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욥기 강해

욥의고난

에반젤(복음) 2019. 8. 5. 23:15




<욥기의 고난 이해는 우리의 상상을 일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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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는 인간의 고난이 어디로부터 오는가?” 하는 질문에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욥기에서 고난에 대하여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대부분의 경우를 제외하고 어느 특정한 경우에는 왜 우리가 고난을 당해야 하는가에 대해선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욥기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고난의 원인에 대한 통상적인 개념을 일축하고 있다. 즉 소위 인과응보의 원리에 근거한 태도가 잘못되었음을 욥기에서 배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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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과응보?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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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에 등장하는 엘리바스, 빌닷, 소발의 기본적인 전제는 인과응보의 원리에 근거한다. 그것은 죄를 지으면 고난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4:7-11; 11:13-20). 우리는 이 전제가 어느 정도 보편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한다. 적어도 성경에서 순종하는 자와 거역하는 자는 그에 따른 결과들을 가져온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언약을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율법 정신은 이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28). 잠언에서는 하나님의 길, 즉 지혜의 길을 따르는 자는 안연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평안하리라”(1:33)고 가르친다. 복 있는 사람과 악인의 길에 대한 평가를 다룬 시편 역시 일부 보편적 원리를 말하고 있다(1).

그렇지만 욥의 세 친구들은 보편적인 원리를 벗어나 원인과 결과를 뒤집고 있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욥이 고난을 당하게 된 원인은 그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모든 고난은 죄에 의해 시작된다고 한다(4:7-11; 8:3-7; 11:13-15; 15:12-16; 22:21-22).

욥기는 성경적 인과응보 사상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오히려 죄 문제가 아닌 다른 이유로 고난을 당하는 욥을 보여줌으로서 그들의 주장을 일축하고 있다. 욥은 격심한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을 믿는 그의 신실한 신앙을 증거했다. 하나님께 욥을 참소했던 천사는 욥의 신앙이 일시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욥은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1:9-12)과 건강까지도 상실했지만(2:4-6) 그것으로 하나님에 대한 욥의 충성이 변질되지는 않았다. 욥의 경우에 있어 재앙은 어떤 죄에 대한 심판이 아니었다. 욥의 세 친구들에게는 욥이 위선자로 보였을지 모르나 그가 당하는 곤경은 분명 하나님의 형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욥의 신실성을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하기 위한 시험이었다.

요한복음에서는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를 소개하고 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욥에게 적용할 수 있는 말씀을 하셨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9:3). 이 경우에 있어 예수님은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를 고치심으로서 자신이 메시아임을 증거하셨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종들의 고난을 통해 영광을 받으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결국 욥의 고난은 여호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참소하는 자에게 자랑하신 것처럼 욥은 하나님에 대한 신실성을 증명함으로써 참소하는 자의 참소를 일거에 무너뜨렸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신실한 욥에게 복을 주심으로써 욥의 신실성을 온 천하에 나타내셨다. 이것은 우리들이 일상의 삶에서 당하는 고난의 의미와 과히 비교조차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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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난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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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의 고난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예표한 것이라고 해석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상당한 비약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도수장에 끌려가는 양과 같이 자신을 철저하게 하나님께 의뢰함으로써 자신의 신실성을 입증하셨다는 점에서 상관 관계를 찾을 수 있다.

이사야 53장에 기록된 종의 노래는 이 점을 충분히 입증해 주고 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고난과 시험에서 승리하심으로 그리스도가 되셨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2:36)는 베드로 사도의 증거는 욥이 당한 고난의 성격과 그리스도가 당하신 고난의 성격이 전혀 무관치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욥기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책이다. 따라서 어떤 이유로든 무고하게 고난을 받는 자가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에 대해 의문을 품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욥은 철저하게 이 사실을 고백하고 회개함으로써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게 되었다. 반면에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려 죽도록 보내심으로서 모든 인간들에게 자신의 사랑을 보여주셨다(5:8).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죽음을 통하여 사망의 세력 잡은 자 곧 참소하는 자를 없이하는 것이며 그 아래에서 사망의 종노릇하는 모든 사람을 놓아주려 함이었다(2:14-15). 예수께서는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많은 고난을 받으셨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림받은 바 되어 죽임을 당하셨으나 사흘만에 살아나셨다(9:22; 8:31). 이것은 메시아적 예언의 요구이기도 했다(24:46). 베드로는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고난 받으실 것을 미리 예언했다고 밝히고 있다(3:18). 바울 역시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셔야 할 필요성을 역설했다(17:3; 26:23).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 무고하게 고난을 받으신 분이시다. 그리고 유일하게 죄가 없으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스스로 인간이 살고 있는 고난의 세계 속으로 들어오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인간이 당할 수 있는 가장 큰 고난을 겪으셨다. 그러나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으셨다.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은 죄악의 불필요한 결과를 스스로 껴안으시고 받아들이셨는데 이것은 욥뿐 아니라 욥과 같은 모든 사람들에게 고난에 대한 질문의 궁극적인 해답이다. 이런 이유로 초대 교회는 욥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의 관계를 중시하고 수난 주일 동안 욥기를 낭독하기도 했다.

창조주이신 그리스도는 고난을 통하여 구원을 완전케 하셨다(2:10). 또한 시험을 받았으므로 시험받는 자를 능히 도우시는 분이시다(2:18). 그리스도는 거듭해서 죽음을 당하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해서 단번에 그렇게 하셨다(9:26). 사람들을 대신하여 고난을 받으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우리는 영원한 고뇌에서 구원을 받는다. 고통에 대한 스토익(Stoic) 주의자들의 어떠한 부정(否定)도 우리들의 죄성(罪性)을 변화시킬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들의 모든 고난이 끝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성도들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성도들이 회심함으로써 이 세상의 모든 악과 고통으로부터 구제를 받는다고 말하는 것은 달리 생각해야 할 문제이다. 회심은 죄의 근본적인 문제, 즉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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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우리에게도 영광스러운 고난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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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들이 회심함으로써 모든 악과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지만 악과 고통으로부터 분리된다고 말하는 것은 복음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오히려 바울은 성도들의 고난을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동일한 것으로 해석한다(고전 1:3-11). 그리고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함으로써 또한 그리스도로부터 위로를 받는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는 그리스도 안에서 고난과 위로의 교제를 나누는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고난을 참으신 그리스도의 모본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그의 뒤를 따라가야 한다(벧전 2:21). 우리는 조롱거리가 되고, 채찍에 맞으며, 쇠고랑에 채이며, 감옥에서 고통을 겪었던 신앙의 주인공들을 결코 잊어선 안 된다. 그들은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옷을 입고(이것은 악랄한 형벌이었다) 유리하며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다(11:36-38).

모세처럼 우리는 애굽의 보화보다 더 위대한 주 예수를 위하여 이 세상에서 받는 고난을 귀히 여겨야 할 것이다(11:26). 그것은 장차 올 영광을 보장해 주는 것이다(1:24; 벧전 4:13). 현재 받는 고난은 영원한 영광과 비교해 볼 때 너무도 경미하다(8:18; 고후 4:17).

성도들의 고뇌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생활에 성실하게 헌신하겠다는 정신적인 자세에서 기인한다. 비록 성도들은 새로운 성품을 받았을지라도 옛 성품은 근절되지 않는다. 때문에 날마다 육체를 섬기려는 유혹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점에서 진실한 신앙 생활이란 끊임없는 회개와 지속적인 헌신의 생활이어야 한다(고전 15:31).

성도들은 완전한 이상(IDEA)의 세계에 도달하려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떠나서는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니란 사실을 항상 인식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자기 자신을 던져야 한다. 오히려 고난은 방종이나 쾌락에 삶의 만족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증거해 준다. 이런 점에서 고난은 성도에게 있어서 죄에 대한 심판을 증거하기보다는 우리 주님이 하나님께 그러셨던 것처럼 성도의 진정한 헌신을 증거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는 적극적인 신앙의 자세이다.

욥기는 현 시대의 기독교인들에게 여전히 그 힘을 발휘하고 있다. 그러나 욥기는 전적으로 무고하게 고난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서만 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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