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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기도하라 7 (마 6:9-13)

에반젤(복음) 2020. 5. 22. 00:23

이렇게 기도하라 7 (마 6:9-13)


이 시간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마지막 시간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의 송영 부분입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기도하면서 기도의 마무리가 중요합니다. 마지막 부분에서 확신 가지고 돌아가야 응답을 받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우리말 성경에는 이 부분이 괄호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고대 신약사본들 가운데는 이 부분이 빠져있는 사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록되어 있는 사본도 있기에 전통적으로 주기도문을 암송할 때는 이 부분도 암송합니다. 이걸 모르는 사람들은 헬라어 성경을 가지고 와서 대개가 어딧냐고 말합니다.


그런데 주기도문 마지막에 의문점이 하나 있지요? 우리가 주기도문할 때 한글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대개”라는 말을 삽입해서 하기 때문입니다. 대개가 뭘까요? 대충, 대략이라는 그런 뜻입니까? 여기 "대개"는 헬라어 "호티"를 번역한 말입니다. 그 단어는 "왜냐하면," "그 이유는"이라는 뜻을 가진 접속사입니다. 대개라는 단어에서 응답 받는 기도의 비밀을 봅니다.


응답 받는 기도는 어떤 것일까요?


1. 진리에 타당해야 합니다.


즉 “왜냐하면 그 이유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기도는 그동안 주기도문으로 구했던 그 내용의 타당성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구한 이유는 그런 뜻입니다.


즉 영광의 아버지시니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셔야 마땅하고, 온 우주가 다 아버지의 나라이니 이 땅에 당연히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져야 하고, 아버지께 모든 권세가 있으시니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과 죄 사함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심은 물론 그 무엇도 하실 수 있으시기에 이렇게 구했다는 그런 고백입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은 타당성 있는 기도입니다.


여기서 주는 기도의 교훈은 타당성 있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내 합리적 잣대의 타당성이 아니라 하나님 입장에서 타당성 기도입니다. 먼저는 아버지의 뜻이어야 하고, 불가능한 것일지라도 아버지께서 보실 때 타당하면 타당성이 있는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주님이시니 불가능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뜻입니다.


나라, 권세, 영광 이 세 가지는 타당성의 3요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권세와 영광을 위해서 구한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구할 수 있습니다. 터무니없이 성경에 어긋난 기도를 하면 잘못 구함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 영광 돌릴 목적만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 세 가지 중 한 가지도 갖추지 못했습니다. 주기도문은 하나님께서 받으실 가장 타당성 있는 기도입니다.


2. 주님의 공로여야 합니다.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즉 이제까지 구한 것은 아버지의 그 아름다운 사랑과 권세와 능력과 책임지심을 의지한 것이지 내 공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기도한 이유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기 때문”이라는 이 내용에 기도의 공로성이 명백히 나타납니다.


기도란 내 공로로 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께 한 것이 없으니 구할 명분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잘못입니다. 좋으신 아버지 의지해서 하는 것이고, 예수 이름 의지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요14:13-14에“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라 하셨습니다.


야곱이 에서로 변장하고 아버지에게 축복 받았습니다. “이삭이 만지며 가로되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창27:22) 하며 축복했습니다. 이처럼 아버지 사랑과 예수 공로 의지해서 하면 다 들어주시는 중요한 기도 응답의 원리입니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내가 구제하고 내가 헌금하고 내가 의로우니 들어달라고 자기 공로로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기도할 명분은 오직 아버지의 사랑과 예수님의 공로입니다.


3. 응답의 확신 가져야 합니다.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즉 “제가 이렇게 구한 이유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이 기도에서 기도의 확신을 느낍니다. 당연한 걸 정당한 방법으로 당연하게 구했으니 응답은 당연한 것입니다.


문제는 옳게 구했느냐 입니다. 옳게만 구했으면 응답은 100% 믿어도 됩니다. 요15:7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하셨습니다. 십년을 구해도 바르지 못한 기도는 응답이 없지만 바른 기도는 하루를 구해도 있습니다.


그리고 주기도문의 맨 끝 단어가 “아멘”입니다. 진실이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진실로 진실로"는 헬라어 "아멘 아멘"을 번역한 것입니다. 기도하고 진실로 그렇다고 확신해야 합니다.


그러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아멘"이라는 단어를 쓸 자격이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하는 기도가 아니고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기도였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기에 한 번 기도한 다음에는 다시 기도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맞는 말 같아도 틀린 말입니다. 기도하고 잊거나 기도한 걸 기억만 하고 있어서는 기도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처럼 늘 그 제목으로 아버지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시인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 기도하고 아멘의 도장을 찍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타당한 기도를 드리고, 내 공로가 아닌 아버지의 사랑과 예수 이름의 공로로 기도하고, 아멘의 확신으로 기도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아름다운 기도의 응답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agas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