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이 오셨네 (요 14:16-20)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올해 표어가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 “성령이 오셨네”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성령이 오셨네. 제목이 프랭크 보톰(Bottom Frank, 1823)이 작사한 찬송가 185장을 연상시키는 제목입니다. “이 기쁜 소식을 온 세상 전하세 큰 환난 고통을 당하는 자에게 주 믿는 성도들 다 전할 소식은 성령이 오셨네 성령이 오셨네” 그렇습니다. 성령께서 오셨습니다. 성령이 오셨다는 것은 우리가 믿어야 할 놀라운 복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에 대해서 혼란스러워 하는 이유는 성령 받는 것과 충만 받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예수 믿음으로 받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에서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 믿을 때(행19:2) 성령 받았느냐고 물었습니다. 엡1:13에도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갈3:2에도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했고, 5절에도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강조합니다.
이 기초를 잘 닦아야 합니다. 예수 안의 성령이지 예수 따로 성령 따로가 아닙니다. 이처럼 예수 믿는 성도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예수를 영접할 때 예수 안에 계신 성령을 함께 받았습니다. 예수의 영은 받았는데 성령은 못 받았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성령 충만은 그 후의 일입니다. 고넬료처럼 하나님 경외하고 늘 사랑하면 더욱 성령으로 충만함을 입고 능력도 은사도 나타납니다.
성령이 오셨음을 믿는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1. 임재의식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임재의식이란 성령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입니다. 16절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어디 계십니까? 우리에게 계십니다. 자기를 가리키세요. 내 안에 계십니다. 안타까운 것은 예수 믿으면서도 성령 받지 못한 줄 알고 나는 구원 받지도 못하고 성령의 인침도 받지 못했고 이대로 가면 지옥 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방언을 성령세례로 보는 사람들은 더 심각합니다. 그런 생각 버리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는 사건이 보통 사건이 아닙니다. 요6:47-48에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하셨고, 54절에도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하셨습니다. 이처럼 조건이 있다면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는 바른 진리에 서야 합니다.
성령님을 “진리의 영이라” 하신 것도 바른 진리가 아니면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하셨습니다. 하나님만 부른다고 예수님만 부른다고 받는 것 아닙니다. 다른 종교도 인정하는 WCC 다원주의로는 성령이 없습니다. 세상종교나 영 그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예수 믿으면서도 잘못된 신앙을 가지면 사탄이 틈타는데 세상의 영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유일하신 나의 생명의 구주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요일4:15에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했습니다. 고전6:19-20에도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성령의 전이니 성령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의식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2. 기쁨으로 예배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고독하십니까? 외롭습니까? 18절에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성령님만 오시는 것이 아니라 그 성령 안에서 예수님이 오십니다. 성령의 오심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일체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사건입니다.
요14:20에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하셨고, 21절에서는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계명은 믿음과 사랑의 계명입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예수님이 나타나십니다.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제자들을 고아에 비유하신 것은 주님이 오시지 않는다면 그만큼 외롭고 비참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이제 오셨으니 고독하지 말고 기뻐하며 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한 사도의 일화입니다. 그 사도는 길을 다닐 때나 집에 있을 때나 무엇을 하더라도 마치 살얼음판을 걸어가듯 조용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했습니다. 그것을 본 신자들이 "사도님 답답하지 않으십니까? 그렇게 조심스럽게 행동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러자 사도는 "나는 하나님과 성령을 모신 몸일세. 내 몸이 곧 성전이란 말이네. 그러니 어떻게 조심하지 않을 수 있으며 깨끗하게 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답했습니다.
이처럼 성령이 함께 하신다는 임재의식을 가지고 기쁘게 살고 거룩하게 살고 경외하며 살고 기도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부흥사 베니힌 목사는 '성령님 안녕하세요.'라는 책을 썼습니다. 체험과 표적이 있든지 없든지 함께 하심을 믿고 감사하고 찬송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성령체험의 길입니다. 이 때 우리는 더 이상 고아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3. 늘 대화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성령은 보혜사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16절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보혜사란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이며 '곁에서 도우는 자'라는 뜻입니다. 스승으로서의 그리고 든든한 보호자로서 보혜사이십니다. 예수님이 보혜사셨는데 이제는 성령께서 그 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요16:13에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셨고, 딤후1:7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 이라 하셨고, 갈5:22-23에서는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가정에 탈옥한 무장강도가 침입하였습니다. 부부가 인질로 잡혔습니다. 남편은 무서워 떨고 있는데 아내는 침착하게 손님 대하듯이 “서 있지만 말고 앉으세요, 맛있는 아침식사 준비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요”하고 그를 안심시켰습니다. 그 행동이 너무나 태연하였습니다. 강도가 생각하니까 너무 이상하였습니다. 그래서 소리 지르며 “너는 내가 무섭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그러자 부인은 “나는 예수 믿어요. 나는 당신이 죽이면 천국에 가니 무서울 것 없어요. 당신도 나의 이 마음을 가질 수 있어요.” 하고 태연하게 대답하며 새벽 3시에 침입한 강도를 아침 10시까지 차근차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마침내 강도가 자수했습니다. 자살로 끝나지 않고 자수하게 했던 그 침착함과 평안함 성령이 아니고 누가 주셨겠습니까?
성령님은 보혜사이시기 때문에 늘 기도로 대화하시기 바랍니다. 잠3:6에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했습니다. 사30:20-22에는 “네 눈이 네 스승을 볼 것이며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라 했습니다.
무슨 기도를 해야 할지 모르겠으면 “성령님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르겠어요.”라고 말씀해 보세요. 롬8:26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느니라” 하셨습니다. 성경을 볼 때도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 때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시고 나의 말씀으로 다가오게 해 주십니다.
4. 항상 긍정적인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런 믿음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빌4:13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했던 것도 나는 할 수 없어도 성령께서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하면 죄도 절망도 환경도 이기게 하시고 불가능한 것도 가능하게 하십니다. 원수도 사랑하게 하시고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생깁니다.
롬8:3-4에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셨습니다.
긍정적인 믿음은 요즘 유행하는 긍정적인 사고방식과는 다릅니다. 긍정적인 사고방식은 하나님이 없이도 내가 할 수 있다는 자기 신념에서 나온 것이지만 긍정적인 믿음은 하나님이 도우시면 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나의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고 한 나폴레옹의 말은 육신에서 나온 오만이지 믿음이 아닙니다.
이걸 벧후2:10에서는 “자긍”이요 육체를 따라 행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이란 믿으려고 노력하는 면도 있지만 하나님이 주셔야 믿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믿어지지 않습니다. 믿으려고 해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믿음 주시면 산이라도 옮길 믿음이 생겨납니다. 그러므로 그 믿음 안에서 항상 긍정적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유대 땅에 찾아오셨지만 자기 백성들이 무관심하고 배척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와 함께 하신 성령님에 대해서 모르거나 무관심한다면 그는 주님이 주시는 그 구원의 풍성함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믿는 자에게 성령이 임하셨다는 이 놀라운 사실 앞에서 매사에 성령이 함께 하심을 믿고 하나님께 경배하며 사랑하고 대화하고 성령님과 함께 동거 동행 동역하므로 온전한 은혜와 승리의 풍성함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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