사도회의와 안디옥 사건
유대인들의 박해 때문에 예루살렘을 떠나게 된 헬라파 사람들은 사마리아와 시리아, 그리고 소아시아 지방으로 흩어져 선교활동을 벌여 적지 않은 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들의 선교활동의 대상은 자연스럽게 이방인들을 포함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원래부터 세계 보편주의를 지향하면서 율법문제와 이방인문제에 대하여 개방적인 입장을 취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된 이방인들에게 할례 받을 것을 요구하지 않았고, 또 율법의 문자적인 준수도 강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유대 특수주의를 따르는 예루살렘의 유대교적 기독교공동체의 지도자들에게 이와 같은 헬라파 기독교인들의 선교는 율법에 위배되는 것으로 판단이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사람들을 안디옥교회에 파견하여 "너희가 모세의 관습에 따라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행 15:1)라고 가르치게 했다. 이것이 교회 안에 큰 논쟁을 야기시켰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안디옥교회의 대표들이 예루살렘에 가서 야고보의 주재 하에 회의를 갖게 된다(행 15장??갈 2:1-10). 이 회의에서 논쟁과 타협 끝에 두 개의 다른 선교영역과 두 개의 다른 복음29)이 인정되었다. 이것은 이방인들에게 할례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일차적으로 헬라파 기독교공동체의 신학적인 승리였으며,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유대 특수주의와 세계 보편주의가 대립하다가 처음으로 세계 보편주의가 교회 안에서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은 사건이라는 점에서 그 역사적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도회의의 결과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비롯하여 베드로30) 그리고 다른 헬라파 기독교공동체의 지도자들은 만족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유대 특수주의의 노선을 따르는 예루살렘 유대교적 기독교공동체의 지도자들이 이것에 대하여 만족했을 리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사도회의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무할례의 복음"을 부정하고 "할례의 복음"만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며 그리스도인들도 정결례를 비롯하여 율법이 정한 모든 사항들을 지켜야 한다고 선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발생한 사건이 바로 안디옥 사건(갈 2:11-14)이다.
안디옥 사건은 초기 기독교의 역사전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이다. 이 사건은 예루살렘 사도회의의 경우와는 달리 헬라파 기독교공동체가 지향하던 세계 보편주의와 예루살렘의 유대교적 기독교공동체가 지향하는 유대 특수주의가 충돌하여 아무런 타협점을 보지 못하고 서로 등을 돌린 결과를 초래했다는 점에서 예루살렘과 바울 간의 오랜 갈등의 시작을 의미하는 사건이 되었다. 안디옥 사건이 발생한 때는 아마도 예루살렘 사도회의 직후인 것으로 추정된다.31) 이 때는 베드로도 이미 예루살렘을 떠나서 시리아 지방 등지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때였을 것이다. 목적은 밝혀져 있지 않지만 베드로가 안디옥교회를 방문하게 된 것이 이야기의 발단이 된다. 갈라디아서 2:12절에 의하면 베드로는 바울과 바나바와 더불어 다수의 이방인들을 포함한 안디옥교회의 교인들과 함께 식탁교제를 나누고 있었다. 초대교회의 예배습관으로 미루어 보아 그것은 아마도 예배 중에 나누는 주의 만찬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때 "야고보로부터 온 어떤 이들(갈 2:12)"이 그 곳에 나타나자 베드로가 그 "할례파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식탁교제로부터 물러나 자리를 피했다고 한다. 그 때 야고보로부터 파송된 이들이 베드로를 비롯한 유대인들에게 구체적으로 무엇을 비난했는지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갈라디아서 2:12로 미루어 보아, 그들이 이방인들과 한 식탁에서 식사를 했다는 사실이 유대인이 지켜야 할 정결례에 어긋난다는 비난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기는데, 그것은 "야고보로부터 온 이들"이 도착하기 전에 베드로는 이방인들과 식사를 같이 하면서 자신이 정말 율법을 어기고 있다고 생각했을까 하는 문제이다. 이 문제를 생각할 때 우리는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 음식이나 식사에 관한 규례가 매우 많았는데 그것들이 모두 토라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상당 부분 구전(oral tradition)에 근거한 것이므로, 그 해석과 적용에 있어서 사람에 따라 많은 의견의 차이가 있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식탁교제 허용의 한계를 예로 들자면, 이미 할례를 받고 개종한 사람들과 식사를 함께 해도 좋다는 데는 유대인들 사이에 아무 이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할례 받기 전 단계의 이방인들인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과 식사를 함께 해도 좋은지에 관하여는 유대인들 사이에 이견이 있을 수 있었다는 말이다.32) 즉 랍비들 중에서 유대 특수주의적인 경향을 띤 사람들은 이런 부류의 사람들과의 식탁교제를 금했지만, 세계 보편주의에 가까운 사람들은 이들이 유대교의 정결례를 존중한다면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해도 좋다는 입장을 취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안디옥 사건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적어도 "야고보로부터 온 사람들"이 도착하기 전에 안디옥교회의 유대인들, 특히 베드로, 바나바, 바울은 이 문제에 관하여 세계 보편주의적인 입장에 서서 양심의 거리낌없이 교회 내의 이방인들과 식탁의 교제를 나누고 있었을 것이다. 이들의 이러한 세계 보편주의적인 사고는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더욱 강하고 새롭게 확인된 신학적인 확신이었을 것이다.33) 한편 "야고보로부터 온 이들"은 그 광경을 보고 그들이 율법을 어기고 있다고 판단하여 그들을 비난했다. 다시 말해서 이 "야고보로부터 온 이들"의 판단과 행동은 바로 당시 야고보를 중심으로 한 예루살렘 유대교적 기독교공동체의 유대 특수주의적인 입장을 잘 반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안디옥 사건은 예루살렘 사도회의 이후 처음으로 기독교회 안에서 유대 특수주의와 세계 보편주의가 충돌한 사건이 되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에 의하면, 이때 베드로는 자기의 신학적인 입장, 즉 그가 새롭게 인식하게 된 세계 보편주의적인 원칙에 충실하게 행동하지 못하고, 유대 특수주의에 굴복하여 식탁으로부터 물러났으며 심지어 바나바도 여기 동조했다고 한다(갈 2:13). 그 이유는 갈라디아서 2:12이 밝히듯이 "할례파 사람들"이 두려웠기 때문이다.34) 이것은 분명히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른 길을 걷지 못한 것"이다(갈 2:14). 그래서 바울은 베드로와 바나바를 정면으로 비난하면서 그들의 행위를 "위선"이라고 규정한 것이다(갈 2:13). 어떻든 적어도 그 때 안디옥 사건에서는 유대 특수주의가 승리한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바울은 베드로와 그리고 오랜 동역자 바나바와 갈라서게 되며,35) 그 이후로 바울은 더 이상 안디옥교회의 지원을 받는 파송 선교사로서가 아니라, 자기 먹을 것을 손수 벌어 가면서 일하는 독자적인 선교사가 된 것이다.36) 그리고 이 사건 이후 그는 기존의 선교지였던 시리아와 소아시아를 떠나서 유대 특수주의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새로운 선교지를 개척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지중해의 서쪽, 즉 마케도니아와 그리이스이다.37)
d. 바울공동체의 형성과 구원 보편주의의 확산
사도행전 16장에 의하면 바울은 제2차 선교여행 때 시리아, 길리기아, 더르베, 루스드라, 프리지아, 갈라디아, 드로아를 거쳐 마케도니아로 건너간다. 갈라디아교회는 아마도 이 때 바울이 세운 것으로 보인다. 마케도니아에서 바울은 빌립보와 데살로니가 두 도시에 교회를 세운다. 그 후에 바울은 아테네를 거쳐 고린도로 내려간다. 고린도에서 바울은 교회를 세우고 1년 반 정도 머물면서 목회하게 되는데, 이렇게 해서 이방인 기독교인들이 중심을 이루는 바울공동체가 형성된 것이다. 이 바울공동체는 바울의 구원 보편주의적인 신학의 영향으로 처음부터 무할례의 복음을 기초로 하여 세워진 교회들이다. 그 후에 바울은 에베소에서 2년 반 정도 머무르면서 목회하게 되는데, 이 에베소교회는 바울이 처음 세운 교회는 아니지만 신학적으로 바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하여 바울공동체에 속한다고 간주할 수 있다.
이 바울공동체는 유대 특수주의를 견지하고 있는 팔레스틴의 유대교적 기독교공동체와 신학적으로 대립하게 된다. AD 50년대 초반에 바울공동체가 겪은 갈라디아 사건과 고린도 사건은 바로 이러한 신학적인 대립에 의해 야기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38) 이 사건들의 공통점은 외부로부터 교회 안에 침입한 유대주의자들(Judaisers)이 한편으로는 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하고, 또 한편으로는 무할례의 복음을 기초로 하고 있는 바울의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구원신학에 반대하여 이방인 기독교인들에게 할례와 율법준수를 강요하였다는 점이다. 이것은 한마디로 바울공동체가 지향하고 있는 구원 보편주의와 극단적인 유대교적 기독교공동체가 견지하고 있는 유대 특수주의 사이의 신학적인 갈등이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에는 갈라디아교회와 고린도교회가 모두 이 유대주의자들의 말에 설득 당하여 바울을 배척하고 바울이 전한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운 복음을 버리고 할례와 율법준수를 기반으로 하는 구원신학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러한 위기에 직면하여 바울은 서신들을 통하여 자신의 사도권을 변호하고 자기가 전한 복음을 다시 천명하였던 것이다. 이 바울의 노력이 갈라디아교회에 구체적으로 어떤 결과로 나타났는지는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고린도후서가 바울과 고린도교회 사이에 이미 화해가 이루어진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고린도교회는 다시 바울에게 돌아와 바울의 사도권과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인 것으로 추측된다. 이것은 바울공동체 안에서 구원 보편주의가 유대 특수주의의 신학적인 도전을 극복하고 승리하였음을 말해 주는 역사의 일면이라고 할 수 있다.
사도행전 20-28장에 의하면, 이 후에 바울은 예루살렘교회를 위한 성금을 모아서 그것을 전달하려고 예루살렘에 갔다가 거기서 율법에 열심이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및 예수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 의하여 체포되고 로마총독에게 넘겨져서 가이사랴에서 2년 동안 수감되었다가 로마로 이송되게 된다. 이 세계의 심장부인 로마에서 바울이 황제의 재판을 기다리던 2년 동안 담대히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있는 모습으로 사도행전은 끝나고 있다. 이것은 바울의 구원 보편주의에 입각한 선교가 기독교공동체 내에서의 신학적인 갈등을 극복했을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교회 밖에서도 진정으로 세계를 향해 확산되어 가는 복음의 기초를 쌓아 놓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계를 향한 복음"을 주제로 하는 사도행전이 앞으로 펼쳐질 세계 속의 기독교 역사에 대해 가지고 있는 비젼이라고 할 수 있다.
각주
1) 이 장은 [교회와 신학] 제25집(1994), 232-256면에 실린 필자의 논문 "신약교회의 유대특수주의와 세계보편주의"를 부분적으로 수정보완한 것이다.
2) 신명기 7:6, 14:2.
3) 창세기 12:1-3, 출애굽기 9:5.
4) Emil Schuerer, The History of the Jewish People in the Age of Jesus Christ(175 B.C.A.D.135), A New English Version revised & edited by G. Vermes et al, Vol.Ⅲ. Pt.Ⅰ(Edinburgh:T.&T. Clark LTD, 1986), p.159.
5)사 42:1; 사 43:10 참조
6) 사 49:6 참조.
7) 이 제2이사야의 세계보편주의(universalism)에 관하여 다음의 글들을 참조할 수 있다:Gerhard von Rad, Old Testament Theology, Vol.Ⅱ. The Theology of Israel's Prophetic Traditions, tr. D. M. G. Stalker(New York:Harper&Row, 1965), pp.243-244과 249; Christopher R. North, The Second Isaiah:Introduction, Translation and Commentary to Chapters XL-LV (Oxford University Press, 1964), p.13; J. Blenkinsopp, "Second IsaiahProphet of Universalism," JSOT 41(1988), pp.83-103.
8) 사 40:28 참조.
9) James D. Smart, History & Theology in Second Isaiah:A Commentary on Isaiah 35, 40-66 (Philadelphia:Westminster Press, 1965), p.159.
10) 상게서, p.85.
11) 에스라 9-10장, 느헤미야 13:23-29.
12) 느헤미야 8장 참조.
13) 서양문화사에 있어서 the Hellenic Period는 주로 B.C. 8세기부터 B.C. 4세기까지의 희랍세계의 문화를 가리키고, the Hellenistic Period는 알렉산더 대왕 이후 AD 1세기까지의 지중해 세계 전체의 문화를 가리킨다.
14) "proselyte"(개종자)라는 말은 희랍어의 proshvluto"에서 온 단어인데, proshvluto"는 전치사 prov"와 동사 e!rcomai의 현재완료형 e*lhvluqa가 만든 합성명사이다. 어원적으로 볼 때 이 단어는 " …로 나아온 사람"이란 뜻을 가지는데, 사실상 이 말은 유대인들 사이에서 "이방인 개종자(a gentile convert)"라는 의미로 쓰인 전문 용어(terminus technicus)였다. 이와 관련하여, 아직 완전히 개종하지는 않았으나 유대교와 율법에 대하여 긍정적인 관심을 가지고 회당예배에 참석하는 이방인을 가리키는 말로 sebomevnoi toVn qeovn(하나님을 공경하는 자들), 혹은 fobouvmeoi toVn qeovn(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란 말들이 있는데, 이 말들은 행 16:14, 18:7 등에도 나온다. 그러나 현대 유대교 학자들 사이에는 proshvlutoi와 sebomevnoi toVn qeovn 사이에 명확한 구분을 짓기가 어렵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문제에 관하여 다음의 글을 참조할 수 있다:Shaye J. D. Cohen, "Crossing the Boundary and Becoming a Jew," Harvard Theological Review 82(1989), pp.13-33.
15) 이 일화들은 다양한 랍비문헌들 속에서 발견되는데, 이러한 일화들을 간추려 한데 모아 놓은 책으로 다음을 참고할 수 있다:Jacob Neusner, The Rabbinic Traditions about the Pharisees before 70. Part Ⅰ. The Masters (Leiden:E. J. Brill, 1971). 특히 Chapter Ten:Shammai and Hillel(pp.303- 340).
16) Sidney B. Hoenig, "Conversion During the Talmudic Period" in Conversion to Judaism:A History and Analysis, ed. by D. M. Eichhorn(Ktav Publishing House, Inc. 1965), pp.33-66.
17) 이러한 주장을 하는 대표적인 학자가 Bamberger이다:Bernard J. Bamberger, Proselytism in the Talmudic Period, rev. ed.(New York:Ktav Publishing House, Inc. 1968; reprint. Hebrew Union College Press, 1939), 특히 pp.13-25 참조. 한편 McKnight는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유대교 안에 이방인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는 있었지만 그들을 향한 적극적이고 조직적인 선교활동이 있었다는 추측은 문헌상의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부정하고 있다. Scot McKnight, A Light among the Gentiles:Jewish Missionary Activity in the Second Temple Period (Minneapolis:Fortress Press, 1991) 참조.
18) Joseph R. Rosenbloom, Conversion to Judaism:From the Biblical Period to the Present (Cincinnati, Ohio:Hebrew Union College Press, 1978), p.43.
19) 힐렐이 죽은 해(대략 주후 10 년경)로부터 미쉬나가 완성된 때(대략 주후 200년경)까지의 시기를 가리킨다.
20) 이 시기의 대표적인 유대교 역사가인 요세푸스(Josephus), 그리고 대표적인 유대교 철학자인 파일로(Philo) 같은 사람들의 책 속에도 헬라세계의 지식인들에게 유대교의 우수성을 선전하는 내용의 글과 또 이방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하는 이야기를 긍정적으로 소개하는 글들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21) 대략 주후 200년경부터 미쉬나와 게마라가 합해져서 탈무드를 이루게 된 때(주후 500년경)까지의 시기.
22) Eichhorn, 상게서, p.43.
23) 갈라디아서 1:18에 의하면 바울이 회심 후에 처음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베드로를 제외한 모든 사도들이 이미 떠났고 주의 동생 야고보가 예루살렘에서 중요한 인물로 부각되고 있음을 보여주며, 2:9에 의하면 바울이 두 번째로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야고보와 게바 그리고 요한이 "기둥"같은 지도자로 나타나 있는데 역시 다른 사도들에 대한 언급은 없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갈라디아서 1-2장이 그리는 예루살렘 기독교공동체의 모습은 그 지도권이 사도들로부터 주의 동생 야고보에게로 넘어가는 중간단계(a transitional period)를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2:9에서 바울의 언급이 "야고보게바요한"의 순서로 되어 있는 것도 어쩌면 이들 셋 사이에 어느 정도 서열이 형성되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24) Ernst Haenchen, The Acts of the Apostles:A Commentary, tr. B. Nobel & G. Shinn(Philadelphia:The Westminster Press, 1971), p.260; Hans Conzelmann, A Commentary on the Acts of the Apostles, tr. J. Limberg et al. Hermeneia (Philadelphia:Fortress Press, 1987), p.45.
25) 여기서 Conzelmann은 율법준수의 문제에 관하여 이 헬라파 사람들이 열두 사도들보다 역사적 예수의 입장을 더 선명하게 계승하고 있다고 주장한다(Conzelmann, 상게서, p.45). 한편 같은 맥락에서 Haenchen은 율법문제에 대하여 헬라파 사람들이 히브리파 사람들보다 역사적 예수의 해석을 더 잘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한다(Haenchen, 상게서, p.268).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은 열두 사도를 히브리파 사람들에 포함시키는 것이 타당한가 하는 문제이다. 물론 열두 사도들도 아람어를 사용한 사람들이었다는 점에서는 히브리파에 속한다고 볼 수 있지만,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을 직접 받은 이 열두 사도, 특히 그 중에서도 베드로 같은 제자가 처음부터 신학적으로 어떤 입장을 취했었는지는 명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고넬료 이야기를 통해서, 베드로도 처음에는 율법과 이방인의 문제에 대하여 유대 특수주의에 가까운 입장을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새로운 깨달음을 계기로 해서 세계 보편주의적인 입장으로 전환했을 가능성을 볼 수 있을 따름이다.
26) Haenchen, 상게서, p.297 참조.
27) 예수의 어록전승 중에서 특히 QMt를 통해 전수된 것으로 여겨지는 마태복음 10:5-6, 5:17-19, 10:23 같은 logia는 바로 예루살렘에 남아 있게 된 히브리파 사람들의 신학적 입장이 잘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28) 이러한 이들의 입장은 갈라디아서 3:1-5, 5:1-12, 4:10에 간접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29) 갈라디아서 2:7에서 바울은 이것을, 유대인들을 위하여는 "할례의 복음"이 베드로에게, 이방인을 위하여는 "무할례의 복음"이 자신에게 위임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30) 사도행전이 제시하는 시점에 따르면, 이 때는 베드로가 이미 고넬료 사건을 통해 세계 보편주의적인 새로운 자각을 얻게 된 후이다.
31) 예루살렘 사도회의에서는 이방인의 할례문제가 현안으로 되어 있으나, 적어도 바울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안디옥 사건에는 이 문제가 이미 타결된 것이 전제가 되어 있다. 따라서 안디옥 사건은 예루살렘 사도회의의 이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참조:James D. G. Dunn, "The Incident at Antioch (Gal. 2:11-18)," JSNT 18(1983), pp.3-57.
32) Dunn, 상게 논문, pp.12-25.
33) 갈라디아서 3:28 참조.
34) 한편 이것은 당시 야고보를 중심으로 한 예루살렘 유대교적 기독교공동체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었는가를 잘 반영해 주면서, 그렇기 때문에 이 사건 이후 바울이 겪어야 할 어려움이 얼마나 큰 것일지를 암시해 준다.
35) 사도행전 15:36-41 참조.
36) Dunn, 상게 논문, pp.38-39.
37) 사도행전 16:6-10 참조.
38) 갈라디아 사건은 바울이 고린도에서 목회하고 있을 때 일어난 사건이고, 고린도 사건은 바울이 에베소에서 목회할 때 일어난 사건이다. 이 사건들의 성격과 추이는 각각 갈라디아서와 고린도후서를 통해 어느 정도 재구성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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