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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와 칼빈의 교회론

에반젤(복음) 2020. 2. 23. 20:12



루터와 칼빈의 교회론

- 목 차 -

제 1 장 들어가는 말 ···································· 1

 

제 2 장 루터와 칼빈의 교회론

1. 루터의 교회론

1) 출발점 ········································ 2

2) 교회 표지 ··································· 2

3) 성도의 사귐으로서의 교회 ·········· 3

4)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 ···· 5

 

2. 칼빈의 교회론

1) 출발점 ········································ 6

2) 신도의 어머니로서의 교회 ·········· 6

3)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 ···· 7

4) 루터와 비교헤본 칼빈의 강조점 · 8

 

제 3 장 맺는말 ············································ 9

참고문헌 ····················································· 11

 

 

제 1 장. 들어가는 말

교회에 대한 고백은 사도 신조의 중요한 조항 중의 하나였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대한 고백이 있은 다음에 성도의 교제(communio sanctorum)라는 말로 고백되었다.1) 즉 그리스도의 교리를 적용하는 교리(구원론)는 자연스럽게 교회론으로 귀결된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복에 참여하려는 자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사역을 통하여 사람들을 자신에게 연합시키고 그들에게 참된 믿음을 주어서 그 교회를 자기의 몸 곧 성도의 무리(communio fidelium 또는 sanctorum)를 구성한다는 것이 개혁주의의 개념이다. 로마 카톨릭 신학에서는 교회론이 다른 어떤 교리보다도 앞선다. 그들에 의하면, 교회는 성경을 산출하는 도구이므로 성경보다도 앞선다고 말한다. 또한 교회는 모든 초자연적인 은사들을 수여해 주는 자라고 말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교회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최대의 강조점은 신자의 공동체로서의 무형교회가 아니고, 신자의 어머니(mater fidelium)로서의 유형교회에 있다. 종교 개혁은 이같은 로마 카톨릭교회의 교회론과 결별하면서 다시 한 번 영적 유기체로서의 교회에 주목하였다. 종교 개혁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역사와 별도로 교회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구속론과 성령론을 교회론보다 앞서 논의하는 것이 논리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2) 이와 같이 종교 개혁자들은 그리스도 중심으로 교회론을 이끌어 나갔던 것이다.

 

특별히 루터와 칼빈은 종교 개혁의 선두 주자로서 그들이 내세운 교회론이 지금 오늘날에 있어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애비스(Paul D.L.Avis)는 「종교 개혁자들의 신학에 있어서 교회」라는 저작에서 루터와 칼빈을 다음과 같이 대비시켰다. “루터는 일차적으로 그리고 열정적으로 복음의 순수성에 대해 관심을 가졌으며, 칼빈은 교회의 순수성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 루터의 생애의 모든 위기들은 복음을 중심으로 일어났으며, 칼빈의 모든 위기들은 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여기서 애비스가 잘 대비시킨 것처럼 칼빈의 노력이 순수한 교회를 확립하는 데 기울어진데 반해 루터의 노력은 순수한 복음을 확장하는 데 기울어져 있다. 그래서 교회에 대한 루터의 가르침은 때때로 모호하기도 하고, 그리고 시간의 경과에 따라 변화하기도 한 것처럼 보인다.3) 애비스의 이러한 견해처럼 루터와 칼빈 간에는 교회에 대한 여러 가지 교리에 대한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루터와 칼빈의 교회론에 대한 각자의 이론을 살펴본 후에 그들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고찰해보고자 한다.

 

 

제 2 장. 루터와 칼빈의 교회론.

1. 루터의 교회론.

1) 출발점.

루터교 신학에서 교회론(ecclesiology)은 언제나 그리스도론과 구원론이 다.4) 그리고 루터교는 적절한 의미로 교회를 정의하는 데 있어서 복음을 순수하게 가르치며 성례전을 올바로 집행하는 성도의 회중이라고 말하며, 교회의 참된 통일을 위해서는 복음의 가르침과 성례전의 집례에 관하여 일 치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가르친다.5) 다시 말하면 교회는 거룩한 사람들의 회중이며(congregatio sanctorum), 부름받은 사람들의 회중(congregatio vocatorum)이라고 루터교회는 주장한다.6)

 

E.Seeberg는 루터에게 있어서 교회라는 것은 사회학적 개념이 아니라 신학적 개념이라고 말했다. 즉 사람들의 모임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가 교회를 구성한다. 즉 교회라는 것은 사람들에 의한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그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요 하나님이 그 아들의 인카네이션을 통하여 이룩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이 그 자신을 숨기시는 동시에 또한 나타내신다는 사실에서 교회의 본연의 자태는 사람에게 숨겨져 있고 오직 신앙하는 자에게 그 본질이 드러나는 것임을 말한다고 할 것이다. 또한 루터의 교회론에 있어서 칭의 사상을 빼놓을 수 없다.

 

루터는 하나님 앞에 내놓을 수 있는 인간의 자기 의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과의 연합,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하는 것이다. 특별히 십자가의 복음에서 하나님은 인간과의 연합의 길 즉 하나님과 인간의 공동체 교회에의 길을 열어 주시는 것이다.

루터의 교회관은 이렇게 그의 칭의 사상에서 유래한다.7)

 

또 하나 루터에게 있어서의 교회 개념은 교회를 ‘우리를 낳은 어머니’의 개념으로 보는 것이다. 즉 우리는 세례에 의해서 교회에 소속하고(유세), 우리가 성장했을 때는 견신례를 받고 교회에 소속했다는 것을 새롭게 확인하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의 구성원이 되는 것을 개인의 결단에 맡기고 있는 열광주의자의 교회 이해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교회 이해이다. 교회를 창출하는 힘은 각 구성원에게 있고, 그들은 그들 자신의 합의를 통해서 하나의 교회, 또는 하나의 신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다.8)

 

2) 교회의 표지.

먼저 결론적인 루터 교회의 표지를 말하자면 그것은 설교와 성례전에 있다.

오늘날의 루터 교회에서 항상 아우구스부르크 신앙 고백 7장이 말한 이 두 표지를 회상한다. W.엘러트에 의하면 “말씀과 성례전 안에 기초됨이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교회의 영속질서이다. 이러한 교회의 기초야말로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법이며, 교회 안의 다른 모든 질서는 인간의 법이다.”

 

교회는 “말씀과 성례전”을 통해 구성되며, 그 회원들을 통해 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교회는 수직적 실체이기 때문에, 엘러트는 교회를 정의하기를 “성령의 활동이 개개인에게 이루어지는 장소”라고 했다.9) 루터교 신학에 있어서 모든 그리스도교 교리는 하나의 완전한 단위 곧 깨어져서 아니 될 “금반지”로 생각되며 또한 모든 크리스챤은 바르게 가르쳐진 복음을 받거나 그렇지 않으면 복음을 전혀 받지 않는 것이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례전이 올바로 집행되지 않는 다는 것은 성례전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다.

 

교회는 참된 의미에서 혹은 엄밀히 말하면 ‘경험적인 교회’ 혹은 ‘보이는 교회에서 찾을 수 있고 ‘넓은 의미로의 교회’에서 찾아진다.10)

 

좀 더 구체적으로 루터가 말하고 있는 교회의 표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루터는 「회의와 교회에 대하여」(on the councils and the churches)에서 교회의 표지에 관해 아래와 같이 말한다.

 

첫째, 그리스도의 거룩한 백성은 이것으로 알려진다.

즉 성 바울이 말하는 바와 같이 비록 꼭 같은 정도는 아니라 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다. 루터는 여기서 강단에서 설교자를 통하여 전해지는 복음이 곧 하나님의 올바른 교회의 외적인 표지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설교자 를 통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하게 믿어지고 고백될 필요성을 루터는 매우 강조하고 있다.

 

둘째로 루터는 교회의 표지로 올바르게 거행되는 세례의 성례전을 든다.

세례를 받음으로 성령을 받고 중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례는 하나님이 그를 위하여 세우신 것이요 그것은 그에게 주어진 것이다.

 

세째의 교회의 표지는 제단에서 거룩히 거행되는 성찬 예전이다.

루터는 성찬예전의 올바른 거행과 또 이를 받고 그대로 믿는 신앙의 필요성을 중 시하고 있다.

 

네번째의 교회의 표지로 믿는 자들이 서로의 잘못을 용서해줄 때 나타나는 사죄의 열쇠를 들었다.

특별히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준 사죄의 열쇠에 대하여 루터는 이것은 베드로 한 사람에게 준 것이 아니라 사도 전체에게 준 것으로 해석하고 또 사죄의 열쇠는 사도들에게만 국한한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가지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다섯 번 째 교회의 표지는 교역자들을 세워 필요한 임무를 맡기는데 있다.

 

여섯번째 교회의 표지는 신앙하는 자들의 기도와 감사와 찬미의 생활에 있다.

마지막 일곱번째 표지는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길을 걸어가며 핍박을 참고 견디는 데 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사탄과 죄악이 가득하고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려는 자들이 시험과 유혹에 빠질 위험성이 많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없이하려는 원수들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상 여려가지로 루터는 교회의 표지를 말하나 그 중에서도 말씀과 세례, 성찬의 중요성 특히 말씀이 모든 것에 앞서는 기본적인 표지임을 강조한다.11)

 

3) 성도의 사귐(communio sanctorum)으로서의 교회.

루터는 교회에 대해 이렇게 또한 정의한다. “내가 믿기로 땅위에 전 세계를 통해 단지 하나의 거룩한 공통적 기독교 교회가 존재한다고 믿는데, 그것은 성도들, 즉 땅위에 있는 경건하고 믿음있는 사람들의 회중 혹은 회집 이외 아무것도 아니며, 그것은 성령에 의해 모여지고 보존되고 지배받으며 성례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방편들에 의해 증가된다.” 이 정의에 나타난 것처럼 루터는 교회를 성도들의 회집이라고 보았다.12) 특별히 루터는 사도신조의 고백을 통하여 교회를 성도의 교제, 사귐으로서 말한다. 즉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이것은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이 지구상에 넓은 전 세계를 통털어 단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인 교회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나는 믿는다. 이 교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모아지고, 보존되고, 다스려지는 그리고 성례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매일 증가되는 회중, 혹은 성도들의 모임, 즉 지구상에 있는 경건한 믿는 사람들의 모임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13)

 

교회에 관한 이 사도신조의 조항에의 첨언으로서 그 조항을 이해하는 것에 가까운 사실은 다음과 같은 해석이다. 즉 santi(성도들)로 이루어진 communio, 즉 ‘성도의 공동체’, ‘오직 성도들만 있는 공동체’, 최상으로 ‘하나의 거룩한 공동체’, ‘하나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것이다. 다른 곳에서 communio는 루터에게 있어서 또한 참여의 의미가 있다.14) 루터는 특히 communio의 새로운 이해로서 그 속에 자신이 있다고 생각하였던 교제를 “하늘에서 땅으로 끌어내렸다” 즉 성도는 비로소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이 세상에, 공동체 어디에나 있는 것이다.15) 또 communio는 신앙인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헌신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그리고 이를 통하 여 또한 서로 한 몸이 되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말씀을 믿는 자는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에 ‘들러 붙은’것이다.16) 그리고 communio는 교회의 각 지체에 있어서 은사인 동시에 과업, 은총인 동시에 소명을 의미한다.17)

 

즉 이것은 전적으로 신앙에 대한 은사일 뿐만 아니라, 언제나 동시에 사랑을 위한 과업이다.18) 루터는

 

여기서 교제(communio)의 세 단계를 구분한다.

첫째는 “유한한 재산”의 헌신, 인간에 대한 신체적인 봉사,

두번째는 교리와 약속, 중보기도로 행하는 봉사,

마지막으로 최고의 것으로 형제의 악함을 담당하는 것, 은총을 받고 보호를 받은 사람들과 죄인과의 교제, “건강한 사람들”과 “병든자들”과의 교제를 말하는 것이다.19)

 

특별히 communio sanctorum으로서의 교회에 있어서 오직 믿음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교리는 루터의 교회론에 직접적 영향을 주었다. 이 교리를 단호하게 받아들임과 마찬가지로 교회를 본질적으로 의롭게 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 즉 congregatio fidelium으로 여기는 것은 당연하다.

 

의로운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구원을 얻게 되었으므로 교회는 “성도들의 모임,사귐”이란 말로 정의 내려진다.20)

 



4)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

루터는 로마교회와 달리 보이는 교회 보이지 않는 교회로 구별했다.

그렇다고 루터는 교회가 원시 사도시대로부터 계승된 하나의 교회를 부정한 것은 아니였다.21)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에게 작용되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성립되는 것처럼, 은총의 성언은 인간에게 파악될 수 있는 방법으로 행해져야 한다. 즉 다시말하면 보이지 않는 교회는 말씀과 예전을 관장해서 보이지 않는 교회의 권속을 만들어내는 보이는 교회를 요구한다. 그러므로 보이는 교회의 임무는 복음을 선포하고 예전을 관리하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보이는 교회라는 말과 보이지 않는 교회라는 말에 대하여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두 용어는 두 개의 다른 교회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통일된 교회의 두 가지 상이한 속성을 나 타내는 데 지나지 않는 것이다.22)

 

좀 더 구체적으로 루터의 견해를 통해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적 교회를 정의하고자 한다. 루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번째, 자연적이고 근본적이며 본질적인 참기독교계를 우리는 영적인 내적 기독교계라고 부른다.

 

그리고 인위적이며 표면적인 것을 유형적인 외적 기독교계라고 부른다. 그렇다고 양자를 분리시켜서는 안되며 사도들이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에 대해서 말했던 것과 같이, 나는 인간의 영혼에 대해서 생각할 때 그를 영적 인간이라 칭할 수 있으며 그의 몸에 대해서 생각할 때, 그를 유형적 인간이라고 칭할 수 있다.”

 

외형적 교회는 여러 곳에 존재하는데 그것은 “유형적이고 가시적”이다. 그러나 우리가 신조에 따라 믿는 교회는 “유형적이거나 가시적인 것이 아니다.” 그 교회는 “비록 거룩하고 신실한 사람이 누구인가는 당장 알 수 없지만, 신앙을 지닌 성도들의 공동체 또는 회중”이다.

 

이 내용을 볼 때 분명한 사실은, 참된 교회는 현상계를 초월한 어딘가에 존재하는 개념속의 교회가 아니라, 비록 우리 중의 누구라도 다른 사람들의 신앙에 대해서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교회의 범주를 정할 수는 없지만, 이 지상의 교회가 참된 교회이다.23) 물론 앞에서도 말했듯이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가 독립적으로 양존하는 것은 아니다.

 

이 양자를 결속시키는 것은 살아계신 말씀인 그리스도 자신이다. 이 말씀이 전파되는 곳에 서는 교회가 형성되어질 수 있지만 역시 불가시적이다.

 

왜냐하면 말씀은 반드시 신앙으로서 받아져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말씀은 가시적 교회 내에서 선포되기 때문에 신앙이 생기고 구원을 얻는 곳도 바로 이 교회 안에서이다. 따라서 우리는 반드시 이 가시적 교회에 소속되어 야만 한다.24)

 

 

2. 칼빈의 교회론.

1) 출발점.

칼빈이 그의 「기독교 강요」최종판에서 교회론에 할애한 분량은 전체의약 1/3 가량이나 된다. 이것은 그가 이 주제에 대하여 얼마나 많은 관심을 기울였는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오토 베버는 16세기 종교개혁자들 중에서 마르땡 뷔세르를 제외하고는 칼빈만큼 교회론에 관심을 둔 사람도 없다고 말하면서 칼빈에 있어서 교회론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25)

 

특별히 칼빈의 교회론은 주로 말씀과 교회의 관계에로 집중되고 있다.

그도 그럴것이 칼빈의 교회론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은 말씀이기 때문이다. 칼빈은 참 교회의 두 가지 표지로서 말씀과 성례전을 언급하였지만 성례전도 궁극적으로는 말씀에 의존하기 때문에 말씀은 교회론에 있어서 핵심적인 것이다. 또한 두 표지에 포함되지는 않지만 교회의 중요한 기능인 권징도 말씀에 그거해야 하는 것임을 고려한다면, 역시 말씀이 칼빈의 교회론에 있어서 관건이 아닐 수 없다.26)

 

이러한 것을 볼 때 칼빈의 교회론은 본질적으로는 루터의 교회론과 같다. 교회란, 신의 말이 설교되어지고, 성례전이 집행되는 장소이다. 단지 칼빈은 경험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를 보다 철저하게 구별한다. 루터에게는 불가시적 교회가 가시적 교회의 영적인 질에 지나지 않는 데 반해, 칼빈에게 있어서는 불가시적 교회란 역사의 모든 시대에서 선택받은 자의 단체이다. 따라서 불가시적 교회는 그 자체로서는 반드시 신의 말이 설교에 의존하지 않는다.27)

 

이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는 다음장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다. 특별히 칼빈은 교회론을 다루면서 루터와 같이 ‘성도의 교통’을 다루고 있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성도의 교통’이라는 구절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즉 이 구절의 의미는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는 무엇이든 서로 나눈다는 원칙하에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소집되었다는 것이다.28)

 

그리고 역시 기독교 강요에서 교회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첫째로, 교회는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존립하며,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와 같이 흔들리거나 파멸될 수 없다.

둘째, 교회는 그리스도의 영원 불변하심에 연결되어 있어서,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지체가 조각조각 찢기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자들이 자기에게서 멀어지는 것도 허락하시지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교회의 품속에 머물러 있는 동안은 진리가 항상 우리와 함께 거할것을 우리는 확신한다.29)

 

2) 신도의 어머니로서의 교회.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 제4권 1장에서 진정한 교회란 ‘모든 경건한 자의 어머니인 이 교회와 우리는 연합해 있어야 한다’30)라고 말하면서 또한 교회를 아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어머니’라는 칭호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31)

 

교회는 우리의 모체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복음전파를 풍성케 하시기 위해서 교회 내에 복음의 보화를 두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목사와 교사’를 세우셔서 그들의 입술을 통하여 그의 백성들을 가르치도록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권위를 부여하셨으며, 마침내 신앙의 거룩한 일치와 올바른 직분 수행에 도움이 되는 모근 것들을 아낌 없이 부여해 주셨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는 성례를 정하셨다. 성례를 경험한 우리는 그것이 신앙을 성장시키고 강화하는 데 매우 유익한 도움이 된다고 느낀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만이 우리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제도로써의 교회에 관한 칼빈의 언급들을 해석할 수 있다.32)

 

교회의 어머니 됨은 하나님의 아버지됨과 상응하여 교회가 우리를 교회의 자궁으로 잉태하고 우리를 낳아 양육하며 우리를 교회의 관심과 규율로 지키기를 우리가 죽을 육신을 벗고 천사 같이 될 때까지 해주지 않는다면 생명으로 들어가는 출입구는 아무 데도 없다.33) “신은 자기 백성을 한 순간에 완전케 하실 수 있으나 교회의 교육에 의해서만 성년에 이르게 되기를 원하신다.”

 

그리스도는 만약 우리가 죽음의 세상에 침몰해서는 안될 때 계속해서 우리를 부르시며 그의 말씀으로 인도해야 하며 그는 우리를 위하여 언제든지 자기 자신을 희생하신다. 칼빈은 이미 고대에 있었던 여러 가지 말로써 교회의 본질을 다음 몇 마디로 요약하고 있다. 즉 “교회는 우리의 어머니이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명명이 가능한 이유는 “생명에 이르는 문은 단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에 잉태되어 또 탄생하여 그의 젖을 먹고 자라며 우리가 죽은 육신을 벗고 천사처럼 되기 까지 그의 집에서 인도를 받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완성에 도달하기 전에는 이 교회에서 떠날 수가 없다. 또한 이 교회의 품을 떠나서는 죄의 용 서와 축복을 도저히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에 대한 봉사를 위하여 그리스도 자신에 의하여 정해져 있다. 또한 교회는 그리스도가 그 장소에서만 인간적이며 지상적인 가장 안에서 우리와 만나신다고 약속하시기 때문에 칼빈은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옛 귀절을 다시 인용한다.

 

이것은 현존하는 교회를 긍정하는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어서의 주의 뜻에 근거를 두고 하는 말이다.34)

 

3)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

칼빈에게 있어서 교회는 말씀과 예전을 중심으로 모여진 믿는 자들의 공동체임을 앞에서 확인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쯔빙글리와 마찬가지로 거룩한 ‘불가시적 교회’와 많은 위선자들을 내포하고 있는 ‘가시적 교회’를 구별하였다.

 

또한 주목되어야 할 것은 교회의 객관성에 관해서 칼빈은 루터와 전적으로 의견이 일치되어 있었다는 점이다.35) 특별히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루터가 결코 이루지 못한 방법으로 불가시적 교회와 가시적 교회의 개념을 종합한다.36) 두교회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은 두 가지 방법으로 교회를 말하고 있다. “교회”라는 말이 때로는 실재로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 교회에는 양자로 삼으시는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다. 이런 의미의 교회에는 현재 지상에 살고있는 성도들 뿐만 아니라 천지 창조 이후 지금까지 선택받은 모든 사람이 포함된다. 그러나 “교회”라는 이름은 빈번히 한 하나님과 그리 스도를 경배한다고 고백하는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모든 사람을 지시한 다. 우리는 세례에 의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들어가게 되며, 성만찬 에 참예함으로써 진정한 교리와 사랑에 의한 우리의 연합을 증거하고, 주 의 말씀 안에서 일치하며, 말씀을 전파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사역을 보존하신다. 이러한 교회 안에는 이름과 외형만 있고 그리스도는 전혀 없는 위선자들이 많이 섞여 있다. 야심과 탐욕과 시기에 찬 사람들 또 중상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고 아주 불결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다소 간 있다. 이런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허용되는 것은 자격이있는 재판 기관 에 의해 유죄 판결을 받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앞서 말한 교리는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고 하나님에게만 보인다고 믿어야 한다. 이와 같이 우리는 후자, 즉 사람들과 관련한 “교회”라고 하는 것을 중히 여기고 그 교회와의 교통을 계속해야 한다.37)

 

특별히 칼빈이 가시적, 불가시적 교회라는 개념을 적용한 것은 선택된 것으로서의 교회와 신 앞에서만 분명하게 되는 교회에 관하여 그의 주장에서 교회를 신자의 어머니로서 진술하는 부분에 넣은 것에서도 얻을 수 있는 결론이다. 신만이 그의 백성을 안다는 진리에 대해서 그가 말한 것은 교회 즉, 우리가 지상에서 살고 있으며 칼빈에 의하면 우리가 신과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는 한, 그것에서 절단되지 않는다는 그 교회에 엄밀히 적용된다.38)

 

4) 루터와 비교해 본 칼빈의 강조점.

루터와 칼빈은 그들의 교회론을 주장하는데 오히려 많은 공통점과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특별히 ‘보이는 교회’에 관한 칼빈의 견해를 살펴보면 루터와는 차이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즉 루터는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가 본질적으로 하나의 교회이며 단지 두 가지 면에서 볼 수있다는 점에서만 다르다는 개념을 고수하려고 했다.39) 그리고 칼빈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예배한다고 고백하는 가시적 교회와 선택된 자들의 불가시적 교회를 구별 하였다.

 

여기서 루터와 칼빈의 차이점이란 루터에게 있어서 두 교회의 구별은 로마카톨릭 제도로서의 교회와 신앙인의 회집으로서의 교회의 구별이었던 반면, 칼빈에게 있어서 두 교회의 구별은 신앙을 고백하는 자의 회집으로서의 교회와 선택된 자의 회집으로서의 교회의 구별이었다.40)

 

루터는 칼빈과 공통점도 있는데 그것은 루터가 교회를 성도의 회집이라고 했지만, 또한 교회를 어머니라고도 했다는 점이다.즉 “기독교회는 말씀을 통해 당신을 낳고 당신을 양육하는 당신의 어머니이다”라고 루터는 말했다.41)

 

특별히 루터파에 비해 개혁교회가 강조하는 교회로는 다음과 같다.즉 개인구원과 그에 따른 편협한 의인교리에 중점을 둔 루터파는 기독교의 메시지가 역점을 두는 곳이 개인구원이나 만인구원이 아니라, 주님자신과 그가 사람을 가운데 세운 은혜로운 통치이며, 따라서 그의 교회와 그곳의 각 회원들이라는 사실을 불분명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말씀이 개인에게 전달되지만, 동시에 말씀은 개인을 그리스도의 몸에 결속시킨다는 이 두 가지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개혁주의 칼빈신학은 생명력 있는 유기체로 구성된 공동체로서의 교회론을 매우 깊게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으며, 또한 권위적 교회를 위한 원리들을 설정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이전에 상실하였으나 하나님의 약속하에 새롭게 주어진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도록 인도한다.42)

 

“교회는 그 자체가 자신의 메세지와 제도를 결정하는 주인이 아니다. 교회란 형제 들의 공동체로서 봉사에 전념하는 기관이며, 모든 지배형태는 교회로부터 철저하게 배척되어야 한다”라고 말하면서 교회는 말씀에 순종하는 회중들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43)

 

 

제 3 장. 맺 는 말.

지금까지 제2장에서 루터와 칼빈의 교회론을 통하여 그들의 입장을 살펴보았다. 특별히 교회론에 나타난 그들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펴봄으로써 올바른 교회론을 정립하게 되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이 연구를 통하여 교회에 대한 가장 중요한 점은 루터나 칼빈이 모두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를 구분하고 있지만 이 두 교회는 두개의 다른 교회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통일된 교회의 두가지 상이한 속성을 나타내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제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단지 표면적인 교회를 떠나서 교회에 대한 더 깊은 내면의 의미를 찾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과 해방의 행동을 증거하고, 그것을 인간의 역사안에 화육시키기 위하여 존재한다. 교회가 이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려면, 그리스도 안에서 전 인류를 부르시고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그들을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게하며, 이로써 그 자신과 화해하게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 복종을 날마다 새롭게 해야한다. 성령에 의한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 친교를 상실하고 그것을 무관심하게 여긴다면, 교회의 생명력은 고갈된다. 교회와 세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떠나서 그리스도인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를떠난 사람은 잘려나간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말라 버린다(요15:6). 여기에서 우리는 말씀을 듣고 복종하며 기도하고 실천하는 교회를 생각해야 한다. 특별히 교회에서의 기도는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 영광의 영역으로 끌어올려지고, 세계를 지탱하며 구원하시는 주님과 사귈 수 있다. 그러므로 기도는 하나님의 생명과 빚이, 그의 능력이 흘러들어오는 통로이고 수문이다. 교회가 하나님을 증거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그리고 기도와 명상을 하는 것은, 인간과 세계의 구원과 해방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서이다. 교회는 이 사명의 수행자로서 출현되었고 존재한다. 참된 영성의 교회는, 역사안에서의 하나님의 결정적이며 최종적인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선교에 온몸으로 참여한는 데서, 그 여생의 참됨과 현실성을 나타낸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교회는 인간을 억압하는 악과 타협할 수 없다. 그 교회는 불의와 싸우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과 연대한다.44) 우리는 앞으로 교회를 통해, 기도하는 그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속히 올 수 있도록 늘 준비하고 깨어 있어야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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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도날드 매킴 편저,『칼빈신학의 이해』, 이종태 역, 서울:생명의말씀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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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메얼,F.E.,『루터교신학』,김선회 역, 서울:컨콜디아사,1985.

5. 빌헬름니젤,『비교교회론』,이종성,김항안 역, 서울:대한기독교출판사,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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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이버 신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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