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총론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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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시대로부터 시작된 시편은 시대적인 제약뿐만 아니라 인종적, 지리저긴 제약까지도 뛰어넘어 모든 기독교회의 공예배에 사용되어 왔으며, 구약의 다른 어떤 책보다 큰 사랑을 받아왔다. 이러한 시편의 인기는 그것이 인류의 공통적인 경험을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즉 여러 명의 저자에 의해 기록된 150편의 시들은 평범한 개인의 정서와 자기 내부의 느낌, 대적들로부터의 고난과 회복에 대한 간구, 그리고 창조주를 향한 감사와 찬양을 기록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이러한 시편 저자들의 경험을 자신들의 삶과 동일시하여 받아들였던 것이다. 본 서론은 이러한 시편의 심오한 사상과 다양한 주제 연구를 목적으로 하되 그 위에 시편의 일반적인 고찰과 다른 성경과의 관계, 그리고 시편만의 독특한 문제에 대한 특별한 고찰을 시행함으로 시편 전체에 대한 총체적인 개괄 이해를 돕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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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시편의 역사적 배경
Ⅰ. 명칭
대부분의 시편이 보여 주는 문학 형식과 동일시되는 단어는 '노래'라는 의미의 <ryvi ; 쉬르>와 '멜로디'또는 '성시'를 의미하는 <r/mz]mi ; 미즈모르>이다. 실제로 <ryvi ; 쉬르>는 총 29개의 시편에서 사용되었고 <r/mz]mi ; 미즈모르>도 총 57개의 시편에서 사용되었다. 특히 <r/mz]mi ; 미르모르>는 전치사 <B] ; 뻬>와 결합하여 ' …을 연주하다'라는 의미를 지니는 어근 <rm'z: ; 자마르>에서 파생되었으며, 이러한 사실에서 '악기의 반주에 맞추어 노래하다', '노래하다', '찬양하다'는 등의 의미가 생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두 개의 단어 중 어느 것도 시편의 히브리어 명칭으로 발전하지는 못하였다. 오히려 시편의 히브리어 명칭은 '찬양'을 의미하는 <!ylihiTi ; 테힐림>이 사용되었고 좀더 완전한 형태로는 <!ylihiT] rp,s, ; 쎄페르 테힐림>, 즉 '시들의 책'이라는 형태가 사용되었다. 한편 헬라어 역본인 70인역 성경에서는 <oiv falmovi ; 호이 프살모이>를 시편의 명칭으로 채택하였는데 이 말은 '활의 시위나 하아프의 현이 울리는 소리'를 뜻하는 <falmov" ; 프살모스>의 복수형으로 '현악기에 맞춰 부르는 노래들'을 의미한다. 라틴 불가타역에서는 이러한 70인역(LXX) 성경의 명칭에 영향을 받아 '리베르 살모룸'(Liber Psalms)이라 칭하였으며, 영어 성경 역시 이에 따라 'Psalms'이라 명하였고 한글 개역 성경도 이러한 명칭을 그대로 인용하여 '시편'이라 이름 하였다.
Ⅱ. 저자와 기록 연대 및 편찬 연대
시편의 저자와 기록 연대, 그리고 편찬 연대와 시편의 분류, 주제 설정 등 시편 연구의 전부분에 걸쳐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것이 바로 각 시편의 맨 앞에 나타나는 '표제' 또는 '부제'이다. 왜냐하면 이 '표제'에 의해 본 시의 저자와 기록 연대, 그리고 주제 등이 명확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편의 저자와 기록 연대 및 편찬 연대에 대한 고찰에 앞서 시편에 사용된 '표제'의 용도와 신실성, 그리고 그것에 대한 논쟁 등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일 것이다.
1. 표제
'표제'에 대한 연구는 대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주제 하에서 실시된다. 첫째는 '표제의 진실성에 대한 논쟁'이며, 둘째는 '표제의 유형에 대한 고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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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표제의 진실성
'표제'란 시편의 앞부분에 붙어서 시의 저자와 시를 쓰게 된 동기, 시의 유형과 음악의 방향을 제시하는 산문체의 짧은 설명적 문구를 가리키는데, 시편 150편 중에서 34편을 제외한 116편이 이 표제들을 가지고 있다. 전통적 견해에서 이 표제들은 신빙성이 있으며, 온전하고도 완전한 것들로 인정되어 왔었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비평학자들은 표제의 가치를 별로 중요하지 않게 생각했고, '궁켈'(Gunkel) 학파는 아예 표제의 중요성을 무시해 버렸다. 그들은 '고라의 자손'을 제외하고는 솔로몬 이후의 어떤 저자도 표제에 언급되지 않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이로 보아 표제어는 '후대의 랍비들이 되는 대로 시편에 삽입한 것'이라 주장한다. 그들은 이러한 자신들의 견해를 증명하기 위해 '어떤 표제는 그 시편의 내용과 모순된다'는 사실과 '다윗의 저자로 기록된 표제어의 시에서 솔로몬 시대의 성전이 전제되고 있다'는 점 등을 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표제어의 진실성은 확실히 인정되고 있으니, 그것은 다음과 같다. 먼저 시편의 표제어와 시의 내용이 서로 모순된다는 그들의 주장은 그러한 사실에 대한 정확한 근거도 부족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말하는 시편들도 표면적 측면만을 본 것일 뿐 그 저변에 흐르는 근본 의미가 표제어와 크게 다를 바 없다는 것을 파악하지 못한 주장에 불과하다. 둘째로 표제는 다윗의 저작임을 밝히면서 그 내용에는 솔로몬 성전이 건축된 것을 전제하고 있다는 그들의 주장 역시 받아들일 수 없다. 왜냐하면 시 27:4에서 '여호와의 집'이 솔로몬 성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 때의 장막'을 가리키며, 또한 시 27:4의 '전'이라는 의미도 '다윗 때의 장막'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본 절은 다윗 이전 시대인 여호수아 시대에도 '성막'을 '여호와의 집'이라 부른 것에서 잘 알 수 있다(참조, 수 6:24; 이에 대한 자세한 고찰은 제1부, Ⅱ. 2. 1)의 '다윗의 저작권 부인에 대한 논쟁' 부분 참조). 그러므로 다윗의 시에 나오는 '전' 또는 '여호와의 집'은 다윗 당시에 법궤가 모셔져 있던 '성막'을 의미하며, 따라서 표제어와 내용 역시 모순된 것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표제어를 후대의 랍비들이 삽입한 것이라는 그들의 주장 역시 70인역의 '오역'으로 인해 받아들일 수 없는 견해임이 밝혀졌다.
즉 표제어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기록된 오랜 것이라는 사실이 고대 어휘의 어려움 때문에 몇 군데를 잘못 번역한 70인역의 오역으로 인해 증명되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시 75, 76, 77편 등의 표제로 사용된 <j'Xen"m,l; ; 라메나체아흐>를 70인역은 '목표를 위해'라는 <eij" to; tevlo" ; 에이스 토 텔로스>로 번역했는데 오늘날의 구약학자들은 이 말을 '찬양대를 위하여'라는 의미라 정의하며, 시편 80편의 표제인 <!yNIv'voAla, ; 엘 쇼솬님> 역시 70인역에서는 '변화를 경험한 자들을 위해'라는 <uJper tw'n ajlloiw qhsomevnwn ; 훼페르 톤 알로이오 데소메논>으로 번역했으나, 현대의 구약학자들은 '찬양대를 위하여'로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히브리어 시편이 소유하고 있는 표제어의 전문적인 용어의 뜻이 시편의 저작 당시와 비교해 볼 때 70인역자의 때에는 이미 잊혀질 정도로 변질되었음을 말하는데 이는 시편의 표제와 70인역 번역의 때와는 큰 시간적 격차가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의 표제는 그 진실성이 인정되어야 하며, 따라서 표제에 의해 증거되는 저자와 기록 연대, 내용과 주제 역시 진실한 역사적 증거로 인정되어야 한다.
2) 표제의 유형
시편에 나타나는 표제의 유형은 일반적으로 다섯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첫째, 시편의 시적 표현을 드러내는 것들로서 '시르', '미스포므', '믹담', '식가욘' 등이 이에 속한다(이에 대한 자세한 고찰은 제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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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참조).
둘째, 악기나 시편의 연주법과 관련된 표제들로서 '악장', '느깃놋', '느히롯', '알라못', '스미닛', '깃딧' 등이 이에 속한다(이에 대한 자세한 고찰은 제2부, Ⅲ. 참조).
셋째, 시편의 예배 의식에 따른 표제들로서 주로 예배에 사용된 시편들을 가리키며, '성전 낙성가'(시 30편), '안식일의 찬송시'(92편),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시 120-134편) 등이 이에 속한다(이에 대한 자세한 고찰은 제2부, Ⅲ. 2. 참조).
넷째, 저자나 봉헌에 관계된 표제들로서 다윗과 솔로몬, 아삽과 고라 자손들의 시임을 증거하는 표제들이 이에 속한다(이에 대한 자세한 고찰은 제1부, Ⅱ. 2. 참조).
다섯째, 시가 저작될 때의 상황을 설명하는 표제들로서 주로 다윗의 시에서 발견된다. '다윗이 그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의 상황을 설명하는 표제들로서 주로 다윗의 시에서 발견된다. '다윗이 그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노래'(시 3편), '베냐민 사람인 구시의 말에 대하여 다윗이 여호와께 한 노래'(시 7편), '여호와께서 다윗을 그 모든 원수와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로 여호와께 아뢰어 가로되'(시 18편),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척하다가 쫓겨나서 떠날 때에 지은 노래'(시 34편) 등이 이에 속한다.
2. 저자
시편의 저자에 관한 고찰은 크게 '다윗과 관련된 시'에 대한 고찰과 '아삽과 고라 자손의 시'에 대한 고찰, 그리고 '무명의 시'에 대한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세 가지 중에서 '다윗에 관한 시'가 우리의 주된 관심사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때문에 본 서론에서는 많은 양의 지면을 '다윗에 관한 시'에 대한 논쟁 부분에 할애할 것이며, 그럼으로써 본서의 기록 연대와 편찬 연대에 대한 확실한 근거를 삼을 것이고 그 후 '무영의 시'와 '아삽과 고라 자손의 시'에 대해 간단히 생각해 볼 것이다.
1) '다윗의 시'
(1) 저작권에 대한 표제의 증거
시편의 표제는 총 73편의 시를 다윗의 저작으로 돌린다. 히브리 성경 시편의 서두에 있는 표제에 의하면 73편의 시가 '다윗의 시'로 되어 있으며, 12개가 '아삽의 시'로, 그리고 10편은 '고라 자손의 시'로 규정하고 있다. 이외에 72편과 127편은 '솔로몬의 시'로 규정짓고 있으며, 에스라인 '헤만'(시 88편), '에단'(시 89편)에게 각각 한 편씩,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 '모세'(시 90편)의 저작으로 한 편을 규정지은 후 나머지 50편을 '무명의 시'로 규정지었다. 그러므로 표제의 진실성을 믿는 전통적 견해는 이러한 표제의 증거에 따라 73개의 확실한 다윗의 저작인 시편을 제외하고도 무명의 시 중 다윗의 시로 추측되는 몇 편의 시가 포함된다고 생각하고 있다(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본서론 1부 2. 저자 부분의 2) '무명의 시'를 참조하라).
(2) 다윗의 저작에 대한 여러 가지 논쟁들
ㄱ. 모든 시편이 다윗 시대에 저술된 것으로 보는 견해
이 견해는 주로 유대 랍비들과 탈무드에 의해 주창되는 견해인데 그 견해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다윗이 첫 사람 아담과 멜기세덱, 아브라함과 모세와 헤만과 여두둔, 그리고 아삽과 고라의 세 아들들의 열 장로들의 도움으로 시편을 기록했다'(Baba Bathra 14하). 물론 이 구절이 장로들의 도움을 입은 다윗이 시편 전체를 저술했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그 말은 오히려 다윗이 이미 저술된 장로들의 시를 수집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들은 시편의 표제에 나타나지 않은 아담과 멜기세덱, 그리고 아브라함을 시의 저자로 삽입시키고 성경이 증거하는 솔로몬과 에스라인 에단을 시의 저자에서 제외시킨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자신들의 주장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시 89편의 에단을 아브라함의 다른 이름이라고 주장하며 솔로몬에 의해 작성된 시편은 솔로몬을 위하여(for) 작성된 것이지 솔로몬에 의해서(by) 작성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또한 다윗의 시인 시 139편을 '아담'의 시로, 시 110편을 멜기세덱이 지은 시로 주장한다.
그러나 현대의 성경 신학자들 중 이러한 견해를 인정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탈무드의 견해가 비록 모든 시편에 대한 다윗의 저작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모든 시편이 다윗에 의해 수집 됐다는, 즉 '다윗 이후에는 단 한 편의 시도 저술되지 않고 모든 시편이 다윗과 열 장로들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표제의 진실성과 성경의 내용을 고찰해 볼 때 아담과 멜기세덱, 그리고 아브라함이 시의 저자라는 사실은 인정할 수 없으며, 또한 성경은 다윗 이후에 지어진 시가 있음을 분명히 증거하고 있으므로 그러한 그들의 주장은 지나친 다윗의 우월성을 증거하기 위한 유대주의적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ㄴ. 다윗의 저작권을 부인하는 견해
이 견해의 주된 논쟁점은 성경이 증거하는 '다윗의 시'의 저작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의 견해에 의하면 시편은 히브리 종교 단체의 필요성에 의해 생겨나고 성장한 것이라 한다. 그들이 다윗의 저작권을 부인하는 주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다윗의 저작권을 반대하는 그들의 첫 번째 주장은 다윗의 저작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직접적으로 왕이라 칭하거나 3인칭으로 다윗을 칭했다는 점(참조, 시 20, 21, 61, 63, 72, 110편)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받아들일 수 없다. 먼저 그들이 말하는 시편 중 72편은 '솔로몬의 시'이므로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솔로몬이 자신의 부왕을 가리켜 '왕'이라 표현하며, 자신을 가리켜 '왕의 아들'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또한 '나'라는 1인칭 대명사보다도 '왕'이라는 공적 명칭이나 자신을 제 삼자의 입장에서 표현하는 것이 자신의 공적 자격을 나타내거나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데 더욱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러한 표현에도 불구하고 신약이 시 110편을 다윗에게 귀속시키고 있는 것은(참조, 행 2:34) 이러한 표현이 다윗의 저작권을 부인하는 데 아무런 증거가 되지 못함을 드러내는 분명한 증거이다.
둘째, 다윗의 저작권을 부인하는 자들의 두 번째 주장은 다윗의 저작으로 알려진 것들 중에 솔로몬 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완성된 성전에 관한 언급이 있다는 점이다(참조, 시 5, 27, 28, 63, 69, 101, 138). 그러나 이러한 견해 역시 성경에 대한 고찰을 간과한 견해에 불과하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언급 하였듯이(제1부, Ⅱ. 1. 1) 참조), 이에 대한 그들의 주장은 법궤를 모셔 두었던 다윗 시대의 '장막'이 '거룩한 곳'(참조, 출 28:43; 29:30), '여호와의 집'(참조, 수 6:24; 삼상 1:7) '하나님의 집'(참조, 삿 18:31), 그리고 '성전'(삼상 1:9; 3:3)이라 불리기도 했다는 성경의 증거로 쉽게 반증될 수 있다. 즉 다윗의 시편에 나오는 '여호와의 집', 또는 '전', '성전'이라는 단어는 솔로몬 시대의 성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다윗 시대의 '장막'을 가리키는 것이고 따라서 그들의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셋째, 다윗의 저작권을 부인하는 자들의 세 번째 근거는 다윗의 저작이라 생각하는 시에 아람풍의 시편이 있다는 점이다(참조, 시 139편).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다윗의 대적들 중 많은 대적이 아람어를 사용하는 자들이었다는 사실에서 쉽게 해결될 수 있다. 즉 그가 물리쳤었던 블레셋과 모압, 암몬, 아말렉, 에돔 등(참조, 삼하 8:12-14) 이 아람어 계통이었고, 따라서 다윗의 시에서 어느 정도의 아람풍이 드러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의 저작권에 대한 그들의 주장은 받아들여질 수 없고, 따라서 표제가 증거한 '다윗의 시'에 대한 다윗의 저작권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임을 믿고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다윗의 저작을 증거하는 직접적인 증거들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
ㄷ. 다윗의 저작에 관한 증거
다윗의 저작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증거는 표제에 나타나는 <dwdl rwmzm ; 미즈모르 레다비드>, 즉 '다윗의 시'라는 문구이다. 비록 이 문구에 사용된 전치사 <l ; 라멛>이 때때로 '소유를 가리킬 때'(참조, 사 24:1)와 '봉헌이나 지정을 가리킬 때'(참조, 시 4편)에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보통은 '~의'라는 의미로 쓰여 그 저작물의 저작자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단어라는 점에서 다윗의 저작권은 더욱 강하게 주장된다. 이러한 사실은 합 3:1에 기록된 '하박국의 기도'라는 의미의 <aybnh qwqbjl hlp ; 테필라 레하바쿠크 하나비>가 분명히 하박국 선지자를 하박국서 저자로 증거하는 데서 잘 알 수 있다. 또한 '다윗의 시'라고 붙여진 표제의 시에서 그 스스로 다윗을 저작자로 증거하고 있는 점에서도 이러한 사실은 명확하게 증거되고 있으며, 신약성경 역시 그러한 다윗의 저작을 다윗에게 귀속시키고 있는 점에서 더욱 분명히 증거된다(참조, 마 22:44; 막 12:36; 눅 20:42; 행 1:16; 2:25, 34; 롬 4:6; 11:9). 그러므로 시편이 증거하고 있는 다윗의 저작은 인정되어야 하고 명확하게 주장되어야 한다.
이제 이 외에 시편의 다윗 저작설에 대한 증거를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다윗 자신이 매우 원숙한 음악가였다는 점이다. 그는 사울 앞에서 악기를 연주하여 악신을 쫓아낸 명연주가였고, 이러한 음악 솜씨를 아모스 선지자는 그의 선지서에서 분명하게 선언하였었다(참조, 암 6:5). 그는 여호와를 찬양하는 찬양대를 조직하고 전문적으로 찬양만 하게 하였으며(참조, 대상 25:1-31), 성전 공예배를 위해 곡을 작곡하게 하는 등 음악에 깊은 관심과 조예가 있었던 사람이었다. 이렇듯 다윗은 훌륭한 음악가였고 시편을 작성하는 데 필요한 음악 지식을 지닌 자였다.
둘째, 그는 진실로 훌륭한 시인이었다. 그가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애가'(참조, 삼하 1:19-27)는 이러한 그의 훌륭한 시성을 잘 드러낸다.
셋째, 다윗은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이었다. '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참조, 삼상 16:13). 다윗이 이렇듯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었다는 성경의 증언은 크게 주목할 만하다. 왜냐하면 성경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자만이 기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윗은 바로 이러한 기본적인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는 실로 '야곱의 하나님에게 기름부음 받은 자'요 그를 통하여 '여호와의 신이 말씀하신 자'요 '그 말씀이 다윗의 혀에 있은'(참조, 삼하 23:1, 2) 성령의 사람이었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 시편을 기록한 시편의 저자였던 것이다.
넷째, 시편에 나타난 예배용 노래의 기원이나 저작, 그리고 편집에 관한 사항들이 다윗의 이름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증거하는 말씀들이 구약의 각처에서 발견된다(참조, 삼하 6:5-15; 대상 16:4; 대하 7:6; 29:30).
다섯째, 다윗은 참으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였고 순수한 종교적 감성을 소유한 자였다. 시편은 주를 사랑하며 경외하는 마음이 없이는 기록될 수 없는 영혼의 기도들이기도 하다. 다윗은 비록 한때 하나님께 범죄하기도 하였으나, 끝까지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종교적 열정을 잃어버리지 아니한 위대한 신앙인 이었다.
여섯째, 다윗은 풍부하고 다양한 경험을 지닌 자였다. 다윗은 소년 목동으로 시작해 용사, 백성의 지도자, 왕, 감독자, 음악가, 시인, 종교인, 인자한 아버지, 그리고 죄인의 모든 경험을 지닌 자'였다. 시편들의 저자는 이러한 다양한 경험을 지닌 자이어야 하는데, 그것은 그러한 여러 가지 경험을 해본 자만이 시편에 나타나는 다양한 상황들의 저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일곱째, 시편 자체에 다윗의 저작권을 증거하는 것들이 많이 있다. 예를 들면 시 23편은 소년 목동의 경험을 실감나게 보여 주며, 시 51편은 다윗이 밧세바와 함께 범한 죄를 회개하는 처절한 기도가 기록되어 있고, 시 57편에는 사울의 암살을 알고 광야로 도망하는 다윗이 미래의 왕국을 위해 기도하는 간구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상황들은 시편의 다윗 저작을 주장하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
여덟째, 마지막으로 시편의 다윗 저작을 증거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신약이 다윗의 저작을 증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시 2편은 행 4:25, 26이, 시 16편은 행 2:26-28에, 시 32편은 롬 4:6-8에, 시 69편은 행 1:20에 그리고 시 110편은 마 22:44; 막 12:36; 12:36, 37; 눅 20:42-44; 행 2:34에 각각 인용 증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표제가 증거하는 '다윗의 시'를 다윗의 저작으로 확실히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2) '무명의 시'
'무명의 시'는 말 그대로 그 시의 저자나 기록 연대를 전혀 알 수 없는 '익명의 저자에 의한 시'를 말한다. 그러나 성경학자들은 시편에 나타나는 50편의 시 중에서 몇몇의 시를 다윗의 저작으로 귀속시키고 있는데, 그것은 시 10, 33, 66, 67, 71편 등 다윗의 시편 군에 속하는 시들이다. 그들이 이러한 시들을 다윗의 저작으로 포함시키는 주된 이유는 그 시들의 내용이 다윗의 저작임을 증거하고 있다는 것과 다윗의 시편 군에 포함된 시 2편이 표제에 다윗의 시라는 규정이 없다 할지라도 신약성경이 그것을 다윗의 시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주장은 매우 신빙성 있는 주장으로 보이며, 따라서 '무명의 시'에 대한 우리의 견해는 위의 5편은 다윗의 것으로 나머지 45편은 저자를 알 수 없는 익명의 저자에 의한 시라고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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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아삽과 고라 자손의 시
히브리어 성경의 표제는 12편을 '아삽'에게 돌린다. 그러나 이 모든 시들을 레위인 바레야의 아들이요 다윗이 뽑은 음악가였던 아삽에게 돌리기는 무리인 듯하다. 왜냐하면, 시 73편은 여호사밧 시대에 속하며, 75편과 76편은 히스기야 시대에 속하고, 시 74편과 79편은 갈대아 포로의 시작 때에 속하기 때문이다(Havernick). 그러므로 '아삽'이란 개인의 이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아삽이라는 가문의 이름'을 뜻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견해는 충분히 인정할 만한 추측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아삽의 가문이 여호사밧의 때에 있었고(참조, 대하 20:14), 느헤미야와 함께 페르시아로부터 귀환한 포로들 중에는 245명의 음악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히브리어 성경의 표제에 의하면 '고라 자손들의 시'는 모두 10편인데 혹자는 이 시들이 고라 자손에 의해 쓰여진 시가 아니라 '고라 자손들이 보관해 온 시'라고 해석하였지만 이러한 해석보다는 표제의 증거 그대로 고라 자손에 의해 저술된 시라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3. 기록 연대
시편의 대다수는 통일 왕국 시대(B.C. 1043-930)에 기록된 것들이다. 그러나 모세에 의해 쓰여진 시와 포로 귀환자들이 기록한 시까지 합쳐서 생각하면 그 연대는 근 1000년에 가까운 엄청난 세월의 기간으로 설정된다. 한편 과거의 비평주의자들은 시편의 기록 연대를 통일 왕국시대나 바벨론 포로 때보다도 훨씬 뒤인 마카비 시대로 보았다. 그러나 주장은 북팔레스틴 시리아 해변의 '라스 삼라'(Ras Shamra)에서 발견된 '우가릿 사본'(Ugaritic texts)에 의해 오늘날에는 인정받지 못하는 학설이 되고 말았다. 왜냐하면 '우가릿 사본'에 기록된 시문이 대부분 B.C. 14세기 이전의 것으로 판명되어 시편의 고대성이 입증되었으며, 그 문체나 글자 역시 70인역이 오역할 정도의 고대 문자로 기록된 것이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4. 편찬과 편찬 연대
1) 시편의 편찬
시편은 모두 150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이 150편은 본래 148개의 시로 구성되어 있는 듯한데, 그것은 시 9편과 10편이 하나의 '아크로스틱 시'(Acrostic: 답관체 형식의 시-히브리어의 철자 순서에 맞춰 모든 행의 첫 단어를 시작하는 시)를 형성하고 있으며, 시 42편과 43편 역시 이와 비슷하게 본래는 하나의 시였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들 시 중에서 시 10편은 9편에서, 그리고 시 43편은 42편에서 분리된 것으로 추측되며, 이러한 추론은 시 10편과 43편이 독립된 표제어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사실로써 더욱 강력하게 주장되고 있다. 한편 70인역 성경은 시 9편과 10편을 하나로 묶어 놓는 반면, 시 42편과 43편은 그대로 살려고 그 대신 두 개의 '할렐 시편'(Hallel Psalm), 즉 시 114편과 시 115편을 하나로 묶은 후 시 113:9-16을 시 115편으로 엮어 놓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70인역에 기록된 시편의 총수가 150편에서 모자라거나 미달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9편과 10편, 114편과 115편을 하나로 합친 70인역은 그 대신 시 116편과 147편을 각각 두 편의 시로 나누어 실음으로써 150편을 채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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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시편의 편찬 연대
시편의 모든 책들이 언제 완벽하게 편찬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확실하게 단언할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시편의 편찬이 어느 한 순간이나 한 시대에 완성된 것이 아니라 세월의 흐름에 따라 점차로 완성되어 갔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다윗 자신에 의해 편집된 시들이 있었다는 사실과(참조, 대상 6:31; 16:4; 대하 7:6; 23:18), 아삽에 의해 수집된 시도 있었다는 사실(참조, 대하 29:30)에 의해 잘 알 수 있다. 한편 대부분의 복음주의 학자들은 시편의 최종 편집자를 '에스라'로 보는 데 의견을 같이한다.
Ⅲ. 기록 목적
' 코닐'(Cornill)에 의하면 시편의 모든 시들이 포로 후 시대의 제2성전에서의 예배에 사용되어 그때 사람들에게 이스라엘의 고대 종교 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기록된 것이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일관적 견해는 받아들일 수 없다. 왜냐하면 비록 시편의 어떤 시들이 예배에 사용되었다 할지라도 모든 시편이 예배에 사용되지는 않았으며, 대부분의 시들은 예배적 성격과는 전연 무관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시편의 대부분은 하나님을 숭배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러 가지 삶의 현상 속에서 하나님께 드린 시적인 고백과 기도, 그리고 간구와 감사의 찬양에 대한 기록이다. 그러므로 시편의 목적은 공중 예배 때 사용되는 찬양으로서의 목적뿐만 아니라 신앙인의 발전을 위한 지침서로서의 목적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시편은 실로 주석가 '칼빈'(Calvin)이 표현한 대로 '영혼의 모든 부분에 대한 해부'로서 슬픔과 번민, 고통과 죽음을 맛보는 인생들에게는 깊은 위로와 절대적 신뢰를 가르쳐 주며, 성공과 승리를 맛보는 인생들에게는 겸손과 자기 절제, 그리고 감사를 가르쳐 준다. 이러한 의미에서 시편은 예배에서의 역할에 대해서만 강조될 것이 아니라 개인의 헌신 생활에 있어서도 강조되고 중요시 여겨야 할 것이다.
Ⅳ. 특징과 구조
1. 특징
시편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크게 네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시편 자체가 한 권이 아닌 여러 편의 시를 편집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성경의 다른 모든 책들은 한 사람의 저자에 의해서 한 시대에 저술된 반면 시편은 유일하게 여러 명의 저자에 의해서 여러 시대에 걸쳐 저술된 성경인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시편만의 독특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둘째, 한 가지 주제가 아닌 여러 가지 주제와 목적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성경은 그 기록 목적이나 주제가 분명하고 뚜렷하다. '이스라엘의 해방' 또는 '구원'을 주제로 하는 출애굽기나 '거룩'을 주제로 하는 '레위기', '의인의 고난과 인내' 또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그 주제로 하는 욥기 등과 같이 모든 성경은 그 주제와 목적을 명확하게 도출해 낼 수 있다. 그러나 여러 명의 저자와 여러 시대에 걸쳐 편집된 시편에서는 그러한 작업이 불가능하다. 개개의 시들 모두가 독자적인 주제와 목적을 가지고 있는 시편은 150편에 달하는 전체의 주제 설정 자체가 어불성설인 것이다. 단지 성도의 삶의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지 상황들과 그에 대한 모범이라고밖에 정의할 수 없는 시편의 포괄성, 이것이 시편만이 지니고 있는 독특한 특징인 것이다.
셋째, 여러 가지 분류법에 의한 분류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시편은 시편 전체에 대한 구조를 설정할 수 없을 정도로 개별적이며 복잡하다. 그것은 내용에 의해서, 또는 표제에 의해서, 그리고 주제에 의해서 얼마든지 다양하게 분류될 수 있으며, 시의 형태와 용도에 의해서도 얼마든지 분류될 수 있는 성질의 정경이다. 그것은 어떠한 정해진 한 가지 틀과 규격에 의해서만 정의되고 규정지어질 수 없는 '무형의 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그것은 얼마든지 다양하게 변화되어 그만큼 새로운 진리를 도출해 낼 수 있는데, 이러한 '무형 속의 구조'가 바로 시편만의 독특한 특징인 것이다.
넷째, 시편의 마지막 특징은 각 시편마다 그 시편의 저자와 기록 시기, 저작 배경, 주제, 용도 등을 알 수 있는 표제어가 붙어 있다는 점이다. 비록 모든 시편에 붙진 않았다 할지라도 이 표제어는 시편 연구에 상당한 유익을 주며, 시편 연구의 핵을 차지하는 귀한 자료인 것이다. 이러한 표제어 역시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시편만의 독특한 특징인 것이다.
2. 구조
고대로부터 시편은 한글 개역 성경과 같이 총 5권으로 분류되었었다. 제1권은 시편 1편에서 41편까지로, 제2권은 시편 42편에서 72편까지로, 제3권은 시편 73편에서 89편까지로, 제4권은 시편 90편에서 106편까지로, 제5권은 시편 107편에서 150편까지이다. 이러한 분류법의 시초가 무엇이며, 그 이유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것이 모세 오경의 다섯 권의 책과 비교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유대인의 '미드라쉬'(Midrash)나 시편에 대한 주석이 시편의 다섯 권을 모세 오경과 비교한다는 점과 옛날의 유대 랍비들이 시편을 '다윗의 오경'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에서 잘 알 수 있다.
한편 '노만 스나이스'(Norman Snaith)는 이러한 시편의 분류법을 고대 팔레스틴에 보급되었던 '율법을 읽은 데 걸린 3년 주기'와 관련지어 생각했는데 그에 의하면 창세기는 처음 41일째 안식일에 읽혀졌고, 출애굽기는 42일째 안식일에 읽기 시작했으며, 레위기는 73일째 안식일에, 민수기는 90일째 안식일에, 그리고 신명기는 107일째 안식일에 읽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세 오경의 각 권에 해당하는 시편의 5권은 그러한 주기와 연관되어서 분류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 이외의 구체적인 구조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따라서 시편의 구조에 대해서는 이러한 개략적인 고찰로 만족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제 이러한 시편과 모세 오경과의 연관성을 도표로 나타내 보면 다음과 같다(참조, 시편 도표1).
Ⅴ. 시편의 문체
시편의 문체는 대체로 서정시적인 특징을 띠고 있다. 그것은 히브리 시가 지니는 여러 가지 독특한 특성을 고루 지니고 있는데 그것을 세 가지로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다(히브리 시와 그 특징에 대해서는 '제3부: 히브리 시의 특성에 대한 고찰'부분을 참조할 것).
1. 사색의 형식
시편에는 일반 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정한 운율이나 박자가 나타나지 않는다. 시편에 사용된 히브리 시의 운율은 매우 자유로우며, 박자에 얽매인 정형적인 시의 형태에서 벗어나 '사색 형식'으로 일관하는 특이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형식은 시편 저자로 하여금 시를 저술하는 데 있어서 어떠한 형태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그의 사상을 표현하는 동시에 필요한 용어를 적재적소에 자유롭게 구사하도록 하는 형식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색 형식의 시에서는 시의 길이까지도 자유롭게 조절되며, 이러한 이유에서 시편에는 2, 3절의 짧은 시편으로부터 176절에 이르는(119편) 장편의 시도 등장하는 것이다.
2. 대구법
시편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대구법'이다. 이 대구법은 모든 히브리 시의 공통적인 특징인데 시편에서 주로 사용된 중요한 대구법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이다. 첫째, 동의 형식의 대구법, 이 형식은 둘째 연을 첫 번째 연과 유사한 언어로 반복하여 설명함으로 그 의미를 더욱 선명히 부각시키는 일종의 강조법이다. 예)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시 24:1), 둘째, 대조 형식의 대구법, 이 형식은 둘째 연이 첫째 연의 생각이나 사상, 단어와 대조되는 것으로 구성되어 앞의 것과 대조되어 상대적으로 두 번째 연의 주제를 강조하는 형식이다. 예)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시 1:6). 셋째, 종합법 형식의 대구법, 이 형식은 둘째 연이 첫 번째 연을 설명하는 말을 삽입시키거나 어떤 사상을 추가함으로 첫 번째 연에 드러난 사상을 완전하게 충족시켜 주는 형식이다. 예)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시 19:7상).
3. 구체적이고도 사실적인 묘사
시편에 기록된 시들의 배경은 대부분 저자 개인의 경험과 생각, 그리고 감정이다. 이것은 개인적인 고백과 간구 찬양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신앙 간증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시편의 저자들은 이러한 간증 용어를 선택하는데 있어서 철학적 용어나 신앙적인 용어들보다도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단어들을 사용하여 그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렇듯 사색 형식을 취하면서도 쉽고 평이한 용어,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용어를 사용한 것이 시편의 독특한 문체인 것이다.
제2부: 시편의 특별 주제들
Ⅰ. 시편의 정경성
시편에 수록된 150편의 시들은 모두 성령의 감동 하에 쓰여진 정경들이다(참조, 눅 24:44; 딤후 3:16). 이러한 사실은 베드로가 시편에 대하여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예수 잡는 자들은 지로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행 1:16)라고 증거함으로 더욱 분명하게 증거되었으며, 다윗 자신도 '여호와의 신이 나를 빙자하여 말씀하심이여 그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삼하 23:2)라고 증거하므로 시편의 정경성을 명확하게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은 분명히 하나님의 성경에 의하여 기록된 정경, 즉 신앙의 권위 있는 기준, 또는 규범으로서의 정경인 것이다.
1. 정경화
'정경화'라는 말은 '본래는 성령의 감동과 무관하게 쓰여진 인간의 글이 후에 정경으로 발전하였다'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받아들일 수 없다. 왜냐하면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흐른다 할지라도 인간에 의해 쓰여진 인간의 기록은 정경적인 것으로 되어질 수도 없고 정경성을 지닐 수도 없기 때문이다. 정경은 '영'(Young) 박사의 말대로 '만일 어떤 저술이 실제로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여진 작품이라면 그것이 저작된 순간부터 정경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래는 인간의 저작이었는데, 후에 필요에 의해서, 또는 기타 다른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정경으로 삽입되게 되었다는 '시편의 정경화 학설'은 인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정경화'의 개념과는 전혀 다른 '정경화'의 개념을 시편 중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기록된 정경들이 하나님의 섭리로 인해 이미 본래부터 지니고 있던 정경성이 도출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에 있어서의 '정경화'의 의미는 이러한 의미에서 생각하고 고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시편 가운데 제1권과 제2권 및 제4권의 경우에는 그러한 정경화가 신속하게 이루어졌음이 분명하다. 예를 들어 시 18 편은 다윗이 죽은지 50년 이내에 정경 사무엘서(삼하 21장)에서 발견되어, 시 96편, 105편, 106편은 다윗이 이스라엘을 통치하기 시작할 즈음에 공공 예배를 위한 규범으로 다윗에 의해 지정되었다(참조, 대상 16:7-36). 이러한 시들은 본래는 정경으로 인정되지 않았으나 그 시의 내부에 내재되어 있던 정경성이 비교적 일찍 도출되어 정경으로 인정되었던 것이다. 그 밖의 많은 시들이 주요한 음악인들에게 그들이 이스라엘의 예배를 지도할 수 있도록 지정되었는데 이러한 사실 역시 다윗이 그것들을 의식적으로 정경화하려 했던 것을 보여 주는 증거인 것이다. 이러한 모든 절차 속에서 시편은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기록된 정경으로서의 그 위치를 확고히 하게 되었고, 그러한 사실을 신약을 비롯한 여러 성경과 외경에서 인정, 증거하였던 것이다.
2. 정경에서의 위치
옛날 히브리식 배열에 의하면 시편은 '율법'과 '예언서들' 다음에 나오는 '성문서들'의 첫 번째에 위치하였다(참조, 눅 24:44). '요세푸스'(Josephus)가 A.D. 1세기에 설명한 것과 같이 히브리식 배열의 구약은 모두 22권의 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중 '모세 오경'이 다섯 권을 차지하고 있었고, '예언서'들이 열세 권을 차지하였는데, 이 예언서들 가운데 '전기의 예언서들'(여호수아서, 사사기-룻기서, 사무엘서, 열왕기서, 역대기서, 에스라-느헤미야서, 에스겔서, 욥기 등의 역사서들을 가리킴)이 여덟 권, '후기의 예언서들'(이사야서, 예레미야-예레미야 애가서, 에스겔서, 다니엘서, 그리고 12권의 소선지서들의 예언서들을 가리킴)은 다섯 권이었으며, 나머지 네 권의 정경은 '하나님께 드리는 찬가들과 인간 생활에 대한 조언들'을 기록한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서의 '성문서'이다. 그러나 4세기에 이르러 이러한 옛 히브리식 배열은 무너져 많은 예언서들이 두 번째 부문에서 세 번째 부문으로, 즉 '예언서들'에서 '성문서들'로 옮겨진 현재의 랍비식 순서로 변경되었다. 하지만 현대의 정경들은 이러한 랍비식 배열을 따르지 아니하고 옛 히브리식 배열을 따른 희랍어역 성경을 따르는데 현대의 희랍어역 성경은 시편의 다른 세 권의 성문서들과 함께 '전기의 예언서들'과 '후기의 예언서들' 사이에 삽입되어 있으며, 이러한 배열은 주님도 마 23:35에서 인정하심으로 거의 공통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Ⅱ. 시편의 시적 형식을 지지하는 표현들
시편에 나타나는 '시적 형식을 지지하는 표현들'이란 시의 형태나 형식을 분류할 수 있는 근거로서의 표현들이 아니라 '시편 자체가 하나의 시임을 증거하는 증거가 되는 말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편의 시적 형식을 지지하는 표현들은 모두 일곱 가지인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쉬르<ryvi ; 쉬르>
'노래'라는 의미의 이 말은 구약에서 모두 29번 사용되었는데 그중 12번은 <r/mz]mi ; 미즈모르>와 연결되어 사용되었다. 하지만 <ryvi ; 쉬르>와 <r/rz]mi ; 미즈모르>는 명확히 구분되는데 <r/mz]mi ; 미즈모르>는 종교적 예배에 사용되는 시에만 적용된 반면 <ryvi ; 쉬르>는 거룩하거나 세속적인 노래 모두에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렇듯 <ryvi ; 쉬르>가 사용된 시편 중에서 특별한 용도나 의미로 사용된 시편들이 매우 많은데, 시 120-134편의 <t/l[}m' ryvi ; 쉬르 마알로트>는 '올라가는 노래'라는 뜻으로서 이 시들은 성소를 향해 순례하는 자들이 즐겨 부르는 '순례자의 노래'라고도 불리며, 시 30편은 <tyBih' tK'nuj' ryvi ; 쉬르 하누카트 하빠이트>는 '성전 봉헌의 노래'라는 뜻으로서 시온 산에 세워진 성전 봉헌식 때 부른 노래이고, 시 45편은 <tdodiy] ryvi ; 쉬르 예디도트>는 '사랑의 노래'라는 뜻으로서 남녀가 사랑을 표현하는 노래이며 '결혼 찬가'라 불리기도 한다. 한편 70인역은 이 말을 <wj/dh ; 오데>라는 말로 번역하였다.
2. 미즈모르<r/mz]mi ; 미즈모르>
70인역에서 헬라어 <yalmov" ; 크살모스>로 번역된 이 단어는 주로 '악기와 관련된 노래의 시'를 뜻한다. '노래하다'또는 '피리 불다'를 뜻하는 동사 <rm'z ; 자마르>로부터 파생된 이 단어는 '끊는다', '자른다'(to cut)라는 의미로 발전, 여기서 '갈라진다'라는 의미와 그것이 뜻하는 '음율적 가름'을 의미하게 되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지휘자' 혹은 '노래 부르는 자'라는 의미까지 발전되었다. 그러나 '에발트'(Ewald)는 이러한 견해에 반대하며, <rm'z; ; 자마르>의 의미를 '포도나무를 전지하다'(참조, 레 25:3;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포도원을 다스려'로 표기되어 있음)라는 의미로 이해하여 '한정된 수와 리듬과 시간에서 연주하고 노래한다'라는 뜻으로 설명하였고, '헹스텐버그'(Hengstenberg)는 '장식하다'라는 의미로 해석, '주께' 또는 '주의 영광, 힘, 이름'이라는 의미인 '찬양'의 의미로 설명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들보다는 시 4, 6, 67, 76 편과 시 27:6; 101:1; 104:33; 105:2; 108:2)에서 증거하고 있는 대로 '미즈모르'는 '악기와 관련된 노래의 시'를 뜻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3. 마스길<lyKic]m' ; 마스킬>
이 명칭은 어떠한 특별한 뜻을 드러내기보다는 단순한 '시'라는 의미이다. 한편 '루터'(Luther)와 '드 베테'(De Wette) 등의 학자들은 이것을 '교훈'과 관련된 것이라 생각하여 '루터'는 '교훈'으로, '미카엘리스'(Michaelis)는 '운문의 강화'로, '드 베테'(De Wette)는 '뒤얽힌 상징적 강화'로 그리고 '헹스텐버그'(Hengstenberg)는 '교회의 교훈이라고 해석하여 그 의미를 좀더 분명히 하였다. '마스길'의 표현은 총 13편의 시에 사용되었는데 그중 시 142편은 '테필라'와 함께, 시 88편은 '미즈모르'와 함께, 시 44편은 '쉬르'와 함께 사용되었으며, 70인역에서는 <sunevsew" ; 쉬네세오스> 혹은 <eij" suvnesin ; 에이스 쉬네신>으로 번역되었다.
4. 믹담<!T;k]mi ; 미크탐>
모두 16편의 시에 붙여진 '믹담'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이전에는 이 단어가 '황금'을 의미하는 '케뎀'과 관련된 것으로 생각, '황금의 시'라는 의미로 해석하였고, '힛지그'(Hitzig)는 '알려지지 않게 하다'라는 의미로, '미카엘리스'(Michaelis)는 '무덤의 비석의 글'로, '모빙켈'(Mowinckel)은 '죄에 대한 속죄의 노래'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많은 해석 중 어느 것이 정확한 의미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으며, 단지 고대 기독교 교부들의 해석이었던 '황금의 시' 또는 '금언의 시'라는 의미로 추측할 뿐이다.
5. 식가욘<@yOyG;vi ; 쉬까욘>
시 7편의 단 한편에서만 나온 이 말의 의미에 대해 '파울루스'(Paulus)는 '화답의노래'로, '게세니우스'(Gesenius)는 '찬양의 노래'로 '모빙켈'(Mowinckel)은 '종교 의식에 있어 회중을 모을 때 부르는 노래'로 해석했으나 보다 많은 학자들은 '애통의 노래', 또는 '애가'로 해석한다. 그러나 비록 '식가욘'이 이렇듯 비탄의 감정을 싣고 있으며, '궁켈'(Gunkel)이 이야기한 대로 민족적 애가들과 개인적인 애가들 모두에게 해당될 수 있는 시라 할지라도 그 의미를 정확히 지적하여 단정하기는 어렵다.
6. 테필라<hL;piT] ; 테필라>
시 17, 86, 90, 102, 142편에 사용된 이 단어는 '기도'를 뜻하는데 다소 서정적인 특성을 나타내는 말이다. 비록 시 86:1-3과 같은 몇몇의 구절들이 비탄적인 요소들을 싣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내용을 담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 단어는 '심판하다', '기도하다'라는 뜻의 동사 <ll;P' ; 팔랄>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7. 테힐라<hL;hiT] ; 테힐라>
'찬양하다'를 뜻하는 동사 <ll'h; ; 할랄>에서 파생된 명사인 '테힐라'는 '찬양'이라는 뜻으로서 히브리 문학에서 특히 하나님을 찬양할 때 사용되는 말이다. 이 말은 시편 중에서 오직 시 145편 한편에만 사용되었는데 그 뜻을 시편에 붙여 말하면 '찬양의 노래'라 말할 수 있다. 한편 시편의 히브리 명칭은 <!ylihiT] ; 테힐림>은 이러한 '테힐라'의 복수형이다.
Ⅲ. 시편에서의 음악적 표현에 대한 고찰
시편에는 시적 형식을 지지하는 표현들 외에도 음악과 관련된 표현들 또는 음악적인 표현들이 상당히 많이 등장하는데 그러한 것들은 주로 음악적인 음률이나 악보, 음악에 종사하는 자, 그리고 음악의 형식을 드러내 주는 표현들이다. 이제 시편에 나타난 음악적 표현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셀라<hl;s, ; 쎌라>
이 말은 시편의 표제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본문 중에서만 등장하는 이 말은 주로 연의 끝에 등장하며 때로는 본문 중간에 삽입되어 나오기도 한다. 이 말은 시편 중에서 모두 71번 나타나며, 예의적으로 하박국서에서 3번 등장하는데(참조, 합 3;3, 9, 13), 그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많은 견해들이 주장되어 왔다. '제롬'(Jerome)과 갈대아역에서는 이 말을 '항상', '영원히'라고 번역하였고, '저스틴 마티르'(Justin Martyr)는 '나눔의 위치를 지시하는 표'로 그리고 '파이퍼'(Pfeiffer)는 '구문적 용어'로 보았다. 이와는 달리 '에발트'(Ewald)는 이 용어를 '올리는 표시', 즉 그 부분에 이르러서는 낭독자가 그의 음을 올려 낭독하라는 표시로 생각했고, '뵈처'(Boettcher)의 '쉼표'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들 중 그 어느 것도 확실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단지 이 용어는 분명한 음악 용어로서 '헤르더'(Herder)나 '게세니우스'(Gesenius)의 해석과 같이 '높게 부르는 멜로디의 중복'이나 '델리취'(Delitzsch)의 해석과 같이 '강하게'(forte)를 뜻하는 음악 부호로 이해하는 편이 더욱 자연스럽다.
2. 힉가욘<@/yG;hi ; 히까욘>
이 말은 시 9:17에서 '셀라'<hl;s, ; 쎌라>와 연결되어 사용되었는데 70인역(LXX)과 '아퀼라'(Aquila) 역본, 그리고 '심마쿠스'(Symmachus) 역본은 시 9:17의 이 말을 <wjdh diafavlmato" ; 오데 디악살마토스>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시 92:4에서는 악기로 연주되는 음악과 관련되어 사용되었다. 그런데 그 음악은 '게세니우스'(Gesenius)나 '드 베테'(De Wette)의 해석과 같이 소란한 음악을 뜻하지 않고 '하프'와 같은 고요한 음악을 뜻한다(Delitzsch). 이러한 견해는 '힉가욘'의 어원이 '고요하게 노래 부르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인정할 만하다(Hupfeld). 한편 힉가욘은 '생각하다'라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는데(참조, 시 19:5), 이러한 이유 때문에 '헹스텐버그'(Hengstenberg)는 이 말을 '음악을 중단하는 동안 명상하라는 명령'으로 생각하였다. 이 외에 '힛지그'(Hitzig)는 이 말을 명상과 연결된 '머리 숙이다'라는 의미에 착안, '주기도문의 고요한 암송을 묘사할 때 사용하는 것'이라 해석하기도 하였으며, '카일'(Keil)은 '작게'라는 의미인 '피아노'(Piano)로 해석하였다.
3. 라메나제아흐<j'Xen'm]li ; 람나체아흐>
한글 개역 성경에서 '영장'으로 번역된 이 말을 고대의 번역자들은 '음악적인 말'로 이해하였고, '모빙켈'(Mowinckel) 같은 이는 '하나님을 달래는 데 사용된 시'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러한 견해보다는 합창대를 연습시키고 지휘하는 지휘자로 생각한다. 그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에발트'(Ewald)가 해석한 그대로 본문의 원형이 '깨끗하게 되다', '완전하게 되다'를 뜻하며, 원형에서 파생된 '피엘형'은 '어떤 것을 완전한 상태에 두다', '어떤 것을 완전하게 보이도록 정돈하다'라는 의미이며, 이 두 가지 의미는 음을 고루 배열하고 정돈하는 지휘자, 또는 합창의 인도자를 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대상 15:21에서 이 단어가 성전 음악과 레위인들에게 위임된 '인도와 지휘'에 관련되어 사용되었다는 것에서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Saalschuetz, Delitzsch). 한편 이 말은 합창의 지휘자라는 의미 외에도 '독창자'(Solist)를 뜻하는 말로도 사용되었는데 그것은 이 말의 의미를 '자신을 눈에 띄게 하는'이라고 해석한 것에서 발전된 견해이다(Herzfeld).
4. 삔기노트<t/nynin]Bi ; 삔기노트>
한글 개역 성경에서 '현악'으로 번역된 이 말은 시 4편, 6편, 55편, 61편, 69편, 76편 등 총 여섯 개의 시편에서 사용되었으며 '현악기'를 뜻한다. 즉 현악기에 맞춰 부르는 노래를 뜻하는 것이다. 대다수의 학자들은 특별히 이 말이 의미하는 악기를 '하프'라 해석한다. 그리하여 '에발트'(Ewald)는 '악기의 지휘자, 더욱 세분해서는 성전 음악의 하프 지휘자'로 해석하였고, '후펠트'(Hupfeld)와 '힛지그'(Hitzig) 역시 이러한 견해에 동조한다. 그리고 '헹스텐버그'(Hengstenberg)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것을 다윗의 하프에 연결시켜 '다윗의 하프 지휘자'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델리취'(Delitzsch)는 이러한 견해에 동조하지 않고 포괄적 의미로 해석하였다. 결론적으로는 이 말이 하프를 의미할 수도 있으나 하프만이라는 제한된 의미보다는 하프를 포함한 모든 현악기로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한 듯하다.
5. 엘-한네힐로트<t/lyjiN]h'Ala, ; 엘-한네힐로트>
한글 개역 성경에서 '관악'으로 번역된 이 말은 시 5편에서 단 한번만 나타난다. 70인역은 이 말을 시편의 내용과 관련시켜 <klhronomouvsh" ; 휘페르 테스 클레로노무세스>라 번역하였는데, 불가타역과 루터도 이러한 번역을 따라 본문을 '후계자를 위하여'라 번역하였다. 현대의 주석가들 중에는 '카일'(Keil)과 '헹스텐버그'(Hengstenberg)가 이러한 해석을 취하여 '카일'은 이 말을 '후계자와 관련하여'라는 의미로 번역하였고 '헹스텐버그'는 '과거로부터 물려받아 소유한 것', 즉 '재산의 소유'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시편의 의도와 전혀 관계없는 해석으로서 현대의 많은 주석가들에 의해 부정되고 있다. 오히려 현대의 주석가들은 이 말을 '갈대 퉁소'로 해석하는데(Hupfeld, Delitzsch) 이러한 견해가 더욱 타당한 것은 우리나라의 '저'에 해당되는 '갈대 퉁소'가 선지자들의 많은 신령한 노래의 악기를 중에 해당될 뿐만 아니라 삼상 10:50; 왕상 1:40; 사 30:29에서도 나타나며, 성전 음악에서 일찍이 사용된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입으로 불어서 소리를 내는 관악기의 통칭, 즉 '저' 또는 '갈대 퉁소'로 보아야 한다.
6. 여두둔<!WtYdiyli ; 리디툼>
시 39편, 62편, 77편에 등장하는 이 말에 대해 '마우러'(Maurer)는 어떤 악기인지 분명히 알 수는 없으나, '그 당시에 존재하던 악기의 이름'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이 견해는 오늘날 거의 인정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현대의 성경학자들은 '여두둔'을 다윗 시대의 음악인으로서 아삽과 헤만의 동료(참조, 대상 25:1; 대하 5:12)이며, 대상 15:17에 나오는 '에단'과 동일 인물인 사람으로 생각한다. 그는 레위족의 므라리 자손이었으며(참조, 대상 6:44), '왕의 선견자'(참조, 대하 25:15)로도 불리웠다. 그러나 본문은 단지 이러한 여두둔 한 사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본문은 여두둔을 포함한 그의 합창단원, 즉 여두둔의 이름을 본뜬 다윗의 합창단원까지도 포함된 의미로서 기브온에서 여두둔의 지휘를 따라 합창한 자들, 또는 여두둔 가문의 이름을 뜻한다(De Wette, Keil, Hitzig).
7. 알-하깃딧<tyTiGih'Al[' ; 알-하끼티트>
시 8편, 81편, 84편의 표제가 되는 이 말에 대해 '미카엘리스'(Michaelis)는 '포도넝쿨이 뻗어 가는 것을 노래한 것'이라 해석하였고, 70인역도 <uJpevr tw'n lhnw'n ; 휘페르 톤 레논>으로 번역하여 이 견해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은 시편의 문맥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해석이다. 이 말은 '현악기로 연주하는'이라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하는데(Redslob), 이러한 해석이 매우 유력한 설명이다.
8. 알-하시미닛<tynIymiV]h'Al[' ; 알-하쉐미니트>
시 6편과 12편의 두 편에서 사용된 이 말은 한글 개역 성경에서 '스미닛'이라 번역되었다. 혹자는 이 말을 '여덟 줄의 악기로 불려져야 하는 노래'라고 해석하였으나 이러한 견해는 인정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8이라는 수가 문헌학에는 관련시킬 수 있어도 악기에 관련시키는 것은 무리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말은 옥타브의 기본음의 선택, 즉 '기본음'을 뜻하는 것으로 보이는데(Gesenius, Delitzsch), 대상 15:21의 '수금을 타서 여덟째 음에 맞추어 인도하는 자'라는 표현이 이러한 견해를 지지하고 있다.
9. 알-알라못<t/ml;[}Al[' ; 알-알라모트>
대상 15:20에 의하면 시 46편에 사용된 이 말은 '고성부', 즉 '처녀다운 스타일의 음'을 뜻한다. '뵈처'(Boettcher)는 이 말을 '테너에 해당하는 음'으로 해석하려 하지만 그 말은 확실히 소프라노로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한데 그것은 시 68편에서 최소한 성전 축제에 탬버린을 연주하던 처녀들이 있었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한편 비록 이 말이 소프라노를 의미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반드시 '젊은이'를 뜻하는 말이라 볼 수는 없다. 그것은 20대의 젊은 계층을 포함한 여러 세대의 소리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10. 알-뭇랍벤<@Bel' tWml[' ; 알무트 라뺀>
많은 학자들은 이 말의 뜻을 문법적인 해석 그대로 받아들여 '아들의 죽음을 위한 노래'라고 해석하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Be ; 뺀>이 가리키는 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먼저 갈대아역을 따르는 몇몇 학자들은 '벤'을 다윗이 쓰러뜨린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참조, 삼상 17:4, 23)으로 생각하였으며, 다른 학자들은 이 말을 '압살롬의 죽음' 또는 '메시아의 죽음'으로 생각하였다. 그런가 하면 '그로티우스'(Grotius)는 문자의 고의적인 바뀜을 지적하면서 '나발의 죽음'이라 생각하였고, '헹스텐버그'(Hengstenberg)와 '델리취'(Delitzsch) 역시 이 견해에 동조한다. 그러나 어느 견해가 정확한지는 분명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11. 알-아엘렛샤할<rj'V'h' t'y<a'Al[' ; 알-아엘레트 하솨하르>
한글 개역 성경에서 '아앨렛샤할'로 번역된 이 말은 오직 시 22편에서만 사용되었다. '마우러'(Maurer)의 말과 같이 그것은 악기를 지적하는 말이 아니며, '이븐 에즈라'(Iben Ezra)와 '칼빈'(Calvin)의 해석과 같이 '멜로디와 리듬의 첫말'도 아니다. 그것은 '새벽의 사슴의 곡'이라 할 수 있는데, '미드라쉬'(Midrash)는 이 말을 아 2:8의 말씀에 나타나는 '아침 제사의 어린양'에 연관시켜 해석하였고, '루터'(Luther) 역시 그것을 상징적으로 말해서 '공회 앞에 이끌려 간 예수님'을 뜻한다고 보았다. 한편 '킴히'(Kimchi)는 이 말을 '아침 샛별'로 해석하였으나 그러한 해석은 본문의 문맥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 해석에 불과하다.
12. 알-마할랏<tl'j}m;Al[' ; 알-마할라트>
시 53편에 단 한번 사용된 이 말에 대해 '게세니우스'(Gesenius)는 '현악기로 연주되는 노래'로, '힛지그'(Hitzig)는 '느리게 하라는 명령'으로 해석하였으나 이러한 견해는 본문의 의도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견해이다. 오히려 이 말은 '델리취'(Delitzsch)의 해석과 같이 '애가조의 이름' 혹은 '특별한 애가의 첫말'이라고 보아야 하는데, '카일'(Keil) 역시 이 노래를 '병에 관하여'로 해석, '환난'과 관련시켰고, '헹스텐버그'(Hengstenberg)도 이러한 해석에 동조하는데, 단지 그는 이 병을 육체적 질병에 국한시키지 않고 '영적 질병의 상징'으로 생각하였다.
13. 알-쇼산님<!yNIv'vAl[' ; 알-쇼솬님>
시 45편과 69편의 표제인 이 말은 시 60편의 '알 수산에듯'<Wd[e wv'WvAl[' ; 알 수솬 에두트>과 시 80편의 '엘 소산님에듯'<tWd[e !yNIv'vAl[' ; 엘-쇼솬님 에두트>와 같은 의미로서 '백합의 노래' 또는 '증거의 백합', '백합의 증거'라는 뜻이다. '드 베테'(De Wette) 같은 학자는 이 말을 '백합 모양의 악기'에 관련시켰고, 또 다른 학자들은 '거북 모양의 육 음계 악기'에 관련시켰으나, 오늘날에는 이러한 해석이 인정되지 않는다. 또한 '헹스텐버그'(Hengstenberg)는 시 45편의 의미가 '사랑의 노래', '사랑하는 자의 노래'를 뜻한다는 사실에서 이 말을 '사랑하는 신랑'에 대한 상징적 단어로 보았으나 이러한 견해 역시 본문이 세상적인 연정의 의미를 전혀 내포하고 있지 않다는 것과 사랑의 대상과 사랑의 노래 자체를 엄연한 구별이 있다는 이유 때문에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한편 '루터'(Luther)는 본문의 의미를 완전히 오해하여 본문의 백합을 '장미'로 해석, '교훈하기 위한 장미의 금실'이라고 하였는데, 이러한 해석이 비록 그 당시의 귀족이나 처녀들이 머리에 장미 모양의 장식을 한 것과 연관된다 할지라도 이러한 해석 역시도 인정될 수 없다. 그러므로 본문은 '알-쇼솬님'이라는 표제를 가진 시와 관련된 것으로서 '백합화의 노래' 또는 '사랑의 노래'라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
14. 알-요나트 엘렘 레호켐<!yqijor] !l,[, t/yAl[' ; 알 요트 엘렘 레호킴>
시 56편의 표제인 이 말에 대해 '아퀼라(Aquila) 역본과 '제롬'(Jerome), '킴히'(Kimchi), 그리고 '칼빈'(Calvin) 등은 '블레셋 앞에서 도망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은유로 해석하였고, '심마쿠스'(Symmachus) 역본은 '다윗의 멸시받는 가문'으로, 그리고 '알렉산더'(Alexander)와 갈대아역은 '포로 된 이스라엘 백성'과 관련시켜 해석하였으나 오늘날에는 이러한 해석이 인정되지 않고 있다. 또한 '크냅'(Knapp)의 '외국 왕들의 압제에 대하여'라는 해석과 '힛지그'(Hitzig)의 '먼 거리에 있는 백성의 비둘기'라는 해석 역시 인정받지 못한다. 많은 주석가들은 본문을 '비둘기'와 관련지어 '잠잠한 비둘기'(Iben Ezra), '먼 테레빈트의 비둘기'(Bochart)로 해석하고 있으며, '영'(E. J. Young) 박사는 '이별의 나무의 비둘기'로 해석하고 있다.
15. 알-다스헷<tjev]T'Al[' ; 알 타쉬헤트>
이 말은 다윗의 시에서 시 57편, 58편, 59편에 나타나며, 아삽의 시에서는 시 75편에 한 번만 나타난다. '외스털리'(Oesterley)는 이 말이 사 65:8의 '포도송이를 상하지 말라'는 말과 관련 '포도 수확의 노래'로 해석하였으나 명확한 증거는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 외에도 많은 견해가 있으나 그중 그 어느 것도 정확한 견해로 주장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지 그 말의 뜻인 '해치지 못 한다'라는 의미 파악에 만족해야 할 것이다.
이제 이러한 표제들, 즉 '시편의 음악적 표현'과 '시편의 시적 형식을 지지하는 표현들'을 도표로 나타내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참조, 시편 도표2).
Ⅳ. 구약 시대에 사용된 악기들
구약시대, 특히 시편이 기록되고 읽혀지며, 음악에 사용되던 시대의 특징적인 악기는 탈무드에서 '젤라잘'(Zelazal)이라 칭한 '잘잘'(Zazal)인데, 이것은 오늘날의 '심벌즈'(Cymbals)와 같다. 이것은 삼하 6:5에 관련된 거룩한 성구 중의 하나였는데 무조건 큰 소리만을 내는 타악기라기보다는 맑은 소리와 둔한 소리의 두 종류(참조, 시 150:5) 심벌즈를 의미한다. 그러나 보다 폭넓게 쓰인 악기는 하프였는데, 이 악기는 현악기의 대표적 악기로 성경에 많이 등장하고 있다. 고음은 '네벨'(Nebel)로 연주되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수금'을 의미하는 듯하며, 손으로 연주했던(참조, 삼상 16:23; 18:10; 19:9) 열 줄 하프인 '아솔'(Asor)과 다르다. '요세푸스'(Josephus)는 그의 '고대기'에서 이것이 12줄을 가진 악기라는 사실과 상아채로 연주되었다는 사실을 증거하였다. 저음은 하프와 비슷한 악기인 '킨놀'로 연주되었는데 이 악기는 옥타브가 낮은 것이었다. 나팔은 세 종류가 있었다. 먼저 곧은 쇠붙이로 만든 '차조즈라'라는 나팔이 있었고, 수양 뿔로 만든 '소팔'이 있었으며, 양뿔로 만들어진 '찰릴'이라는 나팔이 있었는데 '찰릴'은 퉁소와 같은 것으로서 속이 빈 피리 모양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축제 때에 쓰이는 주된 악기는 '토프'였는데, 아랍어로는 '투프'였고, 손북 혹은 '탬버린'과 같은 악기인 것으로 추측된다. 이 외에도 법궤를 운반할 때 사용된 삼상 6:5에 암시된 '메나안님'(Menaannim), 즉 '시스트럼'은 구부린 쇠장대 사이에 느긋한 고리나 방울들을 매달아 소리 나게 한 것이다. 악기에 대한 자세한 고찰은 rh'ma(레마) 종합자료씨리즈 제10권, 고전 14장 특별 자료 '성경에 나타난 여러 가지 악기들' 부분을 참조할 것.
Ⅴ. 예배에서의 시편 사용
비록 모든 시가 예배를 위해 예배용으로 저술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또한 '헹스텐버그'(Hengstenberg)와 올스하우젠(Olshausen)이 말한 것과 같이 모든 시가 하나님의 교회에 직접적인 관계를 지니고 있지 않다 할지라도 시편 중의 많은 양이 이러한 예배적 내용과 형식을 지니고 있음으로 인해 제1성전인 솔로몬 성전 때와 에스라 성전인 제2성전 때에 많은 부분이 예배적 목적에 이바지하였다. 뿐만 아니라 시편 중의 어떤 시들은 아예 처음부터 성전의 신령한 봉사를 목적으로 이바지하였다. 뿐만 아니라 시편 중의 어떤 시들은 아예 처음부터 성전의 신령한 봉사를 목적으로 제작된 것들도 많은데 이러한 사실은 예배에서의 시편의 용도에 대한 연구를 더욱 필요한 것이 되게 한다. 이러한 예배에서의 시편 사용에 대한 연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로 분류된다.
1. 절기 때의 시편 사용
1) 절기 때의 시편 사용에 대한 성경적 증거
역대상 16장에서 시 105편을 인용, 사용하였다는 것이 우리에게 어떠한 결론을 내려 주든지 간에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러한 사실이 당시의 절기 때에 성전에서 시편을 노래하는 관습이 있었다는 것을 증거한다는 점이다(Hengstenberg). 이에 대한 증거들은 구약성경 곳곳에서 증명된다. 먼저 유다의 히스기야 왕은 성전에서 서원하며 하나님께 찬송하였고(참조, 사 38:20), 예레미야 선지자도 '만군의 여호와께 감사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하는 소리와 여호와의 집에 감사제를 드리는 자들의 소리가 다시 들리니라'(참조, 렘 33:11)고 증거함으로 그들이 성전 예배의 규례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와 동시에 시편의 예배에서의 사용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대하 5:13; 7:13; 20:21; 스 3:11에서 시 136편의 시를 인용하였다는 사실 역시 시편이 절기의 노래로 제2성전 때에 예배용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증거하는데 이러한 사실은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에서 자주 나타나는 '찬양과 감사의 노래'라는 단어가 '할렐 시군'과 깊은 관계를 지니고 있으며, 특히 시 105, 107, 136편 찬양과 깊은 관련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명확히 입증된다. 뿐만 아니라 많은 시들, 특히 제4권과 5권의 시들 중에서 많은 시들이 에스라 9장과 느헤미야 9장의 기도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과 70인역에 제2성전 시기에 예배에서의 시편 사용을 주장하고 있는 점들은 시편이 여러 용도로 그 당시의 예배와 절기에 사용되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2) 절기 때에 사용된 시편들
탈무드의 '미쉬나'(Mishna)는 매요일마다 아침 제사 때 낭송되어야 할 특별한 시편들을 규정해 놓고 있는데, 그것에 따르면 주일 첫날 아침 제사에는 레위인이 제24편을 불렀고, 둘째 날은 시 48편을, 셋째 날에는 시 82편, 넷째 날은 시 92편을, 다섯째 날에는 시 81편을, 그리고 여섯째 날은 시 93편을, 일곱째 날은 시 92편을 낭송하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외에도 그 관습이 일부 변경되기는 하였으나 중요한 절기에 사용되던 시편들은 그대로 사용되었는데 예를 들면 현재까지도 시 65편이 장막절 끝 날에 불려지며, 시 29편은 오순절에 낭송되어진다는 것 등이다. 그러나 70인역은 이와 달리 시 29편을 장막절의 끝 날에 암송되어야 할 시로 규정하였고, 후기의 주석가들은 장막절 중간에 시 6편과 12편, 29편, 시 50:16; 81:7; 82:5; 94:8, 16 등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시 30편은 추수의 첫 이삭을 바칠 때 부른 노래이다. 유월절에는 주로 '할렐 시군'이 낭송되었는데 시 113편과 114편은 식사 전과 둘째 잔을 받기 전에 낭송되었고, 시 111-118은 식사 후에와 넷째 잔을 채운 후에 낭송되었다. '만월'(full moon)에는 할렐 시를 관습적으로 불렀다. 이렇게 그 시대의 장절들을 기입해서 사용한 실례들에 대해 '델리취'(Delitzsch)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① 유월절 마지막 날에 유월절 7일 동안 버들가지로 덮은 번제단 주위를 빙빙 돌면서 제사장들이 호산나를 외친다. ② 시 44:24은 재난과 배신의 날에 레위인들이 날마다 소리 질러 낭독한다. ③ 시 127:1은 예루살렘 귀족들이 속죄일 전날 밤에 사용하였고 대제사장이 이 밤에 졸음을 이기려고 중복해서 암송하였다.
2. 예배 때에 사용된 시들
예배에 사용된 시들은 대부분 그 시의 표제의 의미와 일치하는 특별한 예배에 맞게 사용되었는데 그 중요한 사용은 다음과 같다.
1) 안식일 예배; 안식일은 특별한 예배인 동시에 절기에도 포함되는 독특한 절기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안식일 예배시에 사용하는 시편을 따로 정하지 않고 탈무드가 증거한 그대로 일곱째 날에 낭송되었던 시 92편을 안식일 예배의 시로 사용하였다.
2) 시 30편의 '성전 낙성가'; '다윗의 시 곧 성전 낙성가'로 명명되어 있는 시 30편은 성전의 봉헌시, 또는 낙성식에 주로 사용되는데 '성전 낙성가'라는 말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견해로 분류된다. 첫째, 이 시를 왕궁의 봉헌식 때로 보는 견해. 주로 '칼빈'(Calvin)과 '클라우스'(Clauss)에 의해 주장되는 이 견해는 '집'이라는 단어가 '왕궁'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고, 다윗의 왕궁이 압살롬의 반역에 의해 더럽혀졌으므로 정결케 해야 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에 이 시편은 다윗이 압살롬의 반란으로 인해 더럽혀진 왕궁을 정결케 하면서 사용한 시라고 해석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본문의 역사적 배경이 염병으로부터의 구출이었으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 둘째, 시온 성곽의 재축성과의 관련으로 보는 견해. 다음으로 제기되는 견해가 다윗이 시온 성곽의 재 축성을 기뻐하며 감사함으로 저술한 시라는 견해이다(참조, 삼하 5:12). 그들은 시온 성곽 건축에 대한 다윗의 생각이 그의 왕국의 견고함과 위대함의 서약으로 생각했던 사실을 환기시키며, 이 논리를 말하면서 간접적으로는 심한 병을 막아내고 물리친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 역시 완전한 것은 못 된다. 셋째, 미래에 건축될 성전을 바라보고 지은 시라는 견해. '헹스텐버그'(Hengstenberg), '카일'(Keil), '톨룩'(Tholuk) 등에 의해 주창되는 이 학설은 다윗이 미래에 건축될 장엄한 성전의 모습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믿음으로 저술한 시라는 견해이다. 이러한 견해는 비록 다윗이 자신은 하나님의 진노인 염병에 걸리지 않았을지라도 그것의 치유를 위해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서 단을 쌓았고(참조, 삼하 24:18-25), 그곳에 바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거룩한 곳인 성전 부지였다는 사실로 인해 가장 타당성 있는 견해로 받아들여진다.
3) 감사제에 사용되는 시; 많은 학자들에 의해 감사제에 사용되었으리라 추측되는 시는 시 100편이다. 그것은 시 100편의 표제가 '감사의 시'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인데 주로 '에발트'(Ewald)와 '델리취'(Delitzsch)에 의해 강하게 주장되고 있다.
4) 회개시에 사용되는 시; 회개 때에 사용되었으리라 추측되는 시들은 시 6편과 32편, 38편, 그리고 51편과 130편 등인데, 주로 다윗의 시인 이들 시에 나타난 애통하는 마음과 회개하는 자의 처절한 비애는 이러한 견해를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이기에 충분하다. 이제 이러한 절기들과 시편과의 관계, 그리고 특별 예배와 그때에 사용된 시편들에 대해 도표로 나타내 보면 다음과 같다 (참조, 시편 도표3).
Ⅵ. 시편의 분류
시편의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가 여러 가지 주제에 의해 다양하게 분류될 수 있는 점이라는 사실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이에 대한 구체적 언급은 제1부, Ⅳ. 1. '특징' 부분 참조). 이렇듯 다양하게 분류될 수 있는 시편이기에 예로부터 시편은 여러 학자들에 의해 많은 방법으로 분류되어 왔으나 그중 어느 것도 아직까지 완벽하게 분류하지 못했다는 것이 학자들의 솔직한 고백이다. 그러므로 본 서론에서 제시하는 분류법 역시 완전한 것이라 단정할 수는 없다. 단지 본 서론에서는 많은 자료를 종합 검토하여 가장 보편적이고 공통적인 분류법을 추출, 소개하고자 한다.
1. 교훈적인 시
이 시들은 시편 1편에 나타난 복 있는 자와 악인에 대한 강론처럼 일정한 주제를 선정해 놓고 그것을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방법으로 강론해 나가는 '교훈시'로서 교훈과 훈계를 목적으로 한시들이다. 다음과 같은 시들이 이러한 교훈시에 속한다. 시 1, 5, 7, 9, 10, 12, 17, 19, 25, 34, 36, 37, 49, 50, 52, 73, 82, 92, 94, 101, 111, 112, 114편의 스물세 개.
2. 민족적인 시
'민족적인 시'란 한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은 역사적인 사건들과 그들의 삶, 그리고 그들과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묘사한 시들이다. 민족적인 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역사적 사건을 사실 그대로 기록한 시로서 시 14, 44, 46, 47, 48, 53, 66, 68, 74, 76, 79, 80, 83, 85, 87, 108, 122, 124, 129편 등 모두 이십 개의 시이며, 둘째는 단순한 역사의 기록보다는 이스라엘의 역사 저변에 도도히 흐르고 있는 여호와와 이스라엘과의 언약 관계를 상세히 기술한 시로서 시 79, 81, 105, 106편 등 네 개의 시이다. 그러나 비록 이들의 논조가 약간씩의 차이를 보이고 있고 그 관점이 다르다 할지라도 모두 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두 가지 다 민족적인 시라는 커다란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다.
민족적인 시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축복과 인도로부터 시작된다(참조, 시 105:6, 9). 그러나 보다 본격적인 역사의 기록은 출애굽으로부터 시작된다(참조, 시 80:8). 민족적인 시에는 열 가지 재앙(참조, 시 79편; 시 105:23-36)과 홍해를 건넌 일(참조, 시 66:6; 74:13; 78:1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인도하신 일(참조, 시 78:10, 37), 실로의 재난(참조, 시 78:60)이 발생했었다는 사실과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이 유다 지파에게 임했으며(참조, 시 66:1, 2; 78:68), 그 중에서도 그리스도의 조상이 된 이스라엘의 충실한 목자 다윗에게 임한 사실(참조, 시 78:70-72)이 기록되어 있다. 이외에도 민족적인 시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언약 관계, 즉 하나님은 끝까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며, 이스라엘은 그에게 순종할 의무와 동시에 자신들을 돌보실 것을 구할 수 있다는 언약 관계가 언급되어 있으며, 그들의 종교적 중심지인 '시온'애 대해 기록되어 있다.
3. 회개의 시
주로 죄에 대한 고백이 주를 이루는 이 시들은 죄에 대한 심한 슬픔과 하나님의 용서를 바라보고 악의 길에서 돌아서는 슬픔과 소망이 엇갈리는 시들이다. 이러한 시의 대표적인 작품들은 시 6, 32, 38, 51, 102, 130, 143 편의 일곱 편인데, 이중 6편과 102편은 그 죄가 무엇인가를 명백하게 밝히지 않고 있다.
시편에 나타난 참회시의 기본은 인간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악의 실존과 그 보편성에 대한 의식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주여 주가 서리이까'(참조, 시 130:3). 시편은 비록 원죄와 그것의 유전에 대해 명확하게 언급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인류의 죄는 뿌리박힌 것, 또는 유전적인 것으로 이해하였다(참조, 시 51:5; 58:3). 이러한 죄는 무서운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을 야기 시키는데 그러한 하나님의 심판은 절대적으로 정당하며(참조, 시 51:4), 그로 인하여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던져져 멸망 받는다는 것이 죄에 대한 시편의 증거이다(참조, 시 73:27; 102:10, 11).
그러나 시편의 회개의 시에 나타난 죄에 대한 개념은 그러한 절망과 좌절로 끝나지 않는다. 시편은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의 소망을 분명히 밝힘으로써 범죄한 인간에게 새로운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이다. 비록 인간의 도움은 헛되지만(참조, 시 60:1; 108:12) 하나님은 그의 계시된 언약을 통하여 용서하신다(참조, 시 32:5; 65:3). 이러한 의미에서 구원은 죄가 도말되고(참조, 시 51:1, 9) 다시는 정죄 받지 않는(참조, 시 32:2) 하나의 '사법적인 사건'이라는 것이 시편의 증거인 것이다. 이러한 구원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이루어진다(참조, 시 143:10)는 것이 회개의 시에 나타난 또 다른 사상이다. 시편이 증거하는 성령의 역사는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짓지 못하게 보호하실 뿐만 아니라(참조, 시 19:13), 죄를 뉘우치게 하시며(참조, 시 32:4), 주님 자신을 위해 인간을 선택하시고(참조, 시 65:4), 인간을 죄의 길에서 돌이켜(참조, 시 80:3; 85:4) 영원한 길로 인도하신다(참조, 시 139:23, 24)는 것이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에 인간이 반응해야 한다는 것이 또한 시편의 가르침이다. 이 반응이 곧 '회개'인데 그 회개는 죄에 대한 슬픔(참조, 시 38:18)과 죄에 대한 자백(참조, 시 51:3; 32:5), 그리고 상한 심령을 통한(참조, 시 51:17; 78:37) 죄의 포기를 수반한다. 이러한 수단을 거쳐야만 비로소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참조, 시 130:1, 2; 143:1). 이러한 자에게 회개의 시는 두 가지 결과가 나타난다고 주장하는데 '내적인 결과'로는 '구원의 즐거움'(참조, 시 130편)과 '영원히 거한다는 보장'(참조, 시 145:1)이 주어지고 '외적인 결과'로는 이 세상으로부터의 부분적인 해방과 함께 궁극적인 영광이 도래한다(참조. 시 16:11; 73:24)는 것이 회개의 시의 결론이다.
4. 저주의 시
'저주의 시'는 악한 사람들을 멸망시켜 달라거나 그들에게 재앙을 내려달라고 비는 기도이다. 비록 저주에 관한 언급이 시 5, 7, 28, 54, 55, 58, 59, 79, 83, 101, 139편에 나와 있으나 가장 철저한 저주의 시편은 35, 69, 109 및 137편의 네 편이며, 이들 중 137편을 제외한 나머지 세 편의 시는 모두 다윗의 저작이다. 이와 유사한 기도가 신약성경에도 기록된 바 있다(참조, 갈 5:12; 딤후 4:14; 계 6:10). 한편 저주의 시편에 대해 신약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사상과 너무도 큰 차이가 있다는 점을 들어 이 시편의 진위성을 의심하는 견해가 많이 대두되고 있으나 그러한 난제는 쉽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들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고찰은 Ⅶ. '시편의 신학' 중 '저주의 시편에 대한 고찰' 부분에서 자세히 다루기로 하겠다.
5. 메시아에 관한 시
'메시아에 관한 시'들은 미래에 이 땅에 강림하실 구속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을 기록한 시들이다. 이 시들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그 첫째가 왕이신 메시아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시 2, 18, 20, 21, 45, 61, 72, 89, 110, 132)에 대한 예언이며, 둘째는 고통당하는 메시아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시 22, 35, 41, 55, 69, 109)에 대한 예언이고, 셋째는 메시아에 대한 그 외의 전반적인 예언들이다(시 24, 31, 50, 68, 96, 97, 98, 102, 118). 메시아의 시편과 시편에 나타난 그리스도에 대한 자세한 고찰은 Ⅶ. '시편의 신학' 중 '메시아에 관한 시' 부분에서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6. 찬양의 시
'할렐루야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말로써 시작되는 시편들로서 시 106, 111, 112, 113, 117, 135, 146-150편 등이 이에 속한다. 이 시들은 감사의 시나 애원, 간구나 애가와는 달리 오직 여호와를 찬양하는 내용으로만 가득 차 있는 시들이다.
7. 개인적이거나 민족적인 슬픔을 노래한 시
이 시들은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 달아날 때 지은 슬픔의 시(참조, 시 3편)와 같이 개인적인 차원에서나 민족적인 차원에서 당하는 고난이나 고통, 슬픔을 노래한 시이다. 이러한 시에는 고난을 당하는 자의 비참한 심정과 처절한 고통을 표현하고 있는데 단순히 그러한 슬픔과 좌절로 끝맺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상태를 하나님께 아뢰고 탄원하는 신앙으로까지 승화시킨 시들이 많다. 그러므로 슬픔을 노래한 이 시들을 바꾸어 말하면 여호와를 향한 간절한 기도라고 할 수도 있다. 이러한 시들에는 시 3, 4, 5, 7, 11, 13, 17, 26, 27, 28, 31, 39, 41, 42, 43, 44, 54, 55, 56, 57, 59, 60, 61, 62, 63, 64, 70, 71, 74, 77, 79, 80, 86, 88, 90, 140, 141, 142편 등 모두 서른여덟 편 등이다.
8. 예배 의식용 시편
예배 의식용 시편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그 첫째는 종교적인 감사 행사에 사용되는 '감사의 시'로서 대부분 '너희는 여호와께 감사하라'는 말로 시작되는 시이며, 시 16, 18, 105, 107, 118, 136편 등이 이에 속한다. 둘째는 '할렐시'라 불리는 113-118편이다. 이 시들은 이스라엘의 삼 대 절기인 유월절과 장막절, 그리고 오순절에 사용되었다. 셋째는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표제가 붙은 시 120-134편이다. 이 시들은 유대인들이 범국가적인 명절에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에 사용한 시들로 추측된다.
이제 이러한 분류를 간략하게 분류표로 작성해 보면 다음과 같다 (참조, 시편 도표4).
Ⅷ. 시편의 신학
1. 시편의 신관
1)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시편의 증거
시편은 하나님의 실재를 증명하려 하지 않는다. 시편의 시론은 하나님의 실존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전제로 하며, 때문에 시편에는 하나님의 실존에 대한 논쟁이 나타나지 않는다. 때로 시 10:4; 14:1; 53:1과 같이 '하나님이 없다'라는 말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논쟁의 여지를 허락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자들의 이론을 수용하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하시는 하나님을 깨닫지 못하고 그분의 주권을 인정치 않으려는 악인들의 어리석음과 사악함, 그리고 그들의 무지를 증거하는 것에 불과하다(참조, 시 10:4; 14:1, 2, 4; 53:1). 오히려 시편은 하나님의 인격을 증거하되 때로 '신인동형론'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실제적이고 사실적이며 구체적으로 묘사함으로(참조, 시 2:4) 당신의 피조물의 안녕과 행복에 관심을 가지시는 참 인격자로서의 주님의 실존을 증거하였다(참조, 시 73:26). 이처럼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대한 지루한 논쟁을 접어 두고 처음부터 하나님의 실존에 대한 확실한 믿음에서부터 출발한 것이 시편에 나타난 신론의 특징이다.
2) 하나님의 절대성과 계시로서의 시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다.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의 방법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계시'밖에 없다. 계시는 '자연 계시'와 '특별 계시'로 분류된다. 그런데 시편에는 하나님을 드러내는 이러한 두 가지 계시가 모두 다 나타나있다. 시 19편에 드러나는 자연 계시는 모든 자연이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 그리고 그의 속성을 선포하고 있으며, 따라서 인간은 결코 그 앞에서 핑계할 수 없음을 증거하고 있다.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시 19:3, 4). 이와는 달리 시 119편에 드러나는 특별 계시는 모세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과 죄인의 영혼이 소생되는 방법이 기록되어 있다. 시 119편에 기록된 모세의 율법은 자연이나 우주 만물보다도 더욱 분명하고 확실하게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 그리고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을 계시해 주고 있는데 이러한 의미에서 시 19편에 사용된 '지존자', '전능자'라는 뜻의 <lae ; 엘> 또는 <!yhiloa> ; 엘로힘>이라는 하나님의 이름의 시 119편에 와서는 '(주님이) 임재하신다'라는 의미와 자신이 인간들과 언약을 맺으실 때 주신 고유의 이름인 <hwhy ; 야웨>로 바뀌었다.
3) 유일신론에 대한 시편의 개념
유일 신앙은 이미 모세 오경에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었는데 시편은 그러한 유일신관을 다시 한 번 반복하고 강조하였다. 시편 중에서 유일 신앙을 가장 분명하고 확실하게 드러낸 시는 115편과 86편이다.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시 115:3). 시 115:4-7절은 여호와 외의 이방신들과 우상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거기서 시편 기자는 우상의 무익함과 무능력, 그리고 헛됨을 강조하고 있다. 진정 시편은 '여호와만이 하나님이심'(참조, 시 86:10)을 주장하고 있으며, 이것이 시편에 나타난 신관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시편에서는 전능자 하나님을 뜻하는 <!yhiloa> ; 엘로힘>이 하나님 이외의 다른 의미로도 사용되었는데 그것은 '천사들'(참조, 시 8:5)과 하나님의 대표자로서의 인간들, 즉 '제사장들'(참조, 시 82:7)이다.
4) 시편에 나타난 하나님의 속성
시편에는 하나님의 여러 가지 속성들도 나타나는데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속성이 시편에 나타난 하나님의 대표적인 속성이다.
(1) 무한성
하나님의 무한성은 시편의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시편이 보여 주는 하나님의 무한성은 시 90:2와 시 102:12이 보여 주는 '시간적 무한성'과 시 139편이 보여 주는 '공간적 무한성', 즉 '하나님의 편재성' 두 가지이다. 하나님의 '성전'은 하늘 자체이다(참조, 시 11:4). 그렇지만 그는 동시에 그가 원하시는 모든 곳에 임재해 계신다. 그분은 시내 광야에도 계시며(참조, 시 68:7, 8), 예루살렘에도 계셨으며(참조, 시 20:2; 시 27:4), 동시에 개인에게도 임하셨다(참조, 시 139:18; 145:18). 이 외에도 시 139편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는데 시 139:1-6은 하나님의 영원한 지식과 지혜, 즉 그의 전지성에 대해 증거하고 있으며, 시 139:13-18은 그의 영원한 능력, 즉 하나님의 전능성에 대해 증거하고 있다.
(2) 여호와의 공의
주님의 공의는 시 5편 특히 4절과 8절에 잘 나타나 있다. 그의 공의를 특징적으로 잘 드러내 주는 두 개의 단어는 <tm,a> ; 에메트>와 <qd,x, ; 체데크>의 두 개다. '신실함', '의'를 뜻하는 <tm,a> ; 에메트>는 '의'라는 개념보다도 본래는 '확고부동한', '움직이지 않는'이라는 의미가 더욱 강해 '자신의 언약에 성실하신 하나님의 신실함'과 그러한 의미에서의 의를 뜻한다. 반면 <qd,x, ; 체데크>는 '올바른', '정직한'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 그의 공정하심과 그러한 의미에서의 의를 뜻한다.
(3) 여호와의 선하심
이것은 시 103편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찬양의 주제이며, 그 외의 많은 시들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시편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하나님의 선은 '여호와의 긍휼'(참조, 시 17:7; 86:15)과 '그의 부권'(참조, 시 27:10; 86:26)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시편이 강조하고 있는 하나님의 선은 <ds,j, ; 헤쎄드>, 즉 그의 '변함없는 사랑'이다. 본래 <ds,j, ; 헤쎄드>는 그의 신실하심을 근거로 하고 있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불변하신 사랑은 '정의'와 '평화'를 가져온다. 그리고 이 화평은 인간으로 하여금 완전한 구원에 이르게 한다. 이 외에도 시편은 하나님의 거룩성, 즉 그의 성경을 강조하고 있는데(참조, 시 99), 시편은 여호와 거룩을 '그의 신성의 완성'이라는 의미에서 증거하고 있다.
2. 저주의 시편에 대한 고찰
'저주의 시편'이라 불리는 시는 시 35, 69, 109, 137 의 네 편이다. 이들 시는 모두 악인과 죄인이 하나님의 진노로 멸망 받게 되기를 격한 어조로 저주하고 있다. 그런데 자유주의 학자들은 이러한 저주의 시가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위배된다고 말하면서 저주의 시들에 대한 의문을 표시해 왔다. 그러나 '저주의 시'가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이유와 증거는 여러 가지가 있다.
1) 시적인 표현으로서의 저주
'그 피에 네 발을 잠그게 하며'(시 68:21, 23)라는 표현과 같이 어떤 저주들은 실제적인 저주가 아닌 그 당시의 문장 습관이나 과장 어형에 불과하다. 이러한 사실은 저주의 표현이 얼마든지 시편에 삽입될 수 있음을 증거하는데 시의 구성상 그러한 표현이 사용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합법적인 문형 속에서 상징적인 의미의 시적인 표현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것 자체가 오히려 어색한 논리요, 억지 주장에 불과한 것이다.
2) 죄에 대한 혐오로서의 저주
성경의 저주는 아무에게나 분명한 이유도 없이 행해지지 않는다. 성경의 저주는 분명한 대상이 있고 이유가 있다. 구약이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는 저주의 대상은 선인이나 의인이 아니다. 구약의 저주는 사탄을 그 궁극적인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참조, 나 3:19), 그를 따르는 악인과 그들이 저지른 행악이다. 시 50:21 은 이러한 시편의 입장을 분명히 밝혀 준다. 그러므로 시편의 저주는 정당한 것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저주가 아니라 도리어 죄인과 악한 자, 사탄의 추종자들에게만 임하는 그리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3) 원수 갚는 일을 하나님께 맡기는 형태의 저주
시편의 저주가 정당한 것으로 인정되어야 할 또 다른 이유는 시 58:11과 시 104:34, 35과 같이 저주의 주관자를 하나님으로 믿고 그분의 공의에 의지하였다는 데 있다. 이것은 다윗이 저주를 내리며, 그 저주를 행하는 당사자가 아니라 모든 저주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심과 인간은 그분의 결정과 뜻을 따르고 의지할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며, 이러한 신앙하의 저주이므로 그것은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4) 개인적 목적을 초월한 적극적 목적으로서의 저주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 했던 사울을 미워하지도 저주하지도 않았으며, 그의 악행을 흔쾌히 용서했다. 시 109:2-5에서도 그는 개인적인 복수심을 쾌히 포기하였다. 그러나 이렇듯 원수 갚는 것과 복수를 아무런 미련 없이 포기했던 그였지만 여호와 하나님을 거스르고 거역하는 죄에는 어떠한 자비심도 베풀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개인적인 감정과 복수심은 자제해도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공적인 죄에는 어떠한 자비도 베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시편의 저주가 정당한 것으로 인정받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단지 시편의 저주는 하나님 자신에 대한 모욕이나 저주뿐만 아니라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자에 대한 압제 역시 하나님 자신에 대한 압제로 여기고 저주하였다는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개념이 정당화되는 것은 '저희가 주의 백성을 치려고 간계를 꾀하며… 주를 대적하여 서로 언약하니'라는 시 137:8의 말씀에서 잘 입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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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사후의 벌에 대한 무지로 인한 저주
시편이 기록될 당시는 악한 자가 사후에 심한 벌을 받을 것이라는 사상이 극히도 미약했다. 당시에는 악인의 받을 벌이 이생에서 국한된 것으로 생각하였고 따라서 이생에서 받을 극악한 형벌을 저주했던 것이다. 사실 악한 자가 받을 벌이 사후에 매우 클 것으로 생각한 것은 신약 시대에 와서 발전된 개념이었다(참조, 막 9:44, 46, 48; 계 20:15). 그러므로 그 당시의 상황에서 내려진 저주는 그 당시의 상황에 적합한 저주였다고 보아야 한다.
6) 신약의 사상과 조화되는 구약의 저주
구약은 주로 이생에서의 고난과 고통에 대한 저주가 상세하게 기술된 반면에 신약은 이생에서 원수를 사랑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것은 위에서 밝힌 대로 그 당시에는 사후의 삶에 대한 무지와 신약보다는 낮은 도덕 수준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신약에서의 저주가 구약보다 못한 것은 아니다. 이생에서의 저주에 대해서는 극히 적은 부분만을 다른 신약성경은 도리어 사후에 당할 죄인의 고통과 고난을 더욱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기록하였는데(참조, 마 3:7; 11:20-24; 23:13-33; 요 3:36; 계 6:16, 17) 이러한 사실은 신약의 저주가 구약의 저주보다 결코 가벼운 저주가 아니며, 구약은 율법과 저주, 신약은 사랑과 복음이라는 통념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좋은 증거인 것이다.
3. 메시아적인 시편에 나타난 메시아관
시편에는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해서는 예언하고 있지 않다. 시편이 집중적으로 예언한 그리스도의 생애는 주로 그이 수난과 부활의 영광이며, 메시아의 왕적 통치에 관한 것이었다. 따라서 메시아의 예언에 관한 본 서론의 고찰은 시편이 그려낸 그리스도의 통치권과 수난, 그리고 그의 영광을 살펴보는 것에 초점이 맞춰질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제로 들어가기 이전에 먼저 구분해 놓아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시편이 그리스도를 1인칭과 2인칭, 그리고 3인칭으로 표현하고 있으므로 먼저 그것을 구분해 보는 일이다.
1) 메시아에 대한 세 가지 호칭
(1) 3인칭적인 서술
그리스도에 대한 단순한 언급은 시 2편의 결문에 있는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는 3인칭적인 서술이다(그러나 시 2편의 전체적인 호칭은 1인칭으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3인칭적 서술은 그가 다윗의 아들임을 강조함으로써 약속된 메시아, 예언되고 언약된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으로 올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이러한 3인칭적 서술을 명확하게 구별해 내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2) 2인칭적인 서술
그리스도는 때로 2인칭적인 호칭으로 불릴 때도 있었다. 그 직접적인 예가 시 45:6의 '하나님이여 주의(직역하면 '당신의') 보좌가 영영하도다'라는 구절이다. 이러한 2인칭적 사용은 메시아와 인생간의 친밀한 관계를 나타내기 위해 쓰인 듯하며, 우리의 메시아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밝히기 위함인 듯하다. 일단의 학자들에 의해 2인칭적인 표현이 메시아가 아닌 그 당시의 왕이나 하나님이라고 주장되기도 하였으나 현재의 대부분의 학자들은 메시아의 2인칭적인 사용을 본문의 증거 그대로 인정하고 있다.
(3) 1인칭적인 서술
시편에는 그리스도께서 직접 말씀하신 1인칭적인 표현이 나타난다. 이러한 1인칭적인 표현은 구속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분명하게 밝혀 주는 동시에 구원에 대한 메시아의 절대적 주권을 드러내 주는 표현이다. 한편 시 22편 같은 시는 '다윗'이 자신을 1인칭으로 표현하여 기록한 시인데 그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저작을 그리스도의 1인칭적 표현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다윗의 노래 자체가 곧 그리스도의 예언과 마찬가지의 내용을 노래했다는 점과 구약의 여러 곳에서 다윗을 영적인 의미로 그리스도에 대한 비유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참조, 겔 34:24; 37:24, 25)
2) 그리스도에 대한 세 가지 예언
(1) 제왕시
시편에서 메시아의 왕적 통치를 예언한 시편은 시 2, 8, 45, 72, 89, 110, 112 등 모두 일곱 편이다. 이들 시편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권은 다음과 같다. ① 시 2편: 시 2편은 먼저 메시아의 왕적 통치권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인간들, 특히 세상 군왕들의 헛된 노력을 보여 준다(2절; 행 4:27). 그 후 시편 기자는 그러한 노력의 무익함과 함께 모든 것을 초월한 절대 권력의 소유자이신 메시아의 주권을 소개하고(4-6), 모든 사람에게 주께 복종하라는 권면의 말씀으로 종결짓는다. ② 시 8편: 시 8편의 주제는 '마지막 아담'이다. 즉 8편은 궁극적 구원자로서의 예수와 모든 것의 완성자이신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③ 시 45편: 시 45편에서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에서의 메시아 개념이 명확하게 드러난다(6, 7절). 그리고 '동류보다 승한 왕의 주권'(7절)과 그 왕의 성품과 그의 바람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④시 72편: 시 72편은 그리스도의 통치가 미치는 영역을 은유적으로 표현하였는데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와 강에서부터 땅끝까지 다스리리니'(8절)라는 표현은 전 우주에 대한 그의 통치권을 의미한다. ⑤ 시 89편: 시 89 편은 메시아의 신실함에 대한 신실함과 함께 극명하게 드러남을 증거한 것이다. ⑥ 시 132편: 시 132편은 경배 받으시기에 합당한 메시아의 주권과 영광에 대한 기록이다. ⑦ 시 110편: 시 110편은 왕의 통치권에 대한 예언 중 가장 의미심장하다. 즉 시 110편은 신약성경에서 16번 인용되어 있으며, 그리스도의 신성과 그리스도의 승천, 그리고 그리스도의 천년 왕국의 통치에 대하여 말하였으며, 끝으로 4절에서 그를 왕인 동시에 제사장으로 규정하였던 것이다.
(2) 수난의 시
시편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해 기록한 시는 16, 22, 40, 69, 102, 109 편 등 모두 6편이다. 이들 시편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예언은 다음과 같다. ① 시 40편: 시 40:6-8은 히 10:5-9에서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위해 성부 하나님과 함께(참조, 요 4:34; 6:38; 17:4) 기꺼이 구속의 언약을 맺으시겠다고 말한 내용이다. ② 시 102편: 시 102편은 제한된 피조물과 대조되어 영원성을 소유한 메시아의 무한적인 특성에 대하여, 그리고 그의 종들을 위한 구속의 의미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③ 시 69편과 109편: 이들 두 시편은 다윗의 적들에 대한 일반적인 저주(참조, 시 69:4, 10-12, 18-24, 26-28; 109:2-5, 20, 25, 28, 29)를 기록하고 있다. 특이하게 주목할 점은 이들 시편에 두 개의 특수한 예언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성령께서 다윗의 입을 의탁하여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행 1:16) '유다의 배반'이었다. ④ 시 16편: 시 16편은 '음부'로부터의 개선이 예언되어 있다. 여기에서의 '음부'는 '지옥'을 의미하기보다는 '무덤'을 의미하며, 따라서 이 말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예언인 동시에 '무덤'이 그리스도의 파멸이 아니라 승리의 과정이 됨을 증거하는 것이다. ⑤ 시 22편: 이 시는 수난시의 대표적 작품이다. 이 시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수난당하신 일과(1절: 참조, 마 27:46), 조롱받으신 일(7절; 참조, 마 27:39),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으신 일(8절; 참조, 마 27:43)과 갈증을 느끼신 일(15절; 참조, 요 19:23), 그리고 그의 속옷과 겉옷이 제비 뽑혀 분배된 것(18절; 참조, 마 19:24) 등이 예언되어 있다.
(3) 영광의 시
메시아의 영광에 대한 시편의 예언은 시 16:10과 시 49:15에 기록된 메시아의 영광스러운 부활과 시 68:18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승천에 대한 기록이다. 이 외에도 시편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많은 예언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을 도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참조, 시편 도표5).
Ⅷ. 시편 연구의 유익
시편은 그것을 연구하는 자에게 많은 유익을 제공하는데 크게 다음과 같은 두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 시편은 다양한 헌신의 본보기를 우리에게 보여 준다. 다른 모든 성경이 주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말씀들을 기록한 성경인 반면에 시편은 인간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와 애원, 바람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시편은 인간이 여러 가지의 상황과 여건 하에서 어떻게 하나님께 기도드릴 수 있는가를 보여 주는 모범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시편은 저자들의 다양한 삶의 체험을 배경으로 쓰여진 말씀이다. 한 예로 시편의 반 이상을 저술한 다윗은 비천한 목동에서부터 왕의 궁중에서 시종 드는 사람으로, 그리고 승리한 전사요 망명자이며 위대한 왕으로까지 많은 체험을 한 자였다. 또한 그는 가난하기도 했고 부하기도 했으며, 미움을 받았는가 하면 사랑도 받았고, 박해와 영광을 받기도 했으며, 방탕한 자인 동시에 참회하는 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다윗은 이러한 다양한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결코 하나님을 향한 그의 사랑과 믿음을 잃지 않은 채 그의 모든 생각과 느낌들을 하나님께 아뢰었고 시로 기록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은 그것을 읽는 자로 하여금 같은 경험을 하고 같은 상황에 처할 때에 하나님께 어떤 기도를 드려야 하고 어떠한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를 보여 주는 모범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을 연구하는 자는 그 안에서 하나님께 좀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분명하고도 확실한 길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둘째, 시편은 인생이 어려운 시기에 처하였을 때 그것을 극복하는 실제적인 길을 제시한다. 시편은 실제적인 체험을 통해 체득한 진리로도 가득 차 있다. 다윗은 자신의 엄청난 죄를 깊이 깨닫고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혐오를 느낌으로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진리를 체험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대적으로부터 보호받음으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실제적이고도 무한한 진리를 깨달았으며, 자신의 기도에 즉각적으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응답을 체험하였다. 이러한 실제적인 체험들은 추상적이거나 이론적인 믿음과 교훈이 아닌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진리들을 제공해 주며, 실제적인 헌신의 모범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제3부: 히브리 시의 특성에 대한 고찰
구약에서 '시가서'라 말할 때는 대부분 '시편'과 '잠언' 그리고 '욥기'를 가리킨다. 그런데 시편은 시의 요소뿐만 아니라 얼마의 부분은 지혜를 다루고 있어 그 부분을 '지혜시'라고 불리기도 하며, 잠언과 욥기는 시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기는 하지만 지혜의 요소를 더 많이 지니고 있기 때문에 '전도서'와 함께 '지혜서'로 부르기도 한다. 본 서론은 이러한 분류를 따라 본문에서는 시가서의 특징, 즉 히브리 시의 특성에 대해서만 생각하기로 하고 지혜 문학의 특성과 히브리인의 지혜 개념에 대해서는 '잠언'의 서론 부분에서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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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구약성경에서의 시적 표현 사용
구약성경 중 3분의 1은 완전히 시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시편, 잠언, 아가, 예레미야 애가, 오바댜,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서는 표제를 제외한 모든 부분이 온전한 시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이 외에 비록 전부는 아니지만 대부분이 시로 이루어져 있는 성경들도 있는데 그것들은 욥기와 이사야, 그리고 호세아와 요엘, 아모스서이다. 예레미야서는 그 절반가량이 시로 되어 있다. 그리고 구약의 몇몇 책들, 이를테면 창세기, 출애굽기, 민수기, 신명기, 사사기, 사무엘상렷? 전도서, 에스겔, 다니엘, 스가랴서는 대체로 산문체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많은 부분이 시로 이루어져 있다. 구약성경 중 시가 단 한 줄도 들어가지 않은 책은 레위기, 룻기,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학개와 말라기의 일곱 권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히브리 성경에 있어서 시의 사용은 대단한 부분을 차지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히브리 시의 특성과 구조를 살펴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작업이 되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히브리적 문체의 시들이 누가복음과 요한계시록에도 나타나는데 누가복음에는 눅 1:68-79의 '사가랴의 찬양' 부분과 눅 1:46-56의 '마리아의 찬양', 그리고 눅 2:29-32의 '시므온의 찬송'이 이러한 시적 표현을 사용하였고, 요한계시록에서는 계 4:11; 5:9, 10; 7:15-17; 11:17, 18; 15:3, 4; 18장; 19:1-8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외에 예수님의 여러 경구적인 표현에서도 히브리 시의 병행법적 구조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는 대체로 시가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
Ⅱ. 히브리 시에 있어서의 전문적인 용어
히브리 시에는 그 구조를 분해할 때 사용되는 몇 가지 전문적인 용어가 있다. 이에 대해 '시버스'(Sievers)는 다음과 같이 알기 쉽게 설명해 놓았다. 시 문장의 '절'(Verse)에서 단일 리듬이나 악센트를 가지는 단어 또는 구를 '푸트'(foot)라 한다. 이러한 '푸트'는 행 또는 절을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단어이다. 두 개의 '푸트'가 모여서 '반행'(half-line)을 이루고 두 개의 '반행'이 모여서 하나의 '행'이 된다. 보통은 두 개의 행이 모여 한 절을 이루지만 가끔 세 개의 행이 모여 한 절을 이룰 때가 있다. 행은 영어로 '스틱'(Stich) 혹은 '코올런'(colon)이라 불리며, 때문에 반행은 '헤미스틱'(Hemistich) 혹은 '헤미코올런'(Hemicolon)이라 불린다. 이 외에도 절을 부를 때는 두 개의 행으로 이루어진 절은 '디스틱'(Distich)으로, 세 개의 행으로 이루어진 절은 '트리스틱'(Tristich), 혹은 '트리코올런'(Tricolon)이라 분류하여 부른다. 이제 이러한 용어들을 시 62:4을 예로 들어 도식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이 시는 '입으로는'과 '축복이요', 그리고 '속으로는'과 '저주로다'라는 네 개의 '푸트'(foot)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이 네 개의 '푸트'가 다시 두 개씩 결합하여 '반행'(헤미스틱 또는 헤미코올런)을 이루고 두 개의 반행이 합쳐져 '행'(코올런 또는 스틱)인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로다'라는 문구가 이루어진 것이다.
Ⅲ. 히브리 시의 특징
히브리 시의 대표적인 특징은 對句法, 또는 평행체라고도 불리는 병행법이다. 이것은 사상에 대해서는 사상으로, 구절에 대해서는 구절로, 그리고 낱말에 대해서는 낱말로 균형을 잡고자 하는 유대인들의 독특한 창작 습관에 기인된 일종의 균형과 조화의 법칙이다. 이러한 병행법은 여러 가지로 분류할 수 있으나 크게 '동의적 병행법'과 '반의적 병행법' 그리고 '종합적 병행법'의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1. 동의적 병행법
동의적 병행벙이란 연속되는 마디 속에 동일한 사상이 반복되는 병행법이다. 그것은 병행법의 유형 가운데 가장 간단하고 쉽게 판별되는 유형이다. 시 24편은 이러한 동의적 병행법을 잘 드러내 주고 있는 대표적인 시이다.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중에 거하는 작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시 24:1-3).
이러한 동의적 병행법에서 두 번째 마디는 의미의 더함이나 덜함이 없이 앞의 마디와 똑같은 사상을 반복한다. 예를 들어 시 24편의 첫 번째 절에서 '땅'과 '세계'는 창조의 두 측면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모두 동일한 의미로서 창조의 전체성을 나타내는 두 가지 방법을 뜻한다. 마찬가지로 '강'과 '바다'도 똑같이 지하 깊숙한 곳의 물을 가리키고, '여호와의 산'은 '그의 거룩한 곳' 즉 '시온의 성전'을 지칭한다. 이러한 반복은 전적으로 미학적인 것으로 동일한 관념을 다른 말로 고쳐서 표현함으로 지속적이고도 영속적인 효과를 거두고자 하는 표현 기법이다.
2. 반의적 병행법
반의적 병행법은 사상의 대조나 반대되는 행을 서로 대조시켜 균형을 이루는 병행법이다. 이러한 반의적 병행법은 첫 구절의 뜻을 뒷 구절의 뜻이 더욱 밝혀 주기도 하며, 뒷 구절의 뜻을 첫 구절이 더욱 분명하게 해주고 강조해 주기도 함으로써 시를 보다 아름답고 박진감 있게 해준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시 1:6). 사람들 앞에 놓여 있는 두 가지의 삶의 길을 강조하는 잠언은 그 특수성 때문에 자연히 이러한 반의적 병행법을 많이 사용하였다. 예) '가난한 자는 그 이웃에게 미움을 받게 되나 부요한 자는 친구가 많으니라'(잠 14:20). '젊은 자의 영화는 그 힘이요 늙은 자의 아름다운 것은 백발이니라'(잠 20:29).
3. 종합적 병행법
종합적 병행법이란 균형을 이루는 마디들 속에 둘째 마디의 요소가 첫째 마디의 사상을 발전시키고 있는 형태의 병행법이다. 즉 둘째 행의 사상이 첫째 행의 의도와 사상을 완성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시 14:1은 이러한 종합적 병행법의 대표적 예라 할 수 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한편 이러한 종합적 병행법을 병행법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없다는 반대가 일어나기도 했으나 두 개의 행이 양적인 균형을 이루고 있는 동시에 병행법의 특징인 '휴지부'(한 사상과 다른 사상의 분명한 구분을 볼 수 있는 형태로서 휴식 부호를 뜻함)를 분명히 보이고 있으므로 분명한 병행법의 한 종류로 보아야 한다. 이 외에도 종합적 병행법을 여러 분야로 나누어 생각하는 의견도 대두되었으나 그러한 견해 역시 인정되지 못하였다.
4. 그 밖의 병행법
1) 교차 병행법
'교차 병행법'이란 하나의 사상을 표현한 후 그러한 사상을 보충하는 두 개의 행을 소개하고 다시 맨 첫줄의 사상을 반복하여 강조하는 형태이다. 이러한 교차 병행법을 명확하게 드러내 주는 시가 시 53:1이다.
a)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b) 주의 인자를 좇아서
c)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서
d) 나의 죄과를 도말하소서
위의 배열에서 알 수 있듯이 교차 병행법이란 a-b, b-a 식으로 이러한 형식을 통해 마지막 행을 특별하게 강조하는 형식이라 할 수 있다.
2) 점진적 병행법
'점짐적 병행법'이란 '점진적'이라는 말 그대로 시의 저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주제를 향해 점차 한 발자국씩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시 29:1). 그러나 대다수의 학자들은 이러한 점진적 병행법의 독자적인 영역을 인정하기보다는 종합적 병행법의 한 분야로 보고 있다.
Ⅳ. 히브리 시에 있어서의 운율(Metre)
고대 히브리 전승에는 운율에 대한 시사가 없었고 탈무드 역시 히브리 시의 운율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요세푸스'(Josephus)는 모세의 노래(참조, 출 15:1; 32:1)가 여섯 운율로 되었다고 했고, '빅켈'(Bickell)은 히브리 시각이 두 개의 음절로 되어 장단 혹은 단장으로 되어 있다고 했으며, '레이'(Ley)는 강음의 절수로 계산 히브리 시를 5음률의 3:2(3음절은 강음절 2음절은 약음절)가 특징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시버스'(Sievers)는 강음 절만 계산되는 것이 아니라 두 약음절도 한 강음절과 동등하게 취급되었다고 생각하여 2:2, 3:3, 4:4, 4:3/3:4, 3:2/2:3 등의 여러 가지 운율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비록 그들의 주장처럼 히브리 시문에 3:2의 운율이 가장 많이 나타나기는 하나 다양한 병화가 내재되어 있고 드러나 운율이 히브리 시문 안에 있는 본문에서 추출한 것이 아니라 마소렛 본문의 발성과 병행구문을 감안하여 추출한 운율이므로 정확한 운율로 인정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히브리 시의 운율에 대한 정확한 견해는 여러 가지 운율이 추출되고 실제로 그것들이 성경 본문과 일치하기도 하나 정확한 운율은 규정지을 수 없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한편 그러한 가정 하에서 히브리 시의 운율로 추정되는 세 가지 유형의 운율을 나열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① 애도가-3:2(참조, 시 27:1), 또는 2:3(참조, 시 42:4; 79:13). ② 여섯 운율-3:3(참조, 렘 12:2) 혹은 2:2:2(참조, 시 59:6), ③ 일곱 운율 -4:3 혹은 2:2:3(참조, 렘 4:23).
Ⅴ. 히브리 시에 있어서의 세속시와 종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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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시의 양식은 대체로 '거룩한 것'이었다. 이를테면 그 시들은 종교적인 축제와 관련된 것들이었으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다루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 시들에는 가끔 공식적인 종교적 예배와는 무관하게 저작된 시들이 있었는데 그것은 '전쟁'(참조, 수 10:12, 13; 삿 5장), '피의 복수'(참조, 창 4:23, 24), 적에 대한 모욕, 즉 '조롱가'(참조, 민 21:27-30), '노동'(참조, 민 21:17, 18), '결혼'(참조, 창 24:60) 그리고, '죽음'(참조, 삼하 1:17-27) 등과 깊은 관계를 지닌 시들이다. 이러한 노래들은 대부분 성전 예배에서는 반복되지 않았으며, 대개 여호와라는 이름도 내포하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시 전체를 종교적인 시에서 제외시킬 수는 없다. 왜냐하면 종교적인 시와 세속적인 시가 서로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데, 이것은 세속적인 시로 분류된 그러한 시들이 저작되었던 배경이 바로 종교적인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또한 예언시가 세속적인 기원의 양식을 빌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의 대표적인 예가 '추수하는 노래'(참조, 사 5:1-7), '경멸의 노래'(참조, 사 14:1-27;47장), '장송곡'(참조, 렘 9:17-22; 암 5:2), '승전가'(참조, 사 63:1-6; 나훔서), 그리고 '송사'(참조, 사 45:20, 21; 미 1:1-7) 등이다. 그러므로 비록 세속적인 시처럼 보일지라도 그러한 이유 때문에 성경에 기록된 시를 제외하거나 세속적인 것으로 경멸해서는 안 되며, 그들 모두를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이요 종교적인 시로 취급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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