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레위기 강해

레위기 주제

에반젤(복음) 2019. 7. 25. 14:37

레위기 주제



레위기에서 중점을 두어야 될 문제는 모세가 처음 시내산에서 받았던 계시와 장막에서 받았던 이 레위기에 나타난 사실에 (1:1/출애굽기 40:24) 어떤 연속성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단순히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자 했다면 구태여 성막이 필요 없을 것이고 홍해 건넘으로 충분했을 것입니다.시내산의 계명과 성막 안에서의 계명 사이에는 성막이 개재되어 있습니다.그래서 이 문제는 성막의 목적이 밝혀져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성막은 법궤를 핵심으로 하여 여호와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동행하자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그 동거의 목표는 아브라함에게 한 언약의 준수와 성취에 있습니다.아브라함 언약의 성취는 가나안 땅에 있는 죄악의 무리들을 정복하고 그 땅을 차지하는데 있습니다.따라서 법궤의 이동은 바로 이스라엘의 원수를 겨냥한 것이었습니다.이 사실은 법궤가 시내산에 떠날 때 모세가 한 말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가로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의 앞에서 도망가게 하소서 하였고 궤가 쉴 때에는 가로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천만인에게로 돌아오소서 하였더라."(민수기 10:35)


이렇듯 법궤가 정복용이라면 법궤의 그 존재만 있어도 가능한 일이 아니겠습니까어째서 제사제도가 병행되어 있는 것입니까(실제로 흡니와 비느하스는 그렇게 여겼습니다.사무엘 상 4:3-10)여기에 레위기 계명의 본질이 있습니다.전쟁의 승리가 되려면 여호와의 이름이 있는 법궤의 존속이 우선입니다.그러나 여호와는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

이 공포중에 경험했듯이 인간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거룩한 분이십니다.누구든지 그 분과 함께 있다는 것 자체로 죽음이요 심판입니다.속된 것은 근처도 갈 수가 없습니다.그렇다면 레위 언약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속에 자기의 거하실 자리를 마련하기 위한 조치임이 드러납니다.거룩이 이스라엘 사회 속에 침투했을 때 이스라엘 사회가 어떤 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하는가를 여호와로 부터 사전에 지시 받는 것에 관한 이야기입니다.(1:1)

만약에 사전에 준비가 없다고 하면 이스라엘 민족은 거의 비거룩성 때문에 살아 남을 수 없게 됩니다.


거룩과 비거룩의 관계의 절단을 해소하는 방안이 주어져야 하는 것입니다.그것이 화목입니다.화목되지 않는 상태에서 동행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이 긴장을 해결하는 것이 제사제도입니다.

시내산 계명 자체가 갖는 엄위성과 정결함은 스스로 그 속성을 취소하거나 양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오히려 이스라엘 속에서 한껏 만족되어야 하는 법입니다.이 점이 달성된다면 거룩이라는 입장에서 비언약 계통의 민족을 심판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셈입니다.바로 제사제도는 이 취지에 맞추어 실시됩니다.즉 비거룩한 이스라엘을 거룩한 민족으로 만들어 버리는 작업입니다.그 작업은 출애굽기 24:4-8 에서 실시한 약속 위에 시행되어 지는 것입니다.


모세가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면서 (속건제, 속죄제가 빠져있음.그 이유는 여기서는 아직 죄 문제가 거론될 시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피를 양푼이에 담아가지고 반은 단에 뿌리고 반은 백성들을 뿌리는 것입니다.누구든지 이 언약대로 되지 아니하면 생명을 상실된다는 것인데 여기서 말하는 생명이란 죽음보다는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제외된다는 것입니다.이 언약에 대한 온전한 헌신만이(번제) 나중에 여호와와 화목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화목제)그래서 레위기의 제사제도는 번제로부터 시작해서 화목제로 끝이납니다.(1-3)


이것이 이스라엘과 여호와간의 언약입니다.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

라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언약 관계가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쉽게 다시 정리하면 지금 이스라엘의 입장은 타의(他意)에 의해 일방적으로 언약 안으로 밀려 들어 온 것입니다.왜 우리만 제사 드려야 하느냐 라는 질문이 요구되지 않는 것입니다.출애굽 24장에서는 제사가 번제와 화목제 둘로 나왔지만 만약에 여호와께서 금하는 명령을 어겼을 경우에는(4:1-3) 속죄제를 우선적으로 추가해야 하는 것입니다.(속죄제로 시작되는 경우가 또 있는데 이는 제사장 위임과 관련될 때입니다.출애굽기 29/레위기 8.)제사장을 세우고 그에게 기름을 붓는 제도는 일년에 한차례 온 백성의 죄를 위한 제사를 위한 것인데(9:1-7/16) 위임이란 백성의 죄를 위탁받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 밖의 백성들은 제사장이 하는 제사행위에 함께 동참할 수가 그러면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명령이 무엇입니까그것은 의식주(, , ), 생업, 이 모든 방면에 걸쳐 다 적용됩니다.


옛날 노아 때 노아가 방주에서 정결한 짐승과 부정결한 짐승을 함께 실어 구원이 어디서부터의 구원인지를 깨닫게 해준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도 우리는 비거룩으로 부터 구원되어 정결하고 거룩하고 구별된 남은 자라는 의식을 갖기 위해서 음식 하나에서부터 모든 접촉되는 것에 주의를 요구하고 있습니다.(11-15, 17, 20)

뿐만 아니라 십계명이 조직 내에서 어떻게 확대 적용되는 지를 보여 주는데 1계명부터 10계명까지 전부가 이스라엘이 결코 이방인들과는 같아서는 안된다는 측면에서 준수를 요구하고 있습니다.(18:3)그런데 그 10계명이 명확히 구분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결국 희년사상 하나로 집결됩니다.희년, 그 해는 안식일의 완성의 모습을 가지면서 가난한 자와 종들과 기업이 없는 제사장에게 기업이 돌아가는 해입니다.따라서 모든 것이 은혜와 은혜로만 통용되는 법칙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만약 이것을 지키지 않는다고 한다면 가나안 땅은 땅만이 가지는 고유한 축복 즉 번식과 풍요가 사라질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26:14-33)하지만 이 언약을 지킨다면 여호와께서 약속한 복이 제공될 것이라고 합니다.(26:1-13)


이와같이 레위기에 담긴 율법의 의미는 생명과 죽음이란 단순한 목숨 유지에 관한 것이 아니라 과연 여호와의 것에 참여되는 관계인가 아닌가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이것이 언약면의 실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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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의 제사법과 성결법에 관하여(모세언약을 배경으로)

서 론

언약이란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이란 차원으로 상대할 때 다루시는 원리원칙이다. 언약 안에서만 일하고 언약 밖의 일은 안하신다. 그 이유는 하나님 자신이 그런 원칙을 친히 세우셨기 때문이다. 레위기를 이해하는데 있어 기본적으로 무슨 언약의 영향력 안에 놓여 있는가를 먼저 살피는 것도 같은 취지에서 나온 행동이다.

언약을 하나님 활동의 중심으로 삼는 것에 대하여 불만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약속이란 이미 그 자체로서도 쌍방간의 활동을 제한시킨다.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에게도 자유롭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약속의 제정자라고 해서 약속하고 무관한 제삼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으로부터 하나님의 이탈을 주장하는 것은 마치 하나님에 대해서 뭐가 뭔지 모르겠다고 하는 편이 솔직할 것이다. 약속이란 이렇듯 하나님의 모습을 구속시킨다.

레위기는 하나님이 그러한 언약을 이 땅에 실현시키기 위해 어떤 특별한 후속조치를 남기고 있는가를 보여주게 된다.



본 론

1. 모세언약의 의의(意義)

모세언약은 하나님이 모세를 보내어 이스라엘을 건지는데 동원된 하나님의 원리원칙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과 취지가 담겨있어야 될 특이한 국가이다. 그 뜻과 취지는 족장들에게 이미 알려준바 있다.(창세기 12:2, 15:4, 출애굽기 3:15) 즉 복의 원천이 되는 나라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구원이란 이렇듯 하나님의 복 없는데서 복 있는데로 참여하는 것이다. 모세언약은 이런 아브라함언약을 국가단위로 성취하도록 하는데 작용할 것이다.

그러면 복은 국가라는 차원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주어지게 될까 족장들에게 있어 복이란 곧 생명이었고 죽음의 극복이었다.(22:13, 32:30) 이러한 생명은 그 죽음을 대신해 줄 존재가 있을 때만 비로소 주어지게 된다. 그런데 그 죽음을 대신하는 존재는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라는 의()를 지닌자로서 세상으로부터 죽음당하는 경험을 갖게된다.(4:8-11)


하나님은 이 자를 공격한 측에 비로소 저주의 개념을 가지고 상대하신다.(4:11) 하나님은 억울하게 순교당한 자의 를 복의 중심내용으로 삼고자 하신다. 그리고 그 의를 지상에 확산시켜 보려고 하신다. 최초로 죽은 인물, 그 속으로 아버지 아담을 위시하여 모든 복의 대상을 흡입시킨다. 따라서 복의 원리는 이미 확정적이다. 즉 의인의 죽음을 대속의 죽음으로 간주하여 그 죽음을 복으로 삼으시는 것이다. 언약이란 이 죽음 속으로 대상을 데려오기 위한 장치이다. 그래서 모든 언약은 반드시 참여해야 될 인물이 중심이 되어 주어진다. 모세언약은 바로 모세에게 일어난 그 경험을 언약백성 전부에게 발생시켜 줌으로써 모세안에서 하늘의 복을 맛보게 하려는 언약이다. 그 복은 요 거룩이다. 생명이란 의로운 존재가 될 때 주어진다.


모세는 하나님을 알고 있다. 그의 한평생을 통해 하나님은 체험되었다. 그분의 활동은 전부 자비와 긍휼이란 맥락에서 이해되어진다.(2:6, 34:6) 물에서 건짐 받은 것도 배후에는 하나님의 자비의 섭리가 있었고 아무도 올라갈 수 없는 시내산 꼭대기 에서 거룩한 하나님과 대면하게 된 것도 자비와 긍휼이었고 땅에 내려와서 장막에서 하나님과 단 둘이 만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보호막 덕분이었다. 이러한 사건들은 모세로 하여금 의인의 대신 죽음이 땅에서 파생된 결과임을 분명히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모세 자신도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섬겨 하나님의 노를 유발시키자 자기의 이름을 하나님의 생명책에서 제거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출애굽기 32:31-32)

모세와 하나님과의 언약은 하나님의 지속적인 자비와 긍휼의 중심을 찾아 그 사건 안으로 백성들을 인도하는데 목적이 있다. 그 사건은 두말할 것도 없이 유월절사건이다. 흠없는 1년된 어린양이 그날밤에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그 양의 피를 이스라엘 집안의 출구를 점하고 있다. 그 밤은 하나님이 세상을 방문하는 밤이다. 이 세상 그 누구도 그분의 거룩앞에 버텨설 수 없다. 다만 모세에게 주어진 구원의 사건만이 이 위기를 극복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내려준 것이 무엇이었던가 자비와 긍휼이 아니었던가! 그 자비와 긍휼은 어디서 흘러나오는 것일까 족장의 하나님 그 자체에서부터 나오는게 확실하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모세를 만났을 때, 족장의 하나님으로 소개했기 때문이다. 그 족장의 하나님이 이제 모세 앞에서는 죄없는 양의 모습으로 그 속성을 비치신다.


자비와 긍휼은 곧 죄없는 존재의 대신 희생이었다. 모세와 아론은 알고 있다. 이 여호와의 위력이 애굽의 술객이나 바로왕의 힘보다 더 세다는 것을 이전의 9가지 재앙으로 실감한 바 있다. 사실상 그 위력은 바로 희생과 대신 죽음의 위력이었다. 그것이 이제 자비와 긍휼의 속성으로 전환되어 이스라엘에게 퍼부어진 것이다.


유월절 그날밤의 약속은 이스라엘 전체를 포용할 만한 여지를 미리 마련해 가지고 있었다. 그 약속의 중심은 어린양의 희생의 피이다. 그 피에서 출발하여 새로운 이스라엘, 즉 장자를 배태하는 것이다. 약속의 민족이다. 마치, 사라가 이삭을 배태하듯이 말이다. 이 둘 사건 사이에 공통적으로 개재 되어있는 할례언약의 사상의 일치성을 증빙해준다.(17:13-14, 4:23-26) 출애굽은 결코 애굽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다. 유월절 희생양으로부터 이스라엘은 출발했다. 바로 밤에 나온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밤의 민족이다. 진노의 밤, 죽음의 밤을 이긴 민족은 이 민족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일진대 이러한 이스라엘 국가가 하나님과 약속을 맺는다면 무슨 내용을 가질 것인가 하는 것은 뻔한 이치다. 즉 유월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정신에로의 참여이다! 이러한 언약만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때 그 이스라엘을 지속적으로 유지시켜 준다.


모세언약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희생양의 취지로 돌아서기를 권고하고 있다. 거룩을 향해 버텨냈던 경우가 이 경우밖에 없었기에 국가단위로 거룩한 나라, 제사장 나라가 되기 위해서도 이 수 밖에 없다.(19:5-6) 이제 남은 문제는 어떻게 해서 그 유월절의 양은 지속적으로 그들과 함께 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사실 유월절 양은 출애굽 당시에만 필요한 방식에 국한하기 때문이다. 모세가 알고 있는 수준처럼 어린양이 곧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로 이해되기 위해서는 그 이후에 이스라엘 집단에는 다른방식이 주어져야 하는 것이다. 유월절은 약속의 땅에 도착했을 때 드려지기 때문이다.(13:5, 민수기 9:5에서 처음 유월절은 시내산 밑에서 드려졌다) 유목적인 방식에서 탈피하여 이제는 정착한 농경풍토와 국가라는 거대 조직사회에 맞는 방식속에서 사상의 토착화도 함께 고려해 보는 것이다. 그 국가는 외부로부터 끊임없이 전쟁발생 요인을 지니게 되는 중심에 건설된다.

그렇다고 한다면 자비와 긍휼과 그리고 거룩이라는 것도 새로운 변화에서 고유의 본질을 손상하지 않는 범위에서 새로운 색채를 띠고 등장되어야 한다. 그것은 곧 거룩의 인격화 조짐이다. 모세언약은 레위기에서 이 관점에 맞추어 본질의 깊이를 더해간다.


2. 레위기에 있어 모세언약의 구체화

모세가 처음 시내산에서 받았던 계시와 장막에서 받았던 계시 사이에 어떤 연속성이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레위기 연구의 접근 취지이며(1:1, 40:24) 레위기의 모든 내용은 모세언약에 종속되어 모세언약의 본질이 더욱 확연히 우리 눈에 띄게 하는 것이 본 연구의 목표이다.


우선 제사가 모세언약에서 점하는 위치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이스라엘 남자들은 1년에 세차례씩 여호와를 뵙기 위해 정()한 장소에 나타나야 한다. 이들이 하나님의 계신 곳으로 간주하는 곳은 실제로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하는 곳이다. 하나님의 이름은 족장의 하나님께서 애굽의 과 대결하기 위해 자신이 스스로 이름을 가지고 전쟁에 참전할 때 사용하신 그 이름이다. 그러니까 그 이름은 세속전쟁을 경험한 흔적을 지닌 하나님을 지칭할 때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고 또 기념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지상에서 이름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신의 겸비를 나타내는 행위이다. 세속신의 이름과 하나님의 이름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전쟁에 승리했다는 것은 전 우주는 그 전쟁의 신 앞에 굴복 당해야 마땅하며 그렇지 아니하면 저주와 진노가 뒤따르는 것이다.(민수기 23:20-23, 여호수아 2:9) 그런데 하나님은 애굽신과의 전쟁 과정을 담아 모세언약으로 규정해 놓아 버렸다. 그렇게 된 이상 하나님의 이름은 곧 모세언약을 만들어 주신 하나님이 되어 버리고 누구든지 모세언약에 위배되는 사람은 승리의 신인 여호와에게 정복당한 애굽 꼴이 될것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명확한 사실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제사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기리면서 제사하느냐 또는 무엇을 중심으로 하여 그 구원의 사건을 지속적으로 담아 대대로 전달할 수 있는 제사가 되느냐가 중요하다. 출애굽의 사건을 단지 한 과거 수난으로 종결될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이 실제로 때때로 그 후에 반복되어 재현되려면 그만한 효과를 지닌 장치가 필수적이다. 그 장치가 바로 언약이다. 그런데 미리 언급한 것처럼 유월절 어린양을 거룩한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하는 정결한 희생양으로 승화시키고 그것은 약속의 핵심으로 정한 이상 모든 언약의 활동도 이 정신에 의해 규제된다. 거룩이라는 것도 막연한 개념으로서의 거룩이 아니라 희생을 요구할 수밖에 없게하는 신의 속성을 두고 말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거룩도 모세언약 안에서는 희생의 모습으로 재해석되어 보여진다. 그 희생제물 위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이름은 기념되고 그럴 때 출애굽의 복은 항상 이스라엘 전체에 부어진다. 제사의 사건이 지상에서의 거룩이기 때문이다. 출애굽기 20:24의 제단법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따라서 이스라엘 남자들이 1년에 3차례 하나님을 뵙고자 나오는 것은 사실상 법궤가 안치되어 있는 장막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기리는 행위를 말하는데 그들의 행위는 모두 모세언약에 따라야 한다. 그 모세언약은 새로운 거룩을 이스라엘 사회 전체에 총체적으로 구현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무엇을 통해서 오직 제사법과 성결법을 통해서이다. 제사법이란 희생의 세밀화이며 성결법은 그 희생정신의 적용을 두고 말한다. 레위기 계시가 성막에서, 즉 법궤 앞에 서 주어졌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영속성을 뒷바침해 주는 말이다(1:1)


희생이란 하나님의 거룩에 참여하는 통로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그 자체가 곧 희생의 세계를 향한 부르심이다. 이 안에서만 하나님의 이름, 즉 여호와의 승리의 혜택을 누리게된다. 거룩이 비거룩에 대하여 승리한 그 승리를 두고 말한다. 그 희생의 제사에 대하여 출애굽기 28장에서는 제사장제도가 도입된다. 제사장이 되는 인물은 그전의 장로제도나(24:1) 천부장 백부장 제도에서(18:25-26) 끌어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새로 결정된 제도이다.


인간이 정한 제도권에 규제받는 인물은 결코 하나님의 희생을 대변할 인물이 못되는 것이다. 제사장 중심의 제도권으로 전환시키려는 하나님의 시도는 모세언약의 대폭적인 확대조짐으로 2 아드려져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기존 정치제도의 무가치성을 논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거룩성이 배제된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차피 이스라엘이 거룩한 제사장 나라로서 등장되려면 기존의 제도권에 있는자들도 뭔가 굴복해야 하는 거룩의 대표자가 있어야 한다. 그 누구도 도전할 수 없는 고유한 권위가 서려 있어야 한다. 이 권위는 희생의 참여한 자의 권위이다. 모세를 하나님이 부르실 때 어쨌던 하나님께서 아론도 함께 불러주셨다. 아론은 철저하게 모세에게 예속된 인물이며 모세가 해야할 일이라면 아론도 그 곁을 떠날 수 없다. 하나님이 모세언약을 통해 모세가 경험한 사건을 그 언약속에 담고자 했을 때 아론도 이 언약의 세분화작업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모세와 백성사이모세는 자기가 가져온 계명과 율례는 거룩한 말씀편에 섰다면 백성들은 그 반대편에 서게된다.(출애굽기 24:1-8의 모세언약 체결 현장에서)

언약의 피는(희생제물의 피) 그 가운데 놓이게 될 때 그 중보적 직책을 감당할 자가 결코 백성들 속에서 선출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모세언약은 철저히 하나님의 일방적인 의사에 의해 주어지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님편인 모세편에서 나와야 하는데 그자는 곧 아론이다. 아론은 모세의 확장이다. 아론의 임무가 모세언약의 실제적인 구현이라는 차원에서 그는 모세와 백성사이에 서있다. 아론이 백성들 중에서 그들의 의사에 의해 선출된 것이 아니지만 그들의 대표로서 모세와 마주설 수 있는 것은 시내산에 오를 때 아론은 철저하게 모세로부터 소외되어 백성들 중에 거했다는 사실이고 하나님이 그를 제사직이란 새시대의 제도를 시작하면서 그를 새로 거룩한 인물로 그 백성들 중에서 뽑혔다는 사실에 근거한다.(히브리서 5:1) 모세가 두번째, 세번째 시내산을 오를 때도 아론은 백성들 편이 되어 있다.(출애굽기 32:3)


이제 남은 문제는 백성들이 어떤 식으로 자기들과 함께 기거하는 그 제사장이라는 거룩에 동참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 방법은 제사장이 백성들을 대리하는 제사를 드리는 수밖에 없다(레위기 1:5) 하나님은 백성들의 제사에서 그들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의 제사에서 그들을 만난다. 모든 제사는 반드시 제사장의 손을 거치게 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제사장이 백성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제사장을 대할 때는 마치 백성전체를 대하는 양으로 대하시기 때문에 제사장에게 특별한 모든 거룩을 요구하신다. 제사장의 모든 모습과 행동은 개인의 자격으로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다. 제사라는 행위 속에서 하나님과 제사장의 만남은 곧 하나님과 이스라엘 전체의 만남이다. 백성들에게 잘못이 있으면 제사장 제사로서 제사장이 대신 제사를 드려야 한다. 단 백성들은 그 제사장 제사에 의무적으로 참여함으로 곧 제사장의 거룩에 동참될 수가 있다. 아론계열이 제사장으로 하나님이 요구하는 모든 거룩의 속성을 백성들보다 한발 앞서서 선험적(先驗的)으로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제사뿐 아니라 모든 성결법도 제사장 계열이 더 고차원적이고 더 철저하고 더 포괄적이다.


제사에 있어 제물의 등급도 일반백성과 차이가 난다. 그리고 제사장이 될 수 있는 자격요건이 더욱 세밀하고 정결하다. 그래서 우리는 일반 제사법을 생각하기 앞서 먼저 아론이 대제사장으로 임직 할 때의 제사법을 다루어야 한다.


3. 제사장의 임직에 관한 제사법과 그 확대

제사장직 임직은 사실은 백성2들의 하나님에 대한 의무를 위임하는 직()이라고 볼 수 있다. 제사장의 복장이 이를 말해주는데 가슴팍과 어깨에 이스라엘 12지파의 이름을 새긴 보석이 붙어 있다.(28:12,211) 위임제도 그 자체가 백성을 대신하는 희생제도와 연관이 있다.(28:1) 그 위임식 절차는 이를 말해준다. 이 위임절차의 제일 마지막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눈에 들어온다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출29:46] 라고 되어 있다. 이 말씀은 출애굽의 정신이 중도에 소멸되지 않고 제사장 임직을 통해 면면히 이스라엘 내부에 재현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희생의 정신은 제사장 임직식에 어떤 식으로 담기게 되는가


우선 모세가 이 경우 사제로서 등장한다. 이는 이 임직식에 결코 모세로부터 이탈이 아니라 오히려 모세언약의 확대를 나타내는 것이다. 즉 아론은 모세가 하는 일을 대행하여 제사장이 되는 것이다. 모세의 입장에서는 처음으로 모세언약의 혜택을 입은 자가 바로 아론인 것이다. 그는 거룩하며 거룩의 이름으로 태어난 첫번째 인물이다. 왜냐하면 모세에 의해 첫번째로 대속되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처음 출애굽 할 당시에는 누구든지 혈육에 의한 자연적인 첫 출산자는 선택과 관계없이 모두 거룩한 자들이었다.(13:1) 그러나 시내산 계명 이후 모세의 제사장직에 최초로 가담한 자가 백성을 대표하는 거룩한 자가 된다. 그렇다고 해서 첫출산자가 제외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까지 오는 과정이 보다 세분화된 것이다. 나중에 민수기에 가면 성막을 중심으로 하여 선택된 레위지파가 온지파를 대변하는 대표지파가 된다.(3:12)


어쨌든 7일동안 치러지는 임직식의 주된 내용은 최초의 번제와 최초의 속죄제와 최초의 소제와 최초의 화목제를 이 임직식에 가득 담아 놓는 일이다. 물론 모세가 아론에게 전달할 이 사항은 이스라엘의 영원한 제사준칙이 된다. 그러면 아론에게 전달된 그 각종 제사의 의미를 우리는 무엇이라고 규정할 것인가

이점을 알기 위해서 제사장제도왜 도입되었는가를 봐야한다. 출애굽기 24:5에서 처음 모세언약을 체결할 때는 번제와 화목제만 있지 속죄제는 없다. 그렇다면 속죄제가 이 가운데 끼여든 것은 순전히 원래 제사인 번제와 화목제를 성사시키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음에 틀림없다. 소제는 번제의 일종으로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를 피목적이 있는 것으로 다만 동물제물이 아니라 음식제물로 한다는 차이 뿐이다.(레위기 2) 그래야 원래의 언약형태를 유지시켜 주기 때문이다. 계명에 대한 헌신과 계명 안에서의 화목이 되어야 이스라엘이 거룩해진다.(24:1-8) 그런데 그것이 죄로 막혀있다면 누가 나서서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누군가가 보상되어야 한다. 제사장의 등장은 백성들의 죄를 자기가 위임하는데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제사장이 드리는 제사장 희생제사에 그들로 참여토록 한다. 이스라엘의 첫번째 대제사는(레위기 9:11-24) 제사장이 주도하여 임직식이 7일만에 끝나는 그 이튿날 행해지게 되는데 제일 먼저 드려지는 제사는 번제나 화목제가 아니라 속죄제이다. 이는 곧 제사장의 존재 의의를 말해준다. 따라서 번제나 화목제는 반드시 속죄제가 먼저 드려지고 병행하여 드려져야 한다.(레위기 14:13, 역대하 29:21-24참조) 또한 화목제는 번제가 먼저 드려지고 그 번제물 위에(레위기 3:5) 제물을 얹어 드려져야 되는데 이 순서는 최초의 대희생제사의 순서를 따르는 것이다.(속죄제 레 9:15- 번제 레 9:16- 화목제 레 9:18) 이렇듯 모세로부터 위임받은 아론의 4권한은 자기가 받은 권한을 이스라엘 전체의 권한으로 재위임하고 있다.


즉 죄사함의 권한을 이스라엘 전체의 권한으로 재위임하고 있다. 즉 죄사함의 권한을 말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죄란 바로 원래의 모세언약의 틀에서 벗어나 있는 것을 말하고 곧 희생정신으로부터 이탈된 상태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번제란 말씀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와 헌신을 의미하고 화목제란 그렇게 주어진 복을 다같이 누리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정신이 번제와 화목제에 담겨있다. 번제는 레위기에 제사법에 제일 먼저 등장하게 되고 그 다음이 화목제이고 그 다음이 속죄제인데 이 번제 제물의 경과는 완전 태워짐으로 귀착된다. 하나도 남김없이 다 태워지는 것이다.(1:13) 이러한 제물이 희생하는 태도는 출애굽 때의 어린양의 희생과 유사한데 그것은 같은 번제의 일종인 소제에서 보다 분명해진다.


즉 희생의 제물은 누룩이 들어있지 않는 고난의 떡으로서(16:3) 또는 가루로서 바쳐짐으로 희생의 뜻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다. 말씀에 대한 헌신의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를 위해 애매히 희생을 한 어린양의 운명 안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파악했다는 말이 된다. 먹고 마시고 생존하기 위한 음식을 거절하고 하나님이 제공한 생명에 참여하기 위한 음식을 만든다는 것 자체가 진정한 헌신이자 고난에 동참하는 일이다. 이러한 헌신 뒤에는 진정한 화목이 하나님과 성립된다. 화목은 하나님이 기쁨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번제의 제사에서 그것이 가능한데 번제는 하나님한테 [향기로운 냄새]가 되기 때문이다. 그 향기로운 제물 위에서 겹쳐서 화목제로 드려질 때 일부 바쳐진 제물 이외에 다른 고기들은 정한 장소에서 제물 제공자와 제사장과 남녀노소 할것없이 온 식구가 한데 둘러앉아 하나님의 기쁨에 동참된다. 모두는 하나님의 이름의 낮아지심과 대속의 정신에 대하여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속죄제와 속건제는 이런 진정한 번제와 화목제를 가로막는 요소는 제거하여 다시 화목을 되찾기 위한 제사이다. 속죄제의 특징은 제물의 전 부분이 최종적으로 진 밖에서 태워진다는 것이다 (제단에서 태워진 기름도 결국은 재를 진 밖으로 옮겨서 다른 고기부분과 함께 다시 태워져서 버려진다 레 44:12) 이것은 하나님의 죄에 대한 증오와 더불어서 비본래적 언약요소는(속죄제) 결국에는 제외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속건제는 속죄제와 동일하게 드려지되 다만 20%의 보상을 제사장과 실 피해자에게 갚아야 비로소 제사가 끝나는 제사이다. 제사의 종결이 원상복귀 정도가 아니라 손해 입힌자의 성의와 정성이 번제와 화목제를 가능케 하는 요소로서 제구실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특히 속죄제와 속건제는 고의든 고의가 아니든 반드시 자신의 죄과를 인정하고 들어가야 제사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된다. 자기 잘못을 충분히 진심으로 인정하지 않고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모독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의 제사제도는 결코 주술적이나 마법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다. 제사장이 대신 희생한다는 차원이기에 그 희생에 동참이 되어야지 희생의 구경꾼이나 그 희생을 이용하려 들다가는 저주가 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레위기에 있어 제사법은 아론이 모세에게 위임받은 희생의 터전에 이스라엘 백성을 함께 참여시키는 장치이다.


4. 제사장직 임직에 관한 성결법과 그 확대

성결법이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법칙을 두고 말한다. 이것을 좀더 세분화시키면 [하나님이 거룩하니 하나님이 선택하여 기름부은 자도 거룩해야 하고 그 제사장을 본받아 너희도 거룩하라]는 내용으로 나열할 수 있다. 하나님이 백성들 중에서 한명을 선발했을 때는 단순히 제사일을 하면서 기능적 면에서 기술을 발휘해보라고 선발한 것이 아니다. 성막제조 기술자인 브살렐과 오홀리압의 차원이 아닌 것이다.(31:11-6)

하나님께서 제사장에게 친히 그의 몸에 맞는 옷을 따로 만드시는 것은 거룩을 인격화시켜 백성들 가운데 세워놓으시려는 시도이시다. 거룩이 한 산 존재의 형태로 이스라엘과 더불어 생활을 하게 된다. 그가 먹을 음식이 그들 속에 있으며 그와 결혼할 대상도 그들 가운데 있다. 어디를 가든지 어떤 행동을 하든지 그는 거룩의 빛을 주위에 비추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는 그 자체로서 거룩이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분과의 끊임없는 선이 연결되어져야 한다. 제사장과 항상 연결이 닿는 분은 애굽의 종노릇하던 이스라엘을 구출해 내신 그 여호와라는 하나님이시다. 그렇다고 한다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성결법은 [거룩으로 애굽을 치신 하나님이 애굽에서 건져낸 너희들을 철저히 애굽방식에서 격리하겠다]는 의도로 받아드려져야 한다.(11:45, 18:3-4, 19:36) 문화적인 차이는 곧 애굽과 결별하라는 선언에 동원되어진 문화이어야 한다. 음식물에 관한 정결법으로 예를 들면 분리를 나타내는 [굽이 갈라진 가축들]이 정결한 것이다. 또는 두번생산을 의미하는 되새김하는 가축도 먹을 수 있는 거룩한 것이다.(이런 조건들은 필요조건이 아니라 필요충분조건이다)


또 생명에로의 귀환을 뜻하기 위해 죽음과 주검(시체)에 관련된 것은 철저히 부정한 것으로 본다. 뿐만 아니라 하늘을 사는 새들 가운데서도 땅 짐승에 준하는 식으로 사는 새들은 부정하고 철저히 땅에 붙어 기어다니는 곤충과 동물들은 단호히 거부된다. 반면 땅을 차고 하늘로 도약하는 시늉으로 살아가는 메뚜기 종류는 거룩하다. 물속에서도 땅의 사는 형태와 유사하게 지느러미나 비늘이 없는 것은 먹을 수 없다. 이처럼 땅 그 자체에 대하여 뭔가 부정과 부패와 저주의 조짐이 있음을 암시해준다. 인간인고로 땅에 거하여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이스라엘 민족이지만 하지만 그 땅의 저주와 부패에 매여 살아가서는 거룩의 이미지가 손상되는 것이다. 땅의 부정과 격리되어 있으면서도 땅위를 지배해야될 사명이 그들에게 부여되어 있다. 이것이 거룩한 제사장 나라의 특징이다(19:6) 특별히 이 분리작업(거룩한 작업)에서 돋보이는 것은 새생명에 대한 집념이다. 새생명은 기존의 자연출산부터 통제시키고 성결시키는 작업을 선행케 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생명은 결코 세속적인 곳에서는 주어지지 않고 모세언약 속에서 주어짐을 나타낸다. 죽음과 될 수 있는 데로 멀어져야 하고 죽음의 흔적인 병과 나약함과 손댈 수도 없는 난치병들은 이스라엘 내부에서는 지워져야 한다. 특히 제사장 가문에서는 보다 철저해야 한다. 아예 혼인부터 정결한 처녀와 결합되어야 하고 신체적인 불균형이나 흠집을 보이는 자는 제사장이 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를 보이기 때문이다.(21) 바로 이렇듯 생명의 생기 발랄함을 보여주는 제사장들만이 저주의병 이라고 할 수 있는 문둥병이나 혈류병자를 상대하여 거룩에로의 진행 상태를 점검할 수 있다.


이처럼 성결문화는 이스라엘의 거룩에의 접근을 표상하는 방편으로 등장한다.


5. 제사법과 성결법의 결합

레위기 10장을 보면 제사장의 과실과 거기에 치러진 응분의 대가가 나온다. 냉혹한 이 대가는 제사장이 이스라엘의 거룩화 작업에 있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지대한가를 확실하게 보여준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지시하지 않는 불을 향로에 담아 향을 태우다가 갑작스러운 화염에 의해 즉사하고 만다. 제사장의 역할을 무엇인가 하나님의 긍휼을 백성에게 정확하게 전달하는데 있다. 그런데 제사장 자신이 긍휼을 전하는 식이 되어서는 안되고 하나님의 긍휼이 제사장으로 하여금 백성들에게 다가서도록 되어야 한다. 제사장이 긍휼을 제조하는 것이 아니라 긍휼안에 제사장이 놓여져야 한다. 나답과 아비후는 자기들이 하나님의 긍휼을 제조하려고 했었다. 제단의 불로서 태워져야 하는 향은 향 그 자체의 향기로서 하나님에게 상달되는 것이 아니다. 제물의 고난과 순교의 위에서 피어나야 한다.(요한계시록 8:11-5, 레위기 2:2, 16:12, 민수기 16:46)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은 대속한 자의 희생을 담보로 하고 그것을 새로운 지배원칙의 내용으로 결정했기에 제공되는 것이다. 따라서 긍휼과 자비 안에는 반드시 누군가 희생자가 들어있음이 전제된다. 물론 거룩한 자의 죽음이다. 제사장의 과실은 제사장 개인의 죽음으로 책임추궁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노여움이 온 회중에 퍼진다.(10:6) 모세가 보기에 이번 노여움은 제사장 집안의 문제점 때문에 발생했기에 여기에 대하여 응분의 긴급조9치를 취한다. 그 응분의 조치란 제사장이 범죄했을 때 주어진 규정에 따라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첫째 장례절차를 나머지 제사장들이 관여하지 못한다. 이는 레위기 21:10-11에 의하면 제사장은 어떤 장례식에도 참석해서는 인도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백성들로 하여금 해야하며 주어진 하나님의 진노에 대하여 백성들 입장에서 속죄제와 화목제를 드려야 한다. 그런데 아론의 생각은 모세와 달랐다. 자기 아들은 제사장으로서 죽었기 때문에 제사장 속죄제로 간주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 속죄염소는 아론이 먹지 않고 그냥 전부를 진밖에서 태워버린것이다(8:17 일반인들의 속죄제물은 제사장이 먹게 되어있다. 6:17-23) 여기에 대해 모세가 아론을 나무랐다. 그러나 아론은 모세에게 반박한다. 죽은 아들이나 여기 살아 있는 제사장이나 다같이 공동으로 책임지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2는 바가 아닐까 한다. 이 답변에 모세도 같이 동의하고 있다.


결국 여기서 말해주고자 하는 뜻은 인간 제사장의 불완전성이다. 그러나 인간 제사장의 불완전성임에도 불구하고 긍휼이 전달될 수 있는 것은 죄용서가 하나님의 고유권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권리가 인간 제사장의 실수와 과오로 막힐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과오에 대해서는 전 이스라엘이 공동으로 책임져야 될 것이다. 여기에 성결법과 제사법 결합의 진정한 의의가 담겨 있다. 성결법을 위배하고 자기의 과오를 인정하는 자에게 제사장 제사가 기다리고 있다. 결코 제사장이 그렇게 해 주어야만 죄용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이 제사장을 대동하고 회개하는 자에게 긍휼을 베풀기 위해 그들을 찾아오신 것이다. 자기희생을 또 다시 제공하면서까지! 긍휼을 원하는 자에게 언제든지 하나님은 개방되어 있는 것이다.


제사장을 죽여가면서까지! 새생명을 주고자하는 하나님의 열의는 해산한 여인이나 문둥병환자나 유출병환자나 가릴것 없이 찾아가서 자기희생을 대가로(속죄제 혹은 속건제)부정스러운 그들을 거룩에로 이끄셔서 향기로운 냄새로 여기신다.(번제, 2위기 15:15, 30) 이러한 취지가 온전히 드러나는 것은 1년에 710일 대속죄일 아론 대제사장 자신이 온 민족의 희생자가 되어 자신을 위한 제물의 피를 제단에 바르고 난 뒤 속죄의 염소(아사셀 염소)를 두마리 잡아 하나는 잡고 다른 한 마리는 멀리 광야로 해방시키는 그 의식을 행할 때다. 이때 희생의 위력과 모세 언약의 자비로움이 극대화된다. 백성들의 죄가 날아가 버리는 것이다.(16:33) 이것이 바로 진정한 안식의 내용이다. 이 날의 행사 중심이 되어 파생되는 모든 성결을 위한 제사법은 대제사장의 희생을 근거하여 효력을 발생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고유권한은 대제사장의 희생으로 그 책임하에 대제사장의 권한으로 이양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와중에서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을 잊어서는 아니된다.(16:1-2) 아론의 두아들에게 죽음을 야기시킨 그 무서운 속죄소도(지성소도) 아론의 희생의 피가 감당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은혜의 폭은 더욱더 크게 적용되게 된 것이다. 단 백성들로 제사장을 본받아 정결한 제물로서 제의에 참여할 때 한한다(22)

이제 이스라엘은 진정 제사장 나라로서 제사장 중심체제로 들어설 모든 준비는 다 갖추어졌다. 모든 월력은 이제 유월절에서 시작하여 대속죄일을 지나 초막절에 마무리된다. 이와같이 애굽에서 이스라엘이 그들과 함께 멸절당하지 않고 건져냄을 이루어낸 그 하나님의 희생이 1년 내내 이스라엘을 덮고 있는 것이다. 그 가운데서 항상 제단의 불은 꺼지지 말아야 한다. 제사장이 나라를 유지시켜야 한다(24:1-9) 무엇을 유지시키나 오직 거룩을 지속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제 그 거룩한 정신은 이스라엘의 실생활 속에서 당연히 확산되어야 한다. 철저하게 애굽식으로 살아서는 안된다! 십계명을 따라 그것을 생활에 그대로 적용하고 전에 애굽에서 배웠던 더러운 각종 풍습들은 단호히 버려야 한다. 가차없는 사형제도가 엄격히 시행되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는 거룩을 표방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항상 가난한 자는 주위에 있으며 그들은 바로 약자로서 출애굽정신을 실천에 옮길 좋은 기회를 제공하는 자들이다. 누군가 하나님의 자비를 바로 이해하는 자들이 반드시 돌봐야 한다. 자투리 땅의 열매와 안식년의 결실은 그들의 소유요 그들의 권리이다. 2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 이제 외9국인을 상대로 제대로 자비를 베풀 차례가 되었다. 옛날 애굽나라가 그들에게 행한대로 행하면 결코 그것은 거룩이 아니다. 이제는 반대로 해야한다. 그들도 과거 나그네였던 경험을 갖고 있고 하나님의 희생이 개재되어 오늘날의 자유민이 되지 않았던가 그 희생이 이제는 이방인에게 베풀 때가 온 것이다. 이방인을 향한 거룩한 제사장 나라답게 말이다.


그래서 이 나라에 들어온 자는 모두 다 하나님의 해방을 맛보게 하자! 50년마다 돈없이 몸바친 노예들을 제집으로 돌려보내고 그리운 가족들을 다시 만나게 해주자. 결코 하나님이 주신 그들의 몫을 인간이 뺏어서는 안된다. 더 더구나 제단제사가 백성들의 무관심으로 운영이 중단되어서는 안된다. 이스라엘은 어느 누구나 날 때부터 제단운영의 책임을 지게 해야한다(27:6)


자 이렇게 완전한 제사장 나라, 거룩한 나라, 해방의 나라가 될 때 아브라함의 언약에 따라 누구든지 이 나라를 저주하는 저주를 받고 누구든지 이 나라를 축복하는 자는 축복을 받게 된다. 만약에 이스라엘 자체가 이 모세언약을 위반하면 약속의 땅이 약속위반임을 내세워 이 나라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다시 옛날 하나님의 자비가 없고 희생도 없던 저주의 시절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출애굽기 19:5이미 맺어진 계약이기 때문이다.[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언약을 지키면]


결 론

아브라함언약을 가족단위에서 이제는 국가적 언약단위로 성숙시켜 이 세상에 등장하도록 하시는데 하나님은 조금도 주저함이 없다. 모세언약은 결코 아브라함의 언약과 충돌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의의를 국가와 국가와의 전쟁에서 확연히 부각시키고 있다. 그 전쟁속에 개재된 것은 무엇의 희생이었다. 그 희생의 실체를 찾기 위해서 모세언약은 인간의 악함과 완고함과 과오와 무능과 무지의 환란을 꺽여져야만 하는 것이다. 그 와중에서 보여지는 것이 레위기이다.


부과된 성막계시인 레위기는 인간의 연약함에도 물러서지 않고 한층 더 압박해 들어옴과 동시에 그것을 또한 감당하고도 남음이 있는 대가들을 준비해 놓고 있다. 그런 가운데서 점차 그 희생의 실체가 현실로 드러나는데 물론 신약 때가 아니라고 최종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레위기 수준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중보자적 사명을 감당하는 가운데의 희생이라는 모세언약의 意義가 노출되었다

어린양이라는 표상이 점차 인격에로의 전이가 되는 과정을 모세언약을 통해 비쳐지게 하도록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바로 그 희생자의 순교와 거룩이 전 민족의 거룩으로 확산시켜 하나님이 원래 의도한바 거룩한 언약나라가 이루어진다. 그것은 오직 언약 안에서 달성되지 언약 이외의 방법으로 안되게 되어있다. 이 나라가 바로 아브라함이 고대한 복의 원천이 되는 나라이다.

모세언약이 조건부 언약으로만 대부분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게 아니다! 조건이란 인간의 공적으로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언약 특유의 장치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자비는 그 조건 때문에 가치를 더하게 되어 있다. 하나님의 희생은 인간의 허물을 능가하는 힘으로 제공되어 언약의 나라는 반드시 이 지상에서 사멸되지 않고 번성한다. 셀 수도 없이 많이! 이점을 우리는 레위기에서 또 한번 확인하는 기쁨을 누렸다. 결코 인간 위주의 구속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위주의 구속사인데 그 하나님의 목적은 자신의 형상을 지상에 새기는 것이다. 그 이외의 것은 뽑아 버릴 것이다(마태복음 15:13)

여기에 동의한다면 거룩을 기어이 달성하는 그 하나님의 열의 밑에 하나님의 자기희생이 깔려 있음도 발견하리라 여겨진다. 그 희생을 발견한 자가 바로 모세언약을 바로 이해한 자이고 그 약속대로 거룩한 백성, 이스라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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