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사도행전 강해

[스크랩] 사도행전 연구의 역사

에반젤(복음) 2019. 10. 3. 19:04




사도행전 연구의 역사(송영목 목사)

 

1. 교회개혁까지의 사도행전 연구

 

16세기 교회개혁(The Reformation) 이전 15세기 동안에는 사도행전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진다. AD 400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행해진 존 크리소스톰의 사도행전에 관한 55개의 설교가 있다. 그러나 교회개혁시기에 개신교와 가톨릭 모두 사도행전 주석에 관심을 기울였다. 교회개혁과 역사비평의 발흥 사이 기간인 3세기 동안 약 200명의 저자들이 사도행전에 관한 저술에 동참한 것으로 전해진다.

 

칼빈(1509-1564)의 문법-역사적 해석에 기초한 명료하고 간결한 논조의 사도행전주석은 2권으로 출판되었다. 1권은 1552년에 제 2권은 1554년에 제네바에서 라틴어와 불어로 출판되었다. 하지만 칼빈은 사도행전의 저자, 수신자, 연대, 목적 등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칼빈에 의하면 사도행전은 ‘거룩한 역사’(sacred histories)의 장르에 속한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자기 교회를 돌보시는 역사라는 의미이다. 모든 시대의 교회는 사도행전을 읽음으로 유익을 얻을 수 있는데 그 중하나는 교회의 시작을 알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사도행전에 나타난 사도의 설교를 교훈을 위해 중요한 부분으로 보았다.

 

이 시기 직후 ‘국제법의 아버지’라 불리는 화란의 법학자요 신학자인 휘고 흐로티우스(Hugo Grotius, 1583-1645)의 사도행전 주석은 해박한 고전어에 기초한 언어학적-역사적 주석으로 가치가 있다. 라이트푸트(John Lightfoot, 1602-1675)는 사도행전 1-12장의 주석에서 유대교와 로마라는 교회의 양대 박해 세력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강조했다.

 

라이트푸트는 칼빈과 흐로티우스처럼 다른 주석가를 비판하거나 의존하기 보다는, 독자적이고 예리한 통찰력 있는 주석을 시도하기 위해 해박한 고전어 지식과 LXX, MT, 요세푸스와 같은 역사적 자료를 토대로 한 문법-역사적 주석을 추구했다. 비평 이전 시대의 이런 거장의 주석은 비평-후 비평기의 저술에 견주어도 그 내용 그리고 영적인 통찰력이나 적용에 뒤지지 않는다.

 

2. 튀빙겐학파의 사도행전 연구

 

사도행전 연구에 미친 튀빙겐학파의 수장 F.C. Baur을 비롯한 비평학자들의 영향을 살펴보자. 사도행전의 기록목적은 무엇인가? 복음의 이방인 세계 안에서의 변증인가? 사도행전의 역사성을 인정하더라도, 누가는 단순한 역사 진술자가 아니다. 바울의 회심 이후로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에 대해서는 거의 침묵을 하고 있고, 로마에서의 교회의 설립 그리고 유프라테스 강 근처 즉 동방 지역에의 복음 전파와 같은 사건은 생략하고 있다.

 

하지만 사도행전의 역사적 자료로서의 진정성에 도전을 한 사람은 19세기의 영향력 있는 성경비평가 중 한 명인 드 베테(W.M.L. de Wette, 1780-1849)이었다. 그에 의하면, 사도행전의 일반적인 기록 목적은 신생교회의 성장과정을 추적하는 것이며, 전체적인 계획과 목적에 따라 기록되었다는 증거는 없다. 드 베테는 ‘우리 구절’(We-sections)에서 조차 누가는 바울의 기적 기사만 잘 알고 있었고 그의 말을 잘 몰랐던 것처럼 느껴지며 어떤 자료를 의존하여 기록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사도행전 전반부의 기사와 설교의 유대적인 색체와 다른 장편의 설교들 그리고 사도행전 각 부분간의 차이점들은 여러 자료의 사용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로마에서의 바울의 투옥(AD 61년경) 직후로 사도행전의 기록 연대로 잡지 않고 AD 70년 이후로 본다. 드 베테는 누가가 정보의 부족이나 여러 이유로 바울의 투옥과 석방 이후의 기사를 기록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드 베테의 대를 잇는 19세기 비평학자 중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사람은 F.C. Baur (1792-1860)인데, D.F. Strauss와 A. Ritschl의 스승으로서(이 둘은 나중에 스승의 견해에 동조하지 않음), 그의 사위 E. Zeller(1814-1908, 바우어의 사상을 사도행전 구석구석에 적용한 사람으로 사도행전 연구에 있어서 ‘예수님의 생애’를 쓴 D.F. Strauss에 필적된다. 특별히 사도행전의 기적은 저자의 창작적 신화와 같다고 주장함)와 A. Schwegler(1819-1857. 튀빙겐 대학의 철학 및 언어학 강사)에 의해 그의 사상이 확장-발전되었다.

 

그의 주장은 초대교회는 유대인파(베드로)와 이방인파(바울)의 대립과 투쟁으로 점철되었다는 것이다(참고. 고전 1:11- 베드로와 야고보 vs 바울과 아볼로). 시간이 흐름으로 해서 이 두 대립적 경향이 결국은 통합되었다. 비록 사도행전에 관한 언급이 바우어의 초기 작품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이 사상은 그의 사도행전 이해 의 기초이다. 바우어는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이 다르듯이 사도행전의 바울과 바울 서신의 바울은 상이하다고 본다.

 

그리고 사도행전은 객관적인 서술이 아니라 오히려 주관적인 이익으로 이해 변조된 서술이라고 보아서 역사적인 가치가 없는 것으로 평가절하 한다. 사도행전을 2세기 후반 저작으로 본다. 바우어의 이 주장은 수정된 형태로 지금까지 아주 부분적으로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해 보아야 한다: “이상의 바우어의 추종자들의 주장이 맞는다면 과연 누가는 무슨 목적으로 역사적인 신빙성을 파괴하면서까지 초대교회의 모습을 왜곡되게 묘사하기를 원했는가?”

 

이 질문에 그들의 대답은 위의 주장만큼이나 피상적이다: “율법에서 떠난 이방인 그리스도교가 유대 그리스도교와 나란히 존재하는 현상을 정당화시키는 것이다. 유대파를 회유하기 위해 바울주의의 독특성을 양보한 것이다. 유대주의 기독교에게 양보함으로 이방인 기독교의 독립과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인정받으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로마의) 유대주의 기독교인으로부터 바울적인 이방인 기독교가 인정을 받기 위해 바울주의자가 화해를 제의하는 것이다.”

 

튀빙겐 학파가 사도행전의 목적을 밝히는데 주력한 점에 있어서는 비록 그 결과가 설득력이 없지만 공헌으로 인정받을 만하다. 그리고 보수주의자들은 이 주장에 대한 반론과 대안제시를 위해 분발하게 되었고, 이후 약 40년간 눅-행 연구는 활기를 띠었다고 볼 수 있다. 과연 바울서신이나 복음서 그리고 사도행전에서 튀빙겐학파가 초대교회의 역사를 재구성하여 주장하듯이, 바울적 기독교와 대립되며 유대교와는 오직 메시아를 신앙하는 면에서만 차이가 나는 그런 ‘유대적 기독교’를 발견할 수 있는가?

 

아니다. 그리고 바우어가 그토록 대립적으로 재구성했던 베드로와 바울 사이의 복음 이해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가? 없다. 신약의 배경에 대한 추상적인 공상이 이런 논리의 비약을 초래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독일 관념론과 헤겔의 변증법적인 도식이 튀빙겐학파에게 나타나지만, 오히려 이것보다는 그들의 초기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주관적인 개념과 확신이 신약이해의 열쇠가 되었던 것이다.

 

3. 튀빙겐학파에 대한 반론

 

튀빙겐학파는 보수주의자와 튀빙겐학파의 비평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극단적인 비평학자(튀빙겐의 급진적인 후예들. 예. Bruno Bauer[판 마넨 (van Manen, 1842-1905)은 화란 급진학파의 지도적 대표자이다. Leiden대학의 초대 기독교 역사 교수이자 신약 주경교수였다. 그의 화란 선배로는 A. Pierson, S.A. Naber, A.D. Loman가 있다. 화란 급진주의자들은 초대 기독교가 본질적으로 유대적이라는 F.C. Baur의 주장에 동의한다. 바울서신이 상당히 발전된 신학을 담고 있기에 바울 서신 중 그 어느 것의 바울 진정성을 인정하지 않고, 대신 2세기 인물인 ‘감독 바울’이 기록한 것으로 본다. 감독 바울은 바울 서신들과 여행기록, 바울행전, 베드로행전 그리고 요세푸스의 글을 참고했을 것이라고 본다(누가가 요세푸스를 의존하고 있다고 주장한 사람은 Holzmann, Schmiedel, M. Krenkel 등이다).

 

그리고 감독 바울은 베드로와 바울 사이의 갈등을 중재할 필요가 없었다. 이유는 베드로행전의 저자가 그 작업을 이미 했기 때문이라고 추정한다. 역사적 회의주의자인 Van Manen이 튀빙겐학파보다 더 보수적인 한 가지 면은 사도행전의 유대적인 바울을 실제적인 바울의 모습으로 간주한 점이다. 그러므로 마넨에 의하면 사도행전의 실수는 유대인 바울을 지나치게 이방적 혹은 기독교적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참고. 가스끄, 1989:128-131).], Radical Dutch School, Ernest Renan, Franz Overbeck, W.C. van Manen, P.W. Schmiedel) 모두로부터 협공을 받았다. 후자는 바우어가 논점을 바르게 인식했지만 철저히 전개하지 못한 것이라는 비판을 가했다.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입장에서의 반론을 먼저 살펴보자. Heinrich August Wilhelm Meyer (1800-1873)는 1835년에 사도행전 주석 초판을 썼다. Meyer는 비평적이었지만 초대교회의 변증법적 도식으로 접근하지 않았다. 그도 사도행전 여기저기에 저널적인 요소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바울과 베드로 사이의 유사점은 누가의 독창적 산물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사실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등 역사성을 대체로 인정하였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저작 시기를 70년대 말로 본다. Meyer는 철저한 보수주의자는 아니다.

 

J.A.W. Neander(1780-1850)는 튀빙겐학파의 원시 기독교 재구성을 단호히 반대한 사람으로서 베를린대학의 교회사 교수였다. 사도행전은 바울 서신과 더불어서 초대교회의 역사를 구축할 수 있는 신빙성 있는 자료라고 보았다.

 

F.A.G. Tholuck(1799-1877)는 행 20:17-35절에서 바울이 밀레도 해변에서 에베소장로를 향해서 행한 설교는 바울 서신과 유사하다고 본 최초의 사람이다. 누가가 역사적인 바울의 모습을 정확히 그렸기에 서신의 바울의 모습과 연속성을 가진다.

 

Albrecht Ritschl (1822-1889)은 바우어의 이론에 가장 효과적인 비판을 제시했다[리츨은 사도집단 사이의 대립과 유대인 (혹은 유대교)의 기독교에 대한 영향의 지나친 강조, 바우어의 신약의 (지나치게 늦은) 연대설정의 문제를 지적했다. 그에 의하면 예수님은 도덕적으로 완전한 인간성의 원형이며, 그 안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으로 계시하시는 분이다. 기독교를 절대적인 윤리적 종교로 정의했다. 환언하면, 그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초자연적인 구원이라기보다는 윤리적-도덕적 가치라고 보았다. 이처럼 리츨을 포함한 자유주의자들은 예수님을 동정녀에게서 태어나, 대속적 죽음을 죽고, 육체적으로 부활하여, 승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탁월한 윤리 교사로 바꾸어 놓았다. 이처럼 성경이 말씀하는 초자연적인 요소들은 배척되고, 대신 그 자리에 가치와 사회적 책임을 이념으로 하는 나라를 옹호하는 도덕적 유대인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바우어의 제자이었지만, 리츨은 초대교회에 관한 튀빙겐의 재구성 전체에 비판을 가했다. 리츨에 의하면 튀빙겐학파는 이방인 기독교와 유대 기독교의 다양한 점을 알지 못한 점에서는 지나치게 단순 논리에 빠져있었다. 리츨에 의하면, 모든 유대 크리스천이 바울의 대적도 아니고, 모든 이방인 크리스천이 바울주의자도 아니다.

 

예를 들면, 비 바울적(un-Pauline)과 반 바울적(anti-Pauline) 사이의 구분을 간파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리츨은 튀빙겐학파는 초대교회 내의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통일성을 간과했다고 비판했다. 신약 전체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믿음의 절대성과 유대인이나 유대인의 구분이 없어진 것을 분명히 하고 있지 않는가! 그 외 보수적 입장에서 1200페이지 분량으로 바우어를 비판한 M. 바움가르텐 (1812-1889)과 사도행전과 누가복음 사이의 언어의 통일성을 발견했으며, 사도행전의 역사적 신빙성을 주장했던 E. 레케부쉬 (Lekebusch)도 있다.

 

사도행전은 바울의 동력자가 신빙성 있는 방식으로 역사적인 사건을 충실히 서술하되 자신의 신학적인 목적을 추구했다. 하지만 당파적인 신학을 드러내는 자료가 될 수는 없다. 그리고 재차 강조하는 의미에서 기억할 것은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을 포함하여 모든 신약성경은 다양성과 통일성을 동시에 가진다는 사실이다. 초대교회도 다양성과 통일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 사실을 사도행전을 통한 초대교회 연구에 있어서 간과하면 안 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튀빙겐학파를 비판한 사람들 모두 보수주의자는 아니다. 리츨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리고 보수주의자라고 해서 모두가 반동적이고 교조적 전제에 사로잡힌 사람도 아니다. 철저한 역사적이고 문법적인 연구로 튀빙겐학파의 허점을 공격한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작업이 개혁주의 진영에서 종종 더 요청되고 더 빛을 발하기도 한다. 이것을 우리는 비평적 작업이라 부를 수 있다.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분석이 비평적이다. 그러나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성경의 영감과 권위를 인정하는 전제이다.

 

한편 영국에서는 19세기 말이 되어서야 비평방법이 도입되었다. 영국에서 역사비평은 정통적이고 복음적인 신앙을 가진 학자들에게서도 유용하고 필수적인 도구로 수용되었다. 그렇다고 영국 신학이 독일에 종속된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독립적이었다. 대신 비국교도와 스코틀랜드 출신들 중에 독일로 유학 간 사람이 많았다. 초기 영국 비평의 주요한 특징은 역사 배경연구 - 특별히 헬라-로마세계 에 깊이 관심을 가졌다는 점이다.

 

영국의 초기비평가들은 원래 신학자라기보다 역사가, 언어학자, 고고학자였다(예. J.B. Lightfoot). 하지만 독일 주경학을 영국 전역에 수입한 최초의 인물은 Henry Alford (1810-1871)이다. 그의 신약 주석은 영국 근대주석의 효시이며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1인 주석 중 하나이다. 그는 사도행전을 누가의 저작으로 보고 연대를 AD 63년경으로 본다.

 

튀빙겐의 해석을 주장한 최초의 영국 인물은 비국교도 신학자인 Samuel Davidson(1806-1898)인데, 독일학자들을 소개하는 정도였기에 영국학계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Joseph Barber Lightfoot(1818-1889)의 의의는 F.C. Baur와 그의 추종자들이 공중누각을 세웠을 뿐이며 위 클레멘트(pseudo-Clementine) 문헌의 과거해석에 그들의 해석의 근거를 두었고 다른 초기 기독교 문헌들을 자기들의 주장에 맞게 억지로 맞추었다는 점을 보여준 것이다. ‘클레멘트 1서’(약 AD 96년경)와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의 7서신’(약 AD 98-117년경)을 연구하여 사도권 내에 대립이 없었다고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왜냐하면 클레멘트와 이그나티우스는 그들의 글에서 바울과 베드로 모두 존경했기 때문이다. 라이트푸트의 서신 주석에서도 동일한 결론을 볼 수 있다.

 

Richard Belward Rackham(1868-1912)의 1901년 사도행전 주석은 신학적인데, Journal of Theological Studies의 제 1호에 실린 글에서 사도행전의 초기연대를 주장한다. 예를 들어, AD 70년 사건과 바울의 죽음 등이 언급되어 있지 않고 사도행전에 묘사된 유대교는 분명히 AD 70년 이전이며(이 말은 예루살렘 멸망으로 힘을 잃은 유대교가 아니라 교회의 대적으로 활동한 유대교의 힘이 여전히 컸다는 말이다), 사도행전이 초기교회의 사상과 신학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 근거한다.

 

그는 사도행전과 누가복음 사이의 유비(예. 기다림과 도입기 눅 1-2장과 행 1장/ 성령의 세례 눅 3장과 행 2장/ 그리고 중반-뒷부분에 나타나는 수난기사들)와 행 1-12장과 13-28장 사이의 유비(예. 베드로와 바울의 사역의 유사점)를 동시에 보아서 2중 유비를 주장한 최초의 영국인 저자이다.

 

19세기 영국 학자들의 사도행전에 관한 일반적인 결론들은:

 

1.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는 동일 인물이다. 바울의 동료인 누가이다.

2. 누가는 예수님의 삶과 선포를 정확히 묘사하기 위해서 누가복음을, 초대 교회의 성장을 위해서 사도행전을 기록했다.

 

3. 누가는 저술 시에 특정 강조와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자료의 선택과 배열에 영향을 미쳤다.

4. 누가의 신학적 의도는 역사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5. 사도행전의 신뢰도와 정확도는 바울의 동역자로서 그의 체험에서 나온 것으로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이런 전반적인 보수적인 성향을 영국 학자들이 가지게 된 이유는 Lightfoot의 주석 방법이 사변적인 비평에 의존했던 튀빙겐의 F.C. Baur와는 달리 문맥과 역사적인 배경을 연구한 주석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고학자요 신학자인 Sir William M. Ramsay(1851-1939)의 바울 서신에 관한 역사적 주석 역시 사도행전 연구에 역사적인 정보를 제공했다.

 

Ramsay는 처음에 바우어의 견해를 수용하여 바울 당시가 아니라 사도행전이(Baur에 의하면) 기록된 당시인 AD 150년경의 역사를 발굴하기 위해 소아시아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지정학적이고 고고학적 연구를 거듭할 때 오히려 사도행전에 나타난 바울 당시의 역사적인 신빙성을 알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19세기에 의의있는 연구서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J.A. Alexander(1829-1860)의 주석서가 1857년에 뉴욕에서 출판되기도 했다. 미국인 H.J. Cadbury(1883-1974)의 누가-행전연구는 주목할 만한데 1920년경 박사논문을 개정하여 언어연구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에 의하면 누가의 의학 용어는 의사가 쓰지 않은 70인 역과 다른 역사가들의 글에서 종종 나타나기 때문에 의사 누가를 누가-행전의 저자로만 볼 수 없다.

 

1차 대전 이후 양식비평을 사도행전에 적용한 하이델베르크의 Martin Dibelius(1883-1947)를 언급해 보자. 양식비평(Formgeschichte, Form History, Form Criticism)은 복음서의 양식들을 연구함으로써 복음의 전승과정에서 기록된 양식들 배후에 있는 구전 단계에 도달하려는 시도이다. 그 목표는 가능한 한, 초대 교회의 삶과 예수님의 사역 속에서 개개의 구절과 어록(sayings)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를 결정하려는 것이다.

 

Karl Ludwig Schmidt와 Rudolf Bultmann도 양식비평을 즐겨 사용했다. 디벨리우스는 헤르만 궁켈의 기념 출판물에 기고한 1923년의 글에서 말하기를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모자이크에서처럼 단편들을 짜 맞추고 연결하여 구성하는 일을 할 뿐 아니라 문인으로서 더 큰 개성을 발휘했다. 그리고 사도행전 후반부의 연설-설교는 편집자인 누가의 상상물이다. 그는 사도행전의 여행기사에서만 독립된 설화를 13개나 구분했다. 뮌스터의 Ernst Haenchen은 디벨리우스의 방법론을 체계적으로 사도행전에 적용했다. 1956년에 사도행전 주석을 썼다. 그도 저자의 칼로 자르고 풀로 붙이는 독창적인 문학성을 강조했다.

 

Hans Conzelman(b. 1915)은 괴팅겐대학 교수로서 헨첸과 유사한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콘첼만은 ‘시간의 중심’(Die mitte der zeit)에서 누가를 독창적인 편집자로 보면서 사용된 마가복음을 대체할 복음서를 기록한 사람으로 본다.

 

그리고 누가는 초기의 종말론(즉 예수님의 파루시아가 임박하다는 주장. 하지만 실제로 신약에서 이것 대신에 예수님의 재림이 멀다는 것을 밝히는 구절이 많다. 참고. 가스끄, 1989:405) 대신에 임박한 파루시아가 아니라 미래적 파루시아를 소망하도록 만들었다고 본다[과연 초대교회와 누가의 사상의 중심에는 파루시아의 지연(the delay of the parousia)이 있었는가? 아니다. 왜냐하면 초대교회의 중심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있었지 파루시아가 있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울도 세상의 종말 이전에 ‘기다림의 기간’ (a waiting period)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살전 1:10; 4:13-5:11). 그러므로 지연(delay)에 관한 이슈는 누가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파루시아의 지연 대신 다른 성경 저자들처럼 누가도 파루시아의 ‘불예측성’을 강조한다(행 1:7; 참고. Walton, 2004:245)].

 

그리고 누가는 역사를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3시대 즉 세례 요한으로 마감된 이스라엘의 시대(the time of Israel), 예수님이 활동한 시대(the time of Jesus), 그리고 주님의 승천과 재림 사이인 교회의 시대(the time of the church)로 구분한다.

 

이런 구분의 전제는 교회는 역사적인 실재(historical entity)로서 자체의 특정한 시간을 가진다는 개념이다(Conzelmann, 1987:xlv). 물론 그 중심은 예수님의 활동 시대이다. 교회의 시대는 단순히 기다리는 시대가 아니라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서 적극적으로 구속을 이루신다. 하지만 콘첼만의 이런 역사 구분이 너무 인위적이며 과연 누가의 마음속에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콘첼만의 연구는 사도행전보다는 누가복음에 초점을 맞춘다. 이 말은 누가-행전을 같이 연구할 필요성이 있음을 긍정적으로 강조한다. 비독일 학자들은 디벨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의 주장을 단지 증명되지 않은 가설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영국의 F.F. Bruce는 1951-1952년에 사도행전 주석을 2권으로 완성했다. 성격은 보수적이되 비평적이다. 브루스는 헬라어 주석에 충실한 동시에 Ramsay처럼 매우 역사적인 성격의 주석을 썼다. 사도행전은 역사적이되(예. 연설은 누가의 창작이 아닌 실제 연설임) 신학적인 것으로 해석된 역사서이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의 목적은 역사적이되(기독교에 대해 왜곡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로마인을 향한 기독교의 변호-변증. 물론 부수적-종속적으로 재판을 앞둔 바울 자신의 변증적 성격도 가지고 있음) 변증적이다. 저작 연대는 AD 61년경으로 본다.

 

최근의 새로운 성경 해석 방법론의 발전은 사도행전 연구에도 적용되어 왔다. 20세기 후반의 성경 연구에서 새로운 변화가 있다면, 주로 통시적인 역사비평을 넘어 공시적인 문학비평을 사용하여 하나의 완성된 작품으로 신약 성경을 이루는 본문의 세계 (the world within the text)를 읽으려는 노력일 것이다. 따라서 주석가는 문학 쟝르, 본문의 문학적 통일성을 담은 구조와 수사학적 장치 그리고 본문이 독자에게 미치는 힘 등에 세밀한 관심을 두고 자세히 읽기(close reading)를 시도한다.

 

네러티브 해석은 Luke T. Johnson의 ‘The literary function of possessions in Luke-Acts’가 1977년에 출판된 이후로 사도행전연구에 시도되었고, 그 후 Robert C. Tannehill의 ‘The narrative unity of Luke-Acts: a literary interpretation’(2 vols. 1986-1990)는 사도행전 전체에 서사비평을 조직적으로 적용한 첫 작품이다.

 

수사적 해석도 특별히 사도행전의 연설부분을 분석하는데 적용되었다. 예를 들어, 고전 수사학의 대가인 George A. Kennedy는 바울의 밀레도 연설(행 20:18-35)을 ‘epideitic speech’로 결론을 내렸다. 사회과학적 해석은 Philip E. Esler의 1987년 박사논문 ‘Community and Gospel in Luke-Acts: the social and political motivations of Lukan Theology’에서 시도됐다. 이런 다양한 해석 방법론은 상호 보조적인 것들로서 사도행전 연구에 새로운 빛을 비추어 주었다(보라. Walton, 2004:231-235).

 

*이 글은 가스끄 (1989)의 ‘사도행전 비평사’ (A history of the criticism of the Acts of the Apostles)를 참고했다.

 

참고 문헌

Walton, S. 2004. Acts: many questions, many answers. (In McKnight, S. &Osborne, G.R., eds. The face of New Testament studies. Grand Rapids : Baker Academic. p. 229-250.)

가스끄, W.W. 1989. 사도행전 비평사 (A history of the criticism of the Acts of the Apostles). 바실래.

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 봉서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