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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기독교강요 저술 배경과 목적

에반젤(복음) 2021. 10. 17. 23:47
기독교강요 저술 배경과 목적




1.들어가면서 
  칼빈주의 전체는 '기독교 강요' 속에 들어있다. 이 책은 칼빈이 일생동안 개정 혹은 수정하여 풍부하게 하고, 그에 의해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진 저술이다. 그 외의 다른 모든 저서들, 즉 주석들, 논쟁서들, 교리와 도덕에 관한 소논문들은 적을 방어하기 위한 핵심부의 전진 기지처럼 이 책과 연관을 맺고 있다. 이 책을 통하여 그는 종교개혁자로서의 생애에 있어서 자신의 사상 앞에 제시된 모든 문제들을 체계적으로 해설할 수 있었고, 스스로의 사상을 보다 면밀히 검토해 볼 수 있었다. 확실히 '강요'는 칼빈이 자신의 사상을 가장 충실히 해설한 요약서일 뿐만 아니라 '강요'의 결정판은 기독교 교리의 완전한 해설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칼빈주의 사상의 종합을 제시하고 있으며, 이 한 권만으로도 충분하다.




2. 기독교 강요의 연속 개정판들


  1) 1536년 초판
  기독교 강요 초판은 1536년 판으로 라틴어로 된 516페이지의 소책자였다. 이 책은 6장으로 구성되었는데 첫 부분의 네 가지 주제는 율법, 사도신경, 주기도문, 세례식과 성만찬에 대한 것이었으며 이러한 체제는 루터의 요리문답식 전통적인 구조였다. 제 5장에서 칼빈은 고해성사, 신품성사, 견신례, 종부성사와 혼인성사의 예식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 제 6장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자신의 견해와 국가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입장을 쓰고 있다.


  2) 1539년 제2판
  1539년에 나온 제2판 역시 라틴어로 출판되었다. 그것은 초판에 비해 열 한 장도 더 많이 추가한 3배나 많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인간에 대한 지식이 새로운 두장의 주제로서 쓰여지고 있으며 삼위일체론과 재세례파문제 유아세례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과 천년왕국설에 반박하는 요지들을 삽입하였다.


  부처의 저서들과 스트라스부르그의 개혁자(부처)와의 대화의 영향으로 칼빈은 자신의 '강요'속에 처음으로 예정과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체계화하여 새롭게 삽입하게 되었다. 이 1939년판은 초판보다 뚜렷이 개선되었다. 무엇보다 먼저 칼빈은 자신의 설명을 보다 논리적으로 체계화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이는 그의 신학적 소양이 더 풍부해졌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3) 1541년 프랑스어판
  '강요'의 프랑스어판은 1541년 칼빈이 제네바로 되돌아온 몇주 후, 출판업자 장 지라르(Jean Girard)에 의해서 출간되었다. 문학적인 가치로 생각한다면, 이 1541년판은 확실히 최고의 문서이다. 최초로 우아하고 매우 세련된 프랑스어로 된 독창적인 신학서적이 출간되었으며, 그 프랑스어 문체는 17세기까지 프랑스에서의 언어 표현 형식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는 루터의 독일어판 성경이나, 그가 모국어로 쓴 종교개혁적인 작품들에 비교될 정도로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으며 1542년 7월 1일 파리 의회는 라틴어판과 프랑스어판에 대해 이단서적으로 발매 금지령을 내렸다.


  4) 1543년 라틴어 개정판(3판)과 1545년 프랑스어 번역판
  1543년 칼빈은 '강요'의 라틴어 개정판(제3판)을 출간하였는데 1545년에 프랑스어로 번역되었다. 여기에는 새로운 네 개의 장이 늘어나서 총21장이 되었다. 여기에는 교회 조직에 대한 칼빈의 견해를 상세히 해설한 것이 들어있다.


  5) 1550년 개정(제4판)
  1550년의 개정판(제4판)은 1551년에 번역판이 출간되는데 이는 외형상 종전과는 달리 새로운 체제로 구성되었다. 성경과 그 권위, 성자들과 성상숭배에 대한 것, 마지막으로 인간 양심에 대한 독창적인 해설 첨가됨으로 이 책이 지속적으로 증보되었다.


  6) 1559년 제5판 최종판
  마침내 1559년 라틴어판(제5판. 최종판)과 1560년의 프랑스어 번역판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그의 전 생애에 있어서 최고의 정점에 위치하고 있다. 그는 극심한 병마에 시달리면서 다가오는 최후에 대한 불안과 함께, 이 책을 새롭고도 결정적인 단행본으로 4배 분량이 증가한 최종판을 완성하고 프랑스어로 완역하였다.


  1559년 최종판 '기독교 강요'의 네 권의 책은 다음과 같은 제목을 다루고 있다. 만물의 주권적 지배자이시며 창조주로서 그분의 이름들과 성품들 가운데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 처음에는 율법아래서 조상들에게 알려지시고, 그 후에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계시하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하신 구속자 하나님에 대한 지식,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속에 참여하는 방식과 그것으로부터 얻게 되는 열매, 혹은 후에 일어나게 될 일들에 대한 깨달음, 하나님께서 우리를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지키시기 위하여 사용하신 외적인 수단 혹은 방법 등이 그것이다. 교리적 해설은 새로운 측면에서 보면 사실상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부분은 제1권으로 구성되었는데 신론(삼위일체),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 성경의 계시와 인간(죄와 구원의 필요성에는 무관하게) 에 관한 내용으로 구성되어있다. 두 번째 부분은 나머지 세 권을 모두 합친 것으로 역사적인 계시와 구원의 계획을 다루고 있으며 이것은 다시 두 부분으로 세분된다.


  첫째, 옛 계명 아래에서의 구원의 역사에 대한 예비와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 속에서의 구원의 완성(제2권),
  둘째, 성령에 의한 구원의 권능과 적용, 성도의 마음속에서 성령의 긴밀한 작용과 미래의 삶 속에서의 그 완성(제 3권),
  셋째, 성령이 역사를 완성하고 올바른 최후로 인고하기 위하여 사용한 외적 수단들(제4권)으로 나뉘어져 있다. 여기에도 반대자들에 의한 논쟁의 여지와 결점들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550년에서 1560년 사이의 개정판은 기념비적인 저술로 남아있게 되었으나. 진정코 개혁주의 개신교의 신학대전이라 할 수 있다.




3. 기독교 강요의 원자료


  1) 칼빈 사상의 근원적 배경
  칼빈은 루터나 츠빙글리, 멜란히톤과 부처보다 한 세대 후의 사람이었으며, 그들의 저서와 업적을 참조하지 않고서는 그가 이룩한 일을 성취할 수 없었을 것이다. 루터의 사상의 원천에 문제가 있다면, 칼빈 사상의 근원에도 역시 문제가 제기될 수 있을 터이다. 혹자는 칼빈이 루터의 가장 충실한 제자였다고 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를 루터 사상의 변절자로 간주하였고, 그 밖의 사람들은 성 어거스틴이나 부처로부터 전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영향을 받았을 뿐이요 다른 종류의 영향을 배제시켜 버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칼빈이 성경 전체에 대해 정밀한 연구를 행했으며, 다른 어떤 종교개혁자보다도 구약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은 거듭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첫째로, 그가 자신의 교리의 근거를 오직 성경에만 두었으며, 모든 저술 작업중에서 저술을 가장 중시하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특히 예언서들과 사도 바울의 서신에 대한 그의 면밀한 독서와 그이 주석은 항상 자신의 교리적 입장에 대한 확신을 찾기 위하여 성 어거스틴을 읽고, 루터에 대해 연구하는 신학자로서 성경을 대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둘째로 그는 초대 교회 교부들의 많은 저서들을 주의깊게 탐독하였다. 그의 관용론(De Clementia)에 관한 주석이 성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City of God)으로부터 전수 받았고 요한 크리소스톰, 오리겐,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테미스티우스, 키케로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인용하였다. 초창기에 칼빈은 헬라 교부들 중에서도 성 크리소스톰을 특히 선호 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성어거스틴의 영향은 훨씬 크다고 볼 수 있다. 교리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는 성 어거스틴으로부터 차용하였다. 그러나 교부들이 성경의 정도(正道)에서 벗어 날 때에는 주저 없이 그들과 의견을 달리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또한 그는 고대의 공의회인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제1차 에베소, 칼케돈을 비롯한 이단자를 정죄하기위한 공의회를 기꺼히 받아들인다.


  2) 영향을 받은 신학자와 루터와의 관계
  그 외에도 칼빈은 몽테뉴, 성 안셀무스, 피터 롬바르드, 토마스 아퀴나스, 성 버나드, 둔스 스코투스, 오컴의 영향이 나타난다. 에라스무스나 뷔데의 영향이 나타나지만 루터의 영향은 너무 자명하여서 의심의 여지가 없다.


  루터와 칼빈과의 관계는 Lang에 의해 논증된 '친밀한 동료의식'을 통해 이해되어야 한다. 그는 '강요'의 초판에 나타난 칼빈의 사상은 거의 남부 독일의 루터파와 같다고 지적하였다. 뿐만 아니라 칼빈의 칭의와 죄인의 전적타락, 자범죄와 원죄, 유일한 구세주이시며 중보자인 그리스도, 성령을 통한 구원의 역사, 그리고 말씀과 성찬에 관한 근본적인 교리와 관련하여, 루터와 전적으로 일치된 견해를 나타내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신칭의와 믿음에 의한 부활에 대한 루터의 핵심적 교리는 다른 어떤 개혁파 이론가들보다 칼빈에 의해 더 충실하게 확립되었고 한층 강력하게 표현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칼빈이 루터의 영향을 받았다고 스스로 인정하지만 그는 너무 강한 개성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어떤 비판이나 유보도 없이 그를 루터파의 일원이라고 공언할 수는 없다. '베스트팔'에게 보내는 마지막 경고(Last Warning to Westphal)에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루터의 이러한 업적에 어떠한 오류가 발견된다 할지라도 그것을 덮어두기를 원한다. 진실로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훌륭한 재능에 경의와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덕을 위해서 악을 묵인하려는 것, 그것은 모든 善에 어긋나는 것이다"


  3) 루터와 대립
  1536년 이후 그는 성찬 문제에 있어서 루터와 대립되었다. 그후 정경론, 예정론, 교회론, 그리스도론,혹은 성찬등 모든 문제에 있어서 의견의 대립은 첨예화 되었다. 이는 교리상의 미묘한 견해차 이상으로 그들을 대립하게 만든 것은 각자 초기의 학문 수련과정의 차이, 그리고 종교적 감수성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


  4) 멜랑히톤과의 관계
  1536년부터 칼빈과 우정으로 유대를 맺게된 멜랑히톤도 칼빈에게 영향을 준 인물주의 하나이다. 1546년 제네바에서 출간한 그의 '신학총론'의 프랑스어 번역판의 서문을 칼빈이 썼다는 점이 알려져 있고 십계명과 믿음, 소망과 구제, 회개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한 해설은 멜란히톤의 유명한 교리들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성찬과 세례에 대한 내용과 그리스도론의 유사성이 이를 입증하여 준다. 멜란히톤의 아우그스부르그 신앙고백서(Augsburg Confession)에서 교리의 일치성을 나타내고 있으나 자유의지와 예정론에 있어서 그들은 심각한 대립을 나타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스스로를 여전히 루터와 멜란히톤의 동지로 생각하였으나 츠빙글리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츠빙글리는 '철학자들로부터 지나치게 오염되었음이 나타났고, 지나치게 불경스러우며, 지나치게 역설을 좋아했던것이다고 츠빙글리와 칼빈의 흥미있는 비교에 있어서 Von Soos는 쓰고 있다. 또 한사람 칼빈주의 신학의 형성에 있어서 부처의 역할은 매우 중요한 요소로 남아있다. 부처와의 개인적인 만남뿐만 아니라 부처의 주석의 영향은 기독교 강요 1539년판과 1541년판에서 매우 명백하게 나타난다. 선택 혹은 遺棄, 하나님의 소명과 칭의와 영광에 의한 예정의 역할에 관해서도 부처의 로마서 주석의 영향이 나타난다. 회개에 관한 칼빈 사상의 특별한 전환점 역시 부처로 인해서 영향을 입은 것으로 보인다.




4. 기독교 강요의 목적
  1536년판 '기독교 강요'의 서문 '왕께 드리는 헌사'(Epistle to the King)에서 그는 "저의 목적은 오직 기초 원리들을 가르쳐서, 하나님에 대한 선한 열정으로 충만한 사람들이 참된 경건으로 인도함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고 쓰고 있다. 아울러 그는 "폐하 앞에 신앙고백으로 제시하고~~ 이책으로부터 참된 교리를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에서 그의 기독교 강요의 목적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처음에 칼빈의 의도는 기독교 교리 전체를 다루는 일종의 요리문답적 동기에서 쓰여졌다고 볼 수 있다. 1536년의 초판은 새로 개종된 독자들에게 '몇 가지 원리'를 가르치기 위한 기본적인 교리 입문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틴어로 출판되어 소수의 지식층에게만 읽게 됨으로 제2판(1539년)에는 성경을 읽는데 대한 적절한 교리적 기초를 제시하려는 것으로 전환되었다.


  칼빈은 더 이상 종교개혁자들이나 단순한 호기심을 가진 일반군중을 염두에 두지 않았으며, 신학이론을 연구하는 학생들에게 자신의 교리를 전수하는데 뜻을 두었다. 칼빈은 1939년 라틴어판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나의 목적은 신학연구에 전념하려는 사람들을 가르치며 준비시킴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성경연구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하고, 성경 이해를 보다 향상시키며, 동요 없이 의롭고 올바른 길로 인도하려는 것이다.........이 책은 도움을 원하는 사람들의 지침서로서 일반적인 입문서이기 때문이다. 1541년 프랑스어 번역판의 주장에는 더욱 명백하게 표현되어 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그들이 목적해야하고 관심을 집중시켜야하는 최종 목표를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참으로 성경은 사람이 아무 것도 첨가할 것이 없는 완전한 교리를 간직하고 있으며, 그 속에다 우리 구세주께서 무한한 지혜의 보화들을 계시하였으나, 그것을 잘 습득하지 못한 사람은 인도와 도움을 얻을 수 없으며, 만약 여기저기 방황하지 않고 성경이 명한 목적을 지향하면서 올바른 길로 나아간다면 결국 찾게 될 진리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나 스스로 자신의 책을 과대평가하지 않기 위해서 이 책에 지나친 가치를 부여하거나 이것을 읽는 것이 얼마나 유익한 것인가를 감히 강조하지 않겠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만은 굳게 확신할 수 있는데, 즉 이 책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성경을 참되고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열쇠이며 출발점이 되어줄 것이라는 점이다"


  사실 칼빈에게 있어서, 성령은 사람들을 부르시고, 믿음을 얻게 만드시고, 그 사람들이 성경을 읽음으로 스스로 하나님의 계시에 젖도록 하신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에 그들을 안내하기 위한 지침서로서 '기독교 강요'를 쓴다고 밝히고 있다.
출처: 광주개혁교회(Gwangju Reformed Church) 원문보기 글쓴이: 이주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