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스바냐 강해

스바냐[Zephaniah]

에반젤(복음) 2019. 10. 1. 20:09




스바냐[Zephaniah]

 

 

(습 3:1-10) “1. 패역하고 더러운 곳, 포학한 그 성읍이 화 있을진저 2. 그가 명령을 듣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의뢰하지 아니하며 자기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가지 아니하였도다 3. 그 가운데 방백들은 부르짖는 사자요 그의 재판장들은 이튿날까지 남겨 두는 것이 없는 저녁 이리요 4. 그의 선지자들은 경솔하고 간사한 사람들이요 그의 제사장들은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범하였도다 5. 그 가운데에 계시는 여호와는 의로우사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빠짐없이 자기의 공의를 비추시거늘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하는도다 6. 내가 여러 나라를 끊어 버렸으므로 그들의 망대가 파괴되었고 내가 그들의 거리를 비게 하여 지나는 자가 없게 하였으므로 그들의 모든 성읍이 황폐하며 사람이 없으며 거주할 자가 없게 되었느니라 7. 내가 이르기를 너는 오직 나를 경외하고 교훈을 받으라 그리하면 내가 형벌을 내리기로 정하기는 하였지만 너의 거처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나 그들이 부지런히 그들의 모든 행위를 더럽게 하였느니라 8.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일어나 벌할 날까지 너희는 나를 기다리라 내가 뜻을 정하고 나의 분노와 모든 진노를 쏟으려고 여러 나라를 소집하며 왕국들을 모으리라 온 땅이 나의 질투의 불에 소멸되리라 9. ○그 때에 내가 여러 백성의 입술을 깨끗하게 하여 그들이 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한 가지로 나를 섬기게 하리니 10. 내게 구하는 백성들 곧 내가 흩은 자의 딸이 구스 강 건너편에서부터 예물을 가지고 와서 내게 바칠지라”

 

 

스바냐라는 말은 “야훼는 숨기셨다,”는 뜻입니다. 1절에 그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대개 아버지 밖에 나오지 않는데, 스바냐는 4대까지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히스기야 왕의 현손으로 왕족으로, 유다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 시기에 본서의 말씀들을 외쳤습니다. 그의 메시지가 요시아 왕의 개혁의 요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개혁은 외적으로는 큰 변화를 가져왔으나, 내적인 변화를 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스바냐는 그들에게 주의 날, 심판의 날이 오고 있음을 경고하였습니다. 스바냐의 주제는 하나님을 대적한 자들에 대한 심판이 그 첫째이며, 다른 또 하나는 그를 따르는 자들을 위한 축복입니다. 총 3장인데 한 장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첫째 1장입니다.

 

종교 개혁을 하던 요시아 왕 때 활동하던 스바냐 선지자는 왕과는 7촌이고, 왕의 조카가 됩니다. 그는 요시야 왕의 신앙 개혁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 요시아 왕은 8세에 왕이 되어서 31년을 왕 노릇한 사람인데 20세부터 종교개혁을 하였습니다.

 

그의 개혁은 우상과 그 제단, 하나님을 배신한 사람들,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 자들, 하나님은 복도 화도 내리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들, 이방인의 옷을 입고 이방신을 섬기는 자들을 대상으로 했는데, 놀랍게도 여기는 백성들과 왕의 신하들, 심지어 왕자들까지 있었습니다. 그때에 힘 있는 자들이 포악하였고, 거짓을 행하였습니다. 선지자는 이 고의적인 행악 자들에게 심판이 온다고 경고합니다. 그때는 무역이 그치고, 집을 지었으나 그 집에 살지 못할 것이며, 포도원을 조성하였으나, 그 포도를 먹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 날은 분노의 날이요, 눈물의 날이요, 환난과 파괴의 날이요, 어두움의 날이요, 은과 금이 힘을 쓰지 못하는 날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1장의 내용입니다.

 

⑴. 그들은 왕의 개혁과 선지자의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요시아 왕 18년에, 성전을 수리하던 중 율법 책을 발견합니다. 대제사장 힐기야는 그 책을 서기관에게 주었고, 서기관은 요시야 왕 앞에서 그 율법 책을 읽어 내립니다.(왕하23:2~3) 그 말씀을 듣던 요시아 왕은 옷을 찢고, 울면서, 종교개혁을 단행합니다. 당시에 성전은 폐허가 되어 있었습니다. 선왕인 할아버지 므낫세와 아버지 아몬 왕은 우상숭배에 빠졌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어린아이를 제물로 바치는 의식도 행했고, 성전 안에 남창(男娼)과 아세라 여신을 섬기는 여자들이 살도록 허락도 하였습니다. 요시아는 그들을 성전에서 쫓아내었고, 그 모든 기물과 제단을 철거하고, 과거 왕들이 태양신에게 바쳤던 우상들도 제거했으며, 많은 영매와 심령술사들도 제거했고, 개인이 모신 집안 신들도 제거하라고 명령했습니다.(왕하23:4~20) 또 유월절을 새롭게 지켰습니다. 요시아 왕은 그처럼 위대한 개혁을 주도하였지만 그 개혁은 안타깝게도 유다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따르지 않았고, 마음을 바꾸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왕이 개혁을 주도했지만 그들은 돌아서거나, 회개를 하지 않았습니다. 요시아 이후 왕들 역시 또 우상숭배로 빠져든 것을 볼 때,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다가 유다는 결국 바벨론에게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하나님도 마음을 바꾸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보면서 사람이 변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과 또 전파하거나, 가르친다고 다 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학교에 보내면 배워서 좋은 사람이 되고, 큰 병원에 가면 병고치고 건강하게 되고, 교회에 다니면 다 천국을 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스가랴서는 이런 우리의 편안한 생각과 소망에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왕이 앞장을 서서 종교 개혁을 하고, 우상을 타파하고, 또 왕족인 선지자가 죄의 실상을 책망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는데도 불구하고 나라와 백성은 그 길을 돌이키지 않았다는 부정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양심이 없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죄가 양심보다 크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자들이 성경을 모르고,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잘못 사는 것이 아니라. 알지만 살아온 습관이나, 욕심을 버리지 못함으로써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한계, 교육의 한계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가르쳐 주는 것을 되는데, 그렇게 사는 것은 자기 문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의 문제는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요, 영적인 문제입니다. 모든 사람이 알면서도 안하는 것을 어떻게 설명을 합니까. 그러므로 남 유다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 그 쪽으로 가면 망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그 길을 갔던 역사요. 오늘 선지자 스바냐서의 교훈입니다. 여러분 이러니 우리가 기도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우리가 무엇인들 할 수 있겠습니까.

 

홀멘 헌트(W. Holman Hunt)라는 화가가 그린 성화를 보았습니까. 예수님이 등불을 들고, 문밖에 서 있는 그림인데, 그 문은 주위에는 가시넝쿨이 많이 있습니다. 문은 오래된 문인데 문고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밖에서 두드릴 때, 안에서 열어줘야 열리는 문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이 그림을 그릴 영감을 주셨는데, 이 홀멘 헌트는 자기는 그릴 자격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명령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가시넝쿨, 마음을 꽁꽁 닫아 놓은 사람을 상징하는 이 그림을 그렸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모습인 것입니다. 문고리가 안에 있어, 예수님이 아무리 구원하려고 해도, 은혜를 베풀려 해도, 열어주지 않으면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하는 설교, 좋은 말씀은 여러분이 만드는 것입니다. 제가 여기서 천사의 소리를 하더라도, 여러분들이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있으면,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여러분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밖에 세워 놓고, 문을 열지 않고 있는 것이 확실합니다. 아가서 5장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아가서5:2-6절-“내가 잘찌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 다고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 나의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매 내 마음이 동하여서,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가 벌써 물러갔네,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구나,”

 

발을 씻고 누웠다는 것입니다. 그 발은 예수님이 씻어 줘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씻는 것이 아닙니다. 옷을 벗고 누웠고, 문을 잠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핑계를 대면서 밤이슬을 맞으며 찾아온 신랑을 밖에 세워둔 것입니다. 드디어 문을 열었을 때 신랑이 가 버린 것입니다. 그때 이 여인은 정신이 났습니다. 큰일이 난 것입니다. 그래서 미친 사람처럼 밖으로 내달리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기 전에 하는 후회를 발표했습니다. 1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 것을’(53%) 2위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 많은 시간 보낼 것을’(38.8%) 3위 ‘좀 도전해 볼 것을’(31.6%) 4위 ‘내 감정에 충실하며 살 것을’ (26.9%) 5위 ‘일 좀 덜 할 것을’ (11%)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에게 물어 보고 싶습니다. 정말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함께 시간을 보낼 사랑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당신을 사랑한다, 하는 감정을 가지고 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일이 인생이요, 삶이었기에 일을 덜했다면 무엇을 했을까요, 다른 것이 있었나요,

 

여러분 후회는 언제해도 늦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후회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여러 가지 이유와 핑계로 예수님을 밖에 세워 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긴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물을 많이 준비해 두셨는데 기도하지 않아서 받지 못한 후회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떻게 하고 살고 있습니까.

 

2. 둘째 2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1절. 수치를 모르는 백성아, 모여라. 다 함께 모여라. 2절. 정해진 때가 이르기 전에, 기회가 겨처럼 날아가 버리기 전에, 여호와의 무서운 분노가 너희에게 내리기 전에, 여호와의 진노의 날이 너희에게 닥치기 전에, 너희는 다 함께 모여라. 그리고 겸손한 자들은 기도하라,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입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분위기는 달라집니다. 나 외에 다른 사람이 없다고 하던 교만한 나라들, 이스라엘과 유다를 침략하던 가사와 아스글론과 아나돗, 그릿족속 그들은 너희들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모욕하고, 훼방한 족속이요, 나라였는데, 이들은 살아질 것이며, 하나님은 이 땅을 남은 자들을 주셔서 양을 키우고, 우리를 만들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다 삼켰던 북방의 앗수르도 멸하시고, 그들의 수도 니느웨는 사막 같이 메마르고, 당아와 고슴도치 놀이터가 될 것이며, 적막하여 사람이 살지 않는 땅으로 변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2장의 내용입니다.

 

⑴. 남은 자들에 대한 약속입니다.

 

남은자란 첫째, 전쟁이나 재난으로부터 살아남은 자들입니다. 둘째, 심판에서 살아남은 이스라엘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 남은 자에게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며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도를 주어 자기들과 자기 후손의 복을 위하여 항상 나를 경외하게 하고(렘 32:38-39)”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스바냐 선지자는 남은 자를 겸비한자, 주를 찾는 자들로 원수들의 땅에서 살 사람들을 말합니다. 성경에는 홍수에서 살아남은 노아의 8식구, 소돔고모라의 롯, 엘리야 때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는 7천명을 소개합니다. 이들이 새로운 씨가 될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율법을 지키는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남은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도시를 떠나서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던 에세네파가 자기들만이 거룩하게 살기 때문에 남은 자라고 주장했습니다. 또 열심당은 이 세상을 고치려고 생명을 내 놓았으니까, 자기들이 바로 남은 자라고 생각합니다. 예레미야 때에 땅을 사수하자고 하는 자들이 있었고, 항복하자하고 바벨론 편에 선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남은 자가 아니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다니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같은 사람들이 그 시대의 남은 자였습니다. 모든 것이 다 타 버렸습니다. 재만 남아 있습니다. 이 재에 불씨가 있었는데 이것이 남은 자들입니다. 오늘 성경 스바냐 3:12-13에서도 곤고한 자, 가난한 자, 겸손한 자가 바로 남은 자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옥수수 한 알에서 옥수수 1대가 올라옵니다. 자라면 거기서 두 자루의 옥수수를 땁니다. 헤아려 보았습니다. 둘레17개x길이30개x2자루=1020알입니다. 옥수수 한 알이 자란 결과입니다. 이 한 알이 종자요. 이것이 없으면 옥수수를 딸 수 없습니다. 남은 자는 곧 씨앗이요, 종자 씨를 말합니다. 이순신 장군이 누명을 쓰고 옥에 갇혔습니다. 옥고를 치르는 동안 원균이 조선 수군을 완전히 망쳐 놓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옥에서 나와서 왜군과 싸우려고 보니까. 배가 없습니다. 다 파선한 겁니다. 수많은 배가 다 수장된 것입니다. 그런데 가까스로 12 척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그 12척을 가지고 다시 시작합니다. 그리고 왜적과 23번을 싸워서 23번을 이깁니다. 이 12척이 바로 씨앗이요, 남은 자입니다. 오늘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나무를 잘라도 그루터기는 남습니다. 전체가 타락하고, 바알을 숭배하고, 포로가 되었는데도 그루터기는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는 끝이 난 것 같고, 망했는데, 역사는 그들을 통해서 다시 일어났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들을 통해서 역사를 이어가십니다. 그 연장선상에 지금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11장의 바울의 예언대로 이스라엘이 돌아오고, 또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그의 피를 뒤집어 쓴 우리는, 마침내 그 앞에 설 것입니다. 이것이 남은자의 승리입니다. 오늘 스바냐서는 남은 자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모이는 자들, 겸손한 자들, 기도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을 하나님은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희망이요, 남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 모입니까. 겸손합니까. 기도합니까. 자신을 한번 돌아보시고, 스스로 물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나는 남은 자입니까. 씨앗이요, 종자가 되겠습니까.

 

3. 셋째 3장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예루살렘을 패역하고 더러운 성읍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교훈을 받지 않았으며, 기도하지 않았고, 또 하나님 앞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런 사람들이 당시의 방백들이고, 재판장이고, 선지자와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아침마다 당신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외면했습니다. 자신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들을 포기를 하시고, 큰 재앙과 심판을 내리시고, 새로 시작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악과 거짓을 멀리한 새 사람들을 통해서 예루살렘을 회복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너로 인해서 내가 기쁨을 이기지 못한다. 너희를 괴롭힌 자들을 다 벌할 것이며, 너희들의 이름이 날 것이고, 칭찬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기대를 걸고 있던 사람들은 심판을 받았고, 생각하지 못했던 자들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예루살렘을 회복할 사람들이 될 것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3장입니다.

 

⑴. 기대를 저버린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방백들, 재판장들, 선지자들, 제사장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의 수치를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목사, 장로, 권사, 집사들이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렸다. 이런 말씀입니다.

 

이 학생은 분당의 어느 교회에 다녔는데, 중학교 때 성적이 꼴찌였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 할아버지가 대단히 유명한 사람이었는데, 어릴 때부터 장손인 이 학생에게 큰 기대를 걸고, 말끝마다 “너는 꼭 하버드 대학에 가야 해” 라고 노래했답니다. 할아버지가 그러니까 엄마 아빠 할 것 없이 주변 분위기가 그렇게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기대는 크지요, 성적은 안 오르지요, 그러다 보니까 더 압박을 받는 겁니다. 그러다가 이 아이가 공부를 놓아 버린 것입니다. 어른들에 대한 반발심도 작용했습니다. 그때부터 꼴찌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엄마들이 “너 쟤하고 놀면 안 돼, 저런 애랑 놀면 물드는 거야, 놀지 마!”하는 그 이야기가 그 어머니 귀에게까지 들어갔습니다. 고민 끝에 어머니가 용단을 내려서 아이를 미국으로 보냈습니다. 그래도 거기서는 조금 적응을 하는 것입니다. 꼴찌를 해 본 경험 때문인지 자기보다 못한 아이들을 이해를 해주고,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는 모두에게 인기 있는 사람이 됐답니다. 급기야는 주변에서 학생회장 선거에 나가보라고 권유를 받게 됐습니다. 이 학생은 자기는 동양인이라, 아예 꿈도 꾸질 않았는데 주변에서 계속 나가보라고 하니까 결국은 친구들 마음을 상하게 하기 싫어서 그냥 출마를 했답니다.

 

한국에 있는 엄마에게 이 소식을 알리게 되었습니다. 엄마가 기도를 하다가 메일을 보냈습니다. 내용은 예수님이 문둥병자를 고쳐주시는 말씀입니다. 율법으로는 문둥병자가 사람들 앞에 나와도 안 되고, 문둥병자를 만져도 안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문둥병자를 만지고 고쳐 주시지요. 그 엄마가 아들에게 “네가 학생회장에 되던 안 되던 그건 아무래도 좋으니까, 너도 너보다 못한 아이들, 정말 더러워서 가까이 하기 싫어하는 아이들의 친구가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 라는 겁니다. 미국 고등학교의 학생회장 선거는 연설을 3차까지 해야 된답니다. 그런데 결과는 이 학생이 1차 연설에서 전교학생들의 기립 박수를 받고, 나머지 후보들이 다 사퇴를 하는 바람에 학생회장이 됐다는 겁니다. 미국에서 학생회장을 한 경력은 대학 입학 때 상당한 가산점수가 붙는 답니다. 이 학생은 올해 대학엘 들어가게 됐는데 하버드가 포함되어 있는 아이비리그 중 한 학교로 갈 수 있게 됐다고 합니다. 그 학생이 학생회장 선거 때 했던 연설이 궁금하시지요? 이런 내용이었다고 합니다.

 

“저는, 한국에 있을 때는 문둥병자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도 저와 얘기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늘 꼴찌를 했기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여러분은 그런 저를 만져주시고 친구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여러분을 존경합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들은 제 마음을 치료해 주신예수님 같은 분들입니다. 사실, 제가 이번에 학생회장에 출마한 것은 학생회장이 되려고 나온 게 아니라 여러분에게 이런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학생회장이 되느냐 안 되느냐는 사실 제게 큰 문제는 아닙니다. 다만 제가 한 가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저는 꼴찌를 많이 해 봐서 공부를 잘 하고 싶은데 잘 안 되는 친구들의 마음을 웬만큼은 압니다. 그런 친구들을 도와주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문둥병자였던 저를 만져주고 고쳐주고 친구가 되어 주었던 것처럼, 이제는 할 수만 있다면 제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저의 이 마음은 하나님이 아십니다. 하나님은 저의 이 기도를 들어주시리라 믿습니다.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여러분 이상한 것은 기대를 걸고, 정성을 많이 쏟았는데, 실망스러운 결과가 나올 때가 있습니다. 이것을 꽃을 키울 때도, 자식들 가운데서도, 또 신자들 중에도 그런 경우가 나오고,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서도 발견되는 것입니다. 선인장 종류는 정성을 많이 기울이면 죽습니다. 그래서 게으른 사람이 키우기 좋은 것이라고 합니다. 또 자식들 중에서도 옛날에는 개막냉이라는 말을 썼는데 이것은 늦둥이로 막내를 낳으면 부모가 끝까지 돌보아주지 못하고 죽을 것 같고, 또 늦게 얻었으니 특별히 예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 버릇이 없고, 자기만 알고, 아무렇게나 키운 큰애들 보다, 못하고 제멋대로라고해서 개막냉이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또 오래 된 신자들 중에도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잘 참석하지 않고, 십일조도 하지 않고, 기도 생활도 하지 않는 사람들 말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에 그런 일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정말 안 되는, 방백, 재판장, 선지자, 제사장이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날 목사나 장로가 그렇게 했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화초를 심는 것은 꽃을 보려는 것입니다. 나무를 심는 것은 열매 때문입니다. 이것은 목적입니다. 그런데 정성껏 돌보았는데 꽃이 피지 않는다. 몇 년이 지났는데도 열매가 없다. 이런 경우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단 하루밖에 살 수 없다면 당신은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미움이나, 원망으로 보내겠다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용서하지 못했던 사람이 있다면 그 하루가 지나기 전에 화해하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리고는 생각할 것입니다. ‘용서하고 화해할 수 있는 걸, 이렇게 사랑할 수 있는 걸 왜 진작 못했을까.’ 하루밖에 살 수 없다면 할 수 있는 그 사랑을 왜 평소에는 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앞으로도 시간이 많이 남았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어리석은 생각 때문입니다. 더 많이 가지려는 욕심이 화해를 머뭇거리게 하고, 사랑을 주춤하게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결론

 

스페인 선원들이 남미로 황금을 찾아서 떠났습니다. 가다가 태풍에 배가 난파되어서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바다위에 여러 날이 지났습니다. 물이 다 떨어졌어요. 바닷물을 마시면 고통 하다가 죽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바다 물을 안 마시려고 몸부림을 치고 괴로워하는데, 배는 흘려서 아마존 강으로 들어갔습니다. 아마존 강은 너무 크기 때문에 바다와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닷물이 아니라, 먹어도 되는 물인데 선원은 바닷물인줄 알고 죽어 갑니다. 한 사람이 바닷물이라도 실컷 먹고 죽어야 되겠다고 물에 풍덩 들어가서 삼켜보니 바닷물이 아닌 것입니다.

 

모두가 강물로 뛰어 들었습니다. 다 살아났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둘러싸여 있는 것이 인간이지만, 목말라서 죽어 가는 존재가 인간들입니다. 도대체 예루살렘이 왜 무너져야하고, 이스라엘과 유다가 왜 망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없었습니까. 율법이 없습니까. 선지자가 없습니까. 그들은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눈을 감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손을 뿌리쳤던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앗수르, 바벨론의 침략으로 자신들의 소중한 것을 다 잃었습니다. 그리고 이방 땅에서 포로가 된 후 비로써 자신들이 가졌던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어리석은 후회-

배우지 못해서가 아니다. / 알지 못해서도 아니다. / 기회가 없어서도 아니다. 항상 있을 것이라 믿었고 / 손 뻣으면 언제나 잡을 수 있다 생각했고 너무 흔하고 많아서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내 사랑이 그렇고. / 내 인생이 그렇고 / 내 주님이 그렇고. / 내 교회가 그렇다. 그런데 점점 멀어져 가고 있다. 사랑도, 주님도, 교회도 내 인생도 이제 더 참을 수 없다고 한다. 나는 어찌된 사람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했단 말인가. 사랑을 잃고, 주님을 잊고, 인생을 다 보내 버린 나는 누구인가. 다시 처분을 기다리자. / 그 손길을 기다리자. / 눈을 감자, / 마음을 열자,/ 손을 내밀자, 사랑을 쓰는 흰 백지가 되자. / 불붙는 검은 숯이 되자, / 붉은 화살이 되자. /

 

▲조영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