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린아이 같이
마가복음 10장13-16절 /이동원 목사
작년 겨울이라고 생각되는데 우리 예배당의 어떤 교우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아마 오늘처럼 따뜻한 겨울 아침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추위와 눈보라가 며칠 계속되다가 모처럼 맑은 아침에 자기가 집에서 일어나서 창문을 여니 날씨가 너무 좋아서 무심코 이렇게 말했더래요. 야, 골프 치면 기차게 좋겠다고 했더니 옆에 있던 딸이 그러더래요. 아빠, 오늘 같은 날 꽃들도 춥지 않겠지. 조금 있으면 꽃이 피겠지 그러더래요. 그 딸의 얘기를 딱 듣는 순간 자기와 딸의 생각이 얼마나 다른지. 나는 겨우 골프 칠 생각했는데 꽃들이 춥지 않겠다고 꽃들이 피어나겠다고 이런 순수하고 아름다운 딸의 마음에 부딪쳤을 때 아! 나는 굉장히 타락했구나! 이런 생각을 했다는 교우의 얘기가 귓전에 새롭습니다.
시인 월스워즈는 어린이는 어른들의 아버지라는 아주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 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인데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을 남겼습니다.
이 말씀의 목적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이 말씀의 참된 목적을 알기 위해서 먼저 이런 질문을 던지겠습니다. 본문이 의미하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요? 본문이 의미하지 않는 것 첫째는 이 말씀은 어린이들이 무조건 천국에 간다는 것은 아닙니다. 어린아이들이 자동적으로 세상을 떠나가면 천국에 간다는 말은 아닙니다. 어린이들의 구원문제에 대해서 기독교 신학에서는, 교회당 안에서는 오랜 동안 신학자들이 논쟁을 계속해 왔습니다. 논쟁은 아직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런 논쟁이 지속되고 있다는 이야기는 잘 모른다는 얘기예요.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계속 토론하고 있지만 성경은 명확한 이 부분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쟁은 계속됩니다.
가장 보편적인 견해 가운데 하나는 여기서 특별히 어린아이들은 아직 자기 지적 능력이 발달하지 못해서 어떤 이성적 결정을 할 수 있는 나이에 도달하기 전에 아이들이 죽으면 어떻게 되느냐? 이 말입니다. 그럴 때 보편적인 두 가지 견해가 있는데 하나는 부모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아이들은 천국 간다. 왜냐하면 부모들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 속에는 자녀들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도 포함되어 있다. 이런 신학적 입장을 가리켜서 보통 언약 신학이다. Covenant Theology 란 말을 합니다.
언약 신학이다. 한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 안에는 아이들도 포함 되어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아이들도 천국에 갈 것이다. 이런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 가운데 심지어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이것을 유아세례 근거로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 거기까지 나가는 것은 지나친 논리적인 유추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본문의 얘기는 단순히 그 부모들이 아이들이 예수님 축복받았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예수님 앞에 데리고 나와서 예수님의 안수를 요청한 것이고 예수님은 이 어린 아이들의 머리에 손을 얹어 축복하신 것에 불과합니다.
여기서 세례문제까지 꺼내는 것은 지나친 논리의 비약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의 생각은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신데, 아직 결정할 수 있는 나이되기 전에 아이들이 세상을 떠난다면 그 아이 들은 당연히 천국 가는 것이 마땅하다. 그래서 모든 아이들은 다 천국 간다. 이런 어린아이들에 대한 보편적 구원론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정답은 무얼까요? 제가 정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정답은 잘 모른다. 이게 정답입니다. 모르는 건 모 른다고 그래야지요. 성경이 명확하게 이런 문제에 관해서 어떤 시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런 어린아이들의 구원문제에 대해서 건강한 Approach는 무엇이나? 건강한 접근이라는 것은 부모가 예수 그리스도 믿으면 아이들은 자동적으로 구원 된다고 이렇게 가정하는 것보다는 아이들이 태어났을 때부터 그 아이들의 구원 문제를 위해서 부모들이 부지런히 기도하고, 그리고 되도록 빨리 아이들이 구원을 경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몇 살쯤 되면 아이들이 구원 받을 수가 있느냐?
이것도 잘 몰라요. 종종 하나님이 쓰신 아주 위대한 신앙적 거인들의 생애의 전기를 읽어 보면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4살에 구원받았다, 5살에 구원받았다, 6살에 구원을 경험했다는 이런 기록이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성적 결단 자기가 예수님이 누구인가 깨닫고 나 예수님 믿겠다. 예수님을 받아들이겠다고 결단할 수 있는 나이가 몇이냐? 만 3살이냐? 4살이냐? 5살이냐? 6살이냐? 언제부터 결정이 가능하냐? 그것도 잘 모르고 아예 성숙, 그 발전의 단계가 사람마다 다 개인차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일반화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어린아이들에게 구원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언제부터 라고 꼭 집어서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디모데에게 편지를 쓸 때에도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이 성경은 너희들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런 어린아이들도 구원을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은 무조건 다 천국 간다. 그랬다가 못 가면 누가 책임져요? 그러니까 그런 낙관적, 지나친 낙관주의적 가정을 하는 것 다도 내가 우리 어린아이들에게 참 구원받고 하나님을 알고 어려서부터 신앙생활 하면 그만큼 그의 일생에 유익이 되기 때문에 빨리 구원을 경험시키겠다는 부모가 열정을 가지 고 아이들의 신앙 교육에, 또 전도에 아이들의 전도에 뛰어든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해요.
유명한 D.L. 무디가 전도자가 되기 전에 주일학교 교사였습니다. 한 번은 그가 전도 훈련을 받았습니다. 훈련받고 나가서 전도를 했습니다. 돌아와서 전도 보고를 하는데 D L. 무디가 이런 보고를 했다고 합니다. 저는 오늘 두 사람 반을 전도했습니다. 두 사람 반이라니, 사회자가 어째서 두 사람 반입니까? 아! 알겠습니다. 어른 두 사람 전도하고 어린이 한분 전도하셨군요. 이때 무디는 말하기를 사회자에게 거꾸로 얘기하셨습니다. 저는 어린이 두 사람을 전도했고 어른을 전도했습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인생을 벌써 절반 이상 산 사람이기 때문에 어른은 엄격하게 말하면 반 사람입니다. 그런 데 어린아이야 아직 일생을 살지 않았어요. 그 앞에 무한한 한 일생이 그 앞에 펼쳐져 있기 때문에 어린이를 구원한다는 것은 그의 일생을 구원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지 않겠습니까? 얼마나 진지한 얘기예요!
오늘 본문을 조심성스럽게 들여다 보면 성경은 어린아이들이 무조건 구원받는 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 이 아니라 어린 아이와 같은 접근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또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받을 수가 없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린이에 대한 무조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보증을 약속하신 말씀은 아닌 것입니다. 또 본문이 의미하지 않는 것. 두 번째로는 본문은 어린아이들의 과일 보호나 방임 주의적 교육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라는 얘깁니다. 흔히 예배당에서 아이들이 막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막 소리 지르고 그러면 안내하시는 분들이 걱정이 돼서 제재를 합니다. 다른 분들의 편안한 예배, 질서 있는 예배를 위해서 아이들 좀 잘 챙기시고요, 좀 이렇게 아이들은 되도록 아이들 반에 집어넣어 갖고 우리 교육을 받도록 했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안내하는 집사님들이 안내를 하거든요.
그러면 가끔 이런 분들이 나타나요. 성경도 모르십니까? 성경에 보면 아이들을 데리고 예수님 앞에 나올 때 제자들이 그것을 막았더니 예수님이 화가 나서 분히 여기시면서 그들을 꾸짖고 이런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자의 것이라는 성경도 모르십니까? 라고 대드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이런 것을 가리켜서 아는 것이 병이다 이렇게 말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아이들도 어른과 꼭 마찬가지 인격체로 소중히 여기고 소중히 어린 아이들을 접근하는 태도가 우리 교회당 안에서 특별히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전 방정환 선생님이 아주 큰 기여를 했다고 생각해요. 어린이란 낱말을 방정환 선생님이 만들었다고 그래요. 네, 그전까지는 어린이란 말이 없었는데 어리신 분이다 어린이, 어리신 분 어른과 꼭 마찬가지로 어린이도 하나의 인격체로써 존중되고 소중히 여겨져야 할 가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비약해서 부모들이 아무렇게나 어린아이들을 팽개쳐도 좋다는 이야기예요? 그이야기는 아니요. 이것은 부모의 책임을 면죄부를 줄려고 사용될 수 있는 본문 말씀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실상 한국 신세대 부모들에게 뚜렷이 볼 수 있는 오늘날 교육적 성향 가운데 하나는 방임 주의적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한국의 미래를 위해서 매우 저는 불행한 경향이라고 생각됩니다. 세계 어느 나라 부모들 하고 비교해서 한국 부모처럼 자기 자녀들을 멋대로 내버려 두는, 교육의 의지가 없는 부모가 없습니다. 요즈음 한국인들을 객관적으로 보고 평가하는 많은 책들이 외국인들에 의해서 써지고 있고 그것들이 책방에 베스트셀러로 올라 있습니다.
최근 영국의 The Times의 기자로 한국에 와서 15년 이상 살았던 한 분이 <한국인을 말한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의 114페이지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국 아이들은 끊임없이 응석을 부린다. 특히 남자 애들은 좋아하는 일을 참고 미루도록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어른이 되어 서도 모든 것을 즉각 마음대로 하기를 원한다. 그들은 충동적이고 단기 적인 일에 몰두하고 하는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성질을 부리곤 한다. 서구인들이 보기에 한국의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지나치게 관대하다.
이것은 한국의 미래를 위해서 불행한 일이다.
베스트셀러로 한국의 여러 계층에 회자되고 있는 그 일본 사람 이께마라 마모루, 그분이 쓴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쓴 한국. 한국인 비판> 이 책에 보시면요 한장, 한 Chapter의 내용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온상 속에서만 자라는 떡잎. 한국의 어린아이들이 그분의 눈에 비쳤을 때 온상 속에서만 자라는 떡잎이다 자, 이 Chapter는 이런 말로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성질이 별나서 꽤 말썽을 피운 축이다. 친구랑 싸움을 하고 집에 들어가면 어머니는 어김없이 내 손을 잡고 그 집을 찾아 갔다. 그리고 상대방 집에 찾아가 조건 없이 사과를 해야만 했다. 내 입술이 찢어졌든 터졌든 그것은 아랑곳 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나서야 어머니는 내 상처를 치료해 주셨다.
일본에서는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대부분이 이런 식이다. 한국에서도 아이가 싸우고 오면 상대방을 찾아가는 것까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일단 찾아가서는 사과를 하는 게 아니라 아이를 어떻게 키웠기에 남의 집 귀한 자식을 이 꼴로 만들어 놓았느냐고 언성을 높인다. 그러니 아이 싸움이 곧잘 어른 싸움으로 번지곤 한다. 이런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자기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배우지 못한다. 설사 내가 좀 잘못 했다 해도 내 뒤에는 부모가 버티고 있고 언제 어디선지 내 편을 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이는 자기 행동에 잘잘못을 판단할 정도로 철이 들었는데도 정작 부모 눈에는 아이의 잘못이 보이지 않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이것은 얼마나 진립니까! 민주주의 교육이 생활화된 미국에서도 제가 살아 보니까 예배당 와서도 아이들 이 아주 질서 있게 행동을 해요. 그 차이가 어디에 있을까요? 저는 부모 책임이라고 생각을 해요. 종종 미국 예배당에 가 보면 한 구석에서 이리 저리 뛰는 아이들을 정숙하게 야단치고 행동을 교정하고 있는 부모들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달라져야 합니다.
저는 본문의 말씀이 결코 아이들의 방임주의적 행동을 면죄부 줄 수 있는 본문으로 사용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본문이 의미하는 것, 그러면 본문이 정말 의미하는 내용은 뭐나? 저는 본문을 이해하는 열쇠가 되는 2 가지 단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나라, 둘째는 어린아이와 같이 이 2가지 단어가 본문의 열쇠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다시 들어 보세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 하리라 거기서 강조된 두 개의 단어가 있습니다. 한 단어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단어이고 또 하나는 어린아이와 같이 자, 하나님 나라에 어떻게 들어 갈 수가 있느냐? 어린아이 같아야 들어간다. 어린아이가 다 들어간다는 얘기가 아니요. 어린 아이와 같아야 들어간다.
천국에 어떻게 갈 수가 있습니까?
한 죄인이 하나님 나라 가는 길, 이 문제에 관해서 저는 정상적인 개신교 교파 정통 예배당 안에 소 속해 있다면 신학을 초월해서 대부분 동의하는 두 가지 강조점이 있습니다. 회심의, Conversion 회심의 두 가지 조건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천국 가기 위해서 반드시 서야 할 두 개의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는 회개고 또 하나는 믿음입니다. 회개하고 믿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 갈 수가 없어요. 이것 없이 하나님 나라에, 천국에 갈 수 있는 방법은 도무지 없습니다.
첫째는 회개, 두 번째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누가 회개 할 수 있느냐? 누가 믿을 수 있느냐? 그것은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 다시 말하면 어린아이들의 그 삶의 양식 혹은 어린 아이들의 마음과 어린 아 이들의 태도에 있어서 회개와 믿음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마음의 질이 있을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어른하고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는 좋은 삶의 조건과 자질들을 어린아이들이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말입니다.
회개의 경우를 한 번 생각해 보세요.
회개의 경우. 어린아이들이 잘 회개할까요? 어른들이 잘 회개할까요? 어린 아이들이요. 어른들이 되면 사고가 경직이 되기 시작합니다. 자, 어떤 경험, 자기 나름대로 어떤 경험을 통해서 인생을 보는 시야가 점차 굳어지기 시작해요. 그래서 어떤 일정한 나이가 지나고 나면 교정이 안 돼요. 자기 식으로 인생을 꽉 살아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교육이 힘들어요.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매우 힘듭니다. 그러나 어린아이 시절에 무얼 잘못하면 그러면 물론 아이에 따라서 아주 고집이 센 그런 아이들이 없지 않아 있긴 있지만 그러나 부모가 혹은 선생님이 가르칩니다, 설득합니다, 깨우칩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네, 잘못했어요. 자기 잘못을 인정해요. 이 잘못을 인정할 수 있는 마음의 바탕, 그리고 행동을 교정한단 말이죠. 이것이 바로 회개할 수 있는 마음의 밭입니다.
내 잘못을 인정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고칠 수가 있다는 것. 그러나 어떤 일정한 사고의 틀이 굳어져 버리고 경직되면 뭐 잘못을 사과하지 않아요. 사람들이 왜 회개하지 않습니까? 내가 무얼 잘못했어? 이 정도 잘못 안 하는 사람 어디 있어? 그러니까 회개하지 않는 거예요. 자, 회개할 수 있는 마음 밭은 어떤 마음 밭이냐?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 네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그리고 자기 행동을 바꿉니다. 방향을 바꾸는 것이에요. 삶의 방향이 달라져요. 이 회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어린아이들에게 더 있다 말이요.
그래서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기사를 우리가 마태복음에서 읽어 보시면 마태복음 18장3절을 보시면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자, 이 말씀 속에서 어떤 단어가 강조되었습니까? 돌이켜.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 들어 갈 수가 없다 너희가 돌이켜 이 돌이켜야 한다는 단어가 제일 먼저 강조된 것입니다. 회개 없이 하나님의 나라 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회개는 어린아이일수록 더 용이하다 더 쉽다. 그러니까 어린 아이일수록 더 잘 믿을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나이 그게 어른 되면 힘들어요. 아이 때 더 잘 믿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지난 주간에도 제가 말씀드렸지만 우리 예배당도 참여했던, 코리아 갤럽에 의뢰해서 조사한 한국인들의 신앙 의식 조사 보고서, 이 보고서에 보면 이런 질문이 있었습니다. 당신은 언제 예수님을 영접했습니까?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영접한 시기가 언젭니까? 우선 9세 미만에 예수님을 받아들였다 그게 5.3%예요. 저는 이것 보고 깜짝 놀랬어요. 미국보다 비교해 보니까 굉장히 적어요. 미국에는 아주 상당히 높습니다. 그것 보면 한국 부모들이 어린아이들에게 복음을 심어 줄려는 의지가 조금 더 약하지 않은가 생각이 들어요. 5.3%쯤 되니까.
그런데 10살부터 14살까지 예수님을 영접했다. 이것이 12%정도. 그런데 15세부터 19세 사이 예수님을 영접했다. 이것이 무려 26%나 됩니다. 26%.제가 이걸 보고 생각을 바꾸었는데 한국의 미래를 위해서는 대학생 전도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늘 생각했는데 이거 보고 아, 이 중고등부 관심을 써야 겠구나? 많은 사람 들이 26%가 다 15살에서 19살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는 거예요. 여러분들 얘깁니다. 우리들의 얘기. 한국 크리스챤들의 평균치를 따져 보니까 15살부터 19살 사이에 믿었다는 것이 26%, 그 다음 20세부터 24세 사이에 예수님을 영접했다는 퍼센테이지가 13%, 그 다음 25세부터 29세까지가 10.7%, 그 다음 30세부터 39세 사이가 그 다음으로 많은데 18.3% 예요. 전 이거 왜 그럴까? 굉장히 제가 생각을 좀 해 봤는데 제가 여러분들과 같이, 목사님들과 앉아서 이걸 분석해 본 의견들이 이건 결혼 한 후에 예수님 믿는 남편에게, 아내 때문에 끌려서 나온 남자들 때문에 퍼센테이지가 올라가지 않았느냐? 지금 여기 보면 싹 웃으시는 분들 그럴 가능성이 많아요.
그래서 나이 때 상당히 많은 것이 그런 원인이 있지 않나 생각이 들어요. 그러나 40세 이상 돌아가실 때까지, 40세 이상에 믿은 사람들이 14.6%에 불과합니다. 그 얘기는 우리가 운데 절반은 다 19살 되기 전에 믿었어요. 우리 가운데 절반은. 그리고 39세까지 믿었다는 사람이 도합 합해보면 85.3%. 그러니까 40세가 넘으면 믿기가 너무너무 힘들다 거의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사람 있어요. 40세 이상에 믿은 분들 손들어 보세요. 뭐 이거 부끄러울 필요 없어요. 40세 이상에 믿었다. 이 분들은 위대한 기적의 산물입니다. 박수로 한번 격려 하십시다.
그거 보면 우리가 확실히 젊었을 때 보다 어렸을 때 사람들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는 사실이 굉 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자, 이런 강조를 하면 제가 늘 받는 비판 중에 하나가 젊은이 얘길 많이 하다 보니까 우리 이 목사님은 그냥 젊은 사람만 알고 우리 늙은이들은 몰라라한다 제가 이런 비판을 많이 받아요. 그런데 그렇지 않아요. 저는 나이 많은 사람도 믿을 수 있어요, 또 실제로 많이 믿잖아요. 또 나이 많은 사람들도 아주 귀하게 쓰임을 받을 수 있다고 믿어요. 단 나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의 손에 붙잡힘을 받아 아주 귀하게 쓰임을 받으려면 어떤 나이 많은 사람이냐?
아이 같은 어른, 아이 같은 늙은이. 어린아이 같은 마음. 경직된 사고를 갖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처럼 잘못 했을 때는 잘못했습니다. 라고 말 할 수 있는 사람. 어른 되어서도 회개 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아이 같이 단순하게 주님 앞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 그 단순한 마 음 얼마나 좋아요! 저는 그 대표적 인 사람이 바로 나 같은 사람이 아닌가? 이렇게 스스로 생각합니다. 저는 연속극 보고 만날 은혜 받고 울고 그러는데 우리 아내는 결코 우는 법이 없습니다. 그렇게 여자가 독한지 모르겠어요. 회개할 수 있다는 것, 어린아이 같은 마음 안에서만 가능한 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다음 두 번째 믿음의 경우
회개와 믿음이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는데 믿음의 케이스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잘 믿을 수 있을까요? 어른이 되면 우리가 나이가 많아질수록 사람을 탁 만나고 접근하게 되면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해요 우리? 탁 믿어져요. 그냥 믿고 싶고 그래요 사람이? 나이가 많아질수록 째려보고 의심하고 수상하게 생각하고 마음을 주지 않아요. 그러나 어린아이들은 그렇지 않잖아요. 만나면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도 하하 웃고 따라가고 그래서 유괴도 당하고. 그러나 어린아이들의 그 단순성의 특성 가운데 하나는 쉽게 믿습니다. 잘 받아들입니다. 의지합니다. 이게 어린아이의 특성입니다.
어떤 아빠, 엄마, 딸 하고 셋이서 봄철에 길을 가다가 나비가 날라 오니까 딸이 아! 나비다 나비 아빠가 오래간만에 아빠 노릇 한다고 너 나비 어디로 가는 줄 아니? 저 나비가 꿀 찾아가는 거야. 꿀. 뭐 굉장히 아빠 노릇 한다고 했더니. 딸이 그러더래요. 아니야, 아빠 저 나비는 엄마 찾아 가는 거야. 딸의 발상과 아버지의 발상이 얼마나 달라요. 늘 부모 생각하고 의지하고 싶어 하고 어린이 시절에 그렇잖아요. 그런데 왜 이것이 중요하냐 하면 하나님과 관계에 있어 독립성이라는 것이 우리의 성장과정에서 매우 필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독립성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는 의지하는 마음이 있어야 해요.
네, 하나님을 향한 Trust 신뢰, 의지함 그것이 없이는 신앙의 세계에 결코 들어갈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이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여기 오늘 본문에 15절을 다시 읽어 보시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여기 받들지 않는다는 단어가 나옵니다. 저는 이것이 믿음의 다른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받들지 않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냐? 제가 이 단어를 좀 찾아보니까 헬라어에서 덱세타이(δέξηται)라는 단언, 이 단어를 다른 말로 번역하면 그냥 받아들인다고 번역하면 돼요. 그게 더 좋은 단어 같아요.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처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저는 믿음은 받아 들이 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믿음을 단순히 다른 말로 바꾸면 믿음이란 뭡니까? 받아들이는 것. 믿음은 하나님 받아 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것이 믿음이요. 믿음. 믿음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한복음 1장12절에 보시면 영접하는 자 곧 어떻게?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무슨 권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이 말을 바꾸면 그 이름을 믿는 자 곧 영접하는 자.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다는 것은? 교회 왔다 갔다 하는 것. 이 믿는 것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라는 분을 내 구주와 주님으로 인격적으로 내 마음속에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신앙의 시작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란 한 분을 내 마음의 문을 열어 그 분을 나를 구원할 수 있는 분으로, 내 인생의 주인으로 받아들인다. 믿음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받아들이지 못하면 신앙은 시작되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교회와 앉아도, 아무리 예배를 드려도, 아무리 설교를 들어도 아직도 마음의 문을 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있다면 이 사람 그리스도인 아니죠. 받아들여야 돼요.
제가 처음 미국 유학 갔을 때 학교 근처에 있는 미국교회에 나갔다가 연극 하나를 봤습니다. 너무 너 무 감동이 됐습니다. 이다음에 한국에서 이런 연극 한 번 해봤으면 좋겠다고 생각도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연극에 소질이 있나요? 생각만 하고 못 했어요. 그런데 최근에는 한국에서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이 연극이 한국에서도 많이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아주 반갑습니다. 빈방 있습니까? 라는 연극입니다. 연극의 타이틀이 빈방 있습니까? 이런 내용이었어요.
자, 이제 요셉과 베들레헴, 요셉이 호적조사를 하기 위해 자기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게 돼요. 그때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습니다. 방을 찾아다닙니다. 그래서 어떤 여관에 도착해서 빈방 있습니까? 라고 묻는 장면입니다. 자, 이 장면을 하면서 연극배우들을 연극 속에서 보여 주는 데 그중에 한 여관 주인의 아들이었습니다. 연극에 따라 조금 다르지만 제가 본 미국 교회의 연극에서는 여관 주인의 아들에게도 배역을 하나 맡기는 그런 의논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여관 주인의 아들이 장애아였습니다. 장애아. 말을 더듬는 장애 어린아이였습니다. 그런데 너무 너무 연극 하고 싶어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연극 캐스팅에 배우 중의 한 사람으로 집어넣기로 원했는데 말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연극을 하겠어요.
그래서 제일 그 중에서 쉬운 파트, 역할이 뭐냐? 그 여관 주인, 여관 주인을 보조하는 아들 역할을 맡기자. 한 마디 말만 하면 돼. 사람들이 와서 여관 문을 두드리면서 방 있습니까? 라고 물으면 방 없습니다. 한 마디 말만 하면 돼. 그리고 사라지면 돼요. 간단 한 거니까 이 장애 아이도 이 역할 만은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 것을 맡긴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연습을 시킵니다. 짐이라는 아이였는데 그 아이에게 열심히 연습을 시켜요. 바바 바 방 없습니다. 그 말을 시키는 겁니다. 방 없습니다. 방 없습니다 자꾸 연습을 시키니까 한마디 말은 어느 정도 하게 됐습니다. 방 없어요 한 마디 말만 연습을 시켰어요.
자, 연극이 진행됩니다. 드디어 요셉이 왔습니다. 문을 두드립니다. 방 있습니까? 짐이 튀어 나갑니다. 연습한대로 한 마디 말을 합니다. 열심히 연습했으니까. 바 방 없어요. 그런데 요셉이 가지 않고 한 번 더 말을 했습니다. 뭐라고 말했냐면? 내 아내가 마리아가 임신 중입니다. 너무 아프고 아기를 낳을 형편인데 어디 조그만 구석이라고 어떻게 구할 수 없을까요? 이 불쌍한 장면을 본 짐이 전혀 대사에 없는 얘기를 갑자기 했어요. 뭐라고 했느냐하면 그 그 그러면 내 방에 오세요. 내 방에 오세요. 대사에 없는 얘기예요. 연극은 깨지는 거예요. 하지만 여기에는 진한 감동이 스며듭니다. 지난밤도 순진한 아이의 세계에서 도저히 이 분을 거절할 수 없어서 받아들이는 장면 내 방에 오세요. 내 방에 오세요. 아무도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던 그 세태 속에서 이 장애 어린아이 짐이 보여 주었던 그 단순한 마음속에서의 그 초청 내 방에 오세요.
내가 내 마음대로 인생을 살아 보았습니다. 그러나 내 삶은 좌절이었고 방황이었습니다. 이런 내 삶의 현주소를 확인하고 그것이 나의 죄요 내 허물 때문인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 저 죄인이에요. 저 잘못 됐습니다. 회개할 수 있는 마음,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다. 하나님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단순한 복음에 대해서 단순한 마음으로 응답하고 예수님 제 마음 속에 오세요. 볼지어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너에게로 들어가리라. 주께서 내 마음의 문을 노크하고 계시는 그 음성을 듣고 내가 네 마음 문에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너에게로 들어가리라. 내 삶의 자리에 다가 오시사 내 마음의 문을 노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청을 기쁨으로 수락하고 예수님 오세요. 내 마음 속에 오세요. 나의 구세주가 되어 주세요. 나를 구원해 주시고 나의 주인이 되어 주세요. 이것이 구원이 아닙니까?
어린 아이와 같은 단순한 마음으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 것.
구원받는 순간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된 줄로 믿습니다. 그것이 성경의 약속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구원 받고 오랜 시간이 지나간 사람들도 살다 보면 구원은 잃어버리지 않지 만 구원의 기쁨을 잃어 버려요. 그래서 신앙생활이 더 이상 활력을 갖지 못하고 내가 의기소침해서 영적인 침체 속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찬송의 샘이 메말랐습니다. 내 삶의 발걸음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내 삶 속에 성령의 충만함이 떠났고 나는 무료하게 하루하루를 버티고 살고 있습니다. 뭐가 필요할까요? 여러분, 이럴 때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하는 것. 회복하는 것도 구원 받는 것 하고 똑같아요. 내가 회개와 믿음으로 예수님 앞에 와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듯 내가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기를 원할 때도 하나님은 똑같은 것을 요구하십니다. 회개하셔야 돼요. 회개. 내가 하나님 앞에 잘못 살아왔던 것 , 내가 하나님을 내 삶의 첫째 자리에 두지 못했던 것, 내가 내 마음대로 내 고집대로 내 철학대로 살기를 고집했더니 그것이 내 방황의 원인이었습니다. 하나님 나 잘못했어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자백하고 그리고 하나님 다시 신뢰합니다. 더 이상 나를 의존하지 않습니다. 내 지혜, 내 잘난 꾀를 의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면서 삶의 기쁨을 잃어버리고 내 삶이 흔들리는 원인이 어디 있어요? 회개하지 못 하기 때문이요. 왜 회개하지 못 합니까? 어린아이 같지 못 하기 때문에. 어린아이 같지 못하기 때문에. 그 어린 아이들의 단순함, 내가 아이들을 붙들고 설득하고 가르쳤을 때에 처음에는 버티던 아이들이 순간적으로 마음을 바꾸어 잘못했어요, 아빠 그럴 때 그 아이들을 안아 주고 싶잖아요. 내가 주 앞에 그 잘못을 회개하고 자백하는 그 순간, 그리고 그 하나님을 향한 신뢰함으로 주 앞에 서는 순간 나를 안아 주시는 하나님, 내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될 것입니다. 주께서 나를 통치하십니다. 주께서 나를 다스리십니다. 내게 기쁨의 샘물이 터집니다. 환희의 찬양이 내 속에서 회복될 것입니다. 너희가 어린 아이 와 같지 아니하면 결단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가 없느니라. 주께서 오늘 우리 가운데 이 구원을, 그리고 구원의 기쁨의 회복을 주시기를 기도하십시다. 주님은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에 들어 갈 수 없느니라
말씀을 생각하며 기도하십시다.
최근에 내 생활 속에서 구원의 기쁨을 잃어버리고 있는 분들은 계시지 않습니까? 나 예수 그리스도 믿지만,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알지만, 내 삶이 흔들리고 잃어버리고 있다면 어떻게 회복할 수 있어요? 회개와 믿음이에요. 회개하세요. 내가 주 앞에 잘못 살아왔던 삶의 부분이 어떤 부분인지 여러분에게 지적하십니까? 하나님 맞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이 회개, 어린아이 같은 마음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이 회개, 이 단순성. 솔직함 속에 일어날 수 있는 이 회개, 하나님 제가 회개합니다. 그리고 주를 의지합니다. 하나님 내가 순간 적이나마 나를 의지하고 내 꾀를 의지하고 내 지혜를 의존했을 때 하나님 그것이 보기 좋게 나를 패배시켰고 나를 무너지게 만들었습니다. 주님을 의지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겠습니다. 기도로 주를 의지하며 다시 살겠사오니 주여 내 속에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나를 정결하게 하시고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시고 하나님 나를 멀리 멀리 쫓아내지 마시고 내 안에 구원의 기쁨을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여러분 가운데 예배당은 왔다 갔다 하지만 아직도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신 분, 지금 죽으면 내가 어디로 가는지 확실히 알지 못하시는 분, 천국 갈 수 있어요? 아직도 이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 하셨습니다. 네가? 그렇다면 이 시간 하나님 앞에 나오십시오. 회개하십시오. 회개란 내 인생의 방향을 전환하는 것입니다. 내가 삶의 주인 되어 살던 자리에서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이게 본질적인 회개예요. 하나님 내 마음대로 살아왔습니다. 내가 주인이 되어 내 인생을 살아 봤지만 그것이 방황이었고 그것이 내 인생의 흔들림의 원인이었습니다. 제가 회개합니다. 나를 허물과 죄속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보내 주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나의 허물 내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보배로운 피를 흘린 바로 그분, 장사한지 사흘 만에 부활하시사 나의 생명 내 삶의 주인이 되어 주신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나의 구세주로 초청합니다. 주님 제 마음속에 오세요. 나의 구주가 되어 주세요. 나의 주님이 되어 주세요. 내 평생에 이 기도 못해 보신분 계십니까? 내 마음의 방속에 오세요. 나에게 오세요. 내 인생에 이런 중요한 결단을 해 보지 못한 분이 있다면 오늘이 그 결단의 날이 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 나의 구주 나의 주님이 되어 주십시오. 나를 다스려 주옵소서. 그러면 기꺼이 주께서는 성령으로 내 마음 속에 찾아오시고 오늘부터 나를 다스리십니다. 나를 변화시켜 주시고 내 인생은 새로워질 것입니다. 오 성령님 내 안에 오사 나를 다스려 주옵소서.
기도하십시다.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한결같은 사랑하심과 성령의 평화를 주심, 오늘 주를 예배하고 다시 삶의 장으로 나가는 주님의 백성들에게 성령님의 권능으로 자유와 찬양과 그리고 저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기쁨의 삶으로 저들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기를 간절히 축복하옵나이다. 아멘!
영상녹취 / 김은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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