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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권찰의역할

에반젤(복음) 2021. 8. 17. 11:33
권찰의역할

권찰의 직분은 교회에서 매우 애매하다. 교회의 행정과 권징을 관리하고 신령한 문제를 살펴 당회에 알리는 당회원도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제직회의 회원으로서 교회를 봉사하고 헌금을 수납하며 구제에 관한 일을 전담하는 집사도 아니고, 교역자를 도와서 궁핍한 자와 환난 당한 성도들을 심방하고 위로하며 제직회원이 되는 권사도 아니라, 그 어느 부서에도 속하지 않으나 이들이 하는 일들을 다하고 있는 직분이 권찰이기도 하다.

교회의 신령상 문제를 살펴서 당회와 교역자에게 알리는 면에 있어서는 장로의 사명을 다하고 있으며, 교회의 봉사와 구제에 전념할 때는 집사의 직분과도 같고, 교역자를 도와서 성도들의 가정을 심방하고 위로하는 일에 힘쓰므로 권사의 사명을 감당하는 직분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당회원도 제직회원도 아니다. 꼭 어느 부서에 속하느냐고 따진다면 특수한 직분으로 교역자를 돕는 교회의 직분임에는 틀림이 없다. 당회원의 기능을 일부분 감당해야 하는가 하면 일반 제직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하고 있다. 더욱이 교역자를 도와서 목회 부분에 힘쓴다는 의미에서 볼 때 교회의 그 어느 직분과도 비교할 수 없는 주요한 직분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의 헌법을 개정하여 권찰의 직분도 제직회의 일원이 되게 해아 한다고 사료된다.

본 장에서는 교회에서 권찰이 활동하는 면 그중에서도 교역자와의 관계와 구역장과의 관계 그리고 권찰들 간의 관계와 지역 사회에서의 권찰의 위치에 관하여 언급하고자 한다.

1. 권찰과 목회자와의 관계

신약에 나타나는 가장 아름다운 부부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였다. 아굴라는 소아시아 북부의 본토에서 태어났고(행 2:9 벧전1:1), 그의 아내 브리스길라는 교양이 높은 로마 명문 집안의 출신으로 추측한다. 그들은 로마에서 결혼하여 살았으나 글라우디오(행18:2) 황제 때에 유대인들의 소요 사건으로 추방되어 고린도에 와서 살게 되었고 이 때에 바울에게서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 이들 부부는 고린도에서 바울과 함께 교회를 섬기며 복음을 전하다가 다시 에배소를 건너가서(행18:18), 아굴라의 집에서 교회가 모였고(행18:26, 고전16:19), 그 후에 로마에까지(롬16:3) 바울을 따라가서 복음 사업에 협력한 것 같다. 이들 부부는 천막업을 하였고 안식일에는 바울을 도와서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다. 이들은 실로 좋은 평신도 생활의 모범이 되었고 복음을 전하는 바울 즉, 교역자와의 좋은 관계를 가졌다고 생각한다.

사도 바울이 로마의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 맨 끝 부분에서 문안을 할 때 예외 없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내외에 관한 문안을 잊지 않았다. 그는 이들 부부에 대하여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 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롬16:3-4)고 하였다. 바울을 자기 집에 함께 거하도록(행18:3)배려를 하였고, 심지어는 목숨을 바쳐 도와주었다. 참으로 훌륭한 일꾼들이었다. 이들 내외에 대한 성서의 여섯 번 기록 중에 세 번이 아내의 이름이 먼저 기록된 것으로 보아 아내 브리스길라의 활약이 더 컸지 않았나 생각한다.

권찰이 교회를 섬길 때에 목회자에 대한 바른 신앙의 자세는 아굴라 내외에게서 배우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권찰은 목사를 도와서 교인들을 살피고 심방하는 일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 목사가 미처 심방하지 못하는 가정을 권찰들이 살피고 돌아보며 구제해야 할 가정을 알아서 교역자에게 보고하며, 병든 자와 신앙이 약해지고 시험당한 교인들을 신속히 알고 보고하여, 교역자의 손길이 닿을 수 있도록 협력하여야 한다.

권찰은 철저히 교역자의 협조자다. 심방의 협조자로, 구제와 상담의 협조자로 그리고 그 보다 더욱 귀한 일은 기도로 도와야 한다. 아론과 훌이 모세의 손이 내려올 때 옆에서 받쳐 줌으로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케 한 것처럼 기도로 돕는 권찰이 되어야 한다.

목회자나 권찰은 교회의 공동 업무를 수행하는 청지기들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의 일을 맡은 동역자들 이라. 하나님 앞에서는 꼭 같은 사역자들이다. 그러므로 서로 협력하고 주님의 사업에 함께 참여 하며 하나님 나라 건설에 같은 부름을 받아 공동 목표를 지향하고 있다. 그러므로 공동의 책임 의식을 갖고 일해야 한다.

목회자는 양무리를 감독하는 목자(벧전5:2-4)의 사명을 받았으며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이며 사신(고후 5:19, 딤후4:5)이요, 그리스도의 종, 혹은 사자(빌1:1, 고전4:1, 고후5:20, 엡6:20)요, 목사는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교인들을 깨우치는 교사(딛 1:9, 딤후 1:11)로서 교회를 이끌어 가고 교인들을 지도한다. 그러므로 모든 권찰들은 목회자가 이와 같은 주님의 사명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도록 협력하고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그러므로 권찰은 목회자의 목회 방향과 지도를 받아 도와주고 동역해야 한다. 권찰은 목회자보다 앞장서서도 안 되며 앞장 설 수도 없다. 더욱이 목회자의 목회에 방해가 되지 않나 항상 조심해야 한다. 권찰은 목회자의 목회 방향을 좇아 구역을 돌아보며 교인들을 지도하고 복음을 전하며 교회의 사업에 동참하도록 힘써야 한다.

2. 권찰과 구역장과의 관계

한 구역을 담당한 구역장은 권찰의 협조가 필요하고, 권찰은 구역장의 동역자로서 불가 분리의 관계에 있다. 굳이 구역장의 임무와 권찰의 하는 일을 나누어서 말한다면 구역장은 구역의 전체적인 통솔과 함께 구역 예배 인도에 더 많은 힘을 쓰고, 권찰은 구역 교인들의 심방에 주력한다고 보아 틀림이 없다. 그렇다고 구역장이 심방을 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권찰이 구역 예배인도를 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구역장과 권찰은 상호 협력 관계를 철저히 이어갈 때 그 구역은 부흥하고 바람직하게 성장해 갈 것이다.

결코 교회의 모든 직분은 교권을 주장하거나 직분의 높고 낮음이 없다. 교회가 교권을 주장하고 난무할 때 교회의 그 빛을 잃게 되고 속화되어 가게 된다. 교회가 권위가 필요하나 그 권위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사랑에 기초를 두어야 하고 성도들을 이해시키고 설득함에 사용되어져야 한다. 구역장과 권찰의 관계 역시 사하의 관계가 아니라, 교회를 섬기고 복음을 전하며 성도들을 지도하는 데 있어서의 각각 다른 직무에 불과하다. 이 직분들은 각기 감사함으로 섬길 뿐이다. 그것은 바울의 감사의 간증대로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딤전 1:12)하는 자세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나를 택하여 주셨고 나를 충성되이 여겨 곧 충성되지 못한 자신을 충성된다고 인정하여 하나님의 교회에 성역을 맡겨 주셨다는 마음의 태도가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충성되다고 자처하는 자는 충성되지 않다고 하시고, 충성되지 못하다고 하는 자는 충성되다고 인정하시며(마25:21-23), 하나님의 일을 해야겠다고 자진할 때는 하나님의 사역을 맡겨주시지 않고 물리치시는가 하면, 나는 부족하여 할 수 없습니다고 겸손해 하는 자에게는 부르시어 귀한 직분을 맡기시고 가장 위대한 사역을 맡기시는데(출 3:-) 하나님의 역설적 은총을 보게 된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직분으로 알고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게”(딤전 4:15) 할 때 권찰의 사명을 다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자기의 직무를 전심 전력하여 실천할 때 협력관계가 원만히 이루어진다. 대개의 갈등은 자신의 일에는 소홀히 하고 다른 사람의 일을 넘겨다보거나 간섬함에서 파생된다.

자신의 일에 전력을 다하고 동역자와의 협조 관계가 원활함에 자연히 “진보”가 따르게 된다. 모든 구역과 권찰들의 일에는 진보가 따라야 하고 따르게 될 것이다.

가장 염려스러운 것은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는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23:13) 이러한 권찰이 되지 않아야 한다. 구원의 길에 방해물이 되어 자기도 구원받지 못하고 다른 사람도 구원받지 못하게 하는 권찰이나 구역장이 되지 않아야 한다.

구역장과 권찰의 적극적인 협조와 자신에게 맡겨주신 주님의 사명을 감사함으로 정력을 다할 때 그 구역은 놀랍게 부흥하며 성장하리라 믿는다.



3. 권찰과 교인들과의 관계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성령 안에서 성도의 깊은 교제를 가져 사회에서나 교회에서 덕을 끼쳤다.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에서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신자들은 가지라고 하셨다. 예수님과 신자는 한 몸인 것을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가지들인 신자들은 일체다. 이는 신비에 속하는 관계이다.

권찰과 일반 성도의 관계는 성령 안에서 사랑에 기초해야 한다. 성도의 관계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랑과 관계와 사랑의 공동체로서의 유지를 요구한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묘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리라”(행 2:46-47) 이는 초대교회의 생활이었다. 성도들의 관계는 순수했고 주의 사랑의 영으로 서로 위로하고 기쁨과 용기를 주었으며 신령한 교제를 통하여 교회는 날마다 성장해 갔다.

참으로 초대교회 교인들의 교제는 거룩한 교제였다.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배움에 동참하는 교제였고(행2:42) 떡을 함께 나누는 교제(행 2:42), 함게 기도하기를 힘쓰는 거룩한 영적인 교제(행2:42, 빌1:4), 함께 찬송부르는 교제(행2:47, 엡5:19), 헌금에 동참하는 교제(행2:45, 4:32,35), 복음 전파에 힘을 합하여 동역하는 교제(행14,42)였다. 성도들간의 교제, 권찰과 성도들 간의 교제는 거룩한 교제로서 초대교회의 교제를 본받아야 한다.

권찰과 성도들 간의 교회 생활의 관계에 있어서 몇 가지 특별히 유의해야 할 점들을 지적하고자 한다.

먼저 금전 관계에 있어서 특별히 유의해야 한다. 변리로 돈을 주고 받는 일은 금해야 한다. 성서는 이자를 받고 돈을 꾸어주는 일을 금했다(출22:25-26). 교회 안에서 금전 관계가 복잡하면 반드시 시험에 든다. 권찰들이 교인에게 돈을 변리로 주거나 받으면 돈도 잃고 교인도 잃게 된다.

다음으로 교회 안에서 교인들끼리 계를 하지 말아야 한다. 계를 하면 생활에 많은 편리를 도모하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그로 인해서 시험에 들게 된다. 때로는 이해관계로 마음이 상하게 되고 어떤 때는 파당을 조장하게도 되며 심지어는 예배에 방해가 되기도 한다. 사람은 다소의 유익이 있는 곳에는 욕심이 따르게 되고 그로 인해서 시험을 받아 신앙으로 맺어진 형제 사이가 금이 가고 신앙에서 멀어지게 된다.

권찰은 항상 이성 관계에 정결해야 한다. 권찰은 항상 두 분이 동행하는 것이 좋다. 그리하여 교인들에게나 사회인들에게 정숙한 생활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일단 이성 관계에 의심을 받게 되거나 이성 관계에 좋지 못한 소문을 퍼트리게 되면 진위에 관계없이 교회에 덕이 되지 못하고 전도의 문을 닫게 된다.

또한 권찰은 편파적인 행동을 삼가야 한다. 꼭 같은 형제요 자매인 것을 항상 강조하고 자신이 실천해야 한다.

지역적인 감정을 유발하는 말이나 행동을 삼가야 한다. 심방을 하면서 고향 사람은 더 반가워하고 더 반가워하고 어떤 다른 지방의 교인들에 대한 좋지 못한 편견적인 선입관을 갖고 말을 옮기거나 행동을 보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교회는 편당이 생기고 지역 감정으로 어떤 문제가 일어날 때 그것이 불씨가 되어서 크게 비화되는 경우가 있다.

옛 선조들의 양반 관념이나 씨족 문제, 학교의 동창생, 같은 사업을 하는 성도들끼리의 의도적인 모임이나, 특히 부유한 층의 교인들 같은 모임을 조직하거나 눈에 뜨일 정도로 그들과만 상대하고 어울리게 되면 그 계층에 섞이지 못하는 다른 부류의 계층 교인들과는 자연히 거리감 내지는 격한 감정으로 치닫게 되기 쉽다. 어떤 형태로의 관계이든 편파적이거나 편견은 권찰에게 있어서나 교인들 간에 있어서는 각별히 유의해야 할 문제라고 사료된다.

권찰은 모든 교인들과의 관계가 항상 원만하고 어느 교인들과도 같은 형제 의식을 갖고 대하며 심방하고 그리스도의 폭넓은 사랑으로 심방하고 지도해야 한다.

사도행전 6장에 보면 교회가 날로 부흥되어 감에 따라 헬라파에 속한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 구제하고 교회를 봉사하는 일이 많아 거기에 매이게 되니 히브리파 사람들을 원망하게 되었다는 기사가 있다. 이로 인해서 초대교회는 7집사를 선택하여 사도들의 지도하에 교회를 봉사하게 된다.

그것은 제자들의 수효가 점점 많아져서 구제사업이 확산되어 가고 피 구제자들 중에는 헬라계와 히브리계의 유대인의 구별이 드러나게 되니 교회는 오순절의 생활에서 넘어서 새로운 국면에 봉착하게 된다. 제자가 많아지고 그러므로 구제에만 매이게 되니 교회가 어지럽게 되었다. 그것은 성장하고 역사하는 교회의 한 과정이기도 하다. 더구나 물질이 있는 곳에 일어나기 쉬운 모습이다. 비록 구제를 위한 헌금이고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 구제 행위라고 할지라도 분쟁이 일어나고 그것도 성령이 충만했던 교회 안에서의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번져가게 되었다.

그것은 언어와 지역적인 관계가 분규의 불씨가 되었다. 본토를 떠나 당시에 통용되었던 헬라어 사용의 지역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과 히브리어를 사용하면서 본토에 살고 있었던 과부들 사이에서 그것도 하나님의 일을 더 많이 하려는 문제로 일어났다. 언어의 장벽과 지역적인 관계는 그들 사이에 간격을 지었고 급기야는 교회의 문제로 번져나가 이로 인해 하나님의 교회에 새로운 조직을 가져오게 하는 역사를 낳았었다. 이로 인해 초대교회는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경륜과 더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고 해도 그 당시의 분쟁은 교회 자체 내에서 일어났던 첫 번째의 시험이었고 문제였던 것은 사실이었다.

모든 권찰은 성도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언제나 사라오가 봉사의 줄로 이어가고 건전하고 깨끗한 생활이 될 때에 교회에 덕을 끼치고 권찰의 사명을 수행함에 있어서 어려움이 없으리라 믿는다.

4. 권찰과 지역 사회와의 관계

성도의 생활은 교회 안에서나 사회에서의 그것이 일치되어야 한다. 교회에서의 특히 예배 때의 경건이 생활에 연속되어야 한다. 사회에서는 빛과 소금의 생활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실천해야 한다.

권찰은 이웃과의 울타리가 낮아야 하며 언제나 상통하는 인간미 넘치는 관계가 유지되어야 한다.

사도행전 10장의 로마 군대의 백부장 고넬료의 기사는 성도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었다. 그는 이방인이었으나 개종하여 유대인 못지 않은 경건한 생활, 즉 기도와 구제에 힘썼고 온 집이 하나님을 믿으며 이웃에게 칭송을 받았고 유대인들에게 의인이란(행10:21) 이름으로 불리워졌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많이 구제하고 항상 기도하더니”(행 10:2). 신앙 생활의 중요한 요소들을 갖추었다. 경건한 생활, 하나님을 향한 규칙적인 기도 생활, 그리고 이웃을 형한 구제는 하나님께 상달되었고 사회에까지 널리 알려져서 유대인들이 로마의 군대 장교인 그를 칭찬해 줄 정도로 그의 생활이 빛이 되었다.

흔히 열심히 신앙을 지킨다고 하는 교인들 중에는 교회에서와는 달리 이웃 사람들과 사회에서 좋지 못한 인상을 주어서 그리스도의 빛을 가리우는 경우를 보고 듣게 된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권찰이 그 지역 사회에서 칭찬을 받고 이웃 사람들에게 경건한 생활로써 좋은 영향력을 미치게 될 때 말없는 사이에 전도가 될 것이다. 그러나 권찰의 생활이 빛이 못되어서 비난의 대상이 되고 지역 사회에서 소외 되었거나 담을 높이 쌓고 살아가게 되면 사회와의 유대가 부족하므로 전도의 기회를 얻지 못할 것이며, 만의 하나라도 비난을 받게 되고 지역 사회에서 좋지 않은 평을 받게 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게 될 것이다.

권찰은 지역 사회와 교회의 가교가 되고 불신자들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접촉접이 될 때에 그를 통해서 교회에 대한 바른 인식을 그 사회에 심어주게 되고 권찰로 통하여 그 지역 사회에 복음이 널리 전파될 것이다. 그러므로 권찰은 지역 사회에 살고 있는 작은 교회요 한 전도자와 등대가 되며 교회와의 가교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